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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

구당서舊唐書 고구려高句麗 전문 번역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7.
고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있으니, 곧 한(漢) 낙랑군(樂浪郡)의 옛 땅으로서 장안(長安)의 동쪽 5천 1백 리에 있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에 이르며, 남쪽은 바다를 건너 백제(百濟)에 이르고 북쪽은 말갈(靺鞨)에 이른다. 동서가 3천 1백 리요 남북이 2천리이다. 그 관직에서 가장 높은 것을 대대로(大對盧)라 부르고 1품에 비견된다. 나라의 일을 총괄하여 주재하는데 3년에 한 차례씩 교체하는데, 만약 그 직위에 적합한 자면 연한의 제한에 거리끼지 않는다.

교체하는 날에는 혹은 서로 공경하여 복종하지 않고, 모두 군대를 이끌고 서로를 공격하여 이기는 자가 대대로가 된다. 왕은 단지 궁문을 닫고 스스로 지킬 뿐 제어하지 않는다. 다음을 태대형(太大兄)이라고 하는데 정2품에 비견된다. 대로(對盧) 이하의 관직은 모두 12등급이다. 지방에는 60여 성에 주(州)와 현(縣)을 두었다. 큰 성에는 욕살(傉薩) 한 명을 두니 도독(都督)에 비견된다. 모든 성에는 도사(道使)를 두니 자사(刺史)에 비견된다. 그 아래에는 각기 요좌(僚佐)가 있어서 일을 나누어 관장한다. 의상과 복식은 단지 왕만이 다섯 가지의 채색을 사용하며 흰 비단으로 머리관을 만들고 흰 가죽으로 작은 허리띠를 두르는데 그 관과 띠에는 모두 금으로 장식을 한다. 관직의 지위가 높은 자는 푸른 비단으로 관을 만들고 그에 버금가는 자는 붉은 비단으로 하고는 새의 깃털 두 개를 꽂고 더불어 금, 은으로 장식을 한다. 저고리는 통소매를 하고 바지는 통이 크며, 흰 가죽으로 띠를 하고 누런 가죽으로 신발을 만든다. 백성들은 갈(褐)을 입고 고깔(弁)을 쓰며 부인들은 머리에 건괵(巾幗)을 쓴다. 바둑과 투호의 놀이를 좋아하며, 사람마다 축국(蹴鞠)에 능하다. 음식을 먹을 때는 변두(籩 豆)와 보궤(簠簋) 및 준조(罇俎)와 뇌세(罍洗) 등을 사용하니 자못 기자(箕子)의 풍습이 남아 있다. 그들이 거처하는 곳은 반드시 산과 계곡에 의지하여 모두 띠 풀로 집의 지붕을 이는데 단지 절과 신의 사당 및 왕궁과 관청 등은 기와를 사용한다. 민간에는 빈곤하여 초췌한 자가 많으며

겨울이면 모두 긴 구덩이를 만들고 아래로 숯불을 지펴서 방을 따뜻하게 한다. 밭농사와 누에를 치는 것 등은 대략 중국과 같다. 법률은 모반이나 반역을 한 자가 있으면 곧 군중을 모아 횃불을 가지고 다투어 불사른 뒤 온몸이 모두 불에 데어 살이 문드러진 연후에 머리를 베고 가속은 모두 적몰한다. 성을 지키다가 적에게 항복을 하거나 싸움에 임해서 패하여 달아나거나 또는 살인이나 겁탈한 자는 참수하며 물건을 훔친 자는 12배로 갚게 하며, 소나 말을 죽인 자는 노비로 삼는다. 대체로 법을 시행하는데 있어 엄격하게 하기에 범하는 자가 적으며 또한 길에는 떨어져 있는 물건도 줍지 않는다. 그 풍속에 음사(淫祠)가 많으니 영성(靈星)의 신과 해의 신 그리고 가한신(可汗神)과 기자신(箕子神) 등을 섬긴다. 도읍 동쪽에 신수(神隧)라고 하는 큰 동굴이 있는데 10월이면 언제나 왕이 몸소 제사를 지낸다. 습속에 서적을 좋아하여, 문지기·말먹이꾼의 집에 이르기까지 각기 큰 거리에 커다란 집을 짓고 이를 국당(扄堂)이라 부른다. 자제들이 혼인하기 전까지 밤낮으로 여기에서 글을 읽고 활을 익히게 한다. 서책으로 오경(五經)과 사기(史記) 한서(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손성(孫盛)의 진춘추(晉春秋) 옥편(玉篇) 자통(字統) 자림(字林)등이 있으며 또한 문선(文選)이 있는데 이것을 매우 좋아하여 중히 여긴다.

