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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지리지

진서(晉書) 지리지 번역: 평주(平州)와 유주(幽州)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1. 4.

1.      평주(平州)

생각컨대 우공(禹貢)에서 기록하기를 평주는 기주(冀州)의 영역인데, 주국(周)에서 유주(幽州)의 경계로 했으며, 한국(漢)때에는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속했고, 후한(後漢) 말엽에는 공손도(公孫度)가 스스로 평주목(平州牧)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이에 그의 아들 공손강(公孫康)과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文懿)이 요동을 병합하고 그곳에 의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속하였다. 위국(魏)에서는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설치하여 양평(襄平)에 거하였고, (이를) 나누어 요동(遼東) 창려(昌黎) 현토(玄莵) 대방(帯方) 낙랑(樂浪) 등 5개의 군을 평주(平州)로 하였고 후에 유주(幽州)와 합하였다. 이에 공손연(文懿)이 망한 후에 호동이교위(䕶東夷校尉)로 하여 양평(襄平)에 거하였다. 함녕(咸寧)[1] 2년 10월에 나누어 창려(昌黎) 요동(遼東) 현토(玄莵) 대방(帯方) 낙랑(樂浪) 등의 군국(郡國) 5으로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현은 26이고 가구수는 1,8100이다.

平州. , 禹貢冀州之域, 幽州, 右北平郡. 後漢, 公孫度自號平州. 及其子 文懿竝擅㩀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置東夷校尉, 襄平, 而分遼東 昌黎 帯方 樂浪 五郡為平州, 後還合為幽州. 文懿滅後, 有䕶東夷校尉, 襄平. 咸寧二年十月, 分 昌黎 遼東 莵 帯方 樂浪 等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

 

1.1.     창려군

창려군(昌黎郡), 한국(漢)때에는 요동속국(遼東屬國) 도위(都尉)에 속했고, 위국(魏, 曹魏)에서는 군을 설치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2개이고 가구수는 900이다.

1)      창려현(昌黎縣).

2)      빈도현(賔徒縣).

昌黎郡, 漢屬遼東屬國都尉, 魏置郡. 統縣二, 戶九百. 昌黎. 賔徒.

 

1.2.     요동국

요동국(遼東國), 진국(秦)에서 군(郡)으로 세웠다. 한국(漢) 광무(光武)는 요동(遼東) 등을 청주(青州)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되돌려 유주(幽州)로 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8개이고 가구수는 5400이다.

1)      양평현(襄平縣), 동이교위(東夷校尉)가 있는 곳이다.

2)      문현(汶縣).

3)      거취현(居就縣).

4)      낙취현(樂就縣).

5)      안시현(安市縣).

6)      서안평현(西安平縣).

7)      신창현(新昌縣).

8)      역성현(力城縣).

遼東國, 秦立為郡. 漢光武以遼東等屬青州, 後還幽州. 統縣八, 戶五千四百. 襄平, 東夷校尉所居. . 居就. 樂就. 安市. 西安平. 新昌. 力城.

 

1.3.     낙랑군

낙랑군(樂浪郡), 한국(漢)에서 설치하였다. 6개의 현을 다스린다. 가구수는 3700이다.

1)      조선현(朝鮮縣), 주국(周)이 기자(箕子)를 봉한 땅이다.

2)      둔유현(屯有縣).

3)      혼미현(渾彌縣).

4)      수성현(遂城縣), 진국(秦)이 쌓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2]

5)      누방현(鏤方縣).

6)      사망현(駟望縣).

樂浪郡, 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 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1.4.     현도군

현도군(玄菟郡), 한국(漢)에서 설치하였다. 현은 3개이다. 가구수는 3200이다.

1)      고구려현(髙句麗縣).

2)      망평현(望平縣).

3)      고현현(髙顯縣).

菟郡, 漢置. 統縣三, 戶三千二百. 髙句麗. 望平. 髙顯.

 

1.5.     대방군

대방군(帯方郡), 공손도(公孫度)가 설치하였다. 현은 7이며 가구수는 190이다.

