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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지리지

신교본요사 상경임황부 전문번역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6.
발해현 본래 동경인東京人으로 반란을 일으키므로 이곳에 옮겨두었다.흥인현興仁縣 개태開泰 2년 설치하였다. 선화현宣化縣.본래 요동遼東 신화현神化縣의 백성들로 태조太祖가 압록부鴨淥府를 격파하고 그 백성들을 모두 옮기어 도성京의 남南쪽에 거하게 하였다.성종聖宗 통화統和 8년(990년),제궁諸宮 관할하의 사인司人들의 가호家戶들을 끌어모아 두고 창민궁彰愍宮에 예속시켰다.가호家戶수는 4천이다.


신교본요사 권37 지리지 1

상경도上京道 /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

상경도上京道

상경임황부는 원래 한국漢 요동군 서안평현 땅이다. 신국新 왕망莽은 북안평北安平으로 고쳤었다.
태조太祖가 천제天梯、몽국蒙國、별로別魯등의 3산三山의 형세形勢를 취하자 위전葦甸으로 가서 이를 표시하려고 금착전金齪箭을 쏘아서 그곳을 용미궁龍眉宮이라 일렀다.
태조太祖 신책神冊 3년(918년) 그곳에 성城을 세우고 이름을 황도皇都라 이르었다.
태조太祖 천현天顯 13년(938년) 다시 이름을 상경上京이라 고치고 부府는 임황臨潢이라 일컫었다.
[二] 천제天梯, 몽국蒙國, 별로別魯등이 삼산三山이다. 몽국蒙國의 두글자는 원래 빠져있었는데 권卷 116 국어해國語解에 근거하여 보완하였다.




그림 1.  남송 섭융례의 「 거란국지契丹國志 」 첨부 <거란지리지도契丹地理之圖> [출전 : 향고도님 블로그]

래류하淶流河는 서북西北으로부터 남류南流하여 도성京의 삼면三面을 감싸안은 후 곡강曲江으로 동입東入해 들어간다. 그곳에서 북동류北東流하여 안출하按出河가 된다.
또한, 어하御河[三]、사하沙河、흑하黑河、황하潢河、압자하鴨子河、타로하他魯河[四]、랑하狼河、창이하蒼耳河、망자하輞子河、려구하臚朐河、음량하陰涼 河、저하豬河가 있으며 원앙호鴛鴦湖[五]、흥국혜민호興國惠民湖、광제호廣濟湖、염락鹽濼、백구락百狗濼、화신정火神淀[六]、마우산馬盂山、토아산兔兒山[七]、야작산野鵲 山、염산鹽山、착산鑿山[八]、송산松山、평지송림平地松林、대부산大斧山、렬산列山、굴렬산屈劣山、륵득산勒得山이 있다.
륵득산勒得山은 당唐이 대하씨大賀氏를 륵득왕勒得王을 봉한 곳이며 묘墓가 이곳에 존재한다.

☞ 금착전金齪箭 : 원래 금촉전金鏃箭에서 유래했으며 동의어이다.
금金으로 전두箭頭-화살촉-을 장식한 화살箭을 말한다.
금촉전金鏃箭은 돌궐인들의 역사나 풍습등을 기록한 《주서周書·돌궐전突厥傳》이 최초 기록으로 가축에 세를 부과할 때 이를 공정하게 했다는 약속으로 금촉전金鏃箭과 함께 기록한 목간을 밀랍으로 봉인해 신계信契로 삼았다 하며 일종의 신표信標 역할을 하였다.
원래, 북방유목민족이 사용하였으며 후대에 이르러 점차로 제후諸侯나 장상將相이나 칸Khan-제왕帝王의 표징으로 발전하여 거란제국때부터는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징표로 사용되었다.
《요사遼史》에서는 금착전金齪箭을 거란의 칸Khan이 왕경王京을 세우려는 땅에서 궁전宮殿을 세우는 곳을 정하는 의식儀式에 사용하는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표信標로 나타나고 있다.

