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위만이 망명할때 건넌 강은 패수가 아니며 황하(黃河)의 지류인 추수(溴水)라는 곳이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5. 17.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할 때 건넜다고 말하는 패수(浿水)가 맞는가?

위만의 망명에 대한 기록

패 수(浿水)란 고대에 평양(平壤)에 흐르던 강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곳에나 패수(浿水)가 존재할 수가 없죠 평양에 흐르던 강이 패수이고, 패수가에 건설된 도시가 바로 평양입니다. 참고로 신채호선생의 조선사연구초에 보인 평양 패수에 관한 글을 인용하시니 참고하세요.

"사책에 보면 平壤, 平穰, 平那, 卞那, 百牙, 樂浪, 樂良, 浿水, 浿江, 浿河 등은 다만 “펴라”를 가종의 假音으로 쓴 자니, 平壤, 平穰, 平那, 卞那, 百牙는 다 그 음의 초성을 讀하여 “펴라”가 되고, 樂浪, 樂良은 樂의 뜻 “풍류 ”의 초성을 讀하며, 浪과 良은 그 음 “랑”의 초성 중성을 독하여 “펴라”가 되고, 浿水, 浿江, 浿河는 浿의 음 “패”의 초성을 독하며 水 江 河의 뜻 “라”의 全聲을 讀하여 “폐라”가 된 것이니, 이상 云云은 졸저 이두문 해석에 설명한지라. 여기에서는 상술하지 않거니와 “펴라”는 본래 강의 이름으로 그 江上에 건설한 도성도 “펴라”라 명한자니..."

그런데 사기 조선전에 보면 한(漢)나라는 동북쪽 변경이 너무 넓어 그 땅을 지킬수가 없으므로 물러나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였다 하며, 그 후로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할 때 패수(浿水)를 건넜다 합니다.

"漢興為其逺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
한 나라가 일어나니 그 먼곳은 지키기가 아려워 요동의 옛 성을 수리하여 패수를 경계로 한 뒤에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나라 후(侯) 노관이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위만은 그 무리 1000여명을 데리고 조선의 옷을 입고 망명하여 동쪽으로 성을 빠져나와 패수를 건너 옛 진(秦)나라와 조선 사이의 공지(空地)인 상하장에 살았다.

그러나 위 두개의 사실을 종합하면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조 선과 한(漢) 사이의 경계가 패수(浿水)라면 그 곳은 분명 과거에 조선의 평양성이 있던 자리였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한(漢)이 일어서기 전까지 조선이 그 수도인 평양성을 빼앗겼다는 기록도 보이지 않는 것이죠. 따라서 조선과 한나라 사이의 국경이 된 패수(浿水)와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할 때 건넜다고 한 패수(浿水)는 패수가 아니라는 겁니다. 조작된거죠. 따라서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패수는 浿水(패수)가 될수 없으며, 그 가능성이 있는 강으로는 沛水(패수), 淇水(기수), 溴水(추수)입니다. 沛水는 그 음이 같아 혼동될 수 있으며, 淇水는 그 글자가 浿와 비슷하여 혼동될 수 있고, 마지막으로 위만이 건넌 강이 溴水라고 기록된 곳이 보이기때문입니다. 이 세 개의 강과 패수(浿水)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여야 하지만 여기서는  오직 溴水(추수)만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三國志 魏志 卷三十》烏丸鮮卑東夷
『魏畧曰......漢以盧綰為燕王朝鮮與燕界於溴水及綰反入匈奴燕人衛滿亡命為胡服東渡溴水詣凖降説凖求居西界故中國亡命為朝鮮籓屏』
위 략에 기록하기를.... 한나라는 노관으로 연나라 제후(侯)로 삼고 조선과 추수(溴水)를 경계로 하였다. 이에 노관이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니 위만도 조선의 복장을 하고 동으로 추수(溴水)를 건너 망명하였다. 위만은 준(凖)에가 가서 항복하고 옛 중국의 망명인들과 조선의 서쪽경계에 살아 조선의 방패가되는 번국(籓國)이 되기를 간구하였다

삼국지는 위략을 인용하여 패수라 하지 않고 분명히 추수(溴水)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추수(溴水)는 패수(浿水)를 잘못쓴것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조선이 그 평양성과 그곳에 흐르는 패수를 하夏, 상商, 주周, 춘추전국, 진秦, 한漢 등에 빼앗겼나 보세요. 없습니다. 한나라와 조선이 경계가 되었던 강이 패수이어야 한다면 그곳은 과거에 조선의 평양성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즉, 浿水는 평양성이 있던 패수가 아니라는 것이며 사기(史記)는 틀렸으며 삼국지의 기록이 맞다는 것입니다. 위만이 건넌 강은 패수가 아니라 추수(溴水)라는 것이죠

추수(溴水)는 어디인가 ?
추수(溴水)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사서의 기록을 통해 알아보도록 합시다.

