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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펌:이대진]귀주대첩과 관련된 영토회복의 정당성 근거.(7)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6. 12.
(6)회에서 902년에 요태조가 공격한 하동과 대의 북쪽(代北) 아래 구군(九郡)을 공격한
것을 살펴보았고 이번회는 노룡군을 보기로 하였읍니다.

헌대 (6)회에서 903년의 여직을 정벌하고하동(河東)의 회원등군(懷遠等軍),계의북쪽(薊北)을
공격한 것을 먼저 보고 가야 할 듯합니다.
노룡군은 905년이후에 공격을 하니...^^



1.903년 여직공격의 의문점

(5)회 2번 타이틀에 언급된 요 태조의 공략지역인 용화주, 노룡군, 하동군, 운주 ,계북,산북 등지..에서 용화주를 살펴 보았고 이번회는 903년의 공략지를 보아야 하므로...

요사 본기 서언에 나오는 대로 본 요 태조의 공략루트는...


(5)회 ②번에 올렸던 것을 다시 올려드리면...
新校本遼史/本紀/卷一 本紀第一 太祖上/序言 - 2 -
明年春,伐女直,下之,獲其戶三百.九月,復攻下河東懷遠等軍.冬十月,引軍略至薊北,俘獲以還.先是德祖俘奚七千戶,徙饒樂之清河,至是創為奚迭剌部,分十三縣.遂拜太祖于越、總知軍國事
-> 명년 봄, 여직을 정벌하고 3백호를 사로잡았다. 9월 다시 하동 회원 등지의 군을
공략하였다. 겨울 10월에 군을 이끌고 계의 북쪽을 공략하여 포로를 잡아 돌아왔다.
앞서 덕조가 사로잡은 해의 포로 7천호를 요악의 청하로 옮겨서 해질랄부를 만들고 13개의
현으로 나누었다.마침내 태조는 우월, 총지군국사(오늘날의 국무총리 쯤 되는 관직)에 배수되었다.

그런데 봄에 정벌한 여직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네요.
다만 요사 야율갈로 열전에 실마리가 나오는데..기록이라는 것이 영....^^

요사 열전 야율갈로
新校本遼史/列傳/卷七十三 列傳第三/耶律曷魯 - 1220 -
①及太祖為迭剌部夷離菫,討奚部,其長朮里偪險而壘,攻莫能下,命曷魯持一笴往諭之.既入,為所執.乃說奚曰:「契丹與奚言語相通,實一國也.我夷離菫於 奚豈有輘轢之心哉?漢人殺我祖奚首,夷離菫怨次骨,日夜思報漢人.顧力單弱,使我求援於奚,傳矢以示信耳.夷離菫受命於天,撫下以德,故能有此也.今奚 殺我,違天背德,不祥莫大焉.且兵連禍結,當自此始,豈爾國之利乎!」朮里感其言,乃降.

-> 대략 해석합니다.^^
태조가 질랄부이리근이 되어 해부를 토벌하게 되었는데, 공격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갈로에게 화살대 하나를 가지고 가서 타이르게 했는데 해부족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거란과 해는 언어가 서로 통하니 실제는 한나라와 같다. ..~~~요태조가 어찌 너희들
해 부족을 죽이려 하겠느냐? 한나라인들이 우리 조상과 너희 해부족의 추장을 죽여서
한나라인들에게 복수를 하려고 할뿐이다.~~~요태조는 천명을 받았으니 너희가
우리에게 반항하면 천명을 어기는 것이고 너희 나라에 이익도 없다.」하니 출리가 그 말에
감동하여 항복했다.

==>요태조가 질랄부이리근이 되어 공략한 것으로 본기 서언에 기록되어 있는 여직공격, 하동과 대북, 그리고 야율갈로 열전의 해와 일치한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알 수가 없네요..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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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②번 신당서 거란 열전에는 거란의 위치를 알려주는 내용으로..일부만 보면..
契丹,本東胡種.....地直京師東北五千里而贏,東距高麗,西奚,南營州,北靺鞨、室韋,
거란은 본래 동호의 일종이다......땅은 경사(당나라 서울 장안성)로 부터 동북쪽으로 5천리가 넘는다 하는데 동쪽으로는 고구려에 이르며,서쪽으로는 해에 이르고,남쪽으로는 영주에 이르며,북쪽으로는 말갈과 실위에 이른다.

903년에 여직을 공격한 이야기가 왜 있는지 알 수가 없읍니다.
여직은 당시에 있지도 않는 부족이름이니 말입니다.


