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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한국 역사책

심당전서 단서대강 조선기 제15세 흘달 단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8.

제15세 단군왕검 흘달 우제

虞帝諱屹達武帝太子也. 元年己卯在位六十一年.
우제의 이름은 흘달이고 무제의 태자이다. 원년은 기묘년으로 재위기간은 61년이다.

己卯元年. 冊長子古弗爲太子, 命楊武爲首相, 殷成子爲上將.
기묘(BC1782) 원년. 큰아들 고불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양무를 수상이 되도록 하고 은성자를 상장이 되도록 명령하였다.

 

甲申六年. 夏主桀囚湯于夏臺旣而釋之帝聞之曰不納直言其國必將危.

갑신(BC1777) 6년. 夏國(하국)의 주인 걸이 탕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이미 석방했다는 말을 帝(제)가 듣고 말씀하시기를 “그 나라를 장차 반드시 위태로울 것이다”라고 하셨다.

 

丁亥九年. 按察州郡勸諭孝悌敎化大行.

정해(BC1774) 9년. 주와 군을 돌아보고 효와 공경을 권유하고 크게 행할 것을 가르치셨다.

 

乙丑十一年. 殷人伐夏, 桀遣使請援, 帝遣龍加來良, 率九桓之師以助戰事援夏討殷, 湯遣使謝罪, 乃命還軍, 來良班師. 時九桓之中畎族請留西岐之地, 來良許之遂入于岐. 時桀失德日甚, 謨伐桀之計群盜竝起

을축(BC1772) 11년. 은국(殷國) 사람들이 하국(夏國)을 벌하였다. 걸(桀)이 사신을 보내 도와줄 것을 청하니 제(帝)께서 룡가(龍加) 래량(來良)을 보내 구환(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하국이 은국을 토벌하는 것을 도우라고 하였다. 탕은 사신을 보내 용서를 구하니 이내 군사를 돌리라고 명하셨다. 래량은 군대를 반으로 줄였다. 이때에 구환 중에 견족(畎族)들이 서쪽의 기(岐) 땅에 머물 것을 청하니 래량이 이를 허락하고 드디어 기의 땅으로 들어갔다. 이때에 걸은 덕을 잃음이 날로 심해지니 걸을 정벌하려고 도모하는 무리들이 아울러 일어났다.

 

辛卯十三年. 立學館于州郡養賢才. 遼陽人從中國而來言曰, 夏主桀無道其國將亡矣. 帝曰, 夏國之將亡吾已知之也. 果不幾年商侯湯滅之.

신묘(BC1770) 13년. 학관(學館)을 주와 군에 세우고 어진 인재를 키웠다. 요양 사람들이 중국으로부터 망명하며 말하기를 “하국의 주인 걸은 도가 없어 그 나라를 장차 멸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帝)께서 말씀하시기를 “하국의 멸망은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하셨다. 말한대로 몇 년 안되어 상(商)의 제후 탕이 하국을 멸망시켰다.

 

壬辰十四年. 王磨玉【北斗之孫】以沙爲器分布諸州以備日用. 商侯湯欲伐桀, 桀怒遣使請援, 帝命邑借來良率九桓之師伐商曰君雖無道面廷諍可也以臣伐君義不可赦也湯又謝罪

임진(BC1769) 14년. 왕마옥【왕북두의 자손이다】이 모래로 그릇을 만들어 모든 주에 나누어 배포하여 일상 생활에 쓰도록 하였다. 商(상국)의 제후 탕이 걸을 정벌하려고 하자 걸은 화가나서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다. 제(帝)가 읍차 來良(래량)으로 하여금 구환은 군대를 이끌고 상(商)을 정벌하며 말하기를 “임금이 비록 도가 없을지라도 조정을 향하여 송사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벌하려는 의도는 용서받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니 탕이 사죄하였다.

 

癸巳十五年. 帝曰夏桀暴虐無道自取滅亡惟諸司儀監于夏益加勉勵焉.

계사(BC1768) 15년. 제(帝)가 말하기를 “하국의 걸이 포학하고 무도하여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으니 오직 모든 司儀(사의)들은 하국을 귀감으로 삼아 더욱 부지런히 힘쓰기를 더하라”고 하셨다.

