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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

[솟대] 지나측 기본참조사료 : 후한서열전後漢書列傳 유언劉焉편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8.
한중漢中, 파, 촉蜀의 지리적 위치를 새로이 비정하려니 후한서後漢書 지리지와 관련 후한서열전後漢書列傳의 자료를 찾아보게 되어서 다른 분들께 작은 보탬이 될까 유언劉焉편을 일부 풀어보았습니다.
추후에, 모두 풀게 되면 보완하도록 하고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라 미력하겠지만 작으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틀리거나 상이한 부분에 대한 견해가 있으시면 기꺼이 지적해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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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본후한서新校本後漢書 / 열전列傳 / 卷七十五 류언원술여포열전劉焉袁術呂布列傳

제第 六十五  /  유언劉焉 편


패인沛人 장로張魯는 그 어머니가 자색恣色이 있는데다 겸하여 귀도鬼道도 갖고 있어 류언劉焉의 집안을 왕래하더니 로魯가 독의사마督義司馬로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별주부사마別部司馬 장수張修와 더불어 병사들을 이끌고 한중태수漢中太守 소고蘇固를 엄습하여  베어 죽이고 야곡斜谷의 길을 끊어 가로막고 조정의 사자使者를 살해하였다.
로魯는 이미 한중漢中을 취하자 다시 장수張修를 척살하여 오로지하고 그 {무리}들을 아울렀다。
류언劉焉은 자신을 존대尊大함으로써 위엄과 법을 세우고자 했으며 이에 관직을 더 많이 늘려서 위임하고 주중州中의 호족豪族중 강성한자 10여인을 참살하니[一],사민士民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헌제獻帝 초평初平 2년(191년),건위태수犍爲太守 임기任岐및 가룡賈龍이 함께 반란을 일으켜 류언劉焉을 공격하였다. 유언劉焉이 공격해 격파하고 그들 모두를 척살하였다.
이로부터 의기意氣가 점차 성대해져 승여乘輿와 차車와 중重 천여 승乘을 만들어 세우기에 이르렀다[二].
류언劉焉의 4째 아들 류범劉范은 좌중랑장左中郎將이 되었으며,탄誕은 치서어사治書御史가 되고, 장璋은 봉거도위奉車都尉[三]가 되어서 함께 헌제獻帝에게 나아가 장안長安에 있었다.오직 별부사마別部司馬 류모劉瑁만이 류언劉焉을 수행하며 익주益州에 있었다。
조정朝廷은 장璋을 보내어 류언劉焉을 타이르고 깨우치고자 하였으나 언焉은 장璋을 머무르게 하고 다시 조정으로 파견하지 않았다.
흥평興平 원년元年,정서장군征西將軍 마등馬騰과 류범劉范이 모의하여 리각李傕을 척살코자 하자 류언劉焉이 수병叟兵 5천을 보내어 이를 도왔으나 싸움에서 패배하였고[四] 류범劉范 및 류탄劉誕이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류언劉焉은 이미 두 아들의 일로 슬퍼하였는데,다시 우연히 천화天火로 그의 성城과 관청府, 그리고 차중車重이 화재를 당하고 연이어 민가民家에까지 미치어 관사와 도성이 성하게 남은 것이 없어졌다.  이에 성도成都로 치소를 옮겨서 다스렸는데 등창疽이 등背뒤에 나더니 등창疽으로 인해 졸卒하였다[五].
익주益州의 대사大吏인 조위趙韙등은 류장劉璋의 온화하고 어짐을 탐내어 자사刺史로 세웠다. 조서詔書로 인하여 류장劉璋은 감군사자監軍使者이 되어 익주목益州牧을 받게 되고,조위趙韙는 정동중랑장征東中郎將으로 되었다.
먼저 형주목荊州牧 류표劉表를 다스리라며, 표表가 어찌 참람되게 승여乘輿와 기복器服을 흉내내는가 하자,이로써 바르고자 표表를 대응하려고 구朐에 둔병屯兵하였다[六].
  注[一] 촉지蜀志에 이르길,왕함王鹹﹑이권李權등을 참살하였다.
    注[二] 중重은 치중輜重이다。
    注[三] 촉지蜀志에 이르길, 「장璋의 자字는 계옥季玉」이라 하였다.
    注[四] 한漢나라때 촉蜀을 이르길 수叟라고 한다.
           공안국孔安國이 상서尚書를 주석하여 이르길,「촉蜀은 수叟이다.」라고 하였다.
    注[五] 설문說文에 이르길, 「저疽는 구한久漢 」이라 하였다.
  注[六] 朐의 음音은 준蠢이다. 음音은 尹反과 같다. 파군巴郡에 속하며,옛 성이 현 기주夔州 운안현雲安縣 서西쪽에 있다.
☞ 헌제獻帝 : 영제靈帝의 아들로 이름은 유협劉協, 재위기간은 BC189년 ~ BC220년.
☞ 승여乘輿 : 임금이 타는 수레
☞ 봉거도위奉車都尉 :
관직명으로 한漢 무제武帝 원정元鼎 2년(BC115년)처음 두었으며 녹봉은 2천석石이고 승여거乘輿車를 영접하고 시중하는 일을 주관하는데 곽광霍光은 일찍이 이 관직과 광록대부光祿大夫를 겸임하였다.
동한東漢때에는 광록훈光祿勳에 속하였고 조회朝會에서 소召를 받들어 청하였고 인원을 한정하지 않았다. 진晉은 황실皇室 외척外戚이 이를 담당하였고 그후 그 관직을 두거나 없애기를 반복하였다. 당唐은 봉거도위奉車都尉가 수레를 따르며 그것을 운거하는 것을 관장하였으나 항상 설치되지는 않았으며 송宋나라때에는 폐지되었다.

