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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한국 역사책

대동사강 단씨조선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2. 24.

檀氏朝鮮紀(단씨조선기)

始祖開天弘聖帝[姓桓氏, 諱儉. 神市天王雄之子.]在位九十三年. 壽二百十七.
시조 개천홍성제
[성은 환씨이고 이름은 검이다. 신시천왕 웅의 아들이다]는 재위가 93년이고 217세까지 살았다.


【戊辰】開天弘聖帝元年
[唐堯二十五年]이라. 冬十月에 帝ㅣ 登極[按古史云東方初無君長有九種夷分居山野草衣木食夏巢冬穴民性柔而强有神人持天符印三率風伯雨師雲師靈公主命主穀主病形主善惡等三千徒降于太白山〔今白頭山一云妙香山〕自言姓名桓雄父曰桓因卽上帝也敎化民族民皆神之歸者如市故稱神市天王時有一虎一熊祈上帝願化爲人上帝賜靈艾七株蒜二十枚曰汝輩食之不見天日百日則化得爲人身虎不能忍熊忍    七日乃得女身是謂熊女設壇於檀樹下每乞有娠神市天王納而爲后上元甲子十月三日是生帝而神靈及長聖德聞四方國人推戴爲君]하시다. 初에 東方之民이 分居山野하야 草衣木食하며 夏巢冬穴이러니 帝ㅣ繼天登極하사 都太白山[今白頭山]下하시고 定國號曰震檀이라 하시고 設三百六十六條律令하사 敎民以編髮, 火食, 衣服[用布皮尙白色]居處之制하며 立君臣, 上下, 男女之別하니 不言而信하며 不怒而威하며 無爲而化라. 納匪西岬侯女하사 爲后하다. ○皇子夫婁로 爲虎加[官名]하야 率諸加하고 皇子夫蘇로 爲鷹加하야 主刑하고 皇子夫虞로 爲鷺加하야 主病하고 皇子夫餘로 掌禮하고 神誌로 爲馬加하야 掌書契하니 神誌ㅣ 術九變震檀之圖하야 預言歷代九變하고 高矢로 爲牛加하야 掌田事하고 蚩尤氏[蚩尤之後]로 爲熊加하야 掌兵하고 朱因으로 爲鶴加하야 掌善惡하고 余守己로 爲狗加하야 分定諸州하고 命彭虞하야 治國內山川하다.