왕은 고건무(高建武)로 바로 앞선 왕 고원(高元)의 배다른 아우이다. 무덕(武德:618-626) 2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4년에 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고조(高祖)가 수(隋) 말기에 사졸들이 그 땅에 많이 묻힌 것을 생각하여 5년에 고건무에게 글을 내려 이르기를 “짐은 보배로운 명을 삼가 받들어 임금으로 온 세상에 임하였으니 천지인(天地人)의 신령에게 공경으로 따르며 만국을 평안히 할 것이오. 하늘 아래로 두루 사랑을 고르게 하여 어루만져 기르니 해와 달이 비치는 곳에는 모두 잘 다르셔져 편안한 것이요. 왕은 이미 요수(遼水)의 왼편을 도맡아 다스리고 대대로 번복의 땅에 거처하며 정삭(正朔)을 사모하여 받들고 멀리서 조공의 직분을 좇아왔소. 그런 까닭에 사자를 보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성을 펼치니 짐이 매우 가상하게 생각하오. 바야흐로 이제 천하가 편안하여 화락하고 세상이 잘 다스려지니 패옥과 비단이 한껏 왕래를 하고 도로는 막히는 곳이 없소. 이제 한창 화목함을 펼쳐 초빙의 호의를 영원히 도탑게 하고 각자의 강역을 보존하니 어찌 훌륭하고 아름답지 않겠소? 단지 수나라 말년에 군사가 이어지고 환난이 얽어지니 전투로 공방을 치르던 곳에는 각자 자신의 백성들을 잃었으며, 마침내 골육들이 어그러져 멀어지고 가족들이 나뉘어 갈라지게 되었소. 해가 많이 지났다지만 홀아비와 홀어미들은 가슴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하였소. 이제 두 나라가 평화롭게 왕래하여 간격이나 차이를 둘 이유가 없기에, 이곳에 있는 모든 고려인 등은 이미 영을 내려 찾아 모아 놓았기에 얼마지 않아 곧 보낼 것이니, 그곳에 있는 이 나라의 사람들은

왕이 놓아 돌려보내 줌으로써 어루만져 기르는 방안을 힘써 다해 인의로써 용서해 주는 도리를 함께 널리 펴야 할 것이오.”하였다. 그리하여 고건무는 중화 사람들을 모두 수색하여 모으고 예의로 인도하여 보내니 속속 이르는 자가 1만의 숫자가 되므로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7년에 전형부상서(前刑部尙書) 심숙안(沈淑安)을 파견하여 가서 고건무를 상주국 요동군왕 고려왕으로 책봉하고, 아울러 천존상(天尊像)과 도사(道士)를 데리고 그곳에 가서 그들을 위하여 노자(老子)를 강의하니 그 왕 및 도인과 속인 등 보고 듣는 자가 수천 명이었다. 고조가 일찍이 시위하고 있던 신하에게 이르기를 “명분과 실리 사이의 이치는 모름지기 서로 부합해야 한다. 고려가 수나라에 신하라 칭하였지만 끝내는 양제에게 저항하였는데 이 또한 어찌 신하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짐이 만물로부터 존경을 받고자 하는 것은 교만하거나 귀하게 되고자 함이 아니라 단지 이 나라에 자리하며 힘써 베풂으로써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자 한 것인데, 하필이면 그들로 하여금 신하라 일컫게 하여 스스로 잘난 체해야 할 것인가, 곧 조서로서 그들로 하여금 신하라 일컫게 하여 스스로 잘난 체해야 할 것인가, 곧 조서로서 짐의 이 마음을 서술하도록 하라.”하니 시중 배구(裴矩)와 중서시랑 온언박(溫彦博)이 이르기를 “요동의 땅은 주(周)나라 때는 기자(箕子)의 나라였으며 한나라 때는 현토군(玄菟郡)입니다. 위(魏)나라와 진(晉)나라 이전에는 피봉된 강역(彊域) 안쪽으로 가까이 있었으니 신하라고 칭하지 않음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중국이 이적(夷狄)에 대해서는

