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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

[요사遼史] 창업의 현신賢臣 야율갈로耶律曷魯 열전列傳 번역 : 거란흥업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7.
《요사열전遼史列傳》중  유명한 개국공신이자 거란의 창업주 야율아보기의 현명하고 지혜로운 신료이며  뛰어난 전략가이며 용맹한 장수였던 야율갈로耶律曷魯편을 통해서 우리는 야율아보기가 거란을 건국해나가는 그 흥업사 전체를 파노라마처럼 소략하나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야율갈로耶律曷魯이 거란 흥업사전체를 개략적이나마 살펴볼 수 있게 하므로 이를 선정해 풀어보았습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기라성같은 현신과 용장과 전략가들로 넘쳐나듯이  동이족의 한 부분이며 고려-거란의 남북국시대의 한 축인 거란 또한 그 흥업에는  휼룡한 현신과 용장들이 많이 출현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도 겸비하기 힘든데 안으로는 현명하고 온후한 신료로서 밖으로는 탁월한 전략가와 용맹하고 지혜로운 장수로서 문무양쪽의 모든 것을 겸비하였던 야율갈로耶律曷魯는  대표적인 거란의 현신용장중의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사가史家는 야율아보기를 보필하여 거란제국을 열어 그 기틀을 닦았던 문무를 겸비한 현신지장賢臣智將  야율갈로耶律曷魯와 고구려와 백제의 넘쳐나는 현신,용장들이나 거란흥업시의 뛰어난 재신들에 비할때  명나라의 시대적 필요성에 의해 조작되어 만들어진 인물이면서 유비를 보필하였고 삼국지연의란 소설속에서 과대평가되었지만 패업의 길을 닦기는 커녕 수성할 계책이나 흥기할 기반조차도 닦지 못했던 무력한 제갈갈명따위와는 아예 비교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정)


《요사열전遼史列傳》에서  발췌한 명성이 자자함에도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인물중 하나인 야율갈로耶律曷魯에 대한 열전 전문을 풀어올립니다.
실력이 미진하고 부족하여 혹여 틀린 부분이나 이견이 있는 풀이가 있어 지적해주시면 미리 감사를 올리며 이를 정정하거나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야율갈로耶律曷魯에 대한 사가史家의 논論만 따로 덧붙입니다.

「 갈로曷魯는 폐부지친肺腑之親-황실의 가까운 지친-으로서 유악帷幄의 임무寄를 맡았는데 그 말言은 시귀蓍龜와 같이 앞을 내다보았으며
그 지략謀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니 산무유책算無遺策-계책이 조그마한 빈틈조차 없음-이라고 이름이 옳지 않겠는가 !
그 군신君臣이 서로 만남에 있어 성誠으로 대하였으니,오한吳漢의 광무光武에 대한 것과 가깝지 않겠는가?
임금夫이 신임하여 그의 하고자하는 바를 들어 맡기게 하였으니 지혜롭다 할 것이요. 태조太祖도 이를 가졌다 할 것이다.
옛말에 이르기를,오직 성인聖人이 성인聖人을 알아보며 오직 현인賢人이 현인賢人을 알아본다하였으니
이 말이 이것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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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校本遼史/列傳/卷七十三 列傳第三/야율갈로耶律曷魯  [원元 승상 탈탈 저술]
(한몸살점등재 판본은 요사遼史 열전列傳 권卷 六十五 열전列傳 第三이라 함)


야율갈로耶律曷魯    /   소적로蕭敵魯   소아고지蕭阿古只  
야위사열적耶委斜涅赤(=야율사열적耶律斜涅赤)
야율로고耶律老古  야율파덕耶律頗德   /   야율욕온耶律欲穩  야율해리耶律海裡



야율갈로耶律曷魯는 자字가 공온控溫이고 다른 자字는 홍은洪隱으로 질라부인迭刺部人이다.조부祖父는 갑마갈匣馬葛(야율첩라耶律帖剌)로 간헌황제簡憲皇帝의 형兄이다.
부친父은 우사偶思로 요련遙輦이 가한Khan可汗일때, 본부本部-질라부迭刺部-의 이리근Yiligen夷離堇이 되었으며 갈로曷魯는 그의 장자長子이다. 성품이 후덕하였다.

