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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가 원소의 아들 원상과 오환을 정복하기 위해 유성까지 진격하는 장면

by 부르칸 2015. 4. 3.





[펌] 글쓴이: 김성진

 

삼국지를 읽다보면 조조가 원소의 아들 원상과 오환을 정복하기 위해 유성까지 진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대목은 정사인 삼국지 위서에도 자세히 기술되어있다.

먼저 간단히 그 과정을 알아보자.
건안 10년 조조는 군사와 양곡을 운송하기 위해 천주거와 평로거를 굴착한다.
[公將征之,鑿渠,自呼 入泒水,名平虜渠;又從泃河口 鑿入潞河,名泉州渠,以通海.]
다 시 건안 11년 5월 조조는 무종(無終)에 도착하고, 7월 전수(田疇)를 향도로 삼아 노룡새(盧龍塞)를 지나 백단(白檀), 평강(平岡),을 거쳐, 백랑산(白狼山)에서 오환과 일대 격전을 치러 승리한 후, 유성(柳城)으로 진격하고, 원상은 요동의 공손강에게 도망가나 결국 살해되어 그 머리는 조조에게 보내지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지명과 인명이 등장하여 반가운 대목이다.
자, 이제 조조의 진격 경로를 따라 유성까지의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역사의 미로같은 유성은 과연 어디였던 것일까?

1. 무종(無終)에 관하여.....
기존사학에서는 무종을 하북성 옥전(玉田), 노룡을 난하가 장성을 지나는 송정관, 백단을 장성 밖 관성, 유성을 조양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도를 놓고 보면 아주 타당한 이론이라고 생각된다. 과연 그럴까?
이제 복잡한 강줄기를 따라가는 수고가 시작해 보자.
먼저 조조가 건안 10년에 파해친 천주거(泉州渠)에서부터 시작한다.
泉州는 지금의 천진으로 후에 웅노(雍奴)에 속하게 되는데 웅노는 지금의 무청(武淸)이라고 한다.
자치통감을 보자.
1) 水經註:泃水,出右北平無終縣西山,西北流,過平谷縣而東南流,又南流入於潞河,又東合泉州渠口,曹操所鑿也。渠東至海陽縣樂安亭南與濡水合,而入于海。
(수 경주: 구수, 우북평 무종현 서산에서 출발하여, 서북으로 흐르고, 평곡현을 지나면서 동남으로 흐른다. 또 남쪽으로 흘러 로하로 들어가고, 또 동으로 흘러 천주거구로 들어가는데 조조가 판 도랑이다. 도랑은 동으로 해양현 낙안정 남쪽의 유수와 합쳐, 바다로 들어간다.)

2) 又從泃河口,鑿入潞河,名泉州渠,以通海。
(또 구하구를 따라, 로하에 이르는 도랑을 뚫었는데  , 이름이 천주거이고, 이를 통해 바다와 통한다.)

3) 泃水出右北平無終縣西山,東南至雍奴縣,入鮑丘水;魏武征蹋頓,從泃口鑿渠,逕雍奴、泉州以通河海者也。
(구 수는 우북평 무종현 서산에서 출발하며, 동남으로 흘러 웅노현에 도달하고, 포구수로 들어간다;  위무제(조조)가 답돈(오환의 추장)을 정벌할 때, 구하를 따라 도랑을 뚫었는데, 웅노와 천주를 경과하며, 이를 통해 강과 바다가 통한다.)

이 세 대목에서 우리는 조조의 진격 경로를 알 수 있다. 조조가 있던 역현(易縣)에서 강을 따라 천진까지 온 후, 자신이 건안 11년에 판 천주거를 따라 천주, 웅노를 지난 후, 포구수, 구수를 따라 무종에 도착한 것이다. 아주 타당한 전술이다.
(첫 대목의 유수에 대한 부분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아무리 조조라도 천진에서 갈석까지 500리 운하를 단 몇 개월만에 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 이제 구수, 로수, 포구수의 위치를 알아보자.
4) 水經註:鮑丘水出禦夷北塞中,俗謂之大榆河,南過潞縣為潞水
(포구수는 어이북새에서 시작하며, 소위 대유하라고 하며, 남으로 로현을 통과하여 로수가 된다.)
5) 水經註:鮑丘水從塞外來,南過漁陽縣東,和等破瓚處也。又南過潞縣西。
(포구수는 새외에서 출발하여 남으로 흘러 어양현의 동쪽을 지난다.... 또 남으로 흘러 로현의 서쪽을 지난다.)
6) 水經註:濡水出禦夷鎮東南
(류수는 어이진의 동남에서 시작한다.)