1)      대방현(帯方縣).

2)      열구현(列口縣).

3)      남신현(南新縣).

4)      장잠현(長岑縣).

5)      제해현(提奚縣).

6)      함자현(含資縣).

7)      해명현(海㝠縣).

帯方郡, 公孫度置, 統縣七, 戶四千九百. 帯方. 列口. 南新. 長岑. 提奚. 含資. 海㝠.

 

평주(平州)는 처음에 설치하여 모용외(慕容廆)가 자사(刺史)가 되었다가, 드디어 속하였다. 영가(永嘉)의 난에 모용외는 무리에 의하여 추앙되었다. 그 손자 모용준(儁)에 이르러 계(薊)로 도읍을 옮겼다. 그 후에 모용수(慕容垂)의 아들 모용보(寳)는 또한 화룡(和龍)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유주(幽州)로부터 여부진(廬溥鎮) 남쪽의 땅이 위(魏)로 편입됐다. 모용희(慕容熙)는 유주자사진(幽州刺史鎮)를 영지(令支)에, 청주자사진(青州刺史鎮)을 신성(新城)에, 병주자사진(并州刺史鎭)을 범성(凡城)에, 영주자사진(營州刺史鎮)을 숙군(宿軍)에, 기주자사진(冀州刺史鎮)을 비여(肥如)로 하였다. 고운(髙雲)은 유주목진(幽州牧鎮)와 기주목진(冀州牧鎮)을 비여(肥如)에, 병주자사진(并州刺史鎮)을 백랑(白狼)으로 하였고 후에. 후에 풍발(馮䟦)이 빼앗고 풍발은 화룡(和龍)에서 참람되이 불렸는데 이것이 후연(後燕)이며 위(魏)에 멸망당하였다.

平州初置, 慕容廆為刺史, 遂屬永嘉之亂, 為衆所推. 及其孫移都於. 其後慕容垂又遷于和龍, 幽州至於廬溥鎮以南地入於. 慕容熙幽州刺史鎮令支, 青州刺史鎮新城, 并州刺史鎭凡城, 營州刺史鎮宿軍, 冀州刺史鎮肥如. 髙雲 二州牧鎮肥如, 并州刺史鎮白狼. 後為馮䟦所簒, 䟦僭號於和龍, 是為後燕, 卒滅於.

 

2.      유주(幽州)

생각컨대 우공(禹貢)에서 기록하기를 기주(冀州)의 영역이었고 순(舜)은 12목(牧)을 설치하였는데 즉 그 중 하나라고 하였다. 주례(周禮)에서 기록하기를 동북쪽은 유주(幽州)라고 하였다 춘추원명포(春秋元命包)에서 기록하기를 ‘箕星散為幽州, 分為燕國.(기성의 자리가 흐트러져 유주가 되었는데 나누어 연국으로 하였다)’이라 하였다. 북쪽을 태음(太隂)이라고 하는바 (유주를) 유명(幽㝠)이라고 부른다. 무왕(武王)이 은국(殷)을 평정하고 소공(召公)을 연국(燕)에 봉하였는데 그 후에 여섯 나라는 모두 왕이라 칭하였다. 이내 진국(秦)은 연국(燕)을 멸망시키고 어양군 상곡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 등의 5개 군으로 하였다. 한국(漢)의 고제(髙帝)는 상곡을 나누어 탁군을 설치하였다. 무제(武帝)는 13주를 설치하였는데 유주는 옛 이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 후에 동쪽 변방을 열어 현토군과 낙랑군을 설치하고 역시 모두 속하였다. 원봉(元鳯)[3] 원년에 연국(燕)을 고쳐 광양군(廣陽郡)으로 하였다. 유주가 거느리는 것은 대개 9개의 군인데 진국(晉)에 이르기까지 바뀌지 아니하였다. 유주(幽州)는 다스리는 군국(郡國)이 7이며 현은 34개이고 가구수는 5,9200이다.