【무진년, BC2333】개천홍성제의 원년[당요 25]이다. 겨울 10월에 임금이 등극[: 고사(古史)에서 말하기를 동방은 초기에 군장이 없었다. 9종이 있는데 산과 들에 나누어 살았다. 풀로 옷을 해입고 나무로 음식을 해먹었다. 여름에는 집을 짓고 살고 겨울에는 동굴에 살았다. 백성의 성품이 부드러운데 강한 신인(神人) 있어 천부인 3개를 쥐고 풍백 우사 운사 () () 주명(主命) 주곡(主穀) 주병형(主病形) 주선악(主善惡) 3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지금의 백두산 묘향산이라 한다〕에 내려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이름이 환웅이고 아버지는 환인 하느님(上帝)이라 했다. 백성을 교화하니 백성이 모두 신께 돌아오는데 돌아오는 자들이 저잣거리와 같다고 하여 신시(神市) 하였다. 천왕 때에 () () 있었는데 하느님(上帝) 인간이 되기를 빌었다. 하느님은 영묘한 7 마늘 20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해를 100 동안 보지 않으면 변하여 사람의 몸을 갖게 것이다라고 하였다. 범은 참을 능력이 없었고 곰은 참았다. 7일이 지나 곰은 여인의 몸을 얻었는데 이를 웅녀라 한다. 단수(檀樹) 아래에 () 설치하고 항상 아이 갖기를 원하였는데 신시천왕이 이에 그를 들여 () 삼았다. 상원(上元) 갑자(甲子) 10 3 () 낳았는데 신령하였다. 이내 장성하여 성덕(聖德) 갖추었는데 사방의 모든 나라사람들이 그를 추존하여 임금으로 삼았다.]하셨다. 처음에 동방의 백성은 산과 들녘에 나누어 살았는데 풀로 옷을 해입고 나무로 음식을 해먹으며 여름에는 집을 지어 살고 겨울에는 동굴에 살더니 제()가 하늘을 계승하여 등극하고 태백산〔지금의 백두산〕아래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진단(震檀)이라 정하고 366조의 율령을 만들고 백성에게 머리 따는 것과, 음식을 익혀 먹는 것과 옷을 해 입는 것[백색 옷감 혹은 무늬 없는 옷감을 사용하였다], 사는 것을 마련하여 군신과 상하와 남녀의 구별을 세우니 말없이 믿으며 노하지 않고 위엄을 세우며 행함 없이 교화하였다. 비서갑(匪西岬) 제후의 딸을 취하여 후()로 삼았다. ○아들 부루(夫婁)로 하여금 호가(虎加)[벼슬 이름이다]를 맡아 모든 가()를 통솔하게 하고, 아들 부소(夫蘇)로 하여금 응가(鷹加)를 맡아 형벌을 주관하게 하고, 아들 부우(夫虞)로 하여금 로가(鷺加)를 맡아 질병을 주관하게 하고, 아들 부여(夫餘)로 하여금 예절(禮節)을 관장하게 하고, 신지(神誌)로 하여금 마가(馬加)를 맡아 책과 글에 대한 것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신지가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를 지어 9번 변할 역사를 예언하였다. 고시(高矢)로 하여금 우가(牛加)를 맡아 농사에 관련된 일을 관장하게 하고 치우씨(蚩尤氏)[치우의 후손이다]로 하여금 웅가(熊加)를 맡아 군사에 관련된 일을 관장하게 하고 주인(朱因)으로 하여금 학가(鶴加)를 맡아 선악을 관장하게 하고 여수기(余守己)로 하여금 구가(狗加)를 맡아 지방을 나누어 정하게 하였고,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나라 안의 산천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庚寅】二十三年이라 帝ㅣ移都平壤[今滿洲遼陽一云鳳凰城或蓋平縣]하사 改國號曰朝鮮이라하고 浚溝洫하여 開田陌하야 勸農桑하며 行德政하니 民皆化之라 帝ㅣ南巡海上하실새 赤龍이 呈瑞어날 改虎加爲龍加하니 敎化洽被四土하야 東至大海하고 南至洌水[今漢江]하고 西至灤河하고 北至黑水하니 東西五千餘里오 南北이 六千餘里러라 區劃天下하야 封勳功할새 以蚩尤之後로 封藍[遼河附近]하고 神誌는 封肅愼[黑水東南]하고 高矢난 封靑丘[今北部朝鮮]하고 朱因은 封蓋馬[在太白山東南]하고 余守己난 封濊[今黑龍江附近]하고 緋天生은 封南海하고 夫餘는 封餘[濊南]하고 夫蘇夫虞는 封眞番句麗하다南夷ㅣ侵邊이어날 遣皇子夫餘하야 討平하다

【경인년, BC2311】개천홍성제의 23년이다. 임금이 도읍을 평양성[지금의 만주 요양이다. 혹 말하기를 봉황성이라 하기도 하고 개평현이라고 하기도 한다.]으로 옮기고 국호를 조선이라 바꾸었다. 붓도랑을 파고 밭의 경계를 만들어 농업과 양잠을 권하고 덕치를 수행하니 모든 백성이 다 교화되었다. 임금이 해상(海上)을 순행할때에 붉은 룡이 나타나 상서로움을 보이므로 호가(虎加)를 룡가(龍加)로 고치고 교화를 널리 모든 지역에 펼치었다. 영토는 동쪽으로 대해(大海)에 이르고 남쪽으로 렬수(洌水)[지금의 한강이다]까지 미치고, 서쪽으로는 란하(灤河)까지 미치고, 북쪽으로는 흑수(黑水)까지 미치니, 동서로 5000여리이며 남북으로 6000여리이다. 천하를 나누어 공훈에 따라 그 봉국을 주었는데 치우의 후손에게는 람()[료하(遼河) 부근]에 봉하고 신지(神誌)는 숙신[흑수 동남]에 봉하고 고시(高矢)는 청구[지금의 북한]에 봉하고 주인(朱因)은 개마[태백산 동남에 있다]에 봉하고 여수기는 예[지금 흑룡강 근처]에 봉하고 비천생(緋天生)은 남해(南海)에 봉하고 부여는 여[예의 남쪽]에 봉하고 부소와 부우에게는 각각 진번과 구려를 봉하였다. ○남쪽의 오랑캐가 변경을 침범하니 아들 부여를 보내에 평정하였다.

