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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펌:이대진] 귀주대첩과 관련된 영토회복의 정당성 근거.(5)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6. 12.
요나라 태조(재위 916~926)는 당 의종(懿宗) 함통(咸通) 13년(서기 871년)에 출생을
하였다 하는데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나면서부터 남달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모두 개천에서 용났다고 하면서 이것은 하늘이 보내신
신인(神人)이라고 했다는군요..

하여간 태조는 무럭무럭 자라면서 각종 전투에 참여하게 되면서 점점 세력을 키웠다고
합니다.

헌대 거란은 신라, 부여 등과 같이 매우 민주적인 나라였기에 거란 8부족이 3년에
한번씩 가한(可汗=Kahn,혹시 이두문인가요? 가의 ㄱ 과 한의 ㄴ 을 합쳐서 간)을
뽑아서 대통령을 시켰다는군요...매우 민주적이죠?^^

어쨋든 서기 901년에 흔덕근(痕德菫)이 가한 선거에서 승리하였는데 이때부터 요태조가
두각을 나타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흔덕근 가한은 요태조(그때 이름은 야율철리지)
본부이리근(本部夷離菫)에 임명하였다하는데 이 관직은 요즘시대로 하면 군 참모총장 쯤
되나 봅니다.

1. 요 태조가 황제에 오르기 까지..

요태조는 이때 군을 이끌고 주변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동안 업신여김을
당한 수모를 돌려 주려고 했다는 군요..
그래서 군대를 동원하여 실위(室韋),우돌(于厥),해(奚) 등지를 정벌합니다.

그 공으로 질렬부이리근(大迭烈府夷離菫)을 제수받았는데 이 자리는 국방장관 쯤 된다
하네요.

승진한 요태조는 다음해(902년)에 이번에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당(唐)나라를 공격합니다.
무서운 것이 없읍니다.^^

요사 본기 태조 서언
* 新校本遼史/本紀/卷一 本紀第一 太祖上/序言 - 2 -
①..明年秋七月,以兵四十萬伐河東代北,[二]攻下九郡,獲生口九萬五千,駝、馬、牛、羊不可勝紀.九月,城龍化州于潢河之南,始建開教寺.
-> 명년 가을 7월에 군사 40만명으로 하동과 대의 북쪽을 정벌에 나서 ,구군을 공략하였으
며, 포로 9만 5천명을 사로잡았고, 타,마,우,양은 셀수 없었다. 9월에 횡하의 남쪽에 용화주 성을 쌓고 개교사 건설을 시작했다.


다음해(903년)도 또 정복사업을 하는데 재미가 들렸는지...
* 新校本遼史/本紀/卷一 本紀第一 太祖上/序言 - 2 -
②明年春,伐女直,下之,獲其戶三百.九月,復攻下河東懷遠等軍.冬十月,引軍略至薊北,俘獲以還.先是德祖俘奚七千戶,徙饒樂之清河,至是創為奚迭剌部,分十三縣.遂拜太祖于越、總知軍國事
-> 명년 봄, 여직을 정벌하고 3백호를 사로잡았다. 9월 다시 하동 회원 등지의 군을
공략하였다. 겨울 10월에 군을 이끌고 계의 북쪽을 공략하여 포로를 잡아 돌아왔다.
앞서 덕조가 사로잡은 해의 포로 7천호를 요악의 청하로 옮겨서 해질랄부를 만들고 13개의
현으로 나누었더.
마침내 태조는 우월, 총지군국사(오늘날의 국무총리 쯤 되는 관직)에 배수되었다.
(덕조는 추존된 요태조의 아버지...요태조는 황제가 되고 4대조까지 추존한다고 합니다.)


태조는 다음해(904년)도 용화주와 실위를 공격하는데 이 때 당은 노룡군 절도사 유인공
에게 수만의 군사로 방어를 하게 하지만 요태조가 항복한 실위인을 보내 쓴 계교에 속아
당군과 실위는 요나라 복병에 대패하게 됩니다.

