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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남당사료

23. 第二十三世<安原大帝>紀 제23세<안원대제>기(4)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8. 13.
         원문출처;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23.pdf

◎ 癸亥<大藏>十三年, 春正月, 辛酉朔, 受朝於<大宮>, 有鳳凰来鳴于<朱木宮>. 上, 乃與 <聂>公主, 入其殿, 名曰<鳳凰宮>.
 以左侍中<桂春娘>為左丞相, 以其夫<婁師德>為右丞相. <桂春卿>為左侍中. <朱金鈴>右侍中.  <高>皇后生<布德>太子. <高歓>, 使其子, 来献錦絹万匹・皇后翟服七函. 上, 送螺鈿金碗一襲于<歓>妻<婁>氏.
 <宇文泰>使, 来献土物, 告其妻<馮翊>去冬生子<覺>. 上, 賜衣于<馮翊>. <馮翊>生殺兄之仇子, 其情慘矣.

○ 계해{단기2876/AD543}<대장>13년, 춘정월, 신유일 초하루, <대궁>에서 조례를 받았는데, 봉황이 <주목궁>으로 날아와서 울었다. 이에 상은, 이윽고 <섭>공주와 함께, <주목궁>의 전각으로 들어갔으며, <봉황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좌시중 <계춘랑>을 좌승상으로 삼았고, 그녀 지아비 <루사덕>은 우승상으로, <계춘경>은 좌시중으로, <주금령>은 우시중으로 삼았다.  <고>황후가 <포덕>태자를 낳았다. <고환>이 자신의 아들을 시켜서 찾아와 비단과 명주 만 필 및 황후 적복 일곱 상자를 바쳤다. 이에 상은 소라나전 금 주발 일습을 <환>의 처 <루>씨에게 보내주었다.
 <우문태>의 사신이 찾아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우문태>의 처 <풍익>이 지난겨울에 아들 <각>을 낳았음을 고하였다. 이에 상은 <풍익>에게 옷을 하사하였다. <풍익>은, 오빠를 죽인 원수의 자식을 낳았으니, 그 심정이 참담하였을 것이다.

◎ <高澄>强奸御史中尉<高仲宻>之妻<李>氏. <仲宻>, 怒, 殺<虎牢>守将<奚壽興>, 以城降于<泰>. 上, 謂<高>皇后, 曰;“我國之臣, 其妻得寵於君, 則喜. 爾國之臣, 怒. 是, 不忠也.” 后曰;“汝乃万年天子, 而吾父乃汝家之月子奴也. 安得不然.” 上, 笑, 曰;“汝知其本, 則不敢侮我也.” 后曰;“本則雖然, 今為汝妻, 汝乃我身也. 豈有不能任意其身者乎. 可速拜我.” 上乃拜於后, 后抱上而喜, 曰;“汝, 吾夫也.” 上, 倦于政事, 日與<高>皇后・<聂>公主等, 戱謣如是, 淫湎無時, 遂致疝氣陰萎, 湯劑不絶.
 二月, 命以<善屛>為東宮補妃. <善屛>, 能文章·色且壮. 上, 累敢不嫡, 遂賜東宮.

○ <고징>이 어사중위 <고중밀>의 처 <이>씨를 억지로 간음했다. 이에, <중밀>은 노하여 <호뢰>를 지키는 장수 <해수흥>을 죽이고 그 성을 들어서 <{우문}태>에게 투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상이 <고>황후에게 이르길; “우리나라의 신하들은 자기의 처가 임금의 승은을 입게 되면 좋아하는데, 그대의 나라 신하들은 노여워하고 있소. 그것은 불충이오.”라 하였더니, {<고>}후가 아뢰길; “당신은 만년천자이시지만, 제 아비는 당신 집안 달빛{여자} 자식의 종놈인데 어찌 그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이에 상은 웃으며 이르길; “자네도 자신의 본바탕을 알고 있은 즉 감히 나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야.”라 하였더니, 후가 말하길; “{저의} 근본은 비록 그러하여도, 지금은 당신의 처이오니, 당신이 바로 제 몸이십니다. 어찌 제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겠습니까? 어서 저에게 절 해보세요.”라 하였다. 이리하여, 상은 후에게 절을 하였고, 후는 상을 품에 안고 즐거워하며 말하길; “당신은 제 지아비이십니다.”라 하였다. 상은 정사에 권태를 느끼더니, 날마다 <고>황후 및 <섭>공주 등과 희롱하여 망측하기가 이러하였고, 아무 때나 음사에 빠지더니, 끝내는 허리아래가 습하고 시들하기에 이르렀으며, 탕약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2월, <선병>을 동궁의 보비로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선병>은 문장과 색사에 능하고 젊기도 하여, 상이 여러 번 당해내기가 어려워하더니, 마침내 동궁에게 내려 주게 되었던 것이다.

