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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낙랑유물

by 부르칸 2015. 4. 3.
기년이 새겨진 벽돌

다음은 광화(光和) 5년(182)을 시작으로 출토된 벽돌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표를 만들어 보았다.



위 의 표에서 대진 원강(大晉元康)이 새겨진 유물은 와당(瓦當)이며 건시(建始) 원년(407)이 새겨진 유물은 기와이며 나머지 연호는 모두 벽돌에 새겨져 있다. 출토지를 보면 흥평(興平) 2년(195)과 영화(永和) 9년(353)이 새겨진 벽돌은 평양에서 출토되고 나머지는 모두 황해도에서 출토되었다.
황해도에서도 기년이 새겨진 유물을 보면 신천이 19개, 봉산이 8개, 안악이 2개, 신원이 하나가 출토되었다. 신천에서는 정시 9년(248)의 유물을 시작으로 건시 원년(407)까지 꾸준히 출토된 반면 봉산에서는 광화(光和) 5년(182)의 유물이 출토된 후 한동안 잠잠하다가 경원(景元) 3년(262)을 시작으로 다시 출토되었는데 태강 4년(283)을 끝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위에서 광화 5년과 흥평 2년의 유물은 공손씨(公孫氏)와 연관이 있을 듯한데 공손씨가 후한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시기는 189 - 238년이다. 실제로 사인 봉니(私印封泥)들 가운데 공손호인(公孫護印)과 공손덕인(公孫德印)의 봉니가 있다. 따라서 두 유물 가운데 흥평 2년(195)의 것은 공손씨의 것일 확률이 높으며 광화 5년(182)의 것도 그들이 가지고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위의 두 유물을 제외하고는 정시 9년(248)의 것을 시작으로 해서 후연(後燕)의 건시 원년(407)까지 꾸준히 출토되었다. 따라서 정시 9년(248)을 경계로 본다면 앞서 영평 14년(71)의 삼족반과 귀달린 술잔에서 정시 9년의 벽돌까지는 무려 177년의 공백기가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177년의 공백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이 기간 중에는 비록 부침(浮沈)이 있기는 하였으나 낙랑군은 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는데 오히려 유물은 고작 4개밖에 출토되는 않았다.
아마도 낙랑군과 대방군은 각각 평양과 황해도 지방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낙랑군과 대방군이 분명이 이 지역에 있었다면 위와 같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자.
후 한의 광무제가 44년에 바다를 건너 다시 낙랑을 공격해서 살수 이남의 지역에 낙랑군을 다시 설치한 이후 그 이전에 설치하였던 남부도위는 그대로 존속시켰지만 동부도위는 이미 건무 6년(30)에 폐지하였다. 아마도 이때에 폐지된 동부도위와 71년을 끝으로 낙랑군의 유물이 나오지 않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BC 108년에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설치한 낙랑군, 진번군(眞蕃郡), 임둔군(臨屯郡)과 그 이듬해에 옥저(沃沮)에 설치한 현도군 등의 한사군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낙랑군은 설치 당시에는 11현을 속현으로 거느렸는데 소제(昭帝)때인 BC 82년에는 진번군을 병합하여 소명현(昭明縣)을 치소로 한 남부도위를 설치하였고 같은 해에 관할 구역이 너무 멀고 넓은 임둔군을 현도군에 병합시켰다가 BC 75년에 현토군이 이맥(夷貊)의 침입으로 인해서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간 후 낙랑군이 임둔군을 병합시켜서 동부도위를 설치하였다. 임둔군이 설치될 당시에는 15현이었는데 동부도위가 설치될 당시에는 7현이 있었다. 동이(東 ), 불이(不而), 잠대(蠶台), 화려(華麗), 야두매(邪頭昧), 전막(前莫), 부조(扶租) 등 7현이 있었는데 이를 단단대령(單單大嶺)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영동(嶺東) 7현이라고 불렸다.
이렇게 해서 낙랑군은 25현, 6만 2812호, 40만 6748명의 인구를 갖게 되었다. 삼국지 동이전(東夷傳)에 나타난 부여의 인구가 8만호, 고구려의 인구가 3만호였다는 사실로 볼 때 낙랑군의 규모가 얼마나 큰 것인가 짐작이 갈 것이다.
설치된 후 폐지되거나 이동을 한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과는 달리 낙랑군은 상당히 성공적인 한군현으로 존속되었다. 그러다가 전한(前漢) 말에 외척(外戚)인 왕망의 농간으로 인해서 한나라가 낙랑군과 현도군에 대한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신나라가 들어선 후 다시 반란이 일어나 후한의 광무제가 다시 통일하기까지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한군현에서는 한의 세력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왕경(王景)은 자(字)가 중통(仲通)이며 낙랑 염한인( 邯人)이다. 8세조 중(仲)은 본래 낭야(琅邪) 불기인(不其人)이다. 도술(道術)을 좋아하고 천문(天文)에 밝았다. 제여(諸呂)가 난을 일으키자 제(齊)의 애왕(哀王)인 양(襄)은 발병(發兵)을 모의하고 자주 중(仲)에게 물었다. 제북왕(濟北王) 흥거(興居)가 반란을 일으키자 병사(兵師)를 중에게 맡기고자 하였다. 중은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이에 해동(海東)에 배를 띄워서 낙랑산중으로 도망갔다. 인하여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아버지인 굉( )은 군(郡)의 삼로(三老)가 되었다.
갱시(更始)가 패하자 토인(土人) 왕조(王調)가 군수(郡守) 유헌(劉憲)을 죽이고 스스로 대장군(大將軍) 낙랑태수를 칭하였다. 건무(建武) 6년(30)에 광무(光武)가 태수 왕준(王遵)을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그를 공격하였다. 요동에 이르자 굉( )은 군의 결조리(決曹吏)인 양읍(楊邑) 등과 함께 조를 죽이고 준을 맞이하였다. 모두 열후(列侯)에 봉해졌는데 굉은 홀로 작위(爵位)를 사양하였다. 제(帝)는 기이하게 여기고 그를 불렀으나 도중에 병으로 죽었다.(후한서 순리(循吏) 열전 왕경전)

