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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여수기(余守己)라는 인물의 오류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2. 20.
한단고기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濊邑叛命余守己斬其酋素尸毛犁 그리고 보통 이렇게 해석합니다.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余守己)에게 명하여 추장 소시모리를 참수하게 하였다. 

한단고기의 이 기록은 BC2173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규원사화에는 이상하게도 단군임검때 나옵니다. 

余守己爲濊君
여수기(余守己)를 예국(濊國)의 임금으로 삼았다. 

이 기록은 대체로 BC 2300년대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즉 한단고기 기록과 비교해보면 130년이나 차이가 나는 것이지요. 
결국 여수기(余守己)라는 인물이 실제 존재했었는지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濊)와 부여(夫余)

이상하게도 지나의 기록에는 부여임금의 도장에 예나라 임금의 도장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夫餘...중략...其印文言濊王之印國有故城名濊城盖本濊貊之地而夫餘王其中自謂亡人抑有似也
부여임금의 도장에 글로 써 있기를 예왕의도장(濊王之印)이다라고 하였다. 그 나라에 옛 성이 있는데 이름하여 예성(濊城)이라 하였는데 모두 본디 예맥의 땅이다. 그래서 "부여가 그중에서 왕노릇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유민이다"라는 억측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뒤에 억측한 말은 빼놓고서라도 濊王 之 印 과 濊城은 부여와 예가 서로 연관이 있다는 말입니다. 서로 어떤 연관이 있을까하여 부여(夫余)의 뜻을 생각해보니...

* 여余와 예濊는 발음이 서로 비슷합니다. 
* 결국 부夫가 문제가 되는데 

遼史語解卷一
佛古寧, 滿洲語佛舊也, 古寜意也.
불고령, 만주어로 불佛은 옛날(舊)이란 뜻이고 고령古寜이란 뜻이란 말이다. 

'불'과 '부' 역시도 발음이 비슷하므로 부여(夫余)란 옛날 예국(濊國)이란 말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한단고기 BC2173년 기사는 규원사화대로 연도를 더 올려잡아서 단군임검때로 생각해야 하며 아래와 같이 해석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濊邑叛命余守己斬其酋素尸毛犁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자 단군임검은 아들 부여(余)에게 지키고 다스리게 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참수하였다. 

여기서는 余가 단군임검의 아들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여수기가 단군의 아들 부여일 가능성은 규원사화에 나오는 단군 8加를 보시면 분명해집니다.

직책        맡은 사람           직분
호가        맏아들 부루        모든 가를 통괄
응가        둘째 아들 부소    형벌을 주관
노가        셋째 아들 부우    질병을 주관
마가        신지의 후손        생명을 주관
우가        고시의 후손        농업을 주관
웅가        치우의 후손        병사를 주관
학가        주인                  선악을 주관
구가        여수기               고을을 나누어 관리

단군임검에게는 4아들이 있었는데 부루, 부소, 부우는 加라는 직책을 주고 부여에겐 주지 않았습니다. 차별일까요? 그럴리가 없는데 아마 구가를 맡은 여수기가 부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채호선생님도 여수기에 대해서 신뢰를 갖지 않으신 듯 합니다. 조선사연구초에 보면

"문헌비고에 여수기(余守己)가 단군의 9부 군장이 되어 중인이 부(附)하므로 중인변(衆人邊)을 가하여 徐氏가 되었다 하여, 각종의 괴설이 분운하나"

예(濊)가 왜 부여(夫余)가 되었나?
이에 대한 단서를 굳이 찾자면 

濊君南閭等畔右渠率二十八萬口詣遼東内屬武帝以其地為蒼海郡數年乃罷
예나라 임금 남려가 우거왕에 반하여 28만 구(口)를 데리고 요동으로 내속하니 무제가 그에게 땅을 주어 창해군으로 삼고 수년내에 파하였다. 

즉, 예나라 임금이 우거왕을 배반하고 남으로 이동하여 漢에 내속하자 예나라는 비게 되고 그곳을 조선의 다른 임금이 차지하게 되었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나라가 천진남쪽에 있었다는 기록과 막북(漠北)에 있었다는 서로 다른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경주
清漳逕章武縣故城西, 故濊邑也 청장수는 장무현 옛성 서쪽을 지나는데 이것은 옛 예읍(濊邑)이다.

동사강목
《고려사》 지리지에, “명주(溟州)는 본시 예국(濊國)인데, 한 무제 때 임둔으로 만들었다.”
하고, 《여지승람》에는, “명주는 지금의 강릉부(江陵府)인데 딴이름으로는 임둔ㆍ예국ㆍ창해군(滄海郡)ㆍ동이현(東暆縣)이다.”

예국과 임둔군 모두 산동성 북쪽 임읍臨邑이라는 말입니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6권, 부상개황고(扶桑開荒攷),  예(濊)
國本在漠北爲胡(西??)逐遷于今江陵漢武帝元朔元年濊君南閭內屬以其地爲蒼海郡
예국은 본래 막북(漠北)에 있다가 胡에게 쫓겨 지금의 강릉부(江陵府)로 옮겼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원삭(元朔) 원년에 예국의 임금 남려(南閭)가 내속(內屬)하자, 그에게 땅을 주어 창해군(蒼海郡)으로 만들었다.

이 곳에서 말하는 막북은 대체로 내몽고 동남쪽이라는 말입니다. 사서에 대체로 북부여라고 적혀있죠. 그리고 강릉부란 만주를 말할 것입니다. 사서에는 대체로 동부여라고 적혀있습니다. 창해군이란 사서에 나오는 예읍濊邑을 말하는 것입니다. 강릉부를 지금의 강릉으로 보는 것은 사대사관에 의한 위사입니다.

즉, 사서에 나오는 예(濊)는 막북(漠北)에 있는 옛날 예(濊)와 남쪽으로 이동하여 천진 남쪽인 장무현(章武縣)에 있는 두 개의 濊가 존재하며 막북(漠北)에 있는 예(濊)는 달리 말하면 부여(夫余)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