◎ 三月, <歓>, 與<泰>戦于<邙山>, 大捷, <陳元康>請追<泰>入<長安>, 不從. <仲宻>之献<虎牢>[故]也. <泰>, 引軍, 以應攻拔<栢谷>, 而圍<河橋><南城>. <歓>, 以十万軍, 至<河>北. <泰>, 退軍<瀍>, 縱火船於上流以燒<河橋>. <斛律金>等, 以小艇百余載長鎖, 伺火船至以釘釘之, 引鎖向岸, 橋得不燒. <歓>渡<河>據<邙山>為陳留数日. <泰>夜登<邙山>以襲<歓>. 候騎告;“<泰>, 自四十里, 蓐食乾飯而来.” <歓>曰;“自當渴死. 正陣待之.” 黎明, 兩軍相遇. <彭楽>, 以数千騎衝<泰>軍之北垂, 所向奔潰, 馳入<泰>營, <歓>疑<楽>叛, 忽西北塵起, <楽>使告捷, 虜<泰>大都督<臨洮王><東>等僚佐四十八人. 諸将乘勝擊<泰>, 大破之, 斬首三万余級.

○ 3월, <환>은, <태>와 <망산>에서 싸워서, 크게 이겼는데, <진원강>이 <태>를 추격하여 <장안>으로 들어가길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중밀>이 <호뢰>를 {<태>에게} 바친 때문이었다. 이에 <태>가, 군대를 이끌어 응징하여 <백곡>을 쳐서 빼앗고, <하교>의 <남성>을 포위하였다. 이어서, <환>이 십만 군으로 <하>의 북쪽에 다다르자, <태>는 군대를 <전수{<하>남에서 <락>수로 흘러들어가는 물줄기}>로 물리고는, 상류에서 큰 배들에 불을 붙여서 <하교>를 불태우려 하였다. 그러자, <곡률금> 등이 작은 거룻배 100여척에 기다란 쇠사슬을 싣고서 큰 배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다가온} 불붙은 배에 {사슬 끝에 달린} 쇠갈고리가 박히게 하여 쇠사슬을 물가로 당겼더니, 다리가 불태워짐을 막을 수 있었다. 이에 <환>이 <하>를 {무사히} 건너서 <망산>을 의지하여 진을 치고 여러 날을 머무르자, <태>가 야밤에 <망산>을 기어올라 <환>을 기습하였다. 척후 기병이 고하길; “<태>가 손수 40리를 급히 서둘러서{새벽 잠자리에서 마른 밥을 먹고} 오고 있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환>이 말하길; “그 놈 자신도 목말라 죽을 지경일 것이다. 진영을 바로하고 그놈들을 기다리자.”라 하였다. 동이 틀 무렵 양 군이 서로 조우하였다. <팽락>이 수천 기를 이끌고 <태>군의 북쪽 끝을 쳤더니, 도망치고 무너져 내리기에, <태>의 군영으로 내달려 들어갔다. <환>은 <락>이 배반한 줄로 의심하였었다. 그런데, 홀연 서북쪽에 먼지가 일더니, <락>의 사자가 승첩을 알려왔다; <태>의 대도독인 <림조왕><동> 등의 동료{=지위가 동등한 벼슬아치}와 속료{=벼슬아치 밑에 딸린 부하} 48명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여러 장수들은 승승하며 <태>를 공격하여 크게 이겼고, 목을 벤 것이 3만여 급이었다.

◎ <歓>命<楽>追<泰>, 甚窘<泰>曰;“癡男子. 今日無我, 明日豈有汝邪. 何不急還營収汝金宝.” <楽>, 從其言, 獲<泰>金帶一囊以皈, <[歓]>, 怒其失<泰>, 欲斬之, 擧刃将下者三, <楽>乞五千騎復[爲王取之]. <歓>曰;“縱之, 何意. 而復取邪.” 以絹三千匹, 壓<楽>背, 賜之. 明日復戦. <泰>中軍・右軍合擊<歓>破之, 俘其步卒. <歓>, 失馬, 取從者馬走. 步騎七人從之. 追兵至, 都督<尉興慶>, 腰有百箭, 拒之矢盡, 而死. <賀拔勝>追<歓>甚急, <劉洪徽>射<勝>二中, <段韶>又射斃<勝>馬, <歓>逸去. <勝>, 歎其不執弓矢, 曰;“天也.” 時, <泰>左軍<趙貴>等五将不利, <歓>軍復振, <泰>與戦又不利. 會日昃, <泰>遁, <歓>軍追之. <獨孤>・<于勒>等収散卒, 自後擊之, 追兵驚擾, <泰>得全其右軍. 若<于惠>夜引去, <歓>軍追之. <惠>曰;“<長安>死, 此中死, 有異乎.” 營食而畢, 乃建旗鳴角収卒, 徐還. 追者, 疑有伏, 而不能逼. <泰>, 遂入関, 使<達奚武>拒之. <封子繪>・<陳元康>, 以為天授之時, 而請追擊. 諸将皆以為野無靑草, 人馬疲困, 不可遠追, 乃止.]