류수는 난하이다.(기존사학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고, 상류에 대해서는 저자도 동의한다.)
이 난하의 수원(水原)과 포구수(대유하)의 수원은 같은 어이진이다.
지도를 보면 난하의 상류와 백하(白河)의 상류는 같은 곳에서 출발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포구수, 로하, 대유하는 동일한 강으로 바로 지금의 백하이다. (역시 기존사학과 동일하다.)
이 포구수의 경로에 어양현과 로현이 있다.
구수는 무종과 평곡을 지나 동남으로 흘러 웅노에 이르러 포구수에 도달하므로 포구수의 서쪽에 있어야 마땅하다.
기존 사학에서 주장하는 무종이 현재의 옥전이고, 어양이 현재의 계현이라면 두 현은 모두 포구수, 즉 백하의 동쪽에 있게 된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자 이제 대군(代郡)에서 출발하는 영정하를 찾아보자.
중국 놈들은 지저분하여 갖가지 이름으로 이를 숨겨두었으므로 아주 주의하여 찾아야한다.  

자치통감을 보면 대단히 열심히 灅水=濕水=治水=桑乾水임을 설명하고 있다. (晉紀十《孝愍皇帝上》建興元年)
그 한 대목을 보자
又有馬邑川水,會桑乾水而注于濕水。濕水東流過平城南,又東流逕廣甯下洛縣南,東至漁陽,入笥溝
(또 마읍천수가 있는데 상건수와 만나 습수에 이른다. 습수는 동으로 흘러 평성의 남쪽을 지난다. 또 동으로 흘러 광년하락현 남쪽을 지나고, 동으로 흘러 어양에 이르러 답구(운하)에 들어간다.)
따라서 상건수(지금의 영정하)는 어양을 지남을 알 수 있다.

다시 한서 지리지(地理志第八下)를 보자.

上谷郡 軍都,溫餘水東至路,南入沽.
       且居,陽樂水出東,南入沽.  
代郡   且如,于延水出塞外,東至寧入沽.
       平舒,祈夷水北至桑乾入沽.
漁陽,沽水出塞外,東南至泉州入海,行七百五十里
온여수, 양락수, 우연수, 근이수가 모두 沽水의 지류이고, 이는 어양을 지나 천주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감을 알 수 있다.
이제 그 중 하나인 우연수를 보자.
水經註:雞鳴山在廣甯郡下洛縣于延水北。
(계명산은 광녕군 하락현 우연수의 북쪽에 존재한다.)
계 명산은 지금의 선화(宣化)에 있는 유명한 산으로 선화현 옆으로 영정하의 지류가 흐른다. 따라서 우연수는 상건하의 지류이며, 고수(沽水)의 지류임을 알 수 있다. 근이수도 상건을 지나 고수에 들므로 당연히상건하의 지류이다. (자치통감에도 그렇게 되어있다.)
결론적으로 沽水=灅水=상건수=영정하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뙤놈들은 이렇게 같은 강을 수없이 많은 이름으로 불러 우리에게 혼돈을 주지만 우리도 마찬가지이니 할말은 없다. (한강 지류의 이름들을 보라. 어찌 다르다고 할 것인가?)

이제 다시 한서 지리지에 우리가 알고자 하는 무종을 찾아보자.
右北平 俊靡縣,灅水南至無終,東入庚。
水經註:庚水與鮑丘水合,俊靡吊,

우북평 준미현조를 보면 류수는 남으로 흘러 무종에 이르고, 동으로 경수에 들어간다고 하였고, 경수는 포구수와 합친다고 하였다. 灅水=庚水는 영정하이다. 따라서 무종은 영정하 부근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정리해 보자.
구수(泃水)는 무종을 지난다.
포구수=로하는 어양, 로현, 웅노, 천주를 지나는 백하이다.
灅水=庚水=沽水는 영정하로 무종, 준미, 어양을 지난다.
따라서 무종과 어양은 영정하와 백하 사이에 있다.
이 등식은 반드시 옳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저자가 지적하는 이 부근에는 지금의 북경이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경은 과거의 계현(薊縣)으로 유주의 중심도시이다.  
저자의 이론이 옳다면 조조는 당연히 무종으로 오지 않고 계현으로 왔어야 옳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수양제는 고구려를 침입하기 전에 계현의 남쪽 상건수에서 제사를 지냈다. 계현은 상건수의 북쪽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경은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다.
水經:濕水出鴈門陰館縣,東北過代郡桑乾縣,謂之桑乾水,東過廣陽薊縣北。今在薊城南,城邑有變遷也。
(수경: 습수는 응문 음관현에서 출발하여, 동북으로 흘러 상건현을 지난다. 소위 상건수다, 동쪽으로 흘러 광양 계현의 북쪽을 지난다.)
이어 자치통감의 저자는 ‘지금 계성의 남쪽을 지나는데 성읍에 변천이 있었다’라고 저자와 같은 의문을 토론하고 있다.
문제는 북위 시대의 여도원도 수경주에 이에 대한 주석을 남기지 않은 점으로 볼 때 최소한 북위시대까지는 계현이 지금의 북경이 아니라 영정하의 남쪽에 있었다.