마치 늘어선 별들에 대한 태양과도 같으니 존귀함을 낮추실 이유가 없으며, 머리를 숙이는 것은 번신의 강역과 같아짐을 말하는 것입니다.”하니 고조가 이에 그만 두었다. 9년에 신라와 백제가 사신을 보내 고건무를 송사하여 이르기를 길을 막아서 조정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서로 더불어 틈이 있으면 누차 서로를 침략하였다. 조서를 내려 원외산기시랑 주자사(朱子奢)가 가서 그들을 화해시켰다. 건무가 표를 올리고 사죄하며 신라와 더불어 사신을 마주하고 회맹(會盟)할 것을 청하였다. 정관(貞觀) 2년(628)에 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격파하니 고건무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고 하례하였으며 아울러 피봉받은 강역의 지도를 올렸다. 5년에 조서를 내려 광주도독부사마 장손사(長孫師)를 파견하여 가서 수나라 때 전사한 군사들의 해골을 거두어 매장하고 고려가 세운 경관(京觀)을 허물었다. 건무는 그 나라가 정벌당할까 두려워하여 이에 장성을 쌓으니 동북의 부여성(夫餘城)으로부터 서남의 바다에 이르니 1천여 리가 되었다. 14년에 그들의 태자 환권(桓權)을 들여보내 예방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치니 태종이 후하게 대접하고 노고를 위로함에 있어 매우 지극하였다. 16년 서부대인 개소문(蓋蘇文)이 관직을 거머쥐고 왕을 범하려 하자 여러 대신들이 고건무와 더불어 논의하여 그를 주살하고자 하였다. 일이 누설되자 소문이 이에 부병(部兵)들을 모두 소집하여 사열을 펼친다고 말하고

아울러 성의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 놓았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 와서 보게 되었는데 개소문이 병사들을 부려 모두 살해하지 죽은 자가 1백여 명이었다. 이어 창고를 불사르며 왕궁으로 달려 들어가 건무를 살해하고 건무의 아우인 대양(大陽)의 아들 장(藏)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스스로 자리에 올라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는데 중국의 병부상서 겸 중서령의 관직과 같은 것이니 그로부터 나라의 정치를 마음대로 하였다. 개소문의 성씨는 천씨(泉氏)이며, 수염이 많은 얼굴에 매우 준수하고 형체가 걸출하였다. 몸에는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있기에 좌우에서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하였다. 항상 그의 부하에게 땅에 부복하게 하고는 그를 밟고 말에 오르며, 말에서 내릴 때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길을 나설 때는 먼저 호위대를 풀어놓고 길을 인도하는 자가 길게 호령하여 길 가는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는데 백성들은 두려워 피하며 모두 스스로 구덩이나 골짜기로 뛰어든다. 태종이 고건무의 죽음을 듣고 그를 위하여 애도식을 거행하고 사신에게 부절을 주어 조문하게 하였다. 17년에 자리를 이은 왕인 장(藏)을 봉하여 요동군왕 고려왕으로 삼았다. 또 사농승 상리현장(相里玄奬)을 파견하여 새서를 지니고 가서 고려를 말로 타일러 신라를 공격하지 말도록 하였다. 개소문이 상리현장에게 말하기를 “고려와 신라는 원한으로 틈이 진 지 이미 오래오. 예전 수(隋)나라 왕실에서 침략해 올 때 신라가 기회를 타고 고려 5백 리의 땅을 약탈하고 그 성읍들을 신라가 모두 차지하고 있소.

스스로 땅과 성을 돌려주지 않으면 이번 싸움은 아마도 그칠 수 없을 것이오.”하였다. 그러자 상리현장이 이르기를 “이미 지나간 일인데 어찌 뒤쫓아 논할 것인가?”하였으나 개소문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태종이 시위하고 있던 신하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막리지는 그의 주인을 해치고 대신들을 모두 살해하였으며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 구덩이에 파묻고 함정에 빠뜨리는 것과 같을 뿐이니 백성들은 더욱이 자칫하면 번번이 죽임을 당하기에 원한과 고통을 마음에 담아두고 길거리에서는 눈짓만 하고 있다. 무릇 군사를 출정시켜 백성을 위로하고 반역자를 문죄하여 토벌하는데는 모름지기 그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왕을 시해하고 백성을 학대한 구실을 내세우면 패퇴시키기 매우 쉬울 것이다.”하였다. 19년 명을 내려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官)을 삼아 장군 상하(常何)등과 강(江), 회(淮), 영(嶺), 협(硤) 등지의 강한 병사 4만 명과 전선 5백 척을 통솔하여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또 특진영국공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官)을 삼고 예부상서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을 부관으로 삼아 장군 장사귀(張士貴) 등과 보병과 기병 6만 명을 통솔하여 요동(遼東)으로 향하게 하였다. 양군이 세력을 합하게 하고, 태종은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가서 합류하게 했다.