○ <환>은 <락>에게 <태>를 추격하라 명하였고, 심히 궁색하여진 <태>는 말하길; “어리석은 사내자식아! 오늘 내가 없어지면, 내일 어찌 너는 살아있겠냐? 어찌하여 군영으로 돌아가 네 금보를 서둘러 챙기지 않느냐?”라 하였다. <락>은 그의 말을 좇아서 <태>의 금대와 한 자루를 챙겨 돌아왔더니, <[환]>이가, <락>이 <태>를 놓아준 것에 노하여, 참살하려고 칼날을 들었다 내렸다 하길 세 차례를 하는 차에, <락>은 애걸하여 5천기를 주시면 [다시금 왕을 위해 그놈을 붙잡겠노라] 하였고, <환>이 이르길; “그 놈을 놓아줄 땐 무슨 속셈이었고? 그런데 다시 잡겠다고?”라 하였다. 명주 3천 필을 <락>의 등짝에 꾹꾹 눌러서 하사하였다. 다음 날 다시 싸움이 붙었다. <태>의 중군과 우군이 합세하여 <환>을 쳐부수고, 그의 보졸들을 포로로 잡았다. <환>은 말을 잃게 되어 따르는 이의 말을 얻어 타고 달아났으며, 보병과 기병 일곱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추격병이 다가오자, 도독 <위흥경>은 허리춤에 화살 100개가 있어서 그것으로 항전하다 화살이 떨어지자 죽었다. <하발승>이 <환>을 매우 급하게 추격하였다. 이에 <류홍휘>가 <승>에게 화살을 쏘아서 두 발을 적중시켰고, <단소> 또한 활을 쏘아 <승>의 말을 맞혀서 쓰러뜨렸다. 이에 <환>은 잽싸게 피하여 도망하였고, <승>은 궁시를 지니지 않았던 것을 한탄하며 말하길; “하늘의 뜻이로다.”라 하였다. 이때, <태>의 좌군인 <조귀> 등 다섯 장수가 밀리게 되고, <환>의 군대가 다시금 떨쳐 일어났기에, <태>가 맞붙어 싸웠으나 또한 불리하였다. 해가 저물자 <태>는 도망하고, <환>은 <태>를 쫓았다. <독고>와 <우륵> 등이 흩어진 군졸을 모아가지고 후방에서 <환>의 추격 군병들을 쳤더니, 그 추격 군병들은 놀라서 어지러워졌고, <태>는 온전하게 우군을 만났다. <우혜>가 야밤에 군대를 물릴 듯하자, <환>의 군병이 그들을 추격하였더니, <혜>가 말하길; “<장안>에서 죽으나, 이곳에서 싸우다 죽으나, 차이가 있겠는가?!”라 하고는, 군영을 차리고 먹기를 마쳤으며, 깃발을 세우고 뿔피리를 불어서 흩어진 군졸들을 불러 모아 천천히 회군하였다. 뒤쫓는 이들도 복병이 있을까 의심스러워서 바짝 따라붙을 수도 없었다. <태>는, 이윽고 관문을 들어서더니, <달해무>를 시켜서 {추격군을} 막게 하였다. <봉자회>와 <진원강>은 하늘이 내린 때라는 생각이어서 추격하자고 하였더니, 여러 장수들 모두가 벌판엔 푸른 풀도 없고 사람들과 말들도 피곤하니 멀리까지 추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그만두었다.

◎ <突厥>者, <柔然>之屬國也. 至是, 漸强踰<西陘>, 與<奚>王<[梪]出>爭界. <[梪]出>親征為<土門>. <突厥>, <土門>所殺<好竹>, 遣使告急. <突厥>移攻<霫>部. <柔然>来救為<土門>所困. 上, 遣郞将<夏乾>率勁騎五千徃破<突厥>. <突厥>, 自是怨我.
 五月, <候景>, 破<虎牢>, 送<高仲宻>妻子于<鄴>. <澄>, 以袨服見之, 曰;“何如今日, 亦可以裂裙而死.” <李>, 乃媚, 曰;“天命有定, 願為枕妾.” <澄>, 乃洗<李>, 而淫之. <李>, 以淫女妖姿, 後結<洋>妻<李>氏, 起揚<燕>之禍, 殄滅<歓>族, 亦報復之. 命邪.  <俶>公主生上子<任>太子.
 <歓>妻累欲来朝. 至是為<布德>而来. 上, 與[<高>后], 出迎于<南口>, 賜<婁>氏皇后翟服. 上, 先拜<婁>氏, 呼為母后. <婁>氏, 呼上以夫皇, 万歲. 群臣皆稱<婁>太后陛下. 時, 年四十四, 肥壮尙少. 與上戱謣如夫婦, 夜則與<高>皇后联枕而受幸. 泣, 謂<高>后曰;“我夫皇真天子中天子也. 何苦為中原天子邪. 中原天子乃虁乞耳.”
 十一月, 命<文藏>太子, 與右丞相<婁師德>, 陪<婁>太后皈<晋陽>, 見<高歓>献幣甚盛.