순리 열전은 어진 관리로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관리들을 모아서 만든 열전이며 혹리 열전은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한 관리들을 모아서 만든 열전을 말한다. 말하자면 충신 열전과 반역 열전과 비슷한 것이다.
왕 경은 낙랑 염한인이며 그의 8세조인 왕중은 낭야 불기인이다. 염한은 낙랑의 25현 가운데 조선 다음으로 나오며 본래의 11현 가운데 하나이다. 낭야는 전국시대에 제(齊)나라에 속한 곳이며 불기는 낭야군에 속한 현이다. 왕씨 가운데 낭야 왕씨가 가장 번성하였는데 동진(東晋)을 건국할 때 큰 공을 세운 왕도(王道)와 왕돈(王敦)이 유명하다.
왕중이 도술과 천문에 밝았다는 사실은 제나라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제북왕 흥거가 문제(文帝) 3년(BC 178)에 반란을 일으키고 왕중에게 병권을 맡겼는데 그는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 바다로 도망가서 낙랑산중으로 숨었다. 이로 인하여 낭야 왕씨가 낙랑군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왕 망(王莽)의 신(新)나라가 오래 가지 못하고 멸망하였는데 이때 가장 강력한 세력은 바로 갱시제(更始帝)군이었는데 갱시제가 패하자 토착세력이었던 왕조가 군수 유헌을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자칭하였다. 건무 6년(30)에 광무제가 태수 왕준을 보내어 왕조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그가 요동에 이르자 왕굉은 군(郡)의 결조리인 양읍과 함께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니 광무제는 둘을 열후에 봉했는데 왕굉은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여기서 결조리(決曹吏)는 삼국지 옥저전에 보이는 불내예후(不耐濊侯)가 설치한 공조(功曹), 주부(主簿), 제조(諸曹)에서 제조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보여진다. 결조(決曹)는 해결하는 관아란 뜻인 것으로 보아 형조(刑曹)와 같은 것으로 보이며 공조는 이조(吏曹), 주부는 호조(戶曹)와 같은 뜻으로 보인다. 후한은 이때인 건무(建武) 6년(30)에 낙랑군 동부도위를 폐지하고 현의 거수(渠帥)를 현후(懸侯)로 삼아 자치(自治)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30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낙랑군의 치소에서 조차 토착민인 왕조가 태수를 죽이고 스스로 독립하였고 낙랑군의 동부도위가 설치된 옥저에서는 최리(崔理)가 낙랑국(樂浪國)을 세웠다가 32년에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였다. 즉 이 당시에 낙랑군에서는 두 개의 세력이 한(漢)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서 낙랑군의 치소에서는 한인(漢人) 관리들이 왕조를 죽이고 반란을 평정하였지만 동부도위가 설치된 옥저 지역에는 그 지배력이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때에는 최리의 낙랑국이 있었기 때문에 광무제가 후한을 건국하고 다시 낙랑군을 정비할 때 동부도위을 제외시켰다고 보인다.

평양의 낙랑 유물

한사군(漢四郡)에 대해서는 한무제(漢武帝)가 BC 108년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다 설치하였다고 이해해 왔다. 그러나 그 위치에 대해서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부에 설치되었다고 보는 견해와, 요동과 요서지역에 설치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왔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부에 설치되었다고 보는 측에서는 주로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서 이를 주장한 반면 요동과 요서지역에 설치되었다고 보는 측은 주로 문헌 자료를 토대로 이를 주장하였다.
또한 한사군 위치 논쟁은 삼국사기의 초기기록 부인론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졸본 부여(卒本扶餘)에서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朱蒙)이 북부여(北扶餘)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인 유리(琉璃)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이에 불안을 느낀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그 어머니와 함께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한수(漢水) 유역에 정착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는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낙랑군을 통과하여 한수 유역에 정착하기 어렵다고 보고 낙랑군과 대방군이 소멸해가던 시기인 300년 이후에야 겨우 한수유역에 정착하여 백제를 건국하는 것이 가능하였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평양을 포함한 평안남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낙랑군과 대방군의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한사군이 이 지역에 설치되었다는 주장을 쉽게 극복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한사군을 한반도북부와 만주 일부에 설치되었다고 보았고 이것이 학계의 정설로 굳어진 지 오래이다.
평안남도와 황해도지역에서 출토되는 낙랑군, 대방군 유물과 관련해서 일정한 특징을 볼 수 있는데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남도 일대에서는 기년(紀年)이 새겨진 칠기류(漆器類)와 동경(銅鏡)이 주로 출토되었고 황해도 일대에서는 기년이 새겨진 벽돌이 주로 출토되었으며 정시(正始) 9년(248)을 경계선으로 하여 그 이전은 기년이 새겨진 칠기류와 동경이 출토되었고 그 이후에는 기년이 새겨진 벽돌이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기년이 새겨진 칠기류

이제부터 기년이 새겨진 유물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먼저 기년이 새겨진 칠기류와 동경에 대한 표를 아래와 같이 만들어 보았다.