2. 요사 903년, 요태조가 여직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은 사실일까?

기록이 의문이 드는 것은 한둘이 아니지만..아마도 그 기록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여직을 찾아 보면...
금사 본기 세기 서언
*新校本金史/本紀/卷一 本紀第一/世紀/序言 - 1 -
②黑水靺鞨居肅慎地,東瀕海,南接高麗,亦附于高麗.嘗以兵十五萬助高麗拒唐太宗,敗于安市.開元中,來朝,置黑水府,以部長為都督、刺史,置長史監 之.賜都督姓李氏,名獻誠,領黑水經略使.其後渤海盛強,黑水役屬之,朝貢遂絕.五代時,契丹盡取渤- 2 -海地,而黑水靺鞨附屬于契丹.其在南者籍契丹,號熟女直;其在北者不在契丹籍,號生女直.生女直地有混同江、長白山,混同江亦號黑龍江,所謂「白山、黑 水」是也.
-> 대략 해석..
흑수말갈은 숙신땅에 살았는데 동쪽으로는 해에 다다르고(?),남쪽으로는 고려에 접하였는데
역시 고려에 부속되어 있었다. 일찌기 당태종과 대결하는 고려를 15만의 병력으로 도왔으나
안시에서 패하였다. 개원 중에 입조하여 흑수부를 두었고 그 부의 장을 도독, 자사로 삼았으며, 장사감지를 두었다. 도독에게는 이씨 성을 주었고 이름은 성으로 하여 흑수경략사가
되었다. 그후 발해가 강성해지자 흑수는 발해에 속하여 조공도 끊겼다. 5대 시기에는 거란이 발해땅을 취하자 흑수말갈은 거란에 부속되었다. 그 남쪽에 있는 것은 거란이 다스렸는데 숙여직이라고 불렀다.:그 북쪽에 있는 것은 거란이 다스리지 않았으며 생여직이라고 불렀다. 생여진 땅에는 혼동간.장백산이 있으며 혼동강은 혹은 흑룡강이라고 불렀는데 소위
「백산、흑수」가 이것이다.

==> 흑수말갈이 곧 여직이라는 것을 알수 있는데 금나라는 요나라의 후대에 세워진 나라이고
또 금나라는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다가 또 발해에 복속되어 있었기에 그런 점을 고려하여
기록에 신경을 썻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이상한 것은 여직은 거란이 발해를 공격한 후에 흑수말갈이 거란에 복속되고, 그것도 남쪽여직만 거란에 복속되어 있다고 하여 숙여직이라고 했다는데, 요사 태조본기 서언에 기록된 903년의 여직정벌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기록했더라도 흑수말갈이나 말갈 이렇게 기록해야 하지요.

흑수말갈을 알아보면..
신당서 열전 흑수말갈
*新校本新唐書/列傳/卷二百一十九 列傳第一百四十四 北狄/黑水靺鞨 - 6177 -
③黑水靺鞨居肅慎地,亦曰挹婁,元魏時曰勿吉.直京師東北六千里,東瀕海,西屬突厥,南高麗,北室韋.離為數十部,酋各自治.其著者曰粟末部,居最南,抵 太白山,亦曰徒太山,與高麗接,依粟末水以居,水源於山西,北注它漏河;稍東北曰汨咄部;又次曰安居骨部;益東曰拂部;居骨之西北曰黑水部;粟末之東曰 白山部.部間遠者三四百里,近- 6178 -二百里.
->대략 보면요..
흑수말갈은 숙신땅에 살았는데 또 읍루라 불렀으며 원위시에는 물길이라 불렀다. 경사로 부터 동북 6천리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해에 이르고, 서쪽은 돌궐과 남쪽은 고려와 연이어 있고 북쪽은 실위다.수십부로 떨어져 추장들이 각자 자치한다.그 강한 것은 속말부라고 부르는데 가장 남쪽에 있는데, 태백산 혹은 도태산이라는 산에 다다르며,남쪽으로 고려와 접하고 있고 속말수에 의지하여 사는데 그 수원은 북주 타루하로 산서에서 나온다.;좀 작은 것은 동북쪽에 있는데 골돌부라고 부르고 ;그 다음은 안거골부라고 부르고 ;동쪽으로 더가 불부가 있다;거골부의 서북에 있는 것은 흑수부라 부르고;속말부의 동쪽에 있는 것은 백산부라 부른다.부족간에 멀리있는 것은 삼사백리이고 ,가까운 것은 이백리다.

