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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

by 부르칸 2015. 4. 3.

28수 신명

등우

「요(堯) ∙ 순(舜) ∙ 우(禹)임금은 후덕(厚德)함으로 나라를 일으켰다.」

등우는 명철한 지혜와 깊고 원대한 생각으로 왕을 보필

광무제는 등우의 덕으로 천하(天下)경륜

 등 우(鄧禹)의 자(字)는 중화(仲華)로, 남양(南陽) 신야(新野)사람이다. 열세 살에 시경(詩經)을 암송했고, 장안(長安)에서 공부했다. 그때에 광무(光武) 또한 장안에 유학와 있었는데, 비록 우(禹)가 나이는 어렸으나 광무가 범인(凡人)이 아님을 알아보고 그와 가깝게 지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한 (漢)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경시(更始)가 즉위했는데, 호걸들이 대부분 등우를 천거했으나 우는 경시를 좇지 않았다. 그 후 광무가 하북(下北)에 군사를 모아 정돈시켜 놓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책략을 품고 하수(河水)를 건너 복(僕) 땅에 이르렀다.

 광 무가 그를 보고 매우 기뻐하여 말하기를『나는 마음대로 벼슬을 줄 수가 있습니다, 선생께서 멀리서 오셨으니, 정녕 벼슬하기를 원하십니까?』 우가 답하길『원치 않습니다.』 광무가 말하길『그렇다면 무얼 원하십니까?』 우가 답하길『공께서 훌륭하신 덕(德)을 사해(四海)에 펼치심에 제가 미력이나마 보태어 공명을 죽백에 드리우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광무가 웃으며 함께 머물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우가 책략을 바쳐 말하길『경시가 비록 관서에 도읍을 정하였지만, 지금 산동지역은 아직 불안하고, 적미(赤眉)와 청독(靑犢)의 무리는 한번 모였다하면 수만 명이 움직이고, 삼보(三輔)는 명분을 빌어 자주 군중을 모으고 있습니다. 경시는 이제껏 싸움에 저본 적이 없어 교만하여 정책을 스스로 듣고 결정치 아니하고, 장수들은 모두가 용렬한 이들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라 뜻은 재물에 있으면서 위력 사용하기를 다투어 조석(朝夕)으로 스스로 좋아할 따름이오, 진실 되고 명철한 지혜나 깊고 원대한 생각을 가지고 임금을 보필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하는 이들은 없습니다.

 지 금 천하는 분열되어 흩어져 그 형세를 가히 짐작할 수 있나니, 때문에 공께서 비록 제후로써 천자(天子)를 보좌하는 공을 세우신다해도 그 공이 오히려 성립되지 않을까 두렵나이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영웅들을 맞아들여 민심을 편하게 함에 힘쓰시어 고조(高祖:始祖)의 업적을 세우셔서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시는 것이 제일입니다. 현재 공의 신분으로서는 천하를 염려하신다해도 평정할 수가 없습니다.』광무가 듣고 크게 기뻐하여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등우를 등장군(鄧將軍)이라 부르게 하고, 항상 그를 막사에 머물게 하여 그와 더불어 계책을 의논하고 결정했다.

 왕 랑(王郞)이 군사를 일으켰다. 광무는 계땅으로부터 신도(信都)로 와서 등우로 하여금 결사대 수천 명을 뽑아 직접 그들을 거느리고 별도로 낙양을 공략하도록 했다. 그 후 우가 광무를 좇아 광아에 이르렀는데, 광무가 성의 누곽에서 머물면서 지도를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우에게 말하길『천하에 제후국들의 형세가 이와 같으니, 나는 이제야 그 중의 한 모퉁이를 얻었오. 일전에 그대께서 나의 신분으로 천하를 도모하면 평정하기에 부족할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이제 어찌해야 되겠오?』우가 답하길 『오늘날 세상이 소란하니 백성들이 훌륭한 임금을 고대하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합니다. 옛날의 요·순·우(堯·舜·禹)나 탕·무(湯·武)께서 나라를 일으키실 때는 덕이 두터운가 아닌가에 그 성패가 달려 있었지 차지한 땅이 큰가 작은가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이 말을 들은 광무가 기뻐했다. 때로 광무는 우를 찾아가 장수들을 임명토록 했는데, 우가 천거하는 자들은 매번 그 재주가 직분에 꼭 맞았으므로 광무는 우가 사람을 볼 줄 안다고 여겼다. 한번은 우로 하여금 별도로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합연 등과 더불어 청양땅에서 동마를 치도록 했는데, 합연 등이 먼저 갔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성을 지키려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 적들에게 포위 당했다. 마침내 우가 진격하여 적들을 격파하고 그 대장을 생포했다. 광무를 좇아 적을 추격하여 포양(浦陽)땅에 이르러서 연이어 크게 승리하여, 이에 북주가 평정되었다.

 적 미(赤眉)가 서쪽에서 성문으로 진입해 오자 경시가 정국상공(定國上公) 직위에 있는 왕광(王匡)·양읍왕(襄邑王) 성단(成丹) 등과 항위장군(抗威將軍) 유균(劉均) 및 뭇 장수들로 하여금 하동·홍농 지역에 분산 주둔하여 그들을 막게 했다. 적미의 군사가 워낙 수가 많았으므로 왕광 등이 당해내질 못했다. 한편 광무는 적미가 틀림없이 장안을 함락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여 틈을 타서 관주지역을 방어코자 했으나, 자신은 산동 지역을 지켜야 했으므로 누구를 대신 보내야 할지 모르다가, 우가 침착하고 도량이 컸으므로 우에게 서쪽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그에게 전장군(前將軍)의 벼슬을 배수하고, 휘하의 정예병 이만 명을 나누어서 서쪽으로 파견하여 성안으로 들어오도록 지시하고, 또 우 스스로 보좌관 및 이하 함께 행동할 만한 자들을 선발토록 했다. 이때 군사(軍司 : 감독관)는 한흠(韓歆)이었고, 제주(祭主)로는 이문·이춘·정려(李文·李春·挺廬) 등 3인이었고, 적노장군(積弩將軍), 요기장군(堯騎將軍)은 번숭이었고 차기장군(車騎將軍)은 종흠(宗歆)이었고 건위장군(建威將軍)은 등심(鄧尋)이었고 적미장군(赤眉將軍)은 경흔였고 군사장군(軍師將軍)은 좌간이었으니, 이들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갔다.

 건 무 원년 정월 우가 기관으로부터 하동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하동도의가 성문을 지켜 열어주지 않자 우가 공략하여 열흘 만에 대파하고, 군중에 필요한 장비 및 물품을 천여 수레나 포획하였다. 이렇듯 포위를 뚫고 들어가 읍에 안착하려 하였는데 수개월이 지나도록 완전히 항복 받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때 경시의 대장군 번삼(樊參)이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대야현을 지나 우를 공격해 왔다. 우는 장수들을 보내어 해땅 남쪽에서 그들을 반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그 대장인 삼의 목을 베었다. 이때에 다시 왕광·성단·유균 등이 합병하여 군사 십여 만을 거느리고 우를 공격하니, 우의 진영이 불리해졌고 요가 장군 번숭도 전사했다. 저녁 무렵이 되어 싸움이 일단 끝나자 군사 한흠 및 이하 장군들이 병세(兵勢)가 이미 기운 것을 알고 모두 우에게 밤을 틈타 도주할 것을 권했으나 우는 듣지 않을 계획이었는데 광(匡) 등이 육갑을 따져 불길한 날이라 하여 출전치 않으니, 우가 이 때문에 군대를 정비할 수 있었다. 그 이튿날 아침 광이 군사를 총 동원하여 우를 공격하니, 우는 군중에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적군이 진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격 명령을 내리니, 장군들이 북을 치며 함께 진격해 적을 크게 무찔렀다. 광 등이 모두 병사를 버리고 도망가니, 우가 날쌘 기마병을 거느리고 급히 추격하여 유균 및 하동태수 양보·시절충랑장 미강을 잡아 목을 베었다.

 이 전투에서 사신들의 부절(符節)을 획득한 것이 여섯이요, 관리들의 도장과 끈을 획득한 것이 오백이요, 병기를 거둬들인 것은 셀 수 없었으며, 이로써 하동지역은 마침내 평정되었다. 옛 제도를 이어 이문(李文)을 하동 태수로 임명하고 나머지는 소속현의 우두머리들에게 맡겨 전쟁의 뒤처리를 하게 했다. 이 달에 광무는 효땅에서 즉위하여 고조가 되었다. 광무제는 사신을 보내어 우를 대사도에 임명하며 말하길『지금 임명하는 권장군 우는 사람됨이 매우 충효롭고 이전에는 짐과 더불어 진영 안에서 천리 밖 싸움의 승패를 도모하였었다. 공자께서도「내게 안회가 있은 뒤로 제자들이 서로 더욱 우애로와 졌다.」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더욱이 우는 적장들의 목을 베고 적군을 격파하여 산서 지방을 평정하였으니, 그 공이 더욱 뛰어나다. 지금 백성들은 서로 친하고, 아비는 의롭고 어미는 인자하고 형은 우애롭고 동생은 공손하고 자식은 효성스러워야 한다는 오품 또한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으니, 그대가 사가 되어 이 다섯 가지 가르침을 받들어 널리 펼쳐 오교(五敎)는 실행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 봉거도위(奉車都尉)를 통해 대사도의 도장과 그에 맞는 도장 끈을 보내어 등우를 제후로 봉하고 만 호의 식읍을 내리나니 공경할 진저! 이 당시 우의 나이는 스물넷이었다.

마침내 분음하를 건너 하양 땅에 들어갔다. 경시의 중랑장 좌보도위인 공승이 군사 십만을 이끌고 좌빙의 군사와 더불어 아현에서 우를 막으니, 우가 다시 그들을 패주시켰다.

 한 편 적미가 수도 장안으로 침입해 이 때에 경기지역을 지키는 삼보(三輔) 관리들이 연달아 거듭 패했고, 적미(赤眉)가 지나가는 곳은 많은 사람들이 살상(殺傷) 당하니, 백성들이 의지할 데가 없었다. 그러던 중 우가 승승장구하고 그의 군사들은 행동에 규율이 있어 포악하지 않다는 소문을 듣고는 모두들 우를 고대하여 혹은 처자를 거느리고 혹은 짐을 등에 지고 와서 우의 군사를 맞이하니, 항복해 오는 자가 하루에 천명이 넘었고 군사는 백만을 헤아렸다. 우는 지나는 곳마다 모두 수레를 멈추고 속도를 늦춰 투항해 오는 자들을 위로하니, 머리가 반백이 된 노인네 아직 상투도 틀지 않은 어린 아이들이 그이 수레아래 모여들어 감동하고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명성이 광서 지역에 떨쳐지니, 광무제가 기뻐하여 여러 번 서신을 보내 칭찬하셨다. 여러 호걸 장수들이 등우에게 장안을 빨리 공격하자고 간청했다.

 우 가 말하길 『안 된다. 지금 우리 군사가 비록 많다 하나 능히 싸울 수 있는 자는 적고, 현재 군량미도 넉넉지 않은데다가 앞으로도 물자를 보충하기가 어렵다. 반면 적미는 이제 막 장안을 함락시킨 터라 군수물자가 넉넉하고 무기도 날카로우니 당해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릇 적미의 무리는 도적떼들이 모여 있는 것이라 하루를 지탱할 만한 계략도 없으니, 비록 군수물자가 풍부하다고 하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상태다. 그러니 견고히 장안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마침 상군과 북지군 안정 세 개 군은 땅이 넓고 사람은 적으며 곡식과 가축이 많으니, 나는 그곳에 머물며 군사를 휴식시키고 군량미를 보충해 병사들을 먹이리라. 그러면서 적미의 무리가 쇠약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하리라.』 그리하여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 순읍에 이르렀다. 우가 도착하여 적미측의 진영을 격파하니 군읍의 관리들이 성문을 열고 투항해 왔다. 서하태노인 종육이 아들을 통해 항복문을 올려 보내니 우가 광무제가 계신 낙양으로 그것을 보냈다.

 관 중지역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우가 오래도록 출병치 않자 무제께서 칙명을 내려 말씀하길 『요임금께서 망하려는 적은 휴포한 임금과 같다. 이제 난세를 당하여, 장안의 관리들이 의지할 데 없이 불안하고 다급해있다. 그대는 마땅히 이 때를 틈타 출병하여 서경을 진압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동요치 않게 하라.』 우는 이와 같은 뜻을 받고 곧 장군들을 파견하여 상군 지역의 여러 현을 각기 공략케 하고, 병사와 곡식을 보충하여 북지군의 대요현으로 돌아왔다. 적노장군 빙석과 거기장군 종흠을 파견하여 순읍을 지키도록 했는데, 두 사람이 권력을 다투어 서로를 공격하여 마침내 빙석이 종흠을 살해하고 이어서 우를 공격하니 우가 저령을 보내어 무제께 이 사실을 알렸다. 무제께서 전령에서 묻기를 『빙석과 제일 친한 이가 누구냐?』 아뢰길 『호군 황방입니다.』 무제께서는 빙석과 황방의 사이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고 서로를 반드시 미워하게 될 것이라고 헤아리셔서, 우에게 전하여 말씀하길 『빙석을 잡을 자는 반드시 황방이다.』 그리고는 상서 종광을 보내어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황방을 항복시키도록 했다. 그로부터 한달 남짓 되어 황방이 과연 빙석을 잡아들이고, 그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와 처벌해 줄 것을 청했다. 경시의 장군 왕광 호은 등도 종광에게 와서 항복하여, 모두 함께 동도(東都)로 돌아오는데, 도중 아읍에 이르러서 그들이 도망치려 하자 종광이 모두 목을 베어 버렸다. 빙석은 낙양에 돌아와서 사면 받아 죽음을 면했다.

 건 무 2년 봄에 광무는 다시 사자를 보내어 우를 양후로 봉하고 식읍으로 네 개 현을 내렸다. 이때에 적미는 서쪽 부풍군으로 달아나 있었다. 우는 남쪽으로 장안에 이르러 곤명지(昆明池)에 주둔하고는 크게 잔치를 베풀어 병사들을 먹였다. 그리고는 장군들을 거느리고 목욕재계하고 길일을 택하여 고묘(高廟)에서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냈다. 그곳에서 11제신주(帝神主)를 모셔다가 사신을 시켜 낙양으로 받들어 가게 하여 능에다 이사(吏士)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등 우가 병사를 거느리고 남전에서 연잠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운양으로 다시 돌아와 살았다. 한중왕(漢中王) 유가(劉嘉)가 등우에게 가서 항복하도록 하였다. 유가의 재상 이보(李寶)가 거만하고 무례하여 등우가 그의 목을 베었다. 이보의 아우가 이보의 부곡민을 거느리고 등우를 공격하여 그의 장군 경흔을 죽였다.

 빙 석이 반란을 일으킨 후에 등우의 위세가 점점 약해지고 식량도 떨어져서 등우에게 귀속했던 사람들이 흩어져 떠나갔다. 그때 적미가 다시 장안으로 들어왔는데 등우가 그들과 싸우다 패하여 고등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군사들은 굶주려서 모두 대추와 채소만을 먹었다. 황제가 이에 등우를 불러들여 칙명을 내려 말하기를 『적미가 식량이 없어 동쪽으로 온 것이니 내가 그들을 꾸짖을 테니 여러 장군들은 걱정할 바가 아니다. 경망스럽게 진병하지 말아라.』

등우는 임무를 받고도 공을 이루지 못했음을 부끄러이 여겨 여러 차례 굶주린 병사들을 이끌고 싸움을 걸었으나 매번 불리하였다.

 건 무 3년 봄, 거기 장군 등홍(鄧弘)과 적미를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패하여 병사들은 모두 죽고 흩어졌다. 그 일은 빙이전(憑異傳)에 보인다. 등우는 홀로 24기병을 이끌고 의양에 들어와 대사도 양흔의 인끈을 바치고 사죄하였다. 왕은 조서를 내려 제후의 인끈을 되돌려 주었다. 몇 개월 후, 우장군(右將軍)을 배수받았다.

 연 잠이 동양에서 패하여 마침내 진흥과 합세하였는데, 건무 4년 봄, 순양에서 다시 노략질하였다. 왕은 등우를 파견하여 복한장군 등엽, 보한장군 우광을 도와 연잠을 등현에서 격파하고 무당까지 추격하여 다시 그들을 깨뜨렸다. 연잠이 한중으로 도망갔는데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건 무 13년, 천하가 평정되자 왕은 여러 공신들의 호읍(戶邑)을 더해주었다. 등우는 고밀후(高密侯)로 완전히 봉해져 고밀·창안·이안·순우(高密·昌安·夷安·淳于) 등 4개 현을 식읍으로 다스렸다. 황제는 등우의 공이 높다고 여겨 그 아우 등관(鄧寬)을 명친후(明親侯)로 삼았다. 그 후 좌우장군의 관직이 없어지자 특진으로 조청에 봉해졌다.

 등 우는 안으로 문장이 밝고 행동이 돈독하며 부모를 효성스럽게 섬겼다. 세상이 편안해지자 항상 국가와 사회가 화평하기를 바랐다. 자식이 열 셋이 있었는데 각기 한 가지 재주씩은 갖추도록 하였다. 규문(閨門)을 잘 다스리고 자손을 가르쳤으니 후세의 모범이 될 만 하였다. 식읍에서 거두어들인 것만으로 살림을 하였으며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황제가 더욱 그를 중히 여겼다. 중원(中元) 원년 다시 사도의 일을 보다가 동쪽으로 왕을 좇아 순수하여 대종(垈宗)을 배수받았다.

 현 종이 즉위하여 등우가 선제(先帝)의 으뜸 공신임을 어여삐 여겨 태부(太傅)로 삼았다. 알현할 때 동쪽으로 향하게 하니 그에 대한 총애와 존경이 매우 심하였다. 1년여를 더 살다가 병이 들었다. 황제는 여러 번 몸소 병문안을 가서 두 아들을 랑(朗)으로 삼았다. 영평(永平) 원년 57세로 죽으니 시호를 원후(元候)라 하였다.


마성

마 성(馬成)은 자(字)가 군천(君遷)이고 남양군(南陽郡) 극양현(棘陽懸) 사람이다. 젊어서 현리(懸吏)를 지냈다. 세조(世祖)가 영천(潁川)을 순행(洵行)할 때 마성을 안집연(安集椽)으로 삼았다가 다시 겹의 현령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세조가 하북(河北)을 토벌할 때 마성은 곧 관직을 버리고 포졸로 따라 나서서 포양(蒲陽)까지 쫓아갔는데 왕은 마성을 기문(期門)으로 삼아 정벌에 따라다니게 하였다.

 건 무(建武) 4년 양무장군(揚武將軍)으로 배수하고 주로장군(誅擄將軍) 유륭(劉隆), 진위장군(振威將軍) 송등(宋登), 사성교위(射聲校尉) 왕상 등을 이끌고 회계 단양(丹陽), 구강(九江), 육안(六安)의 4개 군의 병사들을 징발하여 이헌(李憲)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때는 왕이 수춘(壽春)에 행차 하여 제단을 쌓고 예(禮)에 따라 그에게 장군을 배수하고 파견한 것이었다. 나아가 서(舒)에서 이헌을 포위하고 각 군대로 하여금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도록 하였다. 이헌이 여러 번 도전하였으나 마성은 멱을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았다. 1년여를 지키다가 건무 6년 봄, 성중에 식량이 떨어진 때를 이용해 그곳을 공격하여 마침내 서(舒)를 평정하고 이헌의 목을 베고 그 나머지 무리들을 추격하여 강회(江淮) 땅을 모두 평정시켰다.

건 무 7년 여름에 왕은 마성을 평서후로 봉했다. 건무 8년, 왕을 따라 정벌 나가 외효를 깨뜨린 공으로 천수(天水) 태수로 정해지고 전처럼 군대를 거느리게 되었다. 겨울에 부름을 받고 장안(長安)으로 돌아왔다. 건무 9년, 래합을 대신하여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무위장군(武威將軍) 유상(劉尙) 등을 인솔하고 정벌 가서 하지(河池)를 깨뜨리고 무도(武都)를 평정하였다. 그 다음해 대사공(大司空)이 이통(李通)이 파면 당하여 마성이 대사공의 일을 하였는데 훌륭하게 그 일을 맡아보아서 정말 대사공 같았다. 몇 개월 후에 다시 양무장군(揚武將軍)으로 배수받았다.

 건 무 14년 성산(常山), 중산(中山)에 주둔하여 북쪽 변방을 지켰다. 아울러 마성은 건의대장군(建義大將軍) 주우를 거느리고 주둔하였다. 또한 표기대장군 두무(杜茂)를 대신하여 장벽과 요새를 보수하였으며 서하(西河)에서 위교(渭橋)까지, 태원(太原)에서 천경까지, 중산(中山)에서 업까지 모두 보루와 성벽을 쌓고 봉화대를 세웠으며 십리에 하나씩 정찰소를 두었다. 일을 맡아 본지 5∼6년이 되어 왕은 마성의 수고로움을 헤아려서 경사로 불러서 돌아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많은 변방 사람들이 다시 마성을 파견해서 주둔케 해주십사고 요구하는 서를 올렸다. 남쪽으로 홀로 내려가 요새(要塞)를 막아 지켜서 북방(北方)에는 사고가 없었다. 왕은 마성(馬成)을 중산의 태수로 배수하여 장군 인수(印綬)는 올리게 하였다. 여전히 병사를 이끌고 주둔케 하였다. 건무 24년 남쪽으로 무계만(武谿蠻)의 적을 공격하였으나 공을 세우지 못하여 태수의 인수(印綬)를 바쳤다. 건무 27년 마성을 전초후(全椒侯)로 정하여 봉하여 주니 자신의 식읍으로 나아갔다. 건무 32년 죽었다.


