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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존칭접미사의 생성 발달에 대하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7.
도수희/충남대학교 명예교수
1

현 대 국어에서 활용하고 있는 존칭 접미사는 거의 '님'에 국한되는 듯하다. 물론 상감, 대감, 영감의 '감'이 있지만 이것들은 호칭 대상의 사회적 인식변화로 인하여 점점 사어화하여 가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쓰이고 있을 뿐이다. 다만 씨족, 성씨의 '씨'가 성이나 이름에 접미하여 존대의 뜻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으나 이런 경우는 오로지 남자의 성명에 접미하여 어른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 밖의 존칭 접미사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후기 중세국어의 시기에는 오늘날과는 달리 '놈'이 평칭 접미사이었고, 고대 국어 시기에는 여러 종류의 존칭 접미사가 활용되었다. 예를 들면 '한/간/감/금, 지>치, 바/보/부, 돌이, 쇠' 등이 보편적으로 쓰였다. 어원적으로 볼 때 위의 존칭 접미사들은 그 뿌리가 아주 깊숙한 역사 속에 박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은 위에서 열거한 존칭 접미사들이 언제 생성하여 어떻게 발달하였나를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위의 존칭 접미사들이 후대로 내려 오면서 점점 비칭화(卑稱化)하였다. 비록 현재는 존칭의 의미가 없지만 옛날에는 모두가 존칭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존칭 접미사들이 처음부터 존칭 의미로 생성된 것인가 아니면 비존칭 의미의 접미사로부터 전의된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다시 말하자면 어원적으로 보통명사이었거나 아니면 비존칭 접미사이었던 것들이 고대의 어느 시기에 존칭 접미사화하여 쓰이다가 다시 비칭화(卑稱化)의 과정을 경험한 것이 아닌지의 해답을 찾고자 한다. 아울러 모든 존칭 접미사들의 어형(형태)의 변화 여부에 대하여서도 논의하려 한다.


2

국 어 존칭 접미사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지'이다. 이것은 삼한어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신+지(臣智), 견+지(遣支), 진+지(秦支), 건길+지(鞬吉支), 한+지(旱支)(마한어)의 '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지’는 보다 이른 시기의 고조선어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면 긔+(箕子), 긔+준(箕準)의 '/주'가 그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 고대국어 (필자는 삼한시대를 전기로 이캡?후기로 구분하여 쓰고 있다) 시기에는 박알+지(朴閼智), 김알+지(金閼智), 세리+지(世里智), 거칠부+지(居柒夫智), 길+사/(吉士/次), 명길+지(名吉支), 분지길+지(分知吉支), 법지길+지(法知吉支)(신라어) ; 막리+지(莫離支), 어지+지(於只支)(고구려어) ; 건길+지(鞬吉支), 개+(皆次)(백제어) ; 좌+지(坐知), 질+지(知), 겸+지(鉗知), 탈+지(脫知), 이달아+지(伊珍阿鼓), 내달주+지(內珍朱智), 도설+지(道設智), 아+지(阿志), 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가라어) 등과 같이 고대 4국어에 보편적으로 쓰였다. 그 쓰임새를 보다 세심히 살펴보면 우선 고구려어와 백제어에서는 소극적으로 쓰였고 신라어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쓰였음을 그 나타난 예의 사용 빈도수와 범위로 보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의 의미 기능도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어, 백제어, 가라어에서는 주로 왕명이나 왕칭호 및 최고 관직명에 접미하였는데 신라어에서는 귀족의 이름에 접미하거나 하위 관직명에 이르기까지 접미하는 일반성을 보인다. 위에 열거한 예들 중에서 '막리지'는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최고 관직이며 '어지지'는 고구려의 고국양왕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길지와 '개'는 백제의 왕칭어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어와 가라어의 비교에서는 박알지거서한(朴閼智居西干), 세리지이사금(世里智尼師今)과 같이 왕명과 왕칭호 사이에 끼어 왕명에 접미한 사실이 확인된다. 다만 가라어의 '아지'만은 왕비를 이름이니 혹시 오늘날의 '아씨/아기씨'의 원초형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여기서 잠시 우리말과 계통이 같을 것으로 추정하는 알타이어에서 찾아보면 ryn+chi(공격을 받아 고통을 당하는 동안에 미래를 예언하는 이>, telgo+chi<억측하는 이), yarin+chi(어깨뼈를 지져서 점치는 이), koll+kure+chi(손으로 점치는 이) 등과 같이 chi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처럼 본래에는 '사람'[人]이란 의미의 형태소로 우리말도 출발하였던 것인데 후대에 존칭 접미사로 변하였을 것이다. '사람'이란 기본 의미는 지니고 있으면서 존칭의 뜻이 가미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후대로 내려 오면서 유기음화가 일어나 어형마저 '치'로 변하였다.
   그러나 이 존칭 접미사 '지'는 어느 시기부터인가 서서히 비칭(卑稱)으로 격하되기 시작하였다. 현대 국어에서 사용 예를 들면 '거러지/거지, 이치 그치, 저치, 양아치' 등과 같은 것들이다. 드디어 이 '지>치'는 이제 존칭이든 비존칭이든 인칭 접미사의 제약마저 벗어나 '얼마치, 십원어치, 내일치, 속엣치, 골치' 등과 같이 비인칭에까지 접미 기능이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사람이란 기본 의미가 상실되기도 하였다.