○ <돌궐>은, <유연>의 속국으로, 요사이 들어 점차 강성하여져서 <서형>으로 뻗어 나아가더니, <해>왕 <두출>과 경계를 다투었다. <두출>이 <토문>을 위해 친히 정벌을 나갔고, <돌궐>은 <토문>때문에 <호죽>이 죽은지라 사신을 보내 급한 사정을 {유연에게} 알렸다. 이에 <돌궐>은 공격하기를 <습>부로 돌렸고, <유연>은 <돌궐>을 구원하려 왔다가 <토문>에 의해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함에} 상은 랑장 <하건>을 보냈더니 경기 5천을 끌고 가서 <돌궐>을 격파하였다. <돌궐>은 이 이후로 우리를 원망하게 되었다.
 5월, <후경>이 <호뢰>를 깨고 <고중밀>의 처자식을 <업>으로 보냈다. <징>이, 검은 속옷 바람에 이들을 마나보고 나서, 말하길; “오늘이 어떻소? 치마를 찢어서 죽는 것도 또한 괜찮소만?”이라 하였더니, 이에 <이>씨가 교태지어 말하길; “천명은 정해졌으니, 침첩이 되겠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징>은 <이>씨를 씻겨서 음욕을 채웠다. <이>씨는, 음란한 여인으로 요염한 자태를 가졌기에, 후에 <양>의 처 <이>씨와 결연하여 <연>의 화를 불러 키웠고, <환>의 혈족도 모조리 죽여 버렸으니, 또한 보복한 것이었다. 이게 운명이런가?  <숙>공주가 상의 아들 <임>태자를 낳았다.
 <환>의 처가, 누차 찾아와서 입조하고자 원하더니, <포덕>의 일로 찾아오게 되었고, 상은 <고>후와 함께 <남구>로 맞으러 나갔다. <루>씨에게 황후가 입는 적복을 하사하고는, 상이 <루>씨에게 먼저 절하고 모후라 불렀더니, <루>씨는 상을 부황{황상이신 남편}이라 하면서 만세를 불렀고, 군신들 모두는 <루>씨를 태후폐하라고 불렀다. 이때 그녀는 나이가 마흔 넷이어도 통통하고 건장하며 아직 젊어보였다. 상과 희롱하는 것이 부부처럼 보였고, 밤이 되면 <고{高}>황후와 잇달아서 잠자리를 하며 승은을 입더니만, 울면서 <고>후에게 이르길; “우리의 지아비이신 황상은 천자 중의 천자이시다. 어찌 중원천자를 하기위해 고생한단 말이냐? 중원천자는 {살아남기 위해} 항상 조심하고 애걸해야 할 뿐인데.”라 하였다.
 11월, <문장>태자에게 명을 하여, 우승상 <루사덕>과 <루>태후를 따라붙어 시중들며 <진양>으로 데려다주고, <고환>을 찾아보고 예물을 아주 성대하게 바치라 하였다.

◎ 甲子<大藏>十四年, 春正月, 上, 與<高>皇后, 受朝于<抱真宮><牛頭殿>.  <善屛>公主生<湯宮>太子于<湯宮>, 仍名<陽成>.  <玉陵>妃生女<黃陵>公主.  <婁師德>等率北医<薛俊>等五人而 来. 上, 問<師德>, 曰;“無異聞邪.” <師德>曰;“<宇文泰>近行「六條之治」; 一曰淸心, 二曰敦敎, 三曰盡地, 四曰擢賢, 五曰恤獄, 六曰均役. 此乃我國舊制, 而流入<奚>・<霫>, 至於<泰>而緊用為冨强之術. 以此觀之, 設之非難而行之難, 行之非難而守之難也. 自今守令, 請復行「六條之治」.” 上曰;“善.”
 三月, 甲申朔, <柔然>使<五皐式>, 與<霫>王使<寒疾>・<室韋>使<彦再>等, 来献土物. 皆賜妓饌于賓館.