沛人張魯,母有恣色,兼挾鬼道,往來焉家,遂任魯以為督義司馬,*(遂)*與別部司馬張修將兵掩殺漢中太守蘇固,斷絕斜谷,殺使者。魯既得漢中,遂復殺張修而並其。
焉欲立威刑以自尊大,乃托以佗事,殺州中豪強十餘人[一],士民皆怨。
初平二年,犍爲太守任岐及賈龍並反,攻焉。焉擊破,皆殺之。自此意氣漸盛,遂造作乘輿車重千余乘[二]。焉四子,范爲左中郎將,誕治書御史,璋奉車都尉[三],並從獻帝在長安,唯別部司馬瑁隨焉在益州。朝廷使璋曉譬焉,焉留璋不復遣。
興平元年,征西將軍馬騰與范謀誅李傕,焉遣叟兵五千助之,戰敗[四],范及誕並見殺。焉既痛二子,又遇天火燒其城府車重,延及民家,館邑無餘,於是徙居成都,遂*[疽]*發背*(疽)*卒[五]。
州大吏趙韙等貪璋溫仁,立為刺史。詔書因以璋為監軍使者,領益州牧,以韙爲征東中郎將。先是荊州牧劉表, 表焉僭擬乘輿器服,韙以此遂屯兵朐□備表[六]。
  注[一]蜀志曰,殺王鹹﹑李權等。
    注[二]重,輜重也。
    注[三]蜀志曰:「璋字季玉。」
    注[四]漢世謂蜀為叟。孔安國注尚書云:「蜀,叟也。」
    注[五]說文曰:「疽,久漢。」
  注[六]朐音蠢。□音如尹反。屬巴郡,故城在今夔州雲安縣西也。



헌제獻帝 건안建安 초년初年(AD196년),남양南陽과 삼보三輔의 백성 수만 호戶가 익주益州로 유입되자 이에 모두 거두어  {군사}로 삼았는데 그들을 부르길 「동주병東州兵」이라 하였다.
류장劉璋의 성품은 부드럽고 너그러웠으나 위엄과 경륜이 없어서 동주인東州人이 난폭히 침범하여서 백성들의 우환이 되었으나 능히 억누르지 못하자 구사舊士들이 몹시 이반하여 원망하였다.