3

존 칭 접미사인 '한'도 '지' 못지 않게 오래 묵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역사서인 [상서전]에 나오는 '한'(馯)이 기록으로는 최초의 것이다. 이 '한'(馯)은 보다 후대의 [후한서]에 3한(三韓)의 '한'(韓)으로 나타난다. 이 후로 이것은 '한/금/검/감/찬'(干, 翰, 汗, 漢, 邯, 儉, 今, 錦, 軍, 湌, 粲)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었다. 그러면 이 '한'의 뜻은 무엇이며, 그 뿌리는 어디에 박혀 있는 것이며, 어떻게 발달하여 왔는가를 밝혀 보려 한다.
   '한'의 뿌리는 아주 깊이 박혀 있는 듯하다. 위에서 소개한 표기 자료로 보아도 그렇고 이른바 친족어일 것으로 지목하고 있는 만주어와 몽고어에서도 동일어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즉 sino+hun(신인), obu+kon(노인), omo+kon(노여인), ir+kon(인민) 등의 어휘에서 hun/kon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공통조어에서 분기된 사실을 알려 주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그 의미가 '지'와 마찬가지로 '사람'[人]이다. 따라서 초기에는 존칭 접미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이었거나, 비존칭 접미사이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대 국어에서 존칭 접미사로 나타나는 최초의 기록은 '박혁거세거서한'이다. {삼국유사}는 이 옛 낱말이 진한말이라 하였다. 따라서 진한말도 '한'을 존칭 접미사로 썼음이 확실하다. 진한어로부터 물려 받아 신라는 더욱 활발하게 사용하였다. 우선 왕칭어로 '거서한/거슬함'(居西干/居瑟邯), '니사금/니질금'(尼師今/尼叱今), '마리한/매금'(麻立干/寐錦)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는 최고 관직인 '셔발한/셔블함'(舒發翰/舒弗邯)을 들 수 있다. 가라어도 고관의 직함으로 아도한(我刀干), 여도한(女刀干), 피도한(彼刀干) 등과 같이 9도한(九刀干)의 벼슬이름에 '한'을 썼다. 고구려어는 고추가(古鄒加), 대가(大加), 상가(相加), 마가(馬加) 등처럼 n말음이 없는 '가'가 사용되었다. 백제어도 어라하(於羅瑕)와 같이 n말음이 없는 '하'를 썼다. 역시 몽고어와 만주어도 기선한(寄善汗), 살리한(薩里罕), 태양한(太陽罕) 등과 같이 '한'이 '왕/군주'의 뜻으로 바뀌어 쓰이고 있다. 몽고의 대왕이었던 성길사한(成吉思汗)의 이름에서도 '한'이 확인된다. 이처럼 친족관계가 있는 언어들의 쓰임새도 우리의 옛말과 동일하다.
   위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초기에는 '한'이 사람이란 뜻으로 쓰였다. 어느 시기에 극존칭 접미사로 의미변화가 일어나 한동안 그렇게 쓰이다가 그 사용 범위가 확대되어 후대로 내려오면서 존칭의 격이 떨어져 모든 벼슬이름에도 보편적으로 접미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예를 들면 신라의 관직명인 해한/바달한(海干/波珍干), 아척한(阿尺干), 사한(沙干), 급벌한(及伐干), 대아한(大阿干) 등에 접미된 '한'의 존칭 의미는 상당히 격하되어 있다. 이 '한'은 신라어에서 바달찬(波珍湌), 대아찬/아찬(大阿湌/阿湌) 등과 같이 변형인 '찬'으로도 쓰였다. 이렇게 보편적인 존칭 개념으로 일반화된 '한'은 신라의 망함과 함께 모든 관직명마저 사어가 되었기 때문에 존칭 접미사의 기능도 소멸된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을 기본 의미로 하는 '한'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로지 그것이 비칭화의 내리막 과정을 경험하였을 뿐이다. 다만 대감, 영감의 '감'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이것들 역시 존칭 대상에 대한 인식 변화로 약화의 과정을 밟고 있다. 이 밖의 '한'의 쓰임새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원두한(園頭干), 어부한(漁夫干), 두부한(豆腐干), 곳한(處干)' 등과 같이 비칭으로 격하되었다. 또한 '나무군, 일군 소리군, 각자군(刻字軍), 도배군' 등과 같이 비하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악한, 무례한, 치한, 파렴치한, 괴한' 등과 같이 더욱 낮게 비칭화하였다.


