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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연나라 남쪽의 갈석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 25.
[백송 글]
갈석산의 위치는 고대로부터 학자들 간에 큰 논쟁이 되어 왔다.
근래에 와서는 여러 학자가 산동성 무체현에 있는 갈석산이야말로 『상서 우공』에 기록된 갈석산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동안 통설로 인정받고 있던 하북성 창려현의 갈석산 지위를 흔들고 있는 양상이다.
갈석산의 위치에 대한 것은 사서에 따라서 여러 가지가 있고, 학자들의 이론 또한 다기하다. 지금은 중국의 학자들이 둘로 나뉘어서 하북성과 산동성 양 지역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에 필자 또한 여러 사서의 기록과 현 중국의 몇몇 학자들의 논고를 참고 삼아서 소견을 밝혀 본다.

1.갈석은 연나라의 남쪽에 있었다.

○史記十九 蘇秦列傳(사기 소진 열전)
소진이 연나라 문후에게 말하기를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과 구원이 있다. 남쪽에는 녹타와 역수가 있으며 지방이 2천여 리이다…남쪽의 갈석(碣石)과 안문(鴈門)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의 많이 나는 이점이 있다. 백성들이 비록 농사를 짓지 아니하여도 대추와 밤이 있어서 풍족하니 이곳이 이른바 천부(天府)이다.
주(注)를 요약하면, 정북쪽을 병주라 하고 그곳의 하천을 녹타(菉沱)라고 한다. 색은에서는 녹타를 호타(滹沱)라고 하였으며, 호타는 대군(代郡) 염성(鹵城)현을 출발하여 동남으로 흘러 오대산 북쪽을 지나 동남쪽 정주를 지나 바다로 든다. 역수(易水)는 역현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유주 귀의현을 지나 동쪽에서 호타하와 합쳐진다.
색은의 주석 : (전국책) 갈석산은 상산(常山) 구문현(九門縣)에 있다. (한서)지리지에 대갈석산(大碣石山)은 우북평(右北平) 여성현(驪城縣) 서남쪽에 있다.

說燕文侯曰:「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雲中﹑九原,南有菉沱﹑易水,地方二千餘里,帶甲數十萬,車六百乘,騎六千匹,粟支數年。南有碣石﹑鴈門之饒,北有棗栗之利,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此所謂天府者也。
注 集解周禮曰:「正北曰并州,其川菉沱。」鄭玄曰:「菉沱出鹵城。」索隱按:
滹沱,水名,并州之川也,音呼沱。又地理志鹵城,縣名,屬代郡。滹沱河自縣東至參合,又東至文安入海也。正義菉沱出代州繁畤縣,東南流經五台山北,東南流過定州,流入海。易水出易州易縣,東流過幽州歸義縣,東與呼沱河合也。
注 索隱*(戰國策)*碣石山在常山九門縣。地理志大碣石山在右北平驪城縣西南。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합종(合縱)의 이론을 설파하기 위해 소진이 연나라 문후를 찾은 것은 대략 BC334년이라고 한다. 갈석의 풍요로움에 대하여는 갈석이 바다와 가까이 있어, 수산물과 소금이 풍족함을 말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상산(常山)의 위치에 대하여 중국고대지명사전에는 “常山縣은 본래 漢의 九門縣地로서 옛 성이 지금의 하북성 정정현(河北省正定縣) 서남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갈석을 설명한 곳에서는 구문현이 하북성 고성현(藁城縣)이라고 되어 있고,  여성현(驪城縣)은 지금의 河北省 樂亭縣이라고 되어 있다. 당나라 초에 사마정(司馬貞)이 주석한 것이 사기 색은이다.
한편, 한서지리지에는 대갈석산을 大揭石山(대게석산)으로 쓰고 있으며, 왕망은 게석(揭石)으로 불렀다고 하였다. 아마도, 왕망이 대게산을 게석으로 부르기 시작한 이래로, 갈석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右北平郡 。驪成,大揭石山在縣西南。莽曰揭石。(卷二十八下 地理志第八下)”

○史記卷一百十 匈奴列傳(사기 흉노열전)
조나라 무령왕이 풍속을 바꾸어 호복을 입고 기사(騎射)를 익히게 하였으며, 북쪽으로 임호, 누번을 격파하여 장성을 쌓았고, 운중 안문 대군을 설치하였다. 그 뒤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秦開)가 있었으니, 호(胡)에 인질로 가 있었다. 호(胡)가 그를 매우 신임하였으며, 돌아와서는 동호(東胡)를 습격하니 동호는 천여 리를 물러났다…연나라 또한 장성을 쌓았으니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렀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설치하여 호(胡)를 막았다.