○ 갑자{단기2877/AD544}<대장>14년, 춘정월, 상이, <고>황후와 함께, <포진궁>의 <우두전>에서 조례를 받았다.  <선병>공주가 <탕궁>태자를 <탕궁>에서 낳았다. 후에 이름을 <양성>이라 하였다.  <옥릉>비가 딸 <황릉>을 낳았다.  <루사덕> 등이 북녘의 의원 <설준> 등 다섯을 데리고 돌아왔다. 상이 <사덕>에게 이르길; “별다른 얘기 들은 것은 없었소?”라 하였더니, <사덕>이 아뢰길; “<우문태>가 근자에 「육조지치」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고,  둘은 도탑도록 가르치는 것이고, 셋은 땅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며, 넷은 현자를 발탁하는 것이고, 다섯은 구휼함과 옥사를 올바르게 함이고, 그 여섯은 균등한 조세와 부역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옛날의 제도였으며, <해>와 <습>으로 흘러들어 가더니만, <태>의 땅에 이르렀고 부국강병의 방법으로 긴요하게 쓰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쓰고 있는 것을 들여다보면, 이 제도를 도입하기가 어렵지 않으면 시행하기가 어렵고, 시행하기가 어렵지 않으면 꾸준하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지금 이후로 그 령을 지키며 다시금 「육조지치」를 시행하셨으면 하고 청하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좋겠소.”라 답하였다.
 3월, 갑신일 초하루에 <유연>의 사신 <오고식>이 <해>왕의 사신인 <한질> 및 <실위>의 사신인 <언재>를 데리고 찾아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모두에게 빈관에 머물게 하여 기녀와 음식을 내려주었다.

◎ 七月, 癸未朔, 上, 與<德陽>后, 入<獣林><溫宮>, 命皇太子<平成>監國, 而治疝.
 <泰>, 用<蘇綽>「加减律」, 制新其量衡. <澄>, 用<崔暹>, 彈壓権貴, 収<司馬子如>于獄. <歓>, 命放之, 見其憔悴, 承首择蝨, 賜酒百缾・羊五百頭・米五百石. <消難>, 謂其父, 曰;“救其烝母之犢而如此受辱. 非<暹>之奸而乃<澄>之悪. 非<澄>之悪而乃<歡>之匈.” <子如>, 掩其口, 曰;“汝父, 依人而至此. 汝, 當自立, 而無受辱於小子.” 以此, <歓>漸失豪傑, <子如>・<候景>等皆有叛心.
 <歡>, 以<邙山>之憤, 盡殺<賀拔勝>之諸子. 吊者<勝>, 聞之, 憤恨疾作而死. <歓>喜快之. <泰>, 常言諸將, 對敵神色皆動. <勝>, 獨臨陣如平時, 然其痛子如是.

○ 7월, 계미일 초하루, 상이 <덕양>후를 데리고 <수림>의 「온궁」으로 들어가더니, 황태자 <평성>에게 명을 내려 감국하게 하고는, 산증{허리나 아랫배가 아픈 병}을 다스렸다.
 <태>가 <소작>의 「가감률」을 도입하고 새로운 량형{부피와 무게}제도를 만들었다. <징>은, <최섬>을 등용하고, 권세가와 귀족들을 탄압하더니, <사마자여>를 옥중으로 잡아넣었다. <환>이, 명하여 그를 풀어주게 하였으며, 그 몰골이 초췌하고 머리칼이 희끗희끗하여졌음을 보더니만, 술 100통과 양 5백 마리 및 쌀 5백 석을 하사하였다. 이에, <소난>이 아비에게 말하길; “어미를 치붙었던 쇠새끼를 구해주었다가 이런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섬>의 간교함 때문이 아니었으면 <징>의 악행이었을 것이고, <징>의 악행이 아니었다면 <환>의 흉계였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자여>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 말하길; “네 아비가 엉뚱한 놈을 의지하다가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너는, 당당하게 자립하여서, 조잔한 것들한테 모욕을 당하지 말거라.”라 하였었다. 이로 인하여 <환>은 점차로 호걸들을 잃게 되었었고, <자여>와 <후경> 등도 모두가 반역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환>은, <망산>에서 당한 것이 분하여, <하발승>의 여러 자식을 모조리 죽였다. 동쪽에 있었던 <승>은 이 소식을 듣고 분하고 한이 넘쳐서 병들어 죽었고, 그러자 <환>은 쾌재를 불렀다. <태>는 늘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길, 모든 장수가 적을 대하게 되면 얼굴색이 동요했지만, 유독 <승>만은 싸움에 임하여도 평상시와 같았다고 하였었다. 그런데도 자식들의 죽음을 애통함은 이와 같았었다.