幽州. 按, 禹貢冀州之域, 置十二牧, 則其一也. 周禮..‘東北曰幽州.’ 春秋元命包云..‘箕星散為幽州, 分為燕國.’ 言北方太隂, 故以幽㝠為號. 武王, 封召公, 其後與六國俱稱王. 及, 以為 漁陽 上谷 右北平 遼西 遼東 五郡. 髙帝上谷涿郡. 武帝置十三州, 幽州依舊名不改. 其後開東邉, 樂浪 等郡, 亦皆屬焉. 元鳯元年, 廣陽郡. 幽州所部凡九郡, 不改. 幽州統郡國七, 縣三十四, 戶五萬九千二百.

 

2.1.     범양국

범양국(范陽國), 한국(漢)에서 탁군(涿郡)을 설치하였다. 위국(魏) 문제(文帝, 조비(曹丕) AD220 ~ AD226) 는 범양군(范陽郡)으로 고쳤다.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 AD265 ~ AD290)는 속국(屬國)을 설치하고, 선제(宣帝)의 조카 수(綏)를 왕으로 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8개이고 가구수는 1,1000이다.

1)      탁현(涿縣).

2)      양향현(良鄉縣).

3)      방성현(方城縣).

4)      장향현(長鄉縣).

5)      주현(遒縣).

6)      고안현(故安縣).

7)      범양현(范陽縣).

8)      용성현(容城縣), 후상(侯相)이다.

范陽國, 漢置涿郡. 魏文更名范陽郡. 武帝置國, 封宣帝弟子綏為王. 統縣八, 戶一萬一千. 涿.良鄉. 方城. 長鄉. . 故安. 范陽. 容城, 侯相.

 

2.2.     연국

연국(燕國), 한국(漢)에서 설치하였다. 효소(孝昭)가 광양군(廣陽郡)으로 고쳤다. 10개의 현을 다스리고 가구수는 2,9000이다.

1)      계현(薊縣).

2)      안차현(安次縣), 후상(侯相)이다.

3)      창평현(昌平縣).

4)      군도현(軍都縣), 관(關)이 있다.

5)      광양현(廣陽縣).

6)      노현(潞縣).

7)      안국(安國), 국상(國相)이 있다. 촉주(蜀主) 유선(劉禪)[4]이 이곳에 공(公)을 봉하였다.

8)      천주현(泉州縣), 후상(侯相)이다.

9)      옹노현(雍奴縣).

10)  호노현(狐奴縣).

燕國, 漢置, 孝昭改為廣陽郡. 統縣十, 戶二萬九千. . 安次, 侯相. 昌平. 軍都, 有關. 廣陽. . 安國, 國相, 蜀主劉禪封此縣公. 泉州, 侯相. 雍奴. 狐奴.

 

2.3.     북평군

북평군(北平郡), 진국(秦)에서 설치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4개이고 가구수는 5000이다.

1)      서무현(徐無縣).

2)      토은현(土垠縣).

3)      준미현(俊靡縣).

4)      무종현(無終縣).

北平郡, 秦置. 統縣四戶五千. 徐無. 土垠. 俊靡. 無終.

 

2.4.     상곡군

상곡군(上谷郡), 진국(秦)에서 설치하였다. 군(郡)이 곡(谷)의 상두(上頭)에 있기에 상곡이라 이름한 것이다. 관할하는 현은 2개이며 가구수는 1070이다.

1)      저양현(沮陽縣).

2)      거용현(居庸縣).

上谷郡, 秦置. 郡在谷之上頭, 故因名焉. 統縣二, 戶四千七十. 沮陽. 居庸.

 

2.5.     광녕군

광녕군(廣寗郡), 옛날에 상곡에 속했다. 태강(太康, 280년-289년) 년간에 군을 설치하였으며 도위(都尉)가 거한다. 관할하는 현은 3개이고 가구수는 3930이다.

1)      하락현(下洛縣).

2)      반현(潘縣).

3)      탁록현(涿鹿縣)

廣寗郡, 故屬上谷, 太康中置郡, 都尉居. 統縣三, 戶三千九百三十. 下洛. . 涿鹿

 

2.6.     대군

대군(代郡), 진국(秦)에서 설치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3개이고 가구수는 3400이다.

