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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유리명왕은 예국(濊國)의 임금이었나?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2. 20.
강단사학에서는 예국(濊國)을 동예국(東濊國)으로 축소시켜 강원도 일부에 비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국(濊國)을 설명하고 있는 삼국지나 후한서에는 동예국(東濊國)이라고 하지 않고 단순히 예국(濊國)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단사학에서 왜 예국(濊國)을 동예국(東濊國)으로 축소시키게 되었는지 그 기록을 봅시다.

삼국지의 기록을 보면...

髙句麗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接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쪽으로 조선과 예맥과 접하였고, 동쪽으로 옥저와 접하였고 북쪽으로 부여와 접하였다.

여 기서 조선이란 지나의 군현 중 낙랑군 조선현을 의미하는 듯 합니다. 낙랑군 조선현은 기자조선의 봉국으로 난하유역이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 남쪽이 낙랑군 조선현과 예맥과 접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예맥은 난하 동쪽의 땅이 될 것입니다. 

東沃沮在髙句麗盖馬大山之東濵大海而居其地形東北狭西南長可千里北與挹婁夫餘南與濊貊接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에 닿아있다. 동북으로는 좁고 서남으로는 길어 거의 천리의 크기이다. 북으로 읍루 부여와 접하고 남으로 예맥과 접한다.

동 옥저는 분명히 흑룡강부근의 읍루의 남쪽에 있는 국가입니다.  즉, 생각보다 동옥저는 꾀 북쪽에 있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크기는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1000리 정도 되므로 남북으로는 1000리가 못될것입니다 (직각이등변삼각형이라고 가정하면 약 700리가 나오긴 합니다). 그리고 남으로 예맥과 접한다고 하였으므로 읍루의 약 700리 남쪽에 예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국지에서는 요서에 있었던 옥저국과 구별을 하기 위하여 동옥저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국은 다릅니다. 東자가 붙지 않습니다. 

濊南與辰韓北與髙句麗沃沮接東窮大海今朝鮮之東皆其地也
예(濊)는  남으로 진한과 접하고 북으로 고구려 옥저와 접하였다. 동으로 바다에 닿으며 지금 조선의 동쪽은 모두 예(濊)의 땅이다.

여기서 조선도 또한 낙랑군 조선현이 됩니다. 예국(濊國)은 상상 의외로 큰 나라로 여겨집니다. 지금의 난하를 서쪽끝으로 시작하여 지금의 동해와 오츠크해까지 해당하는 매우 큰 나라입니다. 일반적으로 후기 고구려땅의 중심지라고 생각되는 남만주 일대가 모두 예국(濊國)의 땅이라고 삼국지는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단에서는 낙랑군을 평양으로 비정하고, 개마대산을 개마고원으로 비정하여 예국을 강원도에 동옥저를 함경도에 비정하였습니다. 또한 예국(濊國)이 강원도에 있을 경우 사서에 예국이 요서에 있어야 설명되는 기록이 있으므로 있지도 않은 동예국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제가볼때는 예국은 부여만큼이나 큰 나라였던 것 같습니다. 요서에서 연해주까지 걸친 영토를 가진 것이죠. 그래서 지나의 기록에도 조선현의 동쪽이 모두 예국의 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국(濊國)이 큰 나라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 삼국지도 또한 보입니다.

其印文言濊王之印國有故城名濊城盖本濊貊之地而夫餘王其中自謂亡人抑有似也
(부여국의)옥쇄에는 "예왕의 옥쇄"라고 말하는데, 그 나라의 옛 성에 예(濊)나라 성이 있다. 따라서 모두 본래 예맥의 땅이다. 

이 기록은 부여가 예맥의 땅을 차지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신채호 선생은 삼국지에 나온 예(濊)를 두고 이는 동부여(東扶餘)를 두고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읍루의 남쪽, 신라의 북쪽, 낙랑군 조선현의 동쪽에 있는 나라는 동부여이기때문이죠. 어째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예국은 난하에서 동해와 오츠크해에 걸친 매우 큰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한 점은 삼국사기 어느곳에도 예국(濊國)을 정벌하였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습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행인국 동부여 북옥저 등의 나라들을 정벌하여 자신의 군현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예맥을 정벌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더 이상한 점은 고구려와 예맥이 같이 군사행동을 한 기록이 보인다는 것이죠. 하나만 예를 들면 고구려 태조대왕 66년

六十六年...夏六月王與穢貊襲漢玄菟攻華麗城
태조대왕 66년 여름 6월에 예맥과 함께 한나라 현도군을 습격하였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가 예맥을 점령하지도 않고, 예맥과 고구려가 이렇게 군사행동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 추측입니다만, 유리왕(琉璃王)의 어머니인 예씨(禮氏)는 바로 예씨(濊氏)이며 예맥국의 왕족이었던 것이죠. 고대에 나라이름을 자신의 성씨로 사용하는 경우는 아주 많았습니다. 따라서 예씨부인은 예맥국의 왕족으로 유리왕은 예맥국의 임금이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유리왕이 고구려에 투항하였다는 것은 난하유역에서 동해와 오츠크해까지 이르는 큰 영토를 가진 예맥국과 난하 북쪽을 차지하였던 고구려가 하나의 나라가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일 것입니다. 동명성왕이 유리명왕을 다음 임금으로 삼음 이유는 정통성 이유라기보다는 국가의 이익에 관련되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유리명왕이 북부여에 예속되어 있던 예맥국을 자신의 친아버지인 동명성왕에 떠다 바친것으로 볼수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