* 초시 원년부터 천봉 원년까지는 신나라 유물임.

위 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BC 108년에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 23년이 지난 시원(始元) 2년(BC 85)이 새겨진 이배(耳杯)와 칠기(漆器)를 시작으로 유물이 꾸준히 출토되는데 연희(延熹) 7년(164)이 새겨진 수수경(獸首鏡)까지 거의 평양에서 출토되었고 그 이후에는 기년이 새겨진 벽돌들이 황해도를 중심으로 해서 출토되고 있다.
위의 표에서 전한(前漢)시대의 연호가 새겨진 유물은 17개이고 왕망(王莽)의 신(新)나라의 연호가 새겨진 유물은 4개이며 후한의 연호가 새겨진 유물은 11개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평양을 중심으로 한 낙랑군의 경우, 후한 시대보다 전한 시대에 보다 왕성한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며 이 지역에 대한 강한 지배력을 행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후한의 광무제(光武帝)가 37년에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었던 낙랑을 공격하여 살수(薩水)이남의 지역에 다시 낙랑군을 설치했던 44년을 전후한 유물의 수를 살펴보면 그 이전은 모두 24개이며 그 이후는 모두 8개라는 사실을 통해서 볼 때 연희 7년의 수수경을 종점으로 본다면 대략 비슷한 존속기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44년 이전의 유물이 75%을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일반적으로 유물들은 전시대보다 후시대로 내려오면서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것이 보통인데 오히려 반대의 양상을 띠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강한 암시를 주지 않을까 생각된다.
광 무제의 연호인 건무(建武)가 새겨진 유물은 모두 6개인데 44년에 다시 낙랑군을 설치하기 전까지도 계속 유물이 출토된 점이 특이하다. 고구려가 37년에 낙랑군을 멸망한 후에도 건무 18년(42)이 새겨진 이배(耳杯)와 칠반(漆盤)이 출토된 것은 아마도 44년에 낙랑군을 다시 설치하면서 한나라에서 가지고 들어온 물건일 것이다. 이배는 귀가 달린 술잔이며 칠반은 옻칠한 쟁반이다.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귀 달린 술잔이 16개로 가장 많이 나왔고 칠반이 그 다음으로 많은 14개가 나왔다. 특히 건무 5년(29)부터 귀 달린 술잔의 출토가 두드러지는데 8개로 출토된 귀 달린 술잔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한 편 위에서 거섭(居攝)3년과 초시(初始) 원년은 모두 8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이해에 연호가 거섭에서 초시로 바뀌었음을 나타내며 초시 원년이 바로 왕망이 신나라를 건국한 해이다. 거섭의 연호도 일반적으로 왕망의 것으로 인정되는데 이는 외척으로서 사실상 국권을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했기 때문이다. 천봉(天鳳) 원년(14)이 새겨진 칠반의 경우 원래는 시건국 천봉 원년이 새겨져 있는데 표를 만들 때 편의상 천봉 원년으로 집어넣었다. 이도 또한 이해가 시건국 6년임과 동시에 천봉 원년으로 연호가 변경되었음을 나타낸다.
위의 표에서 유물이 출토되는 시간적 간격을 보면 시원 2년을 시작으로 해서 23년의 범위안에서 계속 출토되고 있으며 원시(元始) 연호의 경우 5년 연속으로 출토되고 있는데 중간에 낙랑군이 고구려에게 멸망되었다가 다시 설치되었을 당시에도 꾸준히 출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고구려가 7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만 장악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영평(永平) 14년(71)이 새겨진 삼족반(三族盤)과 귀 달린 술잔이 출토된 후 영원(永元) 14년(102)이 새겨진 칠안(漆案)과 칠반이 출토되기까지 31년이란 기간이 지났으며 또한 이 유물들과 연희 7년(164)이 새겨진 수수경까지는 62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이후에는 기년이 새겨진 벽돌만이 출토되었다.
여기서 영평 14년을 경계로 하여 그 이전에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된 반면 그 이후에는 연호가 새겨진 유물이 두 개가 출토되었는데 각각 31년과 62년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낙랑군이 영평 14년이후에는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또한 위의 유물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해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영평 14년 이후에도 23년의 범위안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거의 출토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당시에 낙랑군이 평양에 있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고 하겠다.

공관

기년이 새겨진 칠기를 만든 곳은 촉서공, 촉군 서공, 광한군 공관, 자동군 공관, 성도군 공관이다. 촉서공과 촉군 서공은 같은 곳을 말한다. 한서 지리지에는 촉군은 익주(益州)에 속했고 26만 8279호, 124만 5929명의 인구가 있었다고 나온다. 또한 촉군에는 15현이 있었는데 성도(成都)에 공관(工官)이 있었다고 나온다. 이 공관은 바로 성도군 공관을 말하는데 촉군 15현에는 성도 이외에 공관이 없는 점으로 보아 성도군 공관은 바로 촉서공과 촉군서공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광한군 또한 익주에 속했고 16만 7499호, 66만 2249명의 인구가 있었다. 광한군에는 공관이 있었다고 나오는 점으로 보아 광한군 공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런데 촉군과 광한군의 인구를 보면 낙양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동쪽보다는 인구가 적지만 장안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서쪽보다는 상당히 많은 인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촉군은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의 동쪽과 비교해서 결코 인구에 있어서는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파, 촉, 광한은 사천성에 위치한 곳으로 본래는 남이의 땅이었는데 진(秦)나라가 병합하여 군을 만들었다.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토지가 비옥하고 강수(江水)와 비옥한 들이 있다. 산림, 대나무, 채소, 과일이 풍부하다. 남쪽으로 전( ), 북동(  )과 교역하고 서쪽으로 공( )과 가까워 작마( 馬)와 긴 털을 가진 소가 있다. 백성들은 쌀(稻)과 물고기를 먹고 흉년 걱정이 없다. 습속에 근심 걱정은 없으나 경박하고 유약하여 도량이 좁다.