 

【丙寅】五十九年이라 帝ㅣ南巡하사 至阿斯達山[今九月山]하야 封禪祭天하시고 至江華하사 命三子하사 築城於甲比次[今江華傳燈山]하사 名三郞城하고 又設祭天壇[今江華麻尼山]하고 名塹城臺하다獗㺄[疑今蒙古]ㅣ作亂하니 其勢頗盛이어날 命夫餘하야 集中外兵하고 肅愼으로 造弓矢하고 沃沮로 造斧矛하야 討平하고 帝ㅣ 西巡하사 撫安百姓하고 會諸候하야 使勸農桑하고 北巡하사 會東北諸候於肅愼하야 又勸農桑하고 還都하사 會朝臣及諸侯하사 祭天地하고 帝ㅣ 大誥于衆曰惟皇一神이 在最上位하야 用御天宮하사 啓不善原萬德이라 群靈護侍하나니 大吉祥大光明處니 日神鄕이니라 咨爾有衆아 惟則天範하야 扶萬善滅萬惡하라 性通功完하면 乃朝天이니라 天範은 惟一이요 弗貳厥門이니 爾性純誠으로 一爾心이라야 乃朝天하리라 天範이 惟一이라 人心도 惟同하니 惟秉己心하여 以及于人心하라 人心惟化라야 亦合天範하야 乃用御于萬邦하리니 爾生은 由親이오 親降自天이니 惟敬爾親이라야 乃克敬天하야 以及于邦國하리니 是乃忠孝라 爾克禮是道하면 天有崩이라도 必克脫免하리라 飛禽도 有雙하고 弊履有對하니 爾男女以和하고 毋怨毋妬毋淫하라 爾嚼十指하라 痛無大小하리니 爾相愛毋胥讒하고 互佑毋相殘하라 家國以興하리라 爾觀于牛馬하라 猶分厥蒭하나니 爾互讓毋胥奪하여 共作毋相盜하라 家國以殷 하리라 爾觀于虎하라 强暴不靈하야 乃作孼하나니 爾毋桀 鷔以戕物하여 毋傷人하고 恒導爾天範하야 極愛物하라 爾如有越厥則이면 永不得神佑하고 身家以殞하리라 爾如衝火于華田하면 華將殄滅하리니 神人以怒하리라 爾扶傾毋凌弱하며 濟恤毋侮卑하라 爾雖厚包나 厥香必漏하나니 爾敬持彛性하야 毋懷慝하며 毋隱惡하며 毋藏禍心하고 克敬于天하며 親于萬民하라 爾乃福祿이 無窮하리니 咨爾有衆아 其欽哉어다.

【병인년, BC227559년이다. 임금이 남쪽으로 순행(巡幸)하여 아사달산(阿斯達山)[지금의 구월산]에 이르러 제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었다. 강화(江華)에 이르러 세 아들에게 갑비차(甲比次)[지금의 강화(江華) 전등산(傳燈山)]에 성()을 쌓으라고 명령하였고 그것을 삼랑성(三郞城)이라 이름하였다. 또한 제천단(祭天壇)[지금 강화(江華) 마니산(麻尼山)]을 건설하고 참성대(塹城臺)라고 이름하였다. ○궐유(獗㺄)[1][아마도 지금의 몽골]이 난을 일으키니 그 세력이 아주 성하였다. 임금은 夫餘(부여)에게 명하여 안팍의 병사를 모으게 하고 肅愼(숙신)에게는 활과 화살을 만들게 하고 沃沮(옥저)에게는 도끼와 창을 만들게 하여 그들을 토벌하였다. 임금이 서쪽으로 巡幸(순행)하여 백성들을 위로하고 제후를 소집하여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하였다. 북쪽으로 순행하여 동북쪽의 제후를 숙신에 모이게 하고 역시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하였다. 도읍으로 돌아와서 신하와 제후들을 모이게 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말하기를 …(이하 번역 생략)