오한

오 한(吳漢)은 자(字)가 자안(子顔)이고 남양(南陽)의 원(苑) 사람이다. 집이 가난하여 현(懸)의 급사(給事)로 정장(亭長)을 지냈다. 왕망(王莽) 말엽에 빈객(賓客)으로 법을 범했는데 이로 인해 어양(漁陽)으로 망명을 가게 되었다. 쓸 돈이 떨어지자 말 장수를 하면서 연(燕)과 계지방 사이를 왕래했는데 가는 곳마다 호걸들과 교분을 가졌다. 갱시(更始)가 즉위하여 사자(使者) 한홍(韓鴻)으로 하여금 하북(河北)을 순시케 하였다. 이때 어떤 이가 한홍에게 이르길 『오자안(吳子顔)은 기사입니다. 그와 더불어 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한홍이 오한을 불러 들였는데 만나 보고서 매우 흡족해 했다. 마침내 천자의 명을 받들어 그에게 안락령(安樂令)이라는 벼슬을 제수했다.

 왕 랑(王郞)의 봉기를 당하여 북주(北州)가 소란스러웠다. 오한은 평소에 광무(光武)의 훌륭함을 들어왔던 터라 이 기회에 그에게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에 태수(太守) 팽총(彭寵)에게 말하길 『어양(漁陽) 상곡의 돌격대는 그 명성이 천하에 자자합니다. 태수께서는 어찌 두 군(郡)의 접예부대를 합하여 유공(劉公)을 따라 한단을 치지 않는 것입니까? 이는 다시 오기 어려운 기회인줄로 압니다.』 그러나 관속(官屬)들이 모두 왕랑을 따르길 원해 팽총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오한은 이에 인사하고 나와서는 외정(外亭)에 머물렀는데 태수 관속의 무리들을 어떻게 속여서라도 해보려고 했으나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유 생(儒生)처럼 보이는 사람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그를 부르게 하고는 먹을 것을 내주고 소문을 물었다. 지나가는 곳이면 군현(郡縣)이 그에게로 귀속되는 바이지만, 한단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실재로 유씨(劉氏)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한이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광무의 조서를 가장하여 어양에 격문(檄文)을 띄우고 한편으로는 그 유생으로 하여금 팽총에게 가게 하여 들은 바를 낱낱이 얘기하게 했다. 그리고 오한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팽총이 정말 그렇겠다고 여기고 오한으로 하여금 어양의 군대와 상곡의 여러 장수들을 합군(合軍)하여 남쪽으로 내려가게 했는데 이르는 곳마다 왕랑의 장수들을 격참(擊斬)시켰다. 광무가 광아(廣阿)에 이르러서 오한을 편장군(偏將軍)으로 삼았다. 한단을 함락시키고 나서는 그에게 건책후(建策候)라는 호를 내렸다.

 오 한은 사람됨이 질후(質厚)했으나 학문이 짧아 문장으로 자신의 뜻을 빨리 표달시킬 수 없었다. 등우(鄧禹)와 여러 장수들이 이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자주 천거했는데 기용되어서는 신임을 받아 늘 문하(門下)에 머물렀다. 광무가 장차 유주의 병력(兵力)을 징발하려고 밤에 등우를 불러 누구를 보냈으면 좋을지를 물었다. 더불어 여러 번 얘기를 했었는데 『그 사람은 용기도 있고 지모(智謀)도 있어 그에 미치는 장수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라고 하자 곧바로 오한을 대장군(大將軍)에 제수(除授)하고 부신(符信)을 주어 북으로 열 군(郡)의 돌기병(突騎兵:돌격대와 같음)을 징발토록 했다. 갱시(更始) 휘하의 유주목 묘증(苗曾)이 이를 듣고는 은밀히 군대를 통어(統御)하며 제군(諸郡)에 조서를 내려 징발에 응하지 말도록 했다. 오한은 이에 기병 스무 기(騎)를 이끌고 먼저 무종(無終)으로 달려갔는데 묘증은 오한의 군대가 방비가 없을 것으로 여겨 길가로 나가 맞아들이려고 했다. 오한이 곧바로 기병을 지휘하여 묘증의 목을 베고 그 군속(軍屬)들을 빼앗았다.

 북 주(北州)가 놀라 모든 성읍(城邑)이 멀리서 소식만 듣고는 뜻을 따르기로 했다. 드디어 병력을 모두 징발하여 이들을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광무와 청양에서 합류했다. 뭇 장수들이 오한이 돌아오는데 군사와 말이 매우 많음을 보고는 모두 말하길 『어찌 저 병사들을 갈라 다른 장수들에게 주지 않으랴.』라고 했다. 오한이 막부에 이르자 장수들이 병부(兵簿)를 올려 병사들을 많이 청했다. 이를 보다 못한 광무가 말하길 『그대들은 남에게 병사들을 주지 못해 안달이더니 이제 와서 병사를 청함이 어찌 또 그리도 많은고?』하니 병사를 청했던 장수들이 모두 부끄러워하였다.

 애 초에 갱시가 상서령(尙書令) 사궁(謝躬)으로 하여금 여섯 장군을 이끌고 왕랑을 공격하게 했는데 항복시키지 못했다. 광무가 당도하여 함께 하단을 평정했다. 그런데 사궁의 부장군(副將軍)이 약탈을 일삼고 상관의 지시를 잘 받지 않아 광무가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비록 함께 하단성 안에 있었으나 마침내는 성(城)을 나누어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로 안부는 취할 수 있었다. 사궁은 늘 직무에 근실했는데 광무가 칭찬하기를 『사상서령(謝尙書令)이 진짜 관리이다.』라 했다. 그러자 사궁은 광무를 의심치 않았다. 사궁은 이미 그 병사들을 거느리고 업으로 돌아가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광무는 남쪽으로 내려가 청독(靑犢)을 치고는 사궁에게 말했다. 『나는 사견에서 적들을 따라가 꼭 쳐부수겠다.

 군 도들로 산양에 머무는 놈들은 이로 인해 기세가 꺾여 도망칠 것이다. 만일 그대의 위력으로 이들을 쳐 대오를 흩트린다면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사궁은 쾌히 응낙했다. 광무가 청독을 함락시키자 군도들이 과연 북쪽 용려산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사궁이 이와 때를 맞추어 대장군 유경과 위군태수 진강을 머물게 하여 업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여러 장군들을 이끌고 도망가는 군도들을 추격했다.

 궁 지에 빠진 도적들이 사력을 다해 덤벼들었는데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었다. 마침내 사궁은 크게 패하였고 죽은 자도 수천이 되었다. 광무가 사궁의 성 밖에 있는 틈을 타 오한과 잠팽을 시켜 그 성을 치게 했다. 오한이 우선 변사를 보내 진강에게 유세케 하였다. 『제가 듣기로 상지자는 위험에 처하지 않고도 난을 구제하며, 중지자는 위기로 인해 공을 세우고, 하지자는 위기에 안주하려다 저절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위기와 패망의 다다름은 사람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이니 잘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 새 경사(京師)는 패하여 어지럽고 사방이 소란스러움은 그대도 들어 아는 바이며 소왕의 군대가 강성하고 병사들이 좇아 하북이 그에게로 돌아섰음은 그대가 본 바입니다. 사궁이 안으로는 소왕을 배신하고 밖으로는 민심을 잃었음은 그대가 아는 바입니다. 그대는 지금 위태한 성을 지키면서 멸망의 화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에 신의가 설 바가 아니요 충절 또한 이루어질 바가 아닙니다.

문 을 열어 우리 군대를 받아들임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가 됨은 물론 하지자의 패망을 면하고 중지자의 공을 거두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도모할 수 있는 최상의 방책입니다. 이를 듣고 진강은 그렇다고 여기고 유경과 사궁의 처자(妻子)들을 잡아들이고 성문을 열어 오한 등을 맞아 들였다. 사궁이 융려(隆慮)로부터 업으로 돌아왔는데 진강이 이미 그를 배신했음을 알지 못했으므로 수백 명의 기병과 함께 가벼이 성으로 들어왔다. 오한의 복병들이 사궁을 잡아 손으로 쳐죽이자 따르던 그의 병사들이 모두 항복했다.

 사궁의 자는 자장(子張)으로 남양(南陽) 사람이었다.

애 초에 그의 처가 광무가 그를 제대로 대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알고 늘 사궁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당신과 유공(劉公)은 전력(戰力)면에서 서로 능가할 수 없는데도 그 사람의 헛소리를 믿고 방비를 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제압당하고 말 것입니다.』라 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그와 같은 난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광 무가 북진해 군적(群賊)을 쳐부술 때 오한은 늘 돌격대 5천기를 거느리고 선봉에 섰는데 자주 앞장서서 성에 올라 진(陳)을 허물어뜨리곤 했다. 하북(河北)이 평정되자, 오한과 여러 장수들이 도서(圖書)를 받들고 존호(尊號)를 올렸다. 광무가 즉위하여 오한에게 대사마(大司馬)를 제수하고 다시 무양후(舞陽侯)에 봉했다.

 건 무 2년 봄에 오한은 대사공(大司空) 왕량(王梁)과 건의대장군(建義大將軍) 주우(朱祐), 대장군 두무(杜武), 집금오(執金吾) 가복(賈復), 양화장군(揚化將軍) 견심 편장군(偏將軍) 왕패(王覇) 기도위(騎都尉) 유융(劉隆)·마무(馬武)·음식(陰識) 등과 함께 업성 동쪽 장수(獐水) 근처에서 단향적(檀鄕賊)들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는데 항복한 사람의 수가 10여 만에 달했다. 광무제가 사자(使者) 편에서 새서(璽書)를 보내 오한을 광평후(廣平侯)로 삼고 광평 척장(斥獐), 곡주(曲周), 광년(廣年) 등의 네 현을 식읍으로 주었다.

 오 한은 다시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업의 서산적(西山賊), 여백경 등과 하내(河內)의 수무적 등 여기저기서 주둔하던 적들을 모두 격파했다. 어가(御駕)가 당도해 수고를 치하했다. 다시 오한으로 하여금 남양으로 진격하여 왼, 열(涅), 양(陽), 양(孃), 신야(新野) 등의 여러 성을 치게 했는데 모두 함락시켰다.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진풍과 황우수(黃郵水) 근처에서 싸워 격파시켰다. 또 편장군 풍이와 함께 창성오루적(昌城五樓賊) 장문(張文) 등을 쳐부수고 신안(新安)에서 동마(銅馬)·오번(五燔) 적을 공격했는데 모두 격파했다.

 그 이듬해 봄에 건위대장군(建威大將軍) 경감과 호아대장군(虎牙大將軍) 합연을 거느리고 지의 서쪽에서 청독(靑犢)을 크게 부수고 항복시켰다. 또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두무(杜茂) 감노장군 진준(陳俊) 등을 거느리고 광락(廣樂)에서 소무(蘇茂)를 포위하였다.

 유 영(劉永)이 주건(周建)을 거느리고 별도로 군사를 10여만 명 불러 모아 광락을 구원하게 하였다. 오한이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한데다 말에서 떨어져 무릎을 다쳐 군영(軍瀯)으로 되돌아갔다. 주건 등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장수들이 오한에게 이르길『대적(大敵)이 눈앞에 있는데 공(公)께서는 다쳐 누웠으니 뭇 병사들이 마음속으로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라 하니 오한은 이에 의연히 붕대를 감고 일어났다. 소를 잡아 병사들에게 먹이고 군중(軍中)에 이르길『적(賊)의 무리가 비록 많다고는 하나 겁탈과 노략질을 일삼는 군도(群盜)에 불과하다. 승리는 양보할 수 없는 것이고 패멸(敗滅)엔 구제(救濟)도 없다.』고 했다. 『금일 제후로 봉해지려는 순간이니 병사들은 힘쓰도록 하라!』고 하자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했다. 이튿날 주건과 소무가 병사들을 내보내 오한을 포위했다. 오한은 사부(四部)의 정병인 황두(黃頭)의 오하(吳河) 등과 오한의 돌기병 3천여 명을 뽑아 일제히 북을 치면서 진군케 했다.

 접 전 후 주건의 군대가 크게 궤멸되어 성으로 도망치려 했다. 오한이 계속 쫓아가 성문 근처에서 싸우다가 함께 성안으로 들어가서 크게 격파했다. 이에 소무와 주건은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오한은 두무와 진준 등을 남게 하여 광락을 수비케 하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수양에서 유영을 포위하고 있던 합연을 도우러 갔다. 얼마 후에 유영은 죽고 두 성 모두 함락되었다.

 그 다음해에 또 진준 및 전장군(前將軍) 왕량(王梁)을 거느리고 임평(臨平)에서 오교적(五校賊)을 격파했는데 동군(東郡)의 기산까지 쫓아가 섬멸시켰다. 북으로 청하(靑河), 장직(長直) 및 평원(平原)의 오리적(五里賊)을 쳐 모두 평정시켰다. 이때 격현의 다섯 성(姓)이 공모하여 현의 수장(守長)을 쫓아내고 성을 근거리로 반란을 일으켰다. 여러 장수들이 다투어 그들을 쳐부수자고 했으나 오한은 이를 듣지 않고 말하기를『격현에 반란이 생기게 한 것은 모두 수장(守長)의 죄이다. 감히 가벼이 군대를 내보내는 자는 베어버리겠다.』라 하고는 또 사람을 시켜 성중(城中)의 사람들에게 사죄하게 했다. 다섯 성(姓)의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여 곧바로 아랫사람들을 거느리고 와서 투항(投降)했다. 여러 장수들이 이에 탄복하면서 말하기를『전쟁을 하지 않고도 성(城)을 항복시켰으니 우리들이 미칠 바가 못되는 것이다.』라 했다.

 그 해 겨울에 오한은 건위대장군 경감과 한충대장군(漢忠大將軍) 왕상(王常) 등을 거느리고 평원(平原)에서 부평적(富平賊)과 획삭적을 격파했다. 그 이듬해 봄에 도적들이 5만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밤중에 오한의 군영(軍營)을 공격해 왔는데 군중(軍中)이 놀라 법석을 떨었으나 오한은 누운 채로 있으면서 동요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잠잠해지자, 곧바로 정병(精兵)을 내보내 돌격하게 하여 그 무리들을 크게 무찔렀다. 그 잔당을 쫓으면서 마침내 무염(無鹽)까지 이르렀는데 발해(渤海)에서 격파하여 모두 평정시켰다. 또 동헌(董憲)을 무너뜨리고자 구성을 포위하고 이듬해 봄에 성을 함락시켜 동헌을 참수(斬首)했다.

 이에 관한 기록은 유영전(劉永傳)에 나온다. 동방이 평정됨에 군대를 정돈하여 경사(京師)로 돌아갔다.

11 년 봄에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잠팽(岑彭) 등을 이끌고 공손술을 치러 떠났다. 잠팽이 형문(荊門)을 격파하고 계속해서 강관으로 진격해 들어갈 즈음에 오한은 이릉(裏陵)에 머물며 노요선(露橈船)을 감춘 뒤 남양의 병사들과 감형(減刑) 모사(募士) 3만 명을 거느리고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잠팽이 자객에 의해 피살되자 오한은 잠팽의 병사들을 병합하여 거느렸다. 12년 봄에 공손술이 거느리는 위당(魏黨), 공손영(公孫永)과 어부진에서 접전하여 크게 격파하고 마침내 무양(無陽)을 포위했다. 오한은 사흥을 맞아 그 무리를 모두 베고 건위로 들어가 경계로 삼았다. 여러 현(縣)이 모두 성을 굳게 지키자 오한은 진군하여 광도(廣都)를 태우게 했다. 이후에 무양 동쪽의 여러 작은 성들이 모두 항복을 했다.

 광 무가 오한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성도(成都)의 10여만 중(衆)을 가벼이 대해서는 안 된다. 광도를 굳게 지키면서 그들이 와서 공격해 오기를 기다릴 일이지 그들과 더불어 싸우지 말라. 만일 그들이 감히 오지 못하면 공(公)이 병영을 옮기면서 뒤를 쫓으라. 모름지기 그들의 힘이 피폐되었을 즈음에 격파시켜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오한은 전세의 유리함을 틈타 마침내 스스로가 보병·기병 2만여 명을 거느리고 성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성에서 10여리 떨어진 곳에 강의 북쪽을 의지하여 병영을 짓고 부교(浮橋)를 만들었다. 부장(副將)인 무위장군(武威將軍) 유상(劉尙)으로 하여 만여 명을 거느리고 강남 쪽에 주둔케 했는데 서로의 거리가 20리 남짓 되었다. 광무가 이를 듣고 크게 놀라고는 오한을 꾸짖으며 이르길『자주 그대에게 천조만단(千條萬端)으로 칙서를 보내나니 무슨 생각으로 일에 임함이 그리 혼란한가? 이미 적을 가벼이 여기고 적진 깊숙이 들었는데다 유상과 병영을 달리 하고 있다. 일에는 완급(緩急)이 있을 터, 다시는 서로 도움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적들이 군대를 내어 그대를 에워싸고 많은 병사들로 유상을 공격할 경우 유상이 무너지면 그대도 패하게 되리라. 다행이 아직 아무 일이 없으니 서둘러 군대를 이끌고 광도로 돌아가라!』라고 했다. 조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공손술이 과연 그 휘하의 장수 사풍 원길(袁吉)로 하여 10여만의 병사를 거느리게 하고는 20여 진영으로 나누어 함께 오한을 공격토록 했다. 또 별장(別將)에게는 만여 명을 거느리고 유상을 치게 하여 서로 구원하지 못하도록 했다. 오한이 그들과 더불어 하룻동안 대전을 치렀으나 패하여 나성으로 들어가고 사풍은 오한의 군대를 포위하였다. 오한이 이에 휘하의 장수들을 불러 독려하면서 말하기를『나는 그대들과 더불어 험한 고비를 넘기면서 이리저리 천리를 떠돌며 전쟁을 치러왔다. 머무는 곳에서 마다 승리를 거두었으니, 마침내는 적진에 깊이 들어와 그 섬 아래에 이르게 되었다.

 이 제 유상과 더불어 두 곳에서 포위를 당하고 있으니 서로의 세(勢)가 이미 접하지 않고 그 화(禍)는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 이에 병사들을 잠수시켜 강 남쪽에 있는 유상에게로 가 합군하여 적들을 막을 생각이다.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사람마다 스스로를 위해 싸운다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패하여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성패(成敗)의 길이 이 일전(一戰)에 있다.』라고 하자 장수들이 모두 오한의 뜻을 따르겠노라고 했다. 이에 병사들과 말을 배불리 먹이고 군영을 닫고는 3일 동안 나가지를 않았다. 그리고 깃발을 많이 세우고 연기를 끊이지 않게 했다. 밤에 재갈을 물리고 병사들을 인솔해 유상과 합군했다. 사풍 등은 이를 눈치 채지 못하고 그 뒷날 군대를 나누어 강 북쪽을 공격케 하고 자신은 남쪽을 공격했다.

 오 한의 병사들이 모두 그들을 맞아 싸우기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했는데 마침내 크게 격파하여 사풍과 원길의 목을 쳤으니 무기를 노획하고 5천여 명의 병사를 베었다. 이에 군대를 이끌고 광도로 돌아가 유상으로 하여 광도에 머물며 공손술을 막게 했다. 한편으로 상황을 소상히 적어 광무에게 글을 올렸는데 스스로를 심히 책망하였다. 광무가 답하여 말하기를『그대가 광도로 돌아간 것은 매우 잘한 것이다. 공손술은 유상을 공략하려고 대들지 않고 그대를 치려고 들 것이다. 만일 그들이 먼저 유상을 공격할 경우 광도로부터 50리 떨어진 곳에서 보병·기병을 모두 이끌고 광도로 가 때맞추어 위기를 구원하면서 반드시 쳐부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부터 오한은 광도와 성도 사이를 여덟 번이나 오가며 공손술과 싸워서 이기고 마침내 그 성곽 가운데다 진을 치게 되었다. 공손술이 직접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성문을 나와 큰 싸움을 벌였는데 오한은 호군(護軍) 고오(高午) 당감(唐邯)으로 하여 수만 명의 예졸(銳卒)을 거느리고 공격하게 하였다. 공손술의 병사들이 패하여 도주하자 고오가 공손술의 진영을 흩트리고 공손술을 잡아 죽였다. 이에 관한 기록은 공손술전(公孫述傳)에 보인다.

이듬해(건무12년) 정월에 오한은 군대를 내려갔다. 원에 이르렀을 때 광무가 조서를 내려 접에 들러 선영도 찾아보게 하고는 곡식 2만곡(斛)을 하사하였다.

 15 년에 다시 양무장군(陽武將軍) 마성(馬成)과 포로장군(捕虜將軍) 마무(馬武)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가 흉노(匈奴)를 격파했다. 18년에 촉군(蜀郡)의 군수가 사흠(史歆)을 거느리고 성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는 대사마(大司馬)라고 스스로 칭하면서 태수 장목(張穆)을 공격하였다. 장목이 성을 넘어 광도로 도망하자 사흠이 각 군현에 격문을 띄웠는데 탕거(宕渠)의 양위(楊偉), 구인의 서용(徐容) 등이 각기 수천 명의 병사를 일으켜 이에 응했다. 광무가 옛적에 사흠으로 하여금 잠팽의 호군(護軍)으로 삼고 병사(兵事)를 익히게 했던 까닭에 오한으로 하여 유상과 태중대부(太中大夫) 장궁(臧宮)을 거느리고 만여 명의 병사로 그를 토벌토록 시켰다. 오한이 무도(武都)로 들어가 광한(廣漢)·파(巴)·촉(蜀)의 세 군(郡) 병사를 징발하여 성도를 포위하였다. 백여 일 만에 성을 함락시키고 사흠 등을 베었다. 오한이 이에 뗏목을 타고 강을 내려가 파군(巴郡)에 이르자 양위와 서용 등이 두려워하여 흩어졌다. 오한은 그 거수격인 2백여 명을 베고 그 잔당과 수백의 여염집을 남군(南郡) 및 장사(長沙)로 이사시키고 돌아왔다. 오한은 천성적으로 일을 애써 했는데 매번 징벌에 나설 때마다 광무가 미안해하며 그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다른 장수들은 전진(戰陣)이 불리해지면 대개는 두려워하여 상도(常度)를 잃었으나 오한은 위기에 태연자약했고 전쟁장비들을 돌보면서 병사들을 고무시켰다.