이 곳은 중국에서도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외부의 침입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금성탕지(金城湯池)로 유명하다. 한때 개원의 치를 구가하던 당 현종이 말년에 양귀비와의 사랑에 빠졌다가 안록산의 난으로 장안이 함락되자 이 곳으로 피난 온 것으로 유명하고 당 희종 또한 황소의 난으로 장안을 버리고 이곳으로 피난을 왔다. 말하자면 조선 시대에 외적이 침입하면 항상 왕들이 강화도로 피난을 간 것과 마찬가지이다.
험한 산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내부에는 강수가 흐르고 있어서 비옥한 토지가 많았다. 강수는 단순히 큰 강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양자강이다. 산림, 대나무, 채소, 과일이 풍부했는데 대나무가 많다는 사실은 각종 공예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남쪽으로 전, 북동과 교역을 하였다. 전과 관련해서 1956년 중국 운남성 진녕현(晉寧縣) 고묘(古墓)에서 한 무제가 서남이의 전왕( 王)에게 수여한 전왕지인( 王之印)이 발견되었다.
서 쪽으로 공과 가까워 작마와 긴 털을 가진 소가 있었는데 공은 의봉 2년(677) 조선군왕으로 봉해져 요동으로 간 보장왕이 말갈과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발각되어 소환되어 간 공주( 州)이다. 백성들은 쌀과 물고기를 먹고 흉년 걱정이 없다고 나오는데 당시에 일반 백성들조차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상당히 풍요로운 곳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습속에 근심 걱정은 없으나 경박하고 유약하여 도량이 좁다고 나오는데 온갖 물산이 풍부하기 때문에 양식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근심 걱정이 없었던 것 같다. 반면 경박하고 유약하여 도량이 좁다는 사실은 남방 민족의 특성을 말해 주는데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기후탓인지는 몰라도 참을성이 적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심한 성격으로 인해서 이 곳 사람들은 각종 공예품을 만드는데 훌륭한 기술을 발휘했다고도 볼 수 있다. 원래 의식주 걱정이 없어야 문화가 발달할 수 있다.
평양에서 발견된 각종 칠기를 만든 곳이 이 곳이었다는 사실은 대나무가 풍부해서 공예품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고 흉년 걱정이 없을 정도로 배 불리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여유가 생겨 공예품을 만드는 등 예술 활동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경박하고 유약하여 도량이 좁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성격이 매우 꼼꼼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훌륭한 공예품을 만들 수 있는 재주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년이 새겨진 칠기의 출토지는 평양이다. 평양에서도 정오동, 정백동, 석암리, 낙랑리, 오야리이다. 기년이 새겨진 칠기가 나온 개수는 다음과 같다.

정 오동 1호분: 4개, 4호분: 1개, 6호분: 6개, 정백동 2호분: 1개, 37호분: 1개, 17호분: 2개, 200호분: 2개, 석암리 9호분: 2개, 194호분: 9개, 201호분: 3개, 205호분: 4개, 낙랑리 목곽분: 1개, 오야리 21호분: 1개

전체적으로 봤을 때 석암리에서 18개, 정오동에서 11개, 정백동에서 6개가 나왔다. 단일 고분으로 본다면 석암리 194호분에서 9개, 정오동 6호분에서 6개, 정오동 1호분과 석암리 205호분에서 각각 4개씩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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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 동부도위 폐지 후 동옥저와 동예

그러면 낙랑군 동부도위가 폐지되고 일어난 동옥저(東沃沮)와 동예(東濊)에 대해서 삼국지(三國志)를 통해서 살펴보자. 먼저 동옥저를 살펴보자.

동 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으며 큰 바닷가에 산다. 그 땅의 형세는 동북이 좁고 서남은 길다. 가히 천리이다. 북쪽은 읍루( 婁), 부여(夫餘)와 더불어, 남쪽은 예맥(濊貊)과 더불어 접해 있다. 호(戶)는 5천이다. 대군왕(大君王)은 없고 세세(世世)로 읍락(邑落)에는 각각 장수(長帥)가 있다. 그 언어는 구려와 더불어 같으며 간혹 약간 다르다. 한초(漢初)에 연(燕)의 망인(亡人)인 위만(衛滿)이 조선에서 왕노릇하였다. 이때 옥저는 모두 속했다. 한 무제 원봉(元封) 2년(BC 108)에 조선을 토벌하고 만의 손자인 우거(右渠)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4군을 설치하였다. 옥저성(沃沮城)에다 현토군을 설치하였다. 후에 이맥(夷貊)의 침입을 받아 군을 구려(句麗)의 서북으로 옮겼다. 지금 이른바 현토고부(玄 古府)가 이것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했다.
한(漢)은 토지가 넓고 멀기 때문에 단단대령(單單大領)의 동쪽에 동부도위를 설치하였다. 불내성(不耐城)을 치소로 하고 별도로 영동(領東) 7현을 주관하였다. 이때 옥저 또한 모두 현(縣)이 되었다. 한 건무(建武) 6년(30)에 변군(邊郡)을 없앴는데 도위(都尉)는 이로 인하여 파(罷)하였다. 그후 그 현에 있는 거수(渠帥)를 현후(懸侯)로 삼았다. 불내(不耐), 화려(華麗), 옥저(沃沮) 제현(諸縣)은 모두 후국(侯國)이 되었다. 이적(夷狄)이 다시 서로 공격하여 정벌하였다. 오직 불내예후(不耐濊侯)만이 지금까지 오히려 공조(功曹), 주부(主簿), 제조(諸曹)를 두었는데 모두 예민(濊民)으로 채웠다. 옥저의 모든 읍락의 거수는 모두 스스로 삼로(三老)라고 칭한다. 곧 옛날의 현국(縣國)의 제도이다. 나라가 작아서 대국(大國)의 사이에서 핍박(逼迫)을 받아 드디어 신하로써 구려(句麗)에 속하였다. (삼국지 옥저전)