◎ 十月, <滄>太子如<鄴>. 時, <歓>擊<汾州>山中之<稽胡>, 俘其百余戶, 分配諸州. <滄>太子, 亦得其奴婢, 使于<鄴>邸. 上, 聞之, 命放之. 而奴不去.
 <深麥>, 作<興輪寺>迎僧于外國, 僧之奸者宻通而越去, 乃布禁令.  上, 如<謝應>家, 哭<魴>公主. 以<平川>公主妻<應>.

○ 10월, <창>태자가 <업>으로 갔다. 이때에 <환>은 <분주> 산간 속의 <계호>를 공격하고 그곳의 100여 가를 포로로 잡아다가 여러 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창>태자 또한 그 노비를 받았기에 <업>에 있는 저택으로 보냈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명을 내려서 그들을 풀어주게 하였지만, 그 노비들은 떠나지 않았다.
 <심맥>이 <흥륜사>를 짓고 외국의 승려를 맞아들였는데, 승려들 중에서 간교한 이들은 몰래 상통하더니 도망하여 사라졌다. 그리하여 그리하지 못하도록 령을 반포하였다.  상이, <사응>의 집으로 가서 <방>공주의 주검에 곡을 하였으며, <평천>공주를 <응>에게 처로 주었다.

◎ 乙丑<大藏>十五年, 春正月, 庚辰朔, 上, 朦宮, 與<德陽>后, 受朝於<牛頭殿>.  <澄>使来言<婁>氏有疾, <高>后欲皈. 上, 朦宮, 與<高>后如<晋陽>. 至<月海>聞<爾朱文>暢作乱, 而還. 上, 命<高>后為東宮妃, 稱小后. <梁義臣>大丞相, <文藏>・<淵華>爲左・右侍中.
 二月, <善見>納<夸呂>從妹爲妻曰<容華>. 上, 遣<興文>・<淸海>於<鄴>, 叅其婚儀.
 <宇文泰>, 失<柔然>及<吐谷渾>, 專事<突厥>. 其主<土門狼>子<伊質>, <泥師都>之裔也, 世居<突厥山>, 作<柔然>之兵, 伏而致冨・繁殖, 呑倂鄰<胡>. 而至是, 爲<泰>所奪.

○ 을축{단기2878/AD545}<대장>15년, 춘정월, 경진일 초하루, 상이 동궁에게 명하여 <덕양>후와 함께 <우두전>에서 조례를 받게 하였다.  <징>의 사신이 와서 <루>씨가 아프다고 하였더니, <고>후가 돌아가고파 하였다. 이에 상이 동궁에게 명하여 <고>후를 데리고 <진양>으로 가보라 하였는데, <월해>에 이르러 <이주문>이 세력이 불어나더니 반란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상이 <고>후에게 명하여 동궁의 비가 되게 하고, 소후라 칭하였다. <양의신>을 대승상, <문장>과 <연화>를 각각 좌・우시중으로 삼았다.
 2월, <선견>이 <과려>의 종매를 처로 삼았으며, 이름은 <용화>이었다. 상은 <흥문>과 <청해>를 <업>으로 보내서 그들의 혼례에 참석케 하였다.
 <우문태>가, <유연>과 <토곡혼>을 잃더니, <돌궐>에 전념하였다. <돌궐>의 주인인 <토문랑>의 아들 <이질>은, <니사도>의 후예로, <돌궐산>에서 여러 대를 거쳐 살면서 <유연>의 용병이 되어 숨죽이고 살면서 부를 모으고 번창하더니, 인접한 호족들을 집어삼키거나 아울렀다가, 지금 <태>에게 탈취 당한 것이다.

◎ 三月, 乙卯朔, 上, 疾彌篤, 庚辰崩. 東宮, 以指血注口, 回生. 命<德陽>后傳璽宝, 而戒勿嗜色・善政・儉葬而崩. 東宮, 卽位於<牛頭殿>, <白檀門>上受百官山呼, 擧「月煌之儀」. 春秋六十七.
[南堂 朴昌和 先生 遺稿]

○ 3월, 을묘일 초하루에 상의 병이 두루 깊어지더니, 경진일에 죽었다. 동궁이 손가락의 피를 내어 입에 흘려 넣었더니 회생하였다. <덕양>후에게 옥새와 어보를 전하게 하고, 색을 밝히지 말고 선정을 베풀고 장례는 검소하게 하게 이르라고 명하고는 죽었다. 동궁이 <우두전>에서 즉위하고 <백단문> 위에서 백관들의 산호를 받았으며, 「월황의 의식」도 거행하였다. 춘추 67세였다.//


거칠고 긴 번역서를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상으로 [남당 박창화 선생 유고] 중 확보된 <고구리사초/사략>의 초벌번역을 마칩니다. 금후 21세와 24세 이후의 자료가 나나타고 확보되어져 새로이 추가되어 질 수 있기는 희망합니다.