여름 4월에 이적의 군대가 요수를 건너 나아가서 개모성(蓋牟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포로 2만 명을 노획하였으며 그 성에 개주(蓋州)를 설치하였다. 5월에 장량의 부장 정명진이 사비성(沙卑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그곳의 남녀 8천여 명을 노획하였다. 이날 이적은 요동성으로 군대를 나아가게 하였다. 태종은 요택(遼澤)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지난날 수나라 군대가 요수(遼水)를 건넜으나 그때는 하늘이 돕지 않아 종군하던 사졸들의 해골이 산야에 두루 흩어져 있으니 진실로 애석하고 탄식할 일이다. 백골을 덮어 주는 도의는 참으로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니 명령으로 모두 거두어들여 매장하도록 하라.”하였다. 국내성(國內城)과 신성(新城)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이 와서 요동을 도왔으나 강하왕 도종이 기병 4천 명을 거느리고 되받아쳐서 크게 격파하고 1천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태종은 요수를 건넌 뒤 조서를 내려 교량을 철거하게 함으로써 사졸들의 결의를 굳게 하였다. 태종은 요동성(遼東城) 아래에 이르러 사졸들이 흙을 져서 구덩이를 메우는 것을 보았다. 태종이 그 중 제일 무거운 것을 나누어 친히 말 위에 실었다. 시종하던 관리들이 송구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다투어 흙을 지고 성 아래로 옮겼다. 이때 이적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고려는 우리에게 포차(抛車)가 있어 3백 근의 돌을 1리 밖까지 날린다는 것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매우 두려워하여, 성 위에 나무를 쌓아 전투누각을 만들어 그것으로 날아오는 돌을 막게 하였다. 이적이 포차를 벌려 놓고 돌을 쏘아 그 성을 공격하니 맞는 곳은 모두 무너졌다. 또 충차(衝車)를 밀어 그 누각에 부딪치니 기울어져 넘어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태종이 친히 갑옷 입은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적과 합세하여 그 성을 에워쌌다. 조금 뒤 남풍이 매우 맹렬하기에 그 서남쪽의 누각에 불을 놓을 것을 명하였다. 불길이 연이어 성중(城中)을 휩쓰니 가옥들이 모두 타버렸다. 전사들이 성에 오르니 적들이 크게 무너지고 불타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으며, 그들의 날랜 군사 1만여 명을 포로로 하고 그 성을 요주(遼州)로 삼았다. 처음에 태종은 정주로부터 매 수십 리마다 봉화대 하나씩 설치를 명하여 요동성까지 이어지게 하고 태자와 약조하기를 요동을 정복하면 봉화를 올릴 것이라 하였다. 이날 태종은 봉화를 올리게 하여 변방의 요새안으로 (소식을) 전했다. 군대를 백애성(白崖城)에 자리하고 공격을 명하였다. 우위대장군 이사마가 쇠뇌의 화살에 맞자, 태종이 친히 피를 빨아 주었다. 장군과 사졸들이 이를 듣고 감동하여 격려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성은 산에 의지하고 물가에 임하여 사면이 험하고 가팔랐다. 이적이 당차(撞車)로 부딪치니, 돌과 화살이 성중에서 빗발같이 쏟아졌다. 6월에 태종이 성의 서북쪽에 이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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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손벌음(孫伐音)이 몰래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며 이르기를 “신이 이미 항복을 원하였으나 그 중에 두 마음을 품은 자가 있습니다.”하므로 조서로서 기치(旗幟)를 하사하여 이르기를 “반드시 항복할 것이면 이것을 성 위에 세워라.”하였다. 손벌음이 성 위에 기치(旗幟)를 세우니 고려는 당의 군사가 성에 오른 것이라 여기고 이에 모두 항복하였다. 당초 요동이 함락될 적에 손벌음이 항복을 구걸하였다가 다시 후회하니, 태종이 그의 언행이 반복한다고 노여워하여 성 안의 사람과 물건들을 전사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허락하였다. 항복을 받기에 이르자 이적이 태종에게 “전사들이 분발하여 앞을 다투며 화살과 돌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은 노획물을 탐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이제 성을 거의 빼앗았는데 어찌하여 다시 그들의 항복을 허락하여 까닭 없이 장군과 사졸의 마음을 저버리십니까?”하였으니 제께서 이르기를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병사를 풀어놓아 살육하게 하고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을 포로로 삼게 하는 것은 짐이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장군의 휘하에 공이 있는 자는 짐이 곳간의 물건으로 상을 줄 것이고, 장군에게서 이 성 하나를 살까한다.”하였다. 마침내 항복을 받아들이니 남녀 1만 명과 병사 2천 4백 명을 노획하였다. 그 성에 암주(巖州)를 설치하였으며 손벌음을 암주자사에 제수하였다. 우리의 군대가 요수를 건너자 막리지가 가시성(加尸城)의 700명을 보내 개모성(蓋牟城)을 지키게 했는데

