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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압록강과 익주강과의 관계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2. 15.
청나라 건륭제 당시 기록된 만주원류고와 그 보다 앞서 강희연간에 양빈(楊賓)이 찬한 柳邊紀略에 기재된 압록강의 다른 명칭을 보면 그 위치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압록강은 황룡부의 익주와 관련이 있고, 일명 익주강(益州江)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발해에서 익주치소를 지나기에 붙여진 것이라는 기록도 있고, 여기서의 익주는 요사에서 황룡부 소속의 익주를 말한다고 만주원류고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고대 지명대사전에는 황룡부가 길림성 농안현이라고 하였고, 백도백과에서는 익주의 치소는 농안현 소성자향에 있는 소성우고성(今农安县小城子乡小城于古城)이라고 하였군요. 거란지리지에도 황룡부의 위치가 잘 나와 있습니다.
만주원류고 원문 번역문 및 주석은 제가 역주하여 곧 출간예정인 만주원류고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만주원류고 권11
元一統志 賔州之西 曰黄龍府 即石晉少帝初安置之地[주]
遼史 益州 觀察 屬黄龍府 統縣一 靜逺縣
金史 收國元年正月 上自将攻黄龍府 進臨益州 州人走保黄龍 取餘民以歸 留羅索{見前} 尼楚赫{滿洲語珠也 舊作銀术可 今改}守黄龍 上率兵趨達嚕噶城{蒙古語頭目也 舊作達魯古 今改}次寜江州西

『원일통지』 빈주(賔州)의 서쪽을 황룡부(黄龍府)라 부른다. 곧 석진(石晉) 소제(少帝)를 처음에 안치한 곳이다.
『요사』 익주(益州)는 관찰(觀察)을 두어 황룡부에 속하였다. 관할 현은 정원현(靜逺縣) 하나이다.
『금사』 수국 원년(1115) 정월 황제가 몸소 황룡부를 칠 때에 익주(益州)로 진공하자 州의 사람들이 달아나 황룡부를 지켰다. 나머지 주민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유라색(留羅索){앞을 참조} 니초혁(尼楚赫){만주어로 구슬(珠)이다. 이전에 은출가(銀术可)로 쓴 것을 이번에 고침}이 황룡을 지켰다. 황제가 군사를 이끌고 달로갈성(達嚕噶城){몽고어로 우두머리(頭目)이다. 이전에 달로고(達魯古)로 쓴 것을 이번에 고침}으로 달려가면서 영강주(寜江州) 서쪽으로 갔다.
[주] 후진(後晋) 少帝(914~964) 즉 석중귀(石重貴), 946년 거란병이 개봉에 침입하여 황제를 포로로 사로잡아 갔다. 뒤에 건주(建州)에서 죽었다. (백도백과)


許亢宗奉使行程録 自托色貝勒寨九十里 至曼濟勒噶{蒙古語纓絡也 舊作漫七離 今改}貝勒寨 道旁有契丹舊益州 賔州空城 又六十里 至古烏舍寨 寨枕混同江 過江四十里 至呼勒希{滿洲語愚蒙也 舊作和里閑 今改}寨 又東行五里 即有潰堰斷塹 自北而南莫知逺近 界隔甚明 乃契丹昔與女真兩國古界也 八十里直至拉林河
『허항종봉사행정록』 탁색패륵채(托色貝勒寨)에서 90리를 가서 만제륵갈(曼濟勒噶){몽고어로 주옥을 연결한 장식품(纓絡:영락)이다. 이전에 만칠리(漫七離)로 쓴 것을 이번에 고침}패륵채(貝勒寨)에 닿았다. 길 옆에 거란의 구 익주(益州)와 텅빈 빈주(賔州)성이 있다. 또 60리를 가서 옛 오사채(烏舍寨)에 닿았다. 채(寨)는 혼동강(混同江)가에 있다. 강을 지나 40리를 가서 호륵희(呼勒希){만주어로 우둔함(愚蒙)이다. 이전에 화리한(和里閑)으로 쓴 것을 이번에 고침}채에 닿았다. 또 동쪽으로 5리를 가니 곧 제방을 무너뜨려 끊은 곳이 있다. 이곳에서 북쪽은 사막의 남쪽으로서 원근(逺近)을 알 수 있고, 경계가 떨어진 것이 분명하다. 이에 따라 이전에 거란과 여진 양국이 경계로 삼았다.  80리를 곧바로 가서 납림하(拉林河)에 닿았다.

