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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욱리하(郁里河)의 위치는 산동성 청주(靑州)일까?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2. 15.
삼국사기 개로왕조에 등장하는 욱리하(郁里河)는 어디에 있었을까?
먼저 욱리하가 기재된 삼국사기를 살펴보자

●삼국사기 백제본기 3 개로왕
이 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樓閣)과 대사(臺) 등을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 욱리하(郁里河)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곽(槨)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장사하고,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 데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에까지 이르렀다.
於是 盡發國人 烝土築城 卽於其內作宮25)樓閣臺 無不壯麗 又取大石於郁里河 作槨以葬父骨 緣河樹堰 自蛇城之東 至崇山之北(디지털한국학 자료 인용)

그런데, 지나의 수많은 지명중에서도 욱(郁)자가 들어간 지명은 찾기가 쉽지 않다. 즉, 매우 특수한 경우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고유한 지명처럼.
검색도구를 이용하여 찾아본 결과 산동성 동쪽 유산시(乳山市) 애자진(崖子镇)에 욱리촌(郁里村)이 있었다. 산동성이라는 결과에 눈이 번쩍 뜨였다.

威海典藏
姜世斌 航空航天工业部第一研究院审计室主任,高级工程师。崖子镇郁里村人,1931 年生。1946年3月参加工作,后入山东速成中学、上海交通大学学习。1960年毕业后,分配至国防部第五研究院一分院(后改为航空航天工业部第一研究院)工作,历任技术员、工程师、高级工程师,先后参加火箭动力装置的研制和尖端武器十年发展规划的调研编拟工作。
http://www.weihai.gov.cn/gk/sqzl/whdc/html/14/12010402.htm

그것은 바로 사기 오제본기 제요조에 나오는 욱이(郁夷)와 연관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요 임금은 희중(羲仲 : 동방을 다스리는 관리)에게 명하여 욱이에 살게 하였는데 욱이는 양곡이라고 하였다.(居郁夷,曰暘谷) 또한, 욱이는 우이(嵎夷)라고도 하였고(集解尚書作 嵎夷), 양곡은 탕곡(湯谷)이라고도 하였고, 해가 뜨는 곳(日出湯谷)이라고 하였다. 우이(嵎夷)는 곧 청주(青州)라고 하였다(嵎夷,青州也)

●新校本史記三家注/新校本史記/本紀/卷一 五帝本紀第一/帝堯 신교본사기 본기 오제본기 제요
  乃命羲﹑和,[一]敬順昊天,[二]數法[三]日月星辰,[四]敬授民時.[五]分命羲仲,居郁夷,曰暘谷.
[六]  集解尚書作「嵎夷」.孔安國曰:「東表之地稱嵎夷.日出於暘谷.羲仲,治東方之官.」 索隱舊本作「湯谷」,今並依尚書字.案:淮南子曰「日出湯谷,浴於咸池」,則湯谷亦有他證明矣.又下曰「昧谷」,徐廣云「一作『柳』」,柳亦日入處地名.太史公博採經記而為此史,廣記異聞,不必皆依尚書.蓋郁夷亦地之別名也.正義郁音隅.陽或作「暘」.禹貢青州云:「嵎夷既略.」案:嵎夷,青州也.堯命羲仲理東方青州嵎夷之地,日所出處,名曰陽明之谷.羲仲主東方之官,若周禮春官卿.

※청주(青州) :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따르면 청주는 여러 곳에 설치되었지만, 산동성 임치, 역성현, 익도현 등에도 시대에 따라 청주가 설치되었다.

青州 : 古九州之一,《书禹贡》“海岱惟青州,”说者谓在少阳,其色为青,故名,今山东之胶东道及济南道东霁皆是
汉亦置青州,后汉青州刺史治临淄,即今山东临淄县(후한의 청주는 현 산동성 임치현이다.)
义熙中移镇丹徙,在今江苏丹徒县东南十八里,旋置青州于东阳,今山东益都县治,谓之北青州,而侨置青州,曰南青州,南青州又移治广陵,南朝宋因之,后省南青州,北青州直曰青州,孝建初称青州治历城,今山东历城县治

삼 국사기 지리지에는 우이현, 신구현이 나온다. 또한 신당서에는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당의 좌무위장군 소정방이 신병도행군대총관(필자 주: 삼국사기의 신구현이 신당서의 신병도로 생각된다. 한자가 비슷한데다 위치도 우이현과 신구현은 서로 인접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왕 김춘추가 우이도행군총관에 임명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권제37 (잡지 제6)  지리/기타/도독부 13현 
도독부(都督府) 13현(縣)
우이현(嵎夷縣). 신구현(神丘縣). 윤성현(尹城縣)은 본래 열기(悅己)였다. 인덕현(麟德縣)은 본래 고량부리(古良夫里)였다.
都督府一十三縣 嵎夷縣 神丘縣 尹城縣 本悅己 麟德縣 本古良夫里

●/新校本新唐書/本紀/卷三 本紀第三/高宗皇帝李治/顯慶五年
辛亥,左武衛大將軍蘇定方為神兵道行軍大總管,新羅王金春秋為嵎夷道行軍總管,率三將軍及新羅兵以伐百濟.

욱리(郁里)를 욱이와 곧바로 연계시켜 본 무리는 있지만, 위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욱리(郁里)는 곧 욱이(郁夷)= 우이(嵎夷)가 있던 현 산동성에 있던 지명이며, 욱리하 또한 욱리가 있다고 추정되는 산동성의 어느 강이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