==> 여기도 이상하지요
신당서는 1060년 송나라때 만든 것이니까..원나라때 만든 금사와는 다른 가치관으로
만들었겠지요...앞선 다른 글들에서 인용된 신당서에서 거란과 고구려는 경사 5천리라고
되어 있었는데 여기 흑수말갈은 동북으로 1천리를 더 나갔네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신당서에서는 거란이나 말갈, 흑수말갈이나 발해나 모두 북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들이 숙신의 땅에 살고 있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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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숙신은 진서에 보면 다릅니다. 북적이 아니라 동이족으로 분류됩니다.

*新校本晉書/列傳/卷九十七 列傳第六十七/四夷/東夷/肅慎氏 - 2534 -
    肅慎氏
④肅慎氏一名挹婁,在不咸山北,去夫餘可六十日行.東濱大海,西接寇漫汗國,北極弱水.
->숙신씨는 일면 읍루이고 불함산 북쪽에 산다,거리는 부여에서 60일거리다. 동쪽으로 대해에 다다르며, 서쪽은 구만한국과 접하고 북쪽으로 약수를 한계로 한다.

=> 이러니 숙신의 땅은 불함산이고 부여에서 60일거리이고 동쪽으로 대해에 이르는데.
신당서에서는 숙신의 땅에 흑수말갈이 살며 그것이 경사로 부터 6천리거리이니 이 지역은
경사로 부터 5천리 거리에 있는 거란과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 신당서의 기록에 의하면
거란과 고구려가 있었던 산서성이나 하북성에서 1천리내외에 있는 것이 되지요.

그런데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바로는 거기는 고구려의 땅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대로 고구려가 말갈,흑수말갈의 남쪽에 있다고 하게 되면,
말갈은 학교에서 배운 고구려 영토의 북쪽에 있게 되니까 러시아나 북만주쪽으로 말갈이 이동하게 되어 동북쪽으로 1만리 이상의 차이가 나게 됩니다.
또 고구려의 위치도 경사에서 5천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1만리 이상 동북쪽 밖으로 나가게 되고요..거란도 그쪽으로 이동을 하게 되죠..

이렇게 되면 경사 5천리에 있는 거란이 1만리 이상에 있는 말갈,여직을 공격한 것이고 그것은 무려 5천리 이상을 행군하여 발해의 속민인 여직 3백호를 사로잡아 왔다는 말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무사히 발해의 공격도 받지 않고 5천리를 행군하여 돌아와 당나라 하동지방을 903년에 공격하였다는 말이 되고요..

요태조께서는 참으로 바쁘셨겠군요..^^
가까운 산서지방을 공격하면 숱하게 많은 포로들을 잡아올수 있었는데 겨우 3백호를 사로
잡으려 5천리를 행군하였다가 돌아왔다니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위에 인용한 (5)회 ②번에서 여직을 공격한 후에 요태조가 계의 북쪽을
공격하여 포로를 잡아서는 앞서서 덕조가 잡은 해부족과 7천호와 합쳐 요악의 청하로 이주를 시켜서 해질랄부를 만들고는 거란의 한 부족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태조 본기 서언기록에서 903년에 여직을 공격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게 됩니다. 거란이 발해를 공격한 후에나 흑수말갈,여직은 거란에 복속되었으니
요태조 본기 서언에 여직공격은 없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더구나 요태조의 선조인 덕조도 한번 잡으면 7천호,,요태조는 무려 9만 5천명의 포로까지
잡은 일이 있었는데, 포부가 큰 요태조가 겨우 3백호를 잡으러 군사를 움직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903년의 여직정벌은 없었던 일을 그냥 끼워 둔 것입니다..발해공격의 정당성이라든가
뭐 그런 류의 이유로 그냥 없는 일을 만든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3.도대체 너는 내가 누구인줄 알고나 있는 것이냐?^^

앞에서 진서에는 숙신씨가 동이족인데 신당서에서는 북적으로 기록되어 있었지요..
이런 것은 누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고구려가 동이인데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북적으로 기록하고 있고, 말갈도
고구려의 일족인데 북적으로 만들고 그 말갈이 숙신씨의 땅에 사는데 숙신씨는
동이족이고..
*新校本舊唐書/列傳/卷一百九十九下 列傳第一百四十九下/北狄/渤海靺鞨 - 5360 -
渤海靺鞨大祚榮者,本高麗別種也.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新校本新唐書/列傳/卷二百一十九 列傳第一百四十四 北狄/渤海 - 6179 -
  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姓大氏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부민이며 성은 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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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에 보면 흥미있는 기록도 있읍니다.
구당서에서 발해말갈이라고 하여 북적에 포함된 발해의 기록인데..

