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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수경주의 漢水 세 지류, 沔水 漾水 西漢水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8. 27.



그림 1. 1925년 발행 중화민국지도집中華民國地圖集의 섬서성지도상의 남부방안
그림 2. '중국여도'상의 정군산定軍山

아래는 북위시대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에서 발췌한 면수沔水기록부분에서 언급된 한수漢水의 세 지류에 관한 부분을 부족한 실력이지만 풀었보았습니다.
한수漢水의 한 지류에 불과한 서한수西漢水의 실체와 수경주水經注에서 말하는 면수沔水-양수漾水-서한수西漢水-진수濜水의 지리적 위치를 이해하기 쉽게 해줍니다.

또한, 현재의 면沔이 면양沔陽이고 장로張魯와 류비劉備가 도읍을 세운 한중漢中의 치소도 남정南鄭이 아니라 이곳이였으므로 실상 한중漢中의 넓이도 많이 부풀려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추가로, 류비劉備에 대항해 한중漢中을 지키고자 조조의 장수인 하후연夏侯淵이 수비하다 전사한 정군산定軍山의 위치도 같은 한중漢中의 치소였던 면沔땅 일대라는 것을 읽을 수 있으며 중국여도에서도 쉽게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수경주水經注 >>

면수沔水는 무도군武都郡 저현沮縣 동東쪽 랑곡狼谷에서 흘러나오므로, 면수沔水의 다른 이름은 저수沮水라 한다.
감인闞駰이 이르길 : 그 물이 처음에 저여沮洳에서 나오므로, 저수沮水라 한다고 했고, 현縣 또한 여기에 그 이름을 얻었다. 수원에서 흘러나와 남류南流하여 천가수泉街水를 유입하고서 그 물은 하지현河池縣으로 흘러나오며 동남류東南流하여 저현沮縣으로 들어간후 면수沔水로 회입會入해 들어간다. 면수沔水는 다시 동남東南쪽으로 흘러 저수수沮水戍-수戍는 수자리 병사들이 주둔하는 곳-를 지나가며 이윽고 동남류東南流하며 한수漢水로 유입한다.  저구沮口라 불리는 것은 소위 면沔․한․漢의 하천의 것이다.

《상서尚書》에 말한다.:파총嶓冢에서 양수漾水가 일어나 흘러나오며 동류東流하여 한수漢水를 이룬다.
《산해경山海經》에 일컫기를 한수漢水는 부우산鮒嵎山에서 발원한다 하였다. 동북東北으로 흘러 수구水口로 나아가 들어간다.  
유중옹庾仲雍이 이르길: 이 물水-면수沔水-은 남류하여 관성關城에 이르러 서한수西漢水와 합류한다. 한수漢水는 또한 동북東北으로 흘러 저구沮口에서 합수하는데, 모두 다같이 한수漢水의 수원水源들이다.  
그런 연유로, 위대魏代의 여순如淳이 이르길, 비교하여 논해 보건대 한수漢水는 면수沔水라 하였다. 공안국孔安國이 이르길:양수漾水는 동류東流하여 면수沔水가 되며, 모두 더불어 면수沔水와 더불어 합류하고 한중漢中에 이르러 한수漢水가 되니, 서로간에 이름을 통칭하여 같이 부르는 것이다.
면수沔水는 또한 동류하며 백마수白馬戍-수자리 병사들이 주둔하는 곳-남쪽을 지나면서, 진수濜水가 유입해 들어오는데, 진수濜水는 북쪽 무도군武都郡 저중氐中에서 발원하며, 남류하여 로성魯城 동쪽을 지나며 강이 넓어진다. 로魯는 패국沛國 장릉張陵의 후손孫이며, 장릉張陵은 도道를 촉蜀 학명산鶴鳴山에서 배워 그 업業을 장형張衡에게 전해졌고, 다시 장형張衡은 도道를 장로張魯에게 전하였고, 장로張魯에 이르기까지 관대하게 대하고 자애를 실천하여서, 백성百姓들이 사랑하여 귀부하니, 도道가 베풀어져 널리 퍼졌으며, 가져오는 쌀을 두斗의 단위로 한정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오두미도五斗米道」라 칭하였다.

초평初平중에 유언劉焉이 로魯의 독의사마督義司馬가 되어 한중漢中에 거주하게 되자 곡도谷道를 끊어 한漢과 연결을 끊고서, 멀리있음을 이용해 성을 쌓고 다스렸는데 효령崤嶺이 가까움으로 인하여 그 둘레는 5리였으며 동東으로는 준곡濬谷에 임하여 그 깊이가 백길에 이르고, 서북西北의 두 면面은 연봉連峰들이 벼랑崖처럼 연이어져 그곳을 징벌함을 궁리하기 어렵게 하고, 남南쪽으로 나아가면 반도盤道-능선-이 나오는데 위로 오르는데 넉넉히 2리里정도이다. 진수濜水는 다시 남南쪽으로 흘러 장로張魯의 치소 동변을 지나는데, 그 물의 서산西山위에 장천사張天師의 사당堂이 있어 지금까지 백성들이 그를 섬긴다. 유중옹庾仲雍이 그 산山을 일러 백마새白馬塞라 하였는데, 그 사당堂은 장로張魯의 치소에 속하였다. 동쪽으로 백마성白馬城을 마주보는데 일명 양평관陽平關이라고도 한다.
진수濜水는 남류南流하여 면수沔水로 들어가는데 이를 일러 진구濜口라 한다.
그 성城의 서편은 진수濜水가 띠를 두르듯 감싸며 남南쪽으로는 면천沔川과 마주보고 있어 성城의 측면에서 두 물이 서로 만나므로 또한 이르길 진구성濜口城이라고도 한다.
면수沔水는 또한 동東쪽으로 흐르며 무후루武侯壘남변을 지나는데 제갈무후諸葛武侯의 거처이다.  남南쪽으로 면수沔水를 향해 흐르는 그 물水-진수濜水-의 남南변에 량루亮壘가 있는데 배산향수背山向水의 지형으로 그 한가운데에 작은 성城이 있어 방어하기 뛰어나서 깨뜨리기 어렵다. 면수沔水는 또한 동류東流하여 면양현沔陽縣 고성故城 남南측을 지나는데 그 성城은 옛 말에 따르면 한漢나라 시조가 한중漢中에 있을 때, 소하蕭何가 축성한 것이라 한다.

