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이상에 대한 평론

by 부르칸 2015. 4. 3.
머리말

어떤 의미로는 작가 이상의 말대로 '문학도 결국은 투기 사업'일 것이다. 그것은 있을 수 있지만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닌 독자를 겨냥한 투기이며, 중 간항에 해당하는 작품에 창조의 자유를 투기함으로써 자아 실현의 쾌락을 얻고 작품에 소집된 독자를 사로잡아 쾌락을 지불하도록 돼 있는 것이다. 이러한 쾌락은 이중의 벡터로 구성돼 있는데, 하나는 과거의 기억에 연결되 는 독자의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성에 미끄러져 가는 상실의 자유, 즉 작가 의 쾌락이다. 기억-상실의 역사를 기록한 창조적 체념을 삶의 방식으로 갖 는 작가는 언제든지 상실을 기억으로 바꿀 수 있는 상대적 진리, 완전한 구 형(球形)의 자유를 부여 받고 있다. 이러한 가역 반응은 반드시 존재하면 서 동시에 부재인, 육체이면서 또한 영혼인 인간을 그 촉매로 한다. 이러 한 촉매의 이중적 기능이 작품의 문학성이다. 인간의 일부로 육화된 날개는 의미 부재의 구조들 사이에서 그것과는 분리 된 사회적 내포 작용에 의해 해석적 상징이 된다. 날개는 영원한 상실과 기 억 사이로 무거운 바위를 굴리는, 신화적 상징의 중심에 둥지를 만들어 두 고 신화와 문학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진리의 모습이다. 진리는 죽음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공포이며, 고뇌이며, 생명이다. 그것은 지 금 여기서 자유로이 선택한 조건 때문에, 항상 보답이 따르는 뚜렷한 규칙 이 있는 체계가 아니라, 확정 불가능한 자발성으로 인해 무수한 시행 착오 를 겪는다. 작품의 문학성에 대한 성찰을 시도하면서 문학과 신화의 관계를 논하려 할 때, 우리는 항상 생물학에서 종(種)의 분화를 배우고 난 뒤와 같은 혼 란 속에 빠지게 된다. 생물학이 인간 존재를 규명하는 데 미흡하다는 편견 을 제거하고 생명이란 형이상학적 탐구 대상에 절대적 신뢰를 구축할 때 그 러한 혼란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같이 문학의 신화에 대한 관계는 인간 생장 과정과 비교 가능한 발전적 변형을 지속한다. 생명과 마찬가지로 과거 와 현재를 지속하는 문학성이야말로 작품을 항구적으로 살아 숨쉬게 해주 는 지표이자 상징이 된다. 프로타고라스가 얘기한 '만물의 척도'인 인간의 사고가 세분되고 협소해 진 탓에 깊은 심연의 수렁에서 방황하는 현대 문명의 외관이 보여 주듯, 대 부분의 자연을 파괴하고 이제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 게 만든 인간을 이성적 존재라고 인정하기는 어려운 실정이 되었다. 모든 생명이 과거와 현재를 순서 없이 포착한 종합적, 미래 지향적 존재라면 문 학이야말로 그 생명의 우주적 전개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부수적 특성이 며 반영인 것이다. 우리는 이상의 "날개"를 읽어 나가면서 그런 생명을 단 순한 물질적 고뇌로 까지 축약시키지 않도록 유의해 가며 작품의 설명적 구 조를 분석하고 다양한 해석의 기반을 마련해 보고자 한다. 문학에서 쟝르의 선택이 창작의 알파(α)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독서 관점에서는 중심 과제가 아니다. 특히 시인이며 동시 에 소설가인 이상의 경우에는 그런 문제가 더욱 복합적일 수도 무의미할 수 도 있다. "날개"라는 작품이 소설인가 시인가 하는 질문은 우리가 읽어 내 려는 핵심의 가장자리일 뿐이다. 문학 쟝르의 역사적 변형을 밝힌다는 것 은 각기 다른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것처럼 우연적 일치만 드러낼 뿐이라 효과적 독서의 역할은 아니다. 그것은 작가만의 권리이며 아무나 권리를 주 장할 수 없는 신비이기도 하다. 우리 독서의 기본 자세는 대상을 궁극하려 고 대상과 혼연일체가 돼 작가가 자발적으로 드러내는 모순적 공간에서 자 연의 시간적 질서가 짜놓는 직물을 살펴 공리성을 뛰어 넘는 아름다움을 발 견할 수 있는 해탈의 정신이다. 그러나 출발점에서는 우리도 어쩔 수 없이 긍정적이고 생산적 역할을 수행할 얼마 안 되는 구속의 원칙들을 구조주의 비평의 양해 하에 도입할 것이다.

