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유연(柔然) 동쪽에 접해있던 조선(朝鮮)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 19.
장진근 글
1. 글 머리에
 
   《십구사략통고(十九史略通考)》는 원래 원나라의 증선지(曾先之)가 각종 사서에서 상고 때부터 송나라 때까지 역사를 간략하게 편집한 것을 명나라 때 여진(余進)이란 학자가 정삭(正朔)의 승계, 즉 정통(正通)이 잘못 된 것을 주자(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의 체례에 따라 계통을 바로 잡아 정리를 한 다음 명나라 때 편찬한 《원사(元史)》의 기사까지 참고하고 각종 고증을 한 책으로 조선시대에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이 나오기 전까지 아동용 중국사 교과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여러 종의 책들은 서지학적인 정밀한 검토가 있어야 하겠는데 3가지의 책이 있었다. 하나는 명나라 때 직수입하여 선조 원년에 해당하는 융경 2년 5월 일에 행부호군 송순(宋純)에게 선조 임금이 도승지를 통해 하사한 내사본(內賜本)이 있고, 아마 이를 근거로 조선 활자본으로 찍어낸 판본이 보이는데 이는 현재 중국대만중앙학연구소 희귀도서로 올려 있으며, 나머지 한 종류는 일본 명치 때 출판 된 서적이 국내로 반입된 것으로 보여졌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조선본에서는 조위(曹魏)의 창시자 조조(曹操)의 성씨를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조(曺)"자를 쓰고 있는데 반해 이 책에서 "조(曹)"자를 쓰고 있는 점, 다른 판본에는 없는 표점부호 " 。"를 쓰고 있는 점이라 하겠다.
 
   우리나라에서만 쓴다는 曺자와 관련하여 단국대에서 편찬한 《한국한자어사전》에는 曹자의 이체자로서 우리나라 성씨에서 주로 사용한다고 하였다.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동아한한중사전(東亞漢韓中辭典)》에는 성 조로 훈하고, 중국에서는 曹자로 쓰고 우리나라에서는 曺자를 쓴다고 하였다. 왜 그렇게 달리 쓰는지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서 모르겠으나 조선본에서는 "曹操"를 "曺操"로 썼다.
 

 
   첫째줄과 다섯째 줄에 "曺操"로 써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진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명정통11년본 사진 모습이다.
 
   뒤에서 셋째 줄간에 "初曹操自討卓時"를 앞 자료의 첫째 줄 중간의 같은 글자와 대조해 보라. 똑같은 문장이 시작하는 곳에서 조조의 표기는 서로 다른 것을 발견할 것이다. 여기서는 曹操로 표기되어 있다. 또 분구가 되는 곳에 부호 " 。"를 사용하였다.
 
2. 선본(善本)은 어느 것인가
 
   선본(善本)이란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희귀한 판본 혹은 필사본을 이르는 말이다.
 
   실물을 보지 않고 국립중앙도서관에 수장된 데이터 자료에 의해 대충 살펴 보았더니 미려한 활자체는 단연 조선본이 가장 뛰어났다. 어떤 글자인지는 서지학자의 전문적인 검토가 있어야 하는데 정말 글자체가 예쁘고 인쇄상태도 아주 잘 되어 있다. 자료의 충실면에서는 중국에서 수입된 판본인데 증선지(曾先之)가 원대 처음 편찬할 때 서문을 비롯하여 명나라 때의 대본(戴本)의 십구사략통고서(十九史略通考序) 및 여진(余進)의 사략통고후서(史略通考後序)도 들어 있고, 목록도 들어 있다. 본고에서는 이 책의 여진의 서 말미에 정통 11년 세재 병인 2월 삭단(朔旦)이라고 날자가 정확한 기록되었으니 이 판본의 이름을 편의상 명정통11년본이라고 약칭한다.
 
