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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펌:이대진]귀주대첩과 관련된 영토회복의 정당성 근거.(8)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6. 12.
(7)회 글에서 903년의 요태조의 여직공격은 없었던 일을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읍니다.

이번 (8)회에서는 그 다음으로 기록되어 있는 하동 회원, 계북, 요악의 청하에 만든
해질랄부 등을 계속 찾아 보기로 합니다.

903년에 요태조가 하동회원 등군을 공격하였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이것이 하동의 회원군 일대를 공격한 줄로 알았었읍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하동과 회원을 겹으로 공격한 것이더군요.
회원은 하동이 아닌 하북에 있더라구요..^^

회원(懷遠)이 어디있는지 한문을 몰라서 한참을 찾았는데....

구당서 지리지 하북도 연주
*新校本舊唐書/志/卷三十九 志第十九/地理二/河北道/燕州 - 1521 -
①....燕州 隋遼西郡,寄治於營州.武德元年,改為燕州總管府,領遼西、瀘河、懷遠三縣.其年,廢瀘河縣.六年,自營州南遷,寄治於幽州城內.貞觀元 年,廢都督府,仍省懷遠縣.開元二十五年,移治所於幽州北桃谷山.天寶元年,改為歸德郡.乾元元年,復為燕州.舊領縣一,無實土戶.所領戶出粟皆靺鞨別種 [八五],戶五百.天寶,戶二千四十五,口一萬一千六百三.兩京道里,與幽州同.

  遼西 州所治縣也.
-> 연주는 수나라때 요서군으로 영주에 부속되어 있었다. 무덕 원년에 연주총관부를 두었으며, 요서,노하, 회원 3현을 통솔한다. 그해 노하현을 폐하였다. 무덕(6년) 영주를 남쪽으로 옴겨 유주성내에 부속시켰다. 정관 원년 도독부를 폐하여서 회원현으로 하였다. 개원 25년에 유주북쪽의 도곡산으로 치소를 옮겼다. 천보 원년에 귀덕군으로 고쳤다. 건원 원년에 다시 연주로 하였다. 옛날 토호가 차지 않은 1개의 현을 통솔하였다.호를 통솔하는 곳에서 조가 나오는데 모두 말갈의 별종이며(이 부분은 아래 교감기에 나오는데 환우기(寰宇記)라는 것이 아마도 태평환우기를 말하는 듯합니다.), 호는 5백이다. 천보에 호가 2045호가 되었고
인구는 1만1천6백3명이다. 양경도리는 유주와 같다.

[ *주 ;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송나라의 악사(930~1007년)가 편찬한 지지(地志).
총 200권, 목록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新校本舊唐書/志/卷三十九 志第十九 - 1557 -校勘記
㉠..[八五]出粟皆靺鞨別種 寰宇記卷七一作「領靺鞨,本栗末靺鞨別種.」
->[85] 출속개말갈별종은 환우기 71권에 쓰기를「領靺鞨,本栗末靺鞨別種.」이라 했다.

=> 위글 연주에 회원현이 있지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당나라 땅이 줄었다 늘었다 하지요?
무덕은 당나라 고조의 연호이고,정관은 당나라 태종, 개원.천보는 당나라 현종, 건원은
당나라 숙종의 연호라네요..
그러니 시대에 따라 영토가 줄었다 늘었다 하면서 그 영주와 연주가 같은 지역에서
이름이 번갈아 바꿔치기를 연속으로 하고 있고요..굉장히 불안한 시대라는 것을
알수 있겠네요..영토의 신축이 저리 단기간에 일어나고 또 이름도 계속 바꿔치기를
하고 지역도 바꿔치기가 계속 일어나는군요..땅이 줄면 남쪽으로 옮기기도 하고요.

위에서 양경이 뭔지 몰라서 헤맸는데요..양경은 아마도 장안과 낙양을 이르는
말로 생각됩니다.
신당서의 유주대도독부..위에서 양경도리가 유주와 같다라고 되어 있지요?..

그래서 ...

*新校本舊唐書/志/卷三十九 志第十九/地理二/河北道/幽州大都督府 - 1515 -
㉡..幽州大都督府 隋為涿郡.....(중략)....
在京師東北二千五百二十里,至東都一千六百里.
->유주대도독부는 수나라가 탁군으로 삼은 곳이다.....(중략)...
경사로 부터 동북으로 2천5백2십리 동도에 이르기를 1천6백5리다.