[三] 어하御河 : ‘대전大典 7702편’을 살펴보면 고하枯河라 한다.
[四] 타로하他魯河 : 유행표遊幸表를 살피건대 달로하撻魯河라 한다.
[五] 원앙호鴛鴦湖 : 기紀를 살피건대、유행표遊幸表와 더불어 원앙박鴛鴦濼이라 했다 전한다.  ⇒  박濼 : 늪, 큰 연못
[六] 화신정火神淀 : 화火는 원래 「대大」로 오기하였다.통고通考 346권卷 및 국지國志 四、五、六、一三의 각 권卷을 근거로 고친다.
[七] 토아산兔兒山 : 영위지營衛志를 살피건대, 토아산吐兒山이라 한다.
[八] 착산鑿山 : ‘대전大典 77편’을 살펴보면 감산鑒山이라 한다.


가호家戶수는 36,500戶이고 관장하는 군軍、부府、주州、성城은 25곳이며 거느린 현縣은 10곳이다.

ː임황현臨潢縣.

태조太祖 천찬天贊 초년初年에 남으로 연燕、계薊를 공략하여 포로로 사로잡아온 인호人戶로써 황수潢水의 북쪽北쪽에 흩어져 거주하게 하였는데 현縣이 임황수臨潢水에 있었으므로 이름하였다. 땅地은 씨를 뿌리고 곡물이 자라기에 알맞으며 가호家戶수는 3,500호戶이다.

ː장태현長泰縣.

본래 발해국渤海國 장평현長平縣 백성들로 태조太祖가 대인선大諲譔을 정벌하고 먼저 이 읍邑을 얻자  그 사람들을 도성京 서북西北으로 옮기어 더불어 한민漢民과 잡거雜居하게 되었다.가호家戶수는 4천이다.

ː정패현定霸縣.

본래 부여부扶餘府 강사현強師縣 백성들로 태조太祖가 부여扶餘가 떨어져들어오자 그 백성들을 도성京 서西쪽으로 옮기어 한인漢人들과 더불어 잡처雜處하였고 땅을 나누어 논밭을 가꾸고 씨를 뿌렸다.통화統和 8년(990년),제궁諸宮 관할하의 사인司人들의 가호家戶들을 끌어모아 두고 장녕궁長寧宮에 예속시켰다.가호家戶수는 2천이다.

ː보화현保和縣.

본래 발해국渤海國 부리현富利縣의 백성들로 태조太祖가 용주龍州를 깨뜨리고 부리현富利縣사람들을 다 옮기어 도성京 남南쪽에 흩어져 거하게 하였다.통화統和 9년(991년),제궁諸宮 관할하의 사인司人들의 가호家戶들을 끌어모아 두고 창민궁彰愍宮에 예속시켰다. 가호家戶수는 4천이다.

ː로현潞縣.

본래 유주幽州 로현潞縣의 백성들로 천찬天贊 원년元年(922년),태조太祖가 계주薊州를 격파하고 로현潞縣의 백성을 탈취하여 도성京 동쪽東에 두고 발해인渤海人과 더불어 잡처雜處하게 하고 숭덕궁崇德宮에 예속시켰다.가호家戶수는 3천이다.

ː역속현易俗縣.

본래 요동遼東 발해渤海의 백성들로 태평太平 9년(1029년),대연림大延琳과 결구結搆한 요동遼東의 이夷들이 반란을 일으키었으므로 포위하고 해를 넘어 기다리니 이에 항복하여 도성京 북北쪽으로 모두 옮겨와서 그들이 거주하는 곳에 현縣을 설치하였다.이해,발해渤海의 반란한 인가人家를 옮기어 이곳에 두었가.가호家戶수는 1천이다.

ː천료현遷遼縣.

본래 요동遼東 제현諸縣의 발해인渤海人으로 대연림大延琳이 반란을 하여 지모있고 용맹한자를 좌우左右에 두었는데 후後에 성城이 항복하자 그를 죽이고 그의 가속家屬을 서울京 동북東北으로 옮기었으므로 이름하였으며 가호家戶수는 1천이다.

ː발해현渤海縣.

본래 동경인東京人으로 반란을 일으키므로 이곳에 옮겨두었다.

ː흥인현興仁縣

개태開泰 2년 설치하였다.

ː선화현宣化縣.

