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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패수(浿水)의 종점(終點)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8.

한국의 고대사에서 패수(浿水)란 연(燕)나라의 침략 이후에 생겨난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을 말합니다. 처음에 연 나라와 선을 그었던 국경선은 만번한(滿番汗)이었지요. 만번한은 번한현(개주남쪽--복주북쪽)의 서쪽에 있던 소요수의 경로에 있던 수류지(水留池)였고, 패수는 고니하(개주)에서 서북쪽으로 역류하여 염난수와 만나고 다시 대능하와 만나 서남쪽으로 흘러서 난하 입해구, 즉 열구에서 습여수와 용선수가 같이 만나 바다로 들어갔던 물입니다. 이 열구가 있던곳을 신한(新漢)의 왕망(王莽)이 낙선정(樂鮮亭=창려남쪽)이라고 부른것입니다.이곳은 낙랑군의 증지현 서쪽이기도 합니다. 최초 연(燕)나라가 세웠던 만번한과 열구의 거리는 동서로 약 500여리 됩니다. 한 나라는 이 500리의 영토를 지키기가 어렵다고 포기하고 국경선을 열구(낙정)방면으로 흘러가는 패수로 옮긴것이지요. 비록 기록은 밝혀진게 없지만 조선의 강력한 반격이 있었던것으로 추측이 되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시작한 패수의 경계가 중요한것은 위만조선 이후 한 나라가 설치한 한사군(漢四郡)의 강역은 요서지역을 포함한 중국 내륙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고 따라서 중 삼한이나 삼국의 초기 건국지도 요서지방과 중국내륙지방으로 설정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일부 학계의 주장처럼 현재의 압록강이나 평양의 대동강이 패수가 될 수 없고, 북경지방을 흐르던 습여수=영정하나 한때 요수로 부르던 난하가 패수가 될 수 없다는 얘기도 됩니다. 이렇게 중요한 패수의 위치를 확인하는 길은 요동만 위치에 있었던 양평땅과 갈석산이 바다로 윤몰되었다는 송나라 소 식(蘇軾=동파)의 춘추열국도설을 지지한 문정창선생의 학설이 증명이 되어야 하는 조건이 따릅니다. 필자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많은 지도 자료와 근거가 될 수 있는 기록들을 동원하였고,갈석산과 요동만 윤몰에 관한 사료의 원문 번역문은 <<만주원류고>>의 역자이신  장진근선생의 옥고를 빌려왔습니다.

 


지도:춘추열국도설 삽입도 (문정창--<고조선사연구124쪽>) 1.양평=윤몰지  2.발해 역하.구하 윤몰지  3.여순=융기지.4=사문도=일부윤몰지  6.산동반도 일부 융기지



윤몰지역의 정밀분석도: 이학박사 정석근 작성   


<<한서>><지리지>권28 하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屬幽州。【應劭曰:「故朝鮮國也。」師古曰:「樂音洛。浪音狼。」】戸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 四十八。有雲障[扁章旁右郊]。縣二十五:朝鮮【應劭曰:「武王封箕子於朝鮮。」】[言○]邯。【孟康曰:「[言○]音男。」師古曰:「[言○]音乃甘 反。邯音酣。」】[浿]水、水西至増地入海。莽曰樂鮮亭。【師古曰:「[浿]音普大反。】含資、帶水西至帶方入海。黏[虫單]、【服虔曰:「[蝉]音 提。」】遂成,増地、莽曰増土,帶方,駟望,海冥、莽曰海桓。列口,長岑,屯有,昭明、南部都尉治。鏤方,提奚,渾彌【師古曰:「渾音下毘反。」】,呑 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東[目施]【應劭曰:「音移。」】,不而、東部都尉治。蠶台【師古曰:「台音胎。」】,華麗,邪頭昧 【孟康曰:「昧音妹。」】,前莫,夫租。

신한(新漢)의 왕망(王莽)은 패수(浿水)가 바다로 들어가는 종점인 열구현을 낙선정(樂鮮亭)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곽박(郭璞)은 산해경에서 열구(列口)를 요동에 있는 열수(列水)라고 하였습니다.또 <<사기>><조선열전>의 주석으로 실린<사기 색은>에는 소림(蘇林)의 말을 인용하여 열구(洌口)는 현명으로서 루선장군이 발해를 건너 가장 먼저 도착했던 곳이라고 하였는데 열구는 원래 열수의 하구였으나 후에 낙랑군의 속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산해경 해내북경에는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열양이란 열수를 말한다고 합니다.(곽박의 주석) 따라서 열수는 대요수와 같은 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사기>><조선열전>에 실린 <<사기집해>>는 장안의 말을 인용하여 조선에는 습수.열수.산수가 있었는데 이 세강이 합쳐서 열수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낙랑의 조선이란 이름도 여기에서 취했을것이라고 하였습니다.그러나 수경주에서 볼 수 있드시 난하의 옛 이름인 유수(濡水)의 지류에 무열수(武列水)가 있었고,습여수(濕餘水)가 있었고,또 용선수(龍鮮水)가 있었기에 이 물들의 이름을 생략하여 열수.습수.산수라고 불렀을것이라고 한 장안(張晏)의 주석은 동의하기엔 애매한 점이 있습니다. 왜냐면 만약 유수의 지류에 그러한 강들이 있었다면 열구의 위치를 표시하는데 구태어 지류의 명칭까지는 필요가 없는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냥 최후에 바다로 입해하는 유수(濡水)라는 물 이름만 기록하면 될것을 왜 하필 지류의 물 이름들 까지 부쳐야 한다는것입니까. 때문에 다른 물 이름을 등장시킨 이유는 열구의 위치를 확실하게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본다는것이지요. 따라서 방향이 각각 다른 물길이 같은 한곳으로 모이는 특별한 위치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아야 옳다는 생각입니다.그리고 앞에서 곽박이 말했드시 열수는 요동에 있다고 하였고, <<성경강역고>>에서는 용선수(龍鮮水)의 경로를 영원주(寧遠州)를 통하여 동으로 봉대수(封大水)로 봉대수는 다시 완허수(緩虛水)를 거쳐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이 물은 여아하(女兒河)나 소능하(ㅅ小陵河)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물들을 상류로 거슬러 오르면 백랑수와 만나게 되고, 그 백랑수는 난하로 연결되는 청룡하와도 연결이 됩니다.


* 浿 水 , 水西 至 增 地 入 海 。 莽 曰 樂 鮮 亭

 
<<한서>><지리지>의 주석
*列口 郭璞注山海經曰:「列,水名。列水在遼東。」
**朝鮮有濕水·洌水·汕水, 三水合爲洌水
조선에는 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가 있는데, 세 물이 합하여 열수가 된다.

