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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한국 역사책

조선사연구초: 평양 패수 考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1. 13.

평양패수고 상권[1]

1.    서언

평양은 신지비사(神誌秘詞: 고려사 金謂傳에 보임) 가운데 古 3京의 하나인 百牙岡이요, 조선 문명이 발생한 7대 강의 하나인 浿水가의 서울이라. 그러나 시대를 따라 지명이 遷徙했으므로 만일 지금 패수 대동강을 옛날 패수로 알고, 지금 평야 평안남도 首府를 옛 평양으로 알면 평양의 역사를 그릇 앎일 뿐 아니라 곧 조선의 역사를 그릇 앎이니, 그러므로 조선사를 말하려면 평양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丸都가 어디냐. 卒本 이 어디냐. 安市城이 어디냐. 迦瑟那가 어디냐. 백제의 6方이 어디냐. 발해의 5京이 어디냐. 이 모든 지리가 조선사상 누백년래 未決訟案이다. 그러나 그 가장 중요 도 유명한 송안은 평양의 위치가 어디냐의 문제이다. 왜 그러냐 하면, 평양 위치의 문제만 결정되면 다른 지리의 해득은 용이한 까닭이다. 평양의 위치가 시대를 따라 다르니 첫번째는 삼조선 시대의 평양이요, 두번째는 삼국, 동북국 양 시대의 평양이요, 세번째는 고려 이후의 평양이다.

고려 이후의 평양은 지금 평양이니 이는 오직 그 수백년래 定都 可否의 계통적 쟁론이 대강 변론할 거리가 되는 이외에 그 위치에 대하여는 문제가 없거니와, 삼조선의 평양인 고 평양은 비상한 노력을 들이지 아니하면 도저히 그 위치를 알 수 없으므로 가장 어려운 문제요, 삼국 동북국의 평양은 혹 고평양을 가리킨 평양이라 한 기록도 있고, 혹 지금 평양을 가리켜 평양이라 한 기록도 있는 평양이므로 다음 어려운 문제이다.

본편은 곧 고조선의 평양인 고 평양의 위치를 변증하려 하는 바, 근세 우리 조선의 先儒들이나 최근 일본 학자들이 경기 황해 평안 3도와 요동반도의 명산대천을 골마다 더듬어 고 평양의 위치를 찾음에 비상히 노력하였지만 그노력의 보수가 없고 평양이 어디라는 답안이 바로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 찾는 방법이 착오된 까닭이다.

저자가 才力의 천박함을 불구하고 착오을 정정하여 누백년래 잃어버린 평양을 제자리로 돌리려 하여 본변을 초한다. 대개 그들의 착오가 어디에 있는가

2.    1의 착오

1의 착오는 평양 패수의 音義를 해독하지 못하이다. 사책에 보면 平壤, 平穰, 平那, 卞那, 百牙, 樂浪, 樂良, 浿水, 浿江, 浿河 등은 다만 “펴라”를 가종의 假音으로 쓴 자니, 平壤, 平穰, 平那, 卞那, 百牙는 다 그 음의 초성을 讀하여 “펴라”가 되고, 樂浪, 樂良은 樂의 뜻 “풍류[2]”의 초성을 讀하며, 浪과 良은 그 음 “랑”의 초성 중성을 독하여 “펴라”가 되고, 浿水, 浿江, 浿河는 浿의 음 “패”의 초성을 독하며 水 江 河의 뜻 “라”의 全聲을 讀하여 “폐라”가 된 것이니, 이상 云云은 졸저 이두문 해석에 설명한지라. 여기에서는 상술하지 않거니와 “펴라”는 본래 강의 이름으로 그 江上에 건설한 도성도 “펴라”라 명한자니, 卒本河 上에 卒本國이 있고, 泗沘江 상에 사비국이 있는 유니, 平壤, 平穰, 平那, 卞那, 百牙, 樂浪, 浿水 등이 비록 그 문자는 各異하나 그 “펴라”의 假音됨은 동일하며, 비록 그 펴라의 가음됨은 동일하나 다만 패수 패하 등은 ‘강’의 펴라를 가리키는 문자됨에 반하여 平壤, 平穰, 平那, 卞那, 百牙, 樂浪 등은 ‘城’의 펴라를 가리키는 문자됨이 다르며, 城의 펴라와 江의 펴라가 비록 一水一陸의 구별은 각이하나 양 펴라의 거리가 마치 눈과 눈썹같이 밀접한 자어늘 후세이 이두문을 모르는 학자들이 이를 한자의 음으로 직독하여 平壤은 평양, 平那는 평나, 百牙는 백아, 樂浪은 낙랑 혹 락랑, 浿水는 패수가 되어 수륙 양 펴라의 밀접한 관계가 알 수 없이 된지라, 이에 다만 조선의 古記나 중국의 사기, 한서 등의 王儉城平壤이 패수의 東에 있다는 추상적 문자에 의하여 패수와 평양의 위치를 찾을 새, 혹은 요하를 패수로 잡는 동시에 鳳凰城을 평양이라 하며, 혹 압록강을 패수로 잡는 동시에 지금 평양을 평양이라 하며, 혹 대동강을 패수로 잡는 동시에 한양을 평양이라 하며, 또 혹 평양이란 配匹이 없는 禮成江, 碧瀾渡 등의 홀아비의 패수도 생기며, 혹 패수란 동무가 없는 춘천, 成川의 외아들의 평양도 생기어 삼국사기 삼국유사 여지승람 열하일기 동사강목 해동역사 아방강역고 등의 이에 대한 쟁론이 분운하였지만, 기실은 모두 맹인이 활을 쏨과 깉아 과녁을 맞추지 못하였다.그러므로 평양과 패수를 찾으려면 제1에 그 音義를 해독하여 패수를 떠나서 평양이 없고 평양을 떠나서 패수가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3.    2의 착오

2의 착오는 평양과 패수의 고전에 관한 사책의 본문을 善解하지 못함이다. 이를태면 위략에 “朝鮮…後 子孫 稍 驕虐, 燕 乃 遣 將 秦開, 攻 其 西方 取地二千餘里, 至 滿番汗 爲 界, 朝鮮遂弱. … 及漢 以盧綰 爲 燕王, 朝鮮 與 燕 界於 – 해동역사에 浿로 개정 – 水”라 하고[3], 사기 조선열전에 “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屬遼東外徼. 漢興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 滿 … 魋結蠻夷服 以東走出塞 渡浿水… 都王儉”이라 하고[4] 사기 흉노전에 “燕 有 賢將 秦開, 爲 質於 胡, 胡人 甚 信 之, 歸 而 襲破 走 東胡, 東胡 卻 千餘里 … 燕 亦 築 長城, 自 遼陽[5] 至 襄平, 置上谷 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6]” 이라 한 바, 우의 세개의 책은 다 동일한 사실의 기록이다.