동옥저는 남쪽으로 예맥(濊貊)과 접해 있다는 사실에서 예맥은 동예(東濊)를 말하며 삼국사기에 나오는 예맥(穢貊)이다.

태조대왕 59년(113) 여왕(麗王) 궁(宮)이 예맥(穢貊)과 더불어 현도를 침범하였다. (자치통                     감)

66년(120) 왕이 예맥과 더불어 현도를 습격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취하였다.
         69년(123) 봄 한(漢)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                      군사를 이끌고 내침해서 예맥의 거수(渠帥)를 격살(擊殺)하였다.
                   12월 왕은 마한, 예맥의 만여기를 이끌고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                     은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군사 2만을 이끌고 한병(漢兵)들과                      더불어 힘써 방어하니 아군이 대패하였다.
         70년(124) 왕은 마한, 예맥과 더불어 요동을 침범하였다. 부여왕은 군사를 보내어                     구원하여 아군을 격파하였다.

궁 은 태조왕을 말하며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태조왕 59년(113)에 고구려왕 궁이 예맥과 함께 현도를 침범했다는 사실이 나와 있다는 사실에서 예맥이 이미 고구려에 부용(附庸)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왕 66년에는 예맥과 함께 현도군의 화려성을 공취하였고 동왕 69년에는 유주자사, 현도태수, 요동태수 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 예맥의 거수를 죽였는데 아마도 3년전에 화려성을 공취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보인다. 당시 유주에는 현도군과 요동군이 속해 있었는데 현도군이 요동군보다 앞서 기재된 것으로 보아 예맥 지역에 대한 이해관계가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와 예맥이 공격한 지역을 보면 현도군이 세 번, 요동군이 한번으로 예맥이 현도군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이해 12월에 마한, 예맥의 만여기를 이끌고 현도성을 포위하여 예맥의 거수를 죽인데 대해 복수를 하려고 하였지만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에게 2만명의 군사를 주어 한병들과 함께 맞서 싸우니 대패하고 말았다. 다음해인 동왕 70년에도 예맥의 거수를 죽인 요동태수를 응징하기 위하여 요동을 침략하였지만 역시 부여가 구원군을 보내와 패배하고 말았다.
그런데 삼국지 예전을 보면 한말(漢末)에 예가 고구려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삼국사기의 기록과 다른데 여기서 한말은 후한말로써 후한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고구려가 예를 합병했다고 보았다.
처 음에 옥저는 위만에게 속해 있었는데 한 무제 원봉 2년에 조선을 멸하고 4군을 설치할 때 옥저성으로써 현도군을 설치하였으나 이맥(夷貊)의 침입을 받아 고구려의 서북으로 옮겼다. 그 이후 옥저는 다시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는데 토지가 넓고 멀기 때문에 단단대령의 동쪽에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었고 불내성(不耐城)을 치소로 하여 영동 7현을 다스렸다. 여기에 옥저 또한 현에 포함되었는데 건무(建武) 6년(30)에 변군(邊郡)을 없애고 도위를 파하였으며 현의 거수를 모두 현후(懸侯)로 봉하였는데 불내(不耐), 화려(華麗), 옥저(沃沮) 제현(諸縣)이 모두 후국(侯國)이 되었다. 그러나 이적(夷狄)이 서로 싸워 정벌되었고 오직 불내예후(不耐濊侯)만이 지금까지 공조, 주부, 제조를 두어 예민으로써 관리를 두었다.
여기서 이맥(夷貊)은 아마도 고구려를 말하는 것 같으며 현도군이 고구려의 서북으로 옮겨간 후 낙랑군이 이 지역을 관할하였는데 단단대령의 동쪽에 동부도위를 두었다. 동부도위의 치소는 불내성이며 영동의 7현을 거느렸는데 옥저가 여기에 포함되었다. 건무 6년에 동부도위를 없애고 현의 거수들을 모두 현후로 봉하였는데 불내, 화려, 옥저의 제현이 모두 후국이 되었다. 여기서 영동 7현 가운데 불내현과 화려현이 나오는데 불내현(不耐縣)은 평양에서 발견된 낙랑군의 22현 가운데 불이현(不而縣)으로 나오는데 아마도 원래는 불이현이었는데 삼국지를 쓸 때에는 불내현으로 오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화려현은 태조왕 66년(120)에 왕이 예맥과 함께 현도를 습격하여 공취한 화려성을 말하는데 이 대목을 보면 화려현은 현도군에 속해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현도군은 처음에 고구려, 상은대, 서개마(西蓋馬)의 3현과 4만 5006호, 22만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107년에는 요동군의 고현, 후성, 요양(遼陽), 망평현을 병합하여 총 7현을 거느렸다.
현 도군에 화려현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과 태조왕 66년에 현도군의 화려성을 공취했다는 사실은 모순된다. 아마도 본래는 현도군에 화려현이 설치되지 않았지만 임둔군을 병합하면서 화려현은 현도군의 속현으로 인식이 되었고 현도군이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이동한 후에는 화려현은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속해 있었지만 오히려 동부도위보다는 현도군과 더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즉 동부도위에 속한 현들 가운데 화려현이 현도군에서 가장 가까웠지 않았나 생각된다. 실제로 평양에서 발견된 봉니(封泥)들에 나타난 현들을 보면 낙랑군의 25현 가운데 화려, 탄열, 열구현을 제외하고 22현만 나타나는데 낙랑군 본래의 11현 가운데는 탄열현, 남부도위(南部都尉) 7현에서는 열구현, 동부도위 7현에서는 화려현이 보이지 않는 점을 생각한다면 화려현이 동부도위보다 현도군과 더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옥저현(沃沮縣)은 영동 7현에서 부조현(夫租縣)으로 나오는데 글자 형태는 거의 비슷한 점으로 보아 같은 현임을 알 수 있다. 평양 정백동의 부조예군묘(夫租 君墓)에서 부조예군의 은인(銀印)이 나왔는데 부조예군(夫租 君)은 부조와 예의 임금이란 뜻으로 불내예후(不耐濊侯)와 구조가 비슷해 보인다. 즉 불내예후는 불내와 예의 후란 뜻인데 불내와 부조는 영동 7현에 속해 있으며  와 濊는 같은 예이며 君과 侯도 또한 같은데 조선후(朝鮮侯) 준(準)이 왕을 칭했다는 사실로 볼 때 후는 왕보다 한 단계 낮으며 고구려의 경우를 보면 신대왕(新大王) 2년에 명림답부(明臨答夫)의 난(難)때 산곡(山谷)으로 도망을 갔던 차대왕(次大王)의 태자인 추안(鄒安)을 사면하여 구산뢰(狗山瀨)와 누두어(婁豆 ) 두 곳을 식읍으로 주고 양국군(讓國君)으로 봉한 사실과 서천왕(西川王) 11년(280)에 숙신(肅愼)이 내침해서 변방의 백성들을 도륙(屠戮)하자 왕제(王弟) 달가(達賈)를 보내어 숙신을 대파하고 6,7개 부락을 항복시키자 왕은 그에게 안국군(安國君)에 봉하고 지내외병마사(知內外兵馬事)로 삼아 양맥(梁貊)과 숙신의 모든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 양국군과 안국군은 분명히 왕보다 한 단계 아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부조예군과 불내예후는 모두 왕보다 한 단계 아래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은인(銀印)을 사용했으며 만약 왕이었다면 금인(金印)을 사용했을 것이다. 부조예군과 불내예후의 명칭에서 모두 예(濊)가 들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영동 7현은 옥저보다는 예의 땅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들 현들이 모두 후국(侯國)이 되었다는 사실로 본다면 화려예후(華麗濊侯), 야두매예후, 동이예후, 전막예후, 잠대예후 등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 러나 영동 7현이 낙랑군의 지배하에서 벗어난 후 이적(夷狄)끼리 서로 공격하여 정벌당했다는 사실에서 이적에는 고구려도 포함되었던 것 같으며 오직 불내예후만이 살아남아 공조, 주부, 제조 등을 설치하여 예민으로 관리를 두었다는 사실을 보면 영동 7현 가운데 치소인 불내현을 제외한 나머지 6현은 모두 고구려에 의해 병합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결국 삼국지 예전에서 한말에 고구려에게 속했다는 사실은 불내예(不耐濊)를 지칭하며 나머지 6현은 그 이전에 모두 고구려에 의해 병합되었다고 봐야 한다.
옥 저의 모든 읍락의 거수(渠帥)들은 스스로 삼로(三老)라 칭하며 동예 또한 삼로가 있는데 이는 옛날의 현국(縣國)의 제도라고 한다. 통전(通典)에 의하면 진(秦)나라 때 10리마다 정(亭)을 두어 우두머리를 장(長)으로 하며 10 정(亭)마다 향(鄕)을 두었는데 우두머리를 삼로(三老)로 하며 교화를 담당하였다고 한다. 결국 100리마다 1향이 있었으며 삼로가 이를 다스렸다는 사실이며 100리는 소국(小國)을 나타낸다고 보인다.
다음은 삼국지를 통해서 동예에 관하여 살펴보자.

