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신당서 거란(契丹) 열전 번역문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2. 28.
거란(契丹)은 본래 동호(東胡)의 종족으로 그 조상은 흉노(匈奴)에 격파되어 선비산(鮮卑山)을 지키고 살았다. 위(魏)나라 청룡(靑龍) 연간에 부족의 추장 비능(比能)이 점점 흉폭하고 오만해져 유주자사(幽州刺史) 왕웅(王雄)에게 피살되었다. 무리들이 마침내 미약해져 황수(潢水) 남쪽과 황룡(黃龍) 북쪽으로 달아났다. 북위(北魏) 때에 스스로 거란이라고 불렀다. 그 지역은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에서 동북쪽으로 오천리 남짓 떨어져 있다. 동쪽으로는 고구려(高句麗), 서쪽으로는 해(奚), 남쪽으로는 영주(營州), 북쪽으로는 말갈(靺鞨)과 실위(室韋)에 이른다. 냉형산(冷陘山)에 의지하여 스스로 방어하며 산다. 사냥을 하므로 사는 곳이 일정한 거처가 없다. 그 임금의 성씨는 대하(大賀)이다. 정예병사는 4만이나 되는데 8부족으로 나뉜다. 돌궐(突厥)에 신속하여 (돌궐에게) 사근(俟斤)이라는 관직을 임명받는다. 군대를 징발하여 공격할 때에는 모든 부족이 회합하지만,

사냥을 할 때에는 부족별로 행동한다. 해와 사이가 좋지 않아 매번 싸웠지만 불리하여 선비산으로 달아났다. 풍속은 돌궐과 대략 비슷하다. 사람이 죽어도 묘를 쓰지 않으며 마차에 시체를 실어 산으로 들어가 나무 꼭대기에 걸어놓는다.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아침 저녁으로 울어대지만, 부모가 죽으면 (자식들은) 그렇게 하지않으며 추도하는 기간도 없다. 무덕(武德) 연간에 거란의 대추장 손오조(孫敖曹)와 말갈 추장 돌지계(突地稽)가 함께 당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조회하였지만, 다른 추장들은 간혹 소규모로 변경을 침략하기도 하였다. 2년 뒤 군장이 사신을 보내 명마와 좋은 담비를 바쳤다. 정관(貞觀) 2년(628) 마회(摩會)가 항복해 왔다. 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이 주변의 이민족이 당나라와 연합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 (당나라에) 양사도(梁師都)와 거란을 바꾸자고 요청하였다. 태종(太宗)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거란과 돌궐은 같은 부류가 아니며, 지금 우리에게 항복해 왔는데 어떻게 요구하는냐? 양사도는 본래 당나라에 속해있던 백성으로 지방을 침략하는데, 돌궐이 도리어 원조를 하고 있다. 나는 장차 (양사도)를 사로잡을 생각이니 항복해 온 거란과 바꿀 수 없다" 이듬해 마회가 다시 입조할 때 북과 깃발을 하사하니 이로부터 (거란의) 공물이 끊이지 않았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거란의 추장과 해의 수령을 모두 징발하여 종군토록 하였다. 당 태종이 귀환할 때 영주(營州)를 들러

추장 굴가(窟哥)와 노인들을 모두 불러 차등 있게 채색 비단을 하사하고, 굴가를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에 임명하였다. 거란의 대추장이며 (돌궐의 관직인) 욕흘주(辱紇主)인 곡거(曲據)가 다시 무리를 이끌고 귀속하니, (당나라에서는) 그 부족을 현주(玄州)로 삼고 곡거에게 자사(刺史)를 제수하고,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에 예속시켰다. 얼마후 굴가가 부족을 이끌고 복속해 오니 (당나라에서는)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를 설치하고 굴가를 사지절(使持節)·10주제군사(十州諸軍事)·송막도독(松漠都督)에 임명하고 무극남(無極男)에 책봉하고 이씨성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휘하의 달계부(達稽部)는 초락주(峭落州), 흘편부(紇便部)는 탄한주(彈汗州), 독활부(獨活部)는 무봉주(無逢州), 분문부(芬問部)는 우릉주(羽陵州), 돌편부(突便部)는 일련주(日連州), 예해부(芮奚部)는 도하주(徒河州), 추근부(墜斤部)는 만단주(萬丹州), 복부(伏部)는 필려주(匹黎州)와 적산주(赤山州)로 삼아 모두 송막도독부에 예속시켰다. 그리고 돌궐에서 욕흘주(辱紇主)를 받았던 추장들을 당나라의 자사로 임명하였다. 굴가가 죽고 거란이 해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행군총관(行軍總管) 아사덕추빈(阿史德樞賓) 등이 송막도독 아복고(阿卜固)를 사로잡아 낙양에 바쳤다. 굴가에게는 자손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고막리(枯莫離)로 좌위장군(左衛將軍)․탄한주자사(彈汗州刺史)에 임명되어 귀순군왕(歸順郡王)에