조위趙韙는 파중巴中에 있으면서 민심民心을 두텁게 얻었는데,류장劉璋이 권한을 주고 그에게 위임하여서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뜻이 류장劉璋에게 모이지 않음이 뚜렷하니[一],이에 주중州中에서 대성大姓인 씨족들과 몰래 결탁하였다.
건안建安 5년(200년),익주益州로 돌아와 대성大姓 씨족들과 함께 류장劉璋을 공격하자 촉군蜀郡﹑광한廣漢﹑건위犍爲가 모두 반란에 호응하였다.
동주인東州人들은 토벌되어 멸망당할 것이라 보고 두려워하여 이에 한마음으로 힘을 어울러주어 류장璋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반란군들을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강주江州[二]로  나아가 공격하여 평정하고 조위趙韙를 참수하였다.

장로張魯는 류장劉璋이 세상에 어둡고 나약하므로, 돌아와 승순承順-명을 따름-하지 않자 유장劉璋이 노하여 장로張魯의 모친과 형제를 죽이고,그의 장군 방희龐羲등을 보내어 장로張魯를 공격하여,수차례 그를 격파하였으나 장로張魯의 부곡部曲이 파토巴土에 두텁게 있으므로 방희龐羲를 파군태수巴郡太守로 삼았다.장로張魯는 그를 불의에 급습하여 멸하고,드디어 파巴․한漢에서 승리하였다.
  주注 [一] 집輯은 화和{모이다,화합하다,합치다}의 뜻이다.
  주注 [二] 강주江州는 현縣이름이며 파군巴郡에 속하며 지금의 유주渝州 파현巴縣이다.
☞ 부곡部曲 : 후한後漢말에 지방地方의 치안治安을 위해 장군將軍이나 호족豪族이 거느리도록 인정認定받은 군대軍隊

初,南陽﹑三輔民數萬戶流入益州,焉悉收以為,名曰「東州兵」.璋性柔寬無威略,東州人侵暴爲民患,不能禁制,舊士頗有離怨.
趙韙之在巴中,崖民心,璋委之以權.韙因人情不輯,[一]乃陰結州中大姓.建安五年,還共擊璋,蜀郡﹑廣漢﹑犍為皆反應.東州人畏見誅滅,乃同心并力,爲璋死戰,遂破反者,進攻韙於江州,[二]斬之.
張魯以璋闇懦,不復承順.璋怒,殺魯母及弟,而遣其將龐羲等攻魯,數爲所破.魯部曲多在巴土,故以羲爲巴郡太守.魯因襲取之,遂雄於巴漢.
  注[一] 輯,和也。
    注[二] 江州,縣名,屬巴郡,今渝州巴縣。