 매 번 군대를 이끌고 나갈 때마다 아침에 조서를 받으면 저녁이면 군대를 끌고 길로 나아가 애초부터 장비를 갖추는 날은 별도로 없었다. 그리하여 늘 직분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고 공명(功名)으로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조정에 있을 때는 밝게 살피고 신중하게 질의를 했는데 그러한 것들이 그의 풍모(風貌)에 그대로 드러났다.

 일 찍이 오한이 출정을 떠났을 때 그 처자들이 뒤에 남아 밭장사를 했다. 오한이 돌아와서는 이를 꾸짖어 말하기를『병사들이 밖에 있어 그러지 않아도 남정(南丁)들이 부족한 판국에 무슨 일로 그리 많은 전택(田宅)을 사 모으느냐?』하고는 모두 형제들과 외가에 주었다. 20년에 오한의 병이 심하였다. 어가(御駕)가 친히 와서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오한이 대답하여 말하기를『신(臣)이 어리석어 아는 바가 없으니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용서하여 주십시오.』라 했다.

오한이 죽자 조서를 내려 애도의 뜻을 표하고 시호를 충후(忠候)라 했다.


왕양

왕 양(王梁)은 자(字)가 군엄(君嚴)이고 어양군(漁陽郡), 요양현(要陽縣) 사람이다. 군리(郡吏)로 지내다가 태수 팽총(彭寵)의 부름을 받아 호노(狐奴)의 현령(縣令)이 되었다. 그 뒤 개연(蓋延)·오한(吳漢)과 함께 병사를 이끌고 남진(南進)하여 광아(廣阿)에서 세조를 만나 편장군(偏將軍)을 배수받았다.

 한 단(漢鄲)을 평정한 뒤 관내후(關內侯)로 사작(賜爵) 받았다. 왕을 따라 하북(河北)을 평정하고 야왕(野王)의 현령을 배수받았다. 하내(河內) 태수인 구순(嶇恂)과 남쪽으로 낙양(洛陽)을 지키고 북쪽으로 천정관(天井關)을 수비하니 주유(朱有) 등이 감히 출병(出兵)하지 못하였다. 세조는 그것이 왕양의 공이라 여겼다.

 세 조가 즉위하자 대사공(大司空)을 뽑는 일을 상의하였는데 적복부(赤伏符)에 왕양은 위(偉)를 다스렸는데 현무(玄武)가 된다고 하였다. 왕이 생각하기를 야왕(野王)은 위원군(偉元君)이 옮긴 곳이고 현무는 수신(水神)의 이름인데 사공(司空)은 수토(水土)의 관리이므로 이에 왕양을 대사공(大司空)으로 발탁하고 무강후(武强侯)로 봉했다.

 건 무 2년 왕양은 대사마(大司馬) 오한 등과 단향(檀鄕)을 공격하였는데 군사(軍事)는 모두 대사마의 명령을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왕양은 매번 야왕현의 병사를 일으켜서 왕은 그가 조칙(調勅)을 받들지 않는다고 여겨 야왕현에 머물러 있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왕양은 다시 편의에 따라 군대를 일으켰다. 세조는 왕양이 두 번이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크게 노하여 상서(尙書) 종광(宗廣)을 보내서 군중에서 왕량을 목베도록 하였다. 그러나 종광은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하고 수레에 태워 장안으로 보냈다. 장안에 이르자 왕은 그를 용서해 주었다. 한 달 후에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집금오(執金吾)의 일을 하였다. 북쪽으로 기관(箕關)을 지키다가 적미(赤眉)의 별교(別校)를 공격하여 그를 항복하였다.

 건 무 3년 봄 다시 오교(五校)를 공격하여 신도(信都)·조국(趙國)까지 추격해서 그들을 대파하고 여러 주둔군들을 모두 평정하였다. 그 해 겨울, 왕은 사자를 보내 왕양을 전장군(前將軍)으로 배수하였다. 건무 4년 봄, 비성(肥城)·문양(文陽)을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나아가 표기대장군 두무(杜茂)와 초(楚)·패(沛) 사이에서 교강(校慷), 소무(蘇桑)를 수복하였다. 포로장군(捕虜將軍) 마무(馬武)·편장군(偏將軍) 왕패(王覇)도 길을 나누어 함께 진격하니 일년여 만에 모두 평정하였다.

 건무 5년, 왕을 따라 도성(桃城)을 구원하고 방맹(龐萌)들을 격파하였다. 왕양은 싸울수록 더욱 분투하여 왕은 그를 산양태수(山陽太守)로 배수하여 그곳의 백성들을 위로케 하고 예전처럼 병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몇 개월 후에 왕은 그를 불러들여 구양합(歐陽合)을 대신하여 하남윤(河南尹)이 되게 하였다. 왕양은 수로를 뚫어 곡수(穀水)를 끌어다 낙양(洛陽)성 아래 대어서 동쪽으로 공천(鞏川)으로 흘러보내려고 하였는데 수로가 완성되었는데도 물이 흐르지 않았다. 건무 7년에 유사(有司)가 그 일로 탄핵 상주하니 왕양이 두려워하면서 늙어서 쉬게 해 주십사고 청했다. 그러자 왕은 조칙을 내려 말했다.

『왕 양은 이전에 병사를 이끌고 정벌할 때 사람들이 그의 현명함을 칭송하여 그를 발탁하여 경사(京師) 일을 맡긴 것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자 한 것이었으나 많은 노동력을 들였는데도 공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백성들이 그를 원망하고 그를 비방하여 말하는 자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가 관대한 은택을 입고도 겸손히 물러가기를 원하니「그의 군자다움은 사람들의 미덕이 될 만하다(君子成人之美).」그러므로 왕양을 제남(濟南)의 태수로 봉하노라.』

 건무 13년 식읍을 늘려주고 부성후(阜成侯)로 정봉(定封) 하였다. 건무 14년 관직에서 죽었다.


가복

가 복(賈復)은 자가 군문(君文)이고 남양(南陽) 관군(冠軍) 사람이다.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였고, 상서(尙書)를 배웠다. 무음(舞陰) 땅의 이생(李生)을 섬겼는데, 이생이 그를 비상하게 여겨 문인들에게 말하기를『가군(賈君)의 용모와 기상이 이와 같고 또 배움에도 부지런하니 장군·재상이 될만한 그릇이오.』라고 하였다.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말엽에 현(縣)의 관리가 되어 하동(河東)지역에 가서 소금을 가져오다가 도적떼를 만났는데, 동료 십여 인은 모두 소금을 내버려두고 도망갔거늘 가복만이 홀로 소금을 온전히 지켜 현으로 가지고 돌아오니, 현의 사람들이 모두 그의 신실함을 칭찬하였다.

 이 때에 하강(下江)과 신시(新市)에서 군사가 일어나니, 가복 또한 우산(羽山)에서 군사 수백 명을 모아 스스로를 장군이라 칭했다. 갱시(更始)가 즉위하자 곧 자기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한중왕(漢中王) 유가(劉嘉)에게 귀의하여, 그의 교위(校尉) 장군이 되었다. 가복은 갱시의 다스림이 문란하고 그의 장수들이 방종한 것을 보고는 이에 유가에게 유세하여 말하였다.『신이 듣건대 요순(堯舜)의 일을 도모하다가 미치지 못한 자는 탕왕(湯王)·무왕(武王)이요, 탕무(湯武)의 일을 도모하다가 미치지 못한 자는 환공(桓公)·문공(文公)이요, 환공·문공의 일을 도모하다가 미치지 못한 자는 한(韓)·조(趙)·위(魏)·연(燕)·제(齊)·초(楚) 여섯 나라요, 여섯 나라의 법률을 정하여 편안히 잘 지키고자 하였으나 하지 못한 자는 망한 여섯 나라들입니다. 지금 한(漢)의 왕실이 중흥하려 함에, 대왕께서는 친척들을 병방 제후로 삼으시고 천하가 채 평정되기도 전에 보존하시고 있는 것만을 잘 지키려 드시니, 현재 보존하신 바를 앞으로도 보존하실 수 있겠습니까?』 유가가 답하였다.『경의 말은 너무 커서 내가 감당할 것이 못되오. 대사마(大司馬) 유공(劉公)이 하북에 있는데 필히 시행할 수 있을 터이니, 나의 편지만을 가지고 가보도록 하시오.』 가복이 마침내 유가에게 작별을 고하고, 편지를 받아 지니고 북으로 하수(河水)를 건너 박인에 있는 광무에게 이르러 등우를 통하여 알현하였다.

 광 무가 그를 비상하게 여기고 등우 또한 그가 장수의 절개를 지녔다고 칭찬하여, 이에 가복을 파로장군(破虜將軍)으로 임명하여 도적들을 감시하게 하였다. 가복의 말이 수척하니 광무가 왼쪽의 참마를 풀어 그에게 주었다. 벼슬아치들은 가복이 뒤늦게 와서 동료들을 잘 능멸한다고 여겨, 가복을 호땅의 위(尉)로 옮기고자 하였다. 광무가 말하였다.『가독(賈督)은 천리에 떨치는 위엄을 지녀 직책을 맡긴 것이니, 제멋대로 그를 옮기지 말라.』

 광 무가 신도(信都)에 이르러 가복을 편장군으로 삼았고, 한단(邯鄲)을 함락시킴에 이르러 도호장군(都護將軍)으로 옮겨주었다. 광무를 좇아 야견에서 청독(靑犢)을 공격하는데, 대전투가 해가 중천에 뜨도록 계속 되었고 적의 진영은 견고하여 퇴각치 않으니, 광무가 명령을 전달해 복을 불러들여 말하기를『관리나 병사나 모두 굶주렸으니 아침밥을 먹여도 괜찮으리라.』가복이 답하였다.『먼저 격파시킨 연후에 먹이십시오.』 그리고는 가복이 깃발을 등에 지고 선봉에 서니, 가는 곳마다 적군이 모두 쓰러져 마침내 적군은 패주했다. 뭇 장수들이 그의 용맹에 탄복했다.

 또 북쪽으로는 진정(眞定)에서 오교(五校)와 싸워 크게 격파했다. 가복의 부상이 매우 심하자 광무가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내가 가복을 별장군(別將軍)으로 삼지 않은 것은 그가 적을 가벼이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과연 염려한 대로 나의 명장군을 잃게 되었구나. 듣건대 그의 아내가 임신을 하였다 하니, 만일 딸을 낳으면 며느리로 삼고 아들을 낳으면 사위로 삼아 가복으로 하여금 처자를 염려치 않아도 되도록 하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가복이 완쾌되어 계땅으로 광무를 따라 미치니, 서로 상봉하고 매우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어 병사들을 크게 먹이고, 가복으로 하여금 앞장서도록 하여 업땅의 적군을 격파했다.

 광 무가 즉위한 후 가복에게 집금오(執金吾)를 배수하고 관군후(冠軍侯)로 봉하였다. 이에 앞서 하수(河水)를 건너 낙양(洛陽)에서 주유(朱有)를 공격하고 백호공(白虎公) 진교(陣僑)와 싸워 연달아 격파하고 항복시켰다. 건무 2년에 양(穰)과 조양(朝陽) 두 현이 추가로 봉해졌다. 갱시의 언왕(彦王) 윤준 및 남방에 있는 여러 대장군들 중에 아직 항복하지 않은 자가 많자, 임금이 장수들을 불러 군사 일을 의논케 하였는데 아무도 말을 않고 침묵이 계속되었다.

 이 에 임금이 격문으로 땅바닥을 두드리며『언(彦)이 가장 강력하고 완(宛)이 그 다음이니, 누가 이들을 격파할 수 있으리?』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가복이 서슴없이 답하였다.『신이 언땅을 격파하겠습니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였다.『집금오가 언땅을 공격한다면 짐이 다시 무엇을 근심하리요! 완땅은 대사마가 공격하도록 하라.』 마침내 가복과 기도위(騎都尉) 음식(陰識)·요기장군 유식(劉植) 등을 파견하니, 남쪽으로 오사진(五社津)을 건너 언땅을 공격하여 잇달아 격파하였다.

한 달 남짓 만에 윤준이 항복하였고, 언땅을 모두 평정하였다.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갱시의 회양태수(淮陽太守)인 폭사를 공격하니, 폭사가 항복하고 회양현이 모두 평정되었다. 그해 가을에 남쪽으로 소릉(召陵)과 신식(新息)을 공격하여 평정했다. 이듬해 봄에 좌장군(左將軍)으로 옮겨졌고, 별도로 신성(新聖)과 면지(面池)의 사이에서 적미(赤眉)를 공격하여 연달아 그를 격파했다. 의양(宜陽)에서 임금을 만나 적미를 항복시켰다.

 가 복은 임금을 좇아 정벌하러 다니면서 일찍이 패배한 적이 없었고, 여러 차례 뭇 장수들이 포위당한 것을 풀어주고 위급함을 구해 주느라 몸에 열 두 번이나 부상을 당하였다. 건무 13년에 교동후(膠東侯)로 완전히 봉해졌고, 욱질(郁秩)·장무(壯武)·하밀(下密)·즉묵(卽墨)·관양(觀陽)·정호 등 여섯 현을 식읍으로 받았다.

 가 복은 임금이 전쟁을 억누르고 문덕(文德)을 닦고자 하며 공신들이 서울을 옹위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곧 고밀후(高密侯) 등우와 함께 병사를 줄이고 유학(儒學)을 돈독히 하였다. 임금이 매우 잘한 일이라고 여겨 자신도 마침내 좌·우장군을 없애버렸다. 가복은 열후(列侯)의 신분으로 하야하였고 특진(特進)이 가해졌다.

 가 복은 사람됨이 강직하였으며 절개가 곧았다. 사가(私家)로 돌아온 후에는 문을 닫고 위의와 명망을 쌓았다. 주우(朱祐) 등이 가복은 마땅히 재상이 되어야 한다고 천거했으나, 임금이 바야흐로 관직의 일로써 삼공(三公)을 문책하였던 까닭에 공신(功臣)들을 등용하지 않았다. 이때에 열후로는 오직 고밀후(高密侯)·고시후(固始侯)·교동후(膠東侯) 셋만이 공경(公卿)과 더불어 국가의 대사에 참여하여 의논했으며, 은혜를 입음이 매우 두터웠다.

건무 31년에 죽으니 시호를 강후(剛候)라 했다.


진준

진 준(陣俊)의 자(字)는 자소(字昭), 남양현(南陽縣)의 서악(西顎) 사람으로 어려서 군(郡)의 관리가 되었다. 갱시(更始)가 즉위하여 종실(宗室) 유가(劉嘉)로 태상장군(太常將軍)으로 삼았는데 진준은 장사(長史)가 되었다. 광무가 하북을 순수할 때 유가가 서찰을 올려 진준을 천거했는데 이에 광무는 그를 안집현으로 삼았다.

 진 준은 광무를 따라 청양(淸陽)에서 동마적(銅馬賊)을 격파하고 진군하여 포양(蒲陽)까지 이르렀는데 광무는 그에게 강노장군(疆弩將軍)을 제수했다. 안차(安次)에서 오교적(五校賊)과 싸우다가 말에서 내려 손에 짧은 칼을 들고는 진격하였다. 닥치는 대로 격파하여 20여리 까지 추격하다가 그 거수(渠帥)를 베고 돌아왔다. 광무가 멀찍이서 보고 찬탄하며 이르길『싸우는 장수마다 모두 이와 같다면 무슨 걱정이 있을꼬?』라 하였다.

 오 교적이 퇴각하면서 어양(漁陽)에 들어갔는데 지나는 곳마다 노략질을 하였다. 이에 진준이 광무에게 이르기를『마땅히 경기병(輕騎兵)을 내보내 적들의 길목을 지키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각기 굳게 지키게 하여 그들이 먹을 식량을 끊어버리면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니 광무가 이를 듣고 과연 그렇다고 여기고 진준으로 하여금 경기병을 이끌고 적을 앞으로 치닫게 했다.

 보 루와 성벽이 견고하여 안전한 곳은 칙령을 내려 굳게 지키게 하고 들에 있는 곡식들은 모두 거두어들이도록 했다. 적들이 이르러 보니 취할 것이 없어 마침내는 흩어져 달아났다. 군대를 이끌고 들어오자 광무가 진주에게 이르길『저 도적들을 지치게 만든 것은 장군의 계책이었소.』라고 칭찬하였다. 제위에 올라서 진준을 열후(列侯)에 봉했다.

 건 무 2년 봄에 진준이 광적(匡賊)을 공략하여 네 현(縣)을 함락시켰는데 이에 광무는 다시 그를 신처후(新處侯)에 봉했다. 또 진준은 군대를 이끌고 돈구(頓丘)를 공격하여 세 성을 함락시켰다. 그해 가을에 대사마(大司馬) 오한이 천자의 명으로 진준에게 강노대장군(疆弩大將軍)을 제수하고, 특별히 하내(河內)에 있는 금문적(金門賊)과 백문적(白門賊)을 공격하게 하여 이에 진준은 모두 격파시켰다.

 4 년에 군대를 돌려 여양(汝陽)과 항(項)을 굴복시키고 또 남무양(南武陽)을 함락시켰다. 이 때에 태산(太山)의 호걸들이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장보(張步)와 연병(連兵)하였다. 대사마 오한이 광무에게 이르기를『진준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이 군(郡)을 평정시킬 수 없습니다.』라 했다. 이에 광무는 진준에게 태산태수(太山太水)를 배수(拜授)하고 대장군(大將軍)의 일을 행하도록 했다. 장보가 이를 듣고 그 휘하의 장수를 보내 진준을 치게 하였다. 영(瀛) 아래에서 싸워 진준이 그들을 크게 이기고 추격하여 제남(濟南)까지 이르렀다. 장보가 사사로이 봉해주었던 인수(印綬) 90여개를 취하고 여러 현을 차례로 공략하여 마침내 태산을 평정하였다. 건무 5년에 건위대장군(建威大將軍) 경감과 함께 장보를 격파했다. 이에 관한 기록은 경감전에 있다.

 이 때에 낭사가 아직 평정되지 않아 광무는 진준을 태산에서 옮겨 낭사의 태수로 삼았다. 그러나 장군의 직위는 여전히 그대로 두었다. 제(齊) 지역에 평소에 진주의 명성이 자자했는데 그곳이 진준의 치지(治地)와 경계가 되자 그쪽에 머물던 도적떼들이 흩어졌다. 진준이 군대를 이끌고 공유에서 동헌(董憲)을 치고 진격하여 구적손양을 쳐 평정시켰다.

 건무 8년에 장보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낭사로 돌아오려 하자 진준이 쫓아가 토벌하고는 장보를 베었다. 광무가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조서를 내려 진준으로 하여금 청주(靑州)와 서주(徐州)를 전담하여 다스리게 했다.

 진 준이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들을 돌보고 의로움이 있는 자를 표창하며, 군리(軍吏)들을 절도 있게 하여 속하 군현과 사이를 좋게 가지자 백성들이 이를 노래했다. 또 자주 글을 올려 농과 촉(蜀)을 격파할 것을 자청했으나 광무가 조서를 내려 답하기를『동주(東州)가 갓 평정된 것은 대장군의 공이다. 동주는 바다를 등지고 하(夏)를 어지럽히는 도적들이 출몰하는 곳으로 나라에서 아주 염려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러니 방어에 힘쓰고 백성들을 잘 돌보라.』고 하였다.

 건무 13년에 식읍을 더 늘려 축하후(祝阿侯)에 봉했다. 그 이듬해에 부름에 응해 입조(入朝)하였다. 건무 23년에 세상을 떠났다.


경감

경 감의 자는 백소(伯昭), 부풍군(扶風郡) 무릉현(茂陵縣) 사람이다. 그 조상들이 무제(武帝)년간에 관리로서 2천석(石) 이상의 녹봉을 받는 사람들을 이사케 했을 때 거록(鉅鹿)으로부터 이사를 와 무릉에 살게 되었다. 경감의 아버지 황(況)의 자(字)는 협유(俠游)로 경서에 밝아 랑(郞)이 되었으며, 왕망(王莽)의 종제(從弟) 왕급(王伋)과 함께 안구선생(安丘先生)에게서 노자(老子)를 배웠다. 이런 인연으로 후에 삭조(朔調)의 군수가 되었다. 경감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아버지의 업(業)을 익혔는데, 군위(郡尉)가 기병들을 훈련시키느라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며, 말 타고 화살 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는 군대의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왕 망이 패하고 갱시가 즉위하였을 때 갱시 휘하의 여러 장수들이 각 구역을 관할하면서 너 나할 것 없이 위세와 권력을 멋대로 휘둘러 군수나 현령들을 걸핏하면 갈아치웠다. 경감의 아버지 경황도 왕망에 의해 군수가 되었기에 심기가 편할 수가 없었다. 이때 경감의 나이가 스물 하나였는데 이에 경감은 주서(奏書)를 들고 갱시에게로 가 재물을 바치고 자구책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했다.

