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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한국 역사책

심단전서 단서대강 조선기 제4세 부루 원제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9.

제4세 단군왕검 부루 원제

원제(元帝)는 이름이 부루(夫婁)인데 성제(聖帝)의 태자이다. 신축년(辛丑)이 원년이며 58년동안 제위에 있었다.

신축년 원년(BC2240)

신축년 원년이다. 上月(상 월) 3일에 帝(제)는 諸加(제가)와 諸侯(제후)를 이끌고 天祖(천조)와 三神(삼신)과 上帝(상제)에게 크게 제사지내고 평양에서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帝(제)는 어질고 복이 많아 재물과 큰 부와 함께 사니 백성들과 함께 산업을 다스렸다. 한 백성도 추위와 굶주림에 떨지 않았고 한 사람도 근심과 괴로움이 없었다. 존호를 받들어 칭하여 帝佺(제전)이라하고 즉위하였고 先帝(선제)의 遺志(유지)를 이어 천하를 다스렸다. 매년 봄가을에 순찰하고 國中祭天(국중제천)을 예를 다해 올렸으며, 도랑을 파고 도로를 열었다. 農桑(농상)을 흥하게 하고 목축을 권장하였으며 모든 汗(한)【諸侯(제후)의 主(주)이다】들의 선악을 감찰하며 상과 벌 주기를 매우 신중하였고 敎(교)[1]를 세워 학문을 권장하니, 문화는 크게 떨쳤고 명성이 날로 번창하였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때마다 於阿歌(어아가)를 함께 불렀으며 德(덕)을 찬양하고, 또한 朝天舞(조천무)를 지어 모두 화합했는데, 대개 감사의 의미와 희열의 말을 노래하고 춤추어서, 神人(신인)의 교화에 도달함이다.
9월에 첫째 동생 부여를 遼西(료서)에 봉하고 茫球王(망구왕)이라 하였고, 둘째 동생 부우를 東海(동해)가에 봉하고 東平王(동평왕)【혹은 東海王(동해왕)이라 하는데, 三韓(삼한)은 즉 그의 후손이다.】이라 하였고, 셋째 동생 夫蘇(부소)를 綏芬河(수분하)에 봉하여 句麗王(구려왕)이라 하였다.[2]

임인년 2년(BC2239)

정월에 大連(대련)과 小連(소련)을 불러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중요한 덕목을 물어보았다. 대련을 명하여 攝司職(섭사직)【馬加(마가)이다】이 되게 하였고, 小連(소련)은 司徒(사도)【鷹加(응가)】가 되게 하였다. 大連(대련)과 小連(소련)은 阿斯達(아사달) 사람으로 檀朝(단조)의 중신이다. 사람됨이 忠孝(충효)와 善(선)을 겸하여 있었다. 3일 喪(상) 동안에 게으르지 아니하였고 3개월간 느슨해지지 아니하였으며 1년되는 해에는 슬퍼하였고 3년되는 해에는 근심스러워 하였다. 이때부터 서로 앞다퉈 5개월간 喪(상)에 머무는 것이 영화롭다는 풍속이 되어버렸다. 이 어찌 천하의 큰 거룩함이라 할 수 없으며 그 德化(덕화)하는 流行(류행)이 소식을 전하는 빠른 자와 비교할 수 있으랴? 소련과 대련은 효도로 잘 알려져 있고 공자에게서도 보이는데 이는 동양 윤리의 원조이다.[4] 【震檀記(진단기)에서는 大連(대련)의 地方(지방)이 즉 平島(평도)[5]이라고 말한다.】

계묘년(BC2238) 3년.

9월에 帝(제)가 諸司(제사)들에게 詔令(조령)을 내리어 “국민들은 辮髮(변발)하여 머리를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도록 하며, 도량형기는 모두 관아에 기준을 두도록 하고 모시와 베의 가격이 다른 곳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백성들은 스스로 속이지 아니하고 먼 곳이든지 가까운 곳이든지 편하였으며 예의를 숭상하고 인의를 행하여 정치를 하여 나라를 생각하니 군자국이라 할만 하였다.

을사년(BC2236) 5년.