건안建安 13년(208년), 조조曹操가 몸소 형주荊州를 정벌하자, 류장劉璋은 이에 사신을 보내어 예를 표하였다.조조曹操는 류장劉璋에게 진위장군振威將軍을,형兄 류모劉瑁에게는 평구장군平寇將軍을 더하여 주었다.류장劉璋이 별가종사別駕從事 장송張松을 보내어 부탁하고자 조조曹操에게 이르렀으나 조조曹操는 서로 접례接禮하지 않았다.장송張松이 한恨을 품고 돌아와 류장劉璋에게 조씨曹氏와의 관계를 끊고 이어서 류비劉備와 결호結好할 것을 권하였으며 류장劉璋은 그의 말을 따랐다.
건안建安 16년(211년), 류장劉璋은 조조曹操가 한중漢中을 향하여 병사를 보내어 장로張魯를 토벌한다는 것을 듣고  안으로 두렵고 위태롭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또한, 류장劉璋이 조조曹操를 막기위해 류비劉備를 맞이할 것을 설하자 류장劉璋은 곧 법정法正[一]을 사신으로 보내고 전쟁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류장劉璋의 주부主簿인 파서巴西의 황권黃權[二]이 간언하여,「류비劉備는 효용梟勇[三]한 것으로 명성이 있으니 부곡部曲의 장長으로서 그를 대하면 곧 그의 마음이 만족치 않을 것이고 빈객賓客으로써 그를 대하면 곧 한 나라에 두명의 주인을 용납하는 것이니 이것은 스스로 평안케 하는 길이 아닙니다. 」라고 이르고  종사從事인 광한廣漢의 왕루王累는 스스로를 주문州門에 거꾸로 매달고 간언하였으나 류장劉璋은 그 간언을 하나도 거두지 않았다.
  주注 [一] 촉지蜀志에 이르길,「법정法正의 자字는 효직孝直으로 부풍扶風 미인郿人이다.
                그 조부는 법진法真으로 자字 교경喬卿이었고 부친은 법연法衍으로 자字는 계모季謀이다.」
  주注 [二] 촉지蜀志에 이르길,「황권黃權은 자字가 공형公衡으로 랑중인閬中人이다. 선주先主가 익주益州를 취하자 모든 현縣들이 감화되어 바라보며 우러러보며 귀부하였으나 황권黃權은 성城을 닫고 굳게 지키었다.  드디어, 장璋이 계복稽服하자 이에 선주先主에게 이르렀다. 선先{주主는 높여 부르는 호칭}는 장차 동東으로 오吳를 정벌하고자 하였는데,황권黃權이 간하였으나 선주先主는 간언을 따르지 않았으며 권權을 진북장군鎮北將軍으로 삼고 강북江北의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선주先主는 몸소 강남江南에 진주하였다. 오吳의 장수인육의陸義는 약한 곳을 헤아려 사방을 끊고 포위하니 우리 남군南軍이 패적敗績하고 선주先主는 군대를 인솔하여 퇴각하였다.  그러나 퇴각로가 막히어 황권黃權은 돌아올 수 없었으므로 지키던 땅과 강북江北의 군사를 거느리고 위魏나라에 항복하였다.
법法을 집행하는 관리가 권權의 처자妻子를 잡아들이겠다고 아뢰자 선주先主가 말하길,    『내孤가 황권黃權을 외로이 저버린 것이지,권權이 나孤를 저버린 것이 아니니라。』하고  그들을 대함을 처음과 같이 하였다.  
위문제魏文帝가 황권權曰에게 이르고 말하길,『군君-그대-은 역逆을 버리고 순리順理를 본받았으니,진陳﹑한韓{진말의 진평陳平․한신韓信}의 자취를 쫓고자 함이 아닌가?』라 물었다.
황권黃權이 답하여 이르길, 『신臣이 돌이켜보면 류씨劉氏에게 두터운 대우를 받았으니 오吳에 항복하는 것은 불가하고 촉蜀으로 돌아갈 길은 없으니,목슴을 맡기는 것이 옳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또,패군敗軍의 장수로서 죽음을 면한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데 어찌 고인古人을 따름이 옳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
  주注 [三] 효梟는 바로 날래고 용감함을 이른다。

☞ 계복稽服 : 조아리어 항복하다
☞ 패적敗績 : 자신이나 자기나라의 패전敗戰을 일컫는 말
☞ 소령所領 : 영유領有하고 있는 땅
☞ 고孤 : 왕후王侯의 스스로에 대한 겸칭謙稱, ‘나’