1. 모티프의 분석:방에서 나오기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의 이야기인 "날개"는 이상의 연애담이 '감정의 어떤 포우즈'를 취함으로써 '위조'된 문 학이다. '한 번지에 18가구'가 사는 19세기를 원소만 지적함으로써 20세기 로 비약해 버린 야심은 과연 무엇일까? "날개"란 이야기의 주된 골격은 '방 에서 나오기'라는 모티브에 관련된 일련의 행위들로 이루어진다. 모든 행위 들은 각기 하나씩의 기능을 담당한 세 단계 - ㉠ 개시 기능 ㉡ 진행 기능 ㉢ 결정 기능 -의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방에서 나오기'라는 명제는 '안 과 밖'이라는 공간의 구분에 따라 재차 분해해 하나가 세 단계로 이루어지 는 연속적인 두 개의 작은 '짝(sequence)'으로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여섯 단계로 하나의 큰 짝을 형성하는 '방에서 나오기'는 "날개"에 총 5번 나온 다. 이 작품에서 '방'이라는 것은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집'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런 '방'이 '장지로 말미암아 두 칸으로 나뉘어' 있어, 해가 드 는 아랫방이 안해 방이고, 볕 안드는 방이 '나'의 방인 것이다. 작품의 전 반부에는 안해의 외출을 매개로 방이 지닌 그런 양면성이 잘 묘사돼 있다. 안해의 외출은 또한 시시껄껄한 '불장난'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고, '책보만 한 해가' '손수건만하게' 돼 나감에 따라 안해의 귀가 행동이 실시되고 '나'는 다시 이불 속 연구로 축소된다. 안해가 외출을 하지 않을 때는 '50전 짜리 은화'가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방이 지닌 이중의 양상을 띄 어 '나'의 의문을 불러 일으켜, 급기야는 '질풍신뢰의 속력으로 광대무변 의 공간'을 달리는 지구 위에 사는 '내'가 닭이나 강아지처럼 주는 모이를 넙죽넙죽 말 없이 받아 먹기만 하다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돈을 놓고 가 는 쾌감'의 유무를 체험하고픈 욕구를 갖게 한다. 이리하여 '나'의 최초의 '방에서 나오기'가 실행된다. 가) 안해는 '나'를 늘 감금하여 두다시피 한다. 나) '나'는 돈을 놓고 가는 쾌감의 유무를 알고 싶다. 다) 안해의 외출을 틈타서 안해 방을 통해 밖으로 나온다. 라) '나'는 어떤 사람에게 돈을 내줘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다. 마) '나'는 안해 손에 돈 5원을 쥐어 주는 쾌감을 체험한다. 바) '나'는 오늘 밤에도 외출하고 싶다. 가)나)다)는 방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이고, 라)마)바)는 주제를 밝히는 정 보가 된다. 앞의 한 짝은 정태적 짝이고 뒤의 한 짝은 역동적 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작은 짝 두개가 합쳐 여섯 단계로 된 큰 짝이 총 5번 나오 는 가운데 제일 마지막 큰 짝의 라)마)바)에 해당하는 작품의 말미에서 우 리는 "날개"라는 작품의 예술적 구조화를 발견할 수 있다. 라) 안해에게 가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나? 마) 정오 사이렌이 울리고 사람들이 닭처럼 푸득거리고 주변이 현란의 극이다.