다음해(905년) 태조가 또 실위를 공격하게 되는데...근데 왜 실위만 공격하는지...
죽어납니다..^^

이때 당나라 하동절도사 이극용이 동맹을 구걸하여 와서 그해 10월에 요태조는 운주에서
이극용을 만나 형제의 동맹을 맺고 병사를 주어 노룡절도사 유인공을 공격하게 합니다.
이때도 많은 포로를 잡아 옵니다.

[주 *이극용(856~906) : 당말(唐末)의 군웅(群雄), 후당(後唐)의 태조, 돌궐족으로 황소의
난 평정에 공이 있어서 883년에 하동절도사로 임명됨, 황소의 부하로 항복한 주전충과
세력다툼을 벌이는 군벌로 성장하였으나 태원에서 주전충에게 패함.

*주전충 (852~912) :오대(五代) 후량(後梁)의 태조(재위 907~912) 안휘성 출신으로
본명은 주온, 황소의 부하로 있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관군에 항복하여 당나라 희종에게
전충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황소의 잔당과 군벌을 평정, 양왕(梁王)에 봉해졌으나
당나라 소왕을 죽이고 애왕을 세워 그에게서 황위를 선위 받아(당나라 멸망 907년)
개봉을 수도로 양나라를 건국하였다.
왕위에 오른 지 6년 만에 자기 아들에게 살해당함.]


그 다음해(906년) 2월에도 요태조는 유인공을 공격하고, 산북(山北)의 해(奚)를
공격하게 됩니다. 변주의 주전충이 내빙하기도 합니다.

906년에 주전충에게 내빙을 받으며 이극용과 주전충의 대결을 활용하는 것을 볼
수도 있네요..^^

그해 12월에

新校本遼史/本紀/卷一 本紀第一 太祖上/序言 - 2 -
③十二月,痕德菫可汗殂,臣奉遺命請立太祖.曷魯等勸進.太祖三讓,從之.
12월 흔덕근 가한이 죽자 신하들이 유명을 받들고 와서 태조가 위에 오르기를
청하였다. 갈로 등이 받기를 권하였다. 태조는 3번 사양하다가 따랐다.

==>꼭 3번은 사양하더군요..^^
하지만 민주주의는 파괴되었읍니다.
선거를 통해 간을 선출하던 방식에서 전제군주가 등장하였으므로
이것은 민주주의의 파괴로 요태조는 이후 정통성 시비에 계속 시달리게 됩니다.


2. 용화주, 노룡군, 하동군, 운주 ,계북,산북 등지..

1번에서 언급된 지역이 대략 이런 곳인데 요태조가 공격을 쉬지 않고
하는 지역입니다.

이 지역을 대략적으로 알아보면 요나라의 위치가 좀 더 확실해 집니다.


그런데 한가지 먼저 말씀 드릴 것은 이 내용은 새로운 사실로서 그동안 국내에서
발표한 사람의 거의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되네요...^^

그러므로 그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하더라도 이보다 더 확실하게
알려 드릴 수는 없다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제가 과문한 탓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회원분들이 알려주시면
정보공유를 위한 취지에 합당한 것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도 1장을 보겠읍니다.

아래 지도는 우공도산천지도라는 것인데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는 알수
없읍니다. 다만 엉터리 지도라는 것외에는...알길이 없읍니다.^^

왜 엉터리 지도인가 하면 제가 사서의 기록과 대조해 본 결과
저 지도의 지명들은 실제 위치에서 동북으로 동북으로 열심히 지명을 옮겨서
그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쪽과 동북쪽에는 고려의 영토가 있었으니....^^

(4)회 글 ②번에서 거란의 남쪽에는 영주가 있고,(4)글 ④번에서 고구려 서북쪽으로 영주와
접한다고 되어 있었지 않읍니까?
그런데 그 내용이 당나라 사서임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차이를 두고 있는 것으로 기록하여
상당히 헷갈리게 한 듯합니다.

영주가 어디인가는 (4)회 글 ⑤번에서 밝혀졌지만 그 내용을 보시면 특이점이
있읍니다..