先儒들이 혹 위략을 據하여 흉노전의 1천여리를 2천여리의 誤라고 하고, 이에 의하여 패수를 대동강이라 하여 滿潘汗을 대동강 이남에서 구하며, 혹 흉노전을 거하여 위략의 2천여리를 1천여리의 誤라 하고, 이에 의하여 패수를 압록강이라 하여 만반한을 압록강 이남에 구하였다. 그러나 愚見으로 말하건대 위략의 2천여리나, 흉노전의 1천여리가 그 何地부터 起算함인지를 묻지 않고 종점의 만반한이 하지임을 구함은 비상한 착오라 하노라. 흉노전으로 보면 진개가 彼 소위 동호—조선을 卻(각)하고 遼陽(요양)으로부터 양평까지 장성을 築(축)하고 상곡(上谷: 지금 大同府), 어양(漁陽: 지금 북경 북 60여리의 廢縣), 우북평(右北平: 지금의 永平部), 요서(遼西: 지금의 盧龍縣), 요동(遼東: 지금의 遼陽)까지의 연장 2천여리의 지방이 곧 조선의 소유를 진개가 약취함이니, 2천여리는 곧 상곡부터 기산하여 요양가지 至한 자요, 만반한은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의 汶縣(문현)과 潘汗縣(반한현)의 양 현이니, 문반한의 연혁이 비록 傳(전)치 아니하였으나 위략에는 만반한이라고 하고, 흉노전에는 양평이라 한바, 양평은 漢(한) 遼東郡(요동군)의 군치(郡治: 지금 遼陽)인즉 문반한은 곧 遼陽 부근의 땅이며, 燕은 조선과 만반한으로 정계하였다가 漢은 退하여 패수를 守하였은즉, 패수는 곧 요양 以西의 물이며 同 地理誌에 沛水가 潘汗縣의 塞外에서 出한다 한 바 지금 海城 (헌우락)의 고명이 패수인즉 南藥泉의 설을 從하여 沛水를 곧 浿水로 잡는 동시에 만반한을 곧 해성 동북, 요양 서남으로 잡음이 가하며, 險瀆縣(험독현) 註에 험독은 조선왕 滿의 都, 즉 王儉城이라 하였은즉, 왕검성(平壤)인 험독은 금 海城이 됨이 명백하거늘 이제 2천여리의 기점을 찾지 않고 종점을 찾으며 만반한의 연혁을 묻지 않고 그 위치를 억정하여 패수와 평양의 관계적 지방을 버리고 패수와 평양—왕검성의 연혁을 억설하려 하니 어찌 실제에 합하랴.

4.    3의 착오

3의 착오는 위조의 문자를 考核하지 못함이라. 이를테면,

1)      歷來 학자들이 한서 帝紀 武帝 元封 3年 眞番, 臨屯에 대한 註에서 “臣瓚曰, 茂陵書, 臨屯郡 治 東, 去 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十五縣.  眞番郡 治 霅縣, 去 長安 七千六百四十里十五縣”[7] 를 거하여 진번 임둔의 위치를 담색하는 유일한 재료를 삼았으나, 그러나 그 소위 茂陵書(무릉서) 司馬相如(사마상여)가 지었다는 책이 과연 可信(가신)할 책이냐. 사기나 한서에 사마상여가 무릉서를 지었다는 기록이 없을 뿐 더러 한서 사마상여전에 거하면 상여의 죽은 뒤 5년만에 무제가 后土(후토)에 始祠(시사)하다 하고, 사기 封禪書나 한서 郊祀志에 거하면 무제가 元狩(원수) 2년[8]에 비로서 后土祠를 세웠으니, 그러면 사마상여의 죽은 해는 원수 2년의 5년전인 원삭 3년[9]이요, 진번, 임둔 양군의 설치는 원삭 3년에서 18년 후인 원봉 3년[10]이니, 원봉 3년 진번, 임둔의 설치의 際에 벌써 죽은지 18년이 넘은 사마상여가 무릉서를 지어 양군의 명칭 위치 및 그 속현의 수를 말하였다 하면 이는 비사학적인 요괴담이 될 뿐이니 한서 註 “臣瓚曰 茂陵書”의 위조임이 또한 명백하지 아니하냐.

2)      선유들이 한서 지리지 樂浪郡(낙랑군)의 소속인 조선(朝鮮), 염한(), 패수(浿水), 함자(含資), 점선(黏蟬), 수성(遂成), 증지(增地), 대방(帶方), 사망(駟望), 해명(海), 렬구(列口), 장잠(長岑), 둔유(屯有), 소명(昭明), 루방(鏤方), 제해(提奚), 혼미(渾彌), 탄렬(), 동이(東), 부이(不而), 잠대(蠶臺), 화려(華麗), 사두매(邪頭昧), 전막(前莫), 부조(夫租)등 25현과 그 註의 “浿水西至地入海” “帶水西至帶方入海” “列水所出西至黏蟬入海” 등의 말에 거하여 浿帶列 3수를 곧 지금 대동 임진 한강 3수로 잡고, 3수의 출입에 의하여 각 현의 소재지를 핵득하려 하였으나, 그러나 此設이 전술한 “상곡부터 2천여리의 종점인 만반한이 요양 등지가 되고, 요양의 서남인 해성현의 헌우락이 패수가 된다.”한 위략 흉노전 조선전 등과 맞지 아니하니, 한서 지리지의 일부분인 낙랑군의 본문과 本註 모두가 위조임이 명백하니 중국 사책은 거의 그 독특한 병적 심리인 자존성이 있는 춘추필법의 繼痛者의 저작인 고로, 비록 저작자의 본서가 그대로 존재할지라도 彼를 상대로 한 전쟁이나 피의 관계된 강토의 문제 같은 것은 피의 기록을 맹신함이 불가하거든, 하물며 위조한 무릉서나 낙랑군 지리지에 의거하여 상고 국경의 문제의 쟁점되는 패수와 평양의 위치를 구할 수 있으랴.