 경 감이 송자(宋子)에 이르렀을 때 왕랑이 성제의 아들 자여(子與)를 사칭(詐稱)하면서 한단(邯鄲)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이에 경감을 따르던 관리 손창(孫倉)과 위포(衛包)가 도중에 공모(共謀)하여 말하길『유자여(劉子與)는 성제의 정통인데 이 길 포기하여 그에게로 가지 않고 멀리 어디로 갈 것인가?』라 하였다. 경감이 칼을 어루만지며 이르길『자여는 도적들에 의해 피폐되어 마침내는 항복한 포로가 되고 말았소. 나는 장안(長安)으로 가서 제후들과 함께 어양(魚陽), 상곡(上谷)의 병마(兵馬)로 진영을 가다듬게 하고 다시 태원(太原), 대군(代郡)으로 나와 몇 수 십일이 걸려서라도 돌기(突起)들을 징집하여 오합지졸들 깔아뭉개기를 마른 나뭇가지 꺾고 썩은 고기 잘라내듯 해버릴 것이오. 그대들이 거취(去就)를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것인지를 모르는 것을 보니 족멸(族滅)이 멀지 않은 듯하오.』라고 했으나 손창과 위포는 끝내 따르지 않고 왕랑에게 투항했다.

 경 감이 도중에 광무가 노노(蘆奴)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북으로 말머리를 돌려 광무를 배알했는데 광무가 그를 머물게 하여 문하리(門下吏)로 삼았다. 경감이 호군(護軍) 주우(朱祐)에게 말하기를 돌아가 군대를 징발하여 한단을 평정해보겠다고 했다. 이 말을 광무가 전해 듣고 웃으면서 말하길『어린 아이가 큰 뜻을 품고 있구먼.』하며 기특하다고 했다. 이로 인해 자주 불러들여 격려하고 위로했다.

 경 감이 광무를 따라 북행(北行)하여 기(機)에 이르렀을 때 한단으로부터 온 군대가 당도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에 광무는 남쪽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여 관속(官屬)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이때 경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지금 우리의 군대가 남쪽으로부터 올라왔는데 다시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안될 일입니다. 어양태수(漁陽太守) 팽총(彭寵)은 공(公)의 읍인(邑人)이고 상곡태수(上谷太守)는 저의 아버지입니다. 이 두 군(郡)에서 징병하여 활 잘 쏘는 병사 만여 기(騎)만 확보하면 한단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 러나 광무의 관속들은 진정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죽더라도 오히려 남쪽으로 머리를 돌려야 하는 것이거늘 어찌 적들의 포대기 속으로 들어간단 말인가?』라 하였다. 광무가 경감을 가리키며 이르길『저 사람이 우리의 북행을 주도할 것이다.』라고 하여 군영의 북행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기(機)에서 반란이 일어나 광무는 어쩔 수 없이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관속들은 각기 흩어졌다. 경감은 상곡군의 창평현(昌平縣)으로 가 아버지를 찾아뵙고 부탁하기를 구순을 동쪽으로 보내 팽총과 약조를 맺게 하고 각기 돌기(突起) 2천 필(匹)과 보병 천명씩을 거느리고 오도록 했다. 마침내 경감은 경단(景丹)과 구순 및 어양의 군대를 합군하여 남행을 개시했다. 지나가면서 왕랑 휘하의 대장(大將), 9경(九卿), 교위(校尉) 이하 4백여 급(級)을 격참하여 인수(印綬) 125개, 부절(舵節) 2개를 획득하고 3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리하여 탁군(檻郡), 중산(中山), 거록(鉅鹿), 청하(淸河), 하간(河間) 등의 군(郡)에 딸린 스물 두개의 현(縣)을 평정시키고 광아(廣阿)에서 광무에게로 향했다. 이때에 광무는 막 왕랑을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두 군(郡)의 군대가 광무를 구원하러 온다는 전갈이 있자 왕랑의 진영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얼마 안 있어 경감 등이 군영으로 가 광무를 배알했다. 광무가 경감 등을 접견하며 이르길『어양, 상곡의 사대부들과 함께 대공(大功)을 이루어주길 바라오.』하고는 배알하러 온 장수들을 편장군(偏將軍)으로 삼고 돌아가 군대를 이끌고 오도록 했다. 또 광무는 경감의 아버지 경황에게 대장군과 흥의후(興義候)라는 직책과 호(號)를 부여하고 경황 스스로가 편장(偏將)과 비장(裨將)을 둘 수 있도록 했다. 경감 등은 마침내 광무를 따르며 한단을 함락시켰다.

 이 때 갱시가 대군(代郡)의 태수 조영(趙永)을 불렀으나 경황이 조영에게 부름에 응하지 말도록 권고하고 그를 광무에게로 보냈다. 광무가 조영을 보내 군(郡)의 태수직을 다시 맡도록 하여 조영이 대군으로 돌아갔으나 대군에서는 장영(張曄)을 시켜 성을 장악하고 모반하였다. 게다가 흉노가 오환적(烏桓賊)을 불러들여 원군(援軍)으로 앉혀두고 있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광무는 경감의 아우 경서(耿舒)를 복호장군(復胡將軍)으로 삼아 장엽을 치게 하여 이겼다. 이에 조영은 다시 태수가 되었다. 이때 오교적(五校賊) 20여만이 북쪽에서 상곡(上谷)을 노략질하고 있었는데 경황과 경서 부자가 연병(連兵)하여 공격하였다. 도적들은 패하여 경계 밖으로 달아났다.

 갱 시가 광무의 위세와 명성이 날로 성(盛)함에 군신(君臣)들이 의아해 하며 염려하고 있음을 알고 사신을 보내 광무를 소왕으로 옹립했다. 그리고는 광무로 하여 공(功)이 있는 휘하 장수들을 이끌고 장안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한편으로 묘증(苗曾)을 유주목(幽州牧)으로 보내고 위순(韋順)은 상곡태수로, 채충(蔡充)은 어양태수로 각각 보내어 북부지방을 통할하도록 시켰다. 이때 광무는 한단궁(邯鄲宮)에 머물면서 온명전(溫明殿)에서 줄곧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경감이 광무의 거실로 들어가 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작금에 갱시가 실정(失政)하여 군신들은 음란(淫亂)하며, 장수들은 기내(機內)에서 날뛰고 귀척(貴戚)들은 도성(都城) 안에서 휘저으며 다니고 있습니다. 천자(天子)의 명(命)이 성문을 나설 수 없음에 각 지역의 목(牧)이며 태수들이 제멋대로 하여 백성들은 좇을 바를 알지 못하고, 사인(士人) 또한 감히 안위(安位)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적들이 재물을 노략질하고 부녀를 겁탈하는가 하면 패물을 가진 자는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백성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마음으로 빌고 있습니다. 다시금 왕망의 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 동마적(東馬賊), 적미적(赤眉賊)의 무리조차 수십만에 달하는데 성공(聖公)께서는 그 정도의 군대도 이룰 수 없는 형편이니 그 파국이 멀지 않았습니다. 공(公:광무)께서는 앞서 남양(南陽)에서 거사(擧事)하여 백만대군을 깨뜨리셨으니 이제 하북(河北)을 평정하신다면 천부(天府)의 땅을 수중에 넣는 셈이 될 것입니다. 의(義)로써 평정하는 것임에 외침이 있으면 응하는 소리가 있을 터, 천하라도 능히 격문을 돌려 평정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천 하는 지중(至重)하므로 타성(他姓)으로 하여 얻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듣자니 사신이 서방(西方)으로부터 와 병사(兵事)를 멈추도록 한 것 같은데 따르지 마셔야 합니다. 지금은 관리와 병사들이 많이 죽어 군원(軍員)이 부족한 듯하니 바라건대 제가 유주(幽州)로 돌아가 정병을 크게 징발한 뒤에 대계를 의논했으면 합니다

경 감(耿弇)의 말에 광무가 크게 기뻐하며 이에 그를 대장군으로 삼아 오한(吳漢)과 함께 유주 산하 10군(郡)의 병력을 징발토록 하였다. 경감이 상곡(上谷)에 당도하여 위순과 채충의 목을 베고, 오한은 묘증의 목을 쳤다. 이리하여 유주의 병력을 모두 징발하였다. 징발된 병력을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서 광무를 도와 동마적(銅馬賊), 고호적(高湖賊), 적미적(赤尾賊), 청독적(靑犢賊)을 격파하고 또 우래적(尤來賊), 대창적(大槍賊), 오번적(五幡賊)을 원씨(元氏)에서 추격하였다. 이때 경감은 늘 날랜 기병들을 거느리고 군(軍)의 선봉이 되어 적들을 퇴각시키곤 했다. 광무가 승승장구의 여세를 몰아 순수(順水) 근처에서 싸움을 시작했다. 추격당하던 적들이 다급해지자 죽기 살기로 싸웠다. 그 무렵 광무의 병사들이 매우 지쳐있었으므로 마침내 대패하였다. 되쫓겨 오다가 범양(范陽)에 보루를 쌓고 피해있었다. 며칠이 지나 군대의 사기가 진작되었는데 도적들이 때마침 퇴각하고 있어 다시 추격하였다. 용성(容城), 소광양(小廣陽), 안차(安次)에 이르러 연일(連日) 싸운 끝에 마침내 물리쳤다.

 광 무가 계로 돌아온 후에 다시 경감과 오한, 경단(景丹), 합연(蓋延), 주우(朱祐), 비융, 경순(耿純), 유식(劉植), 잠팽(岑彭), 제준(祭遵), 견담, 왕패(王覇), 진준(陣俊), 마무(馬武) 등 13장군을 보내 적들을 노(潞)의 동쪽까지 추격하도록 했는데 평곡(平谷)에 이르러 두 번 싸워 1만 3천여급(級)을 참수(斬首) 시켰다. 마침내 우북평군(右北平郡)의 무종현(無終縣)과 토은현(土垠縣) 사이에 이르러 추격을 거의 끝내고 도적들은 흩어져 요서(遼西), 요동(遼東)으로 들어가고 혹은 오환적(烏桓賊)이나 맥(貊)의 사람들에게 공격당하여 거의 잔멸되었다.

 광 무가 즉위하여 경감을 건위대장군(建威大將軍)으로 배수(拜授)했다.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경단(景丹), 강노장군(强弩將軍) 진군과 함께 오창(敖倉)에서 염신적(厭新賊)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건무(建武) 2년에 경감은 다시 호치후(好佩侯)에 봉해져 호치, 미양(美陽) 두 현(縣)에서 식읍하게 되었다. 건무 3년에 연잠(延岑)이 무관(武關)으로부터 나와 남양(南陽)을 공격하여 몇 개의 성을 함락시켰는데 양(穰) 사람 두홍(杜弘)이 그 무리를 이끌고 연잠에게 동조했다. 경감은 연잠 등과 양에서 교전하여 크게 이기고 3천여급(級)의 목을 베었다. 이때 반군(反軍)의 장수와 사졸(士卒) 5천여 명을 생포했으며 인수(印綬) 3백여 개를 획득했다. 두홍은 항복하고 연잠은 부하 몇 명과 함께 동양(東陽)으로 도주했다.

 경 감이 광무를 따라 용릉에 순시를 갔다가 이것저것 살펴본 후에 자청하기를, 북쪽으로 가 상곡병(上谷兵)으로 아직 징발되지 않은 군대를 거두고, 어양의 팽총(彭寵)과 탁군의 장풍(張豊)을 평정시키며, 돌아오는 길에 부평(富平), 획삭(獲索)을 수습하고 동쪽으로 장보(張步)를 공격하여 제(薺)의 땅을 완전히 평정하겠노라고 하였다. 광무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셨다. 건무 4년에 마침내 조서를 내려 경감으로 하여금 어양으로 진공(進攻)케 하였다. 그러나 경감은 자기의 아버지가 상곡에 있고 자기의 아버지와 팽총과는 함께 일했던 처지이며, 자기의 형제로 경사(京師)에 머물고 있는 자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머뭇거리며 감히 혼자서 진격해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상서(上書)하여 낙양으로 갈 것을 청했다. 이에 답하는 조서에 이르길,『장군의 집안은 전체가 나라를 위해 일해 왔고 가는 곳마다 적들을 물리쳐 그 공적이 매우 현저하거늘 이 차제에 무엇을 마다하고 무엇을 망서린단 말이오? 이곳으로 오겠다니 징사(徵士)가 되겠다는 뜻이오? 왕상(王常)과 함께 탁군에 주둔하면서 계책이나 생각해 보시오.』라고 하였다. 경감의 아버지 경황이 경감 자신이 징사로 가 있길 바란다는 소식을 듣고 심기가 편하질 못했다. 이에 경서(耿舒)의 동생 경국(耿國)을 낙양으로 보내 광무를 모시게 했다. 광무가 이 사실을 기뻐하며 경황을 진급시켜 유미후에 봉했다. 이런 후에 경감에게 명하기를 한충장군(漢忠將軍) 주우(朱祐)와 한충장군(漢忠將軍) 왕상 등과 함께 망도(望都), 고안(故安)에 있는 서산적(西山賊) 10여영(營)을 치게 하였는데 모두 격파하였다.

 이 때 정노장군(征虜將軍) 제준(祭遵)은 양향(良鄕)에 머물고 효기장군(驍騎將軍) 유희(劉喜)는 양향(陽鄕)에 머물면서 팽총과 대치하고 있었다. 팽총이 그의 아우 팽순(彭純)을 시켜 흉노병(匈奴兵) 2천여 기(騎)를 거느리게 하고 자신은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두 길로 나누어 제준과 유기를 공격하였다. 오랑캐의 기병이 군도(軍都)를 지날 때 경서가 그 무리들을 격파하고 흉노의 두 왕(王)을 베어버리자 팽총은 퇴주(退走)했다. 경황이 다시 경서와 함께 팽총을 공격하여 군도를 탈환했다. 건무 5년에 팽총이 죽자 광무가 경황의 공을 치하하고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시켜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 경황을 맞아들이도록 했다.

 갑제(甲第)를 하사하고 입조(入朝)토록 하는 한편 경서를 봉(封)하여 모평후(牟平侯)로 삼았다. 경감으로 하여금 오한과 함께 평원(平原)에서 부평, 획삭적을 치게 하였는데 크게 이겼고 항복한 자가 4만여 명이나 되었다.

 조 서가 내려져 경감은 장보의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떠나기 전에 항복한 병사들을 모두 모아 부곡(部曲)을 만들고 장리(將吏)를 두었다. 장보를 치기 위해 허남에 기도위(騎都尉) 유흠(劉歆)과 태산태수(太山太守) 진준(陳俊)을 통솔하여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갔다. 조양(朝陽)으로부터 제하(濟河)까지 다리를 놓아 하수(河水)를 건넜다.

 장 보가 이를 듣고 그의 대장군 비읍(費邑)에게 역하(歷下)에 진을 치게 하고 분병(分兵)하여 축아(祝阿)에도 주둔케 하는 한편, 별도로 태산(太山)의 종성(鍾城)에 수십 개의 병영을 만들어 경감을 기다리고 있도록 하였다. 경감이 하수를 건넌 뒤 먼저 축아를 공격하였는데 새벽부터 성을 공략하기 시작하여 한낮이 덜되어 함락시켰다. 고의로 포위망의 한 귀퉁이를 터 병사들을 종성으로 달아나게 하였다. 종성의 사람들이 축아가 이미 궤멸된 것을 알고 크게 놀라 모두 병영을 비워놓고 도망가버렸다.

 비 읍이 그의 아우 비감(費敢)에게 분병하여 주면서 거리(巨里)를 지키게 했다. 경감이 진격하여 우선 거리를 위협했는데 나무를 많이 베게하여 갱참을 막아버리겠다고 장담했다. 며칠 지나서 투항해 온 사람이 말하길『비읍이 경감장군이 거리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모의(謨議)하여 구원하러 오게 되었다 합디다.』라고 하자 경감이 군중(軍中)에 엄령을 내려 장비들을 손질하게 하고 제부(蹄部)에 칙서를 내려 3일 후에 거리성(巨里城)을 총공격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은밀히 이 말이 새어나가도록 하고자 사로잡은 포로를 느슨하게 감시하여 도망가게 했다. 공격하기로 예정된 날이 되자 과연 비읍이 직접 3만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왔다. 경감이 기뻐하며 장수들에게 이르길 『내가 전쟁장비들을 손질케 한 것은 비읍을 이곳에 오게 하려는 작전이었소. 이제 올 것이 왔으니 하고자 하는 바에 딱 들어맞게 되었소.』라고 하였다. 3천여 명의 병사들을 남게 하여 거리성을 지키도록 하는 한편 경감 자신은 정병들을 이끌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덕을 오르면서 서로 교전하여 크게 이기고 적들의 진영에 이르러 비읍을 베었다. 비읍의 잘린 머리를 거리성에 보이자 비감이 무리를 이끌고 장보에게로 달아났다.

 경 감은 그 적취를 수습하고 아직 항복 받지 못한 병영을 마저 공격하여 40여영(營)을 평정시켰다. 이리하여 마침내 제남(濟南)이 모두 평정되었다. 이때 장보는 극(劇)을 도읍지로 삼고 그의 아우 장람(張藍)을 시켜 그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서안(西安)을 지키게 하는 한편 제군(諸郡)의 태수들이 보낸 병사 1만여 명을 모아 임치(臨淄)를 지키게 했는데 서로 40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경감은 획중(劃中)으로 진군하여 두 성(城) 사이에 머물렀다.

경 감이 서안성은 비록 작지만 견고하고 또 장람의 군대가 날쌔다는 것과 임치는 비록 크기는 해도 실제로는 쉽게 공략할 수 있을 것임을 간파하고 칙서를 내려 여러 장교들을 불러모아 닷새 후에 서안을 공격하겠노라고 공공연히 얘기했다. 장람이 이 소문을 듣고 밤낮으로 삼엄한 경계를 폈다. 치기로 정한 날 꼭두새벽에 경감이 제장(諸將)들에게 칙서를 내려 모두 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날이 밝으면 임치성으로 향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호 군(護軍), 순량(荀梁) 등이 간언하기를 의당 서안을 먼저 공격해야지 않느냐고 했다. 경감이 말하길『그렇지 않소. 서안은 내가 공격하리라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수비를 철통같이 하고 있소. 우리가 임치로 뜻하지 않게 가면 반드시 놀랄 것이니 하루 정도만 공략해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오. 임치를 함락시키면 서안은 고립되어 장람과 장보가 서로 구원할 수 없게 되므로 장람이 반드시 도망치게 될 것이오. 이렇게 되면 이른바 하나를 쳐 둘을 얻게 된다는 것과 같아지는 셈이오. 만일 서안을 먼저 공격하였다고 할 때 곧바로 함락시키지 못하면 적들은 더욱 굳게 수비에 임할 것이고 이로 인해 우리측의 사상자(死傷者)가 많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오. 비록 함락시켰다고 해도 장람은 군대를 이끌고 임치로 달려가 임치의 병력과 합세하여 우리측의 허실(虛實)을 주시하게 될 것이오. 우리가 적지(敵地) 깊숙이 들어가 뒤에서 보급로가 차단되면 한달 남짓 되어 우리는 싸우지도 않고 곧 곤궁에 처하게 될 것이오. 여러분들의 말은 이점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오.』라고 하였다. 마침내 임치를 공격하여 반나절 만에 함락시키고 입성(入城)하였다. 장람이 이 사실을 듣고 크게 놀라 그 무리들을 이끌고 장보가 있는 극으로 도망쳤다.

 경 감이 군중(軍中)에 영(令)을 내려 극 아래지역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도록 했다. 장보가 오면 이 지역들을 취하여 장보를 격노케 할 심산이었다. 장보가 이를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길『우래(尤來), 대동(大彤)의 10여만 병력도 내가 그쪽 병영으로 나아가 깨뜨렸었다. 이제 경감의 군대가 그보다도 적고 또 모두 지쳐 있는데 두려워할 게 뭐 있으랴!』라 하고는 세 아우 장람, 장홍(張弘), 장수(張壽)와 옛 대동적(大彤賊)의 거수 중이(重異) 등의 군대와 함께 2십만 대군이라 일컬으며 임치의 큰 성 동쪽으로 와 경감을 공격하려고 했다.

 경 감이 먼저 치수(淄水)가로 나가 중이와 마주치게 되었다. 돌기(突騎)를 내보내려다 상대방의 선봉을 꺾어 장보로 하여 머뭇거리게 할 것 같아, 고의로 약한 척하여 적들의 기세를 부추겨 놓고는 병사들을 이끌고 소성(小城)안으로 들어와 진을 쳤다. 장보가 기세가 등등해져 곧바로 경감의 병영을 공격하였는데 유흠 등이 이들을 맞아 교전하였다. 이때 경감은 왕궁의 대(臺)에 올라 싸움을 지켜보고 있다가 유흠 등이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보고 직접 접병들을 이끌고 나가 동성(東城) 아래에서 장보의 진영 측면을 돌파하여 크게 이겼다. 나는 화살이 경감의 허벅지에 꽂혔으나 패도(佩刀)로 잘라내 아무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싸움이 끝났다. 경감은 그 이튿날 아침에 다시 병사들을 이끌고 성문을 나갔다.