영주도독부가 앞에서는 燕療 2주를 영한다고 하더니 뒤에 가서는 營遼 2주를
관한다고 하고 있고 또 후에도 조금씩 변동을 합니다.
그런데 영주도독부에 1개의 현이 있는데 유성현이라고 합니다.
유성현 내용을 다시 옮기면...
“유성 한나라 현으로 요서군에 속한다..실위,말갈 제부족이 나란히 동북쪽에 있다.,
먼것은 6천리, 가까운 것은 2천리다.
서북쪽은 奚의 경계와 접하고 북쪽은 거란의 경계와 접한다.“

여기서 실위.말갈. 제부족이 모두 동북쪽에 있는데..먼것이 6천리 가까운 것이
2천리라고 하는 말입니다..이러니 완전 헷갈립니다.^^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5천리 되는 곳에 거란과 고구려가 있는데, 그렇다면 영주는
장안에서 대략 3천리쯤에 위치한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이런 사실은 영주의 지역
폭이 2천리나 될 수는 없으므로 뭔가 이상한 것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은 영토가 오랜 시간에 걸쳐 변화한 것을 한꺼번에 몰아서 기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헷갈리게 하려고요...^^

생각해 보세요..영주 서북쪽으로 해가 있고 북쪽이 거란이라면 신당서에서 영주가 거란의
남쪽에 있다는 말은 맞고요..고구려 서북쪽에 영주가 있다면 고구려 영토는 영주의 남동
쪽에 있다는 말이 되니 지역적으로 고구려가 회수까지 영토를 점유했을 시기가
아니면 성립될수 없게 됩니다.

시대를 다른 시기에 기록을 마치 동시대처럼 기록해 놓으면 사람들이 모두 혼동을
하게 되거나 아니면 아니라고 우길 수 있게 됩니다.^^

말갈이 영주 동북쪽으로 최소 2천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공간 2천리에는 뭐가 있는가 말이죠..영주는 당나라의 국경지역인데 거기서 부터
동북쪽으로 2천리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말이 안되지요?^^
뻔한 것입니다.
그 2천리를 고구려나 신라,백제가 있었다는 말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실제도 영주에서 부터 말갈이 있다는 동북쪽 2천리 공간에 고구려,백제.신라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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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지도를 보면서...
2번 타이틀에 나온 용화주부터 보면요.
용화주는 요나라 상경도에 있는 것입니다.

요사 지리지 상경도
*新校本遼史/志/卷三十七 志第七 地理志一/上京道/龍化州- 447 -
 ④..龍化州,興國軍,下,節度.本漢北安平縣地.契丹始祖奇首可汗居此,稱龍庭.太祖於此建東樓.唐天復二年,太祖為迭烈部夷離菫,破代北,遷其民, 建城居之.明年,伐女直,俘數百戶實焉.天祐元年,增修東城,制度頗壯麗.十三年,太祖於城東金鈴岡受尊號曰大聖大明天皇帝,建元神冊.天顯元年,崩于東 樓.太宗升節度.隸彰愍宮,兵事屬北路女直兵馬司.刺史州一,未詳.統縣一:

  龍化縣.太祖東伐女直,南掠燕、薊,所俘建城置邑.戶一千.
-> 대략 번역...
용화주,. 흥국군, 하. 절도, 본래 한나라 북안평현 땅이다. 거란 시조 기수 가한이 이 곳에
살았서 용정이라고 칭한다. 태조가 여기에 동루를 건설하였다, 당나라 천복 2년에 태조가
질렬부이리근이 되어 대의 북쪽을 파하고 기 백성을 옮겨 성을 쌓고 거기에 살았다.
명년 여직을 정벌하고 포로 수백호를 옮겨 살게 했다. 천우 원년 동성을 중수하고 ...
13년 태조가 동금령강성에서 대성대명천황제 존호를 받았다. 신책 연호를 썻다, 천현 원년
동루에서 붕했다. 태종이 절도로 승하고 창민궁을 예했으며, 병사는 북로 여직병마사에 속하게 하였다. 1주에 자사를 두었는데 상세한 것을 알수 없다. 1개의 현을 통했다.

통화현, 태조가 동쪽으로 여직을 정벌하고 남쪽으로 연과 계를 공략해 포로들의 성을
세우고 읍을 두었다. 호는 1천이다.