바) 오늘은 없는 이 날개야, 돋아라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사실'과 '오해'의 숙명적 절름발이 상태가 개운찮 은 느낌을 질기게 강요하고 있음을 본다. 그것은 '인공'의 날개인 탓도 있 겠고, 작가-'나'가 고의로 회피해 버린 '로직'의 부재 때문이기도 하다. "날개"를 소설이라 한다면 거기에 구체적으로 소설적 인물의 전형을 갖춘 이는 '나' 혼자 뿐이다. 어쩌면 이것이 이상이 자신의 작품으로 19세기를 봉쇄해 버리고자 한 야심인지도 모른다. 주인공 '나'의 근본적인 게으름을 핑계로 항상 '깅가밍가'한 의식의 불투명성이 주장되다 보니 '나'의 서술 로 구성되는 이야기는 당연한 결과로 소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게 만든 다. 예전에 있던 날개가 잘려 나가고 '자국'만 남아 있다는 비극적 세계의 인식은 작가로 하여금 지금껏 써 온 모든 페이지를 말소시키게끔 한다. 이 리하여 이야기는 끝에서 다시 처음으로 되돌려져 영원한 회귀를 거듭하게 된다. 이야기의 이런 수미상관(首尾相關)은 언어학이 정의해 둔 담화의 두 가지 관계에 적용할 수 있다. 하나는 이야기의 연속성을 이루는 '짝'들을 서로 연계하는 통합사적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유사하면서도 대립적인 '짝'들의 상관성을 나타내는 계열사적 관계이다. 모든 이야기가 다 그러하 듯 이야기의 도식은 유사하나 동일하지는 않은 두 가지 균형 사이에 끼인 하나의 움직임에 의해, 즉 앞에서 말한 역동적 짝에 의해 도입되는 불균형 에 의해 그려진다. 움직임, 바로 그것의 다양한 행동들은 여러 개의 서술 단위들이 조합되어 나열되는 전체이다. 우리는 그것을 '약호(code)'라고 하 는데, '약호'는 서술의 하부 구조가 된다. 다시 말하면, 마음껏 흔들 수 있 는 두 날개 사이에 끼여 있는 박제된 몸, 밖해(태양)와 '안해' 사이에 감금 돼 있는 '나', 아슴푸레함(아스피린)과 맑음(마르크스) 중간에 위치한 '나'의 판단, 그런 것들로 설명되는 '부부 관계'가 의미론적 하부 구조를 형성한다. '아스피린'이 '아달린'과 교체됨으로써 이 부부 관계에는 안해 의 모가지가 떨어지는 마술적 변형이 가능해지며, '아달린'은 '나'에게 '닭'과의 동일성을 획득하게 해준다. "날개"의 천체적 약호는 해와 달(남 매)이라는 인척 관계의 것이고, 종교적 약호는 낮과 밤(나와 안해)이라는 부부 관계의 것이 된다. 사회적 약호는 '방에서 나오기'와 연결되는 것으로 서 직업과 돈(방과 은화)이며, 발견적 약호는 밖과 안(닭과 알)이다. 사회 적 약호와 발견적 약호에 있어 방은 '나오기'의 대상과 나옴으로써 생기는 변형이 성립하는 곳을 말한다. 이러한 변형에는 1) (실체에 대한) 기술적 변형, 2) (형의 변화를 가져 오는) 마술적 변형 3) (~을 할 수 있다...는 동사적이며) 언어학적인 변형, 세 가지가 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나오 기'에 관련된 의미 구조를 '불(밝음)/물(어둠)'으로 재현할 수 있을 것이 다. 다섯 번째 해석적 약호는 발견적 약호와 연결되는 것으로서 '방으로 부 터의 암호 해독' 즉 '나오기'라는 그 변형이고, 이 작품이 제기하는 수수께 끼의 풀이가 된다. '나오는' 행동의 주체는 '나'이므로 우리는 작품을 통하 여 '나와 밖해(태양)', '나-낮', '나-직업(외출)' '나-닭(벙어리→병아 리')'라는 동일성의 획득이 가능하다. 위와 같은 유사한 작업의 반복을 생 략하고 우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방에서 나오기'라는 모티브가 '어두운 기억 을 재생하기'로 바꿔질 수 있음을 알리고, 보다 자세한 분석은 서술적 모티 브가 지니는 막강한 연상과 대치의 능력에 의거해야 할 것이다. 2. 모티프의 신화적 독해