5.    4의 착오

4의 착오는 古史를 讀할때에 전후의 文例를 모르고 字句의 文義를 臆解하여 위증한 기록의 발견할 기회를 없게 함이다. 이를테면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險瀆)의 주에 “應劭曰 朝鮮王 滿 都也 依水 險 故曰 險瀆. 臣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是也[11]”의 此는 요동군 험독의 대명사니, 본주의 대의를 상해하면 곧 응소가 요동군의 험독을 조선왕 만의 故都 왕검성이라 주장하매,, 신찬이 이를 반대하여 가로되 왕검성 조선왕 만의 고도는 요동군에 있지 않고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는 자니, 此 요동군의 험독은 彼 왕검성과 관계 없이 따로 있는 험독이라 하여 응소와 신찬 양씨의 설이 서로 반대의 견지에 있으므로 사고가 응소의 설을 棄(기)하고 신찬의 설을 취하여 “瓚是也”의 단안을 내림이니, 그 문의가 십분 명백할 뿐더러, 또 지리지의 각군 각현 註에 거하여 볼지라도, 가령 金城의 주에 應設에는 “성을 築하다가 금을 得한 고로 금성이라 명하였다”하고, 瓚設에는 “금의 견고의 뜻을 취하여 금성이라 명하였다.” 하여 응설과 신찬의 금성에 대한 해석이 서로 반대되매 사고가 瓚是也의 단안을 내리며, 靈丘의 주에 “應設에는 趙 武寧王의 葬地인 고로 영구라 하였다”하고 瓚設에는 무령왕 이전부터 靈丘의 명이 있었다 하여 응설과 신찬의 영구에 대한 양설의 해석이 서로 반대되매 사고가 “찬설시야”의 단안을 내리며, 기타 臨晉, 栒邑, 晉陽, 浦反, 脩武, 梁, 尉氏 등 수십 현의 주가 다 이와 같이 응소 신찬 양설이 반대되는 경우라야 “응설시야”라 하거나 “찬설시야”라 하는 양설의 하나를 취하는 단안을 내렸거니와, 만일 응설과 찬설이 독립으로 是하거나 찬설이 응설을 화동하여 是하면, 비록 단안이 없을지라도 그 시가 自現하므로 煩文(번문)을 피하여 그런 경우에는 응설시야 혹 찬설시야란 어구가 없음이니, 이는 지리지를 일람하면 소연히 각득할 문례인즉, 전술한 바 요동군 험독의 註도 신찬이 본 험독을 왕검성이라 주장하는 응소를 반대하여 왕검성은 낙랑군의 속현이요 此 요동군 험독과는 관계없다는 이의를 발하였으므로 사고가 그 이의를 찬성하여 찬설시야라 함이니, 그 전후의 문례에 의하여 그 문의가 더욱 명백하거늘 선유들이 지리지의 문례를 잘 알지 못하고 또 험독 註의 문의를 잘못 풀어 比自是險瀆의 比를 왕검성의 대명사로 보며, 찬설을 응설의 찬성설로 알아 그 全文을 응소가 가로되 “험독은 조선왕 만의 고도 왕검성이라”하매 신찬은 이를 찬성하여 가로되 왕검성 곧 조선왕 만의 고도가 낙랑군 패수의 동에 재하니 차 왕검성은 곧 요동군의 험독이라” 하고 사고는 또 신찬의 찬성설을 찬성하여 가로되 “찬설이 시야라”한 줄로 해석하였으니, 이러한 해석은 전후의 문례에 불합할 뿐더러, 또는 험독현이 요동군의 속현인 동시에 낙랑군의 속현도 되며, 요동군이 곧 낙랑군인 동시에 낙랑군이 곧 요동군이라는 瘋人의 해석이 되니, 이는 상하의 문의만 모순이 될 뿐 아니라 곧 同樣(동양), 同名, 同位置 성읍이 一地에 쌍립하고 동시 동지 동사실의 역사가 일선에 병행하여 필경 세인이 模捉(모착)할 수 없는 非地理의 지리, 비역사의 역사가 됨이 아니냐. 諸先生의 精博한 학식으로 이 같은 대 착오가 있음은 참으로 喫驚(끽경)할 일이며, 더구나 신찬의 본의는 왕검성인 평양을 요동군 以東의 낙랑군 평안도에 있다고 주장하는 제선생의 의견과 틀림이 없거늘 제선생들은 전술과 같이 신찬의 절을 오해하였으므로 이를 自家의 평안도 평양설을 반대하는 요동평양설로 본지라. 그리하여 동사문답, 아방강역고, 해동역사 지리고 등 각서에 모두 평안도 평양을 주장하는 동시에 신찬의 설이 忘爲之라 하였으니 어찌 천하의 笑話가 아니냐.

이상 네개(위의 2, 3, 4, 5를 가리킴)의 착오를 발견하는 동시에 모든 서적의 위증이 다 파괴되고 모든 학자의 誤考, 誤證이 다 歸正되어, 평안도의 대동강과 今 평양을 古 평양 古 패수로 잡던 망성들은 자연 그 근거를 잃고 奉天省의 海城縣과 이 고 평양, 고패수인 확증을 얻어 이에 조선문명의 발원지인 古 3경의 하나인 평양과 7대 강의 하나인 패수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평양과 패수가 이같이 조선문명사상의 중요한 지방으로써 천여 년 동안 그 고유의 위치를 잃고 천여리나 이사하여 평안도의 소 지방으로 出系하게 됨은 위증한 서적의 作孼(작얼)이라 하겠지만, 그러나 이 같은 위증이 행세되어 제2패수, 제2평양인 대동강 평양이 제1패수, 제1평양인 헌우락 평양의 위치 역사 기타 모든 것을 빼앗게 됨은 何故이냐.

1)      조선민족의 대외적 실패로 말미암음이니, 신라 발해 동북 양국이 서로 대치하다가 북국은 거란과 여진에게 유종이 전멸되고 토지도 전실하여 북국 해북 등 명사는 겨우 삼국古人의 끼친 殘爛한 서자로 남아있을 뿐이며, 이제 제2의 평양 패수가 평양 패수가 되고, 제1의 평양 패수는 깊이 이역에 침몰하여 평양 패수란 이름도 보전치 못함이라.

2)      조선 문헌의 결망함에 말미암음이니, 그와 같이 조선민족의 대외세력이 미약하매 일체 고대의 문화나 무력을 자랑할 만한 고적과 문헌은 모두 매장 혹 燒棄(소기)되고, 오직 노예적 비열과 處士的 담백으로 민족적 苟活을 도모할새 경덕왕은 북방 주군을 남방으로 이설하고, 김부식은 외교적 納媚(납미)의 문자로 지운 삼국사기를 간행하더니 및 몽고황제가 사책을 가져다가 竄削塗改(찬삭도개)를 妄加하니, 이제 지리 연혁이 가장 그 참변을 만나는 동시에 평양 패수의 실록이 모두 멸절하고 오직 그 명칭만 존재한 것이다. 그리되매 중국사의 위증한 문자가 일세에 횡행하나 歷來의 학자들이 혹은 忌諱(기휘)로 인하여 그 위증을 위증이라 하지 못하며, 혹은 習聞으로 인하여 그 위증을 위증인 줄 모르므로 海城 平壤, 패수는 겨우 尋常野史家의 耳語로 남아있을 뿐이요, 평안도 패수 평양만 행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사가가 이같이 위증의 문자를 조작함은 어느 때에 어떤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한 짓이냐. 전설에 거하면 唐人이 조선의 강성과 문명을 시기하여 당 태종이 일체 중국사에 보인 조선에 관한 기사를 개찬하고 이정과 소정방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는 그 서적을 몰수 소화하였다 하니, 이 말이 비록 어느 기록에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대개 可信할 말인가 하노라.

