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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동천왕 벽비의 새로운 해석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1. 30.
우선 제 주장을 하기 전에 아래 두가지를 먼저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첫번째는 고구려 초기 위치부터 다시 확정해야겠습니다. 두번째는 삼국사기의 임금님 이름에 숨어 있는 비밀입니다.

1) 고구려 수도 이동은 아래와 같죠.
BC37-AD3 홀본, 동명성왕
AD3-209 국내위나암성, 유리명왕
209-247 환도성, 산상왕
247-342 평양성, 동천왕
342-343 환도성, 고국원왕
343-427 평양 동황성,
427-586 평양, 장수왕
586-668 장안, 평원왕

우 리가 알고 있는 홀본의 위치는 집안근처도 요동근처도 아닙니다. 바로 북경근처죠. 북경 근처에는 고구려 2대 임금인 유리명왕과 한자가 똑같은 유리묘와 유리하가 있습니다. 그리고 홀본에서 국내위나암성은 돼지가 달아난 곳이므로 그리 멀지 않은 곳일 것입니다. 환도성은 아마도 고조선 수도일 것입니다. 규원사화에 서경압록부 환주와 고구려 환도는 그 이름으로 보아 같은 곳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환도성은 요하 근처일 것입니다. 그리고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현재의 평양은 아닐것입니다. 평원왕이 천도한 장안성이 현재의 평양일 것입니다.

즉,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성 서쪽은 홀본, 국내, 위나암, 환도성입니다. 그리고 국내(國內)는 우리나라 고어로 훈독하면 불내와 비슷할 것입니다. 그리고 보통 한자로 不耐로 적습니다.

2) 동천, 중천, 서천
삼 구사기에는 임금의 칭호가 강이름을 딴 것이라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東遷, 中遷, 西遷입니다. 동천왕때 관구검에 밀려 동쪽으로 수도를 옮겼고 점점 지남에 따라 고구려 영토를 서쪽으로 확장해 갔으며 고국원왕에 가서는 옛 수도인 환도성을 다시 찾습니다. 이 이야기는 동천왕때 많은 영토를 위나라에게 빼앗겼다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곳은 바로 동천왕 이전의 도읍이 있었던 지역입니다.


동천왕 벽비 해석
위 두가지를 염두해 두고 동천왕 벽비 모두를 읽어보면 그 내용이 좀 이해가 갑니다.
모두다 비슷한 내용을 말하고 있더군요. 한순근씨 홈피에서 퍼왔습니다.

「魏 明帝 靑龍癸丑二(五?)年 東主高麗東川王十一年 王詔峴睍宮三太邑長 入漢魏步騎二百 回都愼冊廣欲答 煙雲丘壑 扶筇登蟦 (邡?)外其所於水山深間 生愛月摩詰道 形今溯坐我士 頗得城郭根引七家 因相傳諸譜間 意不可自秘 引世出再(一冊) 先世遺所已久 奇爲茂?體筆 流芳益黠倫 叱(以)啓傹怢陵芥 王幸 安次三塞 始獲習元 禁凡四十六殊 道宮室畢節於相 百三十三歷輯宗 渲引之叱(以)公世天地 蹈事師之風 須萬前郞衆 始異焉 觀獸異微 斯狀墜委遺矣 祖宮前室偖百殊規止 繼明帝還(逐)(多)護(寧)東百殊司吏 邑都沸流 安泰久歲禮幣(樂?)世高麗 殊氏(代?)天祖鄒牟王 慾殺鎩存其故都 將不耐城 往尉那巖城 繼造三千囘卒本邑都 叱祭祀祖尉那岩東 記告後人 復國都再造昌天府宮 拜謁日月 祭示天地 衆邑長百長國殊 誠意立壁碑永 傳百世存祖.
위 명제 청룡 계축년으로부터 5년이고 동주 고구려 동천왕 11년 왕은 현현궁의 삼태읍장을 불러 보기 200과 위나라로 가게 하였다. (후에) 도성에 돌아와 삼가 분부하신 광대한 계책대로 꾀하고 돌아왔습니다라고 복명하였다..중략..짐승들이 이상한 징후를 보이며 시조 사당 전실에 떨어져 죽자 백수는 의식을 멈추었다. 명제에 이어 백수는 "逐多護寧東百殊"로 복귀하여 관아, 관리, 도읍을 비류를 두니 평안하고 태평하며 예악이 있는 세월이 고구려에 이어젔다. 수가 천조 추모왕을 대신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옛 수도 불내성을 보존하였다. 위나암성으로 가서 3천국의 졸본읍도를 만든 후 위나암성 동쪽에서 시조에게 제사드린 것을 기록하여 후인에게 알린다. 다시 나라와 도성을 회복하고 천부궁을 다시 만들어 일월신과 천지지신에게 제사지낸다. 읍장, 백장 국수 등이 정성을 다해 벽비를 세우니 백세토록 영원히 존속하여라.」[註:계축년은 명제 청룡 원년으로 A.D 233년이고, 동천왕 11년은 A.D 237년이다. 이로 보아 청룡계축 뒤에 나오는 "二"는 "五"인데, 만들 때 잘못되었는지 일부 획이 희미해져 "二"로 보이는 것이다.]