4

고 대 국어에서 활용하던 존칭 접미사 가운데 '보'가 있다. 삼국 초기에 고위 관직명으로 쓰였던 대보(大輔), 좌보(左輔), 우보(右輔)의 '보'가 바로 그것이다. 이 '보'는 고구려, 백제, 신라어에 고루 분포하고 있었다. 이후로 '보'는 부(夫)/복(福,卜)/바(波/巴)로 차자표기되었다. 실례를 들면 명림답부(明臨荅夫)는 고구려 초기의 국상(國相)이었다. 그리고 상부(相夫)는 고구려 봉상왕의 이름에 접미한 '부'이고, 소수림왕의 이름 구부(丘夫)도 '부'를 접미하고 있다. 그리고 6세기 후반의 인물인 온달(溫達)도 '바보'라 하였다. 신라어의 '부'에 대한 활용도는 매우 높았다. 널리 알려져 있는 이사부(異斯夫), 거칠부(居柒夫)를 비롯하여 심맥부(深麥夫), 노부(奴夫), 서력부(西力夫) 등과 같이 그 해당 자료가 비교적 풍부하다. 한편 이 '부'는 거칠부지(居柒夫智), 심맥부지(深麥夫智)와 같이 '지'와 결합하여 '부지'로 쓰이기도 하였다. 다만 선후 관계는 고정적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지부'(智夫)의 예가 전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신라 경덕왕 때의 기파랑(耆婆郞)의 이름이 '길보/기보'라면 여기서도 독특한 표기의 '보'를 발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신라 말기의 인물인 장보고의 본명은 궁바(弓巴)/궁복(弓福)인데 모두가 '활보'를 달리 차자표기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사동(蛇童)/사복(蛇卜/巴/伏)도 '뱀보'란 이름이니 여기서도 '보'가 확인되는 셈이다.    위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초기의 '보/부'는 극존칭의 접미사였다. 그 중의 '보'(輔)는 삼국 초기의 국무총리직에 해당하는 존칭 접미사이고, 상부, 구부는 고구려 초기의 왕명이고, 심맥부는 신라 진흥왕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림답부와 이사부, 거칠부는 국무총리와 대장군의 벼슬을 지낸 사람들의 이름이다. 한편 '이사부:황종, 심맥부:삼맥종, 거칠부:황종'은 '夫 : 宗'과 같이 대응한다. 여기서 우리는 고유어인 '夫'(부)의 의미가 '宗'의 훈임을 확인할 수 있다. '높은, 존귀'의 뜻인 '宗'은 '말, 보/부'의 두 훈을 갖고 있었던 것같다. 그러기에 왕의 시호가 '太宗, 定宗, 世宗, 文宗' 등과 같이 宗 ''를 접미하고 있으며, 宗敎 역시 '가장 높은 가르침'의 뜻이니 이 경우의 훈도 ''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어휘는 '궁보'(弓巴/弓福)과 '사보'(蛇卜/巴/伏)이다. 그런데 '巴·福·卜'은 모두 '童'의 뜻이라고 하였으니 弓福은 '활보'이며 蛇卜은 '뱀보'인 것이다. 만일 고구려 대무신왕(서기 7년∼)의 아들 好童의 '童'이 '보'였다면 고구려어에서도 아주 이른 시기의 '보'를 확인하게 된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고구려 초기에 고위 관직명으로 '보'가 쓰였을 뿐만 아니라 저 유명한 고구려의 온달(溫達)의 별명도 '바보'이다. 