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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삼국사기 살수(薩水)의 기록은 후대에 첨가된 것인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6. 1.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 초기 살수(薩水)에 대한 기록은 좀 이상하다.


AD32. 최리의 낙랑국 멸망

 - 만약 낙랑국이 평양방면에 있었다면 분명 이 시점에서 살수(즉 청천강)을 점령하였다.


AD37. 낙랑을 다시 습격하여 멸하였다.

- 중복된 기록이 5년뒤에 다시 나타난다. AD32년의 것이 낙랑국이고 AD37년의 것이 낙랑군이라는 말도 있고.....여러가지 설이 있다.

- 어찌됐는 확실한 것은 AD37년에는 확실하게 살수(청천강)이 고구려 땅이 되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낙랑국이나 낙랑군이나 둘 중 하나는 대동강 유역에 있었기때문이다. 


AD44. 후한 광무제가 살수(청천강) 남쪽을 군현으로 삼다.

- 이 기록에 대한 신빙성 역시 의심되고 있지만...

- 살수(청천강) 남쪽을 군현으로 삼앗다고 하였으므로 이 시기에 살수(청천강) 북쪽은 고구려 땅이다. 왜냐하면 광무제가 살수 남쪽을 빼앗은 기록이 고구려본기에 나와있기때문이다.


AD56. 영토를 개척하여 남쪽으로 살수까지 이르렀다.

- 살수 북쪽을 차지한 것은 이미 대무신왕때이고 후한 광무제가 살수 남쪽을 차지한 후부터는 살수 북쪽은 이미 고구려 땅이 되었다.
- 그러나 이제와서 살수까지 영토를 개척하였다는 비논리적인 기록이 삼국사기에 담겨있다.


즉, 삼국사기에 나온 고구려 초기 살수에 대한 기록은 믿을만 하지 못하다. 
이말은 바꾸어말하면 이러한 살수에 대한 기록들은 고구려에서 살수에 대한 사건에 발생했을때 고구려에서 만든 기록을 참고한 것이 아니라...
후대에 무엇인가를 참고하여 삼국사기에 첨가하였다는 말이며..

그렇기때문에 AD100년도 되기전 사건에 薩이란 글자를 사용하여 "薩水"라고 적은 것이며 불교가 유입된 후에 "살수"에 대한 기록이 첨가된 것을 말한다.


AD32, AD37, AD44, AD56에 나온 살수의 기록은 당대의 기록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