이적이 그들을 모두 사로잡으니 그 사람들이 모두 군대를 따르며 스스로 공적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그 누가 너희들의 힘을 사용하고자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너희들의 가족들은 모두 가시성(加尸城)에 있으니 너희가 나를 위해 싸우면 저들은 장차 죽음을 당할 것이다. 한 집안의 처자를 죽여가면서 한 사람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이다.”하며 모두 놓아 돌아가게 하였다. 천자의 수레가 나아가서 안시성(安市城)의 북쪽에 머무르며 진영을 펼쳐놓고 군사를 진격시켜 공격하였다. 고려의 북부욕살(北部傉薩) 고연수와 남부욕살(南部傉薩) 고혜정이 고려와 말갈의 무리 15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안시성을 도왔다. 적중에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대로(對盧)가 있어 고연수에게 이르기를 “내 듣기로 중국이 크게 어지러우면 영웅들이 함께 일어난다고 합니다. 진왕(秦王)은 뛰어난 무예로 향하는 곳에는 적이 없었으며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고 남면하여 황제가 되니 북쪽 오랑캐는 항복을 청하고 서쪽 오랑캐는 정성을 바쳤습니다. 지금은 국력을 기울여 이곳에 도착하였기에 용맹한 장수와 날랜 병졸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으므로 그 날카로운 기세는 가히 막아서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계략이 될 만한 것은 싸우지 않고 군사를 돈좌하여 오래도록 지켜 버티는 한편, 날래고 굳센 군사를 나누어 보내 그들의 군량로를 끊으면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군량이 반드시 다할 것이니 싸우고자 하여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고자 하여도 길이 없을 것이다.

즉 이는 싸우지 않고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입니다.”하였으나 연수가 따르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바로 나아갔다. 태종이 밤중에 모든 장수를 불러 몸소 친히 지휘하였다. 이적(李勣)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성의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였으며 장손무기(長孫無忌)는 우진달(牛進達) 등 정병 1만 1천명을 거느리고 기습군이 되어 산의 북쪽으로부터 좁은 계곡에서 나와서 그들의 후미를 들이치게 하였으며 태종은 직접 보병과 기병 4천을 데리고 북과 뿔피리를 숨기고 깃발과 표지를 눕히고 적 병영 북쪽의 높은 봉우리 위로 향하고는 모든 군대에 명령하여 북과 뿔피리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군사를 나아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해당관리에게 명을 내려 조당(朝堂)의 곁에 항복 받을 막사를 차리게 하고 이르기를 “내일 오시(午時)에 여기에서 오랑캐의 항복을 받을 것이다.”하고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나아갔다. 다음날 고연수가 단지 이적(李勣)의 군사만을 보고 더불어 싸우려 하였다. 태종이 무기(無忌)의 군대에서 먼지가 이는 것을 머리서 바라보고 영을 내려 북과 뿔피리를 함께 불게하며 기치를 일제히 들게 하였다. 적의 무리가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나누어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진영이 이미 어지러워졌다. 이적이 창을 지닌 보병 1만 명으로 그들을 공격하니 고연수의 무리가 패하였다. 무기가 군사를 놓아 그들의 후미를 공격하고 태종이 또 산으로부터 내려와 군대를 이끌고 그곳에 다다르니