예는 남쪽은 진한(辰韓)과 더불어, 북쪽은 고구려, 옥저와 더불어 접하고 동쪽은 큰 바다가 있다. 지금 조선의 동쪽은 모두 그 땅이다. 호(戶)는 2만이다. 옛날 기자(箕子)가 조선에 가서 8조의 가르침을 만들어 그들을 가르쳤다. 문을 닫는 법이 없어서 백성들은 도둑질하지 않았다. 그후 40여세 조선후(朝鮮侯) 준(準)은 몰래 왕이라 불렀다. 진승(陳勝) 등이 일어나고 천하가 진(秦)을 배반(背叛)하자 연(燕), 제(齊), 조(趙)의 백성들이 조선땅으로 피난을 온 무리가 수만명이었다. 연나라 사람 위만은 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고 다시 와서 왕노릇을 하였다. 한무제가 조선을 토벌하여 멸망시키자 그 땅을 나누어 4군을 설치하였다. 이후에는 호(胡)와 한(漢)이 점점 구별되었다. 대군장(大君長)이 없다. 한(漢)이래로 그 관직에는 후(侯), 읍군(邑君), 삼로(三老)가 있어 하호(下戶)를 통솔한다. 그 늙은 노인이 옛날부터 스스로 구려(句麗)와 동종(同種)이라고 이른다. 그 인성(人性)은 공손하고 성실하며 즐기는 욕망이 적고 염치(廉恥)가 있다. 언어 법속은 대저(大抵) 구려와 더불어 같다. 의복은 다름이 있는데 남녀는 모두 곡령(曲領)을 입는다. 남자는 은화(銀花)을 매다는데 넓이가 수 촌(寸)이나 되게 치장한다. 단단대산령(單單大山領)의 이서(以西)는 낙랑에 속하고 영동(領東) 7현은 도위가 다스리는데 모두 예(濊)의 백성들로 하였다. 후에 도위를 없애고 그 거수(渠帥)를 봉(封)하여 후(侯)로 삼았다. 지금 불내예후(不耐濊侯)가 모두 그 종류이다. 한말(漢末)에 다시 구려에 속했다. 중략. 정시 6년(245)에 낙랑태수 유무(劉茂),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영동의 예가 구려에 속했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다. 불내후 등이 읍을 들어 항복하였다. 정시 8년(247)에 대궐에 이르러 조공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다시 불내예왕(不耐濊王)으로 책봉하였다. 거처는 민간에 섞여 있다. 사시로 군(郡)에 이르러 조알(朝謁)하였다. 2군은 군사의 일이나 세금, 부역은 모두 백성들과 같이 대우하였다.(삼국지 예전)