물론 '바보'에 대한 표기가 고문헌에 나타나지 않아 불안하지만 고구려어가 '보/부'를 활용한 사실로 미루어 짐작컨대 '바보'도 옛날부터 계속해서 불리어 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신라의 청년인 궁복(弓福)이 중국 당나라에 들어갔을 때 성씨를 물었으나 없다 하니 비로소 지어 준 성씨가 張씨이다. 말하자면 이름 '弓福'에서 '弓'자가 들어 있는 '張'자를 택한 것이고 이름은 '福'자를 중국식 발음으로 적다보니 '保皐'(보고)가 된 것이다. '뱀보'(蛇卜)는 신라 진평왕(서기 617년) 때의 사람인데 열두살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일어나지도 못하여 뱀처럼 기어 다녔는 고로 '뱀보'라 불렀다고 {삼국유사}에 적혀 있다. 고구려의 대무신왕 아들이 얼굴이 예뻐서 '호동'(好童)이라 부른 사실과는 대조적이다. 한편 향가 '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 백제 무왕(서기 600년)의 아명인 '맛동'(薯童)을 또 하나의 좋은 예로 참고할 수 있다. 어쨌든 삼국 초기에는 왕명이나 고위 관직명에 '보'를 접미하여 존칭의 뜻을 나타냈음이 분명하다. 초기에 쓰인 접미사 '부'(夫)가 종(宗)의 뜻으로 사용된 사실이 증언한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 오면서 존칭의 뜻이 점점 희미하여져서 급기야 '동'(童)의 뜻에까지 이른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옛날에는 '보/부'(夫/巴/福)이 '宗·童'의 의미였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근·현대에 와서는 '흥부, 놀부, 떼보, 곰보, 울보, 웃음보, 먹보, 뚱뚱보, 바보' 등처럼 비칭(卑稱)화하였다. 한편 한낱 표기형일 뿐 부르기는 반드시 '보/부'로 하였을 '동'(童)도 결국은 어휘화하여 '길동, 개동, 복동, 업동' 등으로 쓰이게 된 것이라 하겠다. 대부분의 해석자들이 '薯童'을 '맛보'로 해독하지 않고 '맛동' 혹은 '서동'으로 추독하는 것으로 보아 '동'(童)은 어휘화한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무왕을 일명 '말통대왕'(末通大王)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니 여기서 만일 '말통'을 '맛동'의 차자표기로 가정한다면 가능성은 더욱 믿음직스럽게 된다.


5

중세 국어 시기에 '놈'은
펴디 몯 노미 하니라 ([훈민정음 언해])

者 노미라 ([훈민정음 언해])

와 같이 보통 사람이란 뜻으로 쓰이었다. 따라서 존칭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평칭의 뜻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보다 후대로 내려 오면서 "목 버힐 노마"({삼강행실도}), "그 놈들이 므엇하리오",({노걸대언해})와 같이 그 의미역이 '사람'에서 '남자'로 한정(축소)되고 뜻도 卑稱으로 격하되었다.
   그러면, 현대어에서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그 실례를 들어 본다.

