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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韓那奚(한나해)가 항복한 이유가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구려가 약해졌기때문이라고 한 말은 오류이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3. 3.
일반적으로 큰 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그 주변의 위성국가들을 먼저 공격하여 큰 나라가 힘을 못쓰게 하여야한다.
唐國(당국)도 고구려를 공격하기 전에 고구려 남쪽에 작은나라인 백제를 먼저 멸망시킨 후에야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불변으로 고대나 중세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런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 역사의 해석을 거꾸로 하는 경우가 있다. 
우선 삼국지에 나온 기록을 보자.

경초(景初) 연간(AD237~239)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帶方太守) 유흔(劉昕)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帶方•樂浪의] 두 군(郡)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에게는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의 벼슬 주었다….중략…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은 낙랑(樂浪)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辰韓) 8국을 분할하여 낙랑(樂浪)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신책첨한국(臣幘沾韓國)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帶方郡)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대방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준(遵)은 전사하였으나 2군은 마침내 한(韓)을 멸(滅)하였다.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韓.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이 시기에 魏國(위국)은 고구려 주변의 여러 나라를 정벌하는데 힘을 쏟았다.

정시(正始) 6년(AD 245)에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대방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은 단단대령(單單大領) 동쪽의 예(濊)가 고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불내후(不耐侯)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그 다음해에 또 예맥을 魏國(위국)이 공격하였다.

정시(正始) 7년(AD 246) 여름 5월 예맥(濊貊)을 토벌하여 모두 깨뜨렸다. 한나해(韓那奚) 따위의 수십개 나라가 그들 부족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삼국지 위지 三小帝紀]


이러한 일련의 주변 소국을 공격한 사건이 있은 후 AD246년 가을에 魏國(위국)은 고구려를 침공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이는 이런 사건을 두고 이렇게 해석하는데 매우 잘못되었다.

관구검의 고구려 공격이 있은 후부터 위나라가 우세해져서 한(韓) 나해(那奚) 등 수십국이 위나라에 항복함으로써 이 전쟁은 위나라의 승리로 끝이 났다. [http://home.megapass.net/~hsg1000/a210l.htm에서 인용]


그러나 이 말은 틀렸다.
왜그런가.

고구려를 치기 위해서는 그 주변의 작은나라를 먼져 공격하여 없애야지 고구려를 공격할때에 魏國(위국)이 편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魏國(위국)은 고구려를 침범하기 전에 그주변의 예맥과 한(韓)을 쳐서 복속시켰다.
魏國(위국)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고구려 수도를 공격을 먼저한 것이 아니라, 그 주변 소국인 한(韓)과 예맥을 먼져 공격하여 이들을 복속시키고 그런 다음에 고구려 수도를 공격하였으니 이 고구려 공격이 246년 가을에 일어난 일이다.

魏國(위국)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魏國(위국)이 우세하여 한나해(韓那奚) 따위 수십국이 항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고구려 남쪽과 서쪽 주변에 있던 한(韓)과 예맥이 멸망하자 고구려의 세력이 약화되어 魏國(위국)이 맘놓고 고구려를 침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삼국사기에 고구려를 위나라가 246년 가을에 공격하였다고 적은 것이다. 
AD244부터 AD246년 여름까지 있던 위나라의 공격은 모두 고구려 주변국가인 한(韓)과 예맥을 공격한 것이지 고구려 수도를 공격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