=> 이렇게 되어 있으니 유주와 연주의 위치가 비슷한 위치라는 것에서 경사와 동도가
양경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읍니다.^^ 실제 양경은 낙양과 장안이 맞나
봅니다.

당나라의 경사는 ...
*新校本舊唐書/志/卷三十八 志第十八/地理一/十道郡國/關內道 - 1394 -
㉢..京師 秦之咸陽,漢之長安也.隋開皇二年,自漢長安故城東南移二十里置新都,今京師是也.城東西十八里一百五十步,南北十五里一百七十五步.
->경사는 진나라의 함양이고 한나라의 장안이다. 수나라 개황 2년에 한나라 장안옛성으로
부터 동남쪽으로 2십리 옮겨서 신도를 설치하였는데, 현재의 경사가 이것이다.
성은 동서로 18리 1백5십보이고 남북으로 15리 1백75보이다.

*新校本舊唐書/志/卷三十八 志第十八/地理一/十道郡國/河南道/東都 - 1420 -
㉣..東都 周之王城,平王東遷所都也.故城在今苑內東北隅,自赧王已後及東漢、魏文、晉武,皆都於今故洛城.隋大業元年,自故洛城西移十八里置新都,今都城是也.北據邙山,南對伊闕,洛水貫都,有河漢之象.
-> 동도는 주나라의 왕성으로 평왕이 동쪽으로 옮긴 도읍이다. 옛성은 현재의 원내 동북귀퉁이에 있으며, 난왕(동주의 마지막왕)이후부터 동한에 이르기까지, 위나라 문제(조조의 아들 조비), 진나라 무제(사마중달의 손자인 사마염)도 모두 도읍을 지금의 옛낙성에 정했다.
수나라 대업 원년에 옛 낙성으로 부터 서쪽으로 18리 옮겨서 새로운 신도를 설치하였는데
현재의 도성이 그것이다.북쪽으로 망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는 이궐을 대하고 있고, 낙수가 도읍을 관통하며, 하한(하한은 아마도 한수와 하수를 이르는 듯^^)의 모양이 있다.


=> 이렇게 보니까 연주와 유주가 조금 확실해 지지요.

그런데 요태조가 하동과 함께 공격한 당나라의 회원은 연주의 하나의 현이고, 그것이 유주에 속하기도 하였다가 유주도독부를 폐하자 회원에 관청을 설치하였는데, 그 지역에 바로 요서가 있고 노하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읍니다.

연주(燕州)는 수나라때 요서군(遼西郡)이며 이곳에 노하(瀘河)와 회원(懷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수나라때 연주와 인근지역에 있는 유주의 대 도독부가 탁군(涿郡)에 있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수나라의 침입을 기록한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서 이 지역을 확인하면 덤으로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 대첩 지역까지 확인하게 됩니다.

그 지역도 역시 귀주대첩과 같은 지역으로 생각됩니다.
산서성과 하북성지역이라는 것이죠.


2.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23년조...

이 이야기가 왜 갑자기 나오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당연히 관계가 있기 때문에
말하는 것입니다.
(3)회 ⑦번 글에 보시면 유주가 발석의 사이,“幽州在渤、碣之間”에 있다고 되어 있지 않읍니까?
위에서 유주는 연주와 유사지역이고 그 지역에 요태조가 공격한 하동,회원 등지가
있지 않읍니까?

그렇다면 “幽州在渤、碣之間”은 어디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요?
이 관련 자료가 너무도 많아서...정리가 안될 지경입니다만..^^

하여간 이 말이 삼국사기에 나와서 다행입니다.

“幽州在渤、碣之間” 은 발해와 갈석사이이니...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왕양 23년 조에 관계 부분만 옮기면...
(관심있는 분들은 이 부분 전체를 모두 보시는 것이 더욱 좋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②.. 二十三年 春正月壬午 帝下詔曰 『高句麗小醜 迷昏不恭 崇聚勃,碣之間, 食遼濊之境...(후략)..
->23년(612) 봄 정월 임오(壬午)에 황제가 조서를 내렸다. 『고구려의 보잘 것 없는 무리들이 미욱스럽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海)와 갈석(喝石) 사이에 모이고, 요수(遼)와 예수(濊)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후략)..