十三年,曹操自將征荊州,璋乃遣使致敬.操加璋振威將軍,兄瑁平寇將軍.璋因遣別駕從事張松詣操,而操不相接禮.松懷恨而還,勸璋絕曹氏,而結好劉備.璋從之.
十六年,璋聞曹操當遣兵向漢中討張魯,內懷恐懼,松復說璋迎劉備以拒操.璋即遣法正將兵迎備[一].璋主簿巴西黃權諫曰[二]:「劉備有梟名[三],今以部曲遇之,則不滿其心,以賓客待之,則一國不容二主,此非自安之道.」從事廣漢王累自倒懸於州門以諫.璋一無所納.
  注[一] 蜀志曰:「法正字孝直,扶風郿人也。祖真,字喬卿。父衍,字季謀。」
  注[二] 蜀志曰:「權字公衡,閬中人也。先主取益州,諸縣望風景附,權閉城堅守。須璋稽服,乃詣先主。*[先]*主稱尊號,將東伐吳,權諫,先主不從,以權為鎮北將軍,督江北軍,先主自在江南。吳將陸義乘虛斷圍,南軍敗績,先主引退,而道隔,權不得還,故率所領降於魏。有司執法白收權妻子。先主曰:『孤負黃權,權不負孤也。』待之如初。
魏文帝謂權曰:『君捨逆效順,欲追蹤陳﹑韓邪?』
權對曰:『臣過受劉氏厚遇,降吳不可,還蜀無路,是以歸命。且敗軍之將,免死為幸,何古人之可慕?』」
  注[三]梟即驍也。



류비劉備가 강릉江陵으로부터 질주하여 부성涪城[一]에 이르니,류장劉璋은 보기步騎 수만을 거느리고 회합會을 베풀 준비를 하고 있었다[二].장송張松이 회합에서 류장劉璋을 엄습할 것을 류비劉備에게 권하였으나 류비劉備는 인정치 않았다.
다음해明年,류비가 나와서 가맹葭萌에 둔을 치자 장송張松의 형兄 광한태수廣漢太守 숙肅[三]이 자신에게 화가 미칠가 두려워하여 이에 장송張松이 모의하였다고 류장劉璋에게 아뢰자 송松을 잡아서 참수하도록 하였고 모든 관關을 지키어 다시 왕래치 못하게 하였다.
류비劉備가 대노하여 돌아와 병사를 시키어 류장劉璋을 공격하였으며 전투가 있는 곳마다 승리하였다.

건안建安 19년(214년),진군하여 성도成都를 포위한지 수십일이 지났지만 성중城中에는 정병精兵 3만명과 일년을 지탱할 곡식이 있었고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성을 지키어 싸우고자 하였다.
류장劉璋이 이르길,「부자父子가 익주州에서 20여년을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행한 은덕恩德이 없으면서 전쟁을 3번이나 치렀고 살과 근육이 초야에 널렸으니 장璋으로 인한 것이다. 어찌 민심을 능히 평안케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성문을 열고 나가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아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는자가 없었다.
류비劉備는 류장劉璋을 공안公安[四]으로 옮기고,그 재보財寶를 돌려보냈는데 이후에 병病으로 졸卒하였다.[五]
명년明年-건안建安20년-에 조조曹操가 장로張魯를 격파하고 한중漢中을 평정하였다.
  注 [一] 부성涪城의 옛 성城은 지금의 면주성綿州城이다.
  注 [二] 촉지蜀志에 이르길,「이 해는 건안建安 16년이 맞다.」
  注 [三] 익군益郡의 기구耆舊가 전하여 이르길,「장숙張肅은 위의威儀가 있고 용모容貌가 심히 아름다웠다。송松은 인물이 키가 작고 방탕放蕩하여 지위가 낮고 절조節操를 갖지 아니하였으므로 사리를 정과精果로써 식별하였지만 재간才幹이 있었다. 류장劉璋이 보내어 조공曹公에게 이르렀으나 공公이 심히 예禮로서 대하지 않았다. 양수楊修가 그를 매우 그릇으로 여기어 공公에게 아뢰었으나 송松을 피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修가 공公이 찬한 병서 병서兵書를 송松에게 보였더니 음연지한飲宴之閒-술자리의 틈새시간-에 한번 살피더니 바로 편히 암송하여 이에 그를 뛰어나다 여겼다.」
  注 [四] 공안公安,지금의 형주현荊州縣이다.
  注 [五] 촉지蜀志에 이르길,「선주先主는 장璋을 공안公安 남쪽으로 옮기고도 오히려 진위장군振威將軍의 인수印綬를 차도록 해주었다. 손권孫權이 관우關羽를 격파하고 형주荊州를 취하자 장璋을 익주목益州牧이라 하고 자귀秭歸로 이주하여 머물러 살게 하였다.」고 말한다.
☞ 부곡部曲 : 후한後漢말에 지방地方의 치안治安을 위해 장군將軍이나 호족豪族이 거느리도록 인정認定받은 군대軍隊
☞ 기구耆舊 : 예순 혹은 칠순이상의 나이가 지긋한 노인

