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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4

고구려에도 상경 중경 하경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사료가 너무 부족하여 가끔가다 헷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중국은 제가 알기로 앞쪽을 남쪽으로 보는 습성이 있다고 하죠.우리나라도 고려중기와 중세조선을 지나면서 중국의 영향을 받아 앞쪽을 남쪽으로 보는 습성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그런데 우리나라는 고대에 앞쪽을 북쪽으로 보았던 것 같고, 그렇기에 하평양(下平壤)이 남평양(南平壤)이 되는 것입니다. (이하 글에서는 "앞쪽=위쪽"으로 봤다는 전제가 들어갑니다) 고구려 사람이 생각하는 앞쪽은 북쪽고구려는 어떤 책력을 사용하였을까요?해동역사에서 유환기문(游宦記聞)의 기록을 인용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해동역사 권17 성력지고려국에는 구집력(九執曆)이 있다. 그 법은 하늘은 왼쪽으로 돌고, 해와 달 역시 왼쪽으로 돈다. 하루의 밤과 낮은 해가 뜨고 .. 2009. 12. 12.
관구검이 새겼다는 不耐城은 국내성(불이성)을 말하는가? 유리왕은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를 합니다. 그 당시 국제적 성황으로 볼때 유리왕은 동부여를 피하여 서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볼 수 있죠. 남당사료에는 국내성 즉 불이성이 북부여 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환도성과 국내성이 서로 인접하였다고 말하고 있죠. 이는 관구검이 새긴 不耐城과 국내성인 不而城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유리왕이 천도한 不而城과 관구검이 공격한 丸都城의 위치不而城은 漢의 낙랑군 不而縣으로 생각됩니다. 그 위치를 살펴보면... 新唐書 卷四十三下 志 第三十三下 自鴨淥江口舟行百餘里,乃小舫泝(溯)流東北三十里至泊汋口,得渤海之境。又泝(溯)流五百里,至丸都縣城,故高麗王都。又東北泝(溯)流二百里,至神州。 압록강 어귀에서 배로 100여리를 가고, 이내 작은 배를 타고 동북으로 3.. 2009. 12. 9.
고구려에도 도읍이 3개가 있었다. 上都, 中都, 下都. 고구려는 도읍을 여러번 옮겨다녔습니다. 그리고 그 도읍들은 각각 상도上都와 중도中都와 하도下都라고 불리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서 "상 중 하"란 도읍의 급수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죠. 예를 들어서 오늘날 상급 도읍을 서울이고, 중급 도읍은 부산이고, 하급 도읍은 인천이나 대구정도 되겠죠. 고대에도 이런 분류법에 의하여 상도와 중도와 하도를 만들었고, 때에따라 상도에 서울을 세우기도 하고 중도에 서울을 세우기도 하고 하도에 서울을 세우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그 상도와 중도와 하도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한편, 우리나라 사서가 너무 부족한 까닭에 가끔 남북과 위아래에 대한 관념이 중국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연 고대에 앞쪽을 남쪽이라고 했을까요? 제가보기에는 앞쪽은 북쪽입니다. 우리나라도 .. 2009. 11. 27.
불이성과 불내성 유리왕은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를 합니다. 그 당시 국제적 성황으로 볼때 유리왕은 동부여를 피하여 서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볼 수 있죠. 남당사료에는 국내성 즉 불이성이 북부여 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환도성과 국내성이 서로 인접하였다고 말하고 있죠. 이는 관구검이 새긴 不耐城과 국내성인 不而城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유리왕이 천도한 不而城과 관구검이 공격한 丸都城의 위치 不而城은 漢의 낙랑군 不而縣으로 생각됩니다. 그 위치를 살펴보면... 新唐書 卷四十三下 志 第三十三下 自鴨淥江口舟行百餘里,乃小舫泝(溯)流東北三十里至泊汋口,得渤海之境。又泝(溯)流五百里,至丸都縣城,故高麗王都。又東北泝(溯)流二百里,至神州。 압 록강 어귀에서 배로 100여리를 가고, 이내 작은 배를 타고 동북으로.. 2009. 1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