한漢 건안建安 24년, 류비劉備는 류장劉璋을 아우르고 북北으로 한중漢中을 정벌하여 처름으로 단壇을 세우니 바로 한중왕漢中王의 위位가 이곳에서 나왔다. 그 성城의 남南쪽은 한수漢水에 임하여 있고, 북北쪽은 성城과 통하여 이를 수 있는 대帶가 둘러있는데, 남면南面은 삼분의 일이 수해로 무너져서 그 유적이 훼손된 것이 보이지만 그 모습을 알기에는 좋은 편이다.
남南쪽으로 정군산定軍山을 마주보고 있으니 조공曹公이 한중漢中을 남정南征할 때 장로張魯가 항복하자 이에 하후연夏侯淵등에게 그곳을 수비하도록 명하였다. 류비劉備가 양평관陽平關 남南쪽으로부터 면수沔水를 건너와서 후연侯淵의 머리를 베고 한중漢中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 장릉張陵 :
최초의 도교교단인 천사도天師道-별칭 오두미도五斗米道-의 창시자
천사도天師道의 교주의 위位는 세습되어 아들 장형張衡, 손자 장로張魯에 이어져 이들을 3장(三張)이라 하며 존칭인 천사(天師)도 자손들이 이어받았다.  
후한말엽, 3대 교주인 장로張魯는 한중漢中에 일종의 종교국가인 도교왕국을 일으켜 독자적인 군대를 갖춘 별도의 나라를 세웠고 또 다른 도교 지도자인 장수張修와 합쳐 세력을 확장하다 두 지도자의 불화로 장수張修가 죽고 장로張魯가 오로지하다 215년 조조曹操에 항복하였다.  그후,  장로張魯는 조조曹操에게 봉토를 받고 그의 제후가 되었다.




[수경주水經注 원문]

沔水出武都沮縣東狼谷中, 沔水一名沮水. 闞駰曰:以其初出沮洳然, 故曰沮水也, 縣亦受名焉. 導源南流, 泉街水注之, 水出河池縣, 東南流入沮縣, 會于沔. 沔水又東南逕沮水戍, 而東南流注漢, 曰沮口所謂沔漢者也.

《尚書》曰:嶓冢導漾, 東流為漢. 《山海經》所謂漢出鮒嵎山也. 東北流得獻水口, 庾仲雍云:是水南至關城合西漢水. 漢水又東北合沮口, 同為漢水之源也. 故如淳曰:此方人謂漢水為沔水, 孔安國曰:漾水東流為沔, 蓋與沔合也. 至漢中為漢水, 是互相通稱矣. 沔水又東逕白馬戍南, 濜水入焉, 水北發武都氐中, 南逕張魯城東. 魯, 沛國張陵孫, 陵學道于蜀鶴鳴山, 傳業衡, 衡傳于魯, 魯至行寬惠, 百姓親附, 供道之費, 米限于, 故世號「五米道」.

初平中, 劉焉以魯為督義司馬, 住漢中斷絕谷道, 用遠城治, 因即崤嶺, 周迴五里, 東臨濬谷, 杳然百尋, 西北二面, 連峰接崖, 莫究其極, 從南爲盤道, 登陟二里有餘. 濜水又南逕張魯治東, 水西山上有張天師堂, 于今民事之. 庾仲雍謂山為白馬塞, 堂為張魯治, 東對白馬城, 一名陽平關. 濜水南流入沔, 謂之濜口. 其城西帶濜水, 南面沔川, 城側二水之交, 故亦曰濜口城矣. 沔水又東逕武侯壘南, 諸葛武侯所居也. 南枕沔水, 水南有亮壘, 背山向水, 中有小城, 迥隔難解. 沔水又東逕沔陽縣故城南, 城, 舊言漢祖在漢中, 蕭何所築也.

漢建安二十四年, 劉備并劉璋, 北定漢中, 始立壇, 即漢中王位于此. 其城南臨漢水, 北帶通達, 南面崩水三分之一, 觀其遺略, 厥狀時傳, 南對定軍山, 曹公南征漢中, 張魯降, 乃命夏侯淵等守之. 劉備自陽平關南渡沔水, 遂斬淵首, 保有漢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