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신라를 백제의 부용국이라고 한 이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0.

지나사서를 보면 아주 이상한 구절이 있습니다.

<북사>

或稱魏將毋丘儉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有留者, 遂爲新羅, 亦曰斯盧. 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高麗[校勘 155], 不堪戎役, 後相率歸之, 遂致强盛.

 일설에 의하면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인들은 옥저沃沮로 도망갔다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新羅를 세웠다고 한다. 신라는 斯盧라고도 한다. 그 나라는 화하·고구려·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沃沮·불내不耐·한예韓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의 임금은 본래 백제百濟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임금이 되었다. 당초에는 백제에 부용附庸하였는데,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군역軍役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와 신라에 귀화하니, 신라는 마침내 강성하여졌다.

 <수서>나 <통전>도 모두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기록이 존재하게 되었을까요?

해답은 <삼국사기>를 면밀히 검토하다보면 나옵니다.


1)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기록 王城東北當唐恩浦路曰尙州(도읍 동북쪽에 있는 당은포로가 곧 상주이다)

삼국사기 신라 지리지를 보면 신라의 도읍이었던 월성이나 금성이 어느 주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경주(慶州)라는 곳은 고려때 붙여진 이름이고 원래 신라 어느 주에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도 보이지 않습니다.

신라의 지리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신라지리지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혁거세 21년(서기전 37)에 궁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고 하였다. 파사왕 22년(101)에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 하고 혹은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는데 둘레가 1,023보(步)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으니 둘레가 1,838보였고, 또한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으니 둘레가 1,906보였으며, 또한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으니 둘레가 2,804보였다.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혁거세가 처음 도읍한 곳은 금성(金城)입니다.

그리고 후에 월성(月城)으로 옮깁니다.

임금이 많이 거처한 곳은 금성이 아니라 월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 신라지리를 보면....

신라 경계 안에 세 주(州)를 설치하였으니, 도읍[王城] 동북쪽의 당은포로(唐恩浦路)에 해당하는 곳을 상주(尙州)라 하고, 도읍 남쪽을 양주(良州)라 하고, 도읍의 서쪽을 강주(康州)라고 하였다.

 재미있는 기록이 보이죠.

도읍의 동북쪽에 상주(尙州)가  있다고 합니다.

상주는 현재 경상북도 서북쪽에 있습니다.

그러니 신라의 도읍은 현재 경주가 아니라 상주의 서남쪽에 있었던 것입니다.

상주의 서남쪽이 금성(金城)일 가능성이 있는데 제 글을 계속 읽다보면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계속 신라지리를 보죠.

 신라 영토의 넓이가 이처럼 매우 컸었다. 그러나 신라가 쇠퇴하게 되어서는, 정사가 거칠고 백성이 흩어져서 강토가 날로 줄어들다가, 마지막 왕 김부(金傅)가 나라를 들어 고려 태조에게 귀의하자 그 나라를 경주(慶州)로 삼았다.

현재 경주라는 곳은 김부(金傅)가 도읍했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인용한 신라지리지에 첫 도읍이 금성이고 후에 월성으로 옮겼으며 후대의 임금들은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고 했으므로

현재의 경주는 월성이었다라는 것을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2) 사로(斯盧)의 이해

 신라의 초기 국호는 서나벌(徐那伐) 혹은 사로(斯盧) 혹은 사라(斯羅)이었고 후에 계림(鷄林)으로 고쳤다가 신라(新羅)가 됩니다.

그리고 도읍도 금성과 월성 등 두 군데가 존재합니다.

현재 사학계에서는 사로국의 위치나 계림국의 위치를 비슷한 곳으로 보고 금성도 월성과 비슷한 곳으로 보지만...

사로국은 상주이며 계림국은 경주입니다.

왜그런지 살펴보면....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遺民)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고,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하였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인데, 이것이 진한(辰韓) 6부(六部)가 되었다. 고허촌의 우두머리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었으므로 가서 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만 있었다. 그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으므로 거두어서 길렀다.

나이가 10여 세에 이르자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夙成)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비하고 기이하였으므로 그를 받들어 존경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 진한 사람들[辰人]은 박[瓠]을 박(朴)이라 일컬었는데, 처음에 큰 알이 마치 박과 같았던 까닭에 박(朴)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辰言]로 왕을 뜻한다.(혹은 존귀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라고도 하였다).

 박혁거세가 임금이 되는 기록이죠. 고허촌의 소벌공이 박혁거세를 발견하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는 기록입니다.

위에 나온 6부는 유리니사금때 이름이 바뀝니다.