=>
분명히 勃碣之間 이라고 나오지요?^^

김부식 선생은 역사 분야에서 가히 신(神)으로 불려도 무방한 경지에 오르신 분입니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수서에 거의 유사하게 나옵니다...

新校本隋書/紀/卷四 帝紀第四/煬帝下/大業八年 - 79 -煬帝下
③八年春正月辛巳,大軍集于涿郡..(중략)...而高麗小醜,迷昏不恭,崇聚勃、碣之間,荐食遼、獩之境...

수 양제가 탁군에 대군을 소집하고 고구려가 발갈지간을 점령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지요?
이 땅은 그러니까..勃碣之間은 분명히 고구려 땅이지요?
하동,회원 등지도 고구려 땅이었다는 것이 증명이 되고요?
더불어 유주와 연주도 고구려 땅이었다는 것이 증명되고요..?
(앞에서 당나라 땅이 늘었다 줄었다 하지 않읍니까? 고구려 땅도 그와 함께 늘었다
줄었다 하였겠지요?^^)

지명은 계속 변화하였기에 이것이 그것 같고 그것이 이것 같아서 헷갈립니다만..
어쨋든 수나라때의 지명으로 보면요..
수나라 양제가 군사를 소집한 탁군을 알아봐야 하는데 연주와 관련하여서 연나라
연상이 되어 연나라를 먼저 보면 알수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연나라를 찾아보면...
그리고 연주과 관련하여서는 연나라를 더 조사해야 하지만 그러면 더 복잡하여지고.
연나라도 남연,북연,전연,후연..그냥 연나라 등등 아주 많고 또 복잡하여 생략하려
합니다.

다만...
사기정의 열국분야
*新校本史記三家注/三家注序/史記正義/列國分野 - 33 -
⑥..燕地尾﹑箕之分.召公封於燕,後三十六世與六國俱稱王.東有漁陽﹑右北平﹑遼西﹑遼東;西有上谷﹑代郡﹑鴈門;南有涿郡之易﹑容城﹑范陽;北有新成﹑故安﹑涿縣﹑良鄉﹑新昌及渤海之安次,樂浪﹑玄菟亦宜屬焉.
-> 연나라 땅은 미,기의 분이다. 소공을 연에 봉하고 이후 36세를 6국과 함께 왕을 칭했다.
동쪽으로 어양, 우북평, 요서,요동이 있다.; 서쪽으로는 상곡, 대군,안문이 있고; 남쪽으로는
탁군의 역,용성,범양이 있고, 북쪽으로는 신성,고안,탁군, 양향,신창 및 발해의 안차, 낙랑.
현도 역시 속한다.

=> 여기 다 믿을수는 없지만 탁군이 연나라 지역에 있는 것으로 나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지역은 대략 산서,하남성,지역인 것으로 보입니다.
또 우리가 요태조의 공격으로 알게 된 하동과 대군에서 대군이 여기서는 연나라의 서쪽에 있다고 하니 대군이 시간이 흐르면서 북쪽으로 이동한 것을 알수 있읍니다.
연나라는 그 보나 남쪽에 있었기에 그리 생각됩니다.


또 탁군과 발해군도 ..
수서 지리 중 탁군..
*新校本隋書/志/卷三十 志第二十五/地理中/涿郡 - 857 -
⑦..涿郡舊置幽州,後齊置東北道行臺.後周平齊,改置總管府.大業初府廢.統縣九,戶八萬四千五十九.
-> 탁군은 구 유주에 설치했는데 후제가 동북도행대를 설치했다. 후주가 제나라를 평정하자 총광관로 고쳐서 설치했다. 대업 초에 부를 폐하였다. 9개의 현을 통할하며 호는 8만4천 59다.

新校本隋書/志/卷三十 志第二十五/地理中/渤海郡 - 845 -
.⑧.渤海郡開皇六年置棣州,大業二年為滄州.統縣十,戶十二萬二千九百九.
-> 발해군은 개황 6년에 체주에 설치했으며 대업 2년에 창주로 하였다. 10개의 현을
통할하고 호는 12만 2천 909다.

=>이러니까 발해와 탁군은 우리가 저 앞에서 ①번글에 우리가 알아보고자 하는 회원이
나온 연주를 생각하여 본다면..유사지역은 알 수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연나라 지역의 지명들과 관련하여 한서지리지 조금씩 옮깁니다.