귀순군왕(歸順郡王)에 책봉되었다. 다른 하나는 진충(盡忠)으로 좌위대장군(武衛大將軍)·송막도독(松漠都督)에 임명되었다. 또 손오조(孫敖曹)에게는 자손이 있었는데, 손만영(孫萬榮)으로 귀성주자사(歸誠州刺史)에 임명되었다. 이때 영주도독(營州都督) 조문홰(趙文翽)가 교만하여 자주 휘하의 거란인 추장들을 모욕하니 이진충 등이 모두 원망하였다. 손만영은 본래 인질로 당나라에 입조한 적이 있어서 중국의 지세를 자세히 알았다. 그래서 모반의 마음을 품고 (이진충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조문홰를 죽이고 영주(營州)를 차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진충은 스스로 무상가한(無上可汗)이라 칭하고 손만영을 장수로 삼아 사방으로 공격하니 향하는 곳마다 모두 항복하였다. 이주일도 되지 않아 무리가 수만명이나 되었지만 거짓으로 십만이라고 하였다. 숭주(崇州)를 공격하여 토격부사(討擊副使) 허흠적(許欽寂)을 사로잡았다.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노하여 조서를 내려 응양장군(鷹揚將軍) 조인사(曹仁師)․금오대장군(金吾大將軍) 장현우(張玄遇)․우무위대장군(右武威大將軍) 이다조(李多祚)·사농소경(司農少卿) 마인절(麻仁節) 등 28명의 장수들에게 토벌케 하였다. 한편 양왕(梁王) 무삼사(武三思)를 유관도안무대사(楡關道安撫大使), 납언(納言) 요숙(姚璹)을 부사(副使)로 삼고, 손만영의 이름은 만참(萬斬), 이진충의 이름은 진멸(盡滅)로 고쳐불렀다. 여러 장수들이 서협석(西硤石)의 황장곡(黃獐谷)에서 싸웠으나 당나라 군대가 대패하여 장현우와

마인절은 모두 사로잡혔다. 거란군이 평주(平州)로 진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측천무후는 다시 우무의대장군(右武衛大將軍) 건안왕(建安王) 무유의(武攸宜)를 청변도대총관(淸邊道大總管)으로 임명하여 거란을 공격토록 하였는데, 이때 노비 가운데 용감한 자를 관청에서 그 주인에게 값을 주고 모집하여 군대에 충원하였다. 손만영이 말에 재갈을 채우고 밤에 단주(檀州)를 습격하였는데 청변도부총관(淸邊道副總管) 장구절(張九節)이 결사대 수백명을 모집하여 육박전을 벌이니 손망영이 패하여 산으로 달아났다. 얼마후 이진충도 죽으니, 돌궐의 묵철가한(黙啜可汗)이 거란의 부족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손만영이 패잔병을 수습하여 다시 세력을 떨치며 별장(別將) 낙무정(駱務整)과 하아소(何阿小)가 기주(冀州)를 공격하여 자사 육보적(陸寶積)을 죽이고 수천명을 약탈하였다. 측천무후는 이진충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조서를 내려 하관상서(夏官尙書) 왕효걸(王孝傑)과 우림위장군(羽林衛將軍) 소굉휘(蘇宏暉)이 17만 대군을 이끌고 거란을 공격하여 동협석(東硤石)에서 싸웠으나, 당나라 군대가 패하고 왕효걸이 죽었다. 손만영은 승리의 기세를 타고 드디어 유주(幽州)를 도륙하였다. 무유의가 장수를 보내 토벌하였으니 이기지 못하였다. 당나라에서 다시 우금오위대장군(右金吾衛大將軍)·하내군왕(河內郡王) 무의종(武懿宗)을 신병도대총관(神兵道大總管),