대원일통지를 보면....
《玄覽堂叢書續集 第三十冊, 大元大一統志卷第一百二十二》
溴河在濟源縣, 其源有三其一源出自原城西北琮山訓掌谷口俗呼爲白澗水, 春秋會諸侯于溴梁卽此一源出縣西二十里曲陽城西南山一源出陽城南溪至縣西南官橋村北出焉 東流至縣東與泷水合又東流去縣十里至皮城村入河陽界東入于河
추하는 제원현(濟源縣)에 있고 3곳에서 발원한다.
첫번째는 원성(原城)의 서북 종산琮山 훈장곡訓掌谷에서 발원하는데 사람들이 이르기를 백간수白澗水라 한다. 춘추에서 말하는 제후가 모인 추량溴梁이 이곳이다.
두번째 발원지는 제원현 서쪽 20리 곡양성曲陽城 서남산西南山이다.
세번째 발원지는 양성陽城 남쪽  지현至縣 서남의 관교촌官橋村 북에서 출발한다. 동으로 흘러 지현의 롱수泷水와 합한다. 또 동으로 흘러 10리를 가면 피성촌에 들어가 하양의 경계에서 황하로 들어간다.

3개의 강이 있다는 것이 사기 조선전에 습수 열수 산수 등 3개의 강이 있다는 것과 비슷하네요.

명일통지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습니다. 아마도 원일통지를 베낀것 같아요.
溴水在濟源縣其源有三一出琮山俗呼為白澗水春秋公會諸侯于溴梁即此一出縣西二十里曲陽城西南山一出陽城南溪俱東南流與瀧水合又東南至溫縣入于黄河


즉, 추수溴水란 제원현濟源縣에 있는 강이라는 것입니다. 위 첨부한 지도를 보시면 추수溴水가 보입니다. 이 지도는 중국역사지리집의 명나라때 지도인데... 서안(西安)의 동쪽으로 추수溴水가 보입니다. 그리고 좀더 동쪽으로 가면 기수(淇水)가 보이고 좀더 동쪽으로 가면 패현(沛縣)이 보이는데 이곳에 흐르는 강은 패수(沛水)일 것입니다. 본 지도에서는 패현 옆에 봉현(丰縣)이 있어서 봉수(丰水)라고 했으나 패수(沛水)라고도 불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황하의 아래쪽에 서화(西華)가 있는데 이 곳은 바로 기자(箕子)가 가 있으면서 인사도 안받았다는 곳이라고 환단고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서화의 북쪽은 조선의 땅이며 서화는 지나의 땅으로 이해될 것입니다.



위치를 좀더 정확히 알기 위하여 위 첨부한 지도를 보세요.
추 수(溴水), 기수(淇水), 패현(沛縣) 모두 태행산맥 남단으로 기자의 망명으로 인하여 그 영토가 넓어졌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곳입니다. 대부분 이해하기를 기자가 그냥 조선으로 망명하였다고 하지만, 기자는 은나라 제후입니다. 따라서 그가 조선으로 망명했다면 그 땅도 같이 조선에 떠다가 바쳤을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기록이 회남자에 보입니다.

淮南鸿烈集解 권12
昔武王伐紂, 破之牧野, 乃封比干之墓, 表商容之閭, 柴箕子之門. (紂死, 箕子亡之朝鮮, 舊居空, 故柴護之也.)
옛날에 무왕이 주왕을 정벌하고 그를 목야에서 깨트렸다. 이에 비간을 그 묘지에 봉하고, 상용을 그 이문에 표했으며, 기자를 그 문에서 지키게 했다(주왕이 죽자 기자는 조선으로 망명했다. 오래도록 공지에 살았는데 옛 시호이다.)