***海陽 今寧遠州前屯衞東 原注龍鮮水東入封大水封大水緩虛水皆南入海有鹽官<<성경강역고>><전한 요서군>



지도:홍대용의 연행도(규장각)

이 지도의 그림은 초기 패수와 국경선을 구분하기 위해서 대략적으로 표시한 계통도입니다. 일반적으로 浿水와 沛수를 같은 물로 인식하고 있지만 물의 흐르는 방향을 검토하면 다르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연나라와 秦나라는 개마대산(단단대령=천산산맥)의 서쪽에서 동쪽으로는 만번한을 경계선으로 하고 개마대산을 새외의 경계로 삼고 남쪽으로는 복주하를 경계로 하였습니다. 만번한이 동서를 가르는 경계선이라면 沛水는 남북을 가르는 경계선입니다. 기원전 75년에 개주의 서쪽에 있던 현도군이 졸본부여의 부흥군의 반격으로 무순으로 쫓겨가면서 국경은 북쪽으로 확장이되고 이때 현도군에 흡수되었던 임둔군을 낙랑군으로 통합하게 됩니다. 낙랑군은 개마대산의 서쪽인 개주에 동부도위를 두었고,임둔군 위치에는 남부도위를 두어 다스리고  단단대령의 동쪽으로는 동옥저와 남옥저,낙랑국.동예등을 통합하여 영동7현을 두었다가 거수들을  후로 임명하여 통치권을 위임하고 물러서게 되지요.


고구려 백제가 패망한 이후 개주하(蓋州河)에 설정된 패수국경선은 당나라가 신라의 영유권을 인정하여 개주 이남에서 한반도 전역의 영유권을 승인하였고, 고구려와 백제가 패망한 이후 건국된 발해와 신라가 대치하며 국경을 이루기도하였으며 거란과 신라, 여진과 고려,원,금과 고려, 명.청과 고려.조선등의 국경이 되기도 하였습니다.이 개주하 패수의 물은 평양 대동강에서 설명 할 수 있는 물이 아니며 발해바다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열구에서 세물이 합수되어 다시 사문도의 서남쪽인 등주수도(왕험성의 험독)를 거쳐 황해(동해)로 들어갔다는 지도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로로서 왕험성은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기록도 볼 수 있습니다. 혹자들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한반도내에 있는 고적들은 어떻게 된것인가? 그 진실은 사료들과 매장유물들을 하나하나 비교하여 분석하여보면 밝혀질것입니다. 이 패수국경설은약 2100년전의 얘기입니다.



<패수에 대한 기타 사료들>

 

 * 桓州 髙麗 中都城, 故縣三, 桓都 神鄉 浿水, 皆廢. 髙麗王 於此 剏立 宫闕 <<요사>><지리지>

** 沙河出東南山西北流, 徑蓋州入於海. 有蒲河;淸河;浿水, 亦曰泥河, 又曰蓒芋濼(한우락), 水多蓒芋之草.   <<遼史>>卷三十八 志第八地理志二 東京道 東京遼陽府

*** 古泥河. 新唐書渤海大氐本粟末靺鞨, 附高麗國. 高麗滅, 保東牟. 直營州東二千里, 以泥河爲境. 萬歲通天中契丹反, 東渡遼水保大白山之東, 北阻奧婁河, 自固. 按元一統志引契丹地理志云, 浿水即古泥河也. 自東逆流數百里, 至遼陽瀦蓄不流. 有蓒芋草生於泊中故名蓒芋泊.

**** 明一統志從之. 又以朝鮮大通江爲泪(浿)水. 古泥河在海城縣西南六十五里, 益(蓋?)平縣北五十里. 源出聖水山流至述眞山散漫爲遼時之蓒芋泊, 今爲蓒芋濼. 水多蓒芋之草, 與朝鮮境內之浿江不同    

 

패수는 고니하(古泥河)에서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만나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낙랑군 증지현의 서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이곳을 왕망은 낙선정(樂善亭)이라고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낙선정은 난하가 입해하는 하구의 동쪽에 樂亭이란 지명으로 있습니다. 많은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지요. 이 물을 다시 역방향으로 추적하면 입해구인 열구에서 북쪽으로 대능하(백랑수)에 이르고, 대능하에서 다시 동쪽으로 염난수(대요수?)에 이르고, 동남으로 고니하(개주)에 이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 국 개주하에서 출발한 패수(열수)는 요동만을 서북쪽으로 돌아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개주의 반대편인 서쪽 낙선정(열구=증지현 서쪽)에서 용선수(龍鮮水=鮮水=濡水=난하)와 습여수(濕餘水=濕水=천진에서 발해만이 생기기 이전에 동북방향으로 흘렀음)가 만나 洌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汕字와 鮮字가 왜 다른가를 찾아보면 같은 글자라는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각각 다른방향에서 흐르는 물이 같이 만나는 곳이 열구이고 그곳이 낙선정이며, 당시 패수의 종점이었지요.

이러한 패수가 흐르던 요동만에 있었던 증지현은 바닷속으로 살아졌습니다. 낙랑군 속현으로 있던 4~5개의 현이 함께 사라진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중대한 사실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는것일까요?열구근처에 있었던 갈석산도 같이 사라졌는데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도 인정치 않으려는 불순한 세력들이 많습니다. 그러한 결과 만리장성의 동단이 요동반도의 단동까지 뻗어오고 있지요. 알량하신 전문학자님들의 박사학위 논문들이 무슨 주장을 하였기에 산해관에서 물속으로 곤두박질하였던 만리장성이 다시 살아나 2천리나 더 길어졌을까요.

이 삼수(습수,산수.열수)의 근거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판한<<중국정사조선전>>역주일(譯註一)91~93쪽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음.

위성사진으로 본 산해관 주변의 지도입니다. 산해관에 왜 만리장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했는지를 확인 할수있는 지형입니다. 열구와 낙정의 오른쪽 단애를 보면 직선으로 무너져 나간 흔적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지도자료:거란지리지도 열구지역에 있던  갈석산 윤몰도


지도자료:대청광여도(청나라본) 제공:향고도   습여수(영정하)가 동북류하여 열수와 용선수가 합류하는 위치


다음글은 발해와 요동만,갈석산등의 윤몰사료입니다. <<만주원류고>>의 역자이신 장진근님의 글입니다. 구혁지의 원문과 지도자료등은 필자의 제공입니다.

 


한서(漢書) · 구혁지(溝洫志)》와 대사공(大司空) 연(掾) 왕횡(王橫)

 

   《한서(漢書) · 구혁지(溝洫志)》에도 왕횡(王橫)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왕횡은 하수를 관리하는 주무부처인 대사공(大司空)의 실무책임자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원래 이 글을 쓴 작자는 왕횡이라는 이름이 꽤나 이름있는 듯 하는데 《명인대사전(名人大詞典)》에도 올려 있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관리자가 가지고 있던 《후한서사전(後漢書辭典)》에는 왕횡(王橫)이란 사람이 표제어로 올라 있는데 생몰연대는 기재되어 있지 않고, 그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서한의 학자이다.  횡(橫)은 어떤 책에서는 황(璜)으로도 썼다. 자는 평중(平仲)이요, 낭야(琅邪)(치소는 산동 제성)인이다. 동래의 비직(費直)으로부터 《주역(周易)》을 배우고, 비지의 학문을 전하였으며, 또 고문《상서(尙書)》에 주해를 하였다."라고 풀이하였다.(장순휘 주편, 《후한서사전(後漢書辭典)》, 산동교육출판사, 1994년, 42쪽 참조)