"날개"라는 작품의 신화적 독서를 결정한 우리는 우선 이야기 줄거리의 명 백한 신화적 기의를 택할 것이다. 이것은 곧 '방에서 나오기'라는 모티브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신라 시대의 삼성(三姓) 신화로 작업을 하게 될 것이란 말이다. 그런 문헌 신화들 외에도 우리 구전 설화들에는 겨드랑이에 비늘이 있는 힘센 장수의 비극적 이야기가 무수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상 의 신화적 감수성이 소설적 상상력에 자리를 양보하는 미덕을 살피려는 희 망으로 굳이 아래와 같은 언어학적 전망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박혁거세 신화: 박혁거세는 박같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성을 '박'이 라 하고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름을 '혁거세'라고 부른 것이라 한다. 하지만 신화의 문맥을 자세히 음미하면, 우리는 박혁거세는 '박이나 해같은' 둥근 알을 깨고 나온 '거북이나 새처럼' 귀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근거는 난생신화(卵生神話), 특히 거북과 새(닭)의 신화가 신라 신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에서 추론된 것뿐만 아니 라 어원학적 관점에서도 획인이 가능하다. 우선 이해를 돕는 이 신화가 갖 는 난생 신화, 용신사상(龍神思想)으로서의 성격을 참고해 보자. '박'이라 는 단어가 '밝음', '빛"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부루', '비로' 등의 어원이 난생 신화와 관련되는 것을 봐서도 알 수 있다. 실제로 '해부루'라 는 이름은 신라의 국조인 이 태양의 자손 '박혁거세'와 언어 혈통적으로 그 리 멀지 않다. '혁(혁)'의 뜻은 '붉다'인데, 지금도 쓰고 있는 '불을 켜다 (혀다)'에서 그 어형을 발견할 수 있다. '혀다'는 '타다'는 뜻으로 쓰기도 하는데, '타다'는 '불이 타다', '말을 타다'처럼 상승의 이미지를 갖는다. 여기서 우리는 '혀'와 '해'의 관계를 조명할 충분한 자료를 갖고 있지는 않 지만, 나머지 부분의 설명에서 그 난관은 쉽게 해결될 것이다. '거세'는 '거서간(거슬한)'을 말하는데, '세', '서' '슬'이 혼동돼 쓰이는 것으로 봐 우리는 주저 없이 '거세'의 어원이 '거스'라고 말할 수 있다. '거스'는 '거쉬'(자회 상 21)가 지렁이를 말하는 것처럼 용신 사상과 관계되는 것으 로, 지금도 '거싱이'(경상), '거시'(전라), '거생이'(경상, 전라) 등의 사 투리로 쓰이고 있다. " 날개"의 서두에 나오는 '니코틴이 회배 앓는 뱃속으 로 스미면'이라는 한 문장은 우리의 독서법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회충은 바로 거쉬로 일러 오던 것이니까 말이다. 후백제 견훤은 지렁이의 자손으 로 전해지고 있다. 지렁이는 금붕어의 '지느러미'로, '나'의 '기지개로 드 러나는 겨드랑이'로 바뀔 수 있다는 단언은 '진개나리꽃, 종달새, 돌맹이 도 새끼를 까는 이야기'에 비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작품의 공간인 '33번지'는 아라비아 숫자의 그 모양만 보더라도 실상 지렁이가 스물스물 기어 다니는 곳이 아니겠는가? '거쉬'의 뜻을 확장하기 위해 우리는 난생 인 '거북과 거위'라는 두 가지 동물을 예로 들어 보면 이 둘도 동일한 어 원적 위상을 지니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박혁거세 신화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 오는 것이 아니고 아래에서 위로 올라 가는 것을 형상화하고 있는 신화라고 할 수 있다. 박혁거세의 왕비는 '알 영'이라는 우물에서 용이 탄생시켰는데 입이 닭의 부리같았다고 전해 온다. "날개"의 앞 부분에서 (난생 동물들처럼 아비 모르는 또는 아비 없는 자식 을 가진) 여왕벌과 미망인이 언급된 까닭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이 될 듯하 다. 박혁거세 신화가 "날개"의 독서에 도움이 될 부분은 '해가 드는 방에서 내가 불장난하는(거생이의 용꿈)' 대목에 해당한다. 2)석탈해 신화 : 탈해는 원래 용성국 왕자이나 태어날 때 알로 태어난 출생 의 신비로 인해 궤짝에 넣어져 배에 실린 채 모험을 한다. 그 배는 붉은 용 이 호위하고 있었는데 가락국의 앞바다 아진포에 도달했을 때는 까치가 수 없이 몰려와 울었다고 한다. 