 

【庚子】九十三年이라 春三月에 帝이 誥太子夫婁曰天道昭昭하야 降在爾心하니 惟執爾心하야 親睦萬民호대 唯以純誠하라하시고 崩[一云化神御天]커시날 太子夫婁王이 立하야 繼父志治天下할새 巡國中하야 察諸侯之善惡하며 勸農奬學하니 文化大行이라 初에 虞이 置幽[今遼西][今遼東]二州於藍隣이어날 遣兵征之하야 盡逐其衆하고 封道羅東武等하야 以表其功하니 沃沮이러라 三十四年에 崩하고 子嘉勒王이 立하야 有聖德이러니 五十一年에 崩하고 子烏斯王이 立하야난 夏有簒逆之亂이어날 命息達하야 率藍眞番二侯兵하야 徃征하니 威德이 流被四表러라 四十九年에 崩하고 子丘乙王이 立하야난 封太白山하고 使民不相侵犯하다 三十五年에 崩하고 子達門王은 立三十二年에 崩하고 子翰栗王은 立二十五年에 崩하고 子 于西翰 王이 立하야 稅 九十之一하고 廣通有無하니 以補不足하다 五十七年에 崩하고 子 阿述 王이 立하야난 有仁德이라 民有犯禁者어든 糞地雖汚나 有時降露라하고 置而不治하니 民皆感化하야 相愛犯禁이러라 二十八年에 崩하고 子 魯乙王이 立하야 始作囿養獸하다 二十三年에 崩하고 子 道奚 王이 立하야는 以一三山[今平壤地]人王朝明으로 爲泊[今九月山 沿海地]君하니 治績이 第一이라 製春具하야 敎民以茅蓋屋하고 海月[朝明三世孫]은 作漕舟便水運하고 明知[海月三世孫]는 撰農曆하다 三十六年에 崩하고 子 阿漢王은 立 二十七年에 崩하고 子 屹達王은 立 四十三年에 崩하고 子 古弗王은 立 二十九年에 崩하고 子 伐音王은 立하야 夏이 遣使請援이어날 遣未良救之러니 後復請援이어날 却以無道하고 不許러니 商湯이 修仁政이어날 王曰有德之君이라하고 結和하고 取稅八十之一하다 三十三年에 崩하고 子 尉那王은 立十八年에 崩하고 子 余乙王은 立 六十年에 崩하고 子 冬奄王은 立 二十年에 崩하고 子 緱牟蘇王은 立 二十五年에 崩하고 子 固忽王은 立十一年에 崩하고 子蘇台王은 立하야 西巡하사 觀藍侯之政하고 陳兵商地하다 三十三年에 崩하고 子 索弗婁王이 立하야난 征商破之러니 尋和라가 後復大戰破之하고 進入其境하야 屯海上하니 民遷其地하다 十七年에 崩하고 子 阿忽王이 立하야난 遣弟固弗加하야 治樂浪하고 遣熊加乙孫하야 觀征南兵하고 設邑商地하니 商人이 相爭不和어날 進兵攻之라가 尋罷하다 十九年에 崩하고 子 延那王이 立하니 年幼라 叔父固弗加이 攝政하다 商攻我師하야 至南界하니 藍侯이 將兵克之하다 十三年에 崩하고 弟 率那王은 立十九年에 崩하고 子 鄒魯王은 立九年에 崩하고 子 豆密王은 立四十五年에 崩하고 子 奚牟王은 立二十二年에 崩하고 子 摩休王은 立하야 商人이 來朝하다 九年에 崩하고 弟奈休王이 立하야난 南巡靑丘하야 察其政하고 西巡藍하야 大會諸侯하고 與殷和親하다 五十三年에 崩하고 子 登屼王은 立 六年에 崩하고 子 鄒密王은 立八年에 崩하고 子 甘勿王은 立九年에 崩하고 子 奧婁門王이 立하야 移都百牙岡[今大同江北岸]하고 使眞蕃侯로 監舊都하다 時有民犯法하니 鷹加이 治之曰今不敎斯人이면 世德以衰하야 國其紊亂이어날 王이 聞之曰民之行이 如水하야 其源이 淸則下流自淸하나니 此朕之凉德所致라 吾皇祖肇基己千載에 國無大難하고 民無大憝이러니 今有此犯하니 恐祖先之法이 因朕廢弛라하고 修先王之德하니 犯者化之하고 民無染惡이러니 二十年에 崩하고 子 沙伐王은 立十一年에 崩하고 子 賣勒王은 立十八年에 崩하고 子 麻勿王이 立하야난 以眞蕃侯鄒咄로 爲龍加하고 王이 南巡至泊[今黃海道]하야 崩하니 在位八年이라 眞蕃侯이 迎立王弟多勿王하야 十九年에 崩하고 子 豆忽王이 立하야난 藍侯이 頗强하야 率諸侯하고 逐孤竹君하고 遷都奄瀆忽하니 與殷逼近이라 使黎巴達로 將兵至邠하야 與其遺民으로 相結立黎國하고 與殷諸侯及西戎人으로 雜處하니 藍侯之威이 漸盛하고 王之威靈이 及恒山之南이러라 二十八年에 崩하고 子 達音王이 立하야난 貊侯이 爲藍侯所幷하니 是時에 王室이 微弱하야 諸侯이 漸强이러라 十四年에 崩하고 子 音次王이 立하야는 修德政하니 王道復興하고 諸侯이 相率來朝러라 時에 伯夷이 避紂來居北海之濱이러니 旣而聞周文王이 善養老하고 復西歸周하다 十九年에 崩하고 子 乙于支王은 立九年에 崩하고 子 勿理王이 立하야난 藍侯儉達이 與靑丘侯句麗侯肅愼侯로 率兵伐殷하고 深入其地하야 定淮岱之地하고 封薄姑氏於奄[靑州地]하고 封盈古氏於徐[淮北徐州地]하니 殷人이 莫敢當이라 然이나 諸侯多叛者러라 十五年에 崩하고 子 丘忽王은 立七年에 崩하고 子 余婁王이 立하야난 藍侯이 立鮮卑國於殷淮南之地하다 五年에 崩하고 子 普乙王이 立十一年에 崩하고 子 古列加王이 立하야난 王令이 不振이라 王이 謀諸加曰昔에 我皇祖이 肇基立業하사 爲萬世後孫之範이러니 今王室衰微하고 諸侯漸强하야 殆無奉命者하니 雖圻內之民이 懷列聖之化하야 猶表忠虔이나 以予之凉德으로 不可致化立威라 欲讓有德하야 遍觀聖裔하니 亦無其人이라 朕이 避居唐莊京[在今文化月山]하야 安奉先聖神靈이러니 時에 殷人箕子이 避周以來이慕其聖하야 割四鄙數百里而舁之고 王이 奉祭器하고 避居唐莊京하니 在位三十七年이라 桓氏이 凡四十七世에 歷一千二百十二年이러라