   목록    권1  태고(太古) · 삼황(三皇) · 오제(五帝)
                   하(夏) · 은(殷) · 주(周)
                   춘추전국(春秋戰國)
             권2  진(秦) · 서한(西漢)
             권3  동한(東漢) · 촉한(蜀漢) · 서진(西晉)
             권4  동진(東晉) · 남북조(南北朝) · 수(隋)
             권5  당(唐)
             권6  오대(五代) · 송(宋) 
             권7  남송(南宋)
             권8  원(元)
 
    눈에 띄는 특징으로 진수의 《삼국지(三國志)》에서는 조조의 위(魏)를 정통으로 보아 《위서(魏書)》에만 본기가 있고 오나 《오서(吳書)》·《촉서(蜀書)》에는 본기가 없으며 관련 기사는 오주, 촉주로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서 여기서는 촉한이 정통을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중국의 북부를 차지한 것은 금나라며 양자강 하류로 밀려 겨우 반벽강산(半壁江山: 침략으로 빼앗기고 남은 국토를 이르는 말)으로 편안(偏安: 중원을 잃고 일부 지방에 안거함을 만족하는 것)해야만 했던 남송으로 정통으로 체면을 유지하고 있으며,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도 빠졌다. 바로 이런 사관들의 확고한 정삭관념(正朔觀念)이 있었기 때문에 《요사(遼史)》 ·《금사(金史)》가 편찬을 보지 못하고 80년 동안 논쟁을 거듭하다가 결국 이민족이 세운 원나라 때에 이르러 비로소 논란의 종지부를 찍고, 송나라나 금나라를 모두 정통으로 인정하는 선에서 타협이 되어 자연스레 《송사(宋史)》·《요사(遼史)》·《금사(金史)》 등이 한꺼번에 편찬이 되었던 것이다.
 
   목록 다음에는 각종 지도가 들어 있다
 
    《천지미분도(天地未分圖)》, 《삼황오제도(三皇五帝圖)》, 《역대제왕수수도(歷代帝王授受圖)》(上) · 《역대제왕수수도(歷代帝王授受圖)》(中) · 《역대제왕수수도(歷代帝王授受圖)》(下), 《역대제도지도(歷代帝圖之圖)》, 미상도(희미해서 판독불능), 《오호잡패지도(五胡雜覇之圖)》, 《오대체거지도(五胡替據之圖)》, 《십구사지리도(十九史地理圖)》, 미상도(희미해서 판독불능), 《춘추전국도(春秋戰國圖)》, 《전국칠웅지도(戰國七雄之圖)》, 미상도(희미해서 판독불능) 등이 있다.
 
   위 지도들은 스캔상태가 아주 부량하여 식별하기 곤란하며 어떤 지도에는 일본사람들이 중국을 얏잡아 잘 쓰는 "지나해(支那海)"가 표기된 것으로 보아 일제 때 어느 누구에 의해 손댄 듯하며, 한반도의 지도도 오늘날의 지도와 똑 같아 역시 누가 손댄 듯하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의 원본에서 판독이 잘 안되는 부분을 가능한 한 복원하여 정리한 듯하다.
 
   다음에는 《고금역대찬사제유성씨명단(古今歷代撰史諸儒姓氏名單)》이 수록되어 있다.
 
   《사기(史記)》, 전한 · 후한국, 《진서(晉書)》, 남북사, 《수서(隋書)》, 《당서(唐書)》, 오대(五代), 통감으로 구분하여 사마천 등 104명의 명단이 수록되었는데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제왕으로 유일하게 당태종의 이름이 들어 있다. 거기 주석에 의하면 《진서(晉書)》를 편찬했다고 하였다. 필자가 쓴 여러 글 중에 《진서》에 가장 문제가 많다는 주장을 한 일이 있다. 그의 주도로 《칠서(七書)》가 관찬으로 편찬되었는데 그는 고구려에 당한 보복으로 그가 관여한 사서에서 붓장난을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또 특히 주목해야 할 문제의 인물로 신찬(臣瓚)이란 사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거기 주석에 의하면 어디 출신인지 어느 때 사람인지도 자세히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성이 우씨(于氏) · 부씨(傅氏)라고도 하는 데 모두 믿을 수 없다.(臣瓚, 不詳所出 · 何代. 或云姓于 · 姓傅, 皆未足信.)  우리는 이런 성도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정체불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조선은 어떤 말에서 유래했다고 했다든지, 험독은 지금의 평양이다라고 몇 마디 붓장난을 해 놓고 한사군 등을 모두 한반도로 끌여 들였다. 그뿐인가? 정사의 어느 기록에도 없는데 교모하게 주석을 이용하여 지금은 없어진 무슨 《태강삼년지기(太康三年地記)》에 낙랑군 수성현에서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한 곳이다라는 둥 엉뚱한 붓장난을 일삼고 있다.
 