한서지리지
新校本漢書/志/卷二十八下 地理志第八下 - 1625 -
⑨遼東郡,秦置.屬幽州.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縣十八:襄平,有牧師官.莽曰昌平.新昌,無慮,西部都尉治.[一]望平,大 遼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長說.[二]房,候城,中部都尉治.遼隊,莽曰順睦.[三]遼陽,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莽曰遼陰.險 瀆,[四]居就,室偽山,室偽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高顯,安市,武次,東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有鐵官﹑鹽官.西安平,莽曰北安平.文,莽曰 (受)[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五]沓氏.[六]
-> 요동군, 진나라가 설치했다. 유주에 속한다. 호는 5만5천972호, 구는 2십7만2천5백3십9. 현은 18 : 양평, 목사관이 있다. 망(전한을 무너뜨린 신나라 왕망)은 창평이라 불렀다.신창,무려 서부도위치. 망평, 대요수가 새외로 나와 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해로 들어가며,천2백5십리를 간다.망 왈 잘열. 방,후성, 중부도위부. 요대, 망 왈 순목. 요양, 대량수 서남으로 요양에 이르러 요로 들어간다. 망 왈 요음. 험독, 거취, 실위산, 실위수가 나오며, 북으로 양평에 이르러 양으로 들어간다. 고현.안시, 무차, 동북도위치. 망 왈 환차. 평곽, 철관,염관이 있다.서안평, 망 왈 북안평, 문, 망 왈 (수) [문]정. 번한, 패수가 새외로 나와 서남으로 해에 들어간다. 답씨..

=> 여기에 보니까 요동군이 유주에 속한다고 하니 이것은 발석지간이라는 것을 알수 있읍니다. 앞에서 유주는 “幽州在渤、碣之間”이라고 하였으니
그런데 위 ⑥번글에 보면 발해의 안차라는 지명이 있는 것을 볼수 있는데 ⑨번글에
보면 안시와 무차가 있읍니다. 이것을 앞뒤 것을 합치면 안차가 되지요?
한자도 같읍니다.^^
발해의 안차를 안시와 무차를 합쳐서 만든 지명이름이 확실한 듯합니다.
같은 유주,발석지간에 있으니 확실하지요..

더구나 뒤에 왕망이 환차라고 이름을 바꿔부른 것에서도 유추가 됩니다..지명이름을 저와 같은 방식으로 변경을 시키는 것이니요..
우리 나라도 합쳐서 지명이름을 만드는 경우가 더러 있지요?

안시와 무차가 있는 지역이 발해라는 것도 알게 되고요.
그곳이 요동지역이라는 것도 알게 되고요.

대요수가 나온다고 하니까 이곳은 .....(4)회글에서..관계된 것을 다시 옮기면요..

신당서 고구려 열전
新校本新唐書/列傳/卷二百二十 列傳第一百四十五 東夷/高麗 - 6185 -
③高麗,本扶餘別種也.地東跨海距新羅,南亦跨海距百濟,西北度遼水與營州接,北靺鞨.其君居平壤城,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去京師五千里而贏,隨山屈繚為郛,南涯浿水,王築宮其左.又有國內城、漢城,號別都.

④水有大遼、少遼:大遼出靺鞨西南山,南歷安市城;少遼出遼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與之合.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鴨頭,號鴨淥水,歷國內城西,與鹽難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而平壤在鴨淥東南,以巨艫濟人,因恃以為塹.

->고구려는,본래 부여의 별종이다.땅은 동쪽으로 해를 넘어서 신라에 이르고,남쪽 역시 해를 넘어 백제에 다다른다. 서북쪽은 요수를 넘어 영주와 접하고,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임금은 평양성에 사는데,장안성이라고도 부른다. 한나라때 낙랑군이었다.
거리는 경사(당나라 장안성)로 부터 5천리가 넘느다. 산을 따라 굽고 둘러서 외성이 되고, 남쪽끝은 패수가 있으며, 왕은 그 왼쪽에 궁을 쌓았다. 또 국내성, 한성이 있는 별도라고
불렀다.