耶律曷魯,字控溫,一字洪隱,迭刺部人。祖匣馬葛,簡憲皇帝兄。父偶思,遙輦時爲本部夷離堇,曷魯其長子也。性質厚。

☞ 요련遙輦 : 거란 8부部의 하나인 요련부遙輦部를 말한다. 돌궐突厥에 대한 철륵제부鐵勒諸部의 반란을 틈타 628년에 이르러 거란 8부部가 모두 당唐에 신속하였다.
이후 대하씨大賀氏가 거란 8부部를 모두 통솔하였으며 세력이 약할때에는 가한Khan可汗, 강성할때는 스스로 당조唐朝에 송막도독松漠都督의 지위를 받아 거란 8부部를 다스렸는데  요련씨遙輦氏의 굴렬屈烈이 무리의 신임을 얻어서 세력이 커지더니 730년에 이르러 결국, 대하씨大賀氏인 송막도독松漠都督府 이소고李邵固(재위,725~730)를 죽이고 스스로 가한Khan可汗이 되었으며 이후로 거란 8부部는 907년 질라부迭刺部의 야율아보기가 등장할때까지 요련씨遙輦氏에서 칸을 선출하였다.
☞ 이리근Yiligen夷離菫 : 거란 관직명官職名으로  영어로 Irkin이라고도 하며 거란 각부各部의 군사수령軍事首領이다.
  요遼 태조太祖도 거란부락연맹전체의 수령이 되기전에 질라부迭刺部 이리근夷離菫이 되면서 세력이 크게 늘어나 기반을 쌓았다.
☞ 간헌황제簡憲皇帝 : 거란契丹 잘라부迭剌部의 수장인 야율살라덕耶律薩剌德(묘호 의조懿祖)의 3남男으로 이름은 야율균덕실耶律勻德實이다.
요遼 태조太祖 야율아보기의 조부祖父로 후에 간헌황제簡獻皇帝로 추존되었고 묘호廟號는 현조玄祖이며 그의 4째 아들인 야율살라적耶律撒剌的이 바로 요遼 태조太祖의 부친이다.  
《요사본기遼史本紀》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인 살라덕薩剌德때부터 농사를 병행하여 부민部民들이 농업農業과 목축牧畜을 병행하여 부유해져 그 부족이 소유한 은殷이 풍부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철鐵을 제련하는 노爐를 또한 세우면서 잘라부迭剌部는 더 부유하고 강성해지었다.



초빈髫鬢-유년시절-때에 태조太祖와 더불어 같이 헤엄치며 놀자 종부從父 석로釋魯가 기특하게 여겨 이르기를,
「우리 가문을 일으키는 자는 필히 두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조太祖가 다 장성하여서도 가죽옷과 말을 서로 바꾸어 교환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그리하여 갈로曷魯는 태조太祖 옆에서 지내며 삼가하여 섬기게 되었다.  
활가滑哥가 그의 부친 석로釋魯를 죽인일로 모여서 태조太祖가 갈로曷魯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활가滑哥가 부친을 죽였으니 헤아리건대 나는 반드시 용납하지 못하니 장차 되풀이되어 나에게 미칠까함이다. 이제 그를  죄대罪台에 맡기어 햇볕이 나면 하늘에 용서를 빌도록 하고서 나의 고모姑께 그를 넘겨줄 것이니 이는 해친것을 내가 잊지 않으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갈로曷魯는 항상 칼刀을 차고서 태조太祖를 따랐으니 준비하므로서 염려치 않으려는 것이었다.  

在髫鬢,與太祖游,從父釋魯奇之曰 :「興我家者,必二兒也.」
太祖既長,相與易裘馬爲好,然曷魯事太祖彌謹。會滑哥弒其父釋魯,太祖顧曷魯曰 :「滑哥弒父,料我必不能容,將反噬我。今彼歸罪台曬爲解,我姑與之。是賊吾不忘也 !」
自是,曷魯常佩刀從太祖,以備不虞。

☞ 해解 : 풀어주다, (신에게)빌다, 압송하다.



그곳에서 오래 거한 후에 갈로曷魯의 부친 우사偶思가 병에 들자 갈로曷魯를 불러 말하길, 「아보기阿保機는 신묘하여 천하를 받아 다스릴 것이니 너汝는 모든 동생들을 이끌고 적심赤心-정성스럽고 참된 마음-으로 그를 섬기어라.」라고 하였다. 얼마후 태조太祖가 와서 병疾에 대해 물으니 우사偶思가 그 손을 잡으며 말하길, 「너는 세상에 기재奇才를 알려라. 나의 아이 촉로蜀魯란 자는 저번에 다스리도록 맡기는 것이 옳다 하였으며 나도 이미 그것을 깨달았느니라.」라고 하였다.  이윽고 모든 자식들이 그에게 복종하였다.

居久之,曷魯父偶思病,召曷魯曰 :「阿保機神略天授,汝率諸弟赤心事之 。」幾而太祖來問疾,偶思執其手曰 :「爾命世奇才。吾兒蜀魯者,他日可委以事,吾已諭之矣 。」既而以諸子屬之。



태조太祖가 달마撻馬 월사리狘沙裡가 되어 관련된 부족部族의 일을 살피는데 갈로曷魯가 수기의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소황실위小黃室韋들을 불러 와서 내부하게 하였다.
태조太祖가 본디 큰 뜻이 있어 갈로曷魯가 어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군국軍國의 일들을 갈로曷魯와 의논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월올越兀 과 오골부烏古部를 토벌하고자 군사를 모으자 갈로曷魯가 전봉前鋒-선봉-이 되었는데 싸움에 공히 많았다.

太祖爲撻馬狘沙裡,參預部族事,曷魯領數騎召小黃室韋來附。太祖素有大志,而知曷魯賢,軍國事非曷魯議不行。會討越兀與烏古部,曷魯爲前鋒,戰有功。

☞ 오골부烏古部 : 당말唐末과 요나라때의 거란 동부의 유목민족遊牧民族으로 오골리烏古裏、어궐於厥、우골羽厥로도 불렸다.  해륵수海勒水 이북은 삼하오골부三河烏古部라 하고 해륵수海勒水 이남은 그대로 오골부烏古部라 부르며 항상 적렬敵烈의 부족部族과 함께 아울러 칭하였다.