*新校本舊唐書/列傳/卷一百九十九下 列傳第一百四十九下/北狄/渤海靺鞨 - 5360 -
⑤祚榮驍勇善用兵,靺鞨之眾及高麗餘燼,稍稍歸之.聖曆中,自立為振國王,遣使通于突厥.其地在營州之東二千里,南與新羅相接.越靺鞨東北至黑水靺鞨[二三],地方二千里,編戶十餘萬,勝兵數萬人.風俗與高麗及契丹同(풍속여고려급계단동),
二三]南與新羅相接越靺鞨東北至黑水靺鞨 冊府卷九五九作「南與新羅相接,西接越靺鞨,東北至黑水靺鞨.」
한문을 모르니 한글로 되어 있는 부분만 봅니다,^^^
발해의 풍속이 고려 및 거란과 같았다고 되어 있지 않읍니까?
이러면 같은 족속이라는 말이죠..
고구려.거란,발해가 모두 같은 풍습을 지녔으니 같은 족속이죠..
위 기록에 야율갈로가 해와 거란이 말이 같아서 실제 한나라다 라고 하여
해가 항복하였다고 하지 않았읍니까...

그런데 고구려는 동이, 거란과 발해는 북적으로 편성되어 있지요..
거란은 앞에서 봤지만 동호(東胡)의 일부입니다.
동쪽 오랑캐..동호..그리고는 북쪽 오랑캐 북적이라고 편성하였지요..
이런 것이 한둘이 아니고 너무 많아서 정리가 안 될 지경입니다.^^

요태조가 공격한 해(奚)도...
*新校本隋書/列傳/卷八十四 列傳第四十九/北狄/奚 - 1880 -
    奚- 1881 -
  奚本曰庫莫奚,東部胡之種也
해는 본래 고막해다 동부 오랑캐의 족속이다.

이리 되어 있는데 북적에 편입해 두었지요..

이 해에 관련하여 기록들이 여럿 있는데..아주 복잡합니다.
*新校本舊唐書/列傳/卷一百九十九下 列傳第一百四十九下/北狄/奚國 - 5354 -
  奚國,蓋匈奴之別種也,所居亦鮮卑故地,即東胡之界也
해국은 모두 흉노의 별종이다. 사는 것이 역시 선비의 옛땅인데 그곳은 동호의 경계이다.

*新校本新唐書/列傳/卷二百一十九 列傳第一百四十四 北狄/奚- 6173 -
  奚亦東胡種,為匈奴所破,保烏丸山.
해 또한 동호의 족속이다, 흉노에게 패하여 오환산에 보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어서 해가 동호면서 선비면서 흉노의 족속이 됩니다.
그러면 거란이 동호의 일족이고 거란이 선비의 일족이고 거란이 흉노의 일족이 되고
그 동호의 일족인 해도 거란과 동류이고 ...그 거란과 같은 풍습을 지닌 것이 고구려
이고 고구려가 발해와 같은 풍습이고..
이러면 해=거란=선비=흉노=동호=발해=고구려가 모두 같은 족속이라는 말이 되지요.

그러니 모두 같은 동이로 되어 있어야 하는데 사서에 따라 달리 기록되어 있네요.^^
아마도 민족을 분리하여 쪼갤려고 하였던 것이나 혹은 역사를 헷갈리게 해서
왜곡을 쉽게 하려고 하였는지도 모르겠읍니다.진실을 알지 못하도록이요..^^


*너무 많은 자료가 있어서 정리가 잘 안되네요..
더구나 실수로 엄청난 시간과 힘을 들인 중요자료를 날려 먹기도 해서..ㅜㅜ...
더욱 어려워 지고 있네요..^^

다음회에는 해에 대해서 좀 더 보고난 후 계북공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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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그림 보시면 거란(요)나라가 마치 북만주, 발해영역이라고 학교에서
배운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는 파랗게 칠한
하동지역....산서성,섬서성 지역에서 요태조가 활동하고 있는 것을 사서기록에서
우리가 확인한 바입니다.
그러니까 저 지도 원판은 잘못된 것이고 제가 수정한 것이 맞는 것이라는 생각이 되네요..
교과서도 아마 저 지도와 유사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이 드는데요..
따라서 그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지도에 “틀림” 학교에서 가르쳐준 요나라의 위치가(만주쪽) 산서성,섬서성쪽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고요...고구려, 신라, 발해의 영역이 아마도 저러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북송,남송의 위치도 유사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구려가 망했는데 왜 하북성과 하남성일부 지역까지 차지하고 있는가 하면요..
영역이라는 것이 상당히 혼돈스러운 시대였으니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요..^^