而趙武靈王亦變俗胡服,習騎射,北破林胡﹑樓煩。築長城,自代並陰山下,至高闕為塞。而置雲中﹑鴈門﹑代郡。其後燕有賢將秦開,為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중국 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진개가 동호를 공격하여 땅을 빼앗은 것이 대략 燕 昭王(소왕) 十二年(기원전300年)이라고 한다. 즉, 소진이 연나라 문후를 만나고 나서 대략 34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연나라 중기의 연나라 국도의 위치
劉玉文 선생이 쓴 “燕南有碣石”辨析에는 〖老北京风情网〗에 실린 ‘燕国的都城’을 인용하여 연나라 환공(桓公), 문공(文公), 역왕(易王)시기에는 하북성 탁주가 연나라 중심이었고, 문공 때에 하북성 웅현(雄縣)에 무양성(武陽城)을 세워 하도(下都)로 삼았다고 하였다.

《水经注》卷十一,《易水》称:“易水又东迳易县故城南,昔燕文公徙易,即此城也”。 《地域文化的界定——以燕赵文化为例》(作者:张京华)一文中说:“燕文公时迁都易城,其地在今河北雄县境”。《燕国的都城》(〖老北京风情网〗)曰:“考古发现证明,当战国中期的燕桓公、燕文公、燕易王时期,燕又在易水旁营建武阳城,是为燕下都。” 很明显, 燕文侯时期的燕国“领土重心”在其膏腴之地的“督亢”地带,即今河北涿州、固安为中心的地带. 燕文侯时期的燕国的“政治中心”与“领土重心”大体重合。

○通典 卷第一百九十四(통전)
邊防十 北狄一 序略匈奴上 (변방 북적 서략 흉노 상)
통전에서는 구체적으로 “조양(造陽)이 媯川郡(규천군)의 북쪽이며, 양평(襄平)은 요동에서 다스리는데 지금의 안동부(安東府)이다. 상곡은 지금의 상곡, 범양, 문안, 하한, 규천 등의 군이다. 어양은 지금의 어양, 밀운군이다. 우북평은 지금의 북평군이다. 요서와 요동군은 지금의 안동부(安東府)이다.”라고 말하였다.

其後燕將秦開襲破東胡,卻千餘里。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造陽,在今媯川郡之北。襄平即遼東所理,今安東府。置上谷、今上谷、范陽、文安、河閒、媯川等郡。漁陽、今漁陽、密雲郡。右北平、今北平郡。遼西、遼東郡以距胡。今安東府地。

즉, 연나라가 동호로부터 빼앗아 설치한 5개 군은 대략 현재의 상간하(영정하)를 경계로 하여 그 북쪽과 동쪽지역임을 알 수 있다. 막연히 전국시대 연나라의 수도를 북경의 계현(薊縣)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위에서 보았듯이 연나라 소왕 당시의 연나라 중심은 북경에도 미치지 못한 탁주 독항 지대였다. 북경 일대는 어양군이 설치된 곳이므로 진개가 빼앗은 이후에 비로소 연나라의 강역에 들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연나라가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 그(조선)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번한을 경계로 삼았다.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 爲界

○ 鹽鐵論 (염철론)
伐 功 第 四 十 五(벌공 제45)
대부가 말하기를 “제나라 환공은 연나라를 지나 산융을 정벌하고 고죽을 깨뜨리고 영지를 없앴다. 조나라 무령왕이 구주를 넘고 대곡을 지나 임호와 누번을 경략하여 없앴다. 연나라는 동호(東胡)를 습격하여 도주케 하고, 천리 땅을 물러나게 하였다. 요동(遼東)을 건너 조선을 공격하였다.”

大 夫 曰 : 「 齊 桓 公 越 燕 伐 山 戎 , 破 孤 竹 , 殘 令 支 。趙 武 靈 王 踰 句 注 , 過 代 谷 , 略 滅 林 胡 、 樓 煩 。 燕 襲 走 東 胡 , 辟 地 千 里 , 度 遼 東 而 攻 朝 鮮 。 

○漢書 卷二十八下 地理志第八下(한서 지리지)
연나라 땅은 ..동쪽에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이 있고, 서쪽에 상곡, 대군, 안문이 있다. 남쪽으로 탁군의 역, 용성, 범양을 얻고, 북쪽에 신성, 고안, 탁현, 양향, 신창과 발해의 안차가 모두 연나라의 일부분이다. 낙랑, 현도 또한 당현히 속한다.

