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상하장은 진번국 소속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2. 14.
상하장(上下鄣)이란 곳은 기준(箕準)이 왕으로 있는 조선(朝鮮)에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처음 거처를 정한 곳이었다.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을 보면

《사기 조선열전》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為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為其逺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為界.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조선(朝鮮)의 왕으로 있는 위만은 옛 연국(燕國) 사람이다. 연국은 전성기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아전(吏)을 두고 장새(鄣塞)를 쌓았다. 진국(秦國)이 연국(燕國)을 멸하고 (장새를 쌓은 곳을) 요동(遼東) 밖의 요(徼, 亭障)에 소속시켰다. 한국(漢國)이 일어나고 그곳이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遼東)의 옛 성채(塞)를 수리하고 패수(浿水)[1]를 경계로 하였다. 연국(燕國)을 복속시켰으나 연국(燕國)의 왕 로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갔고 위만은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1000여 명을 모아 무리를 지어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을 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성채(塞)를 나와 패수(浿水)를 건넌 후에 옛 진국(秦國)의 공터인 상하장(上下鄣)에 살았다. 점차 진번(眞番) 조선(朝鮮) 만이(蠻夷)들을 복속하여 거느리고 연국(燕國)과 제국(齊國)의 망명자들의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


《사기》에서 기록하는 바를 다시 되새겨보자. 연국(燕國)은 전성기때에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킨 곳을 그들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진국(秦國)이 번성하자 진국은 연국(燕國)을 침략하여 그곳을 요동(遼東) 밖의 성채 즉 정장(亭障)으로 삼았다. 따라서, 이곳이 바로 사서에서 말하는 고진공지(故秦空地) 혹은 진고공지(秦故空地)이다. 진국은 연국을 멸하였으나 연국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빼앗은 땅을 다 진국의 영토가 되지 못하였던 것을 말해주고 있다. 진국을 대신하여 한국(漢國)이 번성하자 옛 연국이 조선을 침략하여 아전(吏)을 두었던 곳, 즉 고진공지가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국경을 뒤로 물려 요동군(遼東郡) 패수(沛水)를 경계로 삼았었다. 그리고 나서 연국을 복속시켰으나 그곳의 왕이었던 로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로 망명을 하였고, 이에 따라 연국 사람 위만은 조선으로 망명하였고 상하장(上下鄣)에 거처를 정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곳은 고진공지임이 분명하다. 상하장에 거처를 둔 위만은 점차 진번 · 조선 · 만이 등의 사람들을 점차 자기 편으로 만들고 연국과 제국(齊國)의 망명자들을 모아 세력을 강하게 한 후에 기준(箕準)의 도읍을 침략하여 낙랑(樂浪)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후에 유철(劉徹)이 침략하여 4개의 군을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진번군(眞番郡)이다.

그런데 《후한서》에 至昭帝始元五年罷臨屯眞番以幷樂浪玄菟玄菟復徙居句驪(BC 82년에 임둔군과 진번군을 폐지하고 낙랑군과 현도군에 병합하였다. 현도군은 다시 구려로 옮겨가 살았다)고 하였고 武帝滅朝鮮以沃沮地為玄菟郡後為夷貊所侵徙郡於髙句驪西北(류철劉徹이 조선을 멸하고 옥저 땅을 현도군으로 삼았으나 후에 이맥夷貊이 침입하여 군을 고구려 서북으로 옮겨갔다)고 하였으니, 진번군과 임둔군은 이맥의 침입을 받아 폐지시킨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진번군(眞番郡)에 대해서 알아보자.

《前漢書》卷六
其地為樂浪臨屯玄菟眞番郡[臣瓉曰茂陵書臨屯郡治東暆縣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十五縣眞番郡治霅縣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十五縣師古曰樂音洛浪音郎番音普安反暆音弋支反霅音丈甲反]
그 땅을 낙랑군(樂浪郡) 임둔군(臨屯郡) 현도군(玄菟郡) 진번군(眞番郡)으로 하였다. [신찬(臣瓉)이 말하기를 무릉서(茂陵書)에서는 임둔군(臨屯郡)의 치소는 동이현(東暆縣)인데 장안(長安)에서 6138리를 가며 15개의 현이 있다고 하였고, 진번군(眞番郡)의 치소는 잡현(霅縣)[2]인데 장안(長安)에서 7640리를 가며 15개의 현이 있다고 하였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樂의 음은 락(洛)이고 浪의 음은 랑(郎)이고 番의 음은 반(普安反)이고 暆의 음은 이(弋支反)이고 霅의 음은 잡(丈甲反)이라고 하였다.]