태조太祖가 질라부迭刺部 이리근Yiligen夷離堇이 되기에 이르러 영부英部를 정벌하려 하자,그 장長이 속으로 꾀를 내어 요해처險와 루壘-성채-사이로 내왕하였으므로 공략하였지만 능히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갈로曷魯에게 명하여 가笴-화살대-하나만을 가지고 가서 그들을 타일러 회유하도록 명하니 이윽고 입성하여서 그 곳을 차지하였다.

及太祖爲迭刺部夷離堇,討英部,其長術裡通險而壘,攻莫能下,命曷魯持一笴往諭之。既入,爲所執 。



이때 해奚를 설득해 이르는데,
「거란契丹과 더불어 해奚의 언어言語는 서로 상통하니 진실로 한 나라國인 것이다. 아국我國의 이리근Yiligen夷離堇이 어찌 해奚를 짓밟거나 억압하려는 마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한인漢人이 우리의 조상祖上인 해수奚首를 살해하였으므로 이리근Yiligen夷離堇이 골수에 이르도록 슬퍼하며 하룻밤을 한인漢人에게 복수할 것을 생각하였다. 돌아보니 힘이 외롭고 미약하므로  나로 하여금 해奚를 구원하게 하려는 것이다.  화살矢을 보내어 들을 수 있도록 믿음을 보이고자 한다. 이리근Yiligen夷離堇은 하늘에서 천명을 받아 덕德으로써 아래를 어루만져왔으므로 고로 능히 이 무리들도 소유할수 있는 것이다. 지금 해奚가 나를 죽인다면 하늘의 뜻을 어기고 덕德을 배반하는 것이니 이는 상서롭지 못함이 어둡고도 심히 클 것이다. 또한, 군사가 잇달아 재앙으로 끝을 맺으면 이로부터 상서롭지 못한 일이 시작될 것이니 어찌 너희 나라國에 이로움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그 말에 그들이 마음을 움직여 속마음을 말하고 이로서 항복하였다.

乃說奚曰 :「契丹與奚言語相通,實一國也 。我夷離堇於奚豈有輘轢之心哉?漢人殺我祖奚首,夷離堇怨次骨,日夜思報漢人。顧力單弱,使我求援於奚,傳矢以示信耳。夷離堇受命於天,撫下以德,故能有此眾也。今奚殺我,違天背德,不祥莫大焉。且兵連禍
結,當自此始,豈爾國之利乎 !」述裡感其言,乃降。



태조太祖가 우월于越에 임명되어서 국정國政을 처리하며 갈로曷魯를 질라부迭刺部 이리근Yiligen夷離菫으로 임명하고자 하였는데 사양하며 이르길,「도적이 군주君곁에 있으니, 감히 멀리 가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태조太祖가 흑차자실위黑車子室韋를 토벌하는데 유주幽州 류인공劉仁恭이 양자養子 조패趙霸를 보내어 무리를 거느리고 흑차자실위黑車子室韋를 구원하러 왔다. 갈로曷魯가 도산桃山에 군사를 매복하고,패霸의 무리眾가 반이상 지나기를 기다리며 이를 잠복하여 노리다가 태조太祖와 더불어 합류하여 격파하니 심히 많은 무리를 참획斬獲하고 실위室韋가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太祖爲于越,秉國政,欲命曷魯爲迭刺部夷離菫.辭曰:「賊在君側,未敢遠去.」太祖討黑車子室韋,幽州劉仁恭遣養子趙霸率眾來救.曷魯伏兵桃山,俟霸眾過半而要之;與太祖合擊,斬獲甚眾,遂降室韋.



태조太祖가 운주雲州로 가서 이극용李克用과 회합하였는데 그때, 갈로曷魯가 시위하였다.
극용克用이 돌아보고 기세가 휼룡하기에 묻기를,「위남자偉男子는 누구입니까?」하여  
태조太祖가 답하길,「나의 친족인 갈로曷魯요.」라고 답하였다.

太祖會李克用于雲州,時曷魯侍,克用顧而壯之曰:「偉男子爲誰?」
太祖曰:「吾族曷魯也.」

☞ 위남자偉男子 : 위장부偉丈夫, 즉 휼룡하고 훨칠한 장부丈夫



요련부遙輦部의 흔덕근痕德堇 가한Khan可汗(당시 거란 8부部 전체의 통치자)께서 몰歿하여 회합을 하고자 모이니 군신群臣들이 유명遺命을 받들어 태조太祖를 세우려 청하였다.
태조太祖가 청하여 말하기를,「옛날 나의 선조 이리근Yiligen夷離堇 아리雅裡-야율아리耶律雅裏-는 부당不當하게 이리근夷離堇의 자리에 올랐다고 말함을 겪었는데, 지금 너희 무리가 다시 이런 건의를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물었다.
갈로曷魯가 나아가 답하여,「이전에 당신의 선조의 허물은 유명遺命이 함께 하지 않았고 부서符瑞-상서로운 조짐-가 보이지 않았지만 다만 국인國人이 추대하였던 바 이루어졌습니다.  지금의 선군先君의 말言은 오히려 귀에 익으니 하늘과 사람이 더불어 하는 바이고 이와같이 부절과 계약이 맞으니 하늘에 거슬르려는 것이 아니며 사람에 반하여 하려는 것도 아니며 더하여 군명君命을 어기려는 것도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會遙輦痕德堇可汗歿,群臣奉遺命請立太祖。太祖辭曰:「昔吾祖夷離堇雅裡嘗以不當立而辭,今若等復為是言,何歟?」
曷魯進曰 :「曩吾祖之辭,遺命弗及,符瑞未見,第為國人所推戴耳。今先君言猶在耳,天人所與,若合符契。天不可逆,人不可拂,而君命不可違也 。」

