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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

구당서舊唐書 해奚傳 전문 번역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7.
해족(奚)은 대개 흉노(匈奴)의 별종이다. 거주지는 선비(鮮卑)의 옛 땅이니 바로 동호(東胡)의 경계로서 당나라 장안에서 동북쪽으로 4,000여리 떨어져 있다. 동쪽으로 거란(契丹)과 접하고 서쪽으로 돌궐(突厥)에 이르며 남쪽으로 백랑하(白狼河 ; 대릉하)까지 이르며, 북쪽으로 습(霫)에 이른다. 영주(營州)에서 서북쪽의 요락수(饒樂水)부터 그 나라에 이른다. 뛰어난 병사는 3만여명이며 다섯 부족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 부족마다 사근(俟斤) 한 사람이 있다. 풍속은 돌궐과 비슷해서 항상 물과 풀을 쫓아다니며 목축을 생업으로 삼아 옮겨다니며 일정한 거처가 없다. 머무는 곳은 융단 장막이며 수레를 사용하여 군영을 만드는데 항상 500명을 두어 지키도록 한다. 이 밖의 부락은 모두 산간 계곡에 흩어져 있으므로 세금이 없다. 사람들은 화살로 사냥을 잘하며 거란과 자주 전쟁을 벌인다. 무덕(武德) 연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정관(貞觀) 22년(648) 추장 가도자(可度者)가 무리를 이끌고 항복해오니 요락도독부(饒樂都督府)를 설치하고

가도자를 우령군(右領軍) 겸 요락도독(饒樂都督)으로 삼고 누번현공(樓煩縣公)에 책봉하고 이씨(李氏) 성을 하사하였다. 현경(顯慶) 초에 다시 우감문대장군(右監門大將軍)을 제수하였다.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에 거란이 반란을 일으킨 후 해의 무리는 돌궐에 복속되었다. 두 나라가 항상 표리를 이루기 때문에 양번(兩蕃)이라고 불렀다. 경운(景雲) 원년(710) 수령 이대보(李大輔)가 사신을 보내어 특산물을 바치지 예종(睿宗)이 가상히 여겨 연회를 크게 베풀어 주었다. 연화(延和) 원년(712) 좌우림장군(左羽林將軍)·검교유주대독(檢校幽州大都督) 손검(孫儉)이 병사 12만을 거느리고 그 부락을 습격하였다. 군대가 정형(冷硎)에 주둔하였을 때 전군(前軍)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이해락(李楷洛) 등이 이대보 등과 회전하였는데, 당나라 군대가 패하였다. 손검이 두려워 나아가 구원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이대보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칙을 받들어 너희 변방의 장수들을 달래러 왔는데, 이해락 등이 지시를 받지 않고 군대를 동원하였으니 목을 베어 사과한다”라고 하였다. 이대보가 말하기를 “만약 칙서를 받들어 달래러 왔다면 어찌 나라의 예물이 없는가?”하였다. 손검이 군중에 있는 비난 만여단과 도포와 띠를 주었다. 이대보가 말하기를 “장군이 남쪽으로 돌아간다면

서로 놀래킬 일이 없을 것이다”하였다. 손검의 군대가 점차 대오를 이탈하자 이대보가 무리를 이끌고 추격하였다. (당나라 군대가) 이로 인해 대패하니 병사 중에 죽거나 부상입은 자가 수만명이나 되었다. 손검과 부장 주이제(周以悌)는 이대보에게 사로잡혀 돌궐의 묵철가한(黙啜可汗)에게 보내져 모두 해를 입었다. 개원(開元) 3년(715) 이대보가 신하 월소매락(粵蘇梅落)을 보내 항복을 청하니, 다시 그 지역을 요락주(饒樂州)로 삼고 이대보를 요락군왕(饒樂郡王)에 책봉하고 좌금오원외대장군·요락주도독에 임명하였다. 개원 5년 이대보와 거란의 수령 송막군왕(松漠郡王) 이실활(李失活)이 모두 유성(柳城)에 예전대로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를 설치하도록 요청하니 현종이 들어주었다. 태자첨사(太子詹事) 강사도(姜師度)에 칙서를 내려 건설 작업을 감독케 하였는데, 동원된 사람이 8,000여명이나 되었다. 이해 이대보가 입조하니 사촌외질녀 신씨(辛氏)를 고안공주(固安公主)로 책봉하여 시집보냈다. 이때 물품 1,500필을 하사하였으며 우령군장군 이제(李濟)에게 임명장을 가지고 송환하도록 하였다. 개원 8년(720) 이대보가 군대를 보내 거란을 구원하였는데 싸우다 죽었다. 동생 노소(魯蘇)가 계승하였다.