[지도 : 거란지리도]

○遼史 卷三十八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
龍州,黃龍府。本渤海扶余府。太祖平渤海還,至此崩,
有黃龍見,更名。保寧七年,軍將燕頗叛,府廢。開泰九年,
遷城於東北,以宗州、檀州漢戶一千復置。統州五、縣三:
黃龍縣。本渤海長平縣,並富利、佐慕、肅慎置。
遷民縣。本渤海水寧縣,並豐水、扶羅置。
永平縣。渤海置。
益州,觀察。屬黃龍府。統縣一:
靜遠縣。
安遠州,懷義軍,刺史。屬黃龍府。
威州,武寧軍,刺史。屬黃龍府。
清州,建寧軍,刺史。屬黃龍府。
雍州,刺史。屬黃龍府。

요사에는 황룡부에 속한 주가 5개(익주, 안원주, 위주, 청주, 옹주)이고, 현이 3개(황룡현, 천민현, 영평현)이라고 하였는데, 그 중 익주가 있습니다.

○扶余国(백도백과)
黄龙府属东京道(今辽宁省辽阳市),统5州(益州、安远州、威州、清州、 雍州)、3县(黄龙县、迁民县、永平县),是辽的政治军事重地。
  在军事上,黄龙府郡部署司统领信州(今怀德县秦家屯古城)彭圣军书度使、宪州(今农安靠山乡广元店古城)怀氏军节度使、祥州(今农安万金塔乡万金塔古城)瑞圣军节度使、益州(今农安县小城子乡小城于古城)观察使、威州(今农安县三宝乡小城子古城)刺史。这些军队都驻在黄龙府附近。
익주 (현 농안현 소성자향 소성우고성)

○柳邊紀略  (清)楊賓 撰
鴨綠江 【 即益州江或呼靉江唐書作馬訾水源出長白山明萬歷十九年為大清所併】
압록강 [즉 익주강 또는 호애강이라 한다. 당서에는 마자수가 장백산에서 발원한다고 하였다. 명 만력 19년 대청에 의해 병합되었다.]

만주원류고 권15
髙麗圖經 鴨緑之水 源出靺鞨 其色如鴨頭 故以名之 去遼東五百里 又西與一水合 即鹽難水也 二水合流 西南至安平城入海 髙麗之中 此水最大 波瀾清徹 其國恃此 以為天塹 水濶三百歩 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 遼水東南四百八十里 自遼水印即屬契丹  大金以其地不毛  不復城守 徒為徃來之道而已{按 鴨緑水其色如鴨頭 乃史家傳會之論 詳見完顔部條}
明統志 鴨緑江在遼東都司城東五百六十里{按 鴨緑江在吉林烏拉南九百七十里源出長白山 西南流與朝鮮分界 至鳯凰城東南入海 即古馬訾水 亦名益州江 盖渤海益州所治也 見前疆域門}

『고려도경』 압록수는 말갈에서 발원하는데 그 빛깔이 오리머리와 같다고 하여 이름이 지어졌다. 요동에서 5백 리 떨어져 있고 그 서쪽에서 강 하나와 합쳐지는데 곧 염난수(鹽難水)이다. 두 강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에서 이 강이 가장 크다. 물결이 맑고 깨끗하며 그 나라는 이곳을 천연의 해자로 믿는다. 강의 너비는 3백 보이며 평양성(平壤城)의 서북 450리, 요수(遼水)의 동남 480리에 있다. 요수(遼水)의 동쪽은 거란에 속하는데 대금에서 그 땅이 불모지이므로 다시 성을 두어 방비하지 않았다. 단지 걸어 다니는 길로 사용될 뿐이었다. {살펴보면, 압록강의 색깔이 오리머리와 같다고 한 것은 사가들의 견강부회이다. 자세한 것은 완안부조 참조}
『명통지』 압록강은 요동도사성(遼東都司城) 동쪽 560리에 있다. {살펴보면, 압록강은 길림오랍(吉林烏拉)의 남쪽 970리에 있는데 장백산에서 발원한다. 서남쪽으로 흘러 조선과의 경계를 따라 봉황성(鳯凰城) 동남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곧 옛 마자수(馬訾水)이다. 또 익주강(益州江)이라고도 하는데 아마도 발해 익주(益州)의 치소일 것이다. 앞의 강역문을 참조}