그러면 당 태종이 손댄 서적이 무엇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개 漢書, 晉書가 가장 심할지니, 顔師古가 당 태종의 총신으로 瀛州의 學士列에 참여하여 깊은 帷幄(유악)에서 태종 東侵의 모의를 협조하는 동시에 漢書 校正의 任을 대하였은즉, 그 교정의 際에 한 무제 4군의 범위를 확정하여 위치를 이동하여 조선의 故疆을 거의 중국의 소유로 위증하여 이로써 군신 상하의 적개심을 고무하는 자료를 만들려 한지라. 그리하여 지넌 임둔의 취치를 주할 때에 무릉서란 서명과 기사를 위조하여 지리지를 교열할 대에 낙랑군의 부분을 위조하여 요동군 험독 주에 신찬의 말을 위조 첨입하고 게다가 찬설시야의 例語를 삽기하니 이에 조선의 지리가 아주 문란하였다.

그뿐아니라 南齊書 百濟傳의 二葉殘缺(이엽잔결)이 혹 백제 盛時의 “北據遼薊齊魯南侵吳越[12]”하던 해외 발전의 실록을 당 태종이 削去함이 아니냐. 수서에 적은 동양 고사상 미증유의 대전쟁의 기록이 그같이 모호함도 혹 당 태종의 도말 혹 개찬이 아니냐. 중국 사책이 당 태종 이전의 것이라고 어찌 중국인의 습성된 자존적 심리로 저작한 것이 없으랴만, 다만 당 태종과 안사고의 손댄 서적같이 심하지 아니할 지니라.

일본학자 관야정의 노력에 의하여 성취한 朝鮮古蹟圖譜의 그 도설에 龍岡에서 발굴한 黏蟬碑文을 기재하고 “역래 학자의 쟁송되던 열수는 곧 대동강됨이 가하다” 하였으나, 이는 곧 한서 지리지의 “列水西至黏蟬入海”와 점제비문이 용강에서 발견됨에 의하여 한 말이라. 그러나 만일 한서 지리지의 낙랑군 부분의 위증임을 알았으면 이런 착오가 없었을 것이다.

 

평양패수고 하권[13]

고 평양 패수가 해성 헌우락임은 상에 전술한 바와 같거니와, 금 평양이 평양되고 금 대동강이 패수됨은 하시부터냐. 이에 대하여 양설이 있으니, (갑) 조선 고대에 2개 혹 2개 이상의 지명을 짓고는 그 위에 형용명사를 관하여 구별한 것이 많으니 兩句麗, 三韓, 六伽倻 등이 다 그 류니, 평양 패수도 이와 같이 해성 헌우락을 펴라라 명하는 동시에 평양 대동강도 펴라라 명하고 그 위에 남북 양자를 가하여 구별하였다 함이 하나의 설이요, (을) 우리 선민이 무슨 사항을 인하여 국토나 인민을 갑지에서 을지로 옮기는 경우에는 매양 그 지명까지 옮기었으니, 해부루가 동천하매 동북 양 부여가 생기고, 부여 온조가 南徙하매 하북 하남 양 위례가 생긴 등이 다 그 류니, 평양 패수도 이와 같이 위만과 한무의 난에 해성 헌우락의 펴라에서 대동강상으로 천거한 인민들이 그 신거지를 또한 펴라라 명하여 이에 남북 양개의 펴라가 생기었다 함이 또한 하나의 설이라.

양설중 하설이 是한지는 殘缺한 문헌이 그 판결 재료를 주지 않거니와, 그러나 중고 평양 패수인 삼국시대의펴라는 고 평양 패수와 같이 해성 헌우락을 가리킨 것도 있고 근세 평양 패수 같이 금 평양 대동강을 가리킨 것도 있으니만일 其一을 고집하고 他一을 부인하거나 혹 양자 다 互換하면 곧 지리와 연혁이 불명하여 역사의 사실이 착란할지라. 이제 삼국사기를 주요한 증거서류로 삼고 타서도 보조하여 중고의 펴라를 찾으려 한다.

. 樂浪國과 樂浪郡의 구별

왕검성 펴라인 고 평양 패수가 한무의 침구를 입어 4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되었으나 4군의 위치가 시세에 따라 遷徙無常하므로 낙랑군 수부의 위치는 해성에 고정한 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 범위가 요동 이외에 나오지 못하거늘 후인이 매양 삼국사기에 기재한 낙랑국을 곧 낙랑군으로 오인하여 드디어 남북 양 펴라를 혼동하였다.

“赫居世三十年樂浪人將兵來侵”, “三十八年卞韓樂浪倭人無不畏懷”, “南解元年秋七月樂浪兵至圍金城”, “樂浪謂內虛來攻金城”, “儒理十三年秋八月樂浪犯北邊”, “十四年高句麗王無恤襲樂浪滅之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에 보인 낙랑국의 신라와 관계된 약사요, “大武神王十五年夏四月王子好童遊於沃沮樂浪王崔理 出行因見之”, “遂同歸, 以女妻之”, “好童勸王襲樂浪崔理以鼓角不鳴不備”, “遂殺女子出降”, “二十年王襲樂浪滅之”, “二十七年秋九月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取其地爲郡縣薩水已南屬漢” 등은 고구려본기에 보인 낙랑의 고구려와 관계된 약사요, “溫祚 八年七月築馬首城竪甁山柵 樂浪太守–太守는 王의 誤–使告曰…今逼我疆造立城柵或者其有蠶食之謀乎 十一年夏四月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十三年 王謂臣下曰 國家東–西로 讀함이 可함–有樂浪 十七年春樂浪來侵焚慰禮城 十八年 王欲襲樂浪牛頭山城” 드은 백제본기에 보인 낙랑국의 백제와 관계된 약사라.

선유가 상술한 온조 8년의 낙랑태수란 語를 인하여 3국의 본기에 보인 낙랑 등이 다 漢의 낙랑군을 가리킨 자로 臆定하고, 대무신왕 15년의 낙랑왕은 곧 당시의 조선인이 낙랑태수를 왕으로 오칭함이라고 强解하였으나, 이는 한의 낙랑군이 원래에 요동에 있는 자인 줄을 모른 망설이며, 혹은 대무신왕 27년의 漢光武…伐樂浪取其地爲郡縣의 어로 인하여 낙랑국이 멸망한 뒤에 그 땅이 곧 한의 낙랑군이 된 줄로 아나, 그러나 이는 봉건시대라 조선 전토(만주 동북을 포함)에 수개의 辰國(진국: 대국이란 뜻)이 병립하고, 진국이 하나면 其下에 다수의 소국이 부속하였으니 최씨가 곧 낙랑 진국의 왕으로 기하의 黏蟬, 含資, 帶方 …등 소국을 통솔하였다가 고구려가 최씨를 멸하매 그 각 소국들이 고구려에 子服하여 한의 원병을 청하여 고구려를 막음이니 取其地爲郡縣은 誇大의 辭요, 사실이 아니다. 신라본기 기림 3년에 樂浪帶方兩國歸服의 기사를 보면 낙랑의 진국은 비록 멸망하였으나 그 각 소국은 의연히 존속한 명증이다. 후한서 帝紀에 거하면 漢 光武 建武六年… 初 王調據郡不服, 秋 遣樂浪太守 王遵 擊之, 郡吏殺調, 降遣 … 九月赦樂浪逆殊死已下[14] 라 한바 건무 6년은 대무신왕 13년이니 왕자 호동이 낙랑에 취하던 전 3년이니 낙랑군에 何等의 大事가 있으되 낙랑국이 부지하고, 낙랑국에 하등의 대사가 있으되 낙랑군이 부지하여 당시 양 펴라의 관계가 이같이 격절하였거늘 삼국사기의 오류도 가책하려니와 후세의 독사자들도 또한 소루하다 하겠다.