우숙정어사대부(右肅政臺御史大夫) 누사덕(婁師德)을 청변도대총관(淸邊道大總管), 우무위위대장군(右武威衛大將軍) 사탁충의(沙吒忠義)를 청변중도전군총관(淸邊中道前軍總管)으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토벌케 하였다. 손만영의 부대 기세는 날카로와 북을 울리며 남진하며 영주(瀛州)의 속현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하니 방자함이 거리끼는 바 없었다. 이때 신병도총관(神兵道總管) 양현기(楊玄基)가 해의 군대를 이끌고 그 후미를 공격하니 거란이 대패하였다. 하아소를 사로잡았고 별장 이해고(李楷固)와 낙무정이 항복하였으며, 거란의 병장기를 산더미처럼 수습하였다. 손만영이 군대를 버리고 달아났다가 다시 패잔병을 모아 해와 싸웠다. 해가 사방에서 공격하자 크게 괴멸되어 손만영은 왼쪽으로 말달려 나갔지만 장구절이 세 방면에서 매복하여 기다렸다. 곤궁해진 손만영은 가노 및 경기병과 함께 노하(潞河) 동쪽으로 달아났다. 피곤하여 숲속에서 잠시 누운 참에 가노가 그 머리를 베어버렸다. 장구절이 손만영의 머리를 낙양으로 보내니 잔당들이 모두 괴멸되었다. 무유의가 개선가를 부르며 귀환하니 측천무후가 기뻐하여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신공(神功)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당나라에 패한 후) 거란은 자립할 수 없어 드디어 거란에 복속되었다. 구시(久視) 원년(700) 조서를 내려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와 우무위위장군(右武威衛將軍)

낙무정(駱務整)에게 거란을 토벌케 하니 격파하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거란 출신의 용맹한 장수로서 일찍이 당나라 변방을 습격하여 자주 당나라 군대를 곤궁케 하였던 자들인데, 이때 이르러 공을 세웠다. 개원(開元) 2년(714) 이진충의 사촌 동생인 도독 실활(失活)이 돌궐의 묵철가한(黙啜可汗)이 쇠락한 틈에 부락과 힐리발이건철(頡利發伊健啜)과 함께 (당나라에) 귀속하여 오자, 당나라 현종(玄宗)이 단서(丹書)와 철권(鐵券)을 하사하였다. 2년뒤 다시 해의 군장 이대포(李大酺)와 함께 오자, 조서를 내려 송막도독부를 설치하고, 실활을 송막도독에 임명하고 송막군왕(松漠郡王)에 책봉하고 좌금오위대장군(左金吾衛大將軍)을 제수하였다. 그리고 송막도독부에 정석군(靜析軍)을 설치하여 실활을 경략대사(經略大使)로 삼고, 휘하의 8부족의 추장을 모두 자사로 임명하였으며, 조서를 내려 장군 설태(薛泰)를 압번락사(押蕃落使)로 삼아 이들을 감독․위무케 하였다. 현종이 동평왕(東平王)의 외손 양원사(楊元嗣)의 딸을 영락공주(永樂公主)로 삼아 실활에게 시집보냈다. 이듬해 실활이 죽자 특진(特進)을 추증하고, 사신을 보내 조문보내어 실활의 동생인 중랑장(中郎將) 사고(娑固)에게 관작과 관할 영역을 계승토록 하였다. 이듬해 사고가 공주와 함께 내조하니 연회를 더욱 성대하게 베풀어 주었다. 가돌우(可突于)가 정석군 부사(副使)로서

용맹하여 무리의 신뢰를 얻어 사고가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결행하지 못하였다. 도리어 가돌우가 사고를 공격하니, 사고는 영주로 달아났다. 영주도독 허흠첨(許欽澹)이 중무장한 병사 오백명과 해의 군장 이대보의 병사와 함께 가돌우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고와 이대보 모두 죽었다. 허흠첨이 두려워 군대를 이끌고 유관(楡關)으로 들어와 버렸다. 가돌우가 사고의 사촌 동생 울우(鬱于)를 군장으로 추대하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다. 당나라에서는 조서를 보내 울우를 송막군왕에 책봉하고 가돌우를 사면하였다. 울우가 내조하자 솔경령(率更令)을 제수하고 종실의 여자인 모용(慕容)을 연군공주(燕郡公主)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냈다. 가돌우도 내조하자 좌우림우장군(左羽林衛將軍)을 제수하였다. 울우가 죽고 동생 토우(吐于)가 즉위하였는데 가돌우와 사이가 틀어져 휘하를 안정시키지 못하여 공주와 함께 (당나라로) 달아나니, 요양군왕(遼陽郡王)에 봉하여 숙위(宿衛)로 머무르도록 하였다. 가돌우가 이진충의 동생 소고(邵固)를 받들어 무리를 통치하니 (당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왕위를 계승하도록 허락하였다. 천자가 봉선(封禪)할 때 소고가 여런 주변민족의 군장들과 함께 행재소까지 수행하였다. 이듬해 좌우림위대장군(左羽林衛大將軍)을 제수하고 새로이 광화군왕(廣化郡王)에 봉하였다. 종실의 여자인