위에서 연나라 사람 위만이 상투를 틀고 이복(夷服)을 입고 다시 와서 왕노릇했다(復來王之)는 사실을 통해서 위만의 국적이 본래 연나라가 아니라 조선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래는 조선 사람이었는데 연나라로 망명하였다가 연왕 노관(盧館)이 한(漢)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흉노(匈奴)의 땅으로 들어가자 그는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을 하고 조선으로 오니 준왕은 그에게 박사(博士) 라는 관직을 주어 서쪽을 지키는 번병(藩屛)이 되도록 하였는데 후에 중국에서 망명한 무리들을 모아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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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단대산령이라고 나오는데 이는 단단대령을 말하며 삼국지의 저자들이 서술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 측면이 관측된다. 단단대령의 서쪽은 낙랑에 속하고 동쪽은 동부도위가 다스리는데 모두 예의 사람들은 백성으로 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 부조예군과 불내예후란 명칭에서 볼수 있는 바와 같이 옥저의 백성들은 일부부만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옥저의 인구는 5천호이며 예의 인구는 2만호였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을 듯하다.
정시 6년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영동의 예가 고구려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불내후 등이 읍을 들어 항복하였고 정시 8년에 위(魏)나라에 가서 조공을 하니 위나라에서는 불내예왕(不耐濊王)으로 책봉을 하였다. 여기서 불내예후(不耐濊侯)에서 불내예왕으로 봉한 것으로 보아 불내예에 대해서 그 이전보다 자치권을 강화한 것으로 보이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불내예후로 봉할 때에는 한나라가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기 때문에 자치를 허용한 것이지만 불내예왕으로 봉할 때에는 위나라가 이 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하여 그 이전보다 위나라의 지배력이 강화된 시점이었다.
따라서 외형상의 호칭 변화보다는 이 지역에 대해서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 동부도위와 맞먹는 지배력을 위나라가 회복했다고 보아야 한다. 낙랑군과 대방군이 군사의 일이나 세금, 부역에서 모두 백성들과 같이 대우했다는 사실은 낙랑군과 대방군에 있는 백성들과 같이 대우했다는 뜻이며 이는 두 군이 이 지역에 대한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정 시 8년(247)에 위나라에 조공한 이후 불내예왕으로 책봉받은 후 이듬해인 정시 9년(248)이 새겨진 벽돌이 황해도 신천에서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해서 꾸준히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위나라의 동예(東濊) 정벌과 밀접한 관련을 갖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그런데 기년이 새겨진 벽돌들 가운데 313년에 낙랑군이 멸망되고 314년에 대방군이 멸망된 상황에서도 건흥(建興) 4년(316)이 새겨진 벽돌부터 건시(建始) 원년(407)이 새겨진 벽돌까지 모두 11개나 발견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 라들을 보면 건흥 4년은 서진(西晉)의 연호이며 건무(建武) 9년(343)과 건무 16년(350)은 후조(後趙)의 연호이며 태안(太安) 2년(386)은 전진(前秦)의 연호이며 건시 원년은 후연(後燕)의 연호이며 나머지는 모두 동진(東晋)의 연호이다. 서진과 동진의 연호가 새겨진 벽돌은 모두 7개로 가장 많으며 후조, 전진, 후연의 연호가 새겨진 벽돌은 모두 4개이다. 이는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된 후에도 서진과 동진이 이들 지역에 대해서 꾸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반증이며 북조(北朝)의 왕조들이 생각만큼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다음으로 인장명(印章銘)을 살펴보자. 석암리 9호분에서 영수강녕(永壽康寧)이 새겨진 옥인(玉印)이 발견되었는데 옥인은 옥새라고 하여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정 백동 부조예군묘에서 부조예군(夫租 君)이 새겨진 은인(銀印)이 발견되었다. 부조예군에서 알 수 있듯이 군은 제후였기 때문에 은인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정백동 3호분에서 주고(周古)가 새겨진 은인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주고묘라고도 한다. 정백동 2호분에서 고상현(高常賢)이 새겨진 은인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고상현묘라고도 한다. 이 밖에 석암리 219호분에서 왕근(王根)이 새겨진 은인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왕근묘라고도 한다. 또 발견된 곳을 알 수 없는 □경(耿)이 새겨진 은인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부조예군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이름이 새겨진 은인이 발견되었다. 주고와 왕근은 확실히 중국인이란 사실을 알 수 있으나 고상현은 고구려와도 관련성이 있기 때문에 섣부른 단정을 할 수 없다.