본래 요동遼東 신화현神化縣의 백성들로 태조太祖가 압록부鴨淥府를 격파하고 그 백성들을 모두 옮기어 도성京의 남南쪽에 거하게 하였다.성종聖宗 통화統和 8년(990년),제궁諸宮 관할하의 사인司人들의 가호家戶들을 끌어모아 두고 창민궁彰愍宮에 예속시켰다.가호家戶수는 4천이다.
[九] 관장하는 군부주성軍府州城은 25곳. 「二十五」를 살피어 보면 아래문장에 열거한 군軍、부府、주州、성城의 실제 숫자와는 부합되지 않는다.





그림 2. 거란의 활동무대


상경上京은 태조太祖가 창업創業한 땅이다. 뒤로는 산山을 등지고 앞으로는 평야海를 끌어안아 천험天險한 곳이니 굳게 방어하기에 충분하다.토지가 기름지어 땅을 가꾸어 농작물을 심기에 적합하며 수초水草로 목축牧畜하기에 용이하다. 금착金齪의 일전一箭(화살 한 대)로 2백년의 터가 되었으니 휼룡하지 아니한가.
천현天顯 원년元年(926년),발해渤海를 평정하고 돌아와 이곳에 부곽郛郭(=外城)을 펼치고 궁실宮室을 세워 천찬天贊이라 이름하였다.대전大殿 3곳을 세웠으니 개황전開皇殿、안덕전安德殿、오란전五鸞殿이라 이른다[一0].
중앙에는 역대제왕歷代帝王 어용御容이 있으며 매월 삭망朔望、절진節辰、기일忌日에는 도성의 문무백관이 함께 나아가 치제致祭[一一]를 드린다.  또한, 내성內城으로부터 동남東南쪽 모퉁이에 천웅사天雄寺를 세우고 렬고선간황제烈考宣簡皇帝 우상遺像-죽은이의 초상화-를 봉안奉安하였다.  태조太祖가 붕어한 해에 응천황후應天皇后가 의절사義節寺에서 단완斷腕-순장을 선택하는 대신 오른손을 자른 일-하고 태조릉太祖陵에 집어넣었다. 곧 사찰을 단완루斷腕樓에 세우고 여기에 수비樹碑(=立石,비를 세움)하였다.
태종太宗이 황위로 나아가 취하자 재상宰相 풍도馮道、류구劉昫등을 지절持節로 보내어 로부鹵簿、법복法服을 갖추고 이곳에 이르렀으며 태종太宗및 응천황후應天皇后의 존호尊號를 책冊-칙서-위에 썼다.태종太宗은 번부蕃部에 조서를 내리고 아울러 한漢의 제도制度를 가져와 따랐으며 개황전開皇殿에 어거하고,승천문承天門을 열어서 예禮로 받아들였다.
이어서, 황도皇都를 고쳐 상경上京이라 고치고 성城의 높이는 2장丈으로 하되 적루敵樓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폭원幅員은 27리里였다.
☞ 지절持節 : 통치자가 권한의 징표로 내린 절節-부절符節-을 받아서 군정직권軍政職權을 위임받아 각 지방으로 파견된 관료로 여러 주州를 관할하는 경우는 사지절師持節이라 함.
당唐나라때는 부절符節을 지닌 각지의 방어사防禦使、관찰사觀察使등을 통칭 절도사節度使 혹은 절제사節制使라 하였으며 군사軍事,민정民政,인사人事,이재理財를 모두 관할하였다.
☞ 로부鹵簿 : 로부의장鹵簿儀仗의 준말로 높은 이의 행렬에 위엄을 드러내고자 격식을 갖추어 배치한 의장
[一0] 오란五鸞 란鸞은 원래,「란鑾」이라 되어 있었다.본기本紀중에 무릇 다섯 번이나 아울러 란鸞으로 쓰여진 것이 보이므로 의거해 고친다.
[一一] 치제致祭 대전大典 7702편을 살펴보면 치경致敬이라 하였다.