 

   또한 관리자가 소장하고 있는 또 다른 사전의 하나인 《중국역사대사전》에 의하면 왕황(王璜)을 표제어로 싣고 있으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서한 낭야인으로, 자는 평중(平中)이다. 비직(費直)으로부터 《주역(周易)》을 배우고, 서오(徐敖)로부터 《모시(毛試)》를 배웠다. 또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주해하였다. 왕망 때 대사공(大司空) 연(掾: 속관)으로 황하의 치수정책에 관해 능수능란하게 말했다."라고 하였다.(장휘지 등 주편, 중국역사대사전(中國歷史大辭典)》 상권, 상해고적출판사, 150쪽 참조)

 

   위 두 사전의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둘다 생몰년도의 기재가 없으나 서한 때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어떤 책에서 이름을 황(璜)으로도 썼다고 하는데 후자에서 확인이 되었다. 전자의 자는 "平仲"인데 후자는 "平中"으로 되어 있어 동음이자이다. 《모시(毛試)》는 《시경(詩經)》을 이르는 다른 말이다.

 

   그는 왕망(王莽) 때 황하를 다스릴 수 있는 유능한 인재 100여 명을 불러 난상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황하의 치수정책에 관한 말을 하면서 발해(渤海) 일대 수백리가 물에 잠겼다는 내용의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한서(漢書) 권29, 지제9 《구혁지(溝洫志)》 참조)

 

御 史臨淮韓牧以為「可略於《禹貢》九河處穿之,縱不能為九,但為四五,宜有益。」大司空掾王橫言:「河入勃海,勃海地高於韓牧所欲穿處。往者天嘗連雨,東北 風,海水溢,西南出,浸數百里,九河之地已為海所漸矣。禹之行河水,本隨西山下東北去。《周譜》雲定王五,年河徙,則今所行非禹之所穿也。又秦攻魏,決河 灌其都,決處遂大,不可復補。宜卻徙完平處,更開空,使緣西山足乘高地而東北入海,乃無水災。」沛郡桓譚為司空掾,典其議,為甄豐言:「凡此數者,必有一 是。宜詳考驗,皆可豫見,計定然後舉事,費不過數億萬,亦可以事諸浮食無產業民。空居與行役,同當衣食;衣食縣官,而為之作,乃兩便,可以上繼禹功,下除 民疾。」王莽時,但崇空語,無施行者。


    贊曰:古人有言:「微禹之功,吾其魚乎!」中國川原以百數,莫著於四瀆,
而河為宗。孔子曰:「多聞而志之,知之次也。」國之利害,故備論其事。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황하가 발해로 흘러들어 가면서 발해의 지세가 한목(韓牧)이 길을 뚫고자 하는 곳보다 높았다. 옛날에 일찍이 연일 비가 내리고, 동북풍이 불어 바닷물이 범람, 서남쪽으로 솟구쳐 나오면서 수백리 땅이 잠겨 버렸고, 구하 지방도 이미 대해로 차츰 잠겨 버렸다(河入勃海, 勃海地高於韓牧所欲穿處. 往者天嘗連雨, 東北風 海水溢, 西南出, 侵水百里, 九河之地已爲海所漸矣)."라고 하였다.

 

   왕황이 주해한 고문《상서》에 들어 있다는 이야기와 《수경주(水經注)》에 나오는 바다가 육지를 삼켜 버렸다는 이야기와 등장하는 이름도 비슷하고 스토리도 대충 비슷하다.  

 

   바닷물에 의해 육지가 잠겨 버렸다는 것은 오늘날의 기상 현상으로 재난성 파도인 해일(海溢)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통상 해저 5만 미터 이내의 진원에서 리히터 지진계로 6.5 이상의 해저지진으로 해일이 발생한다고 한다.


지도: 산서.산동.호남.남경도. 1675년 제작  제작자:젠손 쎈코  소장 :암스텔담


魏氏春秋曰:「遼東郡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驪別種因名之小水貊。」

按漢質桓之閒句驪王伯固復犯遼東西安平殺帶方令掠得樂浪太守妻子即此<<후한서>><동이전>

 

분홍색 바탕부분이 요동만으로 윤몰되기전의 요동 광령땅 모습입니다. 오른쪽 하단에 보이는 소요수는 서안평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소수를 의지해서 사는 소수맥(고구려 별종)이 있고, 전 패수.비류수,졸본천,개사수,소요수등이 있습니다. 백제도 이곳 졸본부여에서 갈라져 나갔습니다. 요양에서 서남쪽 200리되는 곳에 고구려의 건국지 환주의 중도성이 있었지요. 지도 우측하단에 염전지대로 보이는 위치가 서안평 주변이가 쉽니다.

 

왼쪽으로 보이는 하단에 대요수의 열구가 있습니다. 열구의 왼쪽이 낙정(낙선정)입니다.갈석산은 이미 윤몰이 되었군요. 양평 평원이 바다로 무너져 내리고 있는 모습을 생생이 표현한 지도입니다. 고구려는 소요수 즉 비류수의 근처에서 건국하여 서쪽으로 후 패수(산해관) 경계까지(전 진번조선 강역)확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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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漢書) · 천문지(天文志)》 지진조에는 서한 원제 초원 2년(기원전 47) 해일이 발생하여 정해지구(靜海地區)를 완전히 삼켜 버려, 소위 동평서문화(東平舒文化)가 소실되었다고 한다. 바로 진 · 수(晉隋) 이전에 이곳은 여전히 발해 서남 모퉁이에 있는 택국(澤國)의 하나였다. 택국(澤國)이란 호수나 늪이 많은 지방으로 수향(水鄕)이라고도 한다. 당건녕(唐乾寧) 3년(896), 비로소 또 행정기구를 설치하기 시작하여 줄곧 송소희(宋紹熙) 년간에 이르기까지 정해(靜海)의 인구는 아직도 서한 대해일(大海溢)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는데 당시의 주호(主戶: 토착민)는 5,623호요, 객호(客戶: 다른 곳에서 이주해 온 사람)는 1192호였다.

 

오늘날 발해만 지역의 꽤 많은 지역에서 발견된 고고 유물은 겨우 전국(戰國)과 서한(西漢)의 유적지만 발견되고 서한 말기와 동한의 유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더 늦은 것으로는 바로 당 · 송(唐宋) 시기의 유물이라고 한다. 한 · 당(漢唐) 사이에 가운데가 단절되어 연대상 서로 연속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서한 때 원래 지금의 창려현(昌黎縣) 남쪽에 설치되었던 누현(絫縣)은 나중에 바닷물에 잠긴 바 되어, 마침내 누현을 없애고 지금의 무녕현(撫寧顯) 동쪽 유관진(渝關鎭)에 임유(臨渝)를 설치했다.