====>
앞에 글을 보시면 용화주가 거란의 시조가 살았기에 매우 중요한 지역임을 알 수 있는데
뒤에 보면 1개의 주가 있다고 하면서 상세한 것을 알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곳인데 어찌 상세하게 알 수가 없겠읍니까?
중요해서 용정...용의 정원..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는데요..
이런 곳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뭔가 다른 내용이 있었는데 없애버린 것이죠...
뻔한 상식입니다.

이번 글②번 참조을 참조하시면 요태조가 여직과 연.계를 공격한 것이 있었지요?
여직은 발해국의 속민인데 요태조가 그 여직을 동쪽으로 공격하고 있고
그 남쪽은 대의 북쪽이고 그 남쪽은 연과 계라고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것은 (3)회의 ③번 글에서 요의 성종이 연과 계의 양장을 모아 중경을
만든 것 그 지역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서 여직을 정벌했다고 한다면 이 지역은 연과 계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라는 것도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지역은 무엇인가요?

요태조가 공격한 동쪽의 여직과 남쪽의 연,계 지역이 이른바 강동 6주일 가능성이
점점 높아만 간다고 판단됩니다.
고려와의 경계일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지도에...

요 태조는 대의 남쪽으로 다시 공격을 하였는데 그것이 연과 계라는
것은 연과 계의 위치는 대의 남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아래 지도가 틀린 것입니다.
지도에서는 계와 연이 대의 남쪽에 그려져 있지 않고 동쪽으로 한참 나가
그려져 있지요?^^

그림 화살표로 연(燕)과 계(薊)가 옮겨져서 그렸어야 맞는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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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려사 절요의 이상한 기록...

고려의 영토와 거란과 접하고 있다고 하는데 고려사 절요에 보면 1차 침입한
거란의 성종임금 통화 12년(994년)에 소손녕이 고려에 보낸 편지를 보면...

*고려사 절요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갑오 13년(994), 송 순화 5년ㆍ거란 통화 12년

⑤“...(전략)...그러므로 얼마 후 이 명령에 준하여 곧 참작하여 압록강 서리(西里)에 5개의 성을 쌓기로 하여, 3월 초에 성을 쌓을 곳에 이르러 수축에 착수하기로 하였으니, 삼가 청컨대 대왕께서 미리 먼저 지휘하여 안북부(安北府 평남 안주(安州))에서 압록강 동쪽에 이르기까지 2백 80리 사이에 적당한 토지를 답사하고 이정(里程)의 거리를 참작하여 아울러 성을 쌓도록 하여, 역부(役夫)를 보내어 같은 시기에 착수하도록 하고, 그 쌓아야 할 성의 수를 빨리 회보하소서. 거마를 교통하여 멀리 조공의 길을 열고 길이 조정(朝廷 거란)을 받듦이 스스로 평안할 계책을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하략)...”

여기 번역본에 거란 자기들은 압록강 서쪽에 5개의 성을 쌓고 고려더러는 압록강
동쪽에 성을 쌓으라고 하고 있는 만일 거란이 북쪽에 있었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압록강 남쪽에 성을 쌓으라 하였겠지요?^^^

그러니 그 압록강이 어느 강이냐? 이런 의문이 안들면 이상한 것이지요..
압록강은 ..(4)회 ④번 글에 나오지요?
다시 그 부분만 옮기면..
“......물색이 오리 머리와 같아서, 압록수라고 불리며, 국내성 서쪽을 지나, 서쪽으로 가서 염난수와 합해지고, 또 서남쪽으로 흘러서 안시성에 이르러 해에 들어간다. 평양성은 압록강의 동남쪽에 있어, 거대한 배로 사람을 건너니, 그것으로 인하여 해자가 되었다.”

