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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탁록과 치우성은 산서성 해주에 있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4.

치우가 황제 헌원(軒轅)과 전투를 하다 죽은 곳은 현 하북성 북부의 탁록(涿鹿)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현재지명을 고대의 그것으로 이해를 하기 때문이지만,
하북성이 아니라 산서성 운성현(運城縣) 해진(解鎭)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산서성 남단인 해주(解州)의 염지(鹽池)를 중심으로 한 일대가 치우와 헌원이 전투를 벌린 지역임을 주장하는
아래의 근거 자료는 지나 웹에서 발췌한 것이다.



해진(解鎭)은 고대에 해량(解梁)이라고 불리웠었는데 해현지(解縣:解州誌)에는  
"原解梁亦稱涿鹿" 이라는 기록이 있고, 안읍현지(安邑縣誌)에는
"他是安邑"蚩尤村"(今改爲從善村)人" 이라는 기록이 있다.
안읍에 치우촌이 있었는데 개명된 이름은 종선촌이라 한다.

 

당나라  시인 왕한(王翰)이 지은 解州<鹽池曉望>의 시(詩) 중에는
"涿鹿城頭分曙色,素池如練迥無塵"
이라는 귀절이 있어 탁록이 해주에 있고 탁록성도 있음을 말한다.

 

<河東鹽法備覽、鹽池門勝跡>이라는 소금과 염지관련 고서에는
"軒轅氏誅蚩尤于涿鹿之野,血入池化鹵,今池南有蚩尤城,相傳是其喪處"
라는 기록이 있어 해주,안읍 지역에 위치한 염지가 전투지이고 염지의 남쪽에 치우성(蚩尤城)이 있음도 기록하고 있다.

 

송나라 羅必이 지은 <路史>에는
"黃帝與蚩尤轉戰到中冀,才活捉了蚩尤,並立即就地處死,故殺蚩尤處稱做"解"
라 기술하고 있다.


산서성 남부는 고대의 기주(冀州)지역인데 기주의 중심인 "解" 즉, 해주(解州)에서 치우가 죽었음을
뜻한다.  로사에는 일설, 헌원의 성(姓)이 "公孫"이라는 기록도 있다.

 

송나라 문인 宋沈括의 <夢溪筆談>에는
"解州鹽池的滷水呈紅色,俗話稱위"蚩尤血"
라 하여  해주의 염지는 붉어서 간수가 들어간 듯 한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치우의 피"라 한다고 적고 있다.

 

<孔子三朝記>에는
"黃帝殺之(蚩尤)于中冀,蚩尤股體身首異處,而其血化爲鹵,則解之鹽池也"
라 하여 절단되어 죽은 치우의 피가 간수처럼 변하여 해주의 염지가 되었음을 묘사하고 있다.

 

<雲笈七簽、軒轅本紀>의
"黃帝殺蚩尤于"黎山之丘",其實"黎山"正是中條山的別名,距解鎭十五里,它是黃帝殺蚩尤于"解"的又一證據"
라는 기록은, 치우가 죽은 곳을  "여산언덕"이라 하는데  여산은 중조산(中條山)의 다른 이름으로 해진(解鎭)에서 십오리에 있어, 치우가 해주에서 죽은 하나의 증거가 된다.


중조산은 백이숙제의 묘(墓)가 있는 수양산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그 고봉은 "湯山"이다.

이상 대략으로 산서성 해주(解州:今運城縣) 일대를 치우가 헌원과 전투를 벌리다 죽음을 당한  지역임을 주장하는 근거 자료를 살펴보았다.

 

탁록전투가 하북성 북부에서 일어 난 것과 산서성 남단에서 일어 난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하북성 북부에서의 사건이라면 현재의 북경을 중심으로한 하북성 북부일대,홍산지역 까지 모두 헌원의 강역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산서성 남단에서의 사건이라면 태행산맥 이동지역은 모두 치우의 강역이었다는 재야의 주장이 힘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강역판도는 치우 이전이나 이후시대의 우리역사를 풀어 가는데도 수월한 길잡이 일 수가 있다.
현재 우리 사학의 입장에서 치우시대를 논하고 연구 한다는 것이 힘겨운 일이긴 하지만,
"동이족수령" 이라고 치우를 말하면서도 헌원과 함께 중화민족의 위대한 선조로 만들어 가고 있는 저들의 행태를 봐야 만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아래 이미지는 산서통치(1682) 해주(解州) 안읍현(安邑縣)의 고적편에서 발견한 치우성(蚩尤城)
기록으로 위에 소개한 근거들과 상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