<황도皇都>
문門 : 동문東門은 영춘迎春이 하며 안아雁兒라고도 이른다. 남문南門은 순양順陽이라 하고 남복南福[一二]이라고도 일컫는다. 서문西門은 금봉金鳳이라고 하며 서안아西雁兒라고도 일컫는다.그 북北쪽을 일러서 황성皇城이라 하며 높이高는 3장丈이며 누로樓櫓-방어용 망루-가 있다.
<황성皇城>
문門 : 동문東門은 안동安東이라 하고 남문南門은 대순大順이라 하고 서문西門은 건덕乾德이라 하고,북문北門은 공진拱辰이라 한다.
황성皇城 중앙에 대내大內가 있는데 내內의 남문南門은 승천承天이라 하고 누각樓閣이 있다. 대내大內의 동문東門은 동화東華라 하고 서문西門은 서화西華라 하는데 이곳이 안으로 통하여 출입하는 곳이다.
ː황성皇城의 정남가正南街의 동쪽지역은 유수사아留守司衙,차염철사次鹽鐵司,차남문次南門,룡사가龍寺街이다.
ː정남가正南街의 남쪽지역은 임황부臨潢府라 하며 그 옆이 임황현臨潢縣이고 현縣 서남西南은 숭효사崇孝寺로  승천황후承天皇后가 세웠다.그 절寺 서西쪽은 장태현長泰縣이고 다시, 서西쪽은 천장관天長觀이다.서남西南은 국자감國子監이고 감監 북쪽은 공자묘孔子廟,묘廟 동東쪽은 절의사節義寺이다.
ː또, (황성내皇城內) 서북西北은 안국사安國寺로 태종太宗이 건설한 곳이다.절寺 동東쪽은 제천황후齊天皇后의 고택故宅이며 택宅 동東쪽은 원비택元妃宅으로 바로 법천황후法天皇后가 이를 세웠다.
그 남南쪽은 패성니사貝聖尼寺[一三],릉금원綾錦院、내성사內省司、국원麴院,섬국贍國、성사2창省司二倉으로 모두 대내大內 서남西南이다. 八作司與天雄寺對.
<남성南城>
남성南城을 일러 한성漢城이라 하며 성城 남南쪽은 횡으로 거리街와 마주하는데 각각 루樓가 있어 치峙와 짝을 이루고 있다. 아래로는 우물井과 마굿간肆이 늘어서 있다.
ː동문東門의 북北쪽은 로현潞縣이며 또한 동남東南은 흥인현興仁縣이다.
ː남문南門의 동東쪽은 회골영回鶻營으로 회골상回鶻商이 상경上京에 머물러 거주하며 장사를 하며 그 거주지에 영營을 설치하였다.서남西南은 동문역同文驛으로 제국諸國의 신사信使가 거주한다.역驛 서남西南은 임황역臨潢驛으로 하국夏國의 사신을 접대한다.역驛 서북西福은 선사先寺로 그 절寺 서西쪽이 선화현宣化縣이고 서남西南은 정패현定霸縣이다.  현縣 서西쪽은 보화현保和縣이다.
ː서문西門의 북北쪽은 역속현易俗縣이며 현縣 동東쪽은 천요현遷遼縣이다.
주周-후주後周- 태조太祖 곽위郭威 광순廣順(951~953)년간의 호교기胡嶠記에 이르길,
「 상경上京 서루西樓에 읍邑과 가옥屋과 시장市이 늘어서 있는데 화폐錢없이 베布로 교역交易한다.서루西樓에는 여러 능금綾錦-비단-제작 장인들이 일하고 있으며, 환자宦者、한림翰林、기술伎術、교방教坊、각저角觝、유儒、승니僧尼、도사道士들이 있다.  한인漢人-북한北漢이나 후주後周인-들인 분汾、유幽、계薊의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하였다.
☞ 신사信使 : 외국에서 온 사신
☞ 환자宦者 : 궁중에서 임금을 시중하거나 숙직을 서는 벼슬아치
☞ 한림翰林 : 당唐나라때부터 한림원翰林院이 설치되었는데 이곳에서 문학적인 예능을 갖추고 황제의 조서詔書를 기초하고 칙서를 받드는 일들을 하던 관료.
☞ 교방教坊 : 궁정宮庭에서 악樂, 무도舞蹈, 희극戲劇을 행하던 예인藝人이 속한 기관
☞ 각저角觝 : 말타기,활쏘기등 여러 가지 기예를 겨루는 것
☞ 중국인中國人 : 옛 사서에 중국인中國人이란 어휘가 들어갔음을 보고 놀란다. 19세기말 재간행된 판본이 아닌가 한다. 중화민족이란 말을 도입하고 이로서 중국인中國人이란 말을 쓰게 한 양계초가 웃을 일이다.
[一二] 남南은 순양順陽이라고도 남복南福이라고도 한다. 순양順陽을 살피건대 대전大典은 순귀順歸라 하였다.「왈남복曰南福」의 3자字는 원래 「왈서안아曰西鴈兒」로 틀리게 나타나있다. 대전大典에서 한가지로 인용하였으니 상하문上下文에 의거하여 고친다.
[一三] 패성니사貝聖尼寺 패貝,남南、북北으로 건룡전乾隆殿에 미치며 본래 아울러「구具」이며 대전大典 7702편도 역시「구具」라 한다.도광전道光殿이 본래 있었으나 고쳤다.