만주원류고 권10
益州
遼史 東京益州 觀察 屬黄龍府
契丹國志 宋政和五年 金太祖攻遼 取賓 祥 威三州 進薄益州 {按 鴨緑江 一名益州江 則益州實與鴨緑江近 當在長白山西南 遼改屬黄龍府 遼史 不言仍渤海之舊 或因其名 而不必即其故地也}[주]

『요사』 동경 익주(益州)에는 관찰(觀察)을 두었으며 황룡부에 속한다.
『거란국지』에는 宋 정화 5년(1115) 金 태조가 요나라를 쳐서 빈(賓) 상(祥) 위(威) 세 주를 빼앗고, 익주(益州)로 진군하였다. {살펴보면, 압록강(鴨緑江)은 일명 익주강(益州江)이다. 곧 익주(益州)는 실제 압록강과 가깝다. 그러므로 당연히 장백산(長白山) 서남쪽에 있다. 요나라에서 고쳐서 황룡부(黄龍府)에 속하게 하였다. 『요사』에서는 발해의 것을 그대로 썼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나, 그 이름을 썼기 때문에 그 옛 지역이라는 것을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주] 이책에서 ‘압록강(鴨緑江)은 일명 익주강(益州江)이다.’라는 매우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익주(益州)는 현 압록강 부근일 것이라고 사족을 붙이고 있다. 익주(益州)의 위치는 『금사』본기를 보면 “수국(收國) 원년(1115) 1월 5일(병자) 上은 친히 황룡부(黃龍部)를 공격하기 위하여 군사를 진군시켜 익주(益州)에 이르렀다. 익주 사람들이 황룡부(黃龍部)를 지키려고 달아나서 익주의 잔여주민을 취하여 돌아왔다.
요(遼)는 도통 야율와리타, 좌부통 소을설, 우부통 야율장노, 도감 소사불류를 파견하여 기병 20만 명, 보병 7만 명으로 변경을 수비토록 하였다. 上은 루실 은출가를 남겨두어 황룡(黃龍)을 지키도록 하였고, 병을 이끌고 달로고성(達魯古城)으로 향하는 길에 영강주(寧江州) 서쪽에서 숙영하였다. ”고 되어 있다. (윤명수, 금사,완안출판사. pp.65.~66.인용) ( 新校本金史/本紀/太祖阿骨打/收國元年 丙子,上自將攻黃龍府,進臨益州.州人走保黃龍,取其餘民以歸.遼遣都統耶律訛里타、左副統蕭乙薛、右副統耶律張奴、都監蕭謝佛留,騎二十萬、步卒七萬戍邊.留婁室、銀출可守黃龍,上率兵趨達魯古城,次寧江州西)

위 내용은 그 이전해 10월, 11월에는 금나라와 요나라가 영강주(寧江州)와 압자하(鴨子河) 빈주(賓州) 함주(咸州)에서 싸우고 나서 계속하여, 금 태조가 요나라 동쪽 변경을 공격하자 요나라가 군사를 파견해 방어하는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1115년 금 태조는 도읍을 상경 회녕부(현 흑룡강성 하얼빈 동남쪽 아성현)에 두고 있었다. 황룡부(黃龍部)는 현 길림성 농안현이라고 알려져 있다. 상경(아성현)에서 황룡부(농안현)을 쳐들어 가니 황룡부 가까이 있던 익주성 주민이 황룡부로 달아난 것이다.
따라서 익주성은 황룡부(농안현) 인근에 있고, 압록강 또한 그 부근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황룡부 인근의 큰 강으로는 동요하(東遼河), 음마하(飮馬河), 송화강(松花江)인데 그 중 현재의 지도로 보면 송화강 또는 음마하가 압록강일 가능성이 높은데, 동요하도 황룡부와 가까이 있어서 압록강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인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따르면 금나라 상경(회녕부)은 현 흑룡강성 아성현(阿城, 하얼빈시 남쪽) 남쪽 4리에 있는 백성(白城)이라고 하였다. (또한 영고탑의 서남지역이라는 『청일통지』의 기술이 틀렸다고 부언하였다.) 또 황룡부가 길림성 농안(農安)현이라고 하였으므로 익주는 농안현과 가깝다. 익주가 장백(현 백두산)과 가깝다는 본문의 내용은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겠다. 현재 지도로 볼 때 아성현에서 농안을 가려면 송화강(松花江)과 음마하(飮馬河)를 지나야 한다. 물론 금사 지리지 상경로에 기재된 산 중에는 장백(長白)이 있으나 오늘날의 백두산(지나에서 장백산이라 부름)이 아닌 다른 산이다.