강영구 (2008-01-21 14:17:16)  
·13년 3월 :縱大船於上流以燒<河橋>. <斛律金>等, 以小艇百余載長鎖, 伺大船至以釘釘之, =>원서에 따르면 大船을 火船으로 바꿔야겠습니다.
·蓐食乾飯而来 =>蓐食이 사전적 의미로 ‘이른 아침에 이부자리 안에서 식사를 함’이라고 하니, 밥을 제대로 지어서 먹는 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의 乾飯을 먹는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른 새벽에 마른 밥을 먹었다’로 해하면 어떨까요?
·垂所向奪潰 =>원서에 奪이 奔자로 군요.
·明日豈有汝, 邪. =>明日豈有汝邪? 내일 어찌 너는 살아있겠냐? 그렇지 않으냐? =>邪를 붙이고 ‘그렇지 않으냐?’는 빼버려야 합니다. 이 때 邪는 단순히 물음표(?)라고 보시면 됩니다.
·擧刃将下者三 칼날을 들어 곧 내리치려는 이가 셋이었는데 =>제 생각에는 <환>이 <락>의 목을 치려하면서도 선뜻 실행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봅니다. 즉 칼을 들어올렸다가 내렸다가 하는 상황이죠. 그래서 이렇게 해석해봅니다. “칼을 들었다가 내렸다 하길 세 번에”
·縱之何意, 而復取. 邪. =>여기의 邪의 쓰임도 물음표입니다. 여기는 붙이고 해석에서는 빼버려야 합니다.
·會日{入下日} =>入+日자를 찾아보니 財의 古字랍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문맥상 ‘해가 지다’의 의미로 쓰인 것으로 봐 ‘昃’을 남당 선생이 이렇게 쓰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若<于惠>夜引去, <歓>軍追之.<우혜>가 야밤에 물러가면, <환>의 군병이 그들을 추격할 것임에, 분위기가 스산하였다. =>‘분위기가 스산하였다’의 한자는 없습니다. 여기서 ‘若’은 ‘乃’의 쓰임과 같다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혜>가 밤에 (병사들을) 이끌고 후퇴하려고 하자 <환>의 군대가 추격하였다.”
·徐還. 追者疑有伏, 而不能逼.돌아오는 것이 더뎠다. 뒤쫓는 이들도 복병이 있을까 의심스러워서 위협할 수도 없었다. =>‘돌아오는 것이 더뎠다’로 하면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는 데 더딘 것인지, 회군하는 것이 더딘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또 ‘더딘다’는 의미로 쓴다면 徐보다는 遲를 써야 더 적당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서서히 회군을 했다’고 봅니다. 서서히 회군한다는 것은 정연하게 회군한다고 볼 수도 있겠고요. 대체로 전쟁 시에 회군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피해의 정도가 천양지차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서히 회군하기 때문에 추격하는 <환>의 군사들이 혹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들이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逼을 여기서는 ‘위협하다’ 보다는 ‘바짝 다가오다’는 뜻으로 쓰는 것이 더 적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使達<奚>武{拒}之. 封<子繪>·<陳元康>, 以為天授之時而請追擊. =>확실하지는 않지만 저는 이렇게 해석해봅니다. ‘달해무’, ‘봉자회’를 붙여 인명으로 봅니다. “<달해무>로 하여금 그것을 막게 했다. <봉자회>, <진원강>이 하늘이 준 때라고 하면서 추격하기를 청했다.”
·5월 :何苦為中原天子, 邪. 中原天子乃{虁}乞耳 =>여기서도 邪는 물음표이므로 붙여야 하고 ‘얄궂다’는 지워야 합니다. 그리고 원문에 따옴표가 耳까지 되어 있는 것처럼 해석도 맞게 해야할 것 같습니다. 夔乞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싹싹 애걸하다’는 조금 어색합니다. ‘어찌 괴롭게 중원천자를 하랴, 중원천자는 기걸일 뿐이다.’ 기걸은 ‘비렁뱅이’를 말하는 것인지?
·11월 :見<高歓>献幣甚盛 =>글자대로 보다면 ‘<고환>을 만나고 예물을 매우 성대하게 바쳤다’가 됩니다.
·14년 7월 :承首捀蝨 =>저도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는데, ‘가장 높은 자리를 주어서 관리들이 끼치는 폐해를 살피라’는 해석은 선뜻 다가오지 않습니다. 捀은 남당 선생의 글자 습관에 비추어 擇자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머리를 받치고 이를 잡아주다’로 해석되는가요? 원숭이 털고르기도 아니고, 뭘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消難, 謂其父 어찌 써버릴지가 어려워 지신의 아비에게 말하길 =>아래 ‘자여가 그 입을 막고서 말하기를’하고 대답하는 것이 나오는 것으로 봐 여기서 其父는 司馬子如를 가리키지 않나 합니다. 그렇다면 消難은 子如의 아들 이름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만일 사마자여와 그 자식의 대화가 맞다면 아래서 자여가 대답하는 말을 해석할 때 경어를 쓰는 것은 어색합니다.
·모든 장수가 대하게 되면 =>모든 장수가 ‘적을’ 대하게 되면