 이 때 광무는 노(魯)에 머물고 있었는데 경감이 장보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와서 구원하려고 했으나 아직 임치까지 못미쳐 있었다. 진준이 경감에게 이르길『극의 적병들이 기세가 등등하니 병영을 닫고 병사들을 쉬게 했다가 천제(天帝)께서 오시면 다시 싸우도록 합니다.』라고 하자 경감이 대답하길『천제께서 장차 당도하시면 신하된 자는 마땅히 소를 잡고 술을 걸러 백관(百官)들을 대접해야 하는 것이거늘, 도리어 적들을 천제의 몫으로 남겨 두잔 말인가?』라고 하였다. 병사들을 내보내 큰 싸움을 벌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방전을 벌인 끝에 다시 크게 이겼다. 벤 적들의 수가 얼마나 많았던지 성중의 개울과 연못이 모두 가득 찼다. 경감이 장보가 지쳐 퇴각할 것을 알고 좌우익의 병사들을 미리 풀어 매복해 있다가 퇴각할 때를 기다리라고 했다. 밤이 깊어지자 장보가 과연 군대를 이끌고 퇴주하기 시작했다. 복병들이 뛰어나와 공격하여 거매수(鉅昧水)까지 추격하였다. 8, 9십리의 길이 죽은 시체로 이어졌고 군대의 장비 2천여 량(兩)을 획득했다. 장보는 극으로 되돌아가고 그의 형제들은 각기 군대를 이끌고 흩어졌다.

 며 칠 후에 광무가 임치에 당도하여 군영(軍營)의 노고를 치하하고 군신(君臣)들을 크게 회집(會集)하였다. 광무가 경감에게 이르길『옛적에 한신(韓信)이 역하(歷下)를 격파하여 한(漢)의 기초를 열었었는데, 오늘 장군이 축아(祝阿)를 공략하여 제(霽)의 서쪽 경계로 삼은 것은 한신의 자취를 이은 것으로 그 공이 서로 비견될 듯 하오. 그러나 한신은 공격을 당하여 항복했고 장군은 강한 적을 꺾었으니 그 공이 오히려 한신의 공보다 이루기 어려울 것이오. 또 전횡(田橫)이 여이기(麗食其)를 죽인 뒤에 조서에 응하게 되었을 때 고제(高帝)가 여이기의 아우에게 조서를 내려 전횡을 건드리지 말라는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니 원수로 삼아버리겠다고 했소. 장보가 전날 복륭(伏隆)을 죽였으나 돌아와 명을 받든다면 복륭의 아비 대사도(大司徒)에게 조서를 내려 그 원한을 풀게 할 터인즉, 그일 또한 서로 매우 유사하오. 장군이 전날 남양에서 제지(齊地)의 평정이란 이 큰 뜻을 세웠을 때, 짐은 대충 이루기 어려운 일일 것이라고 늘 여겼었소. 그런데 뜻을 가졌던 자가 마침내 일을 해내었구려.』라고 하였다.

 경 감이 다시 장보를 추격하자 장보는 평수(平壽)로 도망했다가 사죄의 표시로 군문(軍門) 앞에서 육단(肉袒)을 하고 죄인을 죽이는데 쓰는 도끼를 메고 서있었다. 경감이 장보를 광무가 있는 곳으로 보내고 장보의 군대를 통어하여 입성시켰다. 열 두 군(郡)의 깃발을 세우고 명령을 내려 자기군의 깃발 아래로 가게 했다. 병사들이 그때까지도 10여만이나 되었으며 군대의 장비는 7천여량(兩)에 달했다. 병사들을 흩어 귀향시키고 경감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성양(城陽)으로 갔다. 여기서 오교적(五校賊)의 잔당을 항복시켜 마침내 제의 땅을 완전히 평정했다.

 건 무 6년에 서쪽으로 가 외효(隗囂)를 막고자 칠(漆)에 둔병(屯兵)하였다. 9년에 중랑장(中郞將) 내흡(來歙)과 부(部)를 나누어 안정(安定), 북지(北地)의 여러 영보(營保:도적들의 근거지)들을 순시하면서 모두 항복시켰다. 경감이 평정한 군(郡)이 46개, 함락시킨 성(城)이 3백여 개나 되었으며 일찍이 좌절한 적이 없었다. 진무 12년에 경감이 병이 들자 광무가 몸소 수차례나 다녀갔다. 광무는 다시 경국(耿國)의 아우 경광(耿廣)과 경거(耿擧)를 중랑장으로 삼았다. 경감의 형제 여섯 명이 모두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몸수도 건강하게 당대에 영화를 누렸다. 경황이 죽자 시호를 열후(烈候)라 하고 막내, 경패(耿覇)로 하여 경황의 작위를 잇게 하였다.

 건 무 13년에 경감의 식읍을 늘렸다. 경감이 대장군의 인수(印綬)를 바쳐 군인의 길을 끝내고 열후(列侯)로서 조정의 청(請)을 받들었다. 이견(異見)이 분분한 때마다 불러들여 책략을 묻곤 하였다. 영평(永平) 원년에 죽었는데 시호를 민후(愍侯)라 했다.


두무

두 무(杜茂)는 자(字)가 제공(諸公)이고 남양군(南陽郡) 관군현(冠軍縣) 사람이다. 애초에는 하북(河北)에서 광무제(光武帝)에게 귀의하여 중견장군(中堅將軍)이 되어 항상 왕을 따라 정벌 다녔다. 세조가 즉위한 후 대장군(大將軍)을 배수받고 낙향후(樂鄕候)로 봉해졌다. 북쪽으로 오교(五校)를 진정(眞定)에서 공격하고 나아가 광평(廣平)을 평정하였다.

 건 무(建武) 2년, 다시 고경후(苦陘侯)로 봉해졌다. 중랑장(中朗將) 왕량(王梁)과 함께 오교의 적들을 위군(魏郡)·청하(淸河)·동군(東郡)에서 공격하여 여러 군영과 보루를 함락하고 지절대장(持節大將) 30여명을 항복시키니 세 개 군이 고요해져서 길이 소통되었다. 그 다음해, 사신을 보내 두무를 표기대장군으로 배수하여 패군(沛郡)을 공격케 하니 망현(芒縣)을 점령하였다. 그 때 서방에서 반란이 일어나 교강(佼彊)을 맞아들였다. 건무 5년 봄, 두무는 포로장군(捕虜將軍) 마무(馬武)를 이끌고 서방을 진공(進攻)하여 수개월 만에 그곳을 함락시키니 교강이 동헌(董憲)에게로 도망갔다.

 동 쪽이 평정되자 왕은 건무 7년 두무를 불러 병사를 이끌고 진양(晋陽), 광무(廣武)로 가서 주둔하면서 호(胡)의 도적들을 막으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건무 9년 두무는 안문(鴈門)의 태수인 곽량(郭凉)과 함께 노방(盧芳)의 장수 윤유(尹由)를 번치(繁畤)에서 공격하였는데 노방의 장수 가람(賈覽)이 호(胡)의 기병 만여 명을 이끌고 윤유를 구원하러 왔다. 두무가 나와 싸웠으나 패하여 병사를 이끌고 루번성(褸煩城)으로 후퇴하였다. 당시에 노방은 고루(高柳)를 근거지로 삼아 흉노(匈奴)의 병사와 연합하여 변방의 백성들을 여러 차례 노략질하니 왕이 그것을 근심하였다. 건무 12년 왕은 알자(謁者) 단충(段忠)을 보내 여러 군의 죄수들을 이끌고 가서 두무에게 배속케 하여 북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두무는 변방의 사졸을 징발하여 초소를 짓고 봉화(烽火)를 만들었으며 재화·비단·솜옷 등을 모아서 군사들에게 공급하고 병방의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니 감사하는 인파가 끊이질 않았다. 두무는 또한 둔전(屯田)을 세워 수레로 식량을 운반, 공급하였다.

 그 보다 앞서 안문(鴈門) 사람인 가단(賈丹)·곽광(藿匡)·해승(解勝) 등이 윤유에게 침략 당했었는데 윤유는 그들을 장수로 삼아 함께 평성(平城)을 수비하였다. 가단 등은 윤유의 왕인 노방(蘆芳)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함께 윤유를 죽여서 곽량(郭凉)에게 나아갔다. 곽량이 그 사실을 상주하자 왕은 그들을 모두 열후로 봉해주고 군수물자, 비단, 옷감을 두무와 곽량의 군대 및 평성(平城)의 항복한 백성에게 하사토록 명령하였다.

 이 로부터 노방의 성읍들이 점점 항복해 오고 곽량이 순씨(郇氏)에게 아부했던 족속들을 주살하여 힘없는 백성들을「위로한지」한 달여 만에 안문은 평화로워지고 노방은 드디어 흉노(匈奴)에게 도망갔다. 왕은 곽량의 아들을 발탁하여 중랑(中郞)으로 삼고 자신의 곁에서 보위(保衛)토록 하였다. 건무 13년 왕은 두무의 식읍을 늘려주고 수후(修侯)로 다시 봉해 주었다. 건무 15년 두무는 참거향후(參遽鄕侯)로 정하여 봉해졌다. 건무 19년에 죽었다.


구순

구순(寇恂)은 자(字)가 자익(子翼)이고 상곡군(上谷郡) 창평현(昌平縣) 사람으로서 대대로 명망 있는 종족이었다. 구순은 애초에 군의 공조(功曺)를 지내었는데 태수 경황(耿況)이 그를 매우 중히 여겼다.

 왕 망(王莽)이 패하고 갱시제(更始帝)가 서자 사자를 보내 여러 군현들을 순행케 하고『먼저 항복하는 자는 작위를 회복시켜 준다.』고 알리게 하였다. 구순은 경황을 따라 군의 경계에서 사자를 맞아들였다. 경황이 태수의 인수(印綏)를 바치자 사자가 그것을 받아가지고는 하룻밤이 지났는데도 돌려주지 않았다. 구순이 병사를 이끌고 사자를 보러 들어가서 돌려달라고 청하였다. 사자가 인수를 주지 않으면서 말하기를『천왕(天王)의 사자를 공조(公曺)인 그대가 위협하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구순이 말하기를『감히 사자님을 위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계책을 잘 몰라서 상심하는 것입니다. 이제 천하가 비로소 평정되고 나라의 신의(信義)가 아직 펴지지 않아서 사자님이 왕명을 받고 부절(符節)을 앞세워 사방을 순행하시매 여러 군현들이 목을 늘어뜨리고 귀를 기울여 왕명에 귀의하지 않는 군현이 없습니다. 이제 상곡군(上谷郡)에 이르러 큰 신의를 실추시키고 왕께로 향해 가는 마음을 막으며 모반할 틈을 생기게 한다면 장차 다시 어떻게 다른 군현에게 호령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경부군(耿府君)은 상곡에서 있은 지 오래되어 관리와 백성들의 친애하는 사람이니 지금 그를 바꾸어 버린다면 현명한 사람을 쓴다해도 등급이 마땅치 않고 현명치 못한 사람을 쓴다면 더욱 어지러워 질 것입니다. 사자님을 위해 계책을 세우자면 다시 그를 복위시켜서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사자가 그의 말을 듣지 않자 구순은 시중에게 호령하여 사자의 명령이니 경황을 불러 오라 하였다. 경황이 도착하자 구순은 사자에게서 인수를 빼앗아 경황의 허리띠에 매어주었다. 사자가 어쩔 수 없어 법제에 따라 그에게 인수를 내리게 하니 경황이 받아서 물러났다.

 왕 랑(王郞)이 일어나자 왕은 장수를 파견해 상곡(上谷)을 순행케 하여 경황에게 급히 병사를 징발하도록 하였다. 구순과 문하연(門下椽) 민업(閔業)이 함께 경황에게 유세하기를『한단(邯鄲)은 갑자기 일어나서 믿고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옛날 왕망(王莽)의 시대에 어려움에 처했던 이는 오직 유백승(劉伯升)이 있을 따름입니다. 지금 듣건대 대사마(大司馬) 유공(劉公)과 백승(伯升)의 어머니, 동생 등이 아랫사람들을 우대하여 병사들이 많이 그에게 귀의하니 우리도 그에게 붙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경 황이 말하기를『한단(邯鄲)이 바야흐로 강성하여 홀로 저항할 만한 힘이 없으니 어떻게 하오?』 구순이 대답하기를『지금 상곡(上谷)은 완정하고 튼튼하며 명사수가 만여 명이나 되어서 온 군의 물자를 가지고 거취(去就)를 살펴서 택할 수 있습니다. 제가 동쪽으로 가서 어양(漁陽)과 약속하고 마음을 합치고 병사를 모은다면 한단이라도 우리를 도모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경 황이 그의 말을 옳게 여겨 구순을 어양으로 파견하여서 팽총과 결탁하게 하였다. 구순은 돌아오다가 창평현(昌平縣)에 이르러 한단의 사자를 습격하여 그를 죽이고 그의 군대를 빼앗아서 마침내 경황의 아들 경합 등과 함께 남쪽으로 달려가 광아(廣阿)에서 광무제(光武帝)를 만났다. 왕은 구순을 편장군(偏將軍)으로 배수하고 승의후(承義侯)라고 부르며 왕을 따라 적들을 격파하게 하였다. 구순은 여러 번 등우와 모의하였는데 등우가 구순을 특별히 여겨 쇠고기와 술을 바치고 서로 즐거워하였다.


부준

부 준(傅俊)은 자(字)가 자위(子衛)이고 영천군(潁川郡) 양성현(襄城縣) 사람이다. 세조(世祖)가 양성(襄城)을 순행할 때 부준을 현정장(縣亭長)으로 삼아 군대를 맞게 하고 그를 교위(校尉)로 배수하였다. 그러자 양성(襄城)에서 부준의 어머니와 동생과 종족을 잡아가두고 모두 죽여버렸다.

그 뒤 왕을 따라 왕심(王尋) 등을 격파하고 편장군(偏將軍)을 배수받았다. 부준은 따로 경(京)·밀(密)을 격파하고 영천(潁川)으로 파견 당해 돌아와서 가족들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 지냈다.

 세 조가 하북(河北)을 토벌할 때 부준은 민객 10여명과 북쪽으로 따라가 한단(邯鄲)에 이르러 세조를 알현하였다. 세조는 그로 하여금 영천(潁川)의 병사를 거느리고 항상 정벌에 따라다니게 하였다. 세조가 즉위한 후 부준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건무 2년 부준을 곤양후(昆陽侯)로 봉하였다. 건무 3년 부준을 적노장군(積弩將軍)으로 배수하고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을 격파하게 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강동(江東)·양주(揚州)를 돌아다니며 모두 평정하게 하였다.

 건무 7년, 죽어서 시호를 위후(威候)라 하였다.

건 무(建武) 4년 봄에 전융은 신신(辛臣)을 남겨두어 이릉(夷陵)을 지키게 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장강(長江)을 따라 면수(沔水)를 거슬러 올라가 여구(黎丘)에 이르러 기일을 정하여 항복하고자 하였다.그런데 신신이 뒤에서 전융의 보물들을 훔쳐 가지고는 샛길로 가서 잠팽에게 먼저 항복하고는 편지를 보내서 전융을 불렀다. 전융은 신신이 필시 자신을 팔아넘긴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마침내 감히 항복하지 못하고 반대로 진풍의 군사와 힘을 합했다.

 잠 팽이 병사를 출동시켜 수개월 만에 크게 격파하니, 적의 대장군 오공(伍公)은 잠팽에게로 와서 항복하고 전융은 이릉(夷陵)으로 도망갔다. 광무제가 친히 여구(黎丘)에 행차하여 군사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잠팽 휘하의 부하 중 공훈 있는 자 백 여명을 봉(封)해 주었다. 잠팽이 진풍을 공격한지 3년이 되니, 그간 목을 벤 적병의 수가 구만여 명이어서 진풍에게 남은 병사는 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고 성안의 식량 또한 바닥이 나게 되었다.

 광 무제는 진풍의 세력이 매우 약해졌다고 판단하고 주우(朱祐)로 하여금 잠팽을 대신해서 진풍을 감시하게 하고는, 잠팽은 부준(傅俊)과 더불어 남쪽으로 전융을 공격하게 하니, 마침내 전융의 군사를 크게 격파하고 이릉(夷陵)을 함락시키고 도망치는 전융을 추격해 자귀에까지 이르렀다.

 전 융은 기병 수십 명과 함께 도망해 촉(蜀)으로 들어갔다. 전융의 처자와 병사 수만 명을 다 포로로 잡았다. 잠팽이 촉한(蜀漢)을 정벌하려 하였으나, 지형이 물을 끼고 있고 식량이 부족하며 물이 거세어서 식량을 운반하기도 어려운지라, 위로장군(威虜將軍) 풍준(馮駿)을 보내어 강주(江州)에 주둔시키고 도위(都尉)장군 전홍(田鴻)은 이릉(夷陵)에 주둔시키고 이현(李玄)은 이도(夷道)에 주둔시키고서, 스스로는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와 진향(津鄕)에 주둔하면서 형주(刑州)의 요로(要路)를 막고는 만이(蠻夷)족에게 알려 항복해 오는 자는 그 대장을 광무제께 아뢰어 제후로 봉해 주리라고 했다.

 애 초에 잠팽은 교지의 목(牧)인 등양(鄧讓)과 친분이 두터웠었다. 그리하여 등양에게 편지를 보내 광무제 통치하의 국가의 위엄과 덕을 설명하고는 또 편장군(偏將軍) 굴충(屈充)을 보내 강남(江南) 지역에 격문을 돌려 차례대로 임금의 명령을 전달했다. 그리하여 등양이 강하태수(江夏太守) 후등(候登), 무릉태수(武陵太守) 왕당(王堂), 장사(長沙)의 승상 한복(韓福) 계양태수(桂陽太守) 전합(田翕), 창오태수(蒼梧太守) 두목(杜穆), 교지태수 석광(錫光) 등과 더불어 관리를 파견하여 공물을 헌납하니, 이들을 모두 제후로 봉해 주었다. 이들 중에 혹자는 아들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잠팽의 정벌하는 일을 돕게 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비로소 강남의 보배들이 유통되게 되었다.

 건 무(建武) 6년 겨울에 광무제는 잠팽을 서울로 불러들여 수차례 연회를 열어 잠팽을 맞이하고 또 상을 후하게 내려 주었다. 잠팽이 다시 남쪽 진향(津鄕)으로 돌아가는데, 광무제가 명령을 내려 집에 들러 조상의 묘에 참배케 하고 관리 대장추(大長秋)로 하여금 초하루 보름으로 잠팽의 어머니의 안부를 묻게 했다.

 건 무(建武) 8년에 잠팽은 병사를 이끌고 광무제를 좇아 천수(天水) 지역을 격파하고, 장군 오한(吳漢)과 함께 서성(西城)에서 외효를 포위했다. 이때에 공손술(公孫述)의 장군인 이육(李育)이 군사를 거느리고 외효를 구하러 와서 상규지역에 머무니 광무제가 개연(蓋延)과 경감을 보내어 그를 포위케 하고는 스스로는 동쪽으로 돌아왔다. 잠팽에게 칙서를 내려 말하였다.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나면 곧바로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가서 촉(蜀)의 오랑캐를 공격하시오. 짐의 성품이 만족할 줄을 몰라 이미 농 땅을 평정하고서 또 다시 촉지역을 평정하기를 바라고 있소. 매번 군대를 출정 시킬 때마다 근심으로 머리가 하얗게 세오.』 잠팽이 마침내 계곡의 물을 막아 서성으로 들이대니 서성이 거의 물에 잠길 즈음, 외효의 장군 행순(行巡)과 주종(周宗)의 구원병이 도착하여 외효는 성을 빠져나가 기(冀)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한(漢)나라의 부대는 식량이 다 떨어져서 짐수레를 불태우고 병사를 이끌고 농 땅을 빠져나갔으며, 개연(蓋延)과 경감도 좇아서 퇴각했다. 외효가 군사를 내어 후미에서 진영을 공격해 오니 잠팽이 맨 뒤에서 이를 막아낸 고로 다른 장군들이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동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잠팽은 진향(津鄕)으로 돌아왔다.

 건 무(建武) 9년에 공손술(公孫述)이 휘하의 장군 임만(任滿)·전융(田戎)·정범(程汎) 등을 보내어 수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뗏목을 타고 강관(江關)으로 내려와 풍준(馮駿)과 전홍(田鴻)과 이현(李玄) 등을 격파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도(夷道)와 이릉(夷陵)을 함락시키고 형문(刑門)과 호아(虎牙)를 점거했다. 또한 강수(江水)를 가로질러 구름다리와 전투용 누각을 설치하고 나무판을 모아 세워 물길을 막고 산 위에 진영을 설치하고서 한(漢)의 군사에 대항했다. 잠팽이 수차례 이들을 공격했으나 불리하게 되자, 이에 직진할 수 있도록 전투용 누각을 설치한 배와 모험을 무릅쓰고 돌격할 수 있는 노를 저어 가는 배 수천 척을 구비하였다.

 건 무(建武) 11년 봄, 잠팽은 오한(吳漢) 및 주로장군(誅虜將軍) 유융(劉隆)·보위장군(輔威將軍) 장궁(藏宮)·효기장군(驍騎將軍) 유흠(劉歆)과 더불어서 남양(南陽)·무릉(武陵)·남군(南郡) 지역의 군사와 계양(桂陽)·영릉(零陵)·장사(長沙) 지역의 짐을 지고 노를 젓는 군졸들을 출병 시키니, 무릇 육만 여명의 병사와 오천 필에 달하는 기마가 모두 형문(刑門)에 모이게 되었다. 오한이 계양·영릉·장사 세개 군(郡)의 노젓는 군졸들에게 소비되는 양식이 너무 많다고 여겨 이들을 돌려보내려 하였다.