정백동 2호분에서 부조장(夫租長)이 새겨진 백동인(白銅印)이 발견되었다. 관인 봉니들 가운데 부조현에는 부조승인(夫租丞印)만 보이고 부조장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부조장 백동인을 통해서 부조현에 부조장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부조장과 부조예군은 어떤 관계에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30년에 후한의 광무제가 낙랑군 동부도위를 폐지하면서 그 이전의 부조장이 독립하여 부조예군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정백동에서 부조예군과 부조장이 새겨진 도장이 발견되었지만 부조현을 제외한 낙랑군 24현과 관련되어 은인이나 백동인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평양에서 지금까지 출토된 제한된 유물을 갖고서 섣불리 어떤 주장을 한다는 사실은 다소 무리가 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유독 부조현과 관련된 도장이 두 개씩이나 나왔다는 사실은 어떤 사실을 말해 주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조현은 낙랑군 동부도위에 나열된 현들 가운데 맨 끝에 위치하고 있다. 낙랑군 동부도위는 임둔군과 현도군의 고지에 설치되었는데 오늘날의 강원도와 함경남도 일대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 곳에 있었던 부조예군과 부조장이 평양에 와서 묻혔을까? 물론 낙랑 태수에게 하례를 하기 위해 평양에 왔다가 병환으로 이 곳에 죽어서 묻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부조예군뿐만 아니라 부조장 또한 이 곳에 묻혔다는 사실이나 더군다나 똑 같은 정백동에 묻혔다는 사실로 볼 때 단순히 평양에 왔다가 병환으로 죽어서 묻혔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다. 아마도 낙랑군 동부도위에서 맨 끝에 위치한 부조현이 있었던 곳이 평양이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 밖에 동인(銅印)들이 모두 19개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 왕씨의 동인은 6개, 한씨의 동인은 2개, 황씨의 동인은 1개, 신(臣)씨의 양면 동인은 3개가 발견되었다. 여기서 왕씨의 동인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고 한씨와 황씨 또한 왕씨와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면 모두 9개로 전체의 절반 정도가 된다.
석암리 204호분에서 왕우(王 )의 양면 목인(兩面木印)이 발견되었는데 오관연 왕우인(五官 王 印)과 왕우인신(王 印信)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오관연왕우인에서 오관연은 오관의 관리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관리들은 목인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관리들은 관직이 자주 바뀌기 때문에 목인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백리 127호분에서 왕광(王光)의 양면 목인이 발견되었는데 낙랑태수연 왕광지인(樂浪太守 王光之印)과 왕광목인(王光木印)이 새겨져 있다. 낙랑태수연 왕광지인에서 낙랑태수연은 낙랑태수 밑에 있던 관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형유(荊楡)의 도인(陶印)이 발견되었는데 도인은 목인보다 만들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아 관리는 아닌 듯 하며 도자기를 굽는 사람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사인 봉니를 살펴보자. 사인 봉니에 나오는 성씨들을 살펴보면 왕씨는 5명으로 가장 많고 한씨, 고씨, 공손씨는 각각 2명씩이다. 왕씨와 한씨를 합하면 모두 7명으로 전체 15명 가운데 절반 가량을 차지한다.
다 음은 기년이 새겨진 벽돌에 나타난 사람들을 살펴보자. 왕씨는 6명, 한씨는 5명, 손씨(孫氏)는 2명이고 장씨(張氏), 오씨(吳氏), 전씨(田氏)는 각각 1명씩이다. 왕씨와 한씨가 가장 많은데 이 둘을 합하면 모두 11명이나 된다. 기년이 새겨지지 않는 벽돌에 나타난 사람들까지 합해서 살펴보면 왕씨는 22명, 한씨는 11명, 손씨는 3명, 장씨는 6명, 오씨와 전씨는 각각 3명씩이다. 여기서도 왕씨와 한씨가 모두 33명으로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평양역 구내에서 발견된 영화 9년(353)이 새겨진 벽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영화 9년 3월 10일에 요동한(遼東韓) 현도태수 영동리(領 利)가 만들었다.

영화는 동진의 연호로 안악 3호분(동수묘)에서도 영화의 연호가 나온다. 당시 요동의 최고 책임자는 요동태수였는데 요동한으로 쓴 점이 특이하다. 광개토왕릉비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두비압잠한(豆比鴨岑韓), 구저한(求底韓), 객현한(客賢韓), 파노성한(巴奴城韓),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

위 의 지명들은 광개토왕릉를 지키기 위해 수묘인으로 차출된 곳들인데 특이하게도 성(城)이 아닌 한(韓)으로 나온다. 아마도 위의 지명들과 요동한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요동한과 고구려 또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현도태수인 영동리의 이름으로 봐서 중국인은 아니며 고구려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