기 자에게 문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석에 기자는 공지(空地)에서 살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지나의 가장 동북쪽 요새 밖에 조선과 지나 사이의 공지를 말하는 것일겁니다. 이를 아래 주석에서 더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淮南子集釋 권 12
昔武王伐紂, 破之牧野, 乃封比干之墓, 表商容之閭, 柴箕子之門. (紂死, 箕子亡之朝鮮, 舊居空, 故柴護之也.  莊逵吉云, 柴護之者, 設軍士護之也.  柴卽俗塞.  曾國藩云, 後漢書楊震傳, 柴門謝客, 三國志, 以萬兵柴道, 與比柴字義同, 卽塞也.)
장규길이 말하기를 시호라는 것은 군사들을 보호하는 것이니 곧 세속에서 말하는 성채(城砦)이다. 증국번은 말하기를 후한서 양진전에서 시문은 손님을 맞는 곳이라 하였고 삼국지에서 말하기를 모든 병사로 길을 보호하는것이라 하였으니, 시(柴)자와 같은 뜻을 갖는 것이므로 시(柴)란 즉 새(塞)이다라고 하였다.

즉, 기자는 그냥 망명한 것이 아니라 은나라와 조선 사이의 경계에 있는 성채 밖 공지를 가지고 조선으로 망명하였고 기자가 망명한 후에 이곳의 땅은 조선의 땅이 되었으며 그 경계는 저 지도에 보이듯이 추수(溴水), 기수(淇水), 패현(沛縣) 등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위만조선도 두번째 지도에 표시한 영토를 기자조선으로부터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기자가 망명 한 뒤 살았던 곳은 어디로 추정되는가?
회 남자의 기록대로 기자는 조선으로 망명하였지만 그 몸둥이가 조선으로 간 것이 아니라 기자가 살던 땅의 동북변경지대에 살면서 조선에 망명한 것입니다. 즉, 기자가 살던 땅은 기자가 은나라로부터 받았던 땅의 변경지대라는 것이죠. 그러면 기자가 어디에 살았는지 알면 그 동북 변경이 바로 고조선 땅 중에 기자의 봉국이 되는 것입니다.

論語類考卷二
元按箕國亦子姓子爵其地本 古箕伯之國商以封箕子耳姓纂云箕在商之畿内春秋僖公三十三年秋晉人敗狄於箕杜元凱謂太原陽邑有箕城在今太原府大谷縣東三十五里此又非商之畿内國矣遼東榆社 東南三十里有古箕城或以箕子封朝鮮之後乃有此名而瑯琊之箕國則漢宣帝封城陽侯荒之子文為箕侯非商時箕子之國也

기자가 살던 곳이 하두 많아 이곳저곳을 설명하고 있는데 눈에 제가 주장하는 것과 살던 곳이 비슷한 곳이 나옵니다.
春秋僖公三十三年秋晉人敗狄於箕杜元凱謂太原陽邑有箕城在今太原府大谷縣東三十五里此
춘추 희공 33년 가을에 진인晉人이 고조선사람(狄)을 기두(箕杜)에서 깨뜨렸다고 했는데 이곳은 태원太原 양읍陽邑인데 기성箕城이 현재 태원부 태곡현 동 35리에 있는데 바로 이곳이다.

즉, 제가 첨부한 두번째 지도에 태원의 35리 동남쪽에 바로 기자가 살던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을 중심으로 동북쪽은 고조선 봉국인 기자조선의 땅이고 이 땅으로 위만이 망명할때 건넌 강은 평양성에 흐르는 패수(浿水)이어서는 안되고 추수(溴水), 기수(淇水), 패현(沛縣)에 흐르는 패수(沛水) 이어야 할 것입니다.

위만조선 멸망후 한나라 군현과의 관계
위만이 이와 같이 추수(溴水)를 건넌 후 한나라의 술책에 망하게 되며 위만조선은 5명의 제후가 나누어 갖습니다.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에 따라 5명의 제후가 나누어 갖은 땅을 찾아봅시다. 그 땅은 아래 지도와 같습니다.


위 지도를 보면 놀랍지 않습니까?

위 만이 건넜다던 추수(溴水)의 동북쪽과 기자가 살았다던 태원의 동쪽 땅이 바로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5명의 제후가 나누어 갖은 땅과 너무나도 일치합니다. 이는 위만이 건넌 강은 추수(溴水)이고 기자는 태원의 동쪽 땅을 고조선에 바쳤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기자조선은 난하유역도 아니고, 평양유역도 아닌, 태행산맥의 동쪽 그리고 추수(溴水)의 동북쪽이라는 것이 명확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