備自江陵馳至涪城[一],璋率步騎數萬與備會[二].張松勸備於會襲璋,備不忍.明年,出屯葭萌.松兄廣漢太守肅懼禍及己,乃以松謀白璋,收松斬之[三]?  諸關戍勿復通.
備大怒,還兵擊璋,所在戰剋.十九年,進圍成都,數十日,城中有精兵三萬人,穀支一年,吏民咸欲拒戰.璋言:「父子在州二十餘歲,無恩德以加百姓,而攻戰三載,肌膏草野者,以璋故也.何心能安!」遂開城出降,下莫不流涕.備遷璋於公安,[四]歸其財寶,後以病卒.[五]
明年,曹操破張魯,定漢中.
    注[一]涪城故城今綿州城。
    注[二]蜀志曰:「是歲建安十六年。」
    注[三]益郡耆舊傳曰:「張肅有威儀,容貌甚偉。松為人短小放蕩,不持節操,然
識理精果,有才幹。劉璋遣詣曹公,公不甚禮。楊修深器之,白公辟松,不納。修以公
所撰兵書示松,飲宴之閒,一省即便闇誦,以此異之。」
    注[四]公安,今荊州縣。
    注[五]蜀志曰:「先主遷璋於公安南,猶佩振威將軍印綬。孫權破關羽,取荊州,
以璋為益州牧,留*(住)**[駐]*秭歸。」



장로張魯의 자字는 공기公祺이다. 처음에 그의 조부祖父 장릉張陵은 순제順帝 때에 촉蜀에 상객上客으로 있었으며 그 도道를 학명산鶴鳴山[一]속에서 배웠는데 도서道書를 지어 만들어서 백성百姓들을 미혹하였다.  그 도道를 받고자 따르는 이들은 늘 쌀米 5두鬥를 내어놓아 옛날에 미적米賊이라 불렀다.장릉張陵은 아들 형衡에게 전하고 장형張衡은 그 도道를 로魯에게 전하여 장로張魯는 스스로를「사군師君」이라 부르기에 이르렀다.
그 도道를 배우려 오는 자들은 처음에 모두 이름을「귀졸鬼卒」이라 하였고 후에는 「제주祭酒」라 칭하였다.  제주祭酒들은 각각 령부領部가 있었고 많은 이들은「리두理頭」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모두 성신誠信으로써 가르치고 업신여기거나 거짓말하는 것을 듣지 않으며 병病이 있으면 다만 그 과오를 드러나게 하여 병이 낫게 하였다[二].
모든 제주祭酒들은 각각 길위에 의사義舍를 세우는데 정전亭傳-역참의 숙박시설-과 한가지로 같은 것이며[三], 고기와 쌀을 매달아두어 행려行旅인들에게 넉넉히 공급해주었다.
식사를 할 이들이 배를 채우고 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으며 지나친자들은 곧 귀신鬼道이  능히 그를 병에 걸리게 한다 여겼다.
범법자犯法者들은 먼저 3번은 더 용서해 주었고 그런 연후에야 형벌을 행하였다.[四]
장리長吏는 두지 아니하였고 제주祭酒가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백성들이나 이족夷族들이나 신뢰하여 구하였다[五].
조정朝廷에서 능히 토벌하지 못하자,장로張魯에게 관대히 진이중랑장鎭夷中郎將의 벼슬을 내리기에 이르렀고 한녕태수漢寧太守[六]직을 받아 조공을 바치며 왕래하도록 하였다.