☞ 야율아리耶律雅裏 : 야율니례耶律泥禮、또는 야율녈리耶律涅裏라고도 기록되었는데 야율누리사耶律耨裏思의 증조부가 되며 야율아보기의 7대조祖이다.
《요사遼史》에는 요 태조의 7대조인 야율아리耶律雅裏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있다.
요련씨遙輦氏의 첫 번째 가한Khan可汗 굴렬屈烈이 그의 신하인 이과절李過折의 배신으로 피살되고 당唐과 손을 잡은 이과절李過折이 송막도독松漠都督이 되어 거란 8부部를 장악하자 굴렬屈烈의 살아남은 여당餘黨인 야율니례耶律泥禮가 이과절李過折을 척살하고 요련씨遙輦氏인 적련조리迪輦組裏(=이회수李懷秀)를 조오가한阻午可汗으로 옹립하였다.
요련씨遙輦氏가 170년이상 가한Khan可汗을 계속 배출한데에는 야율씨耶律氏가 심대한 공헌을 했고 요련씨遙輦氏의 마지막 가한Khan可汗 흔덕근痕德堇은 거란 8部의 가한Khan可汗으로 야율아보기를 추대하도록 유명을 남겼으니 요련씨遙輦氏와 야율씨耶律氏간의 유대관계는 그  내력이 오래되어 깊은 것이다.




태조太祖가 이르길,「유명遺命은 분명히 그러하지만 너희가 어찌 천도天道를 알겠는가?」
갈로曷魯가 이르길,「어월於越(=우월于越,당시 태조의 관직)의 탄생에 대해 들었는데,신광神光이 하늘에 붙어서 기이한 향이 장막안에 가득차고 꿈에 신神의 가르침을 받아 용龍이 금패金佩를 주었으니 천도天道로서 사심이 없이 공평한 것이므로 필히 응당히 덕德이 있을 것입니다.
아국我國이 작고 약한데다 인근한 부락에서 오래동안 날마다 서로 미워하여 다투니 이런 연유로 흥기興起하기 위해서는 성인聖人이 나와야합니다. 가한可汗-흔덕근가한痕德堇可汗-께서 하늘의 뜻을 아셨으므로 고로 이러한 명을 하신 것입니다.
또한, 요련遙輦의 9영營이 바둑돌같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음에도, 아무도 가히 위에 오르려는 자가 없습니다.  크고 작은 신민臣民들이 어월於越(=우월于越)께 마음으로 따르니 운명입니다.
예전에 어월於越(=우월于越)이시던 백부伯父 석로釋魯께서 일찍이 말씀하기를,『 내가  뱀이라 한다면 이 아이는 마땅히 용龍이라 할것이오. 』라고 하셨습니다.  천시인사天時人事가 어찌 틀어져 허락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하였으나  태조太祖가 오히려 허락하지 못하였다.

太祖曰 :「遺命田然,汝焉知天道?」
曷魯曰 :「聞於越之生也,神光屬天,異香盈幄,夢受神誨,龍錫金佩。天道無私,必應有德。我國削弱,齮齕於鄰部日久,以故生聖人以興起之。可汗知天意,故有是 命。且遙輦九營棋布,非無可立者;小大臣民屬心於越,天也。昔者於越伯父釋魯嘗曰 :『吾猶蛇,兒猶龍也 。』天時人事,幾不可失 。」太祖猶未許。

☞ 昔者 : 예전에, 이전에 (=구시舊時)



그날 밤,  홀로 갈로曷魯를 불러 꾸짖으며,
「유명遺命으로서 무리眾들이 나를 다그치는데 네가 나의 마음을 존중해주지 않고 너도 또한 고개를 숙여 남의 의견을 따르는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갈로曷魯가 이르길,
「옛 이리근夷離堇 아리雅裡-야율아보기의 7대조-께서는 비록 추대하는 무리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사양하시고 조오阻午를 세우셔 가한可汗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서로 10여세대를 전하고나서는 군신君臣간에 분란分亂이 일어 기강紀綱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타국他國에 맹세하고 위임했다면 이와 같이 그렇게 유斿-거란의 깃발-가 이어져왔겠는지요. 우격羽檄-군사상 급하게 전하는 격문-을 낮에 만날지라도 백성들은 명命을 싫어하여 달아나 버릴 것입니다.
흥왕興王의 운세가 금일에 가득차 있으면  명命-흔덕근가한痕德堇可汗의 유명遺命-을 돌아보고 화답함으로써 하늘에 순응하고 민의를 쫓아야 하는 것이지 피한다는 것은 불가한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태조太祖가 이에 허락하고 다음날,곧 황제皇帝의 위位에 올라서 갈로曷魯를 총군국사總軍國事로 임명하였다.