이제 저자는 어양과 무종을 영정하와 백하의 사이인 현재의 북경유역에 있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물론 어양보다 북쪽에 무종이 있었다.
또, 현재의 통주는 과거의 로현이므로(기존사학에서 하는 이야기) 북서에서 동남 방향으로 무종-어양-로현의 순서로 존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무종은 현 창평 부근이 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위서 유주 편과 신당서 하북도 유주 범양군 편을 보자
위서: 無終二漢、晉屬右北平,後屬.有無終城、狼山.
신당서: 昌平.望.北十五里有軍都陘.西北三十五里有納款關,即居庸故關,亦謂之軍都關.其北有防禦軍,古夏陽川也.有狼山.
위서의 무종과 신당서의 창평 모두에서 낭산을 찾을 수 있다. 지금도 하북도 회래현 영정하 부근에는 낭산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다. 바로 팔달령장성(거용관) 너머이다.

이상에서 저자는 조조가 오환과 원상을 정벌하기 위해 처음 자리한 곳인 무종이 평창 부근임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전수와 함께 우회 침투하는 노룡새, 백단 평강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건안 12년 5월 무종에 도착한 조조는 7월 큰 비를 만나고, 오환의 저항에 부딪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時方夏水雨,而濱海洿下,濘滯不通,虜亦遮守蹊要,軍不得進.太祖患之) 이 때 노룡 부근에 살던 전수라는 자가 나타나 향도가 될 것을 자청한다. 이에 조조는 전수(田疇)가 주장하는 우회 비밀침투 작전을 받아들인다. 비밀작전을 위해 먼저 오환을 속일 필요가 있다. 이에 조조는 ‘지금은 더운 여름이고, 도로는 통하지 않는다. 이에 가을, 겨울까지 기다린 후 다시 진군한다. (方今暑夏,道路不通,且俟秋冬,乃復進軍)’라고 방을 부친 후 전수를 따라 상서무산, 노룡, 백단, 평강을 거쳐 유성을 향한다. 이 때 이를 알아차린 오환이 유성 200리 부근에서 반격한다. 조조는 백랑산에 오른 후 다시 전투를 벌여 오환에 역전승을 거둔다.

저자의 의견대로 무종이 창평이라면 조조는 노룡까지 근 1000리를 우회한 것이 된다.
이건 아무리 삼국지라도 너무 심한 이야기이다.
참고로 낙양에서 북경이 1200리 정도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러나 수경에 ‘류수는 동남으로 흘러 노룡새를 지난다.’고 하였고, 류수는 난하이므로 기존 사학이 옳다. (水經註:濡水東南逕盧龍塞。)
이 것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백단의 위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백단을 알면 자연히 노룡의 위치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먼저 수서(隋書) 안락군(安樂郡)조를 보자.

안락군: 과거 안주에서 다스렸다. 후주가 현주로 바꾸었고, 개황 16년에 주를 이전하고, 되찾아 단주를 설치하였다.(舊置安州,後周改為玄州.開皇十六年州徙,尋置檀州)

   연락: 후위가 광양군을 설치하고, 대흥, 방성, 연락 3현을 다스렸다. 후제는 군을 폐하고, 대흥, 방성을 이(연락)에 합치었다. 대업(수문제)초에 안락군을 설치하였다. 장성, 구하가 있다. (燕樂: 後魏置廣陽郡,領大興、方城、燕樂三縣.後齊廢郡,以大興、方城入焉.大業初置安樂郡.有長城.有沽河)

   밀운: 후위가 밀운군을 설치하여, 백단, 요양, 밀운 3현을 디스렸다. 후제가 군을 폐하고, 2현을 밀운에 합치었다. 또 안락군이 있어 안시와 토근을 다스렸는데, 후제가 폐하고 토근을 안시에 합치었다. 후주는 안시를 폐하여 밀운현에 합치었다. 개황(수양제)초 군을 폐하였다. 장성, 도화산, 라산이 있고, 어수가 있다. (密雲: 後魏置密雲郡,領白檀、要陽、密雲三縣.後齊廢郡及二縣入密雲.又有舊安樂郡,領安市、土垠二縣,後齊廢土垠入安市,後周廢安市入密雲縣.開皇初郡廢.有 長城.有桃花山、螺山.有漁水)

결국 후위의 안락군, 광양군, 밀운군에 속하였던 8개의 현을 2개로 줄여, 수나라에서 작은 크기의 단주 안락군을 설치한 것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백단을 찾는 것이다. 이 백단은 밀운현에 합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이 백단을 신당서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위주에 현이 하나 있고(회융), 부가 둘이 있는데 바로 밀운과 백단이다.  
(媯州媯川郡,上.本北燕州,
縣一.有府二,曰密雲、白檀.有橫河
懷戎.天寶中析置媯川縣,尋省.媯水貫中.北九十里有長城 )

위주 회융현은 현재 팔달령 밖에 있는 회래현이다. 요나라때 회융현을 현재의 북경 부근 회무현으로 옮긴 것이다.
기존 사학에서 주장하는 바이나 저자도 동의한다.
그 이유는 위주에 존재하는 횡하(橫河)는 양락수로 상곡군 저고현(上谷且居縣)에서 출발하여 흐르는 강으로 상건하의 지류이기 때문이다. (水經註:陽樂水出上谷且居縣,東北流,逕女祁縣,世謂之橫水)
이 위주에 밀운군에 있던 백단과 밀운이 부로써 존재한다.
또 자치통감에는 백단이 연락이라고 말하고 있다.
燕樂縣,後魏置,治白檀古城。
宋白曰:白檀故城,在檀州燕樂縣界。