 그 러나 잠팽은 촉의 군대가 강한 것을 고려하여 이들을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글을 올려 이러한 상황을 보고했다. 광무제가 잠팽에게 알려 말하였다. 『대사마(大司馬)는 보병과 기병 사용에만 익숙하고 물에서의 싸움은 잘 알지 못하니, 형문(刑門)의 일은 남쪽 정벌의 임무를 맡은 그대가 알아서 일괄 처리토록 하시오.』 잠팽이 이에 군중에 명령을 내려 적의 구름다리를 공격하고 적의 진영에 먼저 오르는 자에게 으뜸상을 주겠노라 하면서 지원자를 모집했다. 그리하여 편장군(偏將軍) 노기(魯奇)가 이에 응하여 선봉에 나섰다. 이때에 날씨는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고 있었다.

 노 기의 배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 곧바로 적군의 구름다리로 돌격했는데 적군의 물을 막아 놓은 버팀목들이 바람에 쓸려 갈고리처럼 되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노기 등이 여세를 몰아 죽을힘을 다해 싸웠고 이어서 횃불을 날려 적진을 불태우니 바람이 거센 덕에 불이 더욱 잘 붙어서 적군의 다리와 누각 등이 다 타버렸다.

이 에 잠팽이 다시 전 군사를 동원하여 바람같이 함께 전진하니 가는 곳마다 이기지 못하는 곳이 없었다. 촉의 군사는 크게 혼란하여져서 물에 빠져 죽은 이만도 수천 명이었다. 임만(任滿)을 목 베고 정범(程汎)은 생포했는데, 전융(田戎)만 달아나서 강주(江州)를 보루로 삼았다. 잠팽이 상소하여 유융(劉隆)을 남군태수(南郡太守)로 삼고는 스스로는 장궁(臧宮)·유흠(劉歆) 등을 거느리고 오래도록 말을 달려 강관(江關)으로 가는데, 가는 도중 백성을 노략하는 일이 없도록 군중에 명령을 내려 두었다.

 잠 팽의 군사가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쇠고기와 술을 바치면서 영접하고 위로해 주었다. 잠팽은 그 장노들을 만나 대한(大漢) 제국의 백성들이 파(巴)와 촉(蜀)에게 오랫동안 시달리는 것을 가엾이 여겨 군사를 일으켜 원정을 와서 죄지은 자들을 토벌하고 백성들을 위해 근심거리를 없애주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술과 고기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백성들이 모두 크게 기뻐하며 다투어 성문을 열고 항복해 왔다. 광무제가 명령을 내려 잠팽으로 하여금 익주(益州)의 목(牧)이 되게 하고, 또 항복시킨 군(郡)들에 대해서는 태수(太守)의 직분을 행하도록 했다.

 잠 팽이 강주에 이르렀다. 전융은 식량이 풍부하여 함락시키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고 풍준(馮駿)을 남겨 지키게 하고는, 스스로는 군사를 이끌고 빠른 길을 이용해 점강(墊江)에 와서 평곡(平曲)을 공격해 그곳의 쌀 수십만 석을 획득했다. 공손술이 휘하의 장군 연잠(延岑) · 여유(呂鮪)·왕원(王元)과 동생 공손회(公孫恢)의 전 부대를 동원하여 광한(廣漢)과 자중(資中) 지역에서 대항케 하고, 또 장군 후단(侯丹)을 파견하여 군사 이만 여명을 거느리고 황석(黃石)에서 대항케 하였다. 이에 잠팽은 적의 눈을 현혹시키기 위해 가짜 병정을 많이 만들어 설치하고 또 보충군 양흡(楊翕) 등을 막아 싸우게 하고는, 스스로는 병사를 나누어서 일부는 장강(長江)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 강주(江州)로 돌아가게 하고 일부는 도강(都江)을 거슬러 올라가게 하여 후단(侯丹)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또한 한편으로는 새벽과 밤을 이용하여 배로 하여 달려 이천여 리를 가서 곧장 무양(武陽) 지역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또한 정예 기병을 파견하여 광도현(廣都縣)의 성도(成都)에서 수십리 떨어진 곳에까지 이르게 하니 그 기세가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듯 하였고 이르는 곳마다 적군은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애초에 공손술은 한나라의 병사들이 평곡(平曲)에 주둔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많은 군사를 출동시켜 대항하였다. 그런데 잠팽이 이미 무양(武陽)에 도착해 있고 염장의 부대 후미를 돌아 빠져나가 촉(蜀) 땅을 다 어지럽혔다는 말을 듣고는, 공손술은 대경실색하여 지팡이로 땅을 치며 말하였다. 『그가 과연 사람인가! 귀신인가!』

 잠팽이 주둔해 있던 곳의 지명이 공교롭게도 팽망(彭亡)이었다. 이 소리를 듣고 꺼림칙하게 여겨 진영을 옮기려 하였는데 마침 해가 저물어 옮기지 못했다. 촉의 자객이 도망쳐 온 노비로 가장하고 들어와 밤중에 잠팽을 찔러 죽였다.

잠 팽이 제일 처음 형문(刑門)을 격파하고 오래도록 말을 달려 무양(武陽)에 이르기까지 군대를 다스림이 매우 잘 정돈되어 있어서 조금도 법을 어기는 군졸들이 없었다. 공곡왕(卭穀王) 임귀(任貴)가 잠팽의 위엄과 신의를 전해 듣고는 수 천리 먼 곳에서 사신을 보내어 항복해 왔다. 그런데 마침 잠팽이 죽게 되니 광무제는 임귀(任貴)가 헌납한 공물들을 모두 잠팽의 처자에게 주고, 시호를 장후(壯侯)라고 했다. 촉인들이 잠팽을 가련하게 여겨 무양(武陽)에 사당을 세우고는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잠팽

잠 팽(岑彭)은 자가 군연(君然)이고 남양(南陽) 극양(棘陽) 사람이다.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때에 극양현의 현장(縣長)으로 있었다. 한(漢)의 군사가 일어나서 극양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잠팽은 가솔을 이끌고 전대(前隊)의 대부인 견부(甄阜)에게로 도망갔다. 견부가 잠팽이 극양현을 굳건히 지키지 못했다고 노하여, 잠팽의 어머니와 아내를 잡아 가두고 명령을 내려 잠팽으로 하여금 공훈을 세워 스스로 가솔들을 보존토록 했다. 그리하여 잠팽이 빈객을 거느리고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견부가 죽음에 이르러 잠팽은 부상을 당한 채 완(宛) 땅으로 피난하여 전대(前隊) 견부의 부장(副長)인 엄설(嚴設)과 함께 성을 지켰다. 한나라 군사가 공격한 지 수개월이 지나자 성안의 곡식이 바닥나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어, 잠팽이 엄설과 함께 성을 가지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한 의 여러 장수들은 잠팽을 죽이고자 하였는데, 대사도(大司徒)인 백승(伯升)이 말하기를… 『잠팽은 군(郡)의 관리로서 온 마음을 다해 성을 견고히 지킨 것이니, 이는 그의 절개입니다. 지금 큰 일을 하려 하시면 마땅히 의로운 선비들을 표창하셔야 하니, 잠팽을 봉하여 후인들을 권계함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니, 갱시(更始)가 곧 잠팽을 귀덕후(歸德侯)로 봉해 주고 백승(伯升)의 휘하로 소속시켰다. 백승이 해를 입게 되자 다시 대사마(大司馬) 주유의 교위(校尉)가 되어, 주유를 좇아 왕망의 휘하 양주목(楊州牧)인 이성(李聖)을 공격하여 그를 죽이고 회양성(淮陽城)을 평정했다. 주유가 잠팽을 천거하여, 회양도위(淮陽都尉)가 되었다. 갱시가 입위왕(立威王) 장앙(張仰)과 장군요위를 파견하여 회양땅을 진압하도록 하였는데, 요위가 반란을 일으켜 장앙을 공격하고 달아나니, 잠팽이 병사를 이끌고 요위를 쳐서 격파했다. 그 후에 영천태수(潁川太守)로 옮겨졌다.

 때 마침 용릉땅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영천지역을 점령하니, 잠팽이 그곳의 태수로 갈 수 없게 되어 마침내 휘하의 수백인과 더불어 하내(河內)의 태수이며 읍인(邑人) 한흠(韓歆)을 좇았다. 이때에 광무(光武)가 하내지역을 돌며 정벌하니, 한흠이 성을 고수하고자 논의하였는데 잠팽이 만류하며 듣지 않았다. 이윽고 광무가 회(懷) 땅에 이르자 한흠이 황급히 달려나가 맞이하여 항복했다. 광무가 한흠이 모반을 꾀했던 사실을 알고는 크게 노하여, 한흠을 잡아 북 아래 매어 두고는 장차 목을 베려 하였다. 광무가 잠팽을 불러 만나니, 잠팽이 이 기회를 이용해 진언하기를… 『오늘날 적미(赤眉)는 관문 안으로 쳐들어오고, 갱시(更始)는 위태로우며, 권신들은 제멋대로 날뛰며 서로 왕임을 자처하고, 나라 곳곳의 통로는 두절되고, 사방에서는 벌떼처럼 일어나고 군웅들은 다투어 이를 좇으니, 백성들이 목숨을 의탁할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대왕께서 하북(河北)을 평정하사 왕업(王業)을 여셨다는 소식을 접하니, 이는 진실로 하늘이 한(漢) 나라를 보살피신 것이며 선비들의 복이라고 생각되옵니다. 저는 다행스럽게도 대사도(大司徒) 백승(伯升)에 의해 목숨을 보전케 되었는데 채 은덕을 갚기도 전에 백승께서 도리어 화를 당하게 되니, 이것이 저의 천추의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대왕의 은덕을 입게 되었으니 저의 목숨을 다 받쳐 대왕을 보필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광 무(光武)가 잠팽의 말을 깊이 받아들였다. 이어서 잠팽이 또 한흠(韓歆)은 남양(南陽)에서 세력을 떨치는 집안의 사람으로 등용할 만한 인물이라고 말하니, 광무가 한흠을 용서하고 등우(鄧禹)의 군사로 삼았다. 갱시(更始)의 대장군인 여식(呂植)이 군대를 거느리고 기원(淇園)에 주둔해 있었는데, 잠팽이 유세하여 그들을 항복시켰다. 그리하여 자간대장군(刺姦大將軍)을 배수받고 군대를 감독하게 되었으며, 항상 천자(天子)로부터 받은 부절(符節)을 지니고 광무를 좇아 하북(河北)을 평정하게 되었다. 광무(光武)는 임금으로 즉위한 뒤, 잠팽에게 정위(廷尉) 벼슬을 배수하고 예전처럼 귀덕후(歸德侯)로 지내게 하였으며 대장군(大將軍)의 일을 맡아 하도록 하였다. 이에 잠팽은 대사마(大司馬) 오한(吳漢), 대사공(大司空) 왕량(王梁), 건의대장군(建義大將軍) 주우(朱祐), 우장군(右將軍) 만수(萬脩), 집금오(執金吾) 가복(賈復), 효기장군(驍騎將軍) 유식(劉植), 양화장군(揚花將軍) 견심, 적야장군 후진(侯進), 편장군(偏將軍) 풍이(馮異) · 제준(祭遵) · 왕패(王覇) 등과 함께 낙양을 포위하여 수개월이 흘렀다. 그런데 주유 등이 낙양성을 굳게 지킨 채 항복하려 들지 않았다. 광무제는 잠팽이 일찍이 주유의 교위장군(校尉將軍)이었던 까닭에 그로 하여금 가서 주유를 설득하도록 보냈다.

 주 유는 성 위에서 잠팽은 성 아래에서 서로 노고를 위로하며 마치 평소 그랬던 것처럼 환담을 나누게 되었다. 『저는 이전에 장군을 곁에서 모시다가 장군의 추천을 받아 발탁되었으므로 늘 은혜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지금 천하의 정세는, 적미(赤眉)가 이미 장안(長安)을 점거했고 갱시(更始)는 삼왕(三王)의 반란을 만났는데, 이제 광무제께서 천명을 받으셔서 연(燕) 땅과 조(趙) 땅을 평정하시고 유(幽)와 기(冀)의 땅을 다 차지하시고, 백성들이 마음으로 귀의하고 천하 준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황제께서 대군(大軍)을 이끌고 친히 낙양을 공략하러 오신 것입니다. 앞으로도 천하의 일은 이 형세대로 흘러갈 것입니다. 그러하니 공께서 비록 성을 굳게 지키신다 한들 그로써 장차 무엇을 바라시겠습니까?』라고 잠팽이 말하였다.

주유가 대답했다. 『대사도(大司徒) 백승(伯升)이 해를 당할 때 내가 그 모의에 관여했고, 또 갱시(更始)께도 소왕(蕭王)을 북벌(北伐)하러 보내지 마시라고 간언했었으니, 진실로 나의 죄가 깊음을 스스로 알고 있다네.』

 잠 팽이 돌아와서 광무제에게 소상히 보고했다. 그러자 광무제가 말하길,『무릇 큰일을 이루려는 자는 작은 원한들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주유가 만일 지금 항복해 온다면 벼슬과 작위를 내려 보호해 줄 것이거늘 하물며 벌을 내리겠는가? 하수(河水)가 여기에 있으니 내 하수를 두고 맹세한다.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 않겠다.』라고 했다. 잠팽이 다시 주유에게 가서 말을 전하니 주유가 성 위에서 밧줄을 내려 보내며 말하길『정녕 믿을만한 말이라면 이 밧줄을 타고 올라올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잠 팽이 밧줄 있는 곳으로 지체하지 않고 나아가 성벽을 오르려 하니 주유가 그의 성의를 보고 곧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닷새 후에 주유가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잠팽에게로 오면서 각 부서 장군들을 모아놓고 명령을 내리기를『굳건히 성을 지키면서 나를 기다리시오. 내가 만일 돌아오지 않으면 장군들은 곧장 군사들을 이끌고 환원(轘轅) 땅을 올라 언왕에게로 가시오.』라고 했다. 주유는 손을 뒤로 묶은 채 잠팽과 함께 하양(河陽)으로 왔다. 광무제가 그를 보고 곧 포박을 풀게 하고 불러서 만나본 후, 다시 잠팽에게 명하여 그날 밤 즉시 낙양성으로 돌려보내도록 했다.

 이 튿날 아침 주유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항복하니, 주유에게 평적장군(平狄將軍)을 배수하고 부구현(扶溝縣)의 제후로 봉했다. 주유는 본래 회양현(淮陽縣) 사람인데 후에 소부(小府) 벼슬을 했고, 대대로 부구현의 제후로 봉해졌다.

건무(建武) 2년에 잠팽으로 하여금 형주(荊州)를 공격하게 하니, 주 · 엽 등 십여 개의 성을 함락 시켰다.

이 때에 남쪽 지방은 더욱 혼란스러웠었다. 남군(南郡) 사람인 진풍이 여구(黎丘) 땅을 점거하고는 초려왕(楚黎王)이라고 자칭하면서 열 두개 현(縣)을 공략하여 점령하였고, 동흔(董訢)은 도향(堵鄕)에서 병사를 일으켰고, 허한(許邯)은 행(杏)에서 병사를 일으켰고 또 갱시(更始)의 여러 장군들도 각기 병사를 거느리고 남양군(南陽郡)의 성들을 점거하고 있었다. 광무제가 오한(吳漢)을 보내어 그들을 정벌토록 했는데, 오한의 군대가 지나가는 곳에 약탈당하는 일이 잦았다. 이때에 파로장군(破虜將軍) 등봉(鄧奉)이 광무제를 알현하고 신야(新野)로 돌아왔는데, 오한의 군대가 자기의 고을을 약탈하는 것을 보고는 격노하여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오한의 군대를 격파하고 짐수레를 빼앗고 육양에 주둔하며 다른 적들과 힘을 합했다. 그해 가을에 잠팽은 해(杏) 땅을 격파하여 허한을 항복시켜 직책이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으로 옮겨졌다.

 다 시 주우(朱祐)와 가복(賈復) 및 건위대장군(建威大將軍) 경감(耿感), 한충장군(漢忠將軍) 왕상(王常), 무위장군(武威將軍) 곽수(郭守), 월기장군(越騎將軍) 유굉(劉宏), 편장군(偏將軍) 유가(劉嘉)와 경식(耿植) 등을 보내어 잠팽과 힘을 합하여 등봉(鄧奉)을 토벌토록 하였다. 잠팽 등의 군대가 먼저 도향(堵鄕)을 공격하니 등봉이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동흔을 도우러 왔다. 동흔이나 등봉의 병사는 모두 남양(南陽)의 정예병들이라서 잠팽 등이 수개월 동안 공격해도 이길 수가 없었다. 건무(建武) 3년 여름, 광무제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정벌의 길에 올랐다. 광무제의 군대가 엽성(葉城)에 이르렀는데 동흔의 별장군(別將軍)이 병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길을 막아서니 광무제의 수레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잠팽이 달려나가 공격하여 크게 그들을 무찔렀다. 광무제가 도양(堵陽)에 도착하니, 등봉은 밤을 틈타 도망쳐 육양으로 돌아갔고, 동흔은 항복했다. 잠팽이 다시 경감, 가복 및 적노장군(積弩將軍) 부준, 기도위(騎都尉) 장궁(臧宮) 등과 함께 등봉을 추격하여 소장안(小長安)에 이르렀다.

 광 무제가 장군들을 거느리고 직접 싸워 크게 적을 격파했다. 이에 다급해진 등봉은 곧 항복했다. 광무제는 등봉이 옛 공신(功臣)임을 어여삐 여기고 또 오한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하여, 등봉을 살려주자고 하였다. 그러자 잠팽과 경감 등이 간언 하였다. 『등봉이 배은망덕하게도 반역함에 군대를 이끌고 멀리 원정 와서, 가복은 부상을 입고 주우는 적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또한 폐하께서 이미 행차하셨는데도 등봉은 죄를 뉘우치지 못하고 직접 싸움에 나섰으며, 군사가 패배한 후에야 항복했습니다. 만일 등봉을 죽이지 않으시면 악(惡)을 경계할 수 없게 됩니다.』그리하여 등봉을 목베었다. 등봉은 서화현(西華縣) 제후인 등신(鄧晨)의 조카였다.

 광 무제가 돌아가면서 잠팽으로 하여금 부준(傅俊), 장궁(臧宮), 유굉(劉宏) 등을 비롯한 병사 삼만 여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진풍(秦豊)을 공격하고 황우성(黃郵城)을 함락시키도록 하였다. 그런데 진풍이 그의 대장군(大將軍) 채굉(蔡宏)을 거느리고 등(鄧) 땅에서 잠팽의 군사를 막으니, 잠팽은 수개월이 지나도록 진격할 수가 없었다. 광무제가 이상히 여겨 잠팽을 꾸짖었다. 이에 잠팽은 두려워서 곧 군사를 밤중에 훈련시키며 군중에 명령을 내리기를 이튿날 새벽 서쪽으로 산도현(山都縣)을 공격할 것이라 하고는, 포로의 감시를 소홀히 하여 포로가 도망쳐서 진풍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도록 하니, 진풍이 곧 그의 전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잠팽을 맞이하러 왔다. 잠팽은 이에 군사를 잠수시켜 면수(沔水)를 건너게 하여 진풍의 장군 장양(張楊)을 아두산(阿頭山)에서 공격하여 크게 격파시켰다. 또한 시내 계곡을 따라 벌목하여 길을 뚫어 여구(黎丘)를 직접 습격하여 주둔병들을 격파하니, 진풍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말을 달려 이들을 구하기 위해 돌아왔다.

 잠 팽은 다른 장군들과 함께 동산(東山)에서 진영을 펴고 있었다. 진풍이 채굉과 함께 밤에 잠팽을 공격하였는데, 잠팽은 미리 예상하고서 준비를 해 놓은 터라 병사를 출동시켜 거꾸로 그들을 공격하니, 진풍은 패하여 도망쳤고 채굉을 쫓아가 목을 베었다. 잠팽은 무음후(舞陰侯)로 다시 봉해졌다. 진풍의 승상 조경(趙京)이 의성(宜城)을 가지고 항복해 오니, 그에게 성한장군(成漢將軍)을 배수하고, 잠팽과 함께 여구(黎丘)에서 진풍을 포위하도록 했다. 이때에 전융(田戎)이 이릉(夷陵)에서 병사를 거느리고 있다가 진풍이 포위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큰 군대가 들이닥칠까 염려하여 항복하고자 하였다.

 그 런데 처형인 신신(辛臣)이 전용에게 간언 하였다. 『지금 사방의 호걸들이 제각기 군국(郡國)을 점거하고 있는 실정이니, 낙양 땅을 얻는 것도 손바닥을 뒤집듯 쉬운 일입니다. 정예병을 갖추어 놓고서 변화를 관찰함이 좋겠습니다.』 전융이 대답했다. 『진풍은 세력이 강대한데도 오히려 광무제의 남방토벌 부대에 의해 포위당했으니, 하물며 나의 세력으로 어찌 하리요? 항복하기로 결정하겠다.


견담

견 담(堅鐔)은 자(字)가 자급(子伋)이고 영천군(潁川郡) 양성현(襄城縣) 사람이다. 군현리(郡縣吏)를 지내다가 세조가 하북(河北)을 토벌할 때 견담을 추천하는 사람이 있어서 왕을 만나 볼 수 있었다. 왕은 그의 관리로서의 능력을 참작하여 주부(主簿)로 삼았다. 또한 그를 편장군(偏將軍)으로 배수하여 왕을 따라 하북(河北)을 평정하게 하니 견담은 따로 여노(廬奴)에서 대창(大搶)을 격파하였다. 세조가 즉위한 후, 견담을 양화장군(揚化將軍)으로 배수하고 은강후(濦强侯)로 봉하였다.

 여러 장군들과 함께 낙양(洛陽)을 공격하였는데 주유(朱鮪)가 따로이 동성(東城)을 지키는 사람들을 이끌고 모반하여 견담과 은밀히 약속하길 새벽에 상동문(上東門)을 열기로 하였다.