알에서 깨어나고 궤에서 풀려났다고 해서 '탈 해'라 하고,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를 떼어 내고 성을 '석(昔)'이라 했다 한다. 그러나 '석'은 '새'에서, '탈'은 '타다'라는 동사에서, 해는 태 양을 의미하는 우리말 '해'로도 풀 수 있을 것이다. 즉 '탈해'는 '불타는 태양'이란 뜻이며, '석탈해'라는 이름은 '새의 영혼이 사후에 찾아가는 태 초의 낙원'에 대한 향수를 상징한 것이라는 말이다. 석탈해 신화는 무엇보 다 모험의 신화이다. 탈해와 수로의 권력 다툼이나, 호공의 집을 차지하려 는 탈해의 계략(예전에 대장간을 하던 자기 조상의 땅이라는 주장)이 바 로 그 증거이다. 탈해가 수로와 내기할 때 새로 둔갑했다는 것은 '석'이 '새'에서 나온 말임을 알게 해 주는 일화이고, 대장간 이야기는 돋보기로 불을 얻는 기술을 뜻한다. "날개"에서 주인공 '나'의 자아 회복의 줄거리, 곧 안해가 준 돈을 다시 안해에게 갖다 주게 되는 행동의 변화는 탈해가 호 공의 집에 숯돌과 숯부서러기를 파묻어 지어낸 대장간 이야기의 구조와 일 치한다. 그것은 '아달린'이 '아스피린'으로 다시 '아달린'으로 인식되는 과 정이다. 이렇게 보면 "날개"는 새처럼 높이 비상하는 의식의 빛이 '방에서 나오기'라는 모험에 찬 시도로 재생되는 것을 형상화한 영웅 탄생의 신화 에 해당한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 곧장 수중의 '어둠을 헤 치고' 바다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하게 된다. 태양의 죽음과 탄생이라는 제 의를 구현하는 이런 상징 체계는 우리에게 흔히 알려져 있는 신화적 원형이 다. 탈해는 왕의 사위가 됨으로써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날개"의 '나' 는 밖에서 들어 온 '내객'이 안해에게 주고 간 은화를 안해로 부터 받아 도 로 안해에게 지불함으로써 '내객'의 입장으로 탈바꿈한다. 그 때문에 '나' 는 안해로 부터 '공주를 도둑질하러 다닌다, 계집질하러 다닌다'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이런 역설적 구조는 앞에서 말한 그런 역동적 짝에 의해 작 품의 진정한 문학성으로 승화하는데, 탈해의 호공에 대한 역습에서와 마찬 가지로 우리의 흥미를 끄는 이야기의 절정에 해당한다. 탈해는 죽어서 토함산의 산신이 되는데, 산신의 원형은 식물의 상징주의에 의해 인간 의식의 탄생을 훌륭히 재현한다. "날개"에서도 역시 '익살 맞은 맛의 아달린'을 여섯 개나 한꺼번에 먹고 나서 '나'는 볕 들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몽롱하게 보낸 나날과는 달리 바깥에서 '잠결에도 바위 틈을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일 주일을 자고 일어난다. 화장품과 안해의 향기가 지하 로의 여로라는 내향성의 상징이라면, 은화를 지폐로 바꾸는 환전 행위는 외 향성화의 명백한 상징이다. '야맹증'은 내향성'에, '옥상'은 '외향성'에 속 하는 상징이다. 우리는 여기서 "날개"가 탈해 신화처럼 의식의 각성, '정오 의 깨달음'을 뜻하는 신화적 원형에 일치함을 알 수 있다. 3)김알지 신화: 탈해왕 시절에 반월성 너머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 리고 나서 황금 궤짝 안에서 발견된 존재가 알지이다. 박혁거세의 발견에 백마(白馬)가, 탈해의 발견에 까치가 알지 신화에 나오는 '닭'과 같은 역할 을 수행하고 하늘로 날아 올라 갔다. 박혁거세는 '박'같은 알에서 나왔고, 탈해는 태어날 때는 알로 발견될 때는 궤짝 안에 있는 사내 아이였다. 알지 는 알로 태어나지 않고 바로 궤짝으로 부터 나왔다. '알-(알과 궤짝)-궤짝' 이라는 사회 문화적 변화는 '알/궤짝'이라는 대립항으로 신라 삼성 신화가 갖는 의미 발생의 하부 구조를 이룬다. 알지가 신라왕의 조상이 될 수 있 었던 것은 탈해처럼 궤짝에서 나온 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지라는 이름은 박혁거세가 세상에 처음 나타나 스스로를 일컬어 '알지거서간'(한번 일어 나다 라는 뜻이라고 한다)이라고 말한 데서 '알지'라는 말을 따 붙이고, 성은 황금 궤짝에서 나왔다 해서 '김(金)'이라 했다 한다. 