. 낙랑과 평양의 구별

낙랑과 평양이 다 펴라의 假字이나 그러나 낙랑국이 멸망한 뒤에는 낙랑이라 쓰지 않고 평양이라 써 요동의 낙랑군과 구별한 고로 대무신왕 이후 삼국사기에 쓰인 낙랑 돋 신라본기 기림 3년의 낙랑이 금 평양을 가리킨 것인 이외에는 其餘는 모두 요동의 漢 낙랑군을 가리킨 것이요, 평양은 모두 금 평양을 가리킨 것이니, 이를테면 i) 동천왕 20년의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라 한 낙랑은 요동의 낙랑이요 지금 평양이 아니니, 이때에 魏軍이 丸都를 파하고 동천앙을 追하다가 패퇴함인즉 만일 금 평양의 낙랑이라 하면 이는 軍을 進함이요 퇴함이 아니며, 21년의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이라 한 평양은 지금 평양이요 요동의 낙랑이 아니니, 이때에 동천왕이 위군에게 패하고 都을 遷하여 寇를 피함이니, 만일 요동의 낙랑이라 하면 이는 寇를 近함이요 피함이 아니니, 이에서 南펴라는 평양이라 쓰고, 北펴라는 낙랑이라 썼음을 볼지며, ii) 미천왕 3년에 王率兵三萬 侵玄菟郡 虜獲八千人 移之平壤이라 하고, 14년에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라 하였으니, 평양과 낙랑이 만일 동일한 지방이면 이는 전에는 노획을 移置하던 지방이 후에는 다시 노획하던 지방이 되어 我로써 아를 攻하는 怪劇을 행함이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그러므로 여기에 云한 평양과 낙랑도 하나는 금 평양이요 하나는 요동의 낙랑임이 또한 명백하다. 후인이 위증과 개찬이 많은 중국 各史에도 또한 무의중에 끼쳐온 낙랑이 요동에 있는 증거가 간혹 있으니 후한서 帝紀 安帝永初 5년 3월에 “扶餘犯樂浪塞”를 기한 바 부여는 북부여–지금 합이빈이니 낙랑이 요동의 낙랑인 고로 부여가 그 새를 攻함이요, 자치통감(資治通鑑, 晉紀에 보임) 愍帝(민제) 건흥(建興) 원년(美川 14년)에 遼東張統 據樂浪帶方二郡…樂浪王遵說統率其民千餘家歸(慕容) 爲之置樂浪郡以統爲太守를 기한바, 만일 統의 據한 낙랑 대방이 살수 이남의 낙랑 대방이라면 당시에 고구려가 강성하여 살수 이북만 掩唯하였을 뿐 아니라 곧 요동의 西安平 安東縣 등지까지도 美川 12년에 벌써 고구려에 입하여 살수 이남을 거한 張統이 千餘家를 率하고 요서까지 도주하지 못할지니 이것도 요동의 낙랑됨이 또한 無疑하다.

그러나 우리 선민들은 비록 평양의 假字로 펴라를 기하나, 펴라의 의미를 잘 알므로 펴라란 水名인데 浿水를 떠나서는 평양이라 칭한 일이 없다. 이를태면, 고국원왕이 黃城—歷來 史家가 고국원왕 十三年 移居平壤東黃城의 황성을 上句에 연독하여 東黃城이라 하였지만 이는 大誤—에 都하여 평원왕이 장안성에 都한 바 황성과 장안성이 다 평양에 至近하지만 다만 패수를 挾하지 아니한 고로 평양이라 칭하지 아니하고 황성 혹은 장안성이라 칭하여 그 구별이 이같이 엄절하지만, 중국인은 역대 이래에 패수의 유무를 불관하고 낙랑을 이리저리 마음대로 이치하였으니 요동의 낙랑도 이미 전술과 같이 고정한 처소가 없거니와 慕容가 장통(張統: 전항에 보임)의 降을 받아 낙랑태수를 삼고 柳城에 낙랑을 僑設하였으니 이는 遼西의 낙랑이요, 拓跋魏의 이후에는 上谷에 낙랑을 이치하였으니 이는 山西의 낙랑이니, 이 따위는 다 펴라의 물과 관계 없는 낙랑이라 할 것이다.

. 백제 중엽의 관계한 낙랑

평양 낙랑의 구별이 전술한 바와 같으나, 이에 백제사를 讀하고 고이왕 13년에 幽州刺史丘儉與樂浪太守劉茂朔(朔은 帶의 誤이다)方太守王(王은 弓의 誤이다)遵伐高句麗 王乘虛襲樂浪邊民茂聞之怒王恐見侵討還其民口라 하고 분서왕 7년에 春二月潛師襲取樂浪西縣冬十月王爲樂浪太守所遣刺客賊害薨이라 하니, 여기에 4차나 보인 낙랑의 명사를 역래의 사가들이 의심없이 금 평양을 가리킨 것으로 알아왔으나, 그러나 이때는 낙랑국이 망한 지 已久하니 남펴라에 어찌 낙랑이란 假字로 그 칭호를 썼으랴.

대개 삼국사기 가운데 본기와 열전의 가장 간결한 자는 백제가라. 거칠부전의 百濟人先攻破平壤의 語에 인하여 그 연조를 따지면 聖王 29년에 백제가 일차 고구려의 수도를 함락한 대사가 있을지어늘 본기에 이를 누락하며, 문무본기 당서 일본서기 등을 대조하면 부여福信의 隆才(융재)와 전략과 충절은 고금에 倫比(윤비)가 없는 백제 末日의 거인이어늘 열전에 이 같은 거인을 유기하였으며, 자치통감의 扶餘初居鹿山爲百濟殘破[15]의 기사로 보면 금 합이빈이 백제의 땅이 되었거늘 본기나 열전에 그런 말이 보이지 아니하였으며, 姐瑾과 沙法名의 공적을 찬양한 南齊書 가운데에 동성왕의 國書로 보면 동성왕때에 拓跋魏의 누십만 대병을 전승하여[16] 국세가 매우 강성하였거늘 동성왕 본기중의 백제는 어찌 그리 미약하며, 송서의 百濟略有遼西晉平[17]으로 보면 어느 때 백제의 해외 발전이 금 영평부[18] 등까지 미쳤거늘 양 왕의 본기에는 그런 기록이 없으며, 건국설은 十濟, 百濟 등의 부당한 곡해나 남아 있으며 망국의 遺墟에는 釣龍白馬의 적장을 숭배하는 鬼話만 끼쳐있고, 정작 자가의 문화상 정치상 美하고 선하고 웅대한 무엇은 볼 것이 없으니 이는 敵人이 병화에 焚蕩된 문헌의 액보다 사실을 전도한 羅末文士의 曲筆의 죄가 더 많음을 볼 것이다.