제가 지방이 있는 까닭에 오프모임에 참석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추측컨데 제가 선생님에 비해 한참 연하일 듯한데, 감히 '존안'이라는 호칭은 감당하지 못하겠군요.
강영구 (2008-01-21 14:31:19)  
그 동안 제가 미천한 실력을 돌아보지 않고 일부분을 교필이랍시고 조금 해봤는데요, 주제넘게 말씀드리자면 글이란 것이 일단 上梓되어버리면 이도저도 못하는 것이라 제 생각 같아서는 좀 더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다시 숙고교정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글자 해득이 어려운 것, 해석상 어려운 부문이나 문맥이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 등을 널리 펴서 조언을 들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김성겸 (2008-01-21 16:00:33)  
강 선생님,
그간 주신 도움에 크게 힘입어서,
크게 부끄럽지 않게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역시 누군가 일을 벌이면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있으심을 잊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이제는 여유를 가지고 살피면서 우리말도 다듬고 약간의 주석도 곁들이는 작업을 틈틈히 하여서
금년 맹하 이전에 출판되어졌으면 합니다.

재삼 고마움을 표합니다.
저는 대전에 살고 있습니다. 지나시는 길에 꼭 연락 주시길 청합니다.
차라도 한 잔 우려내어 드리고 싶습니다.

1.<자여>가 <고환>과 <고징>을 양편으로 조언하였다가, 양측에 의해 어려움을 겪었었던 것을
자신의 부친에게 고하는 일이었던 같습니다.
<환>은 늦게나마 깨닫고 <자여>의 꾀죄죄한 모습을 <자여> 머리를 어루잡고 사과 한듯합니다.
세월이 지나 <자여>의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많아진 것을 헤아리며, 후회한 듯한 느낌입니다.
머리에서 이를 센다는 얘기를 하얀 머리카락 세는 것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영채 (2008-02-16 22:49:53)  
(1) 계해 대장13년 3월기사 : 伺大船至以釘釘之 -> 伺火船至以釘釘之, 壓<楽>背賜之 -> 壓<楽>背而賜之
(2) 계해 대장13년 5월기사 : “<淑>公主生上子<任>太子” -> “<俶>公主生上子<任>太子”, “上, 與后<高>, 出迎于<南口>” -> “上, 與<高>后, 出迎于<南口>”
(3) 계해 대장13년 7월기사 : “吊者, <勝>聞之” -> “在 東 者, <勝>聞之”
(4) 을축 대장15년 춘정월기사 : “庚辰朔, 上, 朦宮” -> “庚辰朔, 上, 命 東 宮” , “<高>后欲皈. 上, 朦宮” -> “<高>后欲皈. 上, 命 東 宮”
(5) 을축 대장15년 2월기사 “<善見>納<夸呂>從妹爲妻曰<容華>. 上遣<興文>·<淸海>於<鄴>叅其婚儀.”의 해석이 빠졌네요
김성겸 (2008-02-17 18:37:05)  
김 영채 선생님, 고맙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를 살펴 주셨습니다.
덕분에 읽어내기 어려운 글자와, 자판을 잘못 두드려서 날아간 구절 등등을
고치고 살려 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 분들이 짚어주신 내용을 출력하여 마지막 교정을 볼 때 다시 한 번 살펴서
선생님들의 도움이 더욱 빛나게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청개구리 (2008-03-28 17:16:11)  
上, 命<高>后為東宮妃, 稱小后.(상이 <고>후에게 명하여 동궁의 비가 되라 하고, 소후라 칭하였다.)

위의 인용한 대목은 내용이 조금 이상하군요.
해석에는 문제가 없고, 내용이 왕의 처를 동궁의 처가 되게 하여 '며느리'로 삼는다는 말 같은데,
고구려에 이런 법이 있었나요.

아니면 '고후'가 처가 아니고, 애첩 수준이었는지?
김성겸 (2008-03-28 19:53:56)  
청개구리님께서도 완독하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高>后는 본처가 아니었으며, 더구나 동궁의 친어미도 아니었으니,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고 보입니다. 윗대에서도 그러한 일이 수두룩하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