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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신당서 발해 열전 번역문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2. 31.
바다와 접해 있으니 일본으로 통하는 길[日本道]이고, 남해부는 신라로 통하는 길[新羅道]이다. 압록부는 당나라에 조공하러 가는 길[朝貢道]이고, 장령부는 당나라 영주로 통하는 길[營州道]이며, 부여부는 거란으로 통하는 길[契丹道]이다. 발해의 민간에서는 임금을 가독부(可毒夫)라고 부르지만 보통 성왕(聖王) 또는 기하(基下)라고 한다. 임금의 명령은 교(敎)라고 한다. 임금의 아버지는 노왕(老王), 어머니는 태비(太妃), 왕비는 귀비(貴妃), 큰 아들은 부왕(副王), 다른 아들은 왕자(王子)라고 부른다. 관청으로는 선조성(宣詔省)이 있는데, 좌상(左相), 좌평장사(左平章事), 시중(侍中), 좌상사(左常侍), 간의(諫議) 등의 관리가 소속되어 있다. 중대성(中臺省)에는 우상(右相), 우평장사(右平章事), 내사(內史), 조고사인(詔誥舍人)이 소속되어 있다. 정당성(政堂省)에는 대내상(大內相) 1명이 좌상과 우상 위에 있다. 좌사정(左司政)과 우사정(右司政) 각 1명이 좌평장사와 우평장사 아래에 있으니 당나라의 복야(僕射)와 비슷하다. 좌윤(左允)과 우윤(右允)은 당나라의 좌승(左丞), 우승(右丞)과 비슷하다. 좌육사(左六司)에는 충부(忠部), 인부(仁部), 의부(義部)에 각각 1명의 경(卿)이 좌사정 아래에 있다. 그 아래 관할 부서(支司)로서 작부(爵部), 창부(倉部), 선부(膳部)가 있는데, 각 부마다 낭중(郞中)과 원외(員外)라는 관직이 있다. 우육사(右六司)에는 지부(智部), 예부(禮部), 신부(信部)가 있으며, 그 아래 관할 부서(支司)로서 융부(戎部), 계부(計部), 수부(水部)가 있다. 경과 낭중은 좌육사에 준한다. 이것은 당나라의 6부와 비슷하다. 중정대(中正臺)에는 대중정(大中正) 1명이 있는데, 당나라의 어사대부(御史大夫)와 비슷하며, 직위는 사정(司政)의 아래에 있다. 그리고 소정(少正) 1명이 있다. 

아들 대흠무(大欽茂)가 즉위하여 연호를 대흥(大興)으로 고치니, 현종은 왕 및 관할 영역을 세습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에 대흠무는 국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천보(天寶 ; 742~756) 말년에 대흠무가 상경(上京)으로 수도를 옮겼으니, 이곳은 바로 옛 도읍지에서 삼백리 떨어진 홀한하(忽汗河)의 동쪽이다. 현종이 재위할 때까지 발해에서는 29번 사신을 보냈다. 대종(代宗) 보응(寶應) 원년(762)에 조서를 내려 발해를 나라로 인정하여 대흠무를 왕으로 삼고, 검교태위(檢校太尉)로 승진시켰다. 대력(大曆) 연간(766~779)에 25번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일본의 여자 무용수 11인을 당나라 조정에 바친 적도 있었다. 정원(貞元) 연간(785~805)에 동남쪽으로 수도를 동경(東京)으로 옮겼다. 대흠무가 죽으니 발해에서 멋대로 시호를 올려 文王이라 하였다. 아들 대굉림(大宏臨)이 일찍 죽어 친척 동생인 대원의(大元義)가 즉위하였는데, 1년만에 성격이 의심 많고 포악해서 나라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대굉림의 아들 대화여(大華璵)를 왕으로 추대하고 다시 상경으로 환도하였다. 연호를 중흥(中興)으로 고치고는 죽었으니 시호는 성왕(成王)이다. 대흠무의 어린 아들 대숭린(大嵩璘)이 즉위하여 연호를 정력(正曆)으로 고쳤으니, 당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을 제수하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 건중(建中) 연간(780~783)과 정원(貞元) 연간(785~805) 사이에 발해에서 모두 4번 사신을 파견하였다. 대숭린이 죽으니, 시호는 강왕(康王)이다. 아들 대원유(大元瑜)가 즉위하여 연호를 영덕(永德)으로 고쳤다. 대원유가 죽으니, 시호는 정왕(定王)이다. 아우 대언의(大言義)가 즉위하여 연호를 주작(朱雀)으로 고쳤는데 당나라에서 왕위를 계승하도록 한 것이 예전과 같았다. 대언의가 죽으니, 시호는 희왕(僖王)이다. 아우 대명충(大明忠)이 즉위하여 