[사람] 이놈, 저놈, 그놈, 사람놈, 죽일 놈, 썩은 놈, 나쁜 놈, 좋은 놈, 등 (남자)
[동물] 암놈, 수놈, 살찐 놈, 통통한 놈, 작은 놈, 큰 놈,
[물건] 이놈(것), 저놈(것), 큰 놈(것), 작은 놈(것), 새놈(것), 헌놈(것),

위의 예를 통하여 우리는 '놈'이 평칭에서 卑稱으로 격하하면서 그 지칭범위가 '사람'에서 '남자'로 한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나서 다시 지칭범위가 '동물'과 '물건'에까지 확대되었으니 역시 극비칭으로 전락한 것이라 하겠다.
   다만 그 쓰임새로 보아 '한, 치, 보'와는 달리 '놈'은 처음부터 명사이었다. 옛문헌이 '者  놈이라. 놈쟈(者)'와 같이 풀이한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격조사 '-이, -, -, -' 등을 직접 접미하기 때문에 명사로 대접할 수 있다. 가령 한 문장을 예로 들면

그 놈이 정말 나쁜 놈은 나쁜 놈이야!

와 같이 현대 국어에서도 여전히 명사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놈'만은 '한, 치, 보'와는 달리 하나의 평칭 명사로 구실하여 오다가 비칭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동안 대개가 니사금<尼師今>을 '닛(尼師=繼)+'(今=尊上)의 합성어로 분석하고 그것이 오늘날의 '님금'이 되었다고 풀이하여 왔다. 만일 종래의 주장대로 '닛'(=尼師)을 용납한다면 '尼師今'을 'nisk m'으로 추독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nimk m'(님금)이 과연 'nisk m'을 승계한 변화어형일 수 있느냐는데 있다. 그러려면 우선 'nis>nim'의 변화과정을 음운사적인 면에서 논증할 수 있어야 한다.
   종래의 주장처럼 '尼師今'을 'nis(繼)+k m(尊者)'로 분석하고 그 발달형이 후대의 'nimk m'(主)이라면 '닛>님금'에서 's>m'의 변화과정이 무리없이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점이 좀체로 풀리지 않는 난제이다. 그렇다면 문제 해결의 열쇠를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일본서기] 무열기에 이르기를 백제인들은 왕을 nirimu(主)라 불렀다고 하였다. 이 어휘의 발달 과정을

(ㄱ) nirimu>nirimø>niøim>niim>ni:m(主)
(ㄴ) nirimu>niøimu>niimø>niim>ni:m(主)
(ㄷ) nirimu>niøimø>niim>ni:m(主)

와 같이 가정할 수 있다. 위 (ㄱ)(ㄴ)(ㄷ) 중 어느 과정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어느 시기에 'r', 'u'가 탈락하고 다시 모음축약의 장모음화 보상으로 '님:'(ni:m)이 생성되어 중세국어 이후에 보편적으로 쓰여지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님금'은 '님+금'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님금'의 '님'은 '尼師今'의 '尼師'를 승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제어 'nirimu'를 계승한 변화형이라 하겠다. 이 '님'에 존칭 접미사 '금'(<)(舒弗+邯, 尼師+今, 寢+錦, 麻立+干 등)이 합성되어 '님금'이 생성된 것이라 하겠다.
   한편 '님금'의 구조에서 '님'은 어기가 될 수 있으나 '닛'의 '닛'은 어기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님'과는 대척적일 만큼 다르다. 백제어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nirimu>ni:m'은 명사로 쓰이었다. '나의 님은, 님이시여, 님께서, 님은, 님이로다, 님자 '와 같이 독립어사로 쓰여 왔음도 '닛(尼師=繼*님'을 부정하고 'nirimu(主)>님'을 긍정하는 좋은 증좌라 할 것이다.
   요컨대 '님금'은 尼師今의 변형이 아니라 백제어 'nirimu'(主)의 발달형인 'ni:m'(主)에 존칭 접미사 '금'이 합성하여 생성된 단어일 것으로 추정한다.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당초에는 왕칭어이었던 것인데 후대로 내려 오면서 어형이 '님'(님)으로 추독할 수 있다면 그 시기는 아주 오래 전으로 올라가게 된다.