적들이 크게 무너졌으며 1만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고연수 등이 그 나머지 무리들을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지켰다. 그리하여 무기와 이적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포위하게 하고, 동쪽 하천의 교량을 치워 돌아갈 길을 끊었다. 태종이 고삐를 당기고 서서히 나아가며 적의 진영을 바라보고는 시위하고 있던 신하에게 이르기를 “고려가 국력을 기울여 온 것은 존망이 달려 있어서인데, (대장기를) 한번 흔들자 패하였으니 하늘이 우리를 도운 것이다.”하며 말에서 내려 두 번 절을 올리고 하늘에 감사하였다. 고연수와 고혜진 등이 15만 6천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니 태종은 원문(轅門)으로 인도하여 들였다. 연수 등이 무릎으로 기며 앞으로 나와 깊이 절하고 명을 청하였다. 태종이 욕살(傉薩) 이하 추장 3천5백 명을 가려내어 군직을 수여하고 내지(內地)로 옮겼다. 말갈 천3백 명은 거두어들여 모두 구덩이에 파묻고 나머지 무리들은 놓아 주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말 3만 필과 소 5만 두 및 명광갑(明光甲) 5천 벌을 노획하였으며 다른 장비들도 그만큼은 되었다. 고려국이 깜짝 놀라 두려움에 떨더니 후황성(后黃城)과 은성(銀城) 등은 모두 스스로 함락되니 수백 리에 사람과 인가의 기척이 없었다. 이어서 행차하였던 산을 이름하여 주필산(駐蹕山)이라 하고 장군에게 영을 내려 파진도(波陣圖)를 작성하게 하였으며 중서시랑 허경종(許敬宗)에게 명하여 글을 짓게 하고 돌에 새겨 그 공로를 기록하였다. 고연수에게 홍려경(鴻臚卿)을 그리고 고혜진에게는 사농경(司農卿)을 제수하였다.

장량(張亮)이 또 고려와 더불어 건안성(建安城) 아래에서 다시 싸워 모두 격파하니 길게 늘어서서 에워싸고 공격하게 되었다. 8월에 진영을 안시성(安市城) 동쪽으로 옮기자 이적이 마침내 안시성을 공격하며 고연수 등 항복한 무리들의 진영을 그 성 아래로 끼워 놓고 그들을 불러내었다. 성 안의 사람들은 견고하게 지키고 움직이지 않으며 매번 태종의 지휘 깃발이 보이면 반드시 성에 올라 북을 치고 시끄럽게 굴며 저항하였다. 태종이 매우 노여워하자 이적이 이르기를 “적을 격파하는 날 남자들을 모두 주살하기 바랍니다.”하니 성 안에서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모두 죽음으로 항거하였다. 이에 강하왕 도종에게 영을 내려 토산을 쌓게 하여 성의 동남쪽 모퉁이를 공격하게 하였더니 고려 역시 성가퀴(雉)와 성벽의 담을 더욱 올려 저항하였다. 이적이 그들의 서쪽을 공격하여 포석과 충차로 그들의 망루와 성가퀴를 허물어 버리자 성 안에서 무너지는 곳을 따라 즉각 목책(木柵)을 만들었다. 도종이 나뭇가지로 흙을 쌓아올려 토산을 만들고는, 그 중간에 다섯 길을 내어 나무를 걸치고 흙으로 그 위를 덮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으니 점차 성에 가까이 다다르게 되었다. 도종이 과의도위 부복애(傅伏愛)를 보내 군대의 병력을 거느리고 산꼭대기에서 적을 막게 하며 토산을 점차 높이 올려 그 성을 밀치니 성이 붕괴되었다.