물은 대요수, 소요수가 있다. 대요수 : 말갈 서남산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안시성을 지난다. 소요수 : 요산 서쪽에서 나와서,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양수가 있으니 변방의 밖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가서 합해진다. 마자수가 있어 말갈의 백산에서 나오니, 물색이 오리 머리와 같아서, 압록수라고 불리며, 국내성 서쪽을 지나, 서쪽으로 가서 염난수와 합해지고, 또 서남쪽으로 흘서서 안시성에 이르러 해에 들어간다. 평양성은 압록강의 동남쪽에 있어, 거대한 배로 사람을 건너니, 그것으로 인하여 해자가 되었다.

===>
(4)회 ④번글을 보세요..수는 대요수와 소요수가 있다고 하고 안시성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뭡니까? 진나라 요동군이라는 지역은 본래 고구려의 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그 지역은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산서성과 하북성 지역이라는 것을 알수 있으니
결과적으로 한나라 낙랑군이라는 것도 그 지역이고 안시성도 그 지역이고 요동도 그 지역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요동이 현재 요하의 동쪽으로 배웠지만 실제는 그것이 아니라
산서성과 하북성 지역이 요동지역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배운 것은..^^


3. chain reaction.

앞에 사기 열국분야에 나온 연나라 지명들을 더 알아 봐야 하는데
너무 길어져서 이번 회는 마쳐야 할듯 합니다.^^

다음 회에 더 알아보고 발석지간에 나오는 갈석산도 알아봐야 할 듯합니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4)회 ③번글 일부를 다시 옮기면...

新校本新唐書/列傳/卷二百二十 列傳第一百四十五 東夷/高麗 - 6185 -
③高麗,本扶餘別種也.地東跨海距新羅,南亦跨海距百濟,西北度遼水與營州接,北靺鞨
고구려는,본래 부여의 별종이다.땅은 동쪽으로 해를 넘어서 신라에 이르고,남쪽 역시 해를 넘어 백제에 다다른다. 서북쪽은 요수를 넘어 영주와 접하고,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
여기 고구려의 서북쪽에 요수를 넘어서 영주와 접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고구려는 영주의 동쪽과 동남쪽의 그것도 요수와 접한 것이 아닌 요수 건너편의 땅까지
영토로 하고 있었던 것을 알수 있읍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세뇌되어 배우기로는 요수의 서쪽은 요서요, 요수의 동쪽은 요동이라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도록 배웠는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보면 그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도록 주입을 하고는 자신들은 비상식적으로 행동
합니다. ..말하자면 내가 바담 풍해도 너는 바람 풍해라..하는 방식의 기만술인데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23년
...........(전략)...............
唯於遼水西 拔我武邏 置遼東郡及通定鎭而已
->이 정벌에서 [수나라는] 다만 요수 서쪽에서 우리 무려라(武邏)를 함락시키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두었을 뿐이다.
=> 여기도 요수의 서쪽에 요동군을 두었다고 하고 있읍니다.
상식적으로 볼때 요수의 서쪽은 요서이고 동쪽은 요동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데
헷갈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듯 ...요수의 서(西)쪽에 요동(東)군을 두더군요.^^

앞에서 대군의 위치가 변하였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
밑에 지도를 보십시오..대군의 위치가 변경이 되는 것을 볼수 있지요?
그러니 사기에 열국분야에 기록된 연나라의 지명들도 계속 이동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동쪽과 동북쪽.북쪽으로 계속 지명을 이동한 것을 마치 처음부터 고정적이었던
것처럼 지도를 만들고 지명을 기록하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몽땅 속았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것을 연쇄반응으로 생각을 하니까..
한국사와 지나사만을 우리가 속아온 것이 아니라 세계사 자체가 왜곡과 조작으로
점철되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관련되는 것들이 연관되어 나타나는 것이 세계사이니까요.

나아가 그러한 역사와 역사관점에서 살아온 이 지구의 인간의 삶이 연쇄반응으로
허위로 판명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쓸쓸한 마음이 드네요..^^
실상 모두 허위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실제로 증명을 하게 되니...^^


하여간 찾으면 찾을수록 더 많고 복잡한 사실들이 나오니까 점점 더 확대만
됩니다..누군지 역사조작과 왜곡의 범죄를 너무 많이 저질렀네요...
철저하게 압수수색하고 관련되는 것들은 남김없이 출국금지를 시켜서
음모의 진실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쨋든 다음 회에 또 허위를 밝혀서 이 쓸쓸한 심정을 만끽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