是夜,獨召曷魯責曰 :「眾以遺命迫我。汝不明吾心,而亦俯隨耶?」

曷魯曰 :「在昔夷離堇雅裡雖推戴者眾,辭之,而立阻午為可汗。相傳十餘世,君臣之分亂,紀綱之統隳。委質他國,若綴斿然。羽檄逢午,民疲奔命。興王之運,實在今日。應天順人,以答顧命,不可失也 。」太祖乃許。明日,即皇帝位,命曷魯總軍國事。

☞ 유斿 : 깃발, 전쟁터에서 깃발로 군대를 지휘하여 그 군대나 해당하는 나라의 상징이 됨.
            여기서는 거란의 깃발을 말하여 거란국을  상징함.




때時에 제도制度가 아직 명확하지 않고 국가의 능력이 아직 완전하지 못하여 임금을 호종扈從하는 일도 아직 준비를 갖추지 못하였다. 그래서 라갈剌葛-야율라갈耶律剌葛-등의 모든 동생들이 이따금 분에 넘치는 것을 바라고 갔지만 바란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태조궁太祖宮 행영行營은 처음에는 복심부腹心部에 세웠는데 제부諸部에서 호건豪健-매우 뛰어나고 굳센-한 이들 2천여명을 뽑아서 행영行營을 채우고 갈로曷魯와 소적로蕭敵魯로 하여 이들을 거느리도록 하였다.  

時制度未講,國用未充,扈從未備;而諸弟剌葛等往往覬非望.太祖宮行營始置腹心部,選諸部豪健二千餘充之,以曷魯及蕭敵魯總焉.

☞ 야율라갈耶律剌葛 :  요遼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첫째 동생, 태조의 아버지는 아들을 여섯 두었는데 장남이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이고 둘째가 야율라갈耶律剌葛, 세째가 야율질라耶律迭剌, 네째가 야율인저석耶律寅底石, 다섯째가 야율안단耶律安端, 여섯째가 야율소耶律蘇였으며  이들중 막내를 제외한 라갈剌葛, 질라迭剌, 인저석寅底石, 안단安端이 모두 야율아보기가 거란 8부의 수령이 된지 얼마되지 않아 태조 5년인 911년 반란을 일으켰다.



그후 얼마되지 아니하여 제제諸弟의 난亂이 일어나서 태조太祖는 갈로曷魯를 총령군사總領軍事로 임명하자 그들을 토벌하여 평정하는 공을 세웠으므로 질라부迭剌部 이리근夷離菫으로 삼았다.당시, 백성들이 또한 변하여 군사들이 불을 지르거나 겁박하기도 하였으나 나날이 기세를 꺽어 승복하게 함으로서 갈로曷魯는 사방을 어루만져 모아 차지할수 있게 하였다. 기르는 가축은 더욱 번식하여 많아지고 백성들이 일하여 살림이 넉넉해지고 인구도 늘었다.

已而諸弟之亂作,太祖命曷魯總領軍事,討平之,以功為迭剌部夷離菫.時民更兵焚剽,日以抏敝,曷魯撫輯有方,畜牧益滋,民用富庶.

☞  제제諸弟의 난亂 :  요 태조 5년인 911년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둘째동생인 야율라갈耶律剌葛이 주모하여 다른 동생들인 야율질라耶律迭剌, 야율인저석耶律寅底石, 야율안단耶律安端과 함께 일으킨 난亂으로 아래 《요사본기遼史本紀》에 개략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요사본기遼史本紀》   태조太祖 5년 기사
"태조太祖 5年 경인庚寅(911년) 5월,황제皇의 동생인 라갈剌葛、질라迭剌、인저석寅底石、안단安端이 모반謀反하였다.안단安端의 처妻 점목고粘睦姑가 이를 알고 고하여 마침내 사로잡았다. 상上이 용서하지 못하여 형벌을 내리려고 이에 모든 동생들과 더불어 산山에 올라가 희생犧牲-제사祭祀때 제물로 바치는 살아있는 짐승-에 대신 형刑을 가한후 천지天地에 이를 고하고 맹세한 다음에야 그 죄罪를 사면하였다.라갈剌葛은 질라부迭剌部 이리근夷離菫에서 내쫓았고 점목고粘睦姑를 봉하여 진국부인晉國夫人으로 삼았다."
"五年 五月,皇弟剌葛、迭剌、寅底石、安端謀反.安端妻粘睦姑知之,以告,得實.上不忍加誅,乃與諸弟登山刑牲,告天地為誓而赦其罪.出剌葛為迭剌部夷離菫,封粘睦姑為晉國夫人. "




이에 오골부烏古部를 정벌하여 그들을 격파하였으며 이때부터 위엄을 크게 떨치어 두려워하므로 감히 다시 배반하려 하지 못하였다.
때에, 청하여 조의朝儀를 제정하고 건원建元, 즉 나라의 연호를 세우고 백관百官을 거느리며  상上에 존호尊號를 올리었다.
태조太祖가 이윽고 의식禮을 갖추고 책冊-칙서勅書-를  내려 갈로曷魯에게 벼슬을 내려 아로돈우월阿魯敦于越[一]로 삼았다.  「아로돈阿魯敦」이란 것은 요遼나라 말로 성명盛名(명성이 성대하다)함을 지칭한다.

