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사성과 숭산으로 바라본 백제의 위치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5. 13.
백제의 역사는 많이 왜곡되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개로왕은 AD475년에 사성(蛇城)에서 숭산(崇山)까지 둑을 쌓았다고 말하고 있다.[1]
그러나 어느누구도 이곳의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말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강단사학에서 말하는 위치에서는 이 사성과 숭산을 찾을 수 없기때문이다.
백제는 생각보다 북쪽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를 읽다보면 도무지 이해못하는 기록이 있는데 낙랑과 말갈과 백제의 위치관계이다.
김부식은 말갈이 백제의 북쪽에 있고 낙랑이 백제의 동쪽에 있다고 했다.[2]
말갈은 우리가 보통 여진족이라고 하는 종족이고 낙랑은 낙랑군이던 낙랑국이던 평안도와 요녕성을 벗어날수가 없다.
그러나 강단사학에서는 백제가 지금의 서울이라고 말하고 있다.

위치관계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다. 
다시 생각해보면 백제는 아주 북쪽에 있다.

임하필기에서는 백제가 건국된 곳이 원래 중국의 봉천 개원현이라고 말하고 있다.[3]
따라서 백제의 사성과 숭산은 낙랑군과 요동군 부근에서 발견되어야만 할 것이다.(낙랑군은 난하 부근에서부터 평안도까지라고 생각된다)

숭산(崇山)

앞서 임하필기에서 백제가 일어난 곳은 봉천 개원현이라고 하였으므로
이 근방에서 숭산이 기록된 것을 찾으면 그곳에 바로 백제의 숭산이다. 
즉, 요동군과 낙랑군에서 숭산이 존재하는 것이다.

요사지리지 동경도 숭산이 발견된다.
이곳은 요나라 숭주 융안군이고 원래 漢國(한국)의 낙랑군 장잠현이라고 말하고 있다. [4]
또한곳은 요나라 귀덕주 숭산현인데 원래 漢의 양평현이라고 말하고 있다.[5]

漢의 낙랑군 장잠현과 漢의 요동군 양평현의 땅이 서로 붙어 있었고 이곳을 백제가 차지한 뒤로 숭산현으로 삼았던 것 같다.
낙랑군 장잠현과 양평현에 대한 연혁이 자세하지 않은 것은 요나라가 발해와 고구려의 군현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기때문이다.

한편 청나라 기록인 기보통지에는 산해관의 북쪽에 숭산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6]
즉, 백제의 숭산은 현재 산해관 북쪽의 산이 아닐까 짐작해 보며 이곳이 낙랑군과 요동군의 경계지역일 것이고 백제가 건국되면서 백제가 그곳을 차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성(蛇城)

열하일기에 사성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蛇는 곧 뱀의 뜻이므로 "배암성" 즉 白巖城(백암성)이 사성이라고 말하고 있다.[7]

이러한 백제의 사성(蛇城)을 고구려가 빼앗은 후 뱀(비얌, 배암)을 한자로 번역하여 蛇로 썼던 것을 음차하여 배암성(白巖城, 백암성)으로 고쳐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백암성과 사성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순서를 보면 열하일기에서 사성이 백암성이라고 말한 것이 올바른 것인지 그 대략이나마 살필 수 있을 것이다.

i) 삼국사기에 기록된 사성(蛇城)

  • 책계왕 원년(AD286): 왕은 고구려의 침공과 노략질을 염려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 개로왕 21년(AD475):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 데 사성(蛇城)의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에까지 이르렀다.
 

ii)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암성(白巖城)

  • 양원왕 3년(AD 547) 백암성(白巖城)을 고쳐 쌓고, 신성(新城)을 수리하였다.
  • 양원왕 7년(AD 551) 돌궐(突厥)이 신성으로 와서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백암성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 보장왕 3년(AD 645) 이에 앞서 요동성의 장사(長史)가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자, 그 성사(省事)가 그의 처자를 받들고 백암성으로 도망하였다. 

즉, 백제의 사성은 개로왕 475년 이후 시점 어디선가 고구려에 빼앗겼다는 것을 알수있다. 
그리고 그곳은 돌궐이 공격할 정도로 서쪽에 위치하였고 요동성의 성사가 백암성으로 도망할 정도로 요동성과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백암성은 어디인가?
요사(遼史)를 읽어보면 "백암"이 두 곳이 있다.