그러나 구당서를 보면 전혀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檀州
  密雲 隋縣.州所治.
  燕樂 隋縣.後魏於縣置廣陽郡,後廢.舊治白檀故城,長壽二年,移治新城,即今治也.
연락현조를 보면 ‘후위가 연락현에서 광양군을 통치하였고, 후에 폐하였다. 과거에는 백단고성에서 통치하였는데, 장수 2년, 새로운 성으로 옮겨 통치하였는데 즉, 지금 통치하는 곳이다.’ 고 하였다.
현재의 연락은 밀운호 북쪽에 있다. 신당서의 기록과 같이 고북구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 곳은 당나라 정수 2년에 옮겨 설치한 곳이다. 그럼 과거에 연락이 있던 곳은 어디일까?
위의 내용을 다시 생각하면 수나라와 당나라의 초기에는 백단고성에서 연락을 통치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수나라 때의 연락에는 장성과 구하(有長城.有沽河)가 있었다.
구하는 상건하이다.
따라서 장성과 구하가 만나는 곳 부근이 바로 연락이 있던 곳이다.
바로 위주(媯州)가 있던 곳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 부근에는 거용관이 존재한다.  
따라서 연락(즉, 백단, 노룡)은 장성을 따라 거용관(팔달령)으로부터 동북쪽, 즉 고북구 사이에 존재하였다는 말이 된다.

이는 위서 열전 상경(常爽/孫景 )전을 보면 좀더 확신을 갖을 수 있다.
후위 말 두낙주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상경(常景)은 이를 토벌하러 거용관으로 온다. 이 부분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別敕譚西至軍都關,北從盧龍塞,據此二險,藺賊出入之路’
(별속담(지방민)이 서로 군도관에 이르고, 북으로 노룡새로 나아갔다. 이 두 험함을 근거로 두적이 출입하는 길이다.)
군도관은 서쪽에 있고 노룡새는 북쪽에 있다.
이는 저자의 의견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만약 노룡새가 기존사학에서 언급하는 난하부근의 송정관이라면 무려 1000리나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東從盧龍塞’라고 하는 것이 옳다.
이 이상 노룡, 백단을 찾는 것은 현재 사서만으로는 무리이다.
그러나 위나라 때의 밀운은 찾을 수 있다. 분명 백단은 밀운과 같이 안주(安州) 소속이므로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자 후위 때의 밀운을 보자.  

水 經註:大榆河自密雲城南東南流,逕後魏安州舊漁陽邵之滑鹽縣南。滑鹽,世謂之斛鹽城,西北去禦夷鎮二百里。(대유하는 밀운성 남쪽에서 동남으로 흐르고, 후위의 안주 과거 어양군의 활염현 남쪽을 지난다. 활염현은 세칭 각염성인데 어이진이 서북 200리에 있다.)
水經註:密雲戍在禦夷鎮東南九十里,鮑兵水逕其西。(밀운수는 어이진 동남 90리있고, 포병수(포구수의 오기인듯)가 그 서쪽을 지난다.)

대 유하=포구수는 지금의 백하이다. 밀운수는 어양군 활염현 보다 서북쪽으로 110리, 어이진으로부터 90리 동남쪽에 있었다. 지금의 백하의 지류인 백하와 흑하가 만나는 지점이 된다. 밀운성은 이 밀운수보다는 남쪽, 즉, 장성과 연한 곳이면서 백하 부근에 있었을 것이다. 바로 고북구 근처가 된다.

이제 종합해보자.
수나라와 당나라 초에 연락은 백단고성에서 통치하였다.
연락은 거용관(팔달령장성) 동쪽, 밀운은 고북구 부근에 위치하였다.
이 사이에 백단과 노룡새가 존재한다.
결국 조조는 지금의 창평부근에서 거용관을 통해 유성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오환에게 막히자 전수의 의견을 받아들여, 좀더 북쪽, 지금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노룡새, 백단을 잇는 새로운 route를 개발한 것이다.
지도를 보면 이 부근에 존재하는 통로는 고북구, 하방구, 장군관이다.
水經註:自盧龍東越青陘至凡城二百里,自凡城東北出趣平剛故城可百八十里,向黃龍城則五百里。(노룡으로부터 청경을 넘어 범성까지 200리, 범성으로부터 동북으로 평강고성까지 180리, 황룡성까지 500리)
조조는 노령을 넘어 평강까지 갔다. 따라서 수경주에서 언급하는 route와 일치한다.
그런데 이 길은 동북으로 향하는 길이다.
따라서 저자는 조조가 진군했던 길은 현대 지도의 도로 중 고북구와 장군관 route, 특히 고북구 route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부근은 현재의 밀운과 연락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과거의 밀운과 백단고성은 이보다 더 북쪽에 있었던 것이고, 이를 당나라 정수 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저자는 과거의 노룡은 고북구라고 주장한다.
물론 수경주의 류수가 노룡을 지난다는 말과는 차이가 있지만........