[一] 갈로曷魯에게 벼슬을 내려 아로돈우월阿魯敦于越로 삼았다. 아로돈阿魯敦은 신책神冊에 적기를 원년元年 3월에 「아로돈리阿廬敦里」라 지었는데 거란어契丹語로 말뜻을 번역하면,한어漢語로「귀현貴顯(존귀하고 이름이 높음)」、「성명盛名(명성이 성대함)」이란 뜻이다.

乃討烏古部,破之.自是震懾,不敢復叛.乃請制朝儀、建元,率百官上尊號.太祖既備禮受冊,拜曷魯為阿魯敦于越[一].「阿魯敦」者,遼言盛名也.

☞ 조의朝儀 : 나라에서 만들어 제정한 조정朝廷의 의식儀式
☞ 아로돈우월阿魯敦于越 :  풀어보면  ‘존귀尊貴하고 현명顯한 우월于越’ 이 된다.
《요사遼史》 권卷 百十六 「국어해國語解/제기帝紀」의 태조기太祖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언급이 있다.  여기에 보다 명확히「 아로돈우월阿魯敦于越」의 관직을 설명해준다.
[국어해國語解의 해당원문]  “阿廬敦里一名阿魯敦.貴顯名.遼于越官兼此者,惟曷魯耳.”
<풀이>
“아로돈리阿廬敦里는 일명一名 아로돈阿魯敦이라 한다.귀현貴顯함을 이름한다.
요遼 우월관于越官중에 이 관직을 겸직한 자者는 오로지,갈로曷魯뿐이었다.“



이후에도 태조太祖가 서남제이西南諸夷를 정벌할 때 수차례에 걸쳐 선봉前鋒을 하였다.
신책神冊 2년,유주幽州로 다가갈때 종군하여 당唐 절도사節度使 주덕위周德威를 가한주可汗州 서西쪽에서 막고 더불어 싸워 그 군대軍隊를 격파하고 유주幽州에 도달하여 포위하였다.  아직 물리치지 못했지만, 태조太祖가 날씨가 더운 계절이므로 군사를 나누어서 갈로曷魯와 노국용盧國用에게 그곳에 머무르며 지키도록 하였는데 갑자기 (적의) 구원병이 잇달아 이르러서 갈로曷魯등이 군사가 적고 원병이 없으므로 퇴각하였다.

後太祖伐西南諸夷,數為前鋒.神冊二年,從逼幽州,與唐節度使周德威拒戰可汗州西,敗其軍,遂圍幽州,未下.太祖以時暑班師,留曷魯與盧國用守之.俄而救兵繼至,曷魯等以軍少無援,退.



신책神冊 3년 7월,황도皇都가 이윽고 정비되어서 군신群臣이 연회를 열고 낙성식落成式을 하였다.
이해에 갈로曷魯가 병을 얻어 훙서薨逝하니 나이 47세로 생을 마쳐 장사지냈다.
그 무덤에 이름을 하사하고 보답하여 위로잔치를 베풀어 주었고 그 산山-또는 분묘-을 우월곡于越峪이라 이르고 조서를 내려 입석기공立石紀功, 즉 비석을 세워 공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청녕清寧연간에,명命을 내려 상경上京에 사당祠을 세우게 하였다.
처음, 갈로曷魯의 병이 위독하여 태조太祖가 임하여 보더니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갈로曷魯가 말하길, 「폐하陛下의 성덕이 관인寬仁-너그럽고 인자-하니 무리들이 기르고 모두 순응할 것이라 제업帝業이 높이 창성할 것입니다.  신은 이미 특별한 은혜와 예우를 입었으니 비록 눈을 감을지라도 한이 없습니다. 생각건대 질라부迭剌部에 대한 의견이 갈라져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니 빨리 그것을 결정하기를 원하옵니다. 」
훙서薨逝하기에 이르러 태조太祖가 눈물을 흘리며 이르길,
「 사람이 (죽어) 갈라서니, 그대는 3번을 五-제위-에 오르도록 해 나아가게 했건만,그대의 지략이 멸하여 사라지니 도움을 얻지 못하겠구려!」라고 하였다.
후에 태조太祖 21년 공신功臣 각각을 헤아려 지위를 갖게될때 갈로曷魯를 심운心云으로 삼았다.
그 아들로서 척라惕剌、살라撒剌,구불사俱不仕가 있다.

三年七月,皇都既成,燕群臣以落之.曷魯是日得疾薨,年四十七.既葬,賜名其阡宴答,山曰于越峪,詔立石紀功.清寧間,命立祠上京.
初,曷魯病革,太祖臨視,問所欲言.曷魯曰:「陛下聖德寬仁,群生咸遂,帝業隆興.臣既蒙寵遇,雖瞑目無憾.惟析迭刺部議未決,願亟行之.」
及薨,太祖流涕曰:「斯人若登三五載,吾謀蔑不濟矣!」
後太祖二十一功臣,各有所擬,以曷魯為心云.子惕剌、撒剌,俱不仕.