마침 부복애가 사사로이 통솔하던 곳을 떠나 있었는데, 고려인 1백 명이 무너진 성 틈으로 싸웠으며 마침내 토산을 점거하여 구덩이를 파서 길을 끊고 불을 지르고 방패를 둘러 스스로 지켰다. 태종이 크게 노하여 부복애의 머리를 베어 (군중에) 두루 돌려보게 하였다. 모든 장수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사흘이 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태종이 요동의 창고에 군량이 얼마 없고 사졸들이 추위에 떨고 얼어 죽으니 이에 조서를 내려 군대를 돌렸다. 그 성을 지나치자 성 안에서 모두 소리를 죽이고 깃발을 가로뉘었으며 성주가 성에 올라 손으로 절을 하며 받들어 배웅하였다. 태종은 그들이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명주 1백 필을 하사하고 이로써 임금을 섬기는 충절을 격려하였다. 처음에 요동성을 함락할 때에 그 성이 천자의 군대에 항거한 까닭에 응당 노비로 몰수된 자가 1만 4천 명이었는데 모두 앞서 모아 유주(幽州)로 보냈다가 장차 장수와 사졸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였다. 태종은 그들이 부모와 처자가 하루아침에 흩어질 것을 가엾게 여겨, 벼슬아치에게 영을 내려 그들의 값에 준하는 베와 비단으로 속(贖)으로 치르게 하고 사면하여 백성으로 삼았다. 그 무리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3일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고연수는 스스로 항복한 뒤 항상 탄식을 거듭하다 얼마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고혜진은 결국 장안에 이르렀다. 20년에 고려가 사신을 보내와 사죄하고 아울러 두 미녀를 바쳤다.

태종이 그들의 사신에게 일러 이르기를 “돌아가서 너희 군주에게 이르라. 미색이라는 것은 사람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며, 너희가 바친 사람은 실로 아름답고 곱다. 그러나 본국에서 부모형제와 떨어져 온 것을 가련하게 여기기에 그들을 머물러두게 하는 것은 그들의 친지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요, 그들의 미색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상처 입게 하는 것이기에 나는 취하지 않을 것이다.”하며 모두 돌려보냈다. 22년에 또 우무위장군 설만철(薛萬徹) 등을 파견하여 청구도로 가서 그들을 정벌하니 설만철은 바다를 건너 압록수로 들어가 진격하여 박작성(泊灼城)을 격파하고 노획한 포로가 매우 많았다. 태종이 또 강남에 명하여 큰 배를 만들게 하고 섬주자사 손복가(孫伏伽)를 보내 용감한 사졸들을 불러 모집하게 하였으며 내주자사 이도유(李道裕)에게 군량과 장비를 운송하여 오호도(烏胡島)에 쌓아두게 하고는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끝내 시행하지 못하고 태종이 세상을 떠났다. 고종이 제위를 잇고 또 병부상서 임아상(任雅相)과 좌무위대장군 소정방(蘇定方) 및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 등에게 명하여 전후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모두 큰 공 없이 돌아왔다. 건봉(乾封) 원년에 고장(高藏)이 그의 아들을 들여보내 예방하고 태산 아래서 시중들게 하였다.

그해 개소문(蓋蘇文)이 죽자 그의 아들 남생(男生)이 대를 이어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는데 그 아우 남건(男建) 및 남산(男産)과 화목하지 못하고 각기 붕당을 수립하여 서로 공격하였다. 남생이 둘째 아우에 의해 축출되자 국내성(國內城)으로 달아나 사수하며 그의 아들 헌성(獻誠)을 보내 궁궐로 찾아와 구원하여 줄 것을 애원하였다. 조서를 내려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남생이 몸을 탈출해 도망하니 조서를 내려 특진 요동대도독 겸 평양도안무대사에 제수하고 현토군공에 봉하였다. 11월에 사공(司空) 영국공 이적에게 명하여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비장 곽대봉(郭待封)등을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2년 2월에 이적이 요하를 건너 신성에 이르러 모든 장수에게 이르기를 “신성은 고려의 서쪽 경계의 진성(鎭城)으로 가장 요해지이니 만약 먼저 도모하지 못한다면 나머지 성 역시 쉽게 항복시킬 수 없다.”하고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신성의 서남쪽에서 산에 의지하여 목책을 쌓아 놓고 공격도 하고 수비도 하니, 성 안에서는 곤궁하고 급박하여 자주 항복하는 자가 있었다. 이로부터 향하는 곳마다 극복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고장과 남건이 태대형(太大兄) 남산을 보내 수령 98명을 데리고