진번군(眞 番郡)은 현이 15개 인데 한국(漢國)에서 진번군을 다스리기 위한 치소가 잡현(霅縣)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맥의 침입으로 진번군이 폐지되었으며 진번군을 낙랑군으로 통합하였다고 하는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지나인(支那人)들은 그들 특유의 병적 심리로 인하여 일반사람들이 상상치 못할 일을 하곤 하는데, 그것은 멸망 당한 군현들의 이름만 이용하여 다른 땅에다 허설(虛設)하는 것인데 대표적인 것이 현도군이다. 또한 그들의 병적 심리는 진번군의 멸망에도 적용되는데, 진번군이 멸망하자 낙랑군에 통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진번군이 모두 멸망하자 그 치소였던 잡현만이 낙랑군에 명목상 설치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낙랑군에 진번군의 치소인 잡현과 이름이 같은 현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낙랑군에 대한 기록을 보도록 하자.

《前漢書》卷二十八下
樂浪郡戸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有雲鄣]
낙랑군의 가구수는 6,2812이고 인구수는 10,6748이다. [운장雲鄣이 있다.]


여기서 분명 雲鄣(운장)의 雲은 霅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잘못 쓴 것이리라. 이는 진번군 霅縣(잡현)은 원래 霅鄣(잡장)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霅鄣이란 무엇인가? 그 해답은 《사기 색은》에 있다.

《史記索隱》卷二十五
上下鄣[按地理志樂浪有雲鄣]
상하장[안: 한서 지리지의 낙랑군에 雲鄣(운장)이 있다]


《사기색은》의 저자는 왜 상하장(上下鄣)을 주석하면서 《한서 지리지》에 낙랑군 기록에 雲鄣(운장)이 있다고 하였을까? 《사기색은》의 저자는 上下鄣(상하장)이 卡鄣(잡장)을 잘못 썼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즉, 卡이라는 글자를 두 개의 글자로 보고 세로쓰기를 하여 上과 下으로 나눠 썼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존재한다.

《五音集韻》卷十五
霅[地名霅障在樂浪]
잡[지명이다. 잡장은 낙랑군에 있다.]


결론적으로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연국(燕國)은 진번국(眞番國)을 침략하여 빼앗은 땅에 장새(障塞)를 쌓고 그곳을 잡장(卡鄣)이라 하였다. 진국(秦國)이 연국을 멸망시키자 이곳은 공지(空地)로 남았었다. 한국(漢國)이 일어나자 요동군(遼東郡) 패수(沛水)를 국경으로 삼았기에 요동군 동쪽의 진번국은 그야말로 사람이 살지 않는 황량한 곳이 되었지만, 위만(衛滿)이 조선(朝鮮)으로 망명하여 옛 진번국 지역인 잡장(卡鄣)에 머물렀다. 위만은 조선을 침략하여 잡장(卡鄣)에서 패수(浿水) 왕험성(王險城)으로 옮겼지만 우거(右渠)는 류철(劉徹)에게 멸망하니 낙랑 · 진번 · 임둔 · 현도군이 들어섰다. 그러나 이맥(夷貊)의 침입으로 진번군과 임둔군은 멸망하고 현도군은 구려(句麗)의 서북으로 옮겨가 허설(虛設)되었다. 그리고 진번군의 치소인 卡鄣(잡장) 즉 霅障(잡장)도 또한 낙랑군에 허설되었으나, 사서를 기록하는 자가 실수하여 霅障(잡장)을 雲障(운장)으로 기록하였던 것이다.

 
-----------------------------------
[1] 조선(朝鮮)의 도읍이 있었던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는 국경이 될 수 없으므로 당연히 《한서 지리지》에 나온 료동군(遼東郡) 패수(沛水)이어야만 한다.
[2] 霅의 음은 “삽”이지만 사고(師古)의 주석에 음이 丈甲反이라고 하였으므로 “잡”으로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