☞ 훙서薨逝 : 임금이나 왕족王族ㆍ높은 귀족貴族등을 높이어 그 '죽음'을 이르는 말



논하여 이른다.
「 갈로曷魯는 폐부지친肺腑之親-황실의 가까운 지친-으로서 유악帷幄의 임무寄를 맡았는데 그 말言은 시귀蓍龜와 같이 앞을 내다보았으며
그 지략謀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니 산무유책算無遺策-계책이 조그마한 빈틈조차 없음-이라 이름이 옳지 않겠는가 !
그 군신君臣이 서로 만남에 있어 성誠으로 대하였으니,오한吳漢의 광무光武에 대한 것과 가깝지 않겠는가?
임금夫이 신임하여 그의 하고자하는 바를 들어 맡기게 하였으니 지혜롭다 할 것이요. 태조太祖도 이를 가졌다 할 것이다.
옛말에 이르기를,오직 성인聖人이 성인聖人을 알아보며 오직 현인賢人이 현인賢人을 알아본다하였으니
이 말이 이것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論曰:「葛魯以肺腑之親,任帷幄之寄, 言如蓍龜,謀成戰勝,可謂算無遺策矣.其君臣相得之誠,庶吳漢之於光武歟? 夫信其所可信,智也,太祖有焉.故曰,惟聖知聖,惟賢知賢,斯近之矣.」

☞ 유악帷幄 : 유帷와 악幄은 모두 군대의 진영陣營에 쓰이는 막이며 유악帷幄은 모신謀臣 즉 참모參謀를 이르거나 또는 기밀機密을 의논議論하는 곳, 즉 참모부參謀部를 말한다.
☞ 시귀蓍龜 :
시蓍는 보통 점을 치는 댓가지인 점대, 바로 서죽筮竹이나 시초蓍草를 이르는데 원래 고대에는 시초蓍草란 일명 톱풀이라 이르는 빳빳한 다년생 풀나무로 점占을 쳐서 길흉을 보았으나 감숙성등의 서북의 추운 고원지대에서만 자생하여 귀하므로 후대에는 대나무로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원래, 시蓍란 시초점蓍草占을 이르는 것이다.
귀龜는 거북의 껍질을 이르므로 거북껍질을 불에 구워 갈라진 금을 보고 길흉을 점친다.
이 둘을 합친 시귀蓍龜란 시초점蓍草占과 거북점龜占을 합하여 이르는 것으로 고대에는 모든 중요한 사안에 대해 대신들과 백성들에 상의하고 논하고 물어 결정했을 뿐만이 아니라 꼭 마지막에 점占을 치어 길흉화복을 보아 결정하였으므로 시귀蓍龜로 얻어진 점占은 현대로 보면 공신력있는 국제기구나 경제연구소의 Report처럼 왕과 백성들과 신료를 막론하고 매우 신뢰와 존중을 받았다.
심지어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에도 견식과 도량이 넓어 혜박하고 현명한 이를 시귀蓍龜에 비유할 정도로 관용어가 되었으며 세종대왕조차도 황희를 시귀蓍龜로 비유하며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시초점에 대해 자세히 알고싶으시면 아래 뉴스기사를 참조하시면 도움이 되실것입니다.
http://news.nate.com/view/20070907n04746


Written by 구리넷[九黎Net]  솟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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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송 (2009-10-17 20:32:34)  
솟대님/

좋은 자료 소개 잘 보았습니다. 번역하느라 애쓰셨습니다. 저도 요사이 요사를 번역하고 있는데, 같이 공부하는 입장이니 제 생각에 솟대님의 해석오류라고 생각되는 것 중, 문맥의 흐름이 맞지 않는 중요한 몇 가지만 달아 봅니다.
아래 몇 가지만 교정하면 전문을 해석하는데 큰 문제는 없으리라 봅니다.

먼저, 과문인지 모르나, 사서에서 신하를 뛰어난 옛 임금의 공적에 견주어 기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관이 그렇게 기록하는 자체가 대역죄로 몰릴 수 있는 금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하인 야율갈로를 임금인 후한 광무제에 비유하였다는 문장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其君臣相得之誠,庶吳漢之於光武歟? 군신이 서로 정성으로 대하니 이것은 오한(吳漢:광무제 당시의 대장군)과 광무제의 관계와 비슷하지 않겠는가?
즉, 야율갈로는 대장군 오한, 태조는 광무제에 비유한 것입니다.