이제 古爾王의 침습한 낙랑으로 말하면 삼국지 동이열전에帝密遣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이라 하고, “正始六年樂浪太守劉茂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興師伐之不耐侯等擧邑降”이라 한바, 이같이 낙랑이 魏將 劉昕과 劉茂가 相繼하여 태수된 곳이니 만일 이 낙랑이 금 평양일진대 丸都에서 寇를 피하여 천도한 동천왕이 어찌 9년동안 根基가 深厚한 魏人의 낙랑에 移都할 수 있으리요. 그런즉 劉昕, 劉茂, 弓遵 등이 거한 낙랑 대방이 요동의 낙랑 대방인 동시에 고이왕이 침습한 낙랑도 요동의 낙랑이니 이는 대개 백제의 해외 발전의 始일지며, 분서왕의 침습한 낙랑으로 말하면 梁書 백제전에 “晉世百濟據有遼西”라 하니 汾西 원년은 晉惠帝 元康 8년[19]이요 慕容와 동시라. 

史에 거하면 모용외의 요서 낙랑의 建置는 미천왕 14년 張統의 降을 받을 때의 일이나 그 전에 慕容遵이 낙랑왕의 號를 가짐을 보면 요서 낙랑의 건치가 已久함을 볼지니, 그러면 대개 백제가 慕容氏의 요서를 공탈하고 彼의 낙랑 東縣을 차지함에 낙랑태수가 병력으로 백제를 막기에 부족하므로 드디어 자잭을 보내어 왕을 암살함이니 이것도 백제의 해외발전의 일반이라. 古炤娘의 참사에 인한 신라인의 激怨이 백제 역사에 미치어 매양 그 功烈은 刪하고 패망만 記하므로 요동 요서 양 낙랑의 初頭관계가 본기에 궐함이니, 그러면 신라 고구려의 양 본기에 뿐 아니라 백제본기에도 낙랑국의 멸망이후 남펴라는 평양이라고 쓰고 북펴라는 낙랑이라고 쓴 鐵證이며, 이로 말미암아 당 태종이 晉書를 지을때에 고구려와 백제의 戰蹟과 강토를 많이 刪去함이 명백하다.

자치통감에 胡三省이 모용외의 낙랑을 柳城에 僑治한 자라 하고, 문헌통고에 백제의 요서 진평을 唐 柳城 北平之間이라 하고,[20] 당서 지리지에 柳城은 東至 遼河480리, 남지 海 260리, 서지 北平郡 7백리, 북지 契丹界 50리라 하며, 그리고 북평은 동지 류성 7백리, 서지 어양 3백리, 동북도 류성 7백리라 하니,[21] 이로써 류성 낙랑의 위치를 상상할 만 하다.

. 중국사 지리지와 동이열전에 보인 낙랑

한서 지리지의 낙랑 25현이 唐人의 위증임은 이미 상편에 약설하였거니와, 이제 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서의 지리지와 동이열전에 보인 낙랑과 낙랑에 관계되는 현도, 대방 등을 幷考하면,

한서지리지에 보인 현도 낙랑의 기록이 좌와 같으니,

현도군 – 戶 45,006    口 221,845      縣3 (고구려 上殷臺, 西蓋馬)

낙랑군 – 戶 62,812    口 406,748     縣 25 조선(朝鮮), 염감(), 패수(浿水), 함자(含資), 점선(黏蟬), 수성(遂成), 증지(增地), 대방(帶方), 사망(駟望), 해명(海), 렬구(列口), 장잠(長岑), 둔유(屯有), 소명(昭明), 루방(鏤方), 제해(提奚), 혼미(渾彌), 탄렬(), 동이(東), 부이(不而), 잠대(蠶臺), 화려(華麗), 사두매(邪頭昧), 전막(前莫), 부조(夫租)

후한서 군국지에 보인 현도 낙랑의 기록이 좌와 같으니

현도군6城, 戶 1,594     口 43,163     고구려, 서개마, 상은대, 高顯故屬遼東, 候城故屬遼東 遼陽故屬遼東

낙랑군 – 18성, 61,492, 口 257,050     朝鮮 喃()邯 浿水 貪資 占蟬 遂城 地 帶方駟望 海冥 列口 長岑 屯有 昭明 鏤方 提奚 渾彌 樂都

삼국지에는 지리지가 없으므로 이는 궐하고,

진서 지리지에는 현도군[22]이 없고 낙랑과 대방을 양군에 분기함이 좌와 같으니

평주 낙랑군(平州樂浪郡) – 統縣 6, 戶 3700, 朝鮮 屯有 渾彌 遂城 鏤方 駟望

대방군 –公孫度置 統縣 七, 戶 4900, 方 列口 南新 長岑 提奚 含資 海

사기에 한무제가 위씨를 멸하고 4군을 두었다 했는데 하고로 한서 지리지에는 현도 낙랑만 있고 진번 임둔이 없는냐. 낙랑이 25현이나 되는데 현도는 하고로 겨우 3현이냐. 후한서 군국지에는 하고로 한서 지리지보다 낙랑의 1현이 더하고 동이 이하 7현이 없느냐. 진서에는 하고로 현도가 없고 대방과 낙랑 양 군이 있느냐. 후한서와 삼국지의 동이열전의 “昭帝罷眞番臨屯以幷樂浪玄菟[23]”가 그 제1의 답안일지며, “玄菟復徙居句驪自單大領已東沃沮濊貊悉屬樂浪”이 그 제2의 답안일지며, 復分嶺東七縣置東部都尉光武建武六年省東部都尉遂棄嶺東地[24]가 그 제3의 답안일지며, 建安中公孫康分屯有以南荒地爲帶方郡[25]이 그 제4의 답안일지나, 후한서 帝紀 광무제 23년에 “句麗蠶支落大加戴升詣樂浪內屬[26]”이라 하니 蠶支는 곧 蠶臺요, 잠대는  (前漢 시대)낙랑의 縣名이어늘 이제 잠대가 낙랑에 속함을 구하다 함은 마치 楊州가 경기도에 속하려 한다는 笑話이며, 和帝[27] 元初 5년에 宮—태조의 이름—復與濊貊寇玄菟攻華麗城이라 하니, 화려는 낙랑 동부인 嶺東 7현의 하나인즉, 광무때에 벌써 파기한 현이어늘 이제 다시 고구려의 침입하는 漢의 현이 됨도 불성설일 뿐더러 현도에 寇하여 화려를 공한다 함은 낙랑의 속현이 곧 현도의 속현이라는 모순의 語이며, 고구려의 국명에 擬하여 고구려현을 둠은 아직 용서하고라도, 琉璃王 33년에 태자 무휼이 고구려현을 점령하여 그 땅이 고구려국의 소유가 되었거늘 이 뒤 3백년이 지나도록 고구려현이 현도의 수부로 한서지리지나 후한서 군국지에 적힘은 架空의 妄筆이다. 다시 더 상고하면 이따위가 얼마인지 모를지라. 그러므로 한서의 지리지나 후한서의 군국지나 진서의 지리지에 보인 낙랑 현도 등 군은 후인의 위증이요 당 이전 各史의 모든 동이열전의 후인의 개찬이 허다한 것이다. 기중 더욱 낙랑 현도 등에 관한 기록은 대개가 위조라 할 것이다.