솟대 (2009-10-24 11:35:40)      
그림화일이름이 영문이 아니라 한글로 되어 있어 깨지는데 이름을 바꿔주시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솟대 (2009-10-24 11:37:51)      
선생님 새로운 사료 감사올립니다.
익주강에 관한 언급은 또 새로운 보탬이 되겠습니다.
다만, 명말청초와 청말에 강역의 지명이 동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이를 새롭게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만주원류고가 언급한 Text가 된 사료는 요사,금사이고 '거란국지'도 남송 때, 섭융례(葉隆 禮)가 지었으니 이 시기의 압록은 모두 대흥안령 서쪽이나 현 요하서쪽으로 보아야 하니 위치비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최소한 동으로 보아도 서요하나 대릉하등을 보아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덧붙여 요사의 장백산이 현재의 대흥안령산맥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또한, 요사에 압자하가 나오는데 그동안 이 부분이 저도 혼동되었지만 압자하는 압록강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강임이 분명하다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압자하는 거란 상경과 폐지된 동경의 북방에 위치한 금나라 발흥지(후대의 상경회녕부) 사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위도나 경도상으로 고려의 압록강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또 거란상경과 후대의 상경회녕부가 되는 금 발흥지 사이에 냉산(사시사철 추운산)이 있다 하였는데 최소한 하얼빈정도의 위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 까 보고 있습니다.

요사의 압자하는 완안부와 거란상경사이에 위치하였고 거란의 황제들이 거의 몇해마다 봄마다 가서 휴식을 겸하여 일종의 의례로 낚시를 하였으므로 고려의 압록강과는 전혀 다른 강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명대초기의 려진족인 올량합-조선왕조실록의 올량합-의 원위치는 현재의 대흥안령이동이 아니라 대흥안령이서의 부이르호일대이고 명대전기에 려진족이 동남쪽(정정)으로 내려오며서 대흥안령이동으로 넘어오는데 그래도 그 위치는 송화강이 아니라 눈하가 있는 치치하얼일대과 대경과 송원일대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 부분은 최근에 깨닫고 이제 보려는 것이라 아직 글을 올리진 못하지만 명대초기만 하여도 요녕성 강평인근의 동요하와 서요하의 합수점인 삼분하를 중심으로 요하이동과 그 이북의 하얼빈과 치치하얼일대는 조선에 복속된 올량합-후의 건주여진 포함-등의 려진부의 정착지였고 명나라 영락제가 북원과 전쟁할때인 명초때만 하여도 명의 관직을 받은 려진부족의 지도자들인 내안朵顏、복여福餘、태녕泰寧의 올량합 3부의 위치 또한 대흥안령 이서인 몽골 후룬베이의 Buir호 일대부터 그 아래로 내려오며 위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두 북경쪽으로 내려와 임서,파림우기가 위치한 대흥안령산맥근처와 그 아래를 제외하고 모두 대흥안령산맥 이서지역입니다.
따라서, 거란과 금나라의 지명 또한 앞으로 다시 검토해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보는중이지만 나중에 만주원류고을 2쇄나 3쇄를 하게 되신다면 이런 부분의 타당성이 있는지 검토해주시면 어떨지 말씀올립니다.

이제, 수년간 애쓰시면 번역하신 만주원류고가 곧 출간되어 나온다고 하니 상당히 기쁘고 축하드립니다.
많이 판매되어서 좀더 새로운 인식이 확산되기를 기원올립니다.

백송 (2009-10-24 15:24:04)      
솟대님의 의견 감사합니다.
장백산이 대흥안령일것이라는 의견은 매우 타당하고 저도 동감하고 있습니다.
저도 만주원류고 주석에 이미 그러한 것을 반영하였습니다.