   다음에는 《주자통감강목범례(朱子通鑑綱目凡例)》가 수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정통례(正統例) · 제왕례(帝王例) · 황후례(皇后例) · 황태자례(皇太子例) · 열국례(列國例) · 대신례(大臣例) · 사중례(師衆例) · 주살례(誅殺例) · 잡례(雜例) 등의 순으로 적혀 있다.
 
   이 책은 《주자통감강목범례》에 따라서 글을 쓰겠다는 작자의 결의이다. 
 
3. 명정통11년본의 의의
 
   이 책의 봉면에 들어 있는 내사기(內賜記)에 의해 수장 연월일 · 경위와 피교부자가 인적사항정확히 기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판본에는 없는 목록, 천지미분도(天地未分圖) 등 지도, 고금역대찬사유자명단(古今歷代撰史儒者名單), 주자통감강목범례(朱子通鑑綱目凡例) 등이 기재된 완벽한 판본으로 보여지며, 특히 지도 가운데 십구사지리도(十九史地理圖) 같은 경우 조선이 압록강 북쪽에 그려져 있는 등 우리 고대사 연구에 아주 주요한 증거가 되는 자료로 판단된다.
 
4. 동진말 기사에 등장하는 조선(朝鮮)의 정체
 
   조선이라는 국호는 예전 우리나라 이름이라서 그런지 듣기 좋고 그저 아름다운 이름으로 여겨진다. 어렷을 때 나이 지긋한 사람들로부터 저도 조선사람이면서 자조섞인 것인지 왜놈들 흉내를 내는 것인지 조선놈은 이래서 안된다커니 조선놈은 맞아야 한다든지 하는 말을 들을 때는 왠지 주늑이 들고 음습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자기들은 중화요 그 사방은 오랑캐라고 하였다. 동서남북 순으로 하자면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었다. 오랑캐라는 말도 그렇다. 중종 때 언어학자였던 최세진의 훈몽자회를 보면 호를 되 호로 훈했다. 언제부터 오랑캐라는 말이 쓰였는지 알 수가 없다. 사실 오랑캐는 여진족속인 우랑허족을 이르는 말이다. 따지자면 야만인이란 말의 대명사이다. 중국 사람들이 조선이란 좋은 지어 주었을 리가 만무하다. 아마 조선이란 우리나라에서 쓰던 말을 중국 사람들이 가져다 쓴 모양이다. 나라 이름으로도 두번이나 썼다. 그래서 옛날 것은 고조선이라 하고 나중 것은 근세조선이라고고 구분해서 쓴다. 북한에서는 조선이라고 쓰고 있다. 
 
   필자는 역사를 전공으로 하지 않았다. 아직도 정확히 역사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우연한 계기로 《만주원류고》를 역주하여 출판함을 계기로 어떤 언론에서는 민족사연구사라고 추겨주기도 하였다.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임금이 세웠다는 조선은 기자조선 · 위만조선으로 불려 오다가 결국 기원전 108년 서한의 광무제에 의해 멸망당했다. 조선을 멸망시키고 거기에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그 지역이 한반도에 있었다커커니 중국에 있었다커니 민족사학자와 소위 식민사학자들과 대립이 심하다. 
 
   필자가 《만주원류고》를 번역하면서 제일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이 어떤 나라를 중심으로 강역을 설명하면서 이미 망한 조선을 들먹이고 있는데 있었다.
 
   예를 들어 첫째로, 《후한서(後漢書) · 고구려전(高句麗傳)》에,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과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경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둘째로 《삼국지(三國志) · 고구려전(高句麗傳)》에,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朝鮮) · 예맥(濊貊)과, 동쪽은 옥저(沃沮)와, 북쪽은 부여(夫餘)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환도의 아래에 도읍을 하였는데 사방 2천 리가 되고 호수는 3만이다."라고 하였다.
 