 

甲午十六年. 帝下詔, 定州縣立分權之制, 分官僚, 任立法司法行政, 而使各守其職, 官無兼職之苦. 政無濫權之弊, 民無移鄕之心, 各安其行業而無犯法者. 立法政學院選材登用. 時湯婁犯禁法, 帝命臣智于亮率軍合樂浪兵,進據關中鄕西邠岐之地而設官制立國于岐山之下居之是爲周西伯之祖也.

갑오(BC1767) 16년. 帝(제)께서 조서를 내려 주와 현을 정하여 권력을 나누는 제도를 세우시고 관료들을 입법과 사법과 행정으로 나누시고 각기 그 관직을 지키어 관리들이 겸직의 고통을 없게 하였다. 정치에는 월권의 폐단이 없었고 백성들은 이사갈 마음이 없었으며 각기 그 업을 행하는데 편안하여 범법자가 없었다. 法政學院(법정학원)을 세워 인재를 뽑아 등용하였다. 이때에 탕이 자주 금지한 법을 범하였으므로 帝(제)가 臣智(신지) 于亮(우량)에게 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낙랑의 군사와 합하여 關中鄕(관중향)의 서쪽 邠(빈)과 岐(기)의 땅에 나아가 웅거하여 관제를 세우고 나라를 岐山(기산)의 아래에 세우고 사니 이것이 周(주국)의 西伯(서백)의 조상이다.

 

乙未十七年. 有爲子謂伊尹曰.., 擇才德兼備之主輔佐善治. 有爲子素有經濟之材名聞天下, 伊尹當受學於有爲子才德兼備, 而至是爲成湯之佐. 是時湯不貢, 桀遣使復乞援兵, 帝却之曰.., 無道之君也不許. 湯乃興師遷桀于南巢, 從伊尹之言卽王位. 有爲子聞之曰.., 此亦順天應人, 非伊尹不可能也. 時夏國臣民之不服商朝者多來帝命厚待恤之

을미(BC1766) 17년. 유위자가 이윤에게 말하기를 “재주와 덕망을 갖춘자를 선택하여 네 주인을 보좌하여 좋은 정치를 하라”고 하였다. 유위자는 본디 경제에 재주가 있어 이름을 천하에 날리었다. 이윤은 당연히 유위자에게서 학문을 배워 재덕을 겸비하였고 이때에 이르러 湯의 보좌가 되었다. 이때에 탕이 걸에게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걸은 우리에게 구원병을 애걸하였는데 임금께서 물리치며 말씀하시기를 “도리가 없는 왕이구나”라고 하시며 허락하지 않으시었다. 탕은 이내 병사를 일으켜 걸을 남소(南巢)로 옮기고 이윤의 말을 따라 왕위에 올랐다. 유위자가 이를 듣고 말하기를 “이것도 역시 하늘에 순종하고 사람에 응답하는 것이니 이윤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상(商)에 복종하지 않는 백성과 신하들 다수가 망명해 오니 제(帝)께서 후하게 대하고 구휼하라고 명령하셨다.

 

戊戌二十年. 帝命國中多設蘇塗植天指花. 使未婚子弟讀書習射號曰國子郞出行頭揷天指花故時人稱之曰天指花郞.

무술(BC1763) 20년. 제(帝)께서 명하여 나라 안에 소도(蘇塗)를 건설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도록 하였다. 결혼하지 않은 자제들에게는 책을 읽고 활쏘기를 연습하도록 하였으니 이를 국자랑(國子郞)이라고 하며 이들은 밖으로 다닐때에 머리에 천지화를 꽂고다녔으니 옛날에 이들을 일컬어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 하였다.

 

壬寅二十四年. 商主湯遣使始來入朝.

임인(BC1759) 24년. 상(商)의 주인 탕이 사신을 보내 처음으로 입조하였다.

 

癸卯二十五年. 夏國遺臣寒爵遣人以恢復故國請援兵, 帝曰是亦天意非人力所就. 帝曰商湯修仁政有德之君也乃遣使締好通商.