「正始武侵宮 百殊固諫慾鎩 還亡命存其固都誠不耐城 遣訖繼創邑都 護殊百位麓酋(委+台) 七年(246년)十月繼明王封护寧東國吏玄菟沸流 安泰天歲 禮樂世百濟高麗 殊代天府祖鄒牟王以城民之意 秋八月步騎二千戰 儉혁峴岭攻數千里降士數千 國宮前臣高伏 儉鎩城北 王盲(旨?)記天地之中 銘存永世隨登愿 此碑永立以傳百世紹示百殊城民 정시년간에 위나라 군사들이 궁을 침범한 일이 있었다. (침범이 있기 전) 백수는 죽음을 각오하고 한결같이 간하였다. 백수는 망명에서 돌아와 정성을 다해 수도 불내성을 튼튼하게 보존하였다. 흘계를 보내 도읍을 만들고 殊와 百位와 고구려 호족들을 통솔하였다. 정시 7년(서기 246년) 10월에 명제에 이어 (제)왕이 (백수를) "護寧東國吏玄菟沸流"에 봉하니, 평안하고 태평한 세월과 예악이 백제와 고구려에 이어졌다. 殊는 천부와 시조 추모왕과 성민의 뜻을 대신하였다. 정시 7년(서기 246년) 가을 8월 보기병 2천으로 관구검은 혁현령에서 수천리를 공격하여 수천명의 군사를 항복받았다. 관구검이 궁성 북쪽을 뚫자 궁성에서 전 신하 高가 항복하였다. 왕의 뜻으로 천지간에 일어난 일을 새겨 영원히 보존하고 때마다 윗사람에게 바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윗사람이) 근신하기 바라며, 이 비를 영원히 세워두고 이로써 백세를 전하게 하고 백수 성민은 대대로 이어 이 비를 보라.」[註 동천왕 시대에 "護" 字를 간체인 "护"로 정말 사용하였는지 심히 의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위 벽비는 후에 중국이 간체를 사용한 시기에 위작한 것으로 의심한다.]

「始祖之孫日月之子承故夫余故邑遂成 王十年東西南北殊 繼明帝逐多护寧東百殊 司吏玄菟定邑都沸流 安久泰長歲禮樂以百濟高句麗 殊代天府繼祖鄒牟王意 民泰國安 百殊心意□□年功建國都玄菟郡紒継. 시조의 후손 해와 달의 아들이 옛 부여의 옛 읍을 이어받았다. (제)왕 10년(248년)에 동서남북수는 명제에 이어 "逐多护寧東百殊"가 되어 관아, 관리를 현도에 두고 도읍을 비류에 두어 다스리니, 평안하고 태평한 세월과 예악이 백제와 고구려에 이어졌다. 수가 천부를 대신하여 시조 추모왕의 뜻을 이어 백성을 태평하게 하고 나라를 안정시켰다. 백수가 마음과 뜻을 다한 공적으로 □□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현도군에 두고, 나라를 계속하였다.」

