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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 발단은 AD238년의 공손씨 멸망에 있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7. 2.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한 원인은 238년에 공손씨 멸망에 있더군요.

 고구려가 吳와 魏 사이에서 동맹국을 선택하는 고민을 하다가 결국 魏를 선택하고...

관구검이 공손씨를 공격할때 도와줍니다.

 

《삼국지》〈공손탁전〉
景初元年, 乃遣幽州刺史毌丘儉等齎璽書徵淵. 淵遂發兵, 逆於遼隧, 與儉等戰. 儉等不利而還.
경초 원년, 이에 유주자사 관구검 등에게 새서를 주어 공손연을 징벌하도록 보내었다. 공손연은 군사를 일으켜 요수遼隧에서 관구검 등과 싸웠다. 관구검 등은 불리하여 돌아왔다.

 

이때가 AD237년입니다.

결국 공격에 실패하고 돌아와서 다음해에 다시 공손씨를 공격하죠.

 

《삼국지》〈공손탁전〉

二年春, 遣太尉司馬宣王征淵. ...중략.... 傳淵首洛陽, 遼東、帶方、樂浪、玄菟悉平.
2년 봄, 태위 사마선왕을 보내어 공손연을 정벌토록 했다. ...중략... 공손연의 머리를 낙양으로 전하여 요동·대방·낙랑·현토가 모두 평정되었다.

 

그런데 이때 고구려가 군사를 보내 魏를 도와줍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十二年 魏太傅司馬宣王率衆討公孫淵 王遣主簿大加 將兵千人助之

12년(AD238)에 위나라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公孫淵)을 치니, 임금은 주부(主簿), 대가(大加)를 보내 군사 천 명을 이끌고 그것을 돕게 하였다.

 

이 전쟁이 魏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고 그 영토를 나누게 됩니다. 그 영토를 나누는 과정이 삼국지에 나옵니다. 아마 이 전쟁에서 마한도 참여했던가 봅니다.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중략...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校勘 130] [註021]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경초 연간(AD237~239)에 명제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두 군(郡)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에게는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중략... 부종사 오림이 낙랑(樂浪)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辰韓) 8국을 분할하여 낙랑(樂浪)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마한의) 신지(臣智)는 (진)한을 격분하게 하여 (진한이)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이 때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흔이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하였으나 이군(二郡)은 마침내 (진)한을 멸하였다.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요동군 지역 즉 공손씨의 본거지는 魏가 갖고, 낙랑과 대방지역은 마한의 신지에게 봉국 형식으로 하사하였고, 더불어서 마한의 신지에게 진한 땅도 나누어 줄 것 처럼 하였으나, 이것이 진한의 원한을 사서 진한이 대방군을 공격하였죠. 결국 진한은 망하게 됩니다.

 

앞서 이 전쟁에 고구려도 참전하였는데, 고구려에게는 아무런 보답이 안돌아 갑니다.

뭔가 좀 이상하죠. 魏에게 이용만 당하고 영토는 얻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남당사료에 보입니다.

 

《고구려사략》동양대제 12년(AD238)

八月, 滅<淵>, <懿>背約驕傲, 上怒絶之. 

8월에 공손연을 멸하였으나 사마의는 약속을 저버리고 교만하여 거들먹거리니, 임금께서 노하시어 사마의와 연락을 끊으셨다.

 

무슨 약속을 하였을까요?

당연히 공손연 땅을 나눠갖자는 것이겠죠.

그러나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에 보듯이 고구려는 땅을 받지 못하고, 마한과 魏가 나눠갖습니다.

 

그러자 4년 뒤에 고구려는 魏가 공손씨로부터 빼앗은 요동군을 공격하여 빼앗습니다.

약속을 저버린 것을 응징하려던 것이죠.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천왕 16년(AD242)

十六年 王遣將襲破遼東西安平

16년(242)에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시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깨뜨렸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격으로 AD246년에 魏가 쳐들어와 동천왕이 옥저까지 피난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