魯字公旗。初,祖父陵,順帝時客於蜀,學道鶴鳴山中[一],造作符書,以惑百姓。
受其道者輒出米五鬥,故謂之「米賊」。陵傳子衡,衡傳於魯,魯遂自號「師君」。其
來學者,初名為「鬼卒」,後號「祭酒」。祭酒各領部□,□多者名曰「理頭」。皆校
以誠信,不聽欺妄,有病但令首過而已[二]。諸祭酒各起義捨於路,同之亭傳[三],縣
置米肉以給行旅。食者量腹取足,過多則鬼能病之。犯法者先加三原[四],然後行刑。
不置長吏,以祭酒為理,民夷信向[五]。朝廷不能討,遂就拜魯鎮夷中郎將,領漢寧太
守[六],通其貢獻。
  注[一]山在今益州晉原縣西。
    注[二]魏志曰:「大抵與黃巾相似。」首音式*(殺)**[救]*反。
    注[三]傳音陟戀反。
    注[四]原,免也。
    注[五]典略曰:「初,熹平中,妖賊大起,*[三輔有駱曜。光和中,東方有張角]*,
漢中有張修。*[駱曜教民緬匿法,角]*為太平道,*(張角)**[修]*為五斗米道。
    太平道師持九節杖,為符祝,教病人叩頭思過,因以符水飲之。病或自愈者,則雲
此人信道,其或不愈,則雲不信道。修法略與角同,加施淨室,使病人處其中思過。又
使人為奸令祭酒,主以老子五千文,使都習,號『奸令』。為鬼吏,主為病者請禱。
*[請禱]*之法,書病人姓字,說服罪之意。作三通,其一上之天,著山上,其一埋之地,
其一沈之水,謂之『三官手書』。使病者家出米五斗以為常,故號『五斗米師』也。實
無益於療病,*[但為淫妄]*,小人昏愚,競共事之。後角被誅,修亦亡。及魯自在漢中,
因其人信行修業,遂增飾之。教使起義捨,以米*[肉]*置其中,以止行人。又*[教]*使
自隱,有小過者,當循道百步,則罪除。又依月令,春夏禁殺。又禁酒。流移寄在其地
者,不敢不奉也。」
    注[六]袁山松書,建安二十年置漢寧郡。



한수韓遂﹑마초馬超의 난亂때,관서關西의 백성들이 장로張魯에게 달아나 피신한 것이 수만호가 되었다.  당시 사람이 땅에서 옥인玉印을 얻자 따르는 아래사람腢下들이 장로張魯를 한녕왕漢寧王으로 높이고자 하였다.
韓遂﹑馬超之亂,關西民奔魯者數萬家。時人有地中得玉印者,腢下欲尊爲為漢寧王。
장로張魯의 공조功曹이던 염포閻圃가 간하여 이르기를,「한천漢川의 백성들은 호戶수가 10만을 넘으며 사면四面이 험하고 굳건하며  재산이 풍부하고 토질이 비옥하니,상上이 천자天子를 보좌한다면 곧 환공桓公,문공文公이 괴고 다음으로 두융竇融을 본뜨며 부귀富貴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관청을 설치하라는 천자의 말을 받들어 형벌을 내릴 권세를 갖고 있으니 왕王으로 칭하여 번거롭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재앙을 끌어올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하여 로魯가 그 말을 쫓았다.