 

당나라 때의 갈석산(碣石山)은 여전히 그 북서쪽 노롱현(盧龍縣)에 속했으며, 바로 요(遼)나라 때에 이르서 처음으로 갈석산 남쪽에 광녕현(廣寧縣)을 설치, 영주(營州)의 치소로 삼았다.  금대정(金大定) 29년(1189)에, 관외 광녕현(廣寧縣)과 이름이 같아 서로 혼동이 되므로 광녕(廣寧)을 창려(昌黎)로 개칭함과 동시에 처음으로 난하 삼각주 상에 낙정현(樂亭縣)을 설치했다. 이러한 현치의 건치 연혁을 보아도 난하(灤河) 삼각주(三角洲)는 서한 후기에 바다에 잠겨 버렸음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 뒤 점차 바닷물이 밀려나는 과정을 거치게 됨에 따라,  바로 20세기에 이르러 삼각주 평원이 비로소 개발을 회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발해 지역을 주목하고 있는 것은 고조선이 바로 그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발해지역이 해일로 수백리 일대가 잠겨버린 것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은 문정창 선생이시다. 그분은 《한서(漢書) · 천문지(天文志)》에 나와 있는 지진 등의 통계를 이용하여 무려 400여 회의 지진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지진은 해일을 수반하여 철저한 파괴를 가져 온다. 그래서 상전벽해란 말도 생긴 것이다.(문정창, 《백제사연구(百濟史硏究)》, 백문당, 1964년, 456쪽 500리 평지(한낙랑군지의) 윤몰 참조)  

 

   앞서 인용한 정해(靜海)는 발해지구에 있었다. 《정해현지(靜海縣志)》에 의하면 동주 시기에 이 지역이 장로(長蘆)로 불려졌으며, 전후해서 제(齊) · 연(燕) · 조(趙) 등에게 귀속되었다. 진(秦)나라 때는 거록군(巨鹿郡)에 속했고, 서한 시기에 동평서현(東平舒縣)을 설치, 발해군 관할에 속했는데 인구는 대략 4만여 명으로, 치소는 지금의 정해현 서조대촌(西釣台村) 서부에 있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자연환경과 지리환경이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농업 · 상업 및 인구 모두 공전의 발전을 이루어 번영된 동평서문화(東平舒文化)가 출현했는데 앞서 말한 해일로 참담한 피해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중국 인터넷, 《어느 때 중국에서 해일과 지진은 발행했는가?》관련 기사 참조)

 

   바로 이 일대는 우리 고조선은 연라라와 이웃하여 있었으니 거기에는 분명히 고조선 관련 문화 유적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2)  《우공추지(禹貢錐指)》에서 호위(胡渭)의 윤해설의 논거

 

   먼저 호위(胡渭)가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보고 논의를 계속하고자 한다. 호위(胡渭: 1633~1714)의 원명는 위생(渭生)이요, 자는 비명(朏明)이며, 만년의 호는 동초(東樵)였는데 절강 호주부 덕청현 사람이다. 과거시험에 여러번 응시하였으나 낙방을 하였다. 강희 29년(1690), 서건학(徐建學)이 동정동산에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편찬을 위한 국을 설치하여, 호위 · 염약거(閻若璩) · 고조우(顧祖禹) · 황의(黃儀) · 사신행(査愼行) 등을 임시로 초빙할 때 그 사업에 참여한 바 있다. 호위는 원래부터 바로 여지학(輿地學)에 정통한 데다, 뜻을 같이 한 사람들과 서로 토론하고 연구하는 데 있어 우월한 조건에 있어, 7년 뒤에는 《우공추지(禹貢錐指)》란 책을 완성하게 되었는데 모두 20권이다. 만년에 또 강희제(康熙帝)로부터 "기년독학(耆年篤學)》이란 네 글자로 된 글을 하사받아, 일시에 학계에 매료되었다.(화림보, 《중국지명학원류(中國地名學源流)》, 호남인민출판사, 2002년, 367~368쪽 참조)  

 

   이 책에 대한 가치와 공헌등이 추일린(鄒逸麟) 선생이 정리한 책 서문에 아주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우공추지(禹貢錐指)》라는 책 이름이 특이해서 추지(錐指)가 무슨 뜻인지 사전에서 찾아 보았다. 이 말은 《장자(莊子) · 추 수편(秋水篇)》에서 송곳으로 땅을 찔러 깊이를 잰다는 뜻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식견이 좁다는 뜻으로 인신된다고 한다.

 

    동서 권13 중의 하에는 "同爲逆河, 入于海"에 관한 호위(胡渭)의 변설을 보면 그의 박람강기(博覽强記)한 면모를 불 수 있다.


우갈석과 좌갈석이 지도 상단에 보입니다. 그중에서 바다와 반쯤 걸쳐있는 갈석이 좌갈석입니다.

 이곳이 바다로 변하기 전에는 역하와 구하가 흘렀는데 이곳이 윤몰되어 발해만이 생기자 역하와 구하는 바다로 변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호위가 변설을 통하여 밝힌것입니다.



"갈석의 동쪽이 창명(滄溟)인데 《경(經)》에서 말하는 바다(海)이다.  그 서쪽이 역하(逆河)인데 후세에 이를 발해(渤海)라고 하였다. 《하구서(河溝書)》에서는 "同爲逆河, 入于渤海"라고 하였다. 대체로 한인들은 발해를 바다로 여겼으나, 그것이 역하(逆河)였음을 아지 못해 결국 역하가 남피(南皮) · 부양(浮陽)에 있던 것으로 생각했다. 황하(黃河)는 장무(章武)에서 바다로 들어갔던 것이지, 갈석(碣石)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중략).....

 

  왕횡(王橫)이 말하기를, "옛날 하늘에서 연일 비가 오고, 동북풍이 불어, 바닷물이 범람하여 서남쪽으로 솟구쳐 올라, 수백 리가 물에 잠기게 되었고, 구주의 지역도 이미 바닷물에 잠긴 적이 있었다."라고 했다....(중략)...

 