송宋 진종真宗 대중상부大中祥符 9년(1016년)의  설영기薛映記에 이르기를,
중경中京에서 정북正北으로 80리里를 가면 송산관松山館[一四]에 이른다. 70리里를 가면 숭신관崇信館에 이르고 90리里를 가면 광녕관廣寧館에 이르며 50리里이면 요가채관姚家寨館에 이르고 50리里를 가면 함녕관咸寧館에 이르며 30리里이면 황수석교潢水石橋를 건너는데 인근에 요주饒州가 있으니 일찍이, 당唐이 거란契丹에 두었던 요락주饒樂州였고 현재는 발해인渤海人들이 그곳에 거주한다.
황수석교潢水石橋에서 50리里이면 보화관保和館이며 흑수하黑水河를 건너 70리里이면 선화관宣化館이고 50리里이면 장태관長泰館이다. 그 관館 서西쪽으로 20리里에 불사佛舍와 민가民家들이 있으니 바로 조주祖州이다.다시, 정태관長泰館에서 40리里이면 임황부臨潢府에 이른다.
숭신관崇信館을 지나면서부터는 이전의 거란契丹의 옛 지경境이며,그 남쪽은 해奚땅이다.
서문西門으로 들어가는데 그 문門을 금덕金德이라 부르며 안內에는 임황관臨潢館이 있다. 자성子城의 동문東門은 순양順陽이라 불렀다.(임황관臨潢館에서) 북北으로 가면 경복문景福門에 이르며 다시 승천문承天門에 이르는데 안內에는 소덕전昭德殿、선정전宣政殿의 두 궁전宮殿과 더불어 현려峴廬가 있는데 모두 동향東向으로 되어있다.
임황臨潢 서북西北 2백여리에 부르길 량정涼淀이란 곳이 만두산饅頭山 남南쪽에 있으며 더울때 피서避暑하는 곳이다. 풍초豐草가 많이 자라며 어른키 높이 정도의 굴지掘地가 있어 곧 얼음冰이 단단히 얼어있다.
☞ 설영薛映 : 송대宋代 시인詩人. 자字는 경양景陽,고향은 촉蜀으로 진사進士에 급제及第하여 태종太宗、진종真宗、인종仁宗의 3대에 이르는 기간(976년~1063년)을 섬기었으며 관직은 공예工禮 양부兩部의 상서겸어사중상尚書兼禦史中丞에 이르렀다. 시호諡는 문공文恭이다.
[一四] 중경中京 정북正北 80리里면 송산관松山館에 이른다 부필행정록富弼行程錄을 상고하건대,중경中京으로부터 임고관臨都館, 관요관官窯館에 이르며 다시 송산관松山館에 이르면 190리里이다.
[一五] 당唐이 거란契丹에 일찍이 요락주饒樂州를 두었다. 주州란 자字는 원래 빠져있으며  국지國志 24卷에 근거하여 보완한다.
[一六] 량정涼淀 기紀의 천현天顯 4년 6월、8월이하의 기록및 유행표遊幸表를 살펴보면 량형涼陘이라 되어있다.