흰 깃발을 가지고 나와 항복하며 또한 입조할 것을 청하니 이적이 예의를 갖추고 불러들여 만나보았다. 그러나 남건은 여전히 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총장(總長) 원년 9월에 이적이 또 진영을 평양성의 남쪽으로 옮기니 남건이 번번히 군사를 보내어 나와 싸웠으나 모두 크게 패하였다. 남건 휘하의 병사(兵事)를 총관하던 승려 신성(信誠)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군중으로 찾아와 성문을 열어 내응하겠다고 하였다. 5일이 지나자 신성이 과연 성문을 열었다. 이적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 성에 올라 북을 치고 떠들썩하게 하며 성문의 누각을 불사르니 사면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남건이 다급해지자 스스로 자신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11월에 평양성을 쳐서 빼앗고 고장과 남건 등을 포로로 하였다. 12월에 경사에 이르러 함원궁(含元宮)에 포로를 바치고 승리를 알리는 의식을 치렀다. 조서를 내려 고장은 그 정사(政事)를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하여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을 제수하고 남산(男産)은 먼저 항복하였기에 사재소경(司宰少卿)에 제수하고 남건(男建)은 검주(黔州)에 유배시켰으며 남생(男生)은 향도한 공이 있기에 우위대장군에 제수하고 변국공(卞國公)에 봉하였으며 특진 등의 관직은 예전처럼 하였다. 고려국(高麗國)은 예전에 다섯 부로 나뉘어져 1백 76성, 69만 7천호였는데, 이에 그 땅을 나누어 9개 도독부(都督部)와 42개 주(州) 그리고 1백여 개의 현(縣)을 설치하였으며

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통치하게 하였다. 우두머리로 공로가 있는 자들을 뽑아 도독(都督)과 자사(刺史) 및 현령(縣令)을 제수하고 중화인과 더불어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어서 좌무위장군 설인귀를 파견하여 군사를 총괄하고 진무하게 하였으나 그 후에 도망하여 흩어지는 자가 제법 있었다. 의봉(儀鳳) 연간에 고종이 고장(高藏)을 개부의동삼사 요동도독에 제수하고 조선왕에 봉하여 안동에 거처하게 하며 본번을 진무하는 군주가 되게 하였다. 고장이 안동에 이르자 몰래 말갈과 더불어 서로 왕래하며 반역을 꾀하였다. 일이 발각되자 소환하여 공주(邛州)에 유배하였다. 나머지 사람들을 나누어 옮겨 하남(河南)과 농우(隴右) 등 여러 주로 흩어지게 하고 빈약한 자들은 안동성(安東城) 부근에 머무르게 하였다. 영순(永淳) 초 고장이 죽자 위위경(衛尉卿)에 추증하고 조서를 내려 경사에 운구하게 한 뒤 힐리(頡利)의 묘 좌측으로 매장지를 하사하고 겸하여 비석을 세워 주었다. 수공(垂拱) 2년에 또 고장의 손자 보원(寶元)을 봉하여 조선군왕으로 삼았다. 성력(聖曆) 원년에 좌응양위대장군으로 올려 제수하고 충성국왕(忠誠國王)으로 봉하였다. 안동의 옛 가구들을 통솔하여 다스리도록 위임하려하였지만 결국에는 실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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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에 또 고장의 아들 덕무(德武)를 제수하여 안동도독으로 삼고 본번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로부터 고려의 옛 가구로서 안동에 있는 것이 점차 줄어들었으며 나뉘어져 돌궐과 말갈 등에 의지하여 머무르니 고씨 군장은 마침내 단절되었다. 의봉(儀鳳) 초에 남생(男生)이 장안에서 죽으니 병주대도독에 추증하였다. 아들 헌성(獻誠)을 우위대장군으로 제수하고 우림위상하를 겸임시켰다. 천수(天授) 연간에 측천(則天)이 일찍이 금·은·보물을 내어 놓고 재상 및 남북 관청의 문무관중 활을 잘 쏘는 자 다섯 명을 가려 뽑게 하여 함께 내기를 하였다. 내사 장광보가 먼저 헌성에게 1등을 양보하자, 헌성이 다시 우옥검위대장군 설토마지(薛土摩支)에게 사양하였으며 설토마지가 또 헌성에게 사양하니 헌성이 아뢰기를 “폐하께서 활에 능한 자 다섯 명을 가려 뽑을 것을 명하셨는데 간택된 자가 대부분 한관(漢官) 출신이 아닙니다. 신은 이후로부터 한관이 활을 잘 쏜다는 명성이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명궁을 가려 뽑는 일을 중도에 그만두었으면 합니다.”하니 측천이 가상히 여기고 그의 말을 따랐다. 이때 혹리(酷吏) 내준신이 일찍이 헌성에게 재물을 요구하였는데 헌성이 거절하고 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준신이 그가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하여 목을 졸라 죽였다. 측천이 후에 그의 억울함을 알고 우우림위대장군에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개장(改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