【경자년, BC224193년이다. 3월에 임금이 태자 부루에게 말하기를하늘은 도는 밝디 밝으니 너는 오직 마음을 집중하여 만민과 친목하고 오직 순수함과 정성으로 하라하시고 세상을 떠나시니[혹은 신이 되어 하늘로 어거하였다고도 한다]커시날

【신축년, BC2240】太子(태자) 夫婁(부루) 왕이 제위에 올라 아버지의 뜻을 이어 천하를 통치하였다. 나라 안을 순행하며 제후들의 선과 악을 감찰하며 농사와 학문을 권장하니 문화가 크게 이루어졌다. 초기에 虞()가 유주(幽州)[지금의 요서] 와 영주(營州)[지금의 요동]를 람국()에 이웃하게 설치하였으므로 병사를 보내 정벌하고 그 무리를 다 쫓아내고 도라(道羅)와 동무(東武) 등을 봉하여 그 공로를 표창하니 옥저(沃沮)이다. 34년에 죽어

【을해년, BC2206】아들 가륵(嘉勒, ) 왕이 제위에 올랐고 성덕(聖德)이 있더니 51년에 죽고

【병인년, BC2155】아들 오사(烏斯) 왕이 제위에 올랐다. 하국(夏國)에 찬역(簒逆)의 난리가 있어 식달(息達)에게 명하여 람()과 진번(眞番)의 제후의 병사들을 이끌고 가서 정벌하니 위덕(威德)이 사해를 덮었다. 49년에 죽었다.