西鄙(서비)는 藍國(람국)과 이웃하여 접한 땅이다. 舜(순)이 다시 遼西(료서)에 幽州(유주)를 설치하고 遼東(료동)에 營州(영주)를 설치하였으므로, 帝(제)는 병사를 보내 이들을 정벌하고 그 무리를 모두 쫓아 국경을 碣石(갈석)의 서북에 정하였는데 모두 朝鮮(조선)의 版圖(판도)가 되었다. 이때부터 료동과 료서는 다시는 虞國(우국)의 주와 군이 설치되지 않았고 諸侯(제후)들이 와서 조공하는 자가 수십이었다. 이때에 道羅(도라)를 봉하여 불류왕(沸流王)이 되게 하였고 東武(동무)를 봉하여 卒本王(졸본왕)이 되게 하였으며 旭成(욱성)을 봉하여 沃沮侯(옥저후)가 되게 하였는데 이는 遼(료)를 정벌한 공로를 表(표)한 것이다.[6]

무신년(BC2233) 8년.

6월에 帝(제)는 下詔(하조)하여 말하기를 “忠臣(충신)과 義士(의사)와 孝子(효자)와 烈婦(열부)와 賢行(현행)을 조사하여 산 자는 상을 주고 죽은 자는 旌恤(정휼)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 煢獨(경독)끼리 서로 도와서 患難(환난)이 憂樂(우락)처럼 되었다.

기유년(BC2232) 9년.

전국의 版圖(판도) 境界(경계)를 정하도록 명령하였다. 동쪽으로는 滄海(창해)에서 끝나고 남쪽으로는 閻洋(염양)에 미쳤으며 서쪽으로는 碣石(갈석)과 접하고 북쪽으로는 島拉列(도랍렬)【지금의 시베리아이다.】에 이른다. 제후를 分封(분봉)하였는데 큰 민족은 9部(부)이고 작은 민족은 14部(부)인데 총 영역이 전무 3,0000여리이다..

경술년(BC2231) 10년.

4월에 帝(제)는 井田法(정전법)을 마련하도록 명령하였고, 백성들이 밭을 소유하는 것을 폐지하였다. 丘井(구정)을 나누어 田結(전결)로 삼았으며[7] 백성들이 자유로이 사사로운 이익을 얻지 못하게 하였다.

임자년(BC2229) 12년.

神誌(신지)인 貴已(귀이)가 靑丘(청구) 丘井圖(구정도)를 만들어 바치었다.[8]

계축년(BC2228) 13년.

帝(제)의 성품은 聰慧(총혜)하고 仁慈(인자)하여 德化(덕화)가 八方(팔방)의 끝까지 미치고 그 덕의 광택이 널리 四海(사해)를 덮고 인륜 위로 밝으며 교화가 아래로 행하여지니 나라가 태평하여 백성이 안녕하고 집집마다 부족함이 없이 공급되며 미풍양속이 천하에 으뜸이 되었다.

무오년(BC2223) 18년.

帝(제)는 아들이 16명이었는데 큰아들 嘉勒(가륵)을 책봉하여 太子(태자)로 하였고 그 다음 15명 중에 봉국을 얻은 자가 8명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親王(친왕)이라 하였다.

갑자년(BC2217) 24년.

帝(제)는 주와 현을 親幸(친행)하여 按撫(안무)하고 賙恤(주휼)한 후에 도읍으로 돌아왔다.

병인 26년

(번역생략)

계유(BC2208) 33년

虞舜(우순)이 堯(요)를 대신하여 섭정하던 때에 禹(우)의 아버지인 鯀(곤) 을 羽山(우산)으로 귀양보냈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漢族(한족)들에게 미움이 보이었다. 그래서 禹(우)가 치수를 끝낸후에 德望(덕망)이 날로 발전하였으므로 舜(순)은 禹(우)으로 하여금 섭정을 하게 하였는데 17년되던 해에 舜(순)이 남으로 巡幸(순행)하여 蒼梧(창오)의 들에 이르렀을때에 마침내 漢人(한인)에 의하여 해를 당하였고 그 2명의 아내들은 원망스런 마음을 머금고 눈물을 潚湘(숙상)에 흘렸는데 絲竹(사죽)이 斑文(반문)이 되었다. 이내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그래서, 그의 아들 商均(상균)【어머니는 女英(녀영)이다.】은 고국인 檀朝(단 조)로 돌아와 司徒(사도)의 벼슬에 이르렀다. 때에, 蚩尤(치우)씨의 자손인 特明(특명)도 역시 크게 용감하여 본국으로 돌아와 司馬(사마)의 벼슬에 이르렀으며, 商均(상균)과 더불어 정치를 보좌하였으며 문화가 禹(우)의 조정보다 더 월등하였다.癸酉三十三年.