진(陳)을 동화공주(東華公主)로 삼아 소고에게 시집보냈다. 조서를 내려 그 부족의 추장 백여명에게 관직을 내리니, 소고는 아들을 입시(入侍)토록 하였다. 가돌우가 다시 왔는데 재상 이원굉(李元紘)에게 예우받지 못해 불쾌하게 돌아갔다. 장열(張說)이 말하였다. “저들은 금수와 같은 마음이라 오직 이익만 좇는다. 또한 한창 국정을 장악하고 있으니 아랫사람들이 모두 복속하고 있다. 예로써 너그럽게 대하지 않는다면 오지 않을 것이다” 삼년후 가돌우가 소고를 죽이고 굴열(屈烈)을 왕으로 삼고 해의 무리를 협박하여 함께 돌궐에 투항하니, 공주는 평로군(平盧軍)으로 달아났다. 조서를 내려 유주장사(幽州長史)․지범양절도사(知范陽節度事) 조함장(趙含章)이 격퇴하도록 하였다. 다시 중서사인(中書舍人) 배관(裴寬)과 급사중(給事中) 설간(薛侃)을 보내어 크게 장사들을 모집하였다. 충왕(忠王) 준(浚)을 하북도행군원수(河北道行軍元帥), 어사대부(御史大夫) 이조은(李朝隱)과 경조윤(京兆尹) 배주선(裴伷先)을 부장으로 삼고, 정백헌(程伯獻)·장문엄(張文儼)·송지제(宋之悌)·이동몽(李東蒙)·조만공(趙萬功)·곽영걸(郭英傑) 등 여덟 총관(總管)의 병사를 거느리고 거란을 토벌케 하였다. 얼마후 충왕에게 하동도제군원수(河東道諸軍元帥)를 겸하게 하였지만, 충왕이 가지 않았다. 예부상서(禮部尙書) 신안군왕(信安郡王) 위(禕)가 지절(持節)·

하북도행군부원수(河北道行軍副元帥)에 임명되어 조함장과 함께 만리장성을 넘어 추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가돌우가 달아났고 해의 무리는 항복하니, 충왕이 두 종족의 포로와 수급으로 여러 사당에 (승전 사실을) 고하였다. 이듬해 가돌우가 변방을 침략하니, 유주장사 설초옥(薛楚玉)·부총관(副總管) 곽영걸(郭英傑)·오극근(吳克勤)·오지의(烏知義)·나수충(羅守忠)이 1만 기병과 해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도산(都山) 아래에서 싸웠다. 가돌우가 돌궐의 군대로 오니, 해가 두려워하여 어느 쪽에 붙을까 기회를 엿보다가 달아나 험준한 곳에 숨어버렸다. 오지의와 나수충이 패하고 곽영걸과 오극근은 전사하니, (가돌우가) 당나라 병사 만여명을 죽였다. 현종이 장수규(張守珪)를 유주장사로 발탁하여 대응케 하였다. 장수규는 뛰어난 장수인지라 가돌우가 두려워하여 겉으로 신하가 되겠다고 하면서 서북쪽으로 달아나 돌궐에게 의탁하였다. 거란의 관리 이과절(李過折)은 가돌우에 불평을 품고 있었다. 장수규가 부하 왕회(王悔)를 보내 몰래 그를 회유하고 군대로 가돌우를 포위하였다. 이과절이 즉시 밤에 가돌우와 굴열 및 부하 수십명을 죽이고 귀속하였다. 장수규가 이과절에게 그 부족을 통솔하게 하고 가돌우 등의 머리를 상자에 담아 낙양으로 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