 견 담은 건의대장군 주우(朱祐)와 함께 아침을 틈타 들어와서 주유와 부기창고 아래에서 크게 싸워 죽이고 다치게 한 자가 대단히 많았다. 아침식사 먹을 무렵에야 전투가 끝나니 마침내 주유가 항복하였다. 또한 내황(內黃)을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건 무 2년 우장군(右將軍) 만수(萬修)와 남양(南陽)의 여러 현들을 순행(徇行)하였는데 도향(堵鄕) 사람인 동흔(董訢)이 완성(宛城)에서 모반하여 남양(南陽)의 태수 유린(劉驎)을 잡아 가두었다. 견담은 군대를 이끌고 완성으로 달려가 용감한 병사를 선발하여 밤에 성으로 올라가 문지기를 참수하고 쳐들어가니 동흔이 마침내 성을 버리고 도향으로 도망쳤다. 등봉(鄧奉)이 다시 신야(新野)에서 반란을 일으켜 오한(吳漢)을 대파하였다. 그 때 만수(萬修)가 병들어 죽으니 견담이 홀로 고립되어 남쪽으로 등봉을 막고 북쪽으로 동흔을 제지하였는데 일년 만에 도로가 막히고 식량이 도착하지 않아서 견감은 채소를 먹으면서 사졸들과 고통을 함께 하였다. 매번 급할 때마다 몸소 돌과 화살을 막으니 몸에 세 번이나 상처를 입으면서 그의 군사들은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왕이 남양(南陽)을 정벌하여 동흔, 등봉을 격파하고 나서 견담을 좌조(佐曹)로 삼아 항상 정벌에 따라다니게 하였다. 건무 6년 합비후(合肥侯)로 정하여 봉해졌다. 건무 26년에 죽었다.


풍이

풍이(馮異)는 자가 공손(公孫)이고 영천군(潁川郡) 부성현(父城縣) 사람이다. 책읽기를 좋아하여 좌씨춘추(佐氏春秋)·손자병법(孫子兵法)에 능통하였다.

 한(漢) 나라 병사들이 일어나자 풍이는 군연(郡掾)으로서 5개 현을 감독하고 있었는데 부성현의 현장(縣長)인 묘맹(茵萌)과 함께 성을 지키며 왕망(王莽)을 위해 한나라에 항거하였다.

 광 무제(光武帝)가 영천을 순행하면서 부성현을 공략하였으나 항복시키지 못하고 건거향(巾車鄕)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풍이가 남몰래 자신이 속한 현들을 돌아다니다가 한나라 병사에게 붙잡혔다. 풍이의 사촌형 풍효(馮孝)와 같은 군출신인 정침(丁綝)·여안(呂晏)과 함께 광무제를 모시고 있었는데 풍이가 붙잡히자 함께 풍이를 천거하여 부름을 받고 광무제를 만나보게 되었다.

풍 이가 말하였다. 『저 한 사람의 힘은 강약(强弱)을 따질 수가 없습니다. 노모께서 성중에 계시니 원컨대 돌아가 5개 성에 근거하여 공을 세우고 은덕에 보답하겠나이다.』 광무제는『좋다.』고 대답하였다. 풍이는 돌아가 묘맹에게 말하였다. 『지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강성하여 일어났으나 횡포한 자들이 많은데 오직 유장군(劉將軍) 만이 이르는 곳에서 노략질을 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을 보면 보통 사람이 아니니 그에게 귀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묘맹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생사의 운명을 함께 하기로 하였으니 삼가 그대의 계책을 따르겠소.』

 광 무제가 남쪽으로 완(宛) 땅에 돌아왔는데 갱시제(更始帝)의 여러 장군들 중 부서현을 공략한 자가 전후 10여명에 이르렀으나 풍이는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광무제가 사예교위(司隸校尉)가 되어 부성현을 지나가는 길에 풍이 등은 즉시 성문을 열고 술과 소고기를 바치면서 그를 맞아들였다. 이에 광무제는 풍이를 주부(主簿)로 삼았다. 풍이가 광무제에게 같은 고을 사람인 요기(銚期)·숙수(叔壽)·단건(段建)·좌륭(左隆) 등을 천거하자 광무제는 그들을 모두 연사(掾史)로 삼아 그들을 데리고 낙양(洛陽)에 이르렀다.

 갱 시제가 여러 차례 광무제를 파견해서 하북을 순행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여러 장군들은 모두 안 된다고 하였다. 이 때 좌승상(左丞相) 조경(曹竟)의 아들 조후(曹詡)가 상서(尙書)를 지내고 있었는데 두 부자가 요직에 있었으므로 풍이는 광무제에게 그들과 두텁게 결탁하라고 권유하였다. 그 후 광무제가 하북을 지날 때 조후는 힘이 되어 주었다.

 백 승(伯升)이 패한 이후 광무제는 감히 슬퍼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못하고 매번 홀로 있음으로 때마다 술과 고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잠자리에는 눈물을 흘린 자국이 있었다. 풍이가 홀로 머리를 조아리며 넌지시 슬퍼하는 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광무제가 그를 만류하면서 말하였다. 『경은 망언(妄言)하지 않도록 하시오.』

 풍 이가 다시 한가한 틈을 타서 광무제에게 진언(進言)하였다. 『천하가 모두 왕씨(王氏)를 고통스럽게 여겨 한(漢)나라를 사모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갱시제의 여러 장군들은 제멋대로이고 포학하며 이르는 곳마다 노략질을 하여 백성들이 실망하여 의지할 곳을 잃고 있습니다. 지금 공께서는 오로지 천명에 따라 은덕(恩德)을 베풀고 계십니다. 걸주(桀紂)의 어지러움이 있고 난 후에 탕무(湯武)의 공훈이 있었으며 사람이 오래도록 굶주리고 목마르게 되면 쉽게 포만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당장 관속들을 나누어 파견하여 여러 현들을 순행하면서 원한과 응어리 맺힌 것을 다스리게 하시어 은택을 베푸소서.』

 광 무제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한단(邯鄲)에 이르러 풍이와 요기를 파견해서 수레를 타고 여러 속현(屬縣)들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죄인을 심문하였으며,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목숨 걸고 스스로 왕께 나아가려는 사람은 그 죄를 사하여 주고, 이천석 이상 되는 장리(長吏) 가운데 광무제에게 동화하는 자와 복종하지 않는 자의 명단을 분류 작성하여 바치게 하였다.

 왕랑(王郞)의 병사가 일어나자, 광무제는 계(薊)로부터 동남쪽으로 달리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면서 풀밭에서 자고 요양현(饒陽縣) 무루정(無蔞亭)에 이르렀다. 그때의 날씨는 매우 추워서 병사들이 모두 굶주리고 피곤해 있었다.

풍이는 콩죽을 바쳐 광무제가 요기하도록 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 광무제는 여러 장군들에게 말하였다. 『어제 공손(公孫:풍이의 字)이 바친 콩죽 덕분에 추위와 굶주림이 모두 풀렸다.』

 남 궁현(南宮縣)에 이르렀을 때 큰 비바람을 만났다. 광무제는 수레를 끌고 길옆 빈집으로 들어갔다. 풍이는 땔나무를 해오고 등우(鄧禹)가 불을 지펴서 광무제는 부뚜막에 대고 올을 말렸다. 풍이는 다시 보리밥과 토끼의 어깨고기를 왕에게 바쳐 요기 하도록 하였다. 또한 호타하(虖沱河)를 건너 신도(信都)에 이르렀을 때 풍이로 하여금 따로 하간(河間)의 병사를 모으게 하였다. 풍이는 돌아와 편장군(偏將軍)을 배수받고 왕을 따라 왕망을 깨뜨리고 나서 응후(應侯)로 봉해졌다.

 풍 이는 사람됨이 겸손하여 오만하지 않았다. 길을 가다 다른 장수들을 만나면 늘 수레를 한쪽으로 끌어 길을 비켜주었다. 나아가고 물러섬에 항상 규율이 있어서 군중(軍中)에서는 그에게 단정하다고 칭찬하였다. 매년 머물러 쉴 때 여러 장군들이 함께 앉아 공(功)을 논하는데 풍이는 항상 홀로 나무 아래 앉았으므로 군대에서는 그를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고 불렀다. 한단(邯鄲)을 깨뜨리고 나서 부서를 바꾸고 여러 장군들에게 나누어주며 각기 배속된 병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그러나 병사들이 모두 말하길 대수장군에게 속하고 싶다고 하여 광무제는 그 때문에 풍이를 중히 여겼다. 풍이는 또한 철경(鐵脛)을 북평(北平)에서 격파하고 흉노(匈奴)의 우림답돈왕(于林闒頓王)을 항복시키고 나서 왕을 따라 하북(河北)을 평정하였다.

 그 때 갱시제는 무음왕(舞陰王) 이질(李軼)·늠구왕(廩丘王)·전립(田立)·대사마(大司馬)·주유(朱鮪)·백호공(白虎公)·진교(陳僑)로 하여금 30만에 달하는 병사를 이끌고 하남(河南) 태수인 무발(武勃)과 함께 낙양(洛陽)을 지키게 하였다. 광무제는 장차 북쪽으로 연(燕)·조(趙)를 순행하려고 하여 위군(魏郡)·하내(河內)군 만이 군대를 만나지 않았으며 성읍(城邑)이 완정(完整)하고 창고가 가득하여 구순을 하내(河內) 태수로 배수하고 풍이는 맹진장군(孟津將軍)으로 삼아 2개 군의 군대를 거느리고 하수(河水)로 올라와 구순과 합세하여 주유(朱鮪)와 대항하게 하였다.

 풍 이는 이질에게 보내는 서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듣건데 밝은 거울로 모습을 비추고 지나간 일로 지금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옛날 미자(微子)는 은(殷) 나라를 떠나 주(周) 나라로 들어갔으며 항백(項伯)은 초(楚) 나라를 배반하고 한(漢) 나라에 귀의하였고, 주발(周勃)은 대왕(代王)을 맞아들이고 소제(小帝)를 내쳤으며 곽광(藿光)은 효선(孝宣)을 받들고 창읍(昌邑)을 폐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늘을 두려워하고 명(命)을 알았으며 존망(存亡)의 기미를 보고 폐하고 흥하는 일을 살펴서 그런 까닭에 한 때에 성공하고 만세에 위업을 드리울 수 있었습니다. 설사 장안(長安)이 아직도 도울만하다고 하여도 세월이 흘러가면 왕과의 관계가 소원해져서 가까워지기 힘드니 그렇게 되면 그대가 어떻게 한 모퉁이를 점거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장안이 어지러이 무너지고 적미(赤眉)족이 접근해오며 왕후(王侯)들이 난을 일으키고 대신들이 괴리되며 기강(紀綱)이 끊어지고 사방이 붕괴되며 다른 성을 가진 종족들이 다투어 일어나고 있으므로 그런 까닭에 소왕(蕭王)께서 눈서리를 맞으면서 하북(河北)을 다스리고 계신 것입니다

『바 야흐로 지금 뛰어난 영웅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백성들이 바람에 쏠리듯 기대오고 있으니 빈(邠) · 기(岐)가 주(周)를 사모했다고 하여도 지금의 상황과 비유될 수가 없습니다. 그대가 진실로 승패(勝敗)를 깨닫고 큰 계책을 정하여 고인(古人)의 공적을 거울삼아 전화위복(轉禍爲福)할 수 있는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만약 용맹스러운 장수더러 오래도록 달리게만 하고 정예병에게 성을 포위하라고만 명한다면 뒤에 혹 후회하게 되더라도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애 초에 이질과 광무제는 굳게 결의하여 더욱 친애하였으나 갱시제가 서게 되자 도리어 이질은 갱시제와 함께 백승(伯升)을 저버렸다. 그가 비록 장안이 위급하다는 것을 알아서 항복하고 싶었으나 스스로 편안하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질은 풍이에게 다음과 같이 답장하였다.

『저 는 본래 광무제와 모의하여 한(漢)나라를 일으키고 함께 생사(生死)의 약속을 맺고 흥망의 계책을 함께 하기로 하였습니다. 지금 저는 낙양(洛陽)을 지키고 장군은 맹진(孟津)을 다스리고 있어 함께 중요한 요새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좋은 기회를 만나 힘을 합치면 안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광무제에게 저의 우둔한 계책을 진언하여 나라와 백성을 보위하기를 원할 따름입니다.』

 이 질은 풍이와 편지를 주고받은 후에 다시 풍이와 전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풍이는 북쪽으로 천장관(天井關)을 공략하고 상당(上黨)의 두개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또한 풍이는 남쪽으로 하남(河南)·성고(成皐)의 동쪽 13개 현을 평정하고 여러 주둔군들을 모두 평정하니 항복하는 자가 10여만 명이었다.

 무 발(武勃)은 만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광무제의 군대를 공격하자 풍이는 군대를 거느리고 하수(河水)를 건너와 무발과 사향(士鄕)아래에서 싸워 대파하고 무발의 목을 베고 적병 오천 여 명을 죽였으나 이질은 성문을 굳게 닫고 무발의 군대를 구원하지 않았다. 풍이는 이질이 신의를 드러낸 것을 보고 그 사실을 왕께 상주하여 알렸다. 광무제는 고의로 이질의 서신을 폭로하여 주유(朱鮪)가 알도록 하였다. 주유가 노하여 마침내 사람을 시켜 이질을 죽여버렸다. 이 일로 해서 성안이 혼란해져 항복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하여 주유는 토난장군(討難將軍) 소무(蘇茂)로 하여금 만여 명의 병사를 데리고 온(溫)땅을 공격하게 하고 주유 자신은 수만 명을 이끌고 평음(平陰)을 공격하여 풍이를 협공하려고 하였다. 풍이는 교위호군(校尉護軍)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구순(寇恂)과 합세하여 소무를 공격케 하여 그를 깨뜨렸다. 풍이가 하수(河水)를 건너 주유를 공격하니 주유가 달아났다. 풍이는 그를 낙양(洛陽)에까지 추격하여 성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돌아왔다.

 격문을 돌려 상황을 보고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축하하면서 광무제에게 즉위하라고 권유하였다. 광무제는 풍이를 불러 호(鄗)땅에 나아가게 하고 사방의 동정을 물었다. 풍이가 대답하였다.

『3 왕(회양왕(淮陽王)·양왕(穰王)·수왕(隨王))이 모반하고 갱시제가 패망(敗亡)하여 천하에 주인이 없으므로 종묘를 지키고자 하는 우려가 대왕에게 달렸습니다. 마땅히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위로는 사직(社稷)을 위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소서.』

광무제가 말하였다.

『내가 어젯밤 꿈에 붉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깨어나 보니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오.』

 풍이는 그 말을 듣자 아랫자리로 내려가 두 번 절하면서 축하하고 말하였다. 『그것은 천명이 정신에 나타난 것입니다.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은 대왕의 신중한 성품 탓입니다.』

마 침내 풍이는 여러 장군들과 의논하여 존호(尊號)를 올렸다. 건무 2년 봄, 풍이는 이양하후(異陽夏侯)로 정하여 봉해졌다. 풍이는 병사를 이끌고 양적(陽翟)의 적인 엄종(嚴終)·조근(趙根)을 공격하여 그들을 깨뜨렸다. 왕은 풍이에게 조칙을 내려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의 무덤을 돌아보게 하고 태중대부(太中大夫)로 하여금 술과 고기를 보내게 하고 2백리 내의 태수 · 도위(都尉) 이하의 사람들 및 종족들을 모이게 하였다.

 그 때 적미(赤眉), 연잠(延岑)족이 삼보(三輔)에서 난리를 일으키고 군현의 대유지들도 각기 군대를 만들어 일어나니 대사도(大司徒) 등우(鄧禹)가 평정하지 못하여 등우 대신 풍이를 파견해 그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광무제는 하남(河南)까지 전송하러 가서 풍이에게 수레와 7척 보검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풍이에게 칙명을 내리면서 말하였다.

『삼 보(三輔)가 왕망(王莽)·갱시(更始)의 난을 만나고 또 다시 적미·연잠의 만행을 겪으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의지할 데가 없다. 지금 정벌할 때에는 반드시 성과 땅을 도살·침략하지 말고 조용히 평정하고 그들을 편안히 모여 살게 해주면 그만이다. 여러 장수들이 힘껏 싸우지 않는 것은 아니겠으나 노략질을 좋아한다. 경은 본래 병사들을 잘 다스리니 스스로 칙명 받은 것을 염두에 두어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풍이는 머리를 조아려 명을 받고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이르는 곳마다 위의와 신망을 널리 폈다. 홍농(弘農)의 떼도둑 가운데 장군을 칭하는 자가 10여명 있었는데 모두 군대를 이끌고 풍이에게 항복하였다.

 풍이는 적미족의 화음(華陰)에서 만나 서로 60여 일을 대치하면서 수십 차례나 싸워서 그의 장수 유시(劉始), 왕선(王宣) 등 5천여 명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건 무 3년 봄, 왕은 사자를 파견해서 풍이를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배수하였다. 그 때 마침 등우(鄧禹)가 거기장군(車騎將軍) 등홍(鄧弘) 등을 거느리고 돌아왔다가 풍이와 만났다. 등우와 등홍은 풍이에게 함께 적미족을 공격하자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풍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 리 군대가 적군과 대치한 지가 수십 일이 되오. 비록 용맹한 장수들을 여러 차례 생포했다 해도 아직 남은 적병이 많으니 서서히 은덕과 신의로써 그들을 회유하는 것이 좋겠소. 급속히 병사를 일으켜서 그들을 깨뜨린다는 것은 어렵소, 주상께서 지금 여러 장군들을 면지(冕池)에 주둔하면서 동쪽을 막으라 하시고 저에게 서쪽을 공격하라 하셨으니 그것은 우리가 한꺼번에 그들을 이길 수 있는 아주 좋은 계책이오.』

 등 우 · 등홍은 풍이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등홍은 마침내 다른 날 크게 싸우는데 적미족은 거짓 패한 척하고 군대의 짐을 버리고 달아났다. 수레에는 모두 흙을 싣고 콩을 그 위에 얹어 두었는데 등홍의 병사들은 굶주려 있었으므로 다투어 먹으려 하였다. 적미족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등홍을 치니 등홍의 군대는 무너져버렸다. 풍이와 등우가 군대를 합쳐 등홍을 구하러 달려가자 적미족은 조금 퇴각하였다. 풍이는 병사들이 굶주려 있고 피곤하니 잠시 쉬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으나 등우는 듣지 않고 다시 싸워 크게 패하고 3천여 명의 병사가 죽고 다쳤다. 등우는 간신히 탈출하여 의양(宜陽)으로 돌아왔다. 풍이는 말을 버리고 걸어서 회계반(回谿反)으로 갔는데 그의 휘하의 몇 명만을 데리고 군영으로 돌아갔다.

풍 이는 다시 성벽을 굳게 하고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고 여타 진영의 병사 수만 명을 불러모아 적과 싸울 것을 기약하였다. 풍이는 건장한 병사에게 적미족과 똑같이 변장하고서 길옆에 매복해 있으라고 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 적미족은 병사 만여 명으로 하여금 풍이의 선봉대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풍이는 병사를 조금만 내보내서 그들을 구조하였다.

 적 들은 풍이의 세력이 약하다고 판단하고 모든 군대를 동원해 풍이를 공격하니 풍이도 병사를 풀어 크게 싸웠다. 해가 기울자 적병들은 기운이 떨어졌다. 그 틈에 복병들이 갑자기 일어나 옷이 서로 섞었으나 적미족을 식별을 하지 못하고 군대가 마침내 당황하여 무너졌다. 풍이는 추격하여 효저에서 그들을 대파하고 남 · 여 8만 명의 항복을 받았다.

나머지 군사도 10여만 명이 있었으나 동쪽으로 의양(宜陽)으로 패주하여 항복하였다.

 왕은 편지를 내려 풍이를 위로하면서 말하였다.

『적 미족을 깨뜨리고 평정시켰으니 병사들이 수고로웠소. 처음에는 비록 회계(回谿)로 도망갔었으나 마침내는 면지(冕池)에서 분연히 일어났으니 아침에 잃었다가 저녁에 다시 찾아 거두었다고 할만하오. 공을 논하여 상을 내려 큰 공훈에 답하리라.』그때 적미가 비록 항복했다고는 하나 도적들은 여전히 성하였다. 연잠(延岑)은 남전(藍田)에 근거하고 왕흠(王歆)은 하규(下邽)에 근거하고 방단(芳丹)은 신풍(新豊)에 근거하고 장진(蔣震)은 패릉(覇陵)에 근거하고 장한(張邯)은 장안(長安)에 근거하고 공손수(公孫守)는 장릉(長陵)에 주둔하고 양주(揚周)는 곡구(谷口)에 주둔하고 여유는 진창(陳倉)에 근거하고 각굉(角閎)은 연(연)에 주둔하고 임랑(任良)은 호에 근거하고 여장(汝章)은 회리에 근거하여 각각 장군이라 사칭하면서 병사가 많은 자는 만여 명이었고 적은 자는 수천 명으로 돌아가면서 공격하였다.

 풍 이는 한편 싸우고 한편 행군하면서 상림원(上林苑)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연잠은 적미가 깨져 버리자 스스로 무안왕(武安王)이라 칭하고 목수(牧守)를 배치하였으며 관중(關中)에 근거하면서 장한(張邯)·임랑(任良)과 함께 풍이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풍이는 그들을 격파하여 천여 명의 목을 베자 여러 진영·요새에서 연잠에 붙어 지키던 사람들이 모두 와서 항복하고 풍이에게 귀의하였다. 연잠은 도망했다가 석(析)을 공격하였는데 풍이는 복한장군(僕漢將軍) 등엽(鄧曄)·보한장군(輔漢將軍) 우광(于匡)을 보내 연잠을 공격하게 하여 그를 대파하였다.