또는 책성부(柵城府)라고 한다. 경주(慶州),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 등 4주를 관할하였다. 옥저(沃沮)의 옛 땅을 남경(南京)으로 삼았는데, 남해부(南海府)라고 한다. 옥주(沃州), 청주(睛州), 초주(椒州) 등 3주를 관할하였다. 고구려(高句麗)의 옛 땅을 서경(西京)으로 삼았는데, 압록부(鴨淥府)라고 한다. 신주(神 州), 환주(桓州), 풍주(豊州), 정주(正州) 등 4주를 관할하였다. 장령부(長嶺府)는 하주(瑕州), 하주(河州) 등 2주를 관할하였다. 부여(扶餘)의 옛 땅을 부여부(扶餘府)로 삼았는데, 늘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거란(契丹)을 방어하였다. 부주(扶州), 선주(仙州) 등 2주를 관할하였다. 막힐부(鄚頡府)는 막주(鄚州), 고주(高州) 등 2주를 관할하였다. 읍루(挹婁)의 옛 땅을 정리부(定理府)로 삼았는데, 정주(定州), 심주(潘州) 등 2주를 관할하였다. 안변부(安邊府)는 안주(安州), 경주(瓊州) 등 2주를 관할하였다. 솔빈(率賓)의 옛 땅을 솔빈부(率賓府)로 삼았는데, 화주(華州), 익주(益州), 건주(建州) 등 3주를 관할하였다. 불녈(拂涅)의 옛 땅을 동평부(東平府)로 삼았는데, 이주(伊州), 몽주(蒙州), 타주(沱州), 흑주(黑州), 비주(比州) 등 5주를 관할하였다 철리(鐵利)의 옛 땅을 철리부(鐵利府)로 삼았는데, 광주(廣州), 분주(汾州), 포주(蒲州), 해주(海州), 의주(義州), 귀주(歸州) 등 6주를 관할하였다. 월희(越喜)의 옛 땅을 회원부(懷遠府)로 삼았는데, 달주(達州), 월주(越州), 회주(懷州), 기주(紀州), 부주(富州), 미주(美州), 복주(福州), 사주(邪州), 지주(芝州) 등 9주를 관할하였다. 안원부(安遠府)는 영주(寧州), 미주(郿州), 모주(慕州), 상주(常州) 등 4주를 관할하였다. 또 영주(郢州), 동주(錮州), 속주(涑州)의 3주는 독주주(獨奏州)로 삼았다. 속주는 속말강(涑沫江)과 가까운데서 연유하는데, 아마도 속말강은 이른바 속말수(粟末水)를 가리킨다. 용원부는 동남쪽으로 

와 서로 왕래하였으나, 영주(營州)와 평주(平州)에서 장안까지는 8천리나 되는 먼 거리이므로, 그후로도 조공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역사가들이 전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당나라에 반대하였는지 복속하였는지에 대하여도 상고할 길이 없다. 

발해(渤海)(의 시조)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 출신으로 고구려(高句麗)에 복속되어 있었었던 자이며 성은 대씨(大氏)이다. 고구여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였다. 그곳은 영주(營州 ; 지금의 요녕성 조양)에서 동쪽으로 2천리 밖에 위치하며, 남쪽은 신라(新羅)와 맞닿아 이하(泥河)로 경계를 삼았다.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으로는 거란(契丹)이 있었다. 성곽을 쌓고 거처하니, 고구려 유민들이 점점 모여 들었다.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만세통년(萬歲通天) 연간(696)에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像)이 말갈(靺鞨)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 및 고구려 유민과 동쪽으로 달아났다. 요하(遼河)를 건너서 태백산(太白山)의 동북을 차지하고 오루하(奧婁河)에 의지하여 성벽을 쌓고 방어를 튼튼히 하였다. 측천무후는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으로,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책봉하여 그 죄를 용서하고자 하였다. 걸사비우가 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자, 측천무후는 