첫째는  노주 현덕군으로서 발해의 삼로군이고 여기의 옛현은 백암현이라고 기록한 것이고[8]
둘째는 암주 백암군으로 이곳에 발해의 백암성이 있다고 하였으며 발해가 설치한 현으로서 백암현이 있다고 하였다.[9]

그런데 삼국사기에 "백암성을 점령한 후 당국(唐國)이 암주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의 사성은 암주 백암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개 요하 서쪽일 것이다.

즉, 개로왕이  사성에서 숭산까지 쌓았다던 방죽은 현재 산해관에서 요하까지인데, 대릉하 유역을따라 방죽을 쌓지 않았나 한다.


--------------------------------------------
[1]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 (AD 475년)
緣河樹堰 自蛇城之東 至崇山之北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 데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에까지 이르렀다.

[2]<<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BC 6)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日
나라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강역을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3]<<임하필기>> 권36
扶餘國本濊地. 今中國奉天之開元縣句麗百濟之(?)自起也
부여는 원래 濊의 땅인데, 현재 중국 봉천 개원현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일어난 곳이다.

[4]<<요사>> 권38, 동경도
崇州 隆安軍 刺史, 本 漢 長岑縣地, 渤海置州,故縣三, 崇山 溈木 縁城, 皆廢, 户五百, 在京東北一百五十里, 統縣崇信縣.
숭 주(崇州) 융안군(隆安軍)이 설치되었으며 자사를 두었다. 본래 한나라 낙랑군 장잠현(長岑縣)이며 발해가 주를 설치하였다. 옛 현은 숭산(崇山) 위수(潙水) 녹성(綠城) 등 셋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500이며, 동경에서 동북쪽으로 150리 떨어져 있다. 관할 현은 하나인데 숭신현(崇信縣)이다.

[5]<<요사>>권38 동경도
貴徳州...貴徳縣 本 漢 襄平縣, 渤海 為 崇山縣.
귀덕주...귀덕현(貴德縣) 본래 한나라 양평현(襄平縣)이며 발해 때는 숭산현(崇山縣)이다.

[6] <<畿輔通志>>卷四十
山海關...중략...北倚崇山南臨大海
산해관은 북쪽으로 숭산에 의지하고 남쪽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7] <<열하일기>>
때마침 봉황성을 새로 쌓는데 어떤 사람이 “이 성이 곧 안시성(安市城)이다.” 라고 한다.
고구려의 옛 방언에 큰 새를 ‘안시(安市)’라 하니, 지금도 우리 시골말에 봉황(鳳凰)을 ‘황새’라 하고 사(蛇)를 ‘배암(白巖)’이라 함을 보아서, “수(隋)ㆍ당(唐) 때에 이 나라 말을 좇아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사성(蛇城)을 백암성(白巖城)으로 고쳤다.” 는 전설이 자못 그럴싸하기도 하다.

[8]  <<요사>> 권38 동경도
盧州 玄徳軍 刺史, 本 渤海 杉盧郡, 故縣五, 山陽 杉盧 漢陽 白巖 霜巖, 皆廢, 户三百, 在京東一百三十里.  兵事 屬 南女直湯河司, 統縣一, 熊岳縣 西至海 一十五里, 傍海 有 熊岳山.
노주(盧州) 현덕군(玄德軍)이 설치되었으며 자사를 두었다. 본래 발해의 삼로군(杉盧郡)으로 옛 현은 산양(山陽)•삼로(杉盧)•한양(漢陽)•백암(白巖)•상암(霜巖) 등 다섯이 있었는데 다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300이며, 동경에서 130리 떨어져 있다. 군사 관련업무는 남여진탕하사(南女直湯河司)에 속해있다. 관할 현은  하나 웅악현(熊岳縣)으로 서쪽으로 바다까지 15리이며, 바닷가에 웅악산(熊岳山)이 있다.

[8] 요사 지리지
瀋州...巖州 白巖軍 下 刺史, 本 渤海 白巖城.  太宗 撥屬 瀋州, 初隸長寧宫, 後屬敦睦宫, 統縣一.  白巖縣 渤海置. 
심주... 암주(巖州) 백암군(白巖軍)이 설치되었고 하급으로 자사를 두었다. 본래 발해의 백암성(白巖城)이다. 태종이 심주에 속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장녕궁에 예속시켰다가 나중에 돈목궁에 속하게 하였다. 관할 현은 하나이며  백암현(白巖縣) 발해가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