마지막으로 조조의 최종 목적지인 유성과 장수왕이 풍홍을 잡아왔던 황룡성을 향해 떠나보기로하자.

 

 

 

 

노룡-백단-평강을 거쳐 백랑산에서 오환을 격파한 조조는 드디어 유성에 도착하여 포로 20여만을 얻고 11월 역수(易水)로 돌아온다.  
조조는 과연 어느 곳에 있던 유성을 정복한 것일까?
이 유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00년을 뛰어 넘어 서기 4세기 모용씨가 도읍을 정했던 황룡성과 영주 창려군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위서를 보자.

新校本魏書/志/卷一百六上 志第五/地形志上/營州

營州治和龍城.太延二年為鎮,真君五年改置.永安末陷,天平初復.
   領郡六  縣十四   戶一千二十一  口四千六百六十四

昌黎郡晉分遼東置,真君八年併冀陽屬焉.
   領縣三   戶二百一  口九百一十八
  龍城真君八年併柳城、昌黎、棘城屬焉.有堯祠、榆頓城、狼水.廣興真君八年併徒何、永樂、燕昌屬焉.有鳴山、石城、大柳城.定荒正光末置.有鹿頭山、松山. 
建德郡真君八年置.治白狼城.
   領縣三   戶二百  口七百九十三
  石城前漢屬右北平,後屬.真君八年併遼陽、路、大樂屬焉.有白鹿山祠.廣都真君八年併白狼、建德、望平屬焉.有金紫城.陽武正光末置.有三合城.

遼東郡秦置,後罷.正光中復.治固都城.
   領縣二  戶一百三十一  口八百五十五
  襄平二漢、晉屬,後罷.正光中復.有青山.新昌二漢、晉屬,後罷.正光中復.

樂良郡前漢武帝置,二漢、晉曰樂浪,後改,罷.正光末復.治連城.
   領縣二   戶二百一十九  口一千八
  永洛正光末置.有鳥山.帶方二漢屬,晉屬帶方,後罷.正光末復屬.

冀陽郡真君八年併昌黎,武定五年復.
   領縣二   戶八十九  口二百九十六
  平剛  柳城

營丘郡正光末置.
   領縣二  戶一百八十二  口七百九十四
    富平正光末置.永安正光末置.

무려 6군, 14현이 영주에 속하였다.

복잡하니 좀더 간단해진 수서를 보자.
隋書/志/卷三十 志第二十五/地理中/遼西郡
遼西郡舊置營州,開皇初置總管府,大業初府廢.統縣一,戶七百五十一.
   柳城後魏置營州於和龍城,領建德、冀陽、昌黎、遼東、樂浪、營丘等郡,龍城、大興、永樂、帶方、定荒、石城、廣都、陽武、襄平、新昌、[四七]平剛、柳 城、富平等縣.後齊唯留建德、冀陽二郡,永樂、帶方、龍城、大興等縣,其餘並廢.開皇元年唯留建德一郡,龍城一縣,其餘並廢.尋又廢郡,改縣為龍山,十八 年改為柳城.大業初,置遼西郡.有帶方山、禿黎山、雞鳴山、松山.有渝水、白狼水.
(요서군: 과거에는 영주에서 다스렸고, .......
유 성: 후위는 영주를 화룡성에 설치하여 건덕, 기양, 창려, 요동, 낙랑, 영구등 군과 용성, 대흥, 영락........유성, 부평, 등 현을 통치하였다. 후제 때 건덕, 기양 2군과 영락, 대방, 용성, 대흥 등 현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폐하였다. 개황 원년 건덕 1군과 용성 1현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폐하였다. 또 군을 폐하고, 현을 용산으로 바꾸었고, 18년 유성으로 바꾸었다. 대업초, 요서군을 설치하였다. 대방산, 독여산, 계면산, 송산이 있고, 투수와 백랑수가 있다. )

결국 밀운군과 마찬가지로 형편없이 쪼그라져 용성 한 군만을 남기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우리는 용성=용산=유성(수나라의)에는 계명산이 있었다는 것에 주목하여야한다. 계명산은 전편에서 언급하였듯이 팔달령 장성 밖 지금의 선화에 있는 유명한 산이다.
과연 동일한 산일까?
기존사학에서는 이렇게 명백한 증거만 나오면 또 다른 산에 같은 이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계명산은 도저히 그리할 수 없다.
25사 모두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산이므로......

자 다시 위서 창려군을 보자.
昌黎郡晉分遼東置,真君八年併冀陽屬焉.
  龍城真君八年併柳城、昌黎、棘城屬焉.有堯祠、榆頓城、狼水.廣興真君八年併徒何、永樂、燕昌屬焉.有鳴山、石城、大柳城.定荒正光末置.有鹿頭山、松山. 