옥검위대장군(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와 중랑장(中郎將) 색구(索仇)에게 조서를 내려 그를 죽였다. 이때에 걸걸중상은 이미 죽고 아들 대조영이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달아나는데, 이해고가 끝까지 추격하여 천문령(天門嶺)을 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해고에게 저항하니, 이해고는 패하여 돌아왔다. 이때 거란이 돌궐(突厥)에 복속한 탓에 당나라 군대의 길이 막혀서 이들을 토벌할 수 없었다. 대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병하고 이 지역이 당나라에서 먼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부르며, 돌궐에 사신를 보내어 통교하였다. 영역이 사방 오천리에 미쳤으며, 인구는 십여만호에 군사는 수만명이나 되었다. 자못 문자를 알았다. 부여(扶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조선(朝鮮) 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를 다 차지하였다. 당나라 중종(中宗) 때에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岌)을 보내어 회유하니, 대조영이 아들을 보내어 입시토록 하였다. 예종(睿宗) 선천(先天) 연간(712~713)에 사신을 보내어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하고, 다스리고 있는 지역을 홀한주(忽汗州)로 삼아서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이라는 관직도 내렸다. 이로부터 비로소 말갈(靺鞨)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渤海)로만 불렸다. 현종(玄宗) 개원(開元) 7년(719)에 대조영이 죽으니, 발해에서 제멋대로 고왕(高王)이라 시호를 올렸다.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즉위하여 크게 영토를 넓히자 

또 전중시(殿中寺)와 종속시(宗屬寺)를 두었는데, 각 시마다 대령(大令)이 있다. 문적원(文籍院)에는 감(監)을 두었다. 영과 감 밑에는 소령(少令), 소감(少監)이 각각 있다. 태상시(太常寺), 사빈시(司賓寺), 대농시(大農寺)에는 각 시마다 경(卿)이 있다. 사장시(司藏寺), 사선시(司膳寺)에는 각 시마다 영(令)과 승(丞)이 있다. 주자감(冑子監)에는 감장(監長)이 있다. 항백국(巷伯局)에는 상시(常侍) 등의 관직이 있다. 무관(武官)으로는 좌맹분위(左猛賁衛), 우맹분위(右猛賁衛), 웅위(熊衛), 비위(羆衛), 남좌위(南左衛), 남우위(南右衛), 북좌위(北左衛), 북우위(北右衛)의 8위가 있으며, 각 위에는 대장군(大將軍) 1명과 장군(將軍) 1명씩 있었다. 대체로 중국의 제도를 본뜬 것이 이와 같았다 관리의 품계는 질(秩)로 표현하는데, 3질 이상은 자색 옷[紫服]에 상아 홀[牙笏]과 물고기 모양의 금빛 주머니[金魚]를 찬다. 5질 이상은 분홍색 옷[緋服]에 상아 홀과 물고기 모양의 은빛 주머니[銀魚]를 찬다. 6질과 7질은 연분홍색 옷[緋衣]을 입고, 8질은 녹색 옷[綠衣]을 입는데, 모두 나무 홀[木笏]을 찼다. 발해의 민간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태백산의 토끼, 남해의 다시마, 책성의 된장, 부여의 사슴, 막힐의 돼지, 율빈의 말, 현주의 베, 옥주의 솜, 용주의 명주, 위성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가자미이다. 과일로는 환도의 오얏과 낙랑의 배가 있다. 나머지 풍속은 고구려나 거란과 비슷하다. 유주절도부(幽州節度府) 

동북의 여러 종족들이 두려워 복속하였다. 또 사사로이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고쳤다. 현종이 책봉을 내려 왕위 및 관할 영역을 세습하도록 하였다. 얼마후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사자가 입조하자, 현종은 그 지역에 흑수주(黑水州)를 세우고, 장사(長史)라는 관직을 설치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대무예가 신하들을 불러 의논하였다. "흑수말갈이 처음에는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당나라와 통교하게 되었고, 지난번 돌궐에게 토둔(吐屯)을 요청할 적에도 모두 우리에게 먼저 알렸다. 그런데 지금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하면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당나라와 함께 앞뒤에서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동생 대문예(大門藝)와 외숙 임아(任雅)에게 군사를 일으켜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대문예는 일찌기 인질로 당나라 수도에 머무른 적이 있었으므로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무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흑수말갈이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하였다 하여 우리가 공격한다면 이는 당나라를 등지는 셈이 됩니다. 당나라는 대국으로 군사가 우리보다 만배나 되는데 그들과 원한을 맺는다면 우리는 곧 망할 것입니다. 옛날 고구려가 전성기에 군사 30만으로 당나라와 맞서 싸운 것은 굳세고 강했다고 할 만하지만, 당나라 군사가 한번 이르자 땅을 쓸 듯이 다 없애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의 군사는 고구려에 비해 삼분의 일밖에 되지 못하니, 임금께서 저들의 뜻을 어긴다는 것은 不可합니다." 그러나 대무예는 듣지 않았다. 군사가 국경에 이르러 대문예가 다시 상소하여 간절하게 간하였다. 대무예는 화를 내어 사촌형 대일하(大壹夏)를 보내어 대신 통솔케 하고 