   셋째로, 《삼국지(三國志) · 예전(濊傳)》에,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과, 북쪽으로는 고구려 · 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으니, 오늘날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라고 하였다.
 
   넷째로, 《양서(梁書) · 동이열전(東夷列傳)》의 모두에,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 중에서 조선(朝鮮)이 제일 강대하였는데, 기자(箕子)의 교화를 입어 그 문물이 예악에 합당하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첫째와 둘째의 예에서 공통분모가 있으니 고구려의 남쪽에 조선 · 예맥이 있다는 것이다. 《삼국지(三國志)》는 3세기 무렵에 서진의 진수(陳壽)가 쓴 기전체사서요, 《후한서(後漢書)》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중엽에 살았던 남조 송나라의 범엽(范燁)이 쓴 기전체사서이다. 위 예에서 예맥은 이해가 가는데 조선이란 도대체 어떤 나라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직까지 명쾌하게 설명하는 책을 보지 못했다. 진수나 범엽의 말대로라면 3세기에서 5세기 중엽까지도 고구려의 남쪽에 조선이 있었다는 데 그 정체가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의 경우도 의문은 마찬가지다. 《삼국지》는 3세기경의 저작이라고 하였으니 마지막에 나오는 오늘날의 조선은 과연 어떤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냐는 문제가 대두된다. 결국 첫째와 둘째 셋째는 하나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은 역시 그 당시에도 예의 서쪽에는 조선이 있었다는 말 다름 아니다.
 
   넷째의 경우 동이 가운데서 조선(朝鮮)이 제일 강하다고 하였는데 거기서 말하는 조선은 고조선을 말하는 것인지 그 때까지 존재하는 또 다른 조선을 말하는 것인지 문의가 명확하지 않다. 《양서(梁書)》는 7세기경 당나라의 요사렴(姚思廉)에 의해 편찬된 사서이다. 
 
   각설하고, 필자가 요즘 《십구사략통고(十九史略通考)》를 열심히 읽어 보고 있는데 똑 같은 의문사항이 제기되었다.
 
   원문은 이러하다. <  >안은 할주 부분이다.
 
   "柔然, 起於漠北, 奪高次之地而居之, 呑倂諸部。士馬繁盛, 雄於北方。其地西至焉耆, 東接朝鮮, 南臨大漠, 旁小國皆縻屬, 與魏爲敵。<焉音湮, 耆音支; 朝音潮; 屬音竹。柔然後秦屬國也。高車亦狄種也。焉耆西役國名。大漠代北之地。縻, 糜也。>"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유연(柔然)은, 사막 북쪽에서 일어나 고차(高車)의 땅을 빼앗아 그 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여러 부족을 병탄하였다. 군대가 강성하여 북쪽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다. 그 지역은 서로는 언기(焉耆)에 이르고, 동으로는 조선(朝鮮)과 인접하며, 남으로는 커다란 사막을 향하고 있다. 곁에 있는 작은 나라들이 모두 얌전하게 따르게 되었고, 위(魏)와 서로 맞먹을 정도다.
 
   주석부분은 언(焉)의 음은 인(湮)이요, 기(耆)의 음은 지(支)이다. 따라서 연기(焉耆)는 옌지로 발음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朝)의 음은 조(潮)이나 차오로 발음된다고 하였으니 조선(朝鮮)의 발음은 차오시엔이란 말이다. 속(屬)의 발음은 죽(竹)이나 쮸로 발음된다는 말이다. 유연(柔然)과 관련해서는 후진(後秦)의 속국이라고 했으니 먼저 후진이 어떤 나라인가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사해(辭海)》에 따르면, "후진(後秦)은 16국 중의 하나로, 비수전쟁(淝水戰爭) 후 강족 귀족인 요장(姚萇)이 서기 384년에 칭왕을, 2년 뒤에 칭제를 하고 국호를 진(秦)이라 하였으며, 장안에 도읍을 했는데 역사에서는 후진(後秦)이라 일컫었다. 오늘날의 섬서 감숙(甘肅) · 녕하(寧夏) · 산서(山西) 일부를 소유했다. 417년 동진의 유유(劉裕)에게 멸망당했다.
 