   발해(勃海)라는 이름은 예전에는 아직 없었다. 《한비자(韓非子)》에 이르기를, "제경공(齊景公)은 안자(晏子)와 더불어 소해(小海)를 유람하고, 백침(柏寢)이라는 대(臺)에 올랐다"고 하였다. 소해(小海)는 곧 발해(勃海)로서 경공(景公) 때 이미 이런 지명이 있었다. 비단 이것 뿐만 아니라, 《좌전(左傳)》 희공(僖公) 4년에, 초성왕(楚成王)이 제나라 군중으로 파견하여 제환공(齊桓公)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남쪽에 살고 있다(君處南)"고 하였으니, 북해(北海) 역시 곧 바로 발해인 만큼 환공 때에도 그런 지명이 있었던 셈이다. 역하(逆河)의 남쪽 해안 지역이 바닷물에 잠겨 버린 것은 그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왕횡이 말한 옛날(往者)는 예전(昔者)과 같은 말로서 그 때가 오래된 것인지 빠른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꼭 한나라 때를 말하는 것은 아니며, 구문을 망라해서 원래 근거가 될 만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논자에 따라서는 이런 기사가 정사(正史)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왕횡이 한 말이 터무니 없는 것이라도 의문을 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정사라는 것이 진 · 한(秦漢)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닌지 혹은 고사(古史)를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만약 고사를 말한다면, 제후의 사기는 모두 진(秦)나라에 의해 불살라진 터라, 세상에 보이지를 않는다고 해서 어떻게 그 책이 쓰여진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진 · 한(秦漢)의 역사를 말한다면, 바닷물이 서남쪽으로 수백 리나 나갔던 것은 《한서(漢書) · 구혁지(溝洫志)》에 본래부터 이미 명확하게 이런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어찌 꼭 몇 년 몇 월이라고 대서특필해야 나중에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더욱이 변이(變異)에 관한 사건은 정사에는 글로 쓰여진 것이 없고 다른 책에 있는 것이 많으니, 역양(歷陽)이라는 나라가 침몰되어 호수가 된 것은 《회남자(淮南子)》에 나와 있으며, 공도현(邛都縣)이 함몰되어 공지(邛池)가 되고, 장수현(長水縣)이 윤몰되어 곡수(谷水)가 되고, 해강현(海戇縣)이 윤몰되어 자호(柘湖)가 되고, 무원현(武原縣)이 윤몰되어 당호(當湖)가 되었던 것은 모두 《수경주(水經注)》에 나온다. 그러나 정사에 쓰여 있지 않다고 해서 이렇게 말한 것이 모두가 터무니 없다는 것인가? 양주(楊州)에는 예전에 해문현(海門縣)이 있었고 남쪽으로 태창주(太倉州)가 마주하고 있었는데 그 해구가 바로 강미(江尾)이다.


원안으로 보이는 흐미한 그림은 내륙이 바다로 윤몰되어 잠겨있는 흔적입니다. 중국의 지리학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도제작시에 이렇게 표시하도록 규정한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수중의 흔적들이 낙정의 동쪽연안까지 계속되어 그려져 있습니다. 출전:갈석고(碣石考)


동북지경이 바닷물에 침습을 당해 널다랗게 잠식당한 것이 서남쪽으로 수십 리가 된다. 본조(청나라) 강희 초에 현의 치소가 드디어 바닷속으로 빠져들어가 이제 또 그 서쪽으로 40리나 옮겨갔다. 파도가 철석철석 부딛치고 솟구치면서 내는 그 소리가 마치 대포 소리처럼 들리고, 밤낮으로 그치지를 않았으며, 그 때마다  모래 언덕이 장차 붕괴될 때마다 반드시 그에 앞서 균열흔(龜裂痕)이 생기게 되었는데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붕괴될 징후로 보고 문득 옮겨가 버려 그 현은 마침내 폐지되고 말았다. 계산해 보니 30여 년에 40여 리의 땅이 바다로 변해 버렸으니 이렇게 경과한 것이 지난 3~400년이 되는데 이 곳이 강미(江尾)임을 어떻게 모르겠는가? (호위 저 · 추일린 정리, 《우공추지(禹貢錐指)》, 상해고적출판사, 1996년, 480~482쪽 참조)

 

   여기서 호위(胡渭)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정사에 기록된 것만이 믿을 만한 사료가 아니라 다른 기록에 의해서도 어떤 사실의 근거가 될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컨대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서 백제의 강역을 말하면서 "백제는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천여 리 떨어져 있으며, 서쪽으로 대해(大海)를 한계로 하여, 바다(海)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소해(小海)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바로 왜국에 이른다."라고 하였다.(졸저, 《만주원류고》, 112쪽 참조)

 

   여기서 우리는 해(海)라 하면 황해(黃海) 또는 서해(西海)를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호위(胡渭)가 말한 것처럼 중국은 고대로부터 바다라고 하면 의레껏 발해(渤海)를 생각하였으며, 그곳에서 해가 떠 오르기 때문에 양곡(陽谷)이라고 하였으며 또 그러한 곳을 동표일출지지(東表日出之地)라고 했던 것이다. 또한 소해(小海)라고 할 때도 발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에 주목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평양부 군명조에는 "居東表日出之地, 故曰朝鮮"이라고 기록하여 조선이라는 말이 해뜨는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그런 나라 이름이 생겼다는 논조이다. 게다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번역한 《중국정사조선전(中國正史條鮮傳)》에는 여기의 소해(小海)는 경기만으로 주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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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 수의 사료중에는 <<수경>>에 기록된 내용중에 물이 흐르는 방향을 이상하게 설명하여 혼동을 가져온 사례가 있습니다. 이 대목을 <<수경주 석>>에서는 오류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유를 위만이 패수를 건너서 동쪽으로 간 사실을 지적하고 패수가 만약 동류하였다면 물을 건넌것이 아니라 따라갔다고 해야 맞는 답이라는 뜻입니다.


* 浿水出樂浪郡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於海. (수경 원문)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서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수경 원문)

이에 대한 주석문은

-武帝元封二年, 遣樓船將軍楊僕左將軍筍체 討右渠, 破渠於浿水遂滅之.

若浿水東流, 無渡浿水之理. 其地今高句麗國治, 余訪蕃使, 言, 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 卽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 浿水至增地縣入海.

考之古今, 於事差謬, 蓋經誤證也.


한나라 원봉2년에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가 우거를 패수에서 토벌하였는데,
만약 패수가 동류하였다면 패수를 건널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땅을 지금은 고구려가 다스리고 있는데 이곳을 다녀온 사신이 말하기를 성은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패수는 왕험성의   서쪽으로 흐른다는 말이 옳다는 말이지요.
뿐만 아니라 낙랑군의 누방현은 개주의 동북쪽인 안시성과 탕지현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그 일대가 요양현을 포함하여 패수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임패현은 개주를 말하기 때문에 패수는 누방현에서 서남으로 임패현을 지나 남쪽으로(초창기)바다에 들어간다고 해야 옳습니다. 이 물이 처음에는 소요수를 따라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갔었지만 후에 소요수의 입해구의 하상이 높아져 역류하기 시작하여 패수는 서북으로 역류하여 다시 염난수와 합류한뒤 대능하와 만나서 서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갔던것이지요.
님의 글을 읽고 몇자 남깁니다.

저는 문정창님의 500 리 윤해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갈석산 윤몰설도 오류라고 생각하며,
지극히 과장된 표현이라고 봅니다.
다만 지진이나 해일 등의 이유로 일부의 육지가 바다로 변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水量이라고 봅니다.

아마도 지진이나 해일이 없었던 평년 평상시에도 지금의 발해만 북부인 란하 하류 유역에는 지금보다도 水位가 높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정황 하에서 지진이나 해일이 닥치며 500 여리 윤해설 등의 과장 표현이 나타났다고 봅니다.
소위 옹노나 요택이 남아 있게 되는 과정일 것이라고 봅니다.


님께서 정리하신 패수의 흐름 설명을 보고 한말씀 드립니다.

패수가 요동만 앞에서 돌아 서북류하고 다시 남류하여 낙선정 부근에서 용선수(유수- 지금의 란하)와 습여수(발해만이 생기기 전에 천진에서 동북방향으로 흘렀음)가 만나 열수가 되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질문 한가지 합니다.

님께서는 반고의 한서 지리지와 상흠의 수경, 력도원의 수경주 모두를 부인합니까?