성을 '금'이라 하지 않고 '김'이라 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에 대한 우리의 풀이는 이렇 다. 예전부터 심마니들이 사용하는 말에 보면 '닭'을 뜻하는 용어에 '기애 기', '끼애기', '끼야기'라는 것이 있다. 김알지는 '기애기'의 이두식 표기 라는 것이다. '기애기'는 '닭의 아기' 즉 '병아리'가 되는 셈이다. 삼국 유 사에는 '알지'가 '아기'의 뜻이라고도 밝혀져 있지만 우리는 '금(金)'이라 는 한자를 '김'으로 읽는 것에 대한 의문을 풀기는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 말에서 '김(수증기)', '김치(발효 식품)', '기둥', '기와', '낌새', '깃(날개)', '기름' 등의 의미를 참고하면, 우리는 '기'의 어원이 '날아오 름', '땅과 하늘 사이에 곧추서기', '안에서 밖으로 드러나기'와 같이 물질 의 상승적 변화라는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날개"에서 주인공이 '닭과 강아지'에 비유되는 것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 '개구리 (방에 누워 있는 주인공의 모습)', '기지개', '벽에 기대기', '무엇이라도 견디기'(비록 감기라도)' 등 '기'를 연상시키는 말이 두서 없이 나열되고 있다. '오얏나무 궤짝'이라는 뜻의 '이상(李箱)'은 김해경의 필명이다. '이(李)'는 조선 왕조의 성인데 김해경은 하필 남의 성을 필명에 차용했을 까? 한마디로 "날개"는 이제는 왕의 성이 아닌 '김(金)'을 왕의 성인 '이 (李)'에 일부러 감금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것 은 융(Jung)이 말한 '집단무의식'의 문학적 표현에 대한 좋은 예가 될 수 도 있을 것이다. '기'에 관련되는 문화적 변화는 레비 스트로스가 제공한 분석 도구인 '삶은 것과 구운 것'이나 '날 것과 발효된 것'의 대립으로 구 성되는 요리 체계의 문화적 차이점을 원용하면 '알과 궤짝'의 신화적 변화 와 일치한다. "날개"에 나오는 방은 '궤짝 속의 알'처럼 이중 구조로 돼 있 어 주인공 '나'의 의식의 빛을 탄생시키는 '방에서 나오기'라는 모티브 역 시 겹구조 속에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김알지 신화가 "날개"의 독서에 기여하는 바대로 이 작품은 주인공 '내'가 먼 신화적 기억의 뒤안길 에서 되살려 낸 '희망적 존재'로서 자아를 확신하는 드라마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맺음말

"날개"뿐만 아니라 이상의 산문은 대개 소설적이기 보다 시적 이미지가 풍부한 작품들이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제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럴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감정은 어떤 포우즈
여왕봉과 미망인
..............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리 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
였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다시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렇게 시작되고 끝을 맺는 한 편의 시가 "날개"라는 작품의 전체 서술을 포용하고 있다. 한 편의 시를 써 놓고 기도한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제와 날개와 여왕봉이 취하는 감정의 포우즈는 어떻게 다를까? 천재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33번지 18가구의 생활상 어떤 구석이 흥미를 끄는가? "날개"는 오직 천재 자신의 희망과 야심의 이면에 숨어 있는 연애의 유쾌함이 말소시키는 문학적 사명에 대한 고발이다.