무인(BC2203) 38년.

邏閻連(라염련)이 아뢰기를 “신이 어느 해에 南閭(남려)의 땅으로 건너가서 梵經賓(범경빈)【婆羅門敎徒(파라문교도)이다】을 만나 그의 설명을 얻어 들었는데, 그리고 그 훔친 사상을 반복하여 정성스레 공부하였더니 원숭이 마음과 같은 번뇌와 욕정으로 어지러운 마음이 함부로 날뛰지 아니하게 하였는데 심히 近理(근리)하였습니다. 南閭(남려)의 땅에는 聖人(성인)이 생기오니, 엎드려 바라오건대 基下(기하)께서는 사신을 南閭(남려)의 땅으로 보내어 그곳의 정치와 도덕을 살피어 오게 한 후에, 그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하여 국민에게 시행되도록 한다면 이은 반드시 문명진전의 좋은 책략일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제가 말하기를 “사람의 도리에 있어서 진리는 하나이고 두 개의 점 사이에 직선도 한 개이다. 그 나라의 體(체)와 民族(민족)은 비록 서로 다를지라도 다스려 천하를 평정하는 국가를 다스리는 도리는 유일하다. 내가 일찍이 先帝(선제)에게 경계를 들었는데 말씀하시기를 ‘정성스럽게 오직 일관되게 하여야 진실로 그 중심을 잡을 수가 있다’고 하였는데[10] 하필이면 그 다른 나라의 도덕과 정치를 살펴 그것을 가감하여야 하겠는가? 새와 짐승은 육지에서 살고 물고기는 물에서 사는데 물에서 사는 것을 바꾸어 육지에서 살게하면 그 세력이 오래가지 못한다. 만약 우리나라가 다란 나라를 본받고자한다면 이 역시 우리나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신하는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무술(BC2183) 58년.

帝(제)가 죽었다. 이날에 일식이 있었으므로 누런 안개가 사방을 막고 해를 가리었다. 짐승들이 떼지어 어지럽게 울어댔으며 신하들이 슬퍼하여 가슴을 치고 뛰었고 백성들은 통곡하고 슬퍼하며 울었다. 나라사람들이 집안에 제단을 설치하여 볍씨가 꽉찬 토기를 제단위에 놓고 볏짚으로 뚜껑을 만들어 얹었는데 그 위를 夫婁壇地(부루단지)라고 하며 이것은 業神(업신)이 되며 또한 칭하기를 佺戒(전계)라 하였는데 이는 완전한 사람이 받는 戒(계)라는 뜻이며 業主嘉利(업주가리)가 되었다. 대개 사람이 일을 가짐으로 인하여 완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태자 嘉勒(가륵)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仁帝(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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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구절은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환단고기에서는 寮(료)라고 표현하였는데 여기서는 敎(교)라고 하였다.

[2] 단기고사에 나온 구절인데, 단기고사에는 부소를 구려왕으로 봉한 기록이 없다.

[3] 원문 대조 필요. 알 수 없는 글자라서 임으로 鷹으로 적었다. 广안에 曰가 위에 있고 人+子로 밑에 있다.

[4]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구절이다.

[5] 平은 干으로도 보이나 확실하지 않다.

[6] 규원사화의 구절이다. 한 가지 다른 것은 沃沮(옥저)에 봉한 사람을 仙羅(선라)라고 하였다.

[7] 田結(전결)이란 논밭의 조세인데 劃丘井爲田結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환단고기에는 劃邱井爲田結라고 하였다.

[8] 환단고기에는 七回歷과 邱井圖라고 하였다.

[9] 人의 밑에 一이 맨 위에 있고 그 다음 중간으로 又가 있고 맨 아래에 口가 있는 글자이다. 문맥상 “모두다”의 뜻을 갖는 㑒으로 하였으나 명확하지는 않다.

[10] 이는 書經(서경)에 나오는 말이다. “人心惟危道心惟微惟精惟一允執厥中”라고 舜(순)이 이야기하였는데, 이를 지금 夫婁(부루)의 先帝(선제)가 이야기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