   고차(高車)와 관련해서는 북적의 종족이라고 하였다. 역시 사해에 따르면, 중국 고대민족인 철륵(鐵勒)의 별명으로, 철륵인들이 타는 수레 바퀴가 높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였다.
 
  언기(焉耆)와 관련해서는 서역의 국명이라고 했다. 《사해》에 따르면, "옛날 서역의 나라이름으로, 오기(烏耆) · 오전(烏纏) · 아기니(阿耆尼)로도 썼다. 국도는 원거성(員渠城)(현재 신강 어기 서남 사십리성자 부근이다)에 있었다. 주민들은 농업 · 고기잡이 · 목축 등에 종사했다. 문자가 있다. 처음에는 흉노에 속했다가 서한 신작 2년(B.C 60) 후에 서한 서역도위(西域都尉)에 속했다. 서한말에 또 흉노에 속했다. 동한 영원 6년(A.D 94) 반초(班超)가 흉노를 치자 또 내속하였다. 당초에 서돌궐에 붙었다."라고 하였다.
 
   대막(大漠)과 관련해서는 대북(代北)의 지역이라고 했다. 《사해》에 따르면, "대북(代北)은 옛날 지역명으로, 일반적으로 한 · 진(漢晉)의 대군(代郡)과 당 이후의 대주(代州) 이북 지역을 가리킨다고."라고 하였다.
 
   기(羁)는 고삐란 뜻의 미(縻)이다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기미란 뜻인데 이 말처럼 번역하기 어려운 것도 없다. 고대민족문화연구소에서 펴낸 《중한사전(中漢辭典)》에 의하면 얌전히 따르게 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소에 고삐를 매기 전에는 전방지축으로 날 뛰는 데 일단 고삐를 맨 소는 고삐만 잡고 있으면 얌전하게 따른다는 말이다. 필자는 어릴 때 소가 고된 일을 하고 힘이 들면 무릎을 꿇고 아무것도 먹지를 않을 때가 있다. 선고의 명으로 고삐를 붙잡고 있어라고 하면 그 어린 나이에도 꼭 붙들고 있으면 그 육중한 소가 꼼짝을 못하고 얌전히 있다. 이때 선고께서는 풀을 억지로 먹이시는 것을 보았는데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화사(花蛇) 등을 풀속에 섞여 먹이면 소가 벌떡 일어난다고 하였다.
 
   위에서 설명한 것은 주석부분을 부연 설명한 것이다.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위(魏)나라는 어떤 나라인가이다. 이는 북조의 하나로 기원 4세기 초 선비족의 탁발부(拓跋部)가 지금의 산서 북부, 내몽고 등지에 대국(代國)을 세웠다가 나중에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에게 멸망당했다. 비수전쟁(淝水戰爭) 후에 탁발규(拓跋珪)가 386년에 대국(代國)을 중건하고, 칭왕을 하였으며 곧바로 국호를 위(魏)로 개칭했다. 역사에서는 북위(北魏)라고 하며, 후위(後魏) · 탁발위(拓跋魏) · 원위(元魏)라도 한다.
 
   이제 위에서 말하는 조선의 상대적 위치와 존재했던 시대도 드러났다. 사막 북쪽에 있는 유연(柔然)이라는 나라의 동쪽으로 땅을 접하고 있으며 기원 4세기경 존재했던 조선(朝鮮)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필자는 화두만 던졌다. 그 답을 낼 수 있는 분들은 바로 여러분들이다. 분명히 고구려는 아닐 것이다. 고구려가 요동군을 지배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이를 선언적으로 적고 있는 것이 《송서(宋書) · 고구려전(高句麗傳)》에 이르기를, "동이 고구려국은 현재 한대의 요동군을 지배하고 있다."라고 말이다. 필자는 중국의 저명한 학자 김육불 선생이 쓴 《동북통사(東北通史)》 중에 일부 편장을 번역하여 본란에 소개한 바 있다. 그 글의 맨 마지막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중국은 고구려에게 요동을 내주어 2백년을 지배케 했다. 절치부심할 일이다. 뭐 이런 취지다.
 
   우리만 모르고 있는 조선이 4세기경에 막북 부근에서 불사조처럼 살아 있었다는 증좌를 바로 《십구사략통고》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