燕地,尾、箕分野也。武王定殷,封召公於燕,其後三十六世與六國俱稱王。
東有漁陽、右北平、遼西、遼東,西有上谷、代郡、雁門,南得涿郡之易、容城、
范陽、北新城、故安、涿縣、良鄉、新昌,及勃海之安次,皆燕分也。樂浪、玄菟,
亦宜屬焉。

○위의 사기, 통전, 삼국지, 염철론, 한서를 종합하여 보면, 연나라의 동쪽에 요동이 있고, 요동을 지나서 조선이 있었다. 연나라는 동쪽의 요동과 조선의 서쪽일부를 정벌하여 5개 군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하북성 창려는 요서군에 속하며, 연나라의 중심지인 탁주를 기준으로 볼 때에 그 동쪽에 있으며, 남쪽이 아니다. 더욱이 창려 일대는 진개가 BC300년에 빼앗은 요동지방 중 요서군에 속하며, 소진이 연나라 문후를 만났을 때인 BC334년경에는 연나라에 속하지 아니하였다. 따라서, 연나라의 남쪽(호타하, 역수)에 있다고 되어 있는 갈석을 동쪽에 있는 창려의 갈석산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여기에서 연나라 동쪽의 요동은 상간하(영정하) 이북과 그 이동의 현 하북성 북부일대로서, 연나라 동쪽의 요동과 연나라의 요동군은 같은 것이 아니다. 요동에는 여러 소국 즉, 산융 고죽 영지 등이 있었으며, 삼국지를 보면 그 소국들이 결국은 조선의 관할에 있던 속국들이며, 조선을 동호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조선의 힘이 연나라를 압도하여 진개 같은 연나라 장수를 인질로 삼을 정도였으며, 인질은 왕족을 보내게 되어 있으니, 진개 또한 연나라의 왕족임이 분명하다.

2.진시황은 갈석산에 올랐을까?

○戰國策 卷二十九 燕一 (전국책 권29 연1)
蘇秦將為從北說燕文侯(소진장위 종북설 연문후)
한편, 현재 전국책은 당초 33권이었으나, 그 뒤에 많이 없어졌으며, 송나라 포표(鲍彪)가  남아 있는 책을 모아 차례를 붙여 주석하여 편찬한 것에는 “갈석산이 상산 구문현에 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고, 사기 정의를 인용하여 “갈석산은 평주에 있으며, 연나라의 동남쪽이다(碣 石 山 在 平 州 , 燕 東 南)”고 되어 있다.

蘇 秦 將 為 從 〔 一 〕 , 北 說 燕 文 侯 曰 : 「 燕 東 有 朝 鮮〔 二 〕 、 遼 東 〔 三 〕 , 北 有 林 胡 、 樓 煩 〔 四 〕 , 西 有 雲中 、 九 原 〔 五 〕 , 南 有 呼 沱 、 易 水 〔 六 〕 。 地 方 二 千 餘〔 七 〕 里 , 帶 甲 數 十 萬 , 車 七 百 乘 , 騎 六 千 疋 , 粟 支 十年 〔 八 〕 。 南 有 碣石、 鴈 門 〔 九 〕 之 饒 , 北 有 棗 粟 〔 一0 〕 之 利 , 民 雖 不 由 田 作 , 棗 栗 之 實 , 足 食 於 民 矣 。 此所 謂 天 府 也
〔 九 〕   鮑 本 并 州 郡 。 補 曰 : 正 義 云, 碣 石 山 在 平 州 , 燕 東 南 ; 鴈 門 山 在 代 , 燕 西 南 。

○戰國策 附錄 姚宏題 (전국책 부록 요굉제)
사기정의 “갈석은 구문에 있다. 본래 궁실이 있어 거처로 삼았다.”
史 記 正 義 「 竭 石 九 門 , 本 有 宮 室 以 居 」

○戰國策  附錄  姚寬書(전국책 부록 요관서)        
청나라 건륭제 시기에 황비열(黄丕烈)이 剡川姚氏本戰國策札記(섬천유씨본전국책찰기)를 교간(校刊)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찰기자주 : 동성은 구문에 있다.(주 : 갈석산이 현의 지경에 있다.)
찰기자주 : 갈석은 구문에 있다. 본래 궁실(宮 室 )이 있어 거처로 삼았다.
札 記 自 注 云 : 「 東城九門 (注云 ,碣石山在縣界 )」 
札 記 自 注 云 : 「 碣 石 九 門 ,本 有 宮 室 以 居 」 


한편, 전국책 부록은 당초 전국책에서 유실된 것을 찾아 실었는데, 포본 전국책에는 사기정의를 인용하여 갈석산이 평주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요굉의 전국책 부록에는 사기정의를 인용하여 갈석이 구문에 있으며 궁실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기 정의는 아마도 한서지리지에 있는 대갈석산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남송의 요관이 쓴 요관서에도 갈석은 구문에 있다고 하였다.