 9년(서기 32) 봄에 6부의 이름을 바꾸고 그에 따라 성을 내려주었다. 양산부를 양부(梁部)로 고치고 성은 이(李)로 하였고, 고허부를 사량부(沙梁部)로 고치고 성은 최(崔), 대수부를 점량부(漸梁部)<또는 모량부(牟梁部)라고도 하였다.>로 고치고 성은 손(孫), 간진부를 본피부(本彼部)로 고치고 성은 정(鄭), 가리부를 한기부(漢祇部)로 고치고 성은 배(裵), 명활부를 습비부(習比部)로 고치고 성은 설(薛)로 하였다.

 그런데 신채호 선생은 위 기록은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합니다. 즉, 고허부를 사량부로 고친 것이 아니라 원래 이름이 사량부였는데 후대에 고허부로 고쳤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사량부는 한자의 음을 빌어 쓴 것이나 고허부를 그렇지 않기 때문이죠.

 따라서 소벌공이 박혁거세를 뽑아 임금으로 삼았던 곳은 사량부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량부가 아니라 사량촌((沙梁村)입니다.

村이란 옛 우리말로 '벌' 혹은 '불'이죠.

따라서 사량촌의 옛말을 추측하여보면 "사량벌"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지 않습니까?

이곳이 바로 "서나벌"인 것입니다.

즉, 소벌공이 박혁거세를 발견하여 임금으로 삼았다던 사량촌의 옛말인 "사량벌(沙梁伐)"이 곳 "서나벌(徐那伐)"이고 뒷글자 "벌"을 생략한 이름인 "사량"의 전음이 사로(斯盧) 즉 "사라(斯羅)"입니다. 그리고 이곳의 도읍이 새성(金城, 새의 ㅏ는 아래아)입니다. 새성(金城)은 金씨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성입니다.

박혁거세가 세웠다던 서나벌은 사량부에서 시작했던 것입니다.

 

 

3) 계림(鷄林)의 이해

 계림(鷄林)이란 곳도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죠. 삼국사기에 닭의 상서로움이 있어 계림이라고 하였다 기록하였으나 우리 민속에 닭은 그렇게 귀한 동물이 아닙니다. 따라서 계림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永平>三年庚申(一云<中元>六年, 誤矣. <中元>盡二年而已)八月四日, <瓠公>夜行月城西里, 見大光明於<始林>中(一作<鳩林>), 有紫雲從天垂地, 雲中有黃金櫃, 掛於樹枝, 光自櫃出, 亦有白雞鳴於樹下. 以狀聞於王, 駕幸其林, 開櫃有童男, 臥而卽起, 如<赫居世>之故事. 故因其言, 以「閼智」名之, 「閼智」卽鄕言小兒之稱也.

영평 3년(60년)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 서리를 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구림이라고도 한다)가지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하늘로부터 땅에 뻗치어 그 구름 속에 황금의 궤가 나무가지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큰 광명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보고 호공이 그대로 이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친히 숲에 나가서 그 궤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누웠다가 곧 일 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의 고사와 같으므로 그 아이를 알지라 이름하였다. 알지는우리 말로 아이를 뜻하는 말이다.

김알지를 발견한 기록입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김알지의 뜻이 "아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 고대 신앙인 日月星 신앙과 연관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아이를 뜻하는 "알지"란 日에 미치지 못하는 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鷄란 우리말로 "닭"입니다. "닭"이라 쓰고는 "달"이라고 읽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

뒤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말 같은 "이"가 나오면 "달기"라고 발음됩니다.

그리고 林이란 "불" 혹은 "벌"과 같이 발음을 것입니다. "수풀"을 차음한 것이죠.

 鷄林이란 따라서 "달불"이란 말이며 계림의 수도가 바로 月城인 곳입니다.

 

 4) 계림(鷄林)이 사라(斯羅)를 점령하다

 지금까지의 해석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역사는 사라(斯羅)와 계림(鷄林)의 역사를 합본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박씨와 석씨의 역사는 진한에 속하였던 사라(斯羅)의 역사이며 김씨의 역사는 계림(鷄林)의 역사입니다.

이렇게 각각 두 나라가 존재하였었는데, 계림이 사라를 공격하여 하나의 나라가 되어 버리는 것을 의심케 하는 삼국사기 기록이 보입니다.

 尙州沾解王時取沙伐國爲州

상주는 첨해왕대에 사벌국을 취하여 주로 삼은 것이다.

 여기 사벌국(沙伐國)이란 사량벌국(沙梁伐國)을 말합는 것인데 아주 의미 심장한 구절입니다.