또 從父釋魯奇之曰에서 종부(從父)는 백부와 숙부를 가르키는 통칭이고, 석로(釋魯)는 태조의 백부로서 당시 요련씨 부족연맹의 수령이었습니다. 즉, 종부 석로가 태조와 갈로의 뛰어남에 대하여 말한 장면이고.
撻馬狘沙裡 : 撻馬는 태조의 백부인 석로(釋魯)가 창설한 시위정병, 달마월사리는 시위친군의 수령임

太祖爲于越 : 태조가 于越이 되어..于越은 부족 수령을 말한 것이고,
欲命曷魯爲迭刺部夷離菫.辭曰:「賊在君側,未敢遠去.: 이 부분은 “태조가 갈로를 질라부 이리근으로 임명하려고 하자. 갈로가 사양하여 말하기를, 도적이 임금의 곁에 있는데, 임금 곁을 떠나 감히 멀리 갈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聞於越之生也 : 어월(於越:于越과 같음)님의 탄생에 대해 들었는데....
昔者於越伯父釋魯嘗曰 : 예전에 어월님의 백부 석로님이 일찍이 말씀하시길..
“阿廬敦里一名阿魯敦. 貴顯名.遼于越官兼此者,惟曷魯耳.” : 아로돈리. 일명 아로돈은 귀하고 뛰어난 자에 붙이는 이름인데, 요나라에서 우월(于越)의 직위에 있던 자 중에서 이러한 이름을 겸한 자는 오직 갈로뿐이었다.“

솟대님의 열정적인 게시물 계속 기대됩니다.
솟대 (2009-10-17 22:13:19)  
선생님 좋은 지적 감사올립니다.
접하지 못해 들어보지 못한 인물이름등 고유명사가 가장 어려운 부분의 하나인 것 같은데 집어주시니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말씀해주신 종부從父나 오한吳漢나 우월于越은 정정토록 하겠습니다.
요대의 관직이나 인명등 견문이 짧은 탓인 것 같습니다. 애써 시간내주셔 교정해주셔 거듭 감사올립니다. ^^

한가지 혼동되어 의문이 드는 부분은 갈로의 조부의 이름이 열전은 갑마갈匣馬葛이라 하는데 태조와 갈로의 증조부인 야율살랄덕의 아들중 태조의 할아버지인 균덕실의 형은 야율숙라耶律叔剌 와 야율첩라耶律帖剌 둘 뿐이 아닌 가하는데 이름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백송 (2009-10-18 20:36:29)  
솟대님/
태조와 야율갈로의 계보에 대한 연구는 일찍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솟대님의 의문제기에 따라 찾아보니 요사 표4에 황족표가 있고, 교감기에는 야율첩라가 갑마갈이라고 되어 있군요.
六院夷離菫房帖剌。夷離菫罨古只。
于越轄底。迭里特。
六院部舍利房褭古直。不知世次:北院夷離菫斜涅赤。姪右皮室詳穩老古。大王頗德。
政事令撻烈。
北院大王曷魯。〔三〕南院大王吾也。
簡獻皇帝兄匣馬葛。〔四〕遙輦可汗時,本部夷離菫偶思。阿魯敦于越曷魯。惕剌。撒剌。
太師斜軫。小將軍狗兒。

校勘記
〔四〕六院夷離菫房帖剌及簡獻皇帝兄匣馬葛考異,帖剌、蒲古只、匣馬葛為一人三名。此分帖剌、匣馬葛為二,誤。

중국국학망 요사 인용
솟대 (2009-10-18 21:01:07)  
인명이나 지명등이 낯설은 점이라든지 번역이 잘못된 점을 새로이 추가 정정하였습니다.
혹여라도, 갖다 활용하실 분께서는 새로 교정한 내용을 참조하셨으면 합니다.

백송선생님 감사합니다. 갑마갈등에 대해서는 1인에 대한 여러 이칭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은 것 같습니다.
힘들게 교정해주셔서 애로를 덜하며 교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 거듭 감사올립니다.
부족하거나 풀이에 있어 미흡한 점이 여러 곳이 있어서 부분적으로 보완을 마저 하고 그밖에 관련되어 인용되는 인물등에 대해서 추가로 주석등을 첨부하였으니 선생님께도 작은 도움이라도 되셨으면 기쁘겠습니다.
백송 (2009-10-19 09:35:50)  
솟대님
고맙습니다.
덕분에 저의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완순 (2009-10-19 15:36:43)  
솟대 님 수고하셨습니다.

북방민족사는 그 언어가 우리와 사뭇 달라져서 해석하기가 만만치 않고
많은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번역하고 역사의 맥을 캐시려하는 솟대 님의 열정과 노력에 감사를 드립니다.


요사 권73의 <야율갈로(耶律曷魯)>전을 해석하심은 이러한 면에서
매우 의의가 크다 할 것입니다.

야율갈로(耶律曷魯)는 사고전서본에는
야율혁로(耶律赫嚕)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북방의 언어를 한자로 음차하다 보니 생긴 것이며
청나라 때 야율혁로(耶律赫嚕)로 통일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혁로(赫嚕) 또는 갈로(曷魯)는 만주어 Herr(허르) 또는 Helu(허루)를 음차한 것이며
합록(合禄)이라 쓰기도 하였고 합로(合魯)로 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Herr(허르) 또는 Helu(허루)는 만주어로 수레바퀴(車輻)를 나타냅니다.
수레바퀴를 보면 바큇살이 중앙의 한 곳으로 집중되어 있는데
응용하여 강이나 물이 한 곳으로 모여드는 곳도 Herr(허르) 또는 Helu(허루)라 합니다.

이를 통하여 보면 거란의 중심지는
수레바큇살 또는 부챗살처럼 모여드는 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