【을묘년, BC2106】아들 구을(丘乙)왕이 제위에 올랐다. 태백산(太白山)을 봉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35년에 죽었다.

【경인년, BC2071】 아들 달문(達門)왕은 제위에 오른지 32년만에 죽고

【임술년, BC2039】아들 한율(翰栗)왕은 제위에 오른지 25년만에 죽고

【정해년, BC2014】 아들 우서한(于西翰) 왕은 제위에 올라 조세를 90분의 1로 널리 통용되게하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보충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2] 57년에 죽었다.

【갑신년, BC1957】아들 아술(阿述) 왕이 제위에 올랐고 인덕(仁德)이 있었다. 백성들이 금하는 것을 범하는 자가 있었다. 똥이 있는 땅이 비록 더럽기는 하지만 이슬이 내릴때가 있다고 하였다. 설치는 하였으나 다스리지 아니하였으니 백성이 모두 감화되었다. 28년에 죽었다.

【임자년, BC1929】아들 로을(魯乙)왕이 제위에 올라 처음으로 동산에 가축을 길렀다. 23년에 죽었다.

【을해년, BC1906】 아들 도해(道奚)왕이 제위에 올라 일삼산(一三山)[지금의 평양땅]사람 왕조명(王朝明)을 박()[지금 구월산 연해지이다]의 군()하니 치적이 제일이었다. 춘구(春具)를 제작하여 백성들에게 모()를 이용하여 집을 덮도록 가르쳤고, 해월(海月)[조명(朝明) 3세손이다]은 배를 만들어 편하게 물길로 물건을 운반하였고 명지(明知)[해월(海月) 3세손이다]는 농사를 위한 역법을 만들었다. 36년에 죽었다.

【신해년, BC1870】아들 아한(阿漢)왕은 제위에 오른지 27년에 죽고

【무인년, BC1843】아들 흘달(屹達)왕은 제위에 오른지 43년만에 죽고

【신유년, BC1800】아들 고불(古弗)왕은 제위에 오른지 29년만에 죽고

【경인년, BC1771】아들 벌음(伐音)왕이 제위에 올랐는데王은 立하야 하국(夏國)이 사신을 보내 도우믕ㄹ 청하니 미량(未良)을 보내 구원하였는데 훗날 다시 도움을 청하였지만 무도하다 하여 물리치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상국(商國)의 탕()이 어진정치를 닦더니 임금이 덕이 있는 군주라고 말하고 화목하였다. 80분의 1을 조세로 취하였다. 33년에 죽었다.

【계해년, BC1738】아들 위나(尉那)왕은 제위한지 18년만에 죽고

【신사년, BC1720】아들 여을(余乙)왕은 제위한지 63년 만에 죽고

【갑신년, BC1657】아들 동엄(冬奄)왕은 제위한지 20년만에 죽고

【갑진년, BC1637】아들 구모소(緱牟蘇)왕은 제위한지 25년만에 죽고

【기사년, BC1612】아들 고홀(固忽)왕은 제위한지 11년만에 죽고

【경진년, BC1601】아들 소태(蘇台)은 제위하여 서쪽으로 순행하여 람후(藍侯)의 정치를 살피고 상국(商國)의 땅에 병사들을 진열시켰다. 33년에 죽었다.

【계축년, BC1569】아들 색불루(索弗婁)왕이 제위에 올라 상국(商國)을 쳐서 깨뜨리더니 얼마있다가 화해하였으나 후대 다시 크게 싸워 그들을 깨뜨리고 그들의 경내에 집입하여 영토위에(海上) 진을 치니 백성들이 그 땅으로 이사하였다. 17년에 죽었다.

【경오년, BC1551】아들 아홀(阿忽)왕이 제위에 올라 동생 고불가(固弗加)를 보내 낙랑(樂浪)을 다스리도록 하고 웅가(熊加) 을손(乙孫)을 보내 정벌한 남쪽 병영을 살펴보고 상국(商國)의 땅에 읍()을 건설하니 상국(商國)사람이 서로 싸워 화목하지 않으므로 병사를 보내어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잠시후에 그만 두었다. 19년에 죽었다.