대문예는 소환하여 죽이려 하였다. 대문예가 두려워서 사잇길을 통하여 귀순해 오니, 현종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을 제수하였다. 대무예가 사신를 보내어 대문예의 죄악을 폭로하고, 죽이기를 요청하였다. 현종은 대문예를 안서(安西) 지방에 거처하라고 조서를 내리고, 대무예에게는 “대문예가 곤궁에 처하여 나에게 귀순해 왔으니, 의리상 죽일 수가 없어서 벌써 나쁜 곳으로 유배보냈다"라고 꾸며서 답장을 보냈다. 아울러 발해 사신을 머물르게 하여 보내지 않고, 별도로 홍려소경(鴻臚少卿) 이도수(李道邃)와 원복(源復)에게 칙서를 보내도록 전하였다. 대무예가 전후 사실을 숨긴 알아채고 글을 올려 ”陛下는 거짓을 天下에 보여서는 아니 되오"라고 비난하니, 그 뜻은 반드시 대문예를 죽이라는 데 있었다. 현종은 이도수와 원복이 국가의 기밀을 누설한 데 대하여 노하여 모두 좌천을 시키고, 거짓으로 대문예를 내쫓았다고 회답하였다. 10년 뒤에 대무예가 장군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해적을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치니, 현종은 급히 대문예를 보내어 유주(幽州 ; 지금의 북경)의 군사를 동원시켜 반격하는 하고,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을 신라에 보내어 군사를 독려하여 발해의 남쪽를 공격하게 하였다. 마침 날씨가 매우 추운 데다 눈이 한 길(3미터)이나 쌓여 군사들이 태반이나 얼어죽으니,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대무예가 그 아우에 대한 원한이 풀리지 않아서 자객을 모아 당나라 동쪽 수도인 낙양(洛陽)에 들여보내 길에서 저격케 하였으나, 대문예가 대문예는 자객들을 물리치고 살아났다. 하남부(河南府)에서 자객들을 체포하여 모두 죽였다. 대무예가 죽자, 발해에서 사사로이 무왕(武王)이라 시호를 올렸다. 

연호를 태시(太始)로 고쳤다. 1년만에 죽으니, 시호는 간왕(簡王)이다. 삼종숙(三從叔)인 대인수(大仁秀)가 즉위하여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쳤으니, 그의 증조부 대야발(大野勃)은 대조영의 아우이다. 大仁秀가 자못 바다 북쪽의 여러 부족을 토벌하여 크게 영역을 개척하였다. 공적이 있어 검교사공(檢校司空)을 제수받고 왕위를 계승하였다. 원화(元和) 연간(806~820)에 모두 16번, 장경(長慶) 연간(821~824)에 4번, 보력(寶曆) 연간(825~826)에 2번씩 각각 조공하였다. 태화(太和) 4년(830)에 대인수가 죽으니, 시호는 선왕(宣王)이다. 아들 대신덕(大新德)이 일찍 죽은 탓에 손자 대이진(大彛震)이 즉위하여 연호를 함화(咸和)로 고쳤다. 다음해(831) 조서를 내려 관작을 계승케 하였다. 당나라 문종(文宗) 때까지 모두 12번 내조하였고, 회창(會昌) 연간(841~846)에 모두 4번을 사신을 보냈다. 대이진이 죽으니, 아우 대건황(大虔晃)이 왕위에 올랐다. 대건황이 죽으니, 대현석(大玄錫)이 즉위하였다. 함통(咸通) 연간(860~873)에 3번 조공하였다. 처음 발해의 임금이 자주 학생들을 당나라 수도의 태학(太學)에 보내어 고금의 제도를 배우고 익혀 가더니, 이때에 이르러 드디어 해동성국(海東盛國)이 되었다. 그 영역에는 5경(京) 15부(府) 62주(州)를 두었다. 숙신(肅愼)의 옛 땅을 상경(上京)으로 삼았는데 용천부(龍泉府)라고 한다. 용주(龍州), 호주(湖州), 발주(渤州) 등 3주를 관할하였다. 그 남쪽은 중경(中京)으로 삼았는데 현덕부(顯德府)라고 한다. 노주(盧州),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 등 6주를 관할하였다. 예맥(예貊)의 옛 땅을 동경(東京)으로 삼았는데, 용원부(龍原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