○新校本史記三家注/新校本史記/本紀/卷六 秦始皇本紀第六 (사기 진시황 본기)
32년, 시황이 갈석(碣石)으로 가서 연나라 사람 노생(盧生)을 시켜서 선인(仙人) 羨門(선문)과 고서(高誓)를 찾게 하고 갈석문(碣石門)에 (공적을) 새겼다. 성곽을 파괴하였다.

三十二年,始皇之碣石,使燕人盧生求羨門﹑高誓.刻碣石門 壞城郭

○史記卷七十四 孟子荀卿列傳 第十四(사기 맹자 순경열전)
추자(騶子)는 제나라에서 중용되었는데, 연나라에 갔을 때에 소왕(昭王)이 제자들이 앉는 자리에 앉아서 수업을 받았으며, 갈석궁(碣石宮)을 세워서 몸소 가서 스승으로 삼았다.
주, 정의 : 갈석궁은 유주 계현(幽州薊縣) 서쪽 30리 영대의 동쪽에 있다.

是以騶子重於齊。適梁,惠王郊迎,執賓主之禮。適趙,平原君側行撇席。如燕,昭王擁彗先驅,請列弟子之座而受業,築碣石宮,身親往師之。
注 正義碣石宮在幽州薊縣西三十里寧台之東。

갈석국이 유주 계현이라는 정의 주석은 당시 계현이 연나라 강역이 아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구문현에 궁실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갈석궁일 것으로 생각된다. 연나라 소왕이 제나라와 가까운 변경의 구문현에 추자(騶子)를 위한 궁실을 짓고 몸소 행차하여 수업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진시황이 간 곳이 갈석산이 아니라 갈석이라고 하였고, 갈석문(碣石門)에 공적을 새긴 것으로 되어 있다. 『사기 맹자 순경열전』에는 연나라 소왕이 제나라의 유명한 음양가인 騶子(추자)를 위하여 갈석궁(碣石宮)을 지었다고 되어 있으니, 진시황이 간 곳은 바로 갈석산이 아니라 갈석궁으로 보여진다. 공적을 새긴 갈석문(碣石門)은 갈석산이 아니라 갈석궁의 궁문(宮門)으로 생각되고, 성곽을 파괴해 버린 것과도 일치한다.
호타하가 연나라의 남쪽이라고 하였고, 호타하 강변에 옛 구문현이었다는 고성현(藁城縣)이 있어서 서로 일치하고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그곳에 갈석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갈석궁이 평주에 있다는 사기정의의 기록도 있으나 대갈석산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갈석궁의 이름은 갈석에서 따왔을 것이다. 그런데, 하북 고성현 일대는 평야지대로서 큰 산이 없다고 한다. 아마도 조그만 동산 정도가 있었을 것이나, 평야에서는 저명한 지형지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행주산성과 같이 낮지만 가파른 곳은 평야지대에서는 중요한 이정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기에 기록된 연나라 남쪽의 갈석이 산동성 무체현이라는 주장도 무리한 것으로 생각된다. 무체현과 구문현이 있었다는 고성현(현재의 고대지명대사전이 맞다는 것을 전제로)과는 거리가 너무 먼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구문현의 갈석이 『상서 우공』에 기재된 갈석인 것 같지도 않다. 우공의 갈석은 황하 하류의 바닷가 가까이 있어서 황하를 드나들 때에 저명한 지형지물이 된 곳인데, 대청광여도로 볼 때, 고성현은 옛 황하의 흐름과는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상서 우공의 갈석은 무체현의 갈석과 근사해 보인다.

결론적으로 연나라 남쪽의 갈석은 현 창려의 갈석산이 아니고, 현 창려의 갈석은 대게산이었을 것이다. 사기에 기록된 연나라 남쪽의 갈석은 상산 구문현(현 하북성 고성현(藁城縣)에 있었다. 그 곳은 연나라 남쪽의 호타하가 지나는 곳이다. 그곳에 갈석궁이 있어서 진시황이 가서 궁궐문에 공적을 새겼으며, 오늘날 창려의 갈석산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