만주원류고 권15
明統志 嫩河{原訛腦温 今改正} 在開原北千里 源出長白山{明志 舛誤今仍原文駁正於後} 南流入松花江{按 嫩江 在齊齊哈爾城西五里 古名難水亦曰那河 源出内興安嶺 由黙爾根城西北流至齊齊哈爾東北 繞西往南經杜爾伯特郭爾羅斯界入混同江 明時稱腦温 又稱諾尼 音有緩急不同耳至明統志既云出長白山 即無南流入松花江之理 既係南流入松花江 即斷非長白山 所出其謬不待辨也[주6]}

『명통지』 눈하(嫩河){원문은 腦温(뇌온)으로 잘못 쓴 것을 이번에 고침} 는 개원(開原) 북쪽 천 리에 있는데 장백산(長白山)에서 발원한다. {『명지』의 착오에 대하여는 뒤에 반박하여 정정한다.} 남쪽으로 흘러 송화강(松花江)으로 들어간다. {눈강(嫩江)은 제제하이성(齊齊哈爾城) 서쪽 5리에 있고 옛 이름은 난수(難水)로서 나하(那河)라고도 한다. 내흥안령(内興安嶺)에서 발원하여 묵이근성(黙爾根城:현 눈강현)을 지나 서북쪽으로 흘러 제제하이성(齊齊哈爾城) 동북에 이르러 서쪽으로 감돌아 남쪽으로 흘러 두이백특(杜爾伯特) 곽이라사(郭爾羅斯) 경계를 지나서 혼동강으로 들어간다. 명나라 때에 뇌온(腦温) 또는 낙니(諾尼)라고 불렀는데 발음에 완급이 있어 같지는 않을 뿐이다. 『명통지』에서 이미 장백산(長白山)에서 나온다고 하였으니 남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갈 리가 만무한데도, 남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간다고 하였으니는 이것은 결단코 장백산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그 잘못에 대하여는 변명을 들어볼 필요도 없다.}
[주6] 눈강이 발원하는 대흥안령 북쪽의 내몽고자치구와 흑룡강성 경계에는 대백산(大白山:1529m)이 있다. 『명통지』에서는 대백산을 장백산으로 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의 편저자들은 장백산을 지금의 백두산 한곳으로 고정시켜 놓고 보면, 눈강의 흐름이 설명이 되지 아니하므로 명통지의 기록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장백산은 한 곳이 아니라 최소한 3-4개소가 나타는데,
금사에 나오는 백산, 장백산도 마찬가지입니다. 냉산도 장백산과 함께 나오기도 하는데, 저는 장백산과 냉산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장백산은 원사,금사 등을 볼 때,최소한 기록에 따라서는 대흥안령의 대백산, 흑룡강성의 평정산, 대독정자산으로 비정되기도 합니다. 현 백두산이 장백산으로 굳어지게 된 것은 명대 중기 이후가 아닌가 추정됩니다.

압록강의 물빛이 오리머리같아서 압록이라 하였다는 기록에 대하여 만주원류고 역자들은 단호하게 한족 학자들의 견강부회라고 부인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동북 민족의 현지 발음을 따서 한자로 옮기면서 생긴 오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백송 (2009-10-24 15:26:31)      
솟대님/
만주원류고 발간에 관심과 격려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원고는 올 4월초에 출판사에 보냈는데, 출판사의 사정에 따라 아직까지 발간이 이루어 지지
않고 있습니다. 충실한 번역이 되도록 노력하였고, 많은 주석을 달아서 읽기 쉽게 한다고는 하였으나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솟대 (2009-10-24 17:27:47)      
그리고 말씀하신 수계문제에 대해 추가로 명나라 전기의 흑룡강,혼동강,송화강을 대략적으로 섣부르지만 짐작해보면,
요사에서 말하는
흑룡강은 대흥안령산맥 이서의 부이르호나 후룬호에 합수되는 흑룡강 상류수계이고
혼동강은 현재의 눈하로
송화강은 현 백두산에서 서북류하여 눈하와 합수하여 동류하는 현 송화가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즉, 명대와 청대에 인식할 수 있는 송화강과 혼동강의 범위가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명청교체기전후의 지명이동과 함께 후대의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았는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확인되어져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