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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중국사 열전

신당서 북적 말갈전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7.

흑수말갈


#新唐書卷219-列傳第144-黑水靺鞨-06/01

◉< 黑水靺鞨>居<肅愼>地, 亦曰<挹婁>, <元魏>時曰<勿吉>. 直京師東北六千里, 東瀕海, 西屬<突厥>, 南<高麗>, 北<室韋>. 離爲數十部, 酋各自治. 其著者曰<粟末>部, 居最南, 抵<太白山>, 亦曰<徒太山>, 與<高麗>接, 依<粟末水>以居, 水源於山西, 北注<它漏河>; 稍東北曰<汨咄>部; 又次曰<安居骨>部; 益東曰<拂涅>部; <居骨>之西北曰<黑水>部; <粟末>之東曰<白山>部. 部間遠者三四百里, 近二百里.


흑 수말갈은 숙신의 땅에 기거하며 읍루라고도 일컫는데 원위(元魏)때는 물길이라 일컬었다. 경사에서 곧장 동북쪽 6천리로서 동쪽은 바다에 연해있고 서쪽은 돌궐에 속하며, 남쪽은 고려이고 북쪽은 실위이다. 수십개의 부락으로 떨어져 있으며 추장들이 각기 스스로 통치한다.


그 들 가운데 알려진 것은 속말부라 하여 가장 남쪽에 거처하는데, 도태산(徒太山)이라고도 불리는 태백산(太白山)에 닿아 있고 고려와 접해있으며 속말수(粟末水)에 의지하여 기거하고 있으니 그 물줄기는 서쪽의 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의 타루하로 들어가며, 족므 동북쪽은 골돌부라 하며, 또 그 다음으로 안거골부라 하며, 더욱 동쪽은 불열부라 하며 거골의 서북쪽을 흑수부라 하며, 속말의 동쪽을 백산부라 한다. 부락사이는 먼 곳이 3.4 백리이고, 가까운 곳은 2백 리이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黑水靺鞨-06/02

◉< 白山>本臣<高麗>, 王師取<平壤>, 其衆多入<唐>, <汨咄>․<安居骨>等皆奔散, 寖微無聞焉, 遺人迸入<渤海>. 唯<黑水>完彊, 分十六落, 以南北稱, 蓋其居最北方者也. 人勁健, 善步戰, 常能患它部. 俗編髮, 綴野豕牙, 揷雉尾爲冠飾, 自別於諸部. 性忍悍, 善射獵, 無憂戚, 貴壯賤老. 居無室廬, 負山水坎地, 梁木其上, 覆以土, 如丘冢然. 夏出隨水草, 冬入處. 以溺盥面, 於夷狄最濁穢. 死者埋之, 無棺 , 殺所乘馬以祭. 其酋曰大莫拂瞞咄, 世相承爲長. 無書契. 其矢石鏃, 長二寸, 蓋楛砮遺法. 畜多豕, 無牛羊. 有車馬, 田耦以耕, 車則步推. 有粟麥. 土多貂鼠․白免․白鷹. 有鹽泉, 氣蒸薄, 鹽凝樹顚.


백 산은 본디 고려에 신하의 예로서 복속되었는데 천자의 군대가 평양을 탈취하자 그 무리들이 당으로 많이 들어왔으며, 골돌과 안거골 등은 모두 분산되어 점차로 미약해져 들리는 바 없게 되었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뿔뿔이 발해로 들어갔다.


오직 흑수만이 온전하게 강성하여져 16부락으로 나뉘어져 남과 북으로 일컬어지게 되니 아마도 그들 중에 가장 북방에 거처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 사람들은 굳세고 건장하며 보병전에 뛰어나기에 항상 다른 부락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습 속에 머리카락을 땋고 멧돼지의 이발을 꿰고 꿩의 꼬리를 끼워 관을 장식하여 스스로 모든 부락과 차이나게 한다. 인내심이 있는 굳센 성격에 활로 하는 수렵에 뛰어나며 또한 근심하고 슬퍼하는 일이 없으며, 건장한 자를 귀하게 여기며 노약자를 천하게 여긴다. 거처는 집이나 오두막이 없이 산과 물을 등지고 땅에 구덩이를 판 뒤 그 위에 나무로 들보를 치고 흙으로 덮은 것으로서 마치 무덤과 같은 형태이다. 여름에는 나와서 물과 풀을 쫓아다니고 겨울에는 들어가 거처한다. 오줌으로 얼굴을 씻는데 이적 가운데 가장 더럽다. 사람이 죽으면 매장을 하는데 겉널이나 속널이 없으며 타던 말을 죽여 제사를 지낸다.