【기축년, BC1532】아들 연나(延那)왕이 제위에 오르니 나이가 아직 어려 숙부 고불가(固弗加)가 섭정하였다. 상국(商國)이 우리의 사()를 공격하여 남쪽 경계에 이르니 람국(藍國) ()가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이기었다. 13년에 죽었다.

【임인년, BC1519】 동생 솔나(率那)왕은 제위에 오른지 16년에 죽었다.

【무오년, BC1503】아들 추로(鄒魯)왕은 제위에 오른지 9년에 죽었다.

【정묘년, BC1494】아들 두밀(豆密)왕은 제위에 오른지 45년에 죽었다.

【임자년, BC1449】아들 해모(奚牟)왕은 제위에 오른지 22년에 죽었다.

【갑술년, BC1427】 아들 마휴(摩休)왕은 제위에 올라 상국(商國)사람이 내조하였다. 9년에 죽었다.

【계미년, BC1418】동생 나휴(奈休)왕이 제위에 올랐다. 남쪽으로 청구를 순행하여 그 정치를 살펴보고 서쪽으로 람국(藍國)을 순행하여 제후들을 모두 모이게 하였다. 은국(殷國)과 화친하였다. 53년에 죽었다.

【병자년, BC1365】아들 등올(登屼)왕은 제위에 오른지 6년에 죽었다.

【임오년, BC1359】아들 추밀(鄒密)왕은 제위에 오른지 8년만에 죽었다.

【경인년, BC1351】아들 감물(甘勿)왕은 제위에 오른지 9년에 죽었다.

【기해년, BC1342】아들 오루문(奧婁門)왕이 제위에 올라 백아강(百牙岡)[지금 대동강 북안北岸]으로 도읍을 옮기고 진번(眞蕃)()로 하여금 옛 도읍을 관리하게 하였다. 때에 범법하는 백성이 많으니 응가(鷹加)가 그것을 다스리면서 말하기를지금 이 사람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세상의 덕이 쇠하여 나라가 얽혀 어지럽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백성의 행동은 물과 같아서 그 근원이 맑으면 아래로 흘러 저절로 맑아지는데 이것이 다 내가 덕이 얇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께서는 기반을 닦은지 이미 천년인데 국가에는 큰 난리가 없었고 백성은 큰 원망이 없었는데 지금 이러한 범법행위가 있으니 두려워하던 선조의 법이 나로 인하여 폐하여지고 느슨해지는구나라고 하였다. 선왕의 덕을 닦으니 범법자들이 교화되고 백성은 악에 물들지 아니하였다. 20년에 죽었다.

【기미년, BC1322】아들 사벌(沙伐)왕은 제위에 올라 11년 후에 죽었다.

【경오년, BC1311】아들 매륵(賣勒)왕은 제위에 올라 18년만에 죽었다.

【무자년, BC1293】아들 마물(麻勿)왕이 제위에 올라 진번(眞蕃)의 후()인 추돌(鄒咄)을 룡가(龍加)로 삼았다. 임금이 남쪽으로 순행하여 박()[지금 황해도]에 이르러 죽으니 재위 8년이다.

【병신년, BC1285】진번(眞蕃) ()가 임금의 동생 다물(多勿)을 맞이하여 임금으로 세우니[3] 제위에 오른지 19년만에 죽었다.

【을묘년, BC1266】아들 두홀(豆忽)이 제위에 올라서 람국() ()가 아주 강하여 제후들을 거느렸고[4] 고죽군(孤竹君)을 쫓아내고 도읍을 엄독홀(奄瀆忽)로 옮겼으니 은국(殷國)과 핍근(逼近)하였다. 려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빈()에 도달하여 그 유민(遺民)으로 더불어 결탁하고 려국(黎國)을 세웠다. 은국()의 제후들과 서융(西戎)사람들과 더불어 같이 사니 람국() ()의 위엄이 점차 성하여졌고 임금의 위엄이 항산(恒山)의 남쪽까지 미쳤다. 28년에 죽었다.