또 한 그의 장수 소신(蘇臣) 등 8천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연잠은 마침내 무관(無關)에서 남양(南陽)으로 달아났다. 그 때는 백성들이 굶주려서 사람을 잡아먹고 황금 한 근은 콩 다섯 되와 맞바꾸었다. 길은 막히고 군수품은 이르지 않아 병사들은 모두 나무열매로 끼니를 때웠다. 왕은 명령을 내려 남양(南陽)의 조광(趙匡)으로 하여금 우부풍(右扶風)이 되어 병사를 이끌고 풍이를 돕게 하고 아울러 비단과 곡식을 보내니 군(軍) 중에서는 모두 만세를 불렀다.

 풍 이는 군량이 풍족해지자 호족 가운데 명령에 따르지 않았던 자들은 주살하거나 벌을 주고, 항복한 사람 가운데 공로가 있는 자는 포상하여 주었으며 그들의 우두머리는 경사(京師)로 보내고 군대를 해산시켜 본업에 돌아가도록 하였다. 풍이의 위의는 관중(關中)에 널리 펴졌다. 그러나 여유(呂鮪)·장한(張邯)·장진(蔣震)은 사신을 보내 촉(蜀)에 항복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평정되었다.

그 다음해 공손술(公孫述)은 장수 정언(程焉)을 파견해서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여유에게 나아가 진창(陳倉)에서 주둔하도록 하였다. 풍이는 조광(趙匡)과 그들을 맞아 싸워 대파하니 정언은 한천(漢川)으로 패주하였다. 풍이는 그들을 추격하여 기곡(奇曲)에서 싸워 다시 대파하고 돌아와 여유(呂鮪)를 격파하니 요새에서 항복하는 자가 대단히 많았다.

그 후, 촉(蜀)에서는 여러 차례 장수를 파견해 출병하였으나 풍이는 그때마다 그들을 꺾어 버렸다. 백성들을 품어주고 억울한 사건들을 해결해 주니 드나든 지 3년 만에 상림(上林)에는 귀화하는 자가 도읍을 이룰만 했다.

 풍 이는 너무 오래 변방에 있어서 스스로 편안치 않았다. 그래서 조정을 생각하여 임금 가까이에 있고 싶다고 글을 올렸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장(章)을 올려 말하기를 『풍이가 관중(關中)에서 권력을 휘둘러 장안(長安)의 현령을 목베고 그의 권위가 대단히 강해서 백성들이 그에게 귀의하여 그를 「함양왕(咸陽王)」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그 장(章)을 풍이에게 보여주었다. 풍이는 놀랍고 당황하여 사죄하는 글을 올렸다. 『신은 본래 유생(儒生)으로 다행히 명(命)을 받을 기회를 만나 왕의 군대에 몸담게 되어 사사로운 은혜를 과분하게 받고 대장이 되고 제후로 봉직을 받았습니다. 임무를 받아서 미미하나마 공을 세우게 된 것은 모두 주상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이지 우매한 제가 미칠 수 있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신이 엎드려 생각하기에, 왕의 명령을 받고 전공(戰功)을 세우는 것은 매번 뜻대로 되었으나 때로 제 마음대로 결단하는 것은 후회해 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주상의 탁월한 식견을 접한 지가 오래될수록 더욱 멀어져서 이제야 「성(性)과 천도(天道)는 얻어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병 사를 처음 일으키던 어지러운 때에는 호걸들이 서로 다투어 사람을 미혹케 하는 자가 천을 헤아렸습니다. 신은 다행히 주상을 만나 성스러운 주상의 명견(明見)에 몸을 위탁하였습니다. 그러한 위급하고 어지러운 중에서도 감히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거늘 하물며 천하가 평정되고 상하의 질서가 잡힌 지금, 신이 왕께 받은 작위가 높고 높아 헤아릴 수 없지 않습니까? 진실로 바라는 것은 왕의 칙명에 삼가 따라서 봉록을 죽을 때까지 다할까 하는 것뿐입니다. 신에게 보여주신 장(章)을 보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뿐입니다. 엎드려 생각하는 것은 밝으신 주상께서 신의 우매함을 알고 계시어 이 기회에 두서없이 변명하는 것입니다.』 왕은 답장하기를 『장군은 짐에게 있어서 의(義)로는 군신(君臣) 관계이고 은혜로는 부자(父子)지간이다. 무엇을 걱정 근심하며 두려워하는가?』라고 하였다.

 건무 6년 봄, 풍이는 경사(京師)로 왕을 조견(朝見)하였다. 광무제는 공경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내가 병사를 일으킬 때의 주부(注簿)였다. 나를 위해 온갖 고난을 겪고 관중(關中)을 평정하였다.

조 회가 끝나자 왕은 중황문(中黃文)으로 하여금 보배·의복·전백(錢帛) 을 풍이에게 하사하게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위급한 때 무루정(無蔞亭)에서 콩죽을 바치고 호타하(虖沱河)에서 보리밥을 바쳤었는데 그 고마운 뜻을 오래도록 갚지 못하였소.』라고 하였다. 풍이는 머리를 조아리고 감사하면서 말하였다.

『신 이 듣건대 관중(關中)은 환공(桓公)에게 「원컨대 공께서는 허리띠쇠에 화살이 박히던 때를 잊지 마소서 신은 죄인 호송수레에 태워져 끌려오던 일을 잊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였다 합니다. 그래서 제(齊)나라는 관중에게 의지하였습니다. 신도 지금 원하옵기는 주상께서는 하북(河北)에 있었을 때의 어려움을 잊지 마소서. 소신도 감히 건거(巾車)에서 살려주신 은혜를 잊지 않겠나이다.』

 그 후 여러 번 잔치자리에서 보고 이야기하며 촉(蜀)을 정벌할 것을 의논하다가 10여일 머물러 있은 뒤에 풍이의 처자식에게 풍이를 따라 서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건 무 6년 여름, 왕은 장수들을 파견해서 농(隴)지역을 점령하라고 하였으나 외효(隗囂)에게 패하여 풍이에게 명령을 내려 순읍(栒邑)에 주둔하게 하였다. 풍이의 군대가 이르기 전에 외효는 승세를 타고 그의 장수 왕원(王元)·행순(行巡)으로 하여금 2만여 병사를 이끌고 농(隴)지역에서 벗어나게 하고 행순은 순읍을 점령하도록 파견하였다. 풍이는 곧장 군대를 몰아가 먼저 그곳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여러 장군들이 말하였다.

『적병의 기세가 성하고 새로이 승세를 타고 있으므로 함께 싸우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땅히 군대를 편리한 곳에 주둔시켜 놓고 서서히 방략을 생각해 보지요.』풍이가 말하였다.

『적 병이 경계에 임박하였으니 그들은 사소한 이익에 급급하여 더 깊숙이 들어오고 싶어할 것이오. 만약 순읍을 얻게 되면 삼보(三輔)가 위태로와질테니 그것은 우리가 걱정하는 일입니다. 대개「공격하는 자는 부족해 하고 수비하는 자는 여유있다.」고 하였소. 지금 먼저 성을 점거하여 안일함으로 피로함을 대한다면 싸울 바도 못될 것이오.』

 풍 이는 몰래 가서 성문을 닫고 군기와 북을 내리게 하니 행순이 그 사실을 모른 채 급히 달려왔다. 풍이는 그가 뜻하지 않은 순간을 이용해 갑자기 북을 두들기고 깃대를 세워 출병하였다. 행순의 군대가 놀라 어지럽게 달아나니 풍이는 그들을 수십리 추격하여 대파하였다.

 제 준(祭遵)도 왕원을 연에서 격파하였다. 그러자 북지(北地)의 여러 호장(豪長) 경정(耿定) 등이 모두 외효를 버리고 항복하였다. 풍이는 진상을 상서(上書)하고 감히 공훈을 자랑하려 들지 않았다. 다른 장수들이 혹 그의 공을 나누어 가지려고 하자 왕은 그것을 근심하여 편지를 내려 말하였다.

『대 사마(大司馬)·호아(虎牙)장군·건위장군(建威將軍)·한충장군(漢忠將軍)·포로장군(捕虜將軍)·무위장군(武威將軍)에게 명령을 내린다. 적병이 왕성히 쳐내려 와 삼보(三輔)가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순읍(栒邑)이 위급하여 망하는 것은 촌각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북지(北地)의 진영과 보루에서는 군대를 억류하고 관망하였다. 지금 성마다 위급함을 면하고 적병을 꺾어서 경정(耿定)의 무리로 하여금 다시 군신의 의(義)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한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의 공훈은 구산(丘山)과도 같이 크지만 그는 오히려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다. 맹지반(孟之反)이 분연히 달릴 수 있으나 후진으로 남았던 것과 또한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금 태중대부(太中大夫)를 보내 정서장군의 관리·병사 중 사상자(死傷者)에게 의약과 관을 보내니 대사마 이하의 장군들은 친히 죽은 이를 조상하고 상한자를 위문하여 겸허하게 받들라.』

 그 리고 풍이로 하여금 의거(義渠)로 진군케 하고 북지(北地)의 태수일을 아울러 맡도록 하였다. 청산(靑山)의 호(胡)가 만여 명을 이끌고 와 풍이에게 항복하였다. 풍이는 또한 노방(盧芳)의 장수 가람(賈覽)·흉노(匈奴)의 욱건일축왕(薁鞬日逐王)을 공격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상군(上郡)·안정(安定)도 모두 항복하였다. 풍이는 다시 안정(安定)의 태수일을 맡게 되었다.

 건 무 9년 봄, 제준(祭遵)이 죽자 왕은 풍이에게 정로장군(征虜將軍)을 배수하고 그의 군대를 거느리게 하였다. 외효가 죽자 그의 장수 왕원(王元)·주종(周宗) 등이 외효의 아들 외순(隗純)을 다시 세우고 여전히 병사를 모아 기(冀)땅에 근거하니 공손술(公孫述)이 장수 조광(趙匡) 등을 파견해 구조하였다. 광무제는 다시 풍이에게 천수(天水)태수 일을 하게 하고 조광등을 공격하게 하니 1년이 지난 후에 그들을 모두 목베었다. 여러 장군들이 함께 기(冀)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잠시 돌아와 병사들을 쉬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풍이는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않고서 항상 여러 군대 중 선봉대가 되었다.

 그 다음해 여름, 여러 장군들과 낙문(落門)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기 전에 병이 나서 군(軍)중에서 죽었다. 시호를 절후(節侯)라 하였다. 큰아들 풍창(馮彰)이 뒤를 이었다.


왕패

왕 패(王覇)의 자(字)는 원백(元伯), 영천군(潁川郡) 영양현(潁陽縣)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법률(法律)을 좋아하여 왕패의 아버지는 군(郡)의 결조연(決曹掾)이 되었고 왕패 또한 젊어서 옥리(獄吏)가 되었다. 그러나 왕패는 늘 강계하며 옥리의 직을 기꺼워하지 않았는데 그의 아버지가 이상하게 여기고 서쪽으로 보내 장안(長安)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한 (漢)이 군대를 일으켜 영양을 지나게 되었을 때 왕패는 빈객(賓客)들을 거느리고 광무제를 배알했다. 그리고는 『장군감이라면 의병을 일으켰겠지만 제 자신이 그 정도의 역량이 못됨을 익히 알던 터에 공(公)의 위덕(威德)을 흠모하게 되었으니 원컨대 행오(行伍)에 끼워나 주십시오.』라고 얘기했다. 이에 광무가 이르길, 『꿈에서조차 현사(賢士)를 생각했거늘 함께 공업(功業)을 이루는 일에 다른 무엇이 있으리오?』하고는 그를 따라 곤양(昆陽)에서 왕심(王尋), 왕읍(王邑)을 치게 했다. 싸움이 끝나자 왕패는 향리(鄕里)로 돌아가 쉬었다.

광무가 사예교위(司隷校尉)가 되어 영양을 지날 때 왕패는 그의 아버지에게 청하여 그를 따라가자고 했다.

 왕 패의 아버지가 이르길, 『나는 이미 늙어 군대의 일을 맡을 수가 없다. 너나 가서 열심히 하거라.』라고 하였다. 이에 왕패는 광무를 따라 낙양(洛陽)까지 갔다. 광무가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왕패를 공조령사(功曹令史)로 삼고, 왕패를 따르게 하여 하북(河北)으로 건너갔다.

애 초에 빈객(賓客)으로 왕패를 좇던 자들이 수십 명이 되었으나 조금씩 조금씩 떠나버렸다. 광무가 왕패에게 이르길, 『영천에서 나를 따라온 자들은 모두 가버리고 이제 그대 혼자만 남았구려. 노력하시오. 질풍(疾風)이라야 굳센 풀을 알아낼 수 있는 법이라오.』라 하였다.

 왕랑(王郞)이 봉기를 했을 때 광무는 계에 있었는데 왕랑이 격문을 돌려 광무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 광무가 왕패를 시켜 시중(市中)으로 나가 모병하게 하고 장차 왕랑을 치려고 하였다.

그 러나 시중의 사람들이 크게 웃고는 손짓하며 야유하였다. 왕패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되돌아오자 광무는 곧바로 남쪽 하곡양(下曲陽)으로 말을 달렸다. 왕랑의 병사들이 뒤를 따르고 있다는 전문(轉聞)이 있자 광무를 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진 군하여 호타하에 이르렀을 때 척후병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강이 풀려 얼음이 떠다니는데다 배가 없어 건널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관속(官屬)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는데 광무가 왕패더러 가서 살펴보라고 했다. 왕패는 사실을 말하자니 뭇사람들이 두려워할 것 같고 앞으로 나가자니 강이 막고 있는지라 돌아와서 거짓으로 아뢰기를, 『얼음이 두터워 건널 수 있겠습니다.』라 하였다. 이 말에 관속들이 모두 기뻐했다. 이에 광무가 웃으면서 이르길,『척후병이 헛소리를 했구먼.』이라 하고는 드디어 앞으로 나아갔다.

 강 가에 이르자 이상하게도 얼음들이 서로 붙어 있었다. 광무가 왕패에게 도강(渡江)을 감호하도록 시켰는데 몇 기(騎)를 남겨놓고 얼음이 풀렸다. 광무가 왕패에게 이르길, 『우리 군대를 편안히 건너게 하여 죽음을 면하게 한 것은 경(卿)의 힘이었소.』라 하자 왕패가 사양하며 말하길『이는 명철하신 공(公)의 지극한 덕(德)과 신기하고 영묘한 하늘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무왕(武王)을 도왔다는 백어(白魚)의 얘기도 이보다 더 신묘하지는 않았을 겁니다.』라고 하였다.

광 무가 관속들에게 이르기를『왕패의 기지(機智)로 무사히 도강한 일은 하늘이 내린 상서로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라 하며 왕패를 군정(軍正)으로 삼고 관내후(關內侯)라는 작위(爵位)를 주어 그 공을 치하했다. 신도(信都)에 이르러 군대를 풀어 한단(邯鄲)을 함락시켰다.

 왕패는 왕랑을 추격하여 마침내는 그의 목을 베고 그의 새수(璽綬)를 빼앗았다. 왕패는 다시 그 공으로 왕향후(王鄕侯)에 봉해졌다.

광 무를 따라 하북(河北)을 평정할 때 항상 장궁(藏宮), 부준(傅俊)과 함께 병영을 썼는데 유독 왕패만이 사졸(士卒)들을 잘 돌봐 주었다. 죽은 병사의 옷을 벗긴 후 염을 하는가 하면 다친 병사들을 몸소 돌보기도 했다. 광무가 즉위하여 왕패가 병사(兵事)에 밝고 사졸들을 잘 돌본다는 것을 알고 독자적인 직책을 주어도 되리라고 여겨 그를 편장군(偏將軍)으로 삼았다. 아울러 장궁과 부준의 병사들도 거느릴 수 있게 했는데 이 때 장궁과 부준의 직책은 기도위(騎都尉)였다. 건무(建武) 2년에 왕패는 다시 부파후(富波侯)에 봉해졌다.

건무 4년 가을에 광무는 초로 순시를 떠났는데 왕패와 포로장군(捕虜將軍) 마무(馬武)를 시켜 동쪽으로가 수혜(垂惠)에서 주건(周建)을 토벌토록 하였다.

 이 때 소무(蘇茂)가 오교적(五校賊)의 사졸 4천여 명을 거느리고 주건을 구원하고자 하여 우선 날랜 기병들을 보내어 숨어 있다가 마무의 군량(軍糧)을 약탈하도록 했다. 이에 마무는 사고가 발생한 곳으로 가 구원하였다. 주건이 성안으로부터 군대를 내보내 마무를 협공(挾攻)했으나 마무는 왕패의 구원병이 오리라는 것을 믿고 그다지 애써 싸우지 않았다. 마침내 마무의 군대가 소무와 주건에게 패하여 도주하게 되었는데 왕패의 병영을 지나면서 큰소리로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에 왕패가 말하길 『적(賊)의 병사들이 너무 많아 나가서 싸워 봤자 양쪽이 패(敗)할 것이 뻔하니 모쪼록 잘 싸워 주시오』라 하고는 병영의 문을 닫고 수비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군리(軍吏)들이 모두 나가서 싸우자고 했다.

 왕 패가 이르길, 『소무의 병사들이 날쌔고 또 그 수효가 많아 우리 병사들이 속으로 두려워하고 있소. 포로장군 마무와 내가 서로 의지하며 양군(兩軍)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면 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오. 지금 병영을 닫고 굳게 지켜 우리가 서로 구원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게 되면 도적들은 반드시 기세를 펴고 가벼이 들어오게 될 것이고, 또 포로장군은 구원이 없음을 섭하게 여겨 배전(倍前)의 노력으로 싸우게 될 것이오. 이렇게 되면 소무의 병사들이 지치게 될 것인 즉 우리가 그 틈을 타 치게 되면 이길 것은 뻔한 이치요.』라고 하였다. 과연 소무와 주건이 총력전을 펴 마무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싸우기 시작한 지가 꽤 되었을 때 왕패 군영의 장사(壯士) 노윤(路潤) 등 수십 명이 머리칼을 자르고 싸우기를 청했다. 왕패가 장사들의 심지(心志)를 읽은 터라 병영의 뒤를 터 날랜 기병을 내보내 도적들의 후미를 치게 했다. 소무와 주건이 앞뒤로 공격을 받게 되자 혼비백산하여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에 마무와 왕패는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각기 자기의 진영으로 되돌아갔다.

 도 적들이 다시 무리를 지어 싸움을 걸어왔으나 왕패는 꿋꿋하게 누워 나가지도 않고 사졸들을 실컷 먹이고는 놀게 했다. 소무가 왕패의 병영으로 활을 퍼붓듯이 쏘아 왕패 앞의 술동이에도 꽂혔으나 왕패는 편안하게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군리(軍吏)들이 한결같이 이르기를 『소무의 군대가 오전에 패했으니 지금 쉽게 쳐부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패가 이에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소무의 사졸들은 객병(客兵)들로 먼 곳에서 왔는데다 양식이 부족하다. 그래서 자주 공격하여 한번에 이길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제 병영을 닫고 병사들을 쉬게 하는 것이 이른바 싸움을 하지 않고도 상대방의 군대를 굴복시킨다는 것이니 선(善) 중의 선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무와 주건은 싸울래도 싸울 수 없어 군대를 끌고 병영으로 되돌아갔다. 그날 밤에 주건의 조카 주송(周誦)이 반란을 일으켜 성문을 닫고 항거하자 소무와 주건은 도주하였다. 주송은 수혜성(垂惠城)을 왕패에게 바치고 투항하였다.

 건 무 5년 봄에 광무는 태중대부(太中大夫)에게 부신(符信)을 가져가게 하여 왕패에게 토로장군(討虜將軍)을 제수했다. 6년에는 신안(新安)에서 둔전(屯田)하도록 하고 8년에는 함곡관(函谷關)에서 둔전하도록 했다. 또 왕패는 형양(滎陽), 중모(中牟)의 도적들을 공격하여 모두 평정시켰다. 건무 9년에 왕패는 오한(吳漢) 및 횡야대장군(橫野大將軍) 왕상(王常), 건의대장군(建義大將軍) 주우(朱祐), 파간장군(破姦將軍) 후진(侯進) 등이 거느리는 병사 5만여 명과 함께 노방(盧芳) 휘하의 장수 가람(賈覽), 민감(閔堪)을 고류(高柳)에서 공격하였다. 흉노(匈奴)들이 기병을 보내 노방을 돕고 한군(漢軍)이 비(雨)를 만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대장군 오한(吳漢)이 낙양(洛陽)으로 돌아가며 주우에게는 상산(常山)에 주둔케 하고 왕상과 후진에게는 각각 탁군과 어양(漁陽)에 머물도록 시켰다. 광무는 새서(璽書)를 보내 왕패에게 상곡태수(上谷太守)를 제수하고 둔병(屯兵)은 전과 같이 거느릴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군(郡)의 경계에 상관없이 흉노의 포로들을 포격(砲擊)케 했다.

 건 무 10년에 왕패는 다시 오한 등 네 장군이 거느리는 병사 6만여 명과 함께 고류에서 나와 가람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조서가 내려져 왕패와 어양태수(漁陽太守) 진흔은 휘하 병사들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되었다. 흉노의 좌남장군(左南將軍)이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가람을 구원하러 왔을 때, 왕패 등이 평성(平城)아래에서 연달아 싸워 이기고 변새 바깥까지 추격하여 수백 급(級)의 목을 베었다. 왕패 및 여러 장수들은 안문(雁門)으로 들어가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두무(杜茂)와 만나 노방의 휘하 장수 윤유(尹由)를 곽과 번치에서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