그러면 낙랑 현도의 제현은 모두 일필로 묵삭함이 가할까. 한서 지리지 遼東郡 番汗縣의 沛水가 곧 浿水임은 이미 상편에 술하였으며, 삼국지 동이열전에 낙랑전을 궐함이 유감임은 이미 삼국지 동이열전의 교정에 술하였거니와 혹 삼국지에 본래 낙랑전이 있고 낙랑전 가운데에는 낙랑 속국 20여개가 기재되었던 것을 당 태종 안사고 등이 낙랑전을 도말하고그 20여 국을 가져다가 한서 지리지에 첨입하여 낙랑군 25현을 만들며 지리지 가운데 낙랑군의 속현인 번한 험독 등을 요동군에 이입할새, 그 흔적을 숨기기 위하여 번한의 浿水를 沛水로 改하고 험독의 주 “朝鮮王滿都”를 반박하고, 각사의 동이열전 혹 기타에 보인 낙랑의 기사를 혹 削 혹 改하여 중국 古疆의 범위를 넓히어 東侵將士의 적개심을 고무하려 함이었던가. 여하간 지리지의 현도의 3현과 낙랑 25현은 거의 조선의 열국이요 당시 요동 낙랑군의 본현이 아니라 할 것이다.

6.    결론

이상에 말한 바와 같이, 중고시대의 평양 패수는 남북에 分峙하여 남에 있는 자는 낙랑국이라 평양성이라 칭하여 그 위치가 대동강상에 고정하고 북에 있는 자는 낙랑군이라 칭하여 그 군치가 요동부터 요서, 요서부터 상곡까지 이동한 자라. 그러나 南樂浪에는 중국인의 세력이 중고시대에 아주 들어온 적이 없느냐. 이는 단언할 수 없는 자라. 대개 중고시대에 조선인은 금 조선 8도 이외에 압록강을 渡하여 興京 이동, 開原 이북의 奉天, 길림의 대부분을 근거하고, 지금의 長城 이북으로 출하여 熱河道, 興和道, 綏遠道 등으로 진취의 지방을 삼아 세가 성할대에는 남하하여 漁陽(어양: 북경 부근), 右北平(우북평: 永平部), 太原(태원: 大同府) 등을 공격하고, 지나인은 영평부부터 산해관으로 진취의 지방을 삼아 세가 성하면 요동부터 혹 興京 이동도 窺伺(규사)하여, 혹 살수 이남까지도 侵逼(침핍)하였거늘 역대의 史氏들이 매양 이런 줄을 認明하지 못하므로 삼국사기를 읽을 때 고구려가 요서에 축성하였다, 어양, 상곡, 우북평 등에 침입하였다는 말을 보면 고구려가 열하도, 흥화도 등지부터 남향하여 영평부 혹 대동부 등을 攻한 것인 줄을 모르고 산해관부터 서진하여 영평부 혹 대동부 등을 공함인 줄로 알며 중국인의 세력이 미천왕 이전 누백년 동안 평안 황해 등지에 蟠據하였던 줄로 아니, 이 다위는 다 비상한 착오라. 설혹 평안 황해에 1,2차 지나인의 병화를 입은 일이 있다 할지라도 또한 麗末 紅巾이 開城에 침입하듯이 잠시의 침요가 될 뿐이니 영구한 점령지로 있었다 함은 사적 기록에 틀리는 망설이라 할 것이요, 다만 낙랑 遷徙에 대하여 일종 재미를 感할 일이 있으니, 낙랑이 요서로 遷할 때는 조선의 세력이 요동에 미친 뒤며, 낙랑이 상곡으로 천할 때는 조선의 세력이 요서에 미친 뒤니, 낙랑 위치의 진퇴로 조선 세력의 소장을 卜할 것이다.

조선고적도보에 다수히 낙랑과 대방의 墳들을 기재하였으나, 그러나 낙랑군 제8대동강면의 고분을 漢墳이라 함은 銅鏡이나 金口 등에 박힌 王자를 제왕의 왕으로 풀지 않고 한인 왕씨의 왕으로 풀며, 제 6, 제 5江東의 古陵은 전설에 皇帝塚이라 하고, 여지승람에는 이를 동천왕릉이라 하였거늘, 이제 漢王陵이란 전무의 별명을 주며, 점제비는 그 초두의 缺面에 問標를 질러 漢 光和 원년이라 하니, 우리 같은 고고학의 문회한이 어찌 그 시비를 경론하리요마는, 그러나 그 도설의 대개를 보건대 어떤 말은 학자의 견지에서 나왔다느니보다 정치상 他種의 작용이 적지 않은 듯 하다. 대방태수 漁陽 張撫夷의 묘는 그 비문의 漁陽 2자를 거하여 지나 북경인이 出仕한 자의 묘라 하였으나, 백제 중엽부터 백제인이 중국을 모방하여 지은 지명이 많으니 廣陽, 城陽 등이 是니, 어양도 이와 같이 백제 내지의 지명이 아닌지 모를지며, 개로왕때에 대방태수 司馬張茂란 자가 있으니 장씨는 백제의 世家로 대방태수의 직을 세습하던 성씨인지도 모를지니, 據然히 북경인이라 단언함은 너무 급조한 일인가 한다.



[1] 상고시대 평양에 대한 설명

[2] 編註: 편안하다의 뜻도 있으므로 펴라에 사용된 뜻은 이것이 아닌가 한다.