이건 덤입니다.^^

송사 열전 외국 고려
新校本宋史/列傳/卷四百八十七 列傳第二百四十六/外國三/高麗/序言 - 14035 -
⑥...高麗,本曰高句驪.禹別九州,屬冀州之地,周為箕子之國,漢之玄菟郡也.在遼東,蓋扶餘之別種,以平壤城為國邑.漢、魏以來,常通職貢,亦屢為邊 寇.隋煬帝再舉兵,唐太宗親駕伐之,皆不克.高宗命李勣征之,遂拔其城,分其地為郡縣.唐末,中原多事,遂自立君長.後唐同光、天成中,其主高氏累奉職 貢.長興中,權知國事王建承高氏之位,遣使朝貢,以建為玄菟州都督,充大義軍使,封高麗國王.晉天福中,復來朝貢.開運二年,建死,子武襲位.漢乾祐末, 武死,子昭權知國事.周廣順元年,遣使朝貢,以昭為特進、檢校太保、使持節、玄菟州都督、大義軍使、高麗國王.顯德二年,又遣使來貢,加開府儀同三司、檢 校太尉,又加太師.

--> 상당히 재미있는 기록입니다. 왜냐하면 백제와 신라가 여러개 였듯이 고려도 여러개
였을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기 때문이죠...이와 관련하여서는 후에 요나라의 영토로
요나라 성종이 공략한 삼한(三韓)....삼한이 그때까지도 지나 대륙에 있었다는 말이죠?..아닙니까?..^^.........의 문제를 다루는데..... (3)회 글 ⑤번 기록 관련...
그때 개주(開州)와 함께 또 알아볼 기회가 올것입니다.

어쨌든 송사 열전을 대략 번역하면..

고려는 본래 고구려라고 불렀다. 우가 9주를 나누었을때는 기주땅에 속하였고,주나라 때는 기자의 나라였고, 한나라때는 현토군이었다. 요동에 있으며 모두 부여의 별종으로 평성성을 국도호 하였다. 한나라와 위나라 이래로 조공도 하고 공격도 하여 왔다. 수 양제가 두번이거 거병하였고,당태종도 친정하였으나 모두 이기지 못하였다. 고종이 이적에게 명하여 정벌하여 마침내 성을 빼앗아 그 땅을 나눠 군현을 두었다 당나라 말기에 중원이 사고가 많아지자 마침내 스스로 군장을 세웠다. 후당 동광,천성 중에 그 주 고씨가 조공을 했으나 장흥중에 권지국사 왕건이 고씨의 자리를 승계하여 조공해서 건을 현토주 도독으로 하고,대의군사로 충하고 ,고려국왕으로 봉하였다. 진나라 천복중에 다시 조공오고 개운 2년에 건이 죽자 아들 무가 자리를 세습하였고 한나라 건우 말에 무가 죽자 아들 소가 권지국사가 되어 주나라 광순 원년에 조공을 와서 소를 특진하여 검교태보, 사지절,현토주도독 대의군사 고려국왕이라 하였다.
현덕 2년에 또 사신을 보내 조공을 와서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를 가하고 또 대사를 가하였다.

===>
여기 참 특이하죠..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와 견훤을 이기고 신라 경순왕의 귀부를 받아
고려를 건국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망한 이후에 당나라가 혼란해지자 다시 고씨가
고구려를 재건국하였다가, 5대 시대로 오면서 고씨가 왕건에게 왕위를 뺏기고 또 역사가
진행이 되는 것으로 나오지요?

이것이 아마도 (1)회 ⑧번과 ⑨번 글에서 요사에는 고려의 현종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과 고려사 절요에서는 그후 현종이 10년이나 더 고려왕으로 생존하였다는
기록의 차이를 알려주는 실마리라고 생각됩니다.

고려는 하나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에 관한 것으로 ,,고려가 하나가 아니었다는..고려사에서 찾은 기록은 제가 이 주제의 글
마지막에 공개하려고 합니다.

그때까지 기다려 주시기를...^^^

금년을 우리의 역사, 우리의 영토를 회복하여 민족사의 근본을 바로잡는
민족의 올바른..가짜 아닌 진짜... 정신회복의 원년으로 삼고 싶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