그 들의 추장을 대막불만돌이라 하며 대대로 자리를 이어 우두머리가 된다. 글자가 없다. 그들의 화살은 돌로 촉을 만들며 길이가 2촌이니 아마도 호목화살에 돌촉을 쓰던 것에서 남겨진 관습일 것이다. 가축은 돼지가 많으며 소와 양은 없다. 수레와 말이 있고 쟁기를 나란히 연결하여 밭을 경작하며 수레는 걸으면서 민다. 조와 보리가 있다. 그 땅에는 초서와 흰토끼 및 흰 매가 있다. 소금의 샘이 있는데 증기가 올라오는 것이 매우 얿어서 소금기가 나무의 꼭대기에 서린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黑水靺鞨-06/03

◉< 武德>五年, 渠長<阿固郞>始來. <太宗><貞觀>二年, 乃臣附, 所獻有常, 以其地爲<燕州>. 帝伐<高麗>, 其北部反, 與<高麗>合. <高惠眞>等率衆援<安市>, 每戰, <靺鞨>常居前. 帝破<安市>, 執<惠眞>, 收<靺鞨>兵三千餘, 悉坑之.


무 덕(618~626) 5년에 우두머리 아고랑이 처음으로 들어왔다. 태종 정관(627~649) 2년에 신하로서 붙좇으며 공물을 바치는데 늘 변함이 없기에 그 땅을 연주로 삼았다. 제께서 고려를 정벌하자 그들 북쪽의 부란이 반란하여 고려와 합쳐졌다. 고혜진 등이 무리를 거느리고 안시를 지원할 때 매번의 싸움에서 말갈이 항상 앞장을 섰다. 제께서 안시를 격파하여 고혜진을 사로잡고 말갈의 군사 3천여 명을 거두어들여 모두 구덩이에 파묻었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黑水靺鞨-06/04

◉< 開元>十年, 其酋<倪屬利稽>來朝, <玄宗>卽拜<勃利州>刺史. 於是<安東>都護<薛泰>請置<黑水府>, 以部長爲都督․刺史. 朝廷爲置長史監之, 賜府都督姓<李氏>, 名曰<獻誠>, 以雲麾將軍領<黑水>經略使, 隸<幽州>都督. 訖帝世, 朝獻者十五. <大曆>世凡七, <貞元>一來, <元和>中再.


개 원(713~741) 10년에 그 추장 예속리계가 와서 에방하니 현종이 곧 발리주자사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안동도호 설태가 요청하여 흑수부를 설치하고 부락의 우두머리로 도도고가 자사를 삼았다. 조정에서는 장사를 두어 그들을 감독하고 흑수부의 도독에게 이씨 서을 하사하여 이름을 헌성이라 하였으며, 운위장군령흑수경락사로 삼아 유주도독에 예속시켰다. 제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예방하고 공물을 바친 것이 열 다섯 차례였다. 대력 연간에 무릇 일곱 차례였으며 정원(785~805) 연간에 한 차례 들어왔고 원화(806~820) 연간에 두 차례 들어왔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黑水靺鞨-06/05

◉ 初, <黑水>西北又有<思慕>部, 益北行十日得<郡利>部, 東北行十日得<窟說>部, 亦號<屈設>, 稍東南行十日得<莫曳皆>部, 又有<拂涅>․<虞婁>․<越喜>․<鐵利>等部. 其地南距<渤海>, 北․東際於海, 西抵<室韋>, 南北袤二千里, 東西千里. <拂涅>․<鐵利>․<虞婁>․<越喜>時時通中國, 而<郡利>, <屈設>․<莫曳皆>不能自通. 今存其朝京師者附左方.