Written by 구리넷[九黎Net]  솟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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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촉전金鏃箭과 전箭에 대한 참조자료

송宋의 형병邢昺의《이아爾雅·소疏》:“以金爲鏃,齊羽者名鍭。”
“금金으로써 촉鏃-화살촉을 한 것으로 제齊나라는 깃털이 있는 화살을 후鍭라 이름한다。”

진晉의 곽박郭璞의《이아爾雅·주注》:“(金鏃箭),今之錍箭是也。”
“(금촉전金鏃箭)은 현재의 비전錍箭이 맞다。”

양웅揚雄의《방언方言·九》:“箭,自關而東謂之矢,江淮之間謂之鍭。”
“전箭-화살-이라는 것은 관關밖으로 동東쪽에서는 그것을 일러 시矢-화살-라 하고,강회江淮의 사이에서는 그것을 일러 후鍭-화살-라 한다。”

계복桂馥《설문의증說文義證》:“鈭錍,短斧也,又箭名,鈚同也。”
“자비鈭錍는 단부短斧-짧은 도끼다. 또는 전箭-화살-의 이름으로 비鈚-화살-과 같은 말이다。”
《광아廣雅·석기釋器》:“錍,鏑也。《集韻》或作鈚、鎞。”
“비錍-화살촉-는 적鏑-살촉-이다。《집운集韻》은 혹 비鈚-화살-나 비鎞-비녀-로 적는다 하였다。”  
그래서, 금착전金齪箭을 후대에는 “금비전金錍箭” 또는 “금비전金鈚箭”으로도 적었다.


대수맥 (2009-10-29 23:19:09)  
솟대님 글은 항상 저희들에게 많은 지식을 향유할 수 있게 합니다. 제가 하나 건의 할 것은(혹시 제가 아직 모르는지도 모르지만) 운영자님께서 코너를 만들어 모든 분들이 쉽게 볼 수 있으면 어떨지??

아 참! 저도 조금 머리 좀 식힐께요.
부루솟라扶蘇樑 (2009-10-30 03:05:22)
위전(葦甸)과 금착전(金齪箭)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설명좀 해주세요.
관리자 (2009-10-30 10:16:11)  
대수맥님 잘알겠습니다.
솟대님 글을 한번에 볼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완순 (2009-10-30 11:44:31)  
솟대 선생님 번역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요나라 상경의 위치가 제대로 비정이 되어야만
중경이나 남경 등도 위치가 잡히게 됩니다.
그래야만 압록강 또는 압록수의 위치도 나오게 됩니다.

<또한 상경(上京) 임황부(臨潢府)는 본래 한(漢) 요동군(遼東郡) 서안평(西安平)의 땅이다.>라는
문구는 고구려 문제까지 연결이 되기 때문에 우리 고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지나 학자 중에 요나라 상경을 황하 인근의 대명부(大名府) 즉 북경(北京)이라고 비정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여기서 북경은 현 북경이 아닌 황하 인근임은 말할 것도 없구요.
이렇게 된다면 지난번 얘기한 압록강의 비정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하야 합니다.

여기에 대한 보다 명확한 사료를 찾아 지명의 고구려와 고려의 변천 과정이나 추이를
찾아내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애쓰신 솟대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올립니다.
솟대 (2009-10-30 12:24:40)  
과분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혹시, 글을 올려주시면 과거로 올라가시더라도 2007년이전은 빼고 글을 선정해 주셨으면 하는데 지금은 강역이 서진하여 틀린부분도 있으니 요긴한 부분만 가려주실 것을 운영자님께 부탁올립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상경임황부만 찾으면 거란과 거란제국 전후의 강역은 술술 풀리는데...
그런데, 상경임황부에 호수가 두개 있고 인근이 모두 수많은 하천들이 산재한 물과 호수와 초지와 산들이 많은 지역이라는 점을 주의해 검증하면 이 조건에 부합되는 지역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니 노력하면 너무 어렵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부루솟라선생님 미흡하지만 말씀하신 것 찾아보았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올립니다.

그냥 무심코 지나친 부분인데 선생님께서 말씀주셔서 차이나측 백과사전을 살펴보니 금착전金齪箭은 원래 금촉전金鏃箭에서 유래했으며 동의어라고 하네요.