6

옛 낱말에 존칭 접미사 '도리'(都利)가 쓰였다. 신라 유리왕 때의 인명인 소벌도리(蘇伐都利)에 그것이 접미되어 있다. 고허촌장(高墟村長)을 '소벌도리'라 불렀다고 {삼국유사}에 적혀 있으니 도리는 존칭 접미사임에 틀림없다. 이 '소벌도리'를 일명 '소벌공'(蘇伐公)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니 '도리'의 뜻은 곧 '公'에 해당하는 존칭이다. 또한 신라 지증왕(서기 500년~)의 이름이 '지도로'(智度路/智大路/智哲老)인데 '도로' 역시 '도리'와 동일한 존칭 접미사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좀더 후대로 내려 오면 신라 진지왕의 이름 사륜(舍輪 =金輪)에서 또하나의 '도리'를 만날 수 있다. 위의 '사'(舍)는 '금'(金)과 대응하는데 金의 훈은 고래로 '쇠'이니 '사'와 비슷한 음상으로 미루어 일단 '쇠'로 추독할 수 있다. 그러면 '륜'(輪)은 어떻게 해독할 것인가. '륜'에 대한 현대의 훈은 '바키'이고 중세국어 시기에는 '바회'이었지만 고대국어 시기에는 그 훈이 '돌/도리'(<돌다)이었을 것으로 가정할 경우에 '사륜=금륜'을 '쇠도리'로 해독할 수도 있다. 지증왕(제22대)의 이름이 '지도로'이고 부왕인 진흥왕(제24대)의 이름도 고유어 '심맥부'이다. 그런데 아들대에 와서 한어명으로 돌변하였을리가 만무하다. 더욱이 부왕때의 '이사부, 사다함'과 당대인 '거칠부'의 이름이 모두 고유어인 점을 감안할 때 '사륜=금륜'도 고유어 '쇠도리'이었을 것임을 신뢰케 한다. 그 고유어의 단서를 '사륜'의 '사'에서 잡을 수 있어서 위의 가정을 가능케 한다. 고구려 국원왕의 이름이 '쇠'(釗/斯由)이다. 그리고 고구려 말기의 개소문(蓋蘇文)을 '개금'(蓋金)이라고도 하였으니 '소:금'에서 역시 고유어 '쇠'를 발견한다. 金의 훈이 '쇠'이기 때문이다. 비록 3예밖에 안 되지만 옛날부터 '쇠'가 작명의 소재가 되었던 사실을 알려 주는 희귀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대국어 시기에는 '도리'와 '쇠'가 존칭 접미사이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근세국어 시기에 와서는 비칭화하였다. 가령 '꿈도리, 꾀도리, 쇠돌이, 호돌이, 모돌이, 차돌이, 산돌이, 갑돌이' 등을 현대국어에서 쓰이는 예로 들 수 있다. 그리고 '변강쇠, 가마쇠, 구두쇠, 한쇠, 작은쇠, 덕쇠, 마당쇠, 사랑쇠, 돌쇠'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한편 '돌이'와 '쇠'는 접미어소로만 쓰인 것이 아니라 접두어소로도 쓰였다. 가령 '돌남이, 돌동이, 돌례, 돌복이, 돌맹이, 돌무덕' 등과 '쇠고리, 쇠남이, 쇠동이, 쇠돌이, 쇠바우, 쇠노미'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 조어 기능이 전후 어느 위치에서나 발휘될 수 있음은 단적으로 '쇠돌이:돌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돌이'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서기 1617)에 '니돌대, 돌합, 돌금, 돌개'로 나타난다. 이 '돌이', '쇠'가 접두하거나 접미한 이름에는 성씨가 없다. 이처럼 비천한 신분임을 의미할 정도에 이르기까지 비하하였다.
   이 글은 주로 존칭 접미사의 생성과 그 비칭(卑稱)화에 대한 문제들을 논의하였다. 우리 옛말에서 존칭 접미사 '지'와 '한'은 사람의 뜻인 명사에 존칭 의미가 가미되어 접미사화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님'(nirimu) 도 중세국어 시기까지는 '님금'과 더불어 '왕, 주'(王, 主)의 극존칭 명사로 쓰였다. 그런데 거의 근세국어 이후부터 일반적인 존칭 접미사로 격하하였다. 평칭 명사이었던 '놈'도 후대로 내려 오면서 비칭화하였다. 이밖의 '보/부, 돌이, 쇠'도 비칭 접미사로 전락하였다. 왜 이렇게 일변도로 비칭화만 하였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후일로 미루어 둔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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