'문학자가 제 문학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제 생활을 기피하였다는 당대의 비극'을 몸소 실천한 작가가 이상이다. 그가 '이런 맹랑한 포즈가 의외에도 교언영색지격이라는 것을 간파할 줄 믿는다'라고 한 겸허한 고백은 문학적 양심 선언으로서 작가된 자에게는 영원히 기억돼야 할 시금석일 것이다. 대상이 비뚤어져 있는데도 자신의 시각을 고쳐 살아 온 종족을 조상으로 하고 있는 우리가 그릴 수 있는 도식은 산문적이라기 보다는 시적이라는 것을 이상은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본래 '시라는 것은 인간의 신화를 창조한다. 시인은 귀신과 악마의 힘을 빌리는 주술로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죽기에 이르기까지 패하는 것을 선택한다. '인간 기도의 총체적 좌절을 확신하고, 그 자신의 유다른 패배로써 전반적인 인간의 패배를 증언하기 위해 그 자신의 인생부터 스스로 좌절하도록 처신하는 이상의 연애담은 그의 작품 도처에서 확인된다.
"가령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물을 상 찌푸리지 않고 먹어 보는 거, 그래서 거기도 있는 맛인 맛을 찾아내고야 마는 거, 이게 말하자면 패러독스지. 요컨대 우리들은 숙명적으로 사상, 즉 중심이 있는 사생활을 할 수가 없도록 되먹었거든. 지성-흥, 지성의 힘으로 세상을 조롱할 수야 얼마든지 있지, 있지만 그게 그 사람의 생활을 리드할 수 있는 근본에 있을 힘이 되지 않는 걸 어떡하나?"-("단발")

시인 이상은 애초부터 그런 역설적 인간 조건을 좌절로 받아들인다.
"인류가 아직 만들지 아니한 글자가 그 자리에서 이랬다 저랬다 하니 무슨 암시이냐가 무슨 까닭, 한 번 읽어 지나가면 그도 무소용인 글자의 고정된 기술방법을 채용에 하는 흡족지 않은 버릇을 쓰기를 버리지 않을까를 그는 생각한다. 글자를 제것처럼 가지고 그 하나만이 이랬다 저랬다 하면 또 생각하는 것은 사람 하나 생각 둘만 글자 셋 넷 다섯 또 다섯 또또 다섯 또 또또 다섯 그는 결국에 시간이라는 것의 무서운 힘을 믿지 아니할 수는 없다."-
("지도의 암실")

아무리 반복해도 시원(詩源)에 도달할 수 없는 비극을 산문으로 읊는다는 것은 허위 의식의 소산이다. 세상 어디에 입 비뚤어지지 않은 여자가 있는가? 연애는 그에게 단지 모멸과 침뱉기의 대상일 뿐이다. "종생기"는 그런 삶의 '쓰레기', '우거지'같은 일 속에서 승천을 손꼽아 기다리는 뱀의 허물벗기이다. 그와 닮은 사람이 또 어디에 있는가? 거울 속에 보이는 그는 침울한 얼굴로 동시에 꼭 들어 온다. 그러나 거울 속 그는 그가 '매번 악수조차 나눌 수 없게 외출 중이다.' 거울 속의 그는 그가 스스로 죽지 않고는 죽일 수 없는 불사조이다. 그런 신기한 앵무새가 되기 위해서는 꿈속의 언어가 필요하다. 졸음과 게으른 수면이 주는 천혜의 보답으로, 그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또 그의 할아버지가 되고, 또 그들 둘이 함께 그가 되어 살아야 하는 짐스런 세상살이를 열 세 번 되풀이하고 난 뒤 최후의 만찬에 참석하는 영예를 획득한다. 즉 "날개"의 '나'처럼 천국 가는 자격인 움직이는 날개를 다는 것이다. "날개"는 문체에 대한 관심으로 시도된 작품이다. 그것은 쓰레기, 우거지를 수집해 재생하는 작업이었다. 어떤 거대한 모체가 갖다 버린 형태를 상실한 잔해들을 아름답게 성형 복원하는 외과 수술이 필요했다. 그러나 정작 복원된 그 모습을 봐서는 안 된다. 단지 피테칸트로푸스의 그 많은 자손의 먹이를 위해 아담과 이브로부터 세습돼 온 염세 사상만 을핏 엿보도록 허용돼 있다. 