진은 요동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진군 8년 기양군을 이 곳에 속하게 하였다.
용성: 진군 8년 유성, 창려, 극성을 이 곳에 속하게 하였다. 요사, 유돈성, 낭수가 있다.
광흥: 도하, 영락, 연창을 이 곳에 속하게 하였다. *명산, 석성, 대유성이 있다.
정황: 정광 말에 설치하였다. 녹두산, 송산이 있다.

광흥현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徒河之淸山의 도하가 있고, 영라과 연창이 속하였다. *명산은 수서와 함께 고려하면 당연히 계명산이다.

다시 위서 안주 광양군 편을 보자.
安州 廣陽郡延和元年置益州,真君二年改為郡.
  廣興延和二年置,真君九年併恒山,屬.
    燕樂州郡治.延和九年置,真君九年併永樂.
    方城普泰元年置.
안주 광양군: 연화원년 익주를 설치하였고, 진군 2년 군으로 바꾸었다.
    광흥: 연화 2년 설치하였고, 진군 9년 항산을 속하게 하였다.
    연락: 주와 군을 통치하였다. 연화 9년 설치하였고, 진군 9년 영락을 합치었다.
    방성: 보태 원년 설치하였다.

진군 5년은 후위가 북중국을 통일한 해이다.
따라서 진군 8년, 9년에 대대적인 지역 개편작업을 실시하였다.
그 와중에 광흥현은 영주 창려군에 속하였다가 진군 9년 안주 광양군으로 바뀌면서 8년에 속하였던 영락을 연락현에 떼어주고, 대신 항산현을 넘겨받게 되었다.
이제 안주 광양군 광흥현에는 광흥, 도하 연창, 항산이 속하게 된 것이고,
연락현에는 연락과 영락이 속하게 된 것이다.
이유는 북연의 수도인 용성이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중 연락현=영락현은 이미 우리가 전편에서 위치를 확인하였다. 장성과 구하가 있으므로 지금의 팔달령 장성 부근이다.
이제 광흥현을 찾아보자.
1. 항산현이 속하였다. 항산은 상건하=영정하의 대군쪽 상류이다.
2. 연창이 속하였다. 연창은 과거 평성의 북쪽에 있었다. 바로 지금의 대동(大同) 부근이다.
과연 이것이 옳을까?
다시 사서를 보자.
新校本晉書/載記/卷一百二十三 載記第二十三/慕容垂
  垂至參合,見往年戰處積骸如山,設弔祭之禮,死者父兄一時號哭,軍中皆慟.垂慚憤歐血,因而寢疾,乘馬輿而進,過平城北三十里疾篤,築燕昌城而還....... 垂至上谷之沮陽,以太元二十一年死,時年七十一,凡在位十三年.
모용수와 후위 사이에 건곤일척의 전쟁이 벌어지는 순간이다.
모 용수는 점점 커져가는 후위를 견제하기 위해 아들 모용보에게 대군을 주어 북위를 침략하게 하였으나 삼합(參合)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모용수는 복수를 위해 남은 군사를 끌고 후위를 침략한다. 그 때의 상황이다. 지루하더라도 원문을 보자.

(모용수가 삼합에 도착하였다. 지난 해 전투에서 해골이 산을 이룬 곳을 보게 되었다. 제사 지낼 곳을 설치하니 죽은자의 부형이 일시에 통곡을 하며 군사 모두가 서럽게 울었다. 모용수는 부끄럽고 화가나 피를 토하였고 이로 인해 병이나 눕게 되었으나 말수레를 타고 진격하였으나 평성 북 30리를 지났을 때 병이 깊어져 연창성을 세우고 돌아왔다......... 모용수가 상곡 저양에 도달하였는데, 이 때가 태원 21년이었고, 나이는 71세, 재위 13년이었다. )
결국 모용수는 상곡 저양에서 사망하였다. 이 상곡 저양은 지금의 회래 지방이다. (기존사학에서 그리 이야기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연창성이 평성 북 30리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수경에서도 평성 북 40리라고 하였다. (水經:燕昌城在平城北四十里.)

3. 광흥현에는 계명산이 있었다.
전편에 언급하였던 수경의 기록을 보자.
水經註曰:雞鳴山在廣甯郡下洛縣于延水北。
地理志曰:于延水出代郡且如縣塞外
우연수는 대군 저여현에서 출발하며, 계명산은 우연수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또 다른 기록을 보자.
五代史/附錄/卷七十三 四夷附錄第二/契丹兀欲 述律
   自幽州西北入居庸關,明日,又西北入石門關,關路崖狹,一夫可以當百,此中國控扼契丹之險也.又三日,至可汗州,南望五臺山,其一 最高者,東臺也.又三日,至新武州,西北行五十里有雞鳴山,云唐太宗北伐聞雞鳴于此,因之名山.
(유 주 서북의 거용관으로부터, 다음 날, 또 서북으로 석문관에 들었다. 관은 좁은 벼랑길이고, 1명이 가히 백 명을 당할 수 있다. 이 곳에서 중국이 거란의 위험을 누를 수 있다. 또 3 일을 가, 하간주에 도달하여 남으로 오대산을 바라보았는데 이 것이 가장 높은 산이고, 동대이다.  또 3일을 가 신무주에 도달하였고, 서북으로 50리에 계명산이 있다. 당태종이 북쪽을 정벌할 때 이 곳에서 닭울음 소리를 들었다하여 유명해진 산이다.)