위전葦甸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왕성주위의 땅을 뜻하는 전甸-경기,원래 왕성 500리이내지역-이란 단어에 위葦-갈대-라는 단어가 붙은 것으로 보아 이때 거란 상경이 세워질 래류하淶流河일대의 궁전을 세우고자 하는 지역이 초지草地였으므로 위전葦甸이라 하지 않았나 추정할 뿐입니다.

금착전金齪箭은 관련 사서의 내용으로는 돌궐인들의 역사나 풍습등을 기록한 《주서周書·돌궐전突厥傳》이 최초의 기록으로 읽어보면 가축에 세를 부과할 때 이를 공정하게 했다는 약속으로 금촉전金鏃箭과 함께 기록한 목간을 밀랍으로 봉인하여 신계信契로 삼아서 일종의 신표信標 역할을 하는 데에 사용된 것이라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북방유목민족이 사용하였으며 거란이후 동이계 북방유목제국들에 의해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징표로 사용되면서 피지배계층인 한족漢族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금촉전金鏃箭은 북방 유목민들간에 지배층의 조세부과나 상호간의 약속등을 확증하는 일종의 신표信標로서 폭넓게 사용되어지다 유목제국들이 등장하면서 후대에 이르러 거란이 제국으로 흥기할때부터는 점차로 제후諸侯나 장상將相이나 칸Khan-제왕帝王의 전용품專用品으로 발전하여 《요사遼史》에서 보듯이 금착전金齪箭은 거란의 칸Khan이 왕경王京을 세우고자 하는 땅에서 궁전宮殿을 세우는 장소를 정하는 의식儀式에서 사용할 정도로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표信標가 되고 있습니다.

찾아낸 금촉전金鏃箭과 금착전金齪箭에 대한 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금촉전金鏃箭】
금金으로 전두箭頭-화살촉-을 장식한 화살箭.
항상, 신물信物(=신표信標) 혹은 신계信契를 나타내는 징표로서 사용된다.
《漢語大詞典》:
“飾以金箭頭之箭,常用爲信契。”(見該書第十一卷1192頁)

☞ 사서史書 기록 용례 :
“바야흐로 병마를 발병하여 정벌하려고 잡축雜畜-말,소이외의 가축-들에 세를 매기고자 나무위에 쉽게 새겨서 가축들의 숫자를 세고 금촉전金鏃箭 하나와 함께 밀랍蜜蠟-꿀을 짜내고 남은 찌거기를 끊여 만든 기름-으로 봉하여 인印을 하여서 신계信契로 삼는다。《주서周書·돌궐전突厥傳》”
“其征發兵馬,科稅雜畜,輒刻木爲數,並一金鏃箭,蠟封印之,以爲信契。《周書¥厥傳》”



【금착전金齪箭】
옛 돌궐인突厥人들이 사용하던 금촉전金鏃箭과 같은 말이다。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
“곧 금촉전金鏃箭으로 요대遼代 군주君主가 땅의 형상을 헤아려 정하는 의식儀式을 거행하는 도중에 사용하는 전두箭頭-화살촉-이다。”
“(即)金鏃箭。遼代君主在舉行勘定地形的儀式中所用之箭頭。”(見該書第十一卷1195頁)

☞ 사서史書 기록 용례 :
“상경上京 임황부臨潢府는 본래 한漢 요동군遼東郡 서안평西安平의 땅地이다. 신망新莽은 부르길 북안평北安平이라 하였다.태조太祖가 천제天梯、몽국蒙國、별로別魯등의 3산三山의 형세形勢를 취하자 위전葦甸으로 가서 이를 표시하려고 금착전金齪箭을 쏘아서 그곳을 용미궁龍眉宮이라 일렀다。《요사遼史·지리지地理志一·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
“上京臨潢府,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新莽曰北安平。太祖(耶律阿保機)取天梯、蒙國、別魯等三山之勢於葦甸,射金齪箭以識之,謂之龍眉宮。《遼史·地理志一·上京臨潢府》”
솟대 (2009-10-30 12:44:53)  
몇몇 부분들의 간단한 오역들을 고치고 금착전金齪箭에 대한 해설을 첨부했습니다.
필요하신 분은 새로 가져가 쓰시기 부탁드립니다.
혹여, 잘못된 부분들이 있으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