신라의 초기 역사가 서나벌로부터 시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서나벌은 사량부이고 이곳이 바로 사량벌국 즉 사벌국이며 첨해왕때 점령하여 상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죠.

즉, 신라지리지에 王城東北當唐恩浦路曰尙州라는 구절의 王城이란 계림의 수도 월성이 아니라 서나벌(사량부)의 수도 금성의 동북쪽을 상주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또한 최치원전에 보면

 崔致遠字孤雲王京沙梁部人也

최치원은 왕경王京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라고 하였으니 사량부가 경주가 아니라 王城東北當唐恩浦路曰尙州라는 구절에 의거하여 상주라는 것도 분명해지며 사량부가 한때 왕경(王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림이 사라를 점령한 때가 언제냐? 이때는 관구검이 공손씨를 점령하여 멸망시키고 韓(진한)을 멸망시킨 때입니다.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중략...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校勘 130] [註021]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경초 연간(AD237~239)에 명제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두 군(郡)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에게는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중략... 부종사 오림이 낙랑(樂浪)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辰韓) 8국을 분할하여 낙랑(樂浪)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마한의) 신지(臣智)는 (진)한을 격분하게 하여 (진한이)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이 때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흔이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하였으나 이군(二郡)은 마침내 (진)한을 멸하였다.

 즉, AD239년을 기점으로 진한은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한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사라국은 그 힘이 미약해졌던 것이죠.

이것을 기회로 삼아 계림은 사로를 공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沾解王在位 沙梁伐國舊屬我 忽背而歸百濟 于老將兵往討滅之

첨해왕재위때에 사량벌국이 옛날에 신라에 속하였다가 홀연히 백제로 돌아가니 석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멸하였다.

 첨해왕은 AD237년에 즉위하였습니다. 석우로는 석우로는 AD239년에 죽습니다. 아마도 사량벌국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해봄직하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실로 사량벌국이 옛날에 신라에 속하였냐는 것입니다.

동사강목에 보면...

 첨해왕 3년(AD239년) 봄 계림이 사량벌국(沙梁伐國)을 멸하였다.

석우로(昔于老)를 보내어 토벌하였는데, 그 나라가 백제에도 복속하였기 때문이다.
유리왕(儒理王) 이래 이때까지 여러 소국을 병합한 것이 모두 12개 국이니, 이로부터 나라가 더욱 강성해졌다.

 백제에 속하였던 사량벌국을 239년에 토벌하고 드디어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사량벌국이 얼마나 컸던 나라이기에 이 나라를 멸하고 강국이 되었을까요?

왜냐하면 사량벌국이 바로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사로국이며 이것이 바로 진한이라는 말입니다.

 즉, 계림은 239년이 관구검이 공손씨를 멸하고 진한을 멸하였을때를 기회로 삼아 진한을 점령하고 비로서 큰 나라가 되었다는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의 추론이 맞다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라의 왕력은 모두 거짓입니다.
박혁거세거서간에서 시작한 박씨의 왕력은 모두 사로국의 왕력이며 사량벌국 멸망이전의 역사입니다.
벌휴이사금에서 경순왕까지의 왕력은 모두 석탈해를 시조로하는 계림국의 왕력이며 사량벌국 멸망 이후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박혁거세거서간에서 시작한 박씨의 사로국 왕력은 사량벌국이 멸망할때까지인데 아달라이사금에서 끝났으며,
석탈해에서 시작한 석씨의 왕력은 신라라는 하나의 나라를 만들다보니 그 연대가 매우 이상하고,
김알지에서 내물마립간까지의 왕력을 많이 생략되어 그 중간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량벌국을 멸망시킨 석우로의 연대도 좀 이상하게 되었죠.
김부식은 이 모든 것을 숨기기 위하여 서나벌과 사량벌이 다른 것처럼 썼으며
금성과 월성이 어느 州에 속하였는지 기록하지 않았고...
알게모르게 사량부가 상주라는 것과 王城의 동북이 바로 상주라는 것만 의도하지 않았지만 포함시켰죠.

 즉,

"서나벌=사로국=사량벌국=사벌국"이고 이는 진한의 역사이며 박씨와 석씨의 역사입니다. 도읍은 새성(金城, 쇠성)이죠.

"계림(鷄林, 달벌)"은 김알지 계통의 역사이고 진한이 와해된 틈을 노려 서나벌을 점령하고 신라의 역사를 새로쓰게 되는 것입니다. 도읍은 월성(月城, 달성)이죠.

 과연 사량벌국이 계림에 속하였다가 백제에 속하였는지, 아니면 원래 사량벌국이 백제의 부용국으로 진한에 속하였던 나라인지....판단은 여러분께 맞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