국내의 기록을 보자. (사실 이 글에서 hint를 얻어 이 졸작을 시작하게 되었다.)
선화(宣化)
하북성 서북부에 있는 도시. 장가구의 남쪽에 있다. 무주(武州) 또는 선부진(宣府鎭)의 별명이 있다. 계명산(鷄鳴山)에 탄전이 있고 연통산(煙筒山)에 철광이 있다.
(http://bluecabin.com.ne.kr/history/geographicaldic.htm)

이상의 참고문헌으로 우리는 충분히 진군 9년의 안주 광양군 광흥현, 즉 진군 8년의 영주 창려군 광흥현은 지금의 대동방향, 영정하를 따라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영주 창려군은 지금의 영정하 상류, 선화를 중심으로 거용관 밖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용성=화룡성은 지금의 장가계 근방에 있었을 것이다.

다시 기록을 보자.
晉紀 第113卷 晉紀三十五 (AD403–AD404)  《安皇帝戊》 三年 p-3576
 燕王熙與符后遊畋,北登白鹿山,東踰青嶺,南臨滄海而還,士卒為虎狼所殺及凍死者五千餘人。(모용희가 왕후 부씨와 함께 수렵을 갔다. 북으로 백록산에 오르고, 동으로 청령을 넘어, 남으로 창해에 임한 후 돌아왔다. ........)
모용수의 막내아들, 모용보의 동생인 모용희는 광개토대왕에게 겁 없이 덤비던 사람이다. 이때 후연은 후위에 쫓겨 황룡성에 도읍을 두고 있던 시점이다.  
따라서 황룡성의 북쪽에는 백록산이 있다.
사서를 아무리 보아도 이 부분에 백록산은 없다.
가장 보지 않던 청사고에서 찾아보았다. 바로 장가구의 북쪽 鑲黃旗察哈爾에 있었다.
清史稿/志/卷八十一 志五十六 地理二十八/察哈爾
鑲黃旗察哈爾: 在張家口北三百四十里.東北,白鹿山蒙名布虎圖.
(양황기찰합이: 장가구의 북쪽 340리에 있다. 동북에 백록산, 몽고명 포호도가 있다.)
이제 모든 것이 들어맞는다.
정확히 후위의 영주 창려군은 장가구와 선화 일대에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제 황룡성을 찾았으니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 조조의 유성을 찾아가자.
용성에 극성, 유성을 합하였으니 이 부근에 있었을 것이다.

晉紀 第095卷 晉紀十七 (AD332–AD337)  《顯宗成皇帝中之上》 二年 p-3006
  夏,六月,段遼遣中軍將軍李詠襲容皝。詠趣武興,都尉張萌擊擒之。遼別遣段蘭將步騎數萬屯柳城西回水. (여름, 6월, 단요는 중군장군 이영을 보내 모용황을 습격하게 하였다. 이영은 무흥을 함락하였고,  도위 장명을 쳐서 사로잡았다. 단요는 별도로 단란을 장군으로 하여 보기 만명으로 유성 서쪽 회수에 주둔하게 하였다.)
단씨와 모용씨의 싸움장면이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금방 고구려 장수왕과 단씨, 모용씨의 관계를 떠올릴 것이다.
맞다! 바로 그 단씨가 황룡성의 모용황과 싸울 때 분명 유성의 서쪽 회수에 주둔하였다고 하였다.
水經註:陽樂水出上谷且居縣,東北流,逕女祁縣,世謂之橫水,又謂之陽曲水。又濡河從塞外來,西北逕禦夷鎮城,又東北逕孤山南,又東南,水流回曲,謂之曲河鎮。
이 부근의 곡수는 두 군데 있다고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양락수로 양곡수라고도 하는데 지도에서 보면 별로 곡수 같지 않다.
그러나 류하의 상류는 어이진성의 서북을 통과하고, 또 동북으로 흘러 고산의 남쪽을 지나고, 또 동남으로 흘러 물이 동그랗게 돌아 흐른다고 하였다. (이 원문을 얻은 site에서 친절히 설명한 내용이다.)
저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다만 이 것이 류하의 상원이라는 이야기만 제외하고.)
따라서 유성은 곡수 즉 류하의 상류의 동쪽에 있었던 것이다.
이 곡수의 서쪽에는 을련성, 그리고 황룡성이 있다.

晉紀 第095卷 晉紀十七 (AD332–AD337)  《顯宗成皇帝中之上》 三年 p-3010
 三月,慕容皝於乙連城東築好城以逼乙連,〔乙連城,段國之東境也,在曲水之西。〕
(3월, 모용황은 을련성 동쪽에 호성을 쌓아 을련을 핍박하였다. [을연성, 단국의 동쪽 경계이며, 곡수의 서쪽에 있다.])
晉紀 第118卷 晉紀四十 (AD417–AD419)  《安皇帝癸》 十四年 p-3718
道生等拔乙連城,進攻和龍,(도생 등은 을련성을 격파하고, 화룡으로 진공하였다.)