성서를 팔아서라도 고기를 사 먹어야 하는 지식의 확실성이 인정되고 있는 시점이 된 터에 그 모습을 보기만 한다 해도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짐작이 간다. 완전한 '나'의 창조를 위해서 우리가 다시 시작해야 할 일은 '이불 속 연구'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노릇이므로 그저 우리에게 수동적으로 베풀어지는 다소의 위안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신화이다. '나'를 금지된 시간대에 서둘러 귀가시켜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들어가야 하는 방으로 억지로 구겨 넣는 기술 방법 탓에 불안한 독서를 조장하는 숱한 욕설이 나열된다. 신화는 이렇게 난무하는 싸움패들을 달래고 단합시켜 자신의 종교를 구축한다. 진정으로 작가 이상이 듣고 있던 음악은 모차르트의 음악이 아니라 육자배기다. 이상이 중건한 신화의 궁전에 울려 퍼지는 음악은 된장국같이 거슬거슬한 맛을 낸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처음에 작품의 의미가 배어 나오는 하부 구조로서 설정한 영혼과 육신의 존재 방식이다. 육신은 영혼이 시간의 지층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거대한 신화적 대지로서, 이상에게는 음유 시인으로서의 생애를 설계하는 데 유일한 기반이며 비처(秘處)이다. 대지의 식탁 위에 요리의 화학과 잔치의 음악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다. 이제 신화가 돼 버린 이상의 비극적 일생을 우리는 그가 남기고 간 신화적 조사를 그에게 낭송해 주며 애도해야 한다. 낭송회에 참여해 그 조사를 다시 듣는 자만이 잔치상에서 이상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공복이면서도 포만하게 해주는 요리, 악몽처럼 들려 오는 자연의 진동, 점액의 증발로 도처에 얼룩을 남긴 몸부림의 분비물, 공중에서 벼락과 함께 들려 오는 천둥 소리가 이상의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그것은 천년 묵은 뱀이 용이 되어 승천하기를 기다리며 감수하는 고통이며,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로만 연명하며 인간으로 환골탈태를 꿈꾸는 웅녀의 시련과도 통한다. 그러나 이상은 결국 날개를 달고 창공을 훨훨 나는 모습을 연출하지는 않았다. 인간 존재의 정체 불명이 껍질을 벗기면 사라질지 언정 도무지 드러나지 않는 양파처럼 거짓 현실로서 방해를 가해 오기 때문이다. 그런 배신에 부글부글 끓다 마침내 피를 토하고 임종을 맞이한 이상은 마치 축음기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인 양"만 26세와 3개월을 맞이하는 이상 선생님이여, 허수아비여, 자네는 노옹일세. 무릎이 귀를 넘는 해골일세. 아니. 아니. 자네는 자네의 먼 조상일세."-(종생기)라는 증언을 듣고 있었다.

참고 문헌

李箱 短篇集, 金海卿 作, 서문문고(226), 1976
李箱詩集, 李箱, 정음문고(173), 1973
李箱(作家論叢書), 金容稷 編, 문학과 지성사, 1977
구조주의와 문학비평, 김치수 편저, 홍성사, 1980
三國遺事, 一然, 이민수 역, 을유문화사, 1983
국어대사전, 이희승 편, 민중서관,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