개원 10년 (노소가) 입조하니 형의 관작인 요락군왕·우금오원외대장군 겸 보장군경략대사(保塞軍經略大使)를 계승하도록 하고 물품 1,000단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고안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런데 공주와 시어머니가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번갈아 고하니 조서를 내려 이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시 성안공주(成安公主)의 딸 위씨(韋氏)를 동광공주(東光公主)로 삼아 시집보냈다. 개원 14년 다시 노소를 봉성왕(奉誠王)에 책봉하고 우우림군원외대장군(右羽林軍員外將軍)을 제수하였다. 개원 18년(719) 해의 무리가 거란의 대신 가돌우(可突于)에게 협박받아 다시 배신하고 돌궐에 항복하였다. 노소가 제어할 수 없어 유관(渝關)으로 달아났고 동광공주는 평로군(平盧軍)으로 도망갔다. 그해 가을 유주장사(幽州長史) 조함장(趙含章)이 청이군(淸夷軍)의 병사를 동원하여 해를 격파하고 이백명을 참수하였다. 이때부터 해가 점점 (당나라에) 항복해 왔다. 개원 20년 신안왕(信安王) 위(禕)가 조서를 받들어 배반한 해를 토벌하였다. 해의 추장 이시쇄고(李詩瑣高) 등이 부락의 5,000장(帳)을 이끌고 항복해 왔다. 조서를 내려 이시를 귀의왕(歸義王) 겸 특진(特進)·좌우림군대장군동정(左羽林軍大將軍同正)에 책봉하고

귀의주도독(歸義州都督)의 임무를 맡겼다. 물품 10만단을 하사하고 그 부락을 유주(幽州)의 경계에 안치하였다. 천보(天寶) 5년(746) 다시 그 왕 사고(娑固)를 소신왕(昭信王)에 책봉하고 요락주도독을 제수하였다. 대력(大曆) 이후로는 조공이 때때로 왔다. 정원(貞元) 4년(788) 7월 해와 실위가 진무(振武)를 습격하였다. 정원 11년 유주에서 해의 6만명을 물리쳤다고 보고하였다. 원화(元和) 원년(806) 해의 왕 요락주도독이며 귀성왕(歸誠王)을 계승한 매락(梅落)이 내조하니 검교사공(檢校司空)을 더해주고 돌려보냈다. 3년 해의 수령 색저(索低)를 우무위장군동정(右武威衛將軍同正)에 임명하고 단주(檀州)와 계주(薊州)의 유혁병마사(遊奕兵馬使)의 임무를 맡기고 이씨 성을 하사하였다. 8년 사신을 보내 내조하였다. 11년 사신을 보내 명마를 바쳤다. 이후로 매년 조공이 끊이지 않았고 한 해에 두세번 이르기도 하였다. 옛날부터 항상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를 압해·거란양번사(押奚·契丹兩蕃使)로 삼았다. 지덕(至德) 이후로 변경의 신하들이 마음대로 책봉을 하여도 조정에서 용납해주니, 저들이 스스로 갖추어 변방에서 일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래서 해와 거란이 또한 침략이 가장 적었다. 그들이 매년 조하(朝賀 ; 동지, 정조(正朝), 즉위, 탄일 따위의 경축일에 신하들이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하던 일)할 때 항상 수백명이 유주에 이르면, (유주에서) 추장 35인을 뽑아 장안의 대궐에 보내었고, (장안에서는) 인덕전(麟德殿)에서 맞이하여 금과 비단을 하사해 주고 돌려보냈다. 나머지는 (관사에) 머무는 것이 대체로 관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