여기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압록강이 지금 압록강이 아니라는 사실이죠.
국내성의 서쪽을 압록강이 지난다고 되어 있는데.. 만일 국내성이 만주에
있는 것이라면 압록강은 국내성의 남쪽을 지나야 하는 것이고..서쪽으로
흘러서 염난수와 합쳐진다고 하는데 현재 압록강이 흐르다가 어느 강과
합쳐지나요?^^
그리고 평양성이 압록강의 동남쪽에 있다고 되어 있으니 이것 말이 안되죠..
현재 평양에는 대동강이 있지요?^^

따라서 모두가 알다시피 고려사 절요에 나오는 압록강은 현재의 압록강이
아니라 대륙에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고려사 절요 다음해 기록을 보면..아주 황당한 내용이 있읍니다.

* 고려사 절요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을미 14년(995), 송 지도(至道) 원년ㆍ거란 통화 13년
⑥가을 7월에 개주(開州)를 개성부(開城府)로 고치고, 적현(赤縣) 여섯과 기현(畿縣) 일곱을 관할하게 하였다. 또 도(道)를 정하니, 관내도(關內道)는 29주ㆍ82현을, 중원도(中原道)는 13주ㆍ42현을, 하남도(河南道)는 11주ㆍ34현을, 강남도(江南道)는 9주ㆍ43현을, 영남도(嶺南道)는 12주ㆍ48현을, 영동도(嶺東道)는 9주ㆍ35현을, 산남도(山南道) 10주ㆍ37현을, 해양도(海陽道)는 14주ㆍ62현을, 삭방도(朔方道)는 7주ㆍ62현을, 패서도(浿西道)는 14주ㆍ4현ㆍ7진(鎭)을 관할하게 하였다.


여기 보시면 고려의 행정지역인데 이상한 이름입니다.
개주가 나오고..도를 정했는데 관내도 29주, 중원도 13주, 하남도 11주, 강남도 9주, 영남도
12주, 영동도 9주, 산남도 10주, 해양도 14주, 삭방도 7주, 패서도 14주..
합치면 128주입니다.

발해의 행정 지역이 5경 15부 62주라고 하는데 비해 2배 이상이네요..^^
고려의 행정구역 이름도 이상하죠?^^

너무 길어지네요...^^

*
송사.요사,금사는 원나라 세조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때 3사(三史)라고 하여 중요성을 부과하면서 여러 사람들이 2년 만에 만들었다고
하는데 소수민족도 참여하여 만들었다고 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 소위 3사라는 송사,요사.금사를 만든 것은 요와 금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도 하였다고 하는군요.
송도 정통성을 부여하고요..

이런 점을 미뤄볼 때..
송.요,금사는 정치적 야합의 산물이고 이러한 정치적 야합의 산물은
진실과는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역사왜곡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요금송의 후예들이 고려와 발해에 대한 기록을
삭제해 버리면서, 고려와 발해의 역사를 축소왜곡한 것이 틀림없으며, 우리 영토도 축소
하였다고 판단됩니다.

이후 명나라 영락제때 영락대전과 청나라 건륭제때 사고전서를 만들면서
지속적으로 역사조작과 왜곡 작업을 진행하여 오늘날과 같이 이상한 현상을
만들고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도 왜곡을 하여 저런 이상한 모양이 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고려사 역사책을 수십년에 걸쳐서 몇번씩 다시 쓰고 고려 태조에 대한 기록은 아예 새로
만들었다고 하니요...
지나의 사서나 조선시대 만든 전대의 사서기록들이 진실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래서 추론을 할수 밖에 없는데 오늘은 압록강의 진상은 물론 고대 지도까지
잘못된 것을 밝혔으니 기분이 매우 좋읍니다.^^
보람을 느낍니다.^^

진실을 해부해 가는데 진실이 마구 쏟아져 나오니 신명이 오르는 듯하고
진짜 민족정기가 바로 서는듯 합니다.^^

회원님들도 동감(同感)하시기를 바라고요..


어쨋든 길어지기는 하지만 진실을 향한 노력은 계속해야 하므로
윗글 제목 2번에서 용화주 다음으로 있는 노룡군, 하동군, 운주 ,계북,산북 등지
는 다음회에서 계속 찾아보겠읍니다.

그리고 그 후에 요나라 태조가 황위에 올라서 민주적 정통성 시비에 휘말리는 것과
추가되는 거란의 영토확장을 또 보겠읍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진실은 밝혀 지게 마련이고..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게 되어 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