초 기에 흑수의 서북쪽에 또 사모부가 있었으며 더욱 북쪽으로 10일을 가면 군리부이고 동북쪽으로 10일을 가면 굴열부인데 또한 굴설이라고도 하며, 조금 동남쪽으로 10일을 가면 막예개부이고, 또 불열과 우루 및 월희와 철리 등의 부락이었다.


그 땅은 남쪽으로 발해에 닿아 있고 북쪽과 동쪽은 바다에 닿아 있으며 서쪽은 실위에 닿아 있으니 남북의 길이가 2천리이고 동서가 1천리이다. 불열과 철리 및 우루와 월희는 때때로 중국과 교통하였으나 군리와 굴설 및 막예개 등은 스스로 왕래하지 못하였다. 지금 존재하며 경사를 예방한 자들은 좌측 아래에 덧붙여 기록한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黑水靺鞨-06/06

◉< 拂涅>, 亦稱<大拂涅>, <開元>․<天寶>間八來, 獻鯨睛․貂鼠․白免皮; <鐵利>, <開元>中六來; <越喜>, 七來, <貞元>中一來; <虞婁>, <貞觀>間再來, <貞元>一來. 後<渤海>盛, <靺鞨>皆役屬之, 不復與王會矣.


불 열은 역시 대불열이라 일컫는데 개원(713~741)과 천보(742~756) 사이에 여덟 차례 들어와 고래의 눈깔과 초서 및 흰토끼 가죽을 바쳤으며, 철리는 개원(713~741) 연간에 여섯 차례 들어왔으며, 월희는 일곱 차례 들어오고 정권(785~805) 연간에 한 차례 들어왔으며 우루는 정관(627~649) 연간에 두 차례 들어오고 정원785~805) 연간에 한 차례 들어왔다. 후에 발해가 번성하자 말갈이 모두 그에게 복속되어 다시는 왕과 더불어 모이지 않았다.

 

 

 

#新唐書卷219-列傳第144-後論-01/01

◉ 贊曰: <唐>之德大矣! 際天所覆, 悉臣而屬之, 薄海內外, 無不州縣, 遂尊天子曰「天可汗」. <三王>以來, 未有以過之. 至荒區君長, 待<唐>璽纛乃能國, 一爲不賓, 隨輒夷縛, 故蠻琛夷寶, 踵相逮于廷. 極熾而衰, 厥禍內移, <天寶>之後, 區夏痍破, 王官之戍, 北不踰<河>, 西止<秦>․<邠>, 凌夷百年, 逮於亡, 顧不痛哉! 故曰: 治己治人, 惟聖人能之.


당 나라의 덕은 크고도 크기에 하늘이 덮고 있는 산봉우리까지 모두 신하로 붙좇으며 복속되어 왔고 바다가 닿는 안팎으로 주와 현이 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마침내 천자를 존중하여 이르기를 [천가한]이라 하였다. 삼왕 이래로 이보다 더한 적은 없었다. 황량한 구석지의 군장에 이르기까지 당의 새서와 깃발을 기다리고서야 능히 나라를 이루었으니, 하나라도 복종하지 않게되면 그대로 번번이 평정되고 속박되니, 그러한 까닭에 만이들이 갖은 보물을 지니고 서로 발꿈치를 뒤밟으며 조정에 이르렀다. 성하던 불길이 다하여 쇠퇴하고 그 재난이 안으로 들어오니 천보(742~756) 연간 후에는 구석진 화하의 땅은 상처나고 격파되어 왕이 관리하는 수자리는 북으로 황하를 넘지 못하고 서쪽으로 진주(秦州)와 빈주( 州)에서 그치니, 점차 허물어지기 1백년 만에 망하기에 이르므로 되돌아보아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까닭에 말하였다. 남을 다스린 것으로 나를 다스릴 수 있음은 오직 성인이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