韓遂﹑馬超之亂,關西民奔魯者數萬家。時人有地中得玉印者,腢下欲尊魯為漢寧王。
魯功曹閻圃諫曰:「漢川之民,戶出十萬,四面險固,財富土沃,上匡天子,則為桓文,次方竇融,不失富貴。今承製署置,埶足斬斷。遽稱王號,必為禍先。」    魯從之。



장로張魯가 스스로 한천漢川을 물려받은 지 30년,조조曹操가 그를 정벌하려한다는 것을 듣고,양평陽平[一]에 이르러,한중을漢中 들어 항복하고자 하였다.그의 동생 위衛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무리眾 수만數萬을 거느리고,관關[二]을 가로막고 굳게 지키었다.
조조曹操가 위衛를 격파하여 그를 베어 죽이자 로魯는 양평陽平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상顙에 머무르며 귀부하여 항복하고자 하였다.
염포閻圃가 타일러 이르기를,「지금 급히 항복하러가면 그 공功은 가벼울 것이니,또한 파중巴中땅에 의지함만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연후에 맹세하여 의탁하며 그 공功이 필히 많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를 옳게 여기어 남산南山으로 패주하여 갔다.좌우左右가 다 보화창고寶貨倉庫를 불사르자 하였으나.장로張魯가 이르길,「본래 명하여 나라를 바치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아직 끝내지 못했을 뿐이며 금일 피신함은 날카로운 칼날을 피하고자 함이지 어찌 악의惡意가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하며 창고藏를 봉하고 떠났다.조조曹操가 남정南鄭에 입성하여 심히 그것에 기뻐하며 또한 장로張魯가 본래 선의善意가 있다 하여 사람을 보내어 그를 위안慰安하였다.
장로張魯가 바로 가속家屬과 더불어 마중하여 나오자 진남장군鎭南將軍의 벼슬을 내리며 랑중후閬中侯[三]에 봉하고 식읍 만호萬戶를 주었다. 오히려, 본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객례客禮로써 대하였고 로魯의 5자子및 염포閻圃등을 모두 열후列侯로 봉하였다.
장로張魯가 죽자,시호를 원후原侯라 하고 그 아들 장부張富에게 그 작위를 잇게 하였다.

  注 [一] 주周 지도地圖에 기록되기를,「라곡囉谷 서북西에 고古 양편관陽平關이 있다.」하였으며 그 땅은 현 량주梁州 라성현囉城縣 서북이다.
  注 [二] 위지魏志에 이르길,「태조太祖-조조-가 장로張魯를 정벌하여 양평관陽平關에 이르자 장위張衛가 관關을 가로막고 굳게 지키었다.」
  注 [三] 랑중閬中은 파군巴郡에 속하며 현 륭주현隆州縣이다.

魯自在漢川垂三十年,聞曹操征之,至陽平,[一]欲舉漢中降.其弟衛不聽,率眾數萬,拒關固守.[二]操破衛,斬之.魯聞陽平已陷,將稽顙歸降.閻圃說曰:「今以急往,其功為輕,不如且依巴中,然後委質,功必多也.」於是乃奔南山.左右欲悉焚寶貨倉庫.魯曰:「本欲歸命國家,其意未遂.今日之走,以避鋒銳,非有惡意.」遂封藏而去.操入南鄭,甚嘉之.又以魯本有善意,遣人慰安之.魯即與家屬出逆,拜鎮南將軍,封閬中侯,邑萬戶,[三]將還中國,待以客禮.封魯五子及閻圃等皆為列侯. 魯卒,謚曰原侯。子富嗣。
   注[一] 周地圖記曰:「曪谷西北有古陽平關.」其地在今梁州褒城縣西北也.
   注[二] 魏志曰:「太祖征魯至陽平關,衛拒關堅守.」
   注[三] 閬中屬巴郡,今隆州縣


Written by 구리넷[九黎Net]  솟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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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소설삼국지를 신봉하며 중화사관에 물들은 이들이 자신의 역사를 비하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서 기우아닌 기우를 하게하여서
원문을 그대로 가져가시는 분께서는  가능한 출처를 밝혀주시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