1)      대현(代縣).

2)      광창현(廣昌縣).

3)      평서현(平舒縣).

4)      부성현(富城縣).

代郡, 秦置統縣三戶三千四百. . 廣昌. 平舒. 富城.

 

2.7.     요서군

요서군(遼西郡), 진국(秦)에서 설치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3개이고 가구수는 2800이다.

1)      양락현(陽樂縣).

2)      비여현(肥如縣).

3)      해양현(海陽縣).

遼西郡, 秦置統縣三戶二千八百. 陽樂. 肥如. 海陽.

 

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 290년-306년) 이후에 유주(幽州)는 석륵(石勒)에게 함몰되었다. 이내 목제(穆帝) 영화(永和, 345년-356년) 5년에 모용준(慕容儁)은 계(薊)에서 참람되게 칭하였는데 이것이 전연(前燕)이다. 영화 7년에 모용준(儁)은 업성(鄴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모용준(儁)이 죽자 아들 모용위(暐)는 부견(苻堅)에게 멸망당하였다. 부견이 동진(東晉)과의 전쟁에서 패하자 땅은 다시 모용수(慕容垂)에게 들어갔고 이것이 후연(後燕)이다. 모용수가 죽자 모용보(寳)는 화룡(和龍)으로 옮겼다.[5]

惠帝之後, 幽州沒於石勒. 穆帝 永和五年, 慕容儁僭號於, 是為前燕. 七年,移都於. , 苻堅所滅. , 地復入慕容垂, 是為後燕. , 遷於和龍.



[1] AD 275~ AD 280

[2] 진 장성은 요동군 양평현까지인데 사실이 아닌지 의심스럽니다.

[3] BC 80 ~ BC 75

[4] 유선(劉禪, 207년 ~ 271년). 촉한의 2대 왕이자 마지막 왕이다. 재위기간은 223년 ~ 263년이다.

[5] 공손탁이 자립하여서 요동국을 만들 때에 기존의 후한 요서에서 훨씬 동쪽에 요서군이 새로 만들어진다. 한무제시대 요동군에서 밀려난 후한시대 요동군 양평성은 소릉하 대집둔에 있던 연나라 시대 요동군 양평성인데, 이를 바탕으로 공손탁이 새로 만든 요동국 양평성은 금주시 의현 북전성자고, 그때 요동군을 갈라서 만든 요서군의 도하는 그 서북쪽 자도대 부근이라서 치우의 고향이라고 설명하게 된다. 한편 이때 만들어진 요동국 요서군 유성이 오늘날의 조양시 유성이고 그 이전의 전한시대, 연나라 유성, 양락 등은 모두 육주하 서쪽이다. 모용황 342년에 화룡성和龍城(=조양시朝陽市)에 도읍하였고, 357년에 모용준儁은 중산中山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업성鄴城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전연은 370년 전진의 부견苻堅에게 패망하였다. 이후 부견이 383년 동진과 전쟁에서 패전하자 모용수垂가 독립하여서 386년에 중산中山에서 후연국後燕을 세워 황제가 되었으나 396년 모용수가 죽으면서 탁발선비 위나라에 밀려서 대릉하大凌河 화룡성으로 다시 천도하였다. 모용보寶가 모용수의 뒤를 이었으나 3년만에 살해되어 모용성盛이 이었고 모용성도 2년만에 죽었다. 이 뒤 399년에는 모용희熙가 이었고 407년에는 모용운雲이 뒤를 이었다. 모용운은 342년 모용황이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킬 때 고구려에서 끌려간 고씨高氏의 후예로서 고운高雲이라고도 하며 광개토왕과 한 종족의 교분을 맺었다.

한편 395년은 후연後燕의 모용수慕容垂와 북위北魏 탁발규拓跋珪간에 산서성과 하북성에서 전쟁이 치열하였다. 이 때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선비족 모용씨의 배후 근거지 화룡성까지 쳤던 것이다. (www.baedalguk.com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