「正始武止宮不從固諫 食蒿而死 殊還亡命 慾鎩 存其固都 將誠不耐城 往丸都遣訖繼造邑都 護位殊麓酋 魏正始七年 百殊宣> 정시년간의 병란이 끝났다. (?)가 왕에게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쑥만 먹다가 죽었다. 수는 망명에서 돌아와 몸을 돌보지 않고 정성을 다해 그 수도 불내성을 보존하고자 하였다. 환도에 가서 흘계를 보내 도읍을 만들고 위, 수, 고구려 호족들을 통솔하였다. 위나라 정시 7年(246년) 백수가 선포하노라.」

위 벽비를 전부다 읽고 나면 한가지 수상한게 나옵니다.
*  "명제에 이어 백수는 "逐多護寧東百殊"로 복귀하여 관아, 관리, 도읍을 비류를 두니"
*  "옛 수도 불내성을 보존하였다. 위나암성으로 가서 3천국의 졸본읍도를 만든 후 위나암성 동쪽에서"
*  "백수는 망명에서 돌아와 정성을 다해 수도 불내성을 튼튼하게 보존하였다. 흘계를 보내 도읍을 만들고 殊와 百位와 고구려 호족들을 통솔하였다."
* "옛 부여의 옛 읍을 이어받았다." 여기서 옛 부여란 북부여가 아니라 고조선 속국 부여이며 그위치는 북경 근처입니다(위치에 대해서는 윤내현 열국사연구를 참조하세요)
* "동서남북수는 명제에 이어 "逐多护寧東百殊"가 되어 관아, 관리를 현도에 두고 도읍을 비류에 두어 다스리니"
* "그 수도 불내성을 보존하고자 하였다."
* "환도에 가서 흘계를 보내 도읍을 만들고 위, 수, 고구려 호족들을 통솔하였다."
* "명제에 이어 (제)왕이 (백수를) "護寧東國吏玄菟沸流"에 봉하니"

전 부다 내용이 백수가 불내성, 위나암, 비류, 현도, 환도 등에 가서 城들을 복원하고 그 곳의 고구려 호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백수가 위무한 성들은 주로 북경에서 요하까지 성들입니다. 고구려 초기 위치를 강단에서는 요하와 집안 근처로 잡고 있기에 이 동천왕 벽비의 해석이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구려 초기의 수도인 위나암, 불내성, 환도성, 홀본성 모두 북경 근처 성이었고 그 성을 관구검 침입시에 모두 함락당하였기에 그곳을 위나라는 자기 땅으로 만들고자 백수라는 자를 시켜 그곳의 성읍에 있는 지방호족을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결정적인 구절이 있습니다. "七年(246년)十月繼明王封护寧東國"의 구절은 백수가 어떤 위치에 있던 사람인지를 잘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바로 寧東國의 왕이고 이 자가 바로 百殊인 것입니다.

그 리고 벽비에 평안과 태평이 고구려와 백제에 이어졌다라는 것은 지나인들만의 특유한 병적인 자존감에서 나온 필법입니다. 또한 동천왕벽비라고 불려지는 저 벽비는 글쓴이의 주체성이 위나라인제 고구려인지 헷갈리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나라 연호를 쓰는 것이라든가, 벽비 처음에 명제를 첫 글자로 시작하는 것이라든가, 고구려임금을 東主라고 표현한 것... 이런 것들은 자신이 위나라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日月之子라든가, 추모왕의 뜻을 이어라든가, 태평이 고구려 백제에 미쳤다라든가 하는 말들은 자신이 고구려의 후손인 것처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백수가 고구려 서방에 있었던 지방호족이고 관구검 침입후 위나라 속국의 왕이되어 자신이 다스리게 된 땅을 열심히 다시 일구어 위나라쪽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때문에 저렇게 헷갈리는 벽비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위나라 속국이기에 위나라 연호를 쓴 것이죠.

결국, 모든 동천왕 벽비라고 한 것은 동천왕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입니다.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어낸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백수가 동천왕이라니.... 고대 우리말과 이두문에 대해서 공부좀 더 하라고 말하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