반고는 열수를 낙랑군 탄열현에서 설명하였고, 패수는 패수현에서, 대수는 함자현에서 설명하였습니다.
극단적 표현으로 반고가 죽기 전까지는 3 개의 물길이 각각 따로 흘렀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 력도원의 수경주에서는 습여수가 지금의 백하인 고하로 합쳐진다고 하였고, 고하는 지금의 란하인 수경주 기록의 유수와는 엄연히 다른 물길입니다.

반고는 1 세기, 력도원의 5 세기 사람입니다.
이들의 기록에는 열수, 유수, 습여수가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과연 패수가 이들과 만났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습니까?

즉 패수는 패수현만을 흐르는 아주 짧은 물길일 수도 있다고 추측하는 것은 그른 것입니까?
당연히 대수는 짧았을 것이며 열수는 반고가 직접 주석한 대로 820 리 길이의 아주 큰 물길입니다.
또 현토군 서개마현에서 염난수가 2100 리, 요동군 망평현에서 1250 리 길이의 물길이라고 했습니다.

력도원은 지금의 란하인 濡水를 설명하면서 독석에서 발원하여 전체 흐름 모습이 물음표`?` 처럼 묘사하였습니다. 아주 정확히 표현하였지요. 놀랄 정도로...
이 난수가 하류에서 노룡고새, 영지성, 고죽성, 갈석산을 지나며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언제 500 리 육지가 바다로 빠졌고 언제 다시 솟았다는 것입니까?
500 리 윤해설을 제기하는 선에서 끝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가지 말씀드립니다.

문정창님이 인용한 지나 옛 지도에 보이는 양평을 표기한 부근이 지금의 요동반도라고 여기시는 모양인데, 이는 대착오라고 봅니다.
아울러 요사,명사,청사 지리지에 기록된 해주,개주,복주,금주,여순해구의 위치 역시 지금의 요동반도로 추정한다면 역시 지나의 정사 기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청사 지리지에서 장성과 갈석이 있는 영평부는 지금의 북경인 경사에서   830 리 거리에 있답니다.
그리고 봉천성 봉천부의 치소인 성경 심양은 경사에서 동북쪽으로 1470 리 거리에 있다고 합니다.
현대 지도를 놓고 저 두 거리를 가늠해 보십시요.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 속현이였던 요양이나 요양 북쪽 120 리 지점에 있는 심양이 과연 지금의 위치인지를 점검해 보십시요.

명백하게 사서에 기록된 부분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고 여타의 사건 기록과 대조하여 보는 것이 역사책을 들여다 보는 묘미일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하여 기록을 넘어 상상의 세계로 들어간다면 그 이후는 바로 소설이라고 봅니다.

한서부터 청사까지 지리지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일관적이며 사실적입니다.
회남자, 산해경, 수경주, 통전 등의 보조적인 사찬사서들을 통찰한다면 500 리 윤해설, 갈석산 윤몰설 등은 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읽는 자가 상상력을 너무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님의 말대로 낙랑군 영역을 그려 본다면
지금의 요동만 개주 부근에 있었다는 패수 부근에서부터 지금의 요동만을 삥 돌아서 산해관 부근의 란하 하류인 란정지역까지가 낙랑군 땅이였다는 말이 됩니다.

글쎄요...

북한학자인 리지린,림건상 역시 단재,문정창과 같이 조선의 서쪽 경계를 지금의 란하까지도 보았지만 패수를 님처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땅의 어떤 사람도 패수가 그렇게 흘렀을 것이라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지나 정사 지리지를 읽었던 사람이라면...

>>북한학자인 리지린,림건상 역시 단재,문정창과 같이 조선의 서쪽 경계를 지금의 란하까지도 보았지만 패수를 님처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땅의 어떤 사람도 패수가 그렇게 흘렀을 것이라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지나 정사 지리지를 읽었던 사람이라면...

***북한의 학자들과 단재.문정창등이 조선의 서쪽경계를 지금의 난하까지 보앗다는것과 패수가 난하의 입해구인 낙정 경계까지라는 주장이 어떻게 다른가요. 조선과 한나라의 경계선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였다고 보십니까? 한국의 어느학자들도 이만큼 상세하게 패수론을 주장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구체적으로 지도까지 동원하여 제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조.한의 국경선과 패수는 같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것이 상식일텐데 상식밖의 반론을 제기하셨군요. 그리고 위에 제시한 근거사료들은 모두가 지나 사료들입니다.

님께서 그만큼 연구하셨으면 실재로 한서 지리지에 기록된대로 대입하여 지도에 표시해보세요. 삼수가 등장한다고 하여 국경선이 세계가 될수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시도해 보시면 아마도 쉽지 않을것입니다. 왕망이 말한 낙선정(낙정)이 패수가 바다로 합류하는 종점이며 열구이고 낙랑군 증지현의 서쪽이라는 조건을 잊어서는 안됩니다.좀더 시간을 두고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님의 말씀대로 沛水나 浿水가 秦 이후에 漢이 들어서면서 경계에 있는 물길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패수가 지금의 란하 부근에 있었다는 것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님의 주장 중에서 패수가 지금의 요동만을 돌아서 즉 요동반도 개주에서 산해관 부근까지 흘러와
용선수와 습여수와 만나 열수가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며,
그것은 지나의 정사 지리지들에 기록된 내용과 상위하다는 것입니다.

님께서 패수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한 것을 자랑하셨는데, 설명하신 내용은 한서나 수경주의 기록을 넘어섰다는 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장안이나 장화가 조선의 어원을 추정하며 내세운 습수, 선수, 열수는 근거가 희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안의 말에 이끌리어 습수를 습여수로, 선수를 용선수로 열수를 대요수로 비정해 버리면 한서 지리지나 수경주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서나 수경주는 엄연히 유수와 대요수 그리고 열수(수경주에는 기록이 없음)를 구별하여 설명하였습니다. 한서와 수경주의 습여수에 대한 설명은 낙랑군과는 동떨어진 상곡군을 흐른다고 하였고 고하에 합쳐진다고 하였지요.  

즉 장안이 말한 열수의 지류라는 습수는 습여수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안 이후에 열수의 지류인 습수를 설명한 사람을 지금껏 보지 못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장안만 알고 있는 습수였다는 것입니다.

또 수경주와 청사 지리지에 무열수가 등장하지만 모두 지금의 란하인 난수의 지류로 설명하였습니다.
수경주는 무열수가 동쪽으로 흘러 난수에 합쳐진다고 하였고 청사는 열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수를 용선수로 이해하신 부분도 지금의 란하인 수경주 난수의 하류가 서쪽의 어양군
옹노현에서부터 연결된 물길이 동쪽으로 난수까지 이어지면서 흐르는 신하에 들어오는 지류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열수의 지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하는 서쪽의 어양군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경수와 구거지수를 가로질러 끊고 지나며
요서군 신안평현, 해양현을 흘러 일부는 바다로 일부는 동쪽으로 더 나가 난수와 합류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신하에 흘러드는 지류의 하나가 용선수라는 것이며 봉대수,난허수도 있다고 하였지요.