계묘(BC1758) 25년. 夏國(하국)의 신하였던 寒爵(한작)이 사람을 보내 옛날나라를 회복할 수 있도록 군사를 청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 역시 하늘의 뜻이요 사람이 힘으로 이루는 바가 아니라고 하셨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商國(상국) 탕은 어진 정치를 닦고 덕이 있는 왕이라고 하시면서 사신을 보내 商國(상국)과 우호조약을 맺었다.

 

甲辰二十六年. 帝問於有爲子曰.., 道者何也. 請問其詳先生爲我說之. 有爲子對曰.., 道者無對而無名也强名曰道是以道可道無常道名可名無常名盖自天地之大至微塵之小無非包含其道也是故天地有天地之道 人生有人倫之道萬物有萬物之道各有業務悉皆因其道而存於宇宙也 無形有實而成道者神也 親之而不見聽之而不聞然體之於物而不可遺者也 天地雖大不離其內秋毫雖小能容其大昭昭生於冥冥有形生於無形精神生於道形本生於精則萬物成形而互生故九竅胎生八竅卵生七竅孵生細胞孔多者根生也其來也有生命而無跡象其徃也 遺殘質而無定涯出入無門而充滿乎宇宙者一眞氣也廣大無限之空間曰宇 永久無窮之時間曰宙 眞氣充滿其空間循環其時間周流無滯輪回不息其進化之肰每由於密度之變化而生焉 密度則有計量者無計量者存焉 此兩者判爲區別而各成其無限之小小體則此小小體又經由其無數凝集之中心而從其感性因其傾向乃成實體也 (이하 황당기사 원문입력과 번역 생략. 단기고사 참조)

 

戊申三十年. 置勸農院敎以稼穡之法

무신(BC1753) 30년. 권농원을 설치하고 심고 거두는 법을 가르쳤다.

 

庚戌三十二年. 置永明祠奉安廣成子蒲衣子祀之.

경술(BC1751) 32년. 영명사를 설치하여 광성자와 포의자를 봉안하고 제사지냈다.

 

甲寅三十六年. 建孝烈祠奉安小連大連祀之.

갑인(BC1747) 36년. 효렬사를 건설하고 소련과 대련을 봉안하여 제사지냈다.

 

丙寅四十八年. 時和年豊國泰民安建太平楼于南門外會群臣諸侯慶賀.

병인(BC1735) 48년. 때에 화합하여 풍년이 들고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태평루를 남문에 건설하고 무리와 신하와 제후들을 모이게 하고 경하하였다.

 

丁卯四十九年. 帝下詔曰.., 安不忘危, 樂不忘苦. 人無遠慮, 必有近憂事, 無豫備, 必有後困.一粥一飯當思來處之不易, 一絲一粒常念物力之甚艱. 勤儉節約爲國家之大本朕與臣民一心勉行.

정묘(BC1734) 49년. 임금께서 조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편안할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말고 즐거울때에 괴로움일 잊지 말라. 사람이 먼날을 염려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날에 우환이 있으며 예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훗날에 곤고함이 있을 것이다. 한끼의 죽도 당연히 쉽게 나오지 않음을 생각해야 하며 실 한올과 한톨의 쌀도 만들기까지 심한 어려움이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근검절약이 국가의 큰 근본이 되는 것이므로 나는 신하와 백성들과 더불어 한마음으로 힘써서 해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戊辰五十年. 五星取婁.

무진(BC1733) 50년. 5개의 별이 루성(婁星) 자리에 모였다.

 

甲戌五十六年. 黃鶴來栖于苑松. 九月有爲子卒, 帝慟哭以國禮庀葬.

갑술(BC1727) 56년. 누런 학이 와서 원송(苑松)에 깃들였다. 9월에 유위자가 죽었는데 임금께서 통곡하며 나라의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己卯六十一年. 帝崩. 百姓三日禁食而哭泣不止仍釋俘囚禁殺生過歲而葬之太子古弗立是爲益帝.

기묘(BC1722) 61년에 임금께서 돌아가시었다. 백성들이 3일동안 금식하고 통곡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또한 자로잡은 포로를 풀어주고 살생을 금하였다. 해를 넘겨 장사지내고 태자[1] 고불이 즉위하니 이가 익제이다.

 

 

 

[1] 환단고기에는 牛加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