[3] 編註: '위략'에서 말하길, 옛날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가 '주나라'가 약해짐을 보고, '연'이 스스로를 왕으로 높이고, 동쪽의 땅을 다스리려고 하자,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병사와 함께 '연'을 공격하여 '주'의 왕실을 높이고자 하였다. 대부 '예'가 이를 간하여, 멈추게 되고, '예'를 서쪽으로 보내어 '연'에게 말하니 '연'도 이를 그치고,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해지자, '연'이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그 땅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이천여리를 취하였다.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를 삼자, '조선'이 약해지게 되었다.'진'이 천하를 아우르자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게 하였다. 이때에 '조선왕 비'가 섰다. '진'이 엄습할까를 두려워하여 복속하여 '진'에 속하였지만, 알현하지는 않았다. '비'가 죽고 그 아들 '준'이 섰다. 이십여년후에 '진', '항'이 일어나 천하가 어지럽자, '연', '제', '조'나라 백성들이 시름하였다. 점점 '준'에게 가서 망명을 하니, '준'이 이들을 서쪽에 두었다. '한'이 '노관'을 '연왕'으로 삼자, '조선'이 '연'과의 경계를 '패수'로 삼았다. '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호'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이에 이르러, '준'에게 항복하였다. '준'에게 서쪽 경계에 살기를 구하고, 중국망명인으로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고자 하니, '준'이 믿고 은혜를 베풀어, '박사'의 벼슬을 주고, 규를 하사하고, 백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는 우두머리로 하였다. '만'이 망한 무리들을 꾀여, 무리가 점점 많아지니, 이에 '준'에게 사람을 파견하여 거짓으로 고하길, '한'의 병사가 열길로 쳐들어 온다. 방비하기 위해 들어가니, 돌아서서 '준'을 공격하였다. '준'이 '만'과 전쟁을 하는데, 대적하질 못하였다

[4] 編註: 조선왕 ''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가 전성기때부터 진번조선에 노략질하여 속하게 하였고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하고 요동을 변경으로 삼았다. 한나라가 일어서자 그곳이 멀고 지키기 어려워 요동의 요새를 고치니, 경계가 패수로 연나라에 속한다. '연왕 노관' 반하여 흉노로 도망가고,'' 명령을 버리고 무리 천여명과 상투를 틀고 '만이' 복식으로 바꾸고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벗어났다.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공지' '상하장' 땅에 살다가 차츰 '진번조선' 속하게 되고, 제나라의 망명자들의 왕이 되어 '왕검' 도읍을 하였다.

[5] 編註: 사기 흉노전에는 조양(造陽)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6] 編註: 연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었는데, 호에 볼모로 잡혀 있을 그들의 깊은 신임을 얻었다. 연으로 돌아오자 동호를 습격하여 격파하니 동호는 여리를 물러나게 되었다. 형가와 함께 진왕을 찌르러 갔던 진무양이란 자는 진개의 손자이다. 또한 장성을 쌓으니 조양에서 양평에까지 이르렀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설치해 호를 방비했다.

[7] 編註: 漢書 6武帝紀 三年春作角抵戲三百里内皆采觀夏朝鮮斬其王右渠降(其地樂浪臨屯玄菟眞番郡臣曰茂陵書臨屯郡治東縣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十五縣眞番郡治霅縣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十五縣師古曰樂音洛浪音番音普安反音弋支反霅音丈甲反)

[8] 編註: BC 121년이다.

[9] 編註: BC 126년이다.

[10] 編註:BC 108년이다.

[11] 編註:요동군 험독현에 대해서 응소가 말하기를 ‘조선 임금 위만이 도읍한 곳이다. 물에 의지하여 살고 험하기에 예부터 험독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찬이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고 이곳이 진짜 험독이다.’라고 하였다. 사고가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맞다.

[12] 백제의 북쪽으로 , , , 노나라 등이 있고 남으로 오월을 침략하였다.

[13] 중고시대 평양에 대한 설명

[14] 후한서 1 光武帝紀 “初樂浪人王調據郡不服【樂浪郡故朝鮮國也在遼東】秋遣樂浪太守王遵擊之郡吏殺調降遣前軍李通率二軍與公孫述戰於西城破之西城縣屬漢中今金州縣也】夏蝗秋九月庚子赦樂浪謀反大逆殊死已下

[15] 자치통감 97 晉紀 19

初夫餘夫餘在玄菟北千餘里鹿山直其地杜佑曰夫餘國有印丈曰濊王之印國有故城名濊城本濊貊之地其國在長城之北去莬千里南與高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居于鹿山為百濟所侵東夷有三韓國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馬韓有五十四國百濟其一也後漸强大兼諸小國其國本與句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隋書曰百濟出自東明其後有仇台者始立其國漸以强盛初以百家濟海因號百濟杜佑曰百濟南接新羅北距高麗千餘里西限大海處小海之南

[16] 자치통감 136 帝紀2 魏遣兵擊百濟百濟所敗曰三韓凡七十八國百濟其一也據李延史其先以百家濟海後浸盛以立國故曰百濟晉世句麗畧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

[17] 송서 97 열전57百濟畧有遼西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

[18] 난하 유역인 것으로 보인다.

[19] AD 298년으로 백제 분서왕 원년이다. 삼국사기 기록과 보면 AD304년에 낙랑을 습격하는데, 아마도 진나라 원강8년이 최근들어 중국이 새로이 역사를 정립하면서 연대가 많이 바뀐 한다. 혹은 책계왕 13 기사를 말한 같기도 하다.

[20] 다른 판본에는 한문으로 되어 있는 곳도 있다. , “東至遼河四百八十里, 南至海二百六十里, 西至北平郡七百里, 北至契丹界五十里”

[21] 東至柳城七十里, 西至漁陽三百里, 東北到柳城七百里

[22] 晉書14를 보면 현도군이 있다. “玄菟(漢置統縣三戶三千二百)句麗 望平 “ 신채호 선생이 진서 지리지에 현도군이 없다고 했으니 본인지 읽은 晉書도 또한 후대의 위작인가.

[23] 후한서 115 동이전 75, 昭帝始元五年 罷臨屯番以幷樂浪玄菟, 玄菟復徙居句驪自單大領已東沃沮濊貊悉屬樂浪 소제 시원 오년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없에고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현도는 다시 구려의 거처로 옮겨갔다. 단단대령의 동쪽 옥저와 예맥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24] 후한서 115 동이전 75, 後以境土廣遠, 復分領東七縣, 置樂浪東部都尉. 自內屬已後, 風俗稍薄, 法禁亦浸多, 至有六十餘條. 建武六年, 省都尉官, 遂棄領東地

후에 지경이 넓고 멀어 다시 동쪽 칠현으로 나누고, 낙랑 동부도위를 두었다. 속한 이후로 풍속이 점점 박해지고 금하는 법이 또한 많아지니 육십여개에 이르렀다. 건무 육년 도위관을 없애고, 드디어 단단대령 동쪽 땅을 버렸다..

[25] 삼국지 위지 30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方郡 건안 중에 공손강이 둔유현의 남쪽 거친땅을 나누어 대방군으로 삼았다.

[26] 후한서 115 동이전 75 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内屬 구려 잠지락 대가 대승 만여호가 낙랑의 안에 이르러 속했다.

[27] 安帝의 오타인 것 같다. 안제 원초 5년은 AD 118년으로 고구려 태조대왕 66년에 해당하며 삼국사기에 화려성을 공격한 기사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