후한서는 낙양에서 요서군까지의 거리를 3600 리, 현토군 4000 리,낙랑군까지를 5000 리라고 하였지요.
낙랑군 탄열현을 흐르는 열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며 820 리 길이라고 반고가 직접 주석했습니다.

그렇다면 상곡군을 흐르는 습여수, 지금의 열하인 무열수, 요서군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신하의
지류인 봉대수의 또 새끼 지류인 용선수가 어떤 연관관계가 있겠습니까?

물길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장안이 말한 조선의 어원적인 측면에서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글쎄요...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없지 않나요?
浿 水에 대해서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만번한을 흐른다는 것과 한서 지리지 낙랑군의 탄열현을 흐르는 패수, 상흠이 수경에서 설명한 패수를 력도원이 혼란스러워 하면서 기록한 수경주의 패수, 그리고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조의 패대수의 기록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요사 지리지 동경도에 등장하는 패수가 있었군요.

패수에 대한 기록 중에서 신뢰할 만한 기록은 아마도 한서일 것이라고 봅니다.
수경이나 수경주의 기록은 서로 상위하고 력도원도 혼란스러워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취하기도 난감합니다. 하지만 반고는 확고하게 주석을 하였지요.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발원지는 탄열현에 있는 분려산이라고...

지금의 요동반도 개주 부근에서 발원하여 요동만을 빙 돌아 산해관 부근까지 흐른다는 물길이 도대체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패수는 큰 물길이 아니라고 봅니다. 일개 현을 혹은 두개 현을 흐르는 조그만 개천일 수도 있습니다.
국경을 흐르는 물길이기 때문에 아주 크고 길다고 인식하는 것은 억지라고도 봅니다.
분명히 정사 기록은 패수와 열수를 구분하였고 열수는 820 리 길이라고 하였는데 반하여 패수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반고가 실수로 누락한 것일까요?
물론 빼먹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浿수, 沛수에 열성을 쏟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가고할 근거 기록이 위에서처럼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추적하는 것은 곧 소설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한서와 수경주에서 기록한 물길들 중에서 크고 길다란 또 항목이 있는 물길들을 규명하지도 못하면서
근거 기록도 아주 희박한 패수를 무슨 수로 비정하겠습니까?

오히려 염난수,대요수,열수,압록수를 열정적으로 찾아보아야 하지 않겠는지요?
난수濡水에 대한 수경주의 기록 분량이 도대체 얼마나 많습니까?
또 대요수의 량 또한 적지 않습니다.

난수와 대요수는 요동군 서안평현과 안시현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즉 하류가 인접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통전에서는 대요수에서 동남쪽으로 450 리 지점에 압록수가 흐른다고 하였고, 이 부근이 한 2 군 지역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에서는 위의 내용들이 그대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명사,청사 지리지에도 요사 지리지 동경도의 내용과 같습니다.
한서 지리지의 대요수가 요사,명사,청사의 기록과 동일합니다.
수경주 역시 위 정사 기록과 일치합니다.    

조선과 진.한의 경계는 지금의 란하인 수경주의 난수 부근입니다.
한이 건국되면서 진의 경계에서 후퇴하여 만번한을 흐르는 패수로 경계하였다는 그 패수는 아주 작은
개천 수준 정도일 것이라고 봅니다.


사마천이 이 경계의 물길을 浿수라고 한 것은 실수일 것이라고 보고 있으며, 경계선의 물길은 어환의
위략에 기록된 취수, 염철론의 沛수, 한서 지리지의 沛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인 만이 새를 동쪽으로 나가 沛水를 건너 진고공지에 거주하다가 세를 모아 더 동쪽의 浿水를 건너 왕험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고 보아야 순리적입니다.

이것은 응소나 서광이 험독을 놓고 주석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신찬은 응소나 서광이 말하는
만의 도읍이 험독이 아니고 낙랑군 패수 동쪽의 왕험성이라고 정정하여 말하였고 안사고는 신찬의 말이
옳다고 하였지요.

사실 지금에 와서 그 경계선인 패수,패수,취수를 어떻게 찾을 수 있으며 또 구별한다는 것이 무에 그리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를 찾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의 란하 부근이 요서군의 동쪽 경계이고, 바로 동쪽이 낙랑군의 수성현이며 장성의 기점이라는 것이 더 확실하고 여러 논거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또 지금의 란하가 수경주의 난수濡水이며 대요수와 그 입해처가 같은 요동군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규명
하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일 것입니다.

500 리 윤해설, 갈석산 윤몰, 패수 흐름의 추적 등은 단군 조선의 영역을 규명하는 일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고 결론도 없는 것입니다.
이점을 구산님께서는 천천히 시간을 들이셔서 검토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이 난을 빌려 더이상 구체적인 토론을 하긴 어렵습니다.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은 요동만의 윤몰설을 믿을수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맨 마지막에 추가로 올린 자료지도를 봐주세요.요동만 윤몰에대한 설왕설래를 확인하기 위해서 수중까지 답사하여 현장을 확인하고 지도에 그 흔적을 그리도록 하였다는 근거가 <,갈석고>.라는 논문에 남아있습니다.수많은 사료와 지도등의 자료들까지 무시하고 요동만의 윤몰설을 부정하신다면 이 글을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윤몰설을 주장한 사료들과 지도의 제작에 대하여 먼저 조목 조목반론을 제기하셔야 될것입니다.

그리고 사료들에 의한 패수의 계통도를 그릴 구상을 해보시길 바랍니다.그렇다고 저도 이 글을 절대적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무려 10여년을 공부한 결과를 여러분앞에 내놓고 타당한 반론을 기다리는 과정입니다.미쳐 필자가 깨닫지못한 부분에 대하여   반론이 나오면 즉시 수정할것입니다. 그리고 장안이 주장하였다는 삼수론은 필자도 동의할수 없다고 하였으나 최선을 다하여 그 글이 나온 연유를 설명해볼려고 노력하였을 따름입니다.

또하나 패수못지않게 궁금하던것이 열구였습니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으로 출정할때 누선장군 양복이 배를 끌고 제남을 출발하여 연안을 따라 북으로올라가 열구에 도착한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는 열구에서 좌장군 순체와 만나 육군병력 5만명을 수송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순체와 만나지 못하자 7천명의 병력으로 동남쪽으로 달려 사문도에 도착하였다가 낭패를 보고 10여일간을 산중에서 해매었다는 기록입니다.이러한 내용도 <<한서>><보주>에 실려있습니다. 위만조선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가늠할수 있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반론 내용중에 사료를 상세히 검토하지못하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의를 호도하였다는 대목에 대하여는 동의할수 없습니다. 일일이 사료를 제시하고 타당성을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수경주 대요수조 첫 문장은 이렇습니다.
` 대요수가 새 밖 위백평산 혹은 백평산을 에워싸고 발원하여 동남류하여 새안으로 흘러온다.
   요동 양평현 서쪽을 지난다`