【계미년, BC1238】 아들 달음(達音)왕이 제위에 올라 맥국()의 후()가 람국()의 후()에 병합되니 이때에 왕실이 미약하여 제후들이 점차 강성하여졌다. 14년에죽었다.

【정유년, BC1224】아들 음차(音次)왕이 제위에 올라 덕을 닦아 정치를 하니 왕도가 다시 부흥하고 제후들이 서로 내조하였다. 때에 백이(伯夷)가 주()를 피하여 북해(北海)가에 살고 있었는데 이미 주국(周國) 문왕(文王)이 노인을 봉양을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서쪽으로 주국(周國)에 돌아갔다. 19년에 죽었다.

【병진년, BC1205】아들 을우지(乙于支)왕은 제위에 오른지 9년에 죽었다.

【을축년, BC1196】아들 물리(勿理)왕이 제위하여 람국()의 후()인 검달(儉達)이 청구(靑丘) ()와 구려(句麗) ()와 숙신(肅愼) ()와 더불어 병사를 이끌고 은국(殷國)을 정벌하여 그땅에 깊숙히 들어가고 회대(淮岱)의 땅에 정착하였다. 박고(薄姑)씨를 엄()[청주(靑州) ]에 봉하고 영고(盈古)씨를 서()[회수(淮水) 북쪽 서주(徐州) ]에 봉하니 은국(殷國)사람들이 감이 당해내지 못하였다. 그러하였으나 제후들이 많이 배반하더라15년에 죽었다.

【경진년, BC1181】아들 구홀(丘忽)왕은 제위에 오른지 7년에 죽었다.

【정해년, BC1174】아들 여루(余婁)왕이 제위에 올라 람국() ()가 선비국(鮮卑國)[5]을 은국(殷國)의 회수(淮水) 남쪽에 세웠다. 5년에 죽었다.

【임진년, BC1169】아들 보을(普乙)왕이 제위에 올라 11년에 죽었다.

【계묘년, BC1158】아들 고렬가(古列加)왕이 제위에 올라 왕의 명령이 떨치지 못하였다.왕이 어떤 제가(諸加)에게 말하기를옛날에 우리 조상이 기틀을 잡고 업을 이룩하여 만세후손의 모범이 되었더니 지금 왕실이 미쇠하고 제후들이 모두 강하여서 위태로와 명을 받드는 자가 없으니 비록 기내(畿內)의 백성들이 렬성(列聖)의 교화를 가슴에 품고 겉으로는 오히려 충성을 나타내고 있으나 나의 덕이 얇으므로 교화에 이르러 위엄을 세우는 것이 불가하다. 덕있는 작에게 물려주려고 투루 성인들의 자손들을 찾아보았으나 역시 그러한 사람이 없었다. 내가 당장경(唐莊京)[지금 문화 월산에 있다]으로 피해살아서 安奉 선성(先聖)과 신령(神靈)을 편한이 받들고자 한다.”고 하였다. 때에 은국(殷國) 사람 기자(箕子)가 주국(周國)을 피하여 오거늘 그 성스러움을 사모하여 사비(四鄙) 수백리를 떼어주고 그를 마주들어 올리었다. 임금이 제기(祭器)를 받들고 당장경으로 피하여 사니 재위기간이 37년이다. 환씨(桓氏)가 대개 47대에 이르렀고 역년이 1212년이다.



[1] (알유)라고도 한다.
[2]
환단고기에 나오는 구절인데 대동사강에서는 토씨를 잘못달았다. “稅九十之一하고 廣通有無하니 以補不足하다”고 하였지만 “稅九十之一을 廣通하니 有無以補하여 不足하다”로 달아야 한다.
[3]
이때부터 단군조선은 힘이 쇠약하여져서 眞番이 그 권력을 맡아 본 것이다.
[4]
이때부터는 단군조선은 본국으로서의 힘을 잃어버려 藍國이 모든 제후를 거느렸던 것인데 이때부터 發藍箕國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사서에 따라 이 나라를 藍國 혹은 發朝鮮 혹은 箕子朝鮮 혹은 風夷 등으로 적었다.
[5]
鮮牟國 혹은 根牟國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