이제 조조가 노령을 넘어 백단 평강으로 가는 중간에 넘은 청경과 용성의 관계를 보자.
青嶺即青陘,在龍城東南四百餘里。
용성은 청경의 서북 400여리에 있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청경은 고북구 밖 지금의 난평 지방, 유성은 류하의 동쪽, 용성은 지금의 구원에서 덕화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조조는 무종(지금의 창평 부근)에서 거용관을 넘는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route인 노룡(지금의 고북구)을 따라 동북으로 달려 난하의 상류인 곡수의 동쪽 유성으로 향한 것이 된다.
그리고, 모용씨, 고운, 풍발, 풍홍이 자리 잡았던 화룡성=용성은 지금의 내몽고 지방의 장가구, 고원, 덕화 일대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광개토대왕이 모용희의 도발에 화가 나서 쳐들어갔던 숙군성을 보자.

晉書/載記/卷一百二十四 載記第二十四/慕容熙
會高句驪寇燕郡,殺略百餘人.熙伐高句驪,以苻氏從,為衝車地道以攻遼東.熙曰:「待 平寇城,朕當與后乘輦而入,不聽將士先登.」於是城內嚴備,攻之不能下.會大雨雪,士卒多死,乃引歸.

모용희가 부인 부씨와 몽고일대를 유람하고 난 다음 대목이다.
(고 구려가 연군을 침범하여 100여인을 살육하였다. 희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부씨를 데리고 충차지도로써 요동을 공격하였다. 희는 ‘도둑성을 평정하기를 기다리라. 짐이 당연히 수레를 타고 왕후와 함께 들어갈 것이니, 장사들이 먼저 오르는 것을 듣지 않겠다.’고 하였다........)

바로 고구려가 숙군성을 공격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광개토대왕은 연군성=숙군성을 공격한 것이다.
그리고 장수왕은 내몽고지방을 평정하고 현재의 장가구 일대인 용성지방을 점령한 것이다.

조조의 오환 정벌은 우리에게 4세기 고구려의 북방정벌을 알려주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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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문제점

1. 류하가 노룡을 지난다는 점을 해결하지 못했음.
2. 정확한 유성과 용성의 위치를 지적하지 못했음.

저자의 생각.

1. 수경의 저자는 곡수가 백하로 흐른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실제 어이진 부근에 오면 류하와 백하는 거의 붙어있다.

2. 백하와 류하는 같은 강이다.  
濡[rú]水[shuǐ],  潞[lù]水[shuǐ]는 거의 음가가 같다. 로수는 백하이고 따라서 류수는 백하이었을 것이다.

3. 潞水는 大榆水이므로  臨渝=臨榆(둘다 yu로 읽는다.)는 당연히 大榆水곁에 있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臨渝는 현재 난하=濡水에 있는데 백하와 난하가 다른 강이었으면 당연히 臨濡라고 하였어야 했을 것이다.

4. 류수의 남쪽 지류에 천주거를 연결시켰다고 하였는데 원나라 이전 난하와 영정하를 연결시킨 적은 없었다. 따라서 천주거를 연결시킨 로하가 곧 류하인 것이다. (음가가 같으므로)

5. 泃河와 沽水는 모두 구하, 구수로 음가가 같다. 따라서 같은 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6. 백랑하는 백하의 지류인 백하라고 생각한다. 백랑하는 용성의 동남을 흐르고, 조조의 진군로 상에 백랑산이 있었으므로 아주 가능성이 높다.

7. 밀운에 속했던 안시는 안시성이라고 생각한다.
자치통감 진기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建安城在令支之北,乙連之南。
류수가 로하라면 영지, 비려, 해양은 류수를 따라 존재하였으므로 곡수의 서쪽에 있었던 을련지남, 영지지북이라는 등식을 만족할 수 있다.
따라서 건안성은 곡수의 서남쪽, 안시는 고북구 부근, 요동은 자금의 창려부근이 된다.
이 가설은 요동성에서 당태종과 이적이 안시를 건너 건안을 치자는 의견을 개진할 때 안시는 남에 있고, 건안은 북에 있다는 사서의 기록과, 통전에서 언급된 건안성은 요동 서쪽 300리라는 말과 완벽히 일치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수경주의 원문을 읽고 싶습니다.
제가 참고로한 수경주는 모두 자치통감에 실린 주석(아마도 현대의 주석으로 생각됩니다만)에서 얻은 것이므로 정확한 문구와 다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 능한 수경주를  참고문헌으로 삼은 이유는 유일하게 후위의 사람이 저술한 사서이므로 사실과 가장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수서, 위서는 당나라 사람이 저술한 사서이므로 약간의 가필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송나라 사람들이 쓴 구당서와 신당서는 아예 무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결코 몽고와 만주 땅을 돌아다녀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알 턱이 없죠.

다시 한번 수경주를 볼 수 있는 site를 아시면 제게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