수경이 씌여진 시기는 2,3 세기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력도원이 주석을 가한 수경주는 5 세기에 편찬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기 100 년대부터 400 년대까지 양평은 바다에 잠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님께서 주장하는 양평은 언제 바다에 잠기고 언제 육지가 되었나요?
양 평(襄平)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나는 시기는 B.C 281년에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상곡(上谷)에서   조선의 서쪽 땅을 침략하여 그곳에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을 두었을때 부터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동호(東胡:조선)를 막기 위하여 조양(造陽)에서부터 양평(襄平)까지 연장성(燕長城)을 쌓고 연장성의 동쪽 끝에 요동군(遼東郡) 양평현(襄平縣)을 두었지요.갈석산을 넘고 요수를 건너 바로 양평이었다고 보여집니다.<<사기>><흉노전>

* 史記 卷110, 奴列傳第50, 『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연나라도 역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에서 양평까지이다)


** 鹽鐵論, 卷10, 和親 第48 『燕塞碣石絶邪谷繞援遼』(연나라는 변방에 갈석이 있고, 사곡에 의하여 끊겼는데, 요수에 둘려있다.)

이 기사는 요수와 갈석이 연나라의 동쪽 끝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고, 지도의 장성의 끝이 바로 연나라 장성의 끝이라는 얘기입니다. 현재의 양평은 요양 근처인데 난하의 하구에서 양평까지는 수백여리가 바다로 막혀있습니다.


이 양평(襄平)은 그후 B.C 75년까지 같은 장소에 있다가 B.C 75년에 전한(前漢)이 현 요양의 서쪽에 있던 요동군(遼東郡)을 요양지방으로 동진(東進) 시킬 때 양평(襄平)이라는 지명도 같이 요동군(遼東郡)을 따라 요양(遼陽) 방면으로 이동되었다고 봅니다. 이 요동군(遼東郡) 양평현(襄平縣)은 계속하여 공손씨의 요동군 치소로서 위(魏), 진(晋) 때도 요양(遼陽) 방면에 있었습니다. 요동만이 물에 잠기기 시작한건 기원전 132년쯤 이지만 워낙 서서히 윤몰되어 윤몰된 시기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아래의 기록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BC 132. 황하의 발해 유입과 그 하구의 변경.
종전 산동성 남쪽으로 흘러 황해로 들어갔던 대 황하의 물길이 전한(前漢)중엽에 일변하여 돈구(頓丘)동남쪽으로 부터 발해에 유입하게 되었으니 그러한 사실을 <한서 무제기> 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원광3년 (BC132) 춘 하사 종돈구동남 유입발해. (春 河徙 從頓丘東南 流入渤海).
이 유역의 변경으로 인하여 발해만의 지형에 대 변동이 일어났으니, 즉 그 윤몰된 500리평지의 남쪽에 황하의 하구가 생겨난 것이다.

2) AD 114년. 발해의 대지진
위에서 본바와 같이 한나라는 서기전 67년경 부터 대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그후 110 여년간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던 것인바 안제(安帝)초(初) AD 114년 추 팔월 발해에 해일이 일어나고, 대풍이 불어 일시에 3만여본의 거수가 뽑히는등, 그리하여 그 참상이   이루 말할수 없었던 것이다.

3) AD 170년대. 수백리의 진수(秦水)
발해의 이러한 해일과 재변은 그 후도 계속되었으며, 그러한 중에서 그 500리의 평지에 큰 변동이 일어 났으니, 즉 위에서 본바 단석괴(檀石槐)가 고기잡이한 진수(秦水)
와 같이 흐르지 아니하는 거대한 호수지대가 생겨나게 된것이다.

4) AD 221~280년대. 갈석(碣石)의 해중몰(海中沒)
삼국시대 오나라의 태자 중서자요, 효경과 논어의 주자인 위소는, 그옛날 황하하구에   위치하였던 갈석이 발해에 빠져 들어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갈석이 옛날 하구에 있었다. 해가 이미 오래 되매 물에 잠겨 점차 바다에 빠져 들어갔으니,이미 해안으로부터 500 여리 떨어지게 되었다".

5) AD 385~534년. 해안에 돌출한 수백리의 용도(甬道).
지표변동이 일어난지 이미 600 여년, 그 500리의 평지내에 생식하였던 3만여본의 거수가 일시에 뽑히고. 그 옛날 하구에 있었던 갈석이 500리쯤 떨어진 먼 해중으로 들어가고. 또한 그 500리의 평지에 수100리의 호수가 생겨나고. 그후 300여년간에 호수가 점차 바다로 화하여 그 잔해로써 수 십리에 달하는 용도형의 기관이 생겨 났으니, 그러한 사실을 북위의 지리학자요.수경주의 저자인 역도원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여성(驪城)이 바다를 베개하여.....돌이 있되 복도와 같이 수십리 뻗쳐있다. 산 꼭대기에 큰 돌이 있되 그 모양이 기둥과 같다".<서전> 우공 협석 갈석의 주

6) AD 645년. 당태종의 발이 빠진곳.
그후 100여년, 발해 북안지대는 해일과 남만주에서 흘러 내리는 구조(九條)의 강하 등으로 인하여 그 윤몰된 하구의 일부 지역이 니녕(泥녕수렁)지대가 되었으니, 즉 고구려를 토멸하기 위하여 출정한 당태종의 말이 200리의 수렁에 빠지는 등의 일로서 당태종이 대패 하였음은 주지의 역사 사실인것이다.

7) AD 1700년대.^형의 발해 북안(北岸)
그후 천여년간 발해북안의 윤몰은 여전히 계속되었으매, 인하여 대청일통지 성경통부도(統府圖)는 그 당시 발해 북안의 지형이 ^형으로 되어 있다 하였으며, 그리하여 그후 20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발해 북안지대는 지도상 거꾸로선 u자 형으로 나타나게 된것이다.
지진은 지질구조의 약세에 따라 지각의 곁이 움직여 흔들리는 현상으로서, 그 원인은 화산의 활동. 지하수의 침식. 토사의 이동.지괴의 운동. 대륙의 이동등으로 인하여 일어나며, 그러한 운동의 결과로서 산붕. 지탁(땅이 쪼개짐). 지함(땅이 �어짐).등이 생겨 나는 것이다.       문정창 저 <고조선사연구> 259~261쪽에서

발해북안의 지형은 처음에는 "V" 자형의 꺼꾸로선 상태로 있다가 오늘날의 "U"자가 거꾸로 선 상태로 변하는데 200여년이 걸렸다는 기록을 주목합니다. 발해의 윤몰사실은
사서중에 나타나는 자구 한 두자의 풀이로서 좌우될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윤몰설의 논거 잘 보았습니다.
궁금한 점 세가지를 여쭙겠습니다.

문정창님이나 님께서 주장하시는 양평의 윤몰설에 대해서입니다.

첫째는 기원전 75 년에 요동군이 동진했다는 근거는 무엇인지요?        

둘째는 두 양평 중에서 어떤 양평이 윤몰했다는 것인지요?

세째는 양평이 요동군을 따라 동진하면서 요양 방면으로 이동했다는 것이 어떤 내용인지요?
                   즉 요양은 애초부터 지금의 요하 부근인 태자하 변에 있었다는 말씀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