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수(沸流水)를 강단에서는 현재의 혼하(渾河)라고 합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비류국을 다물도 즉 옛 땅을 회복한다는 의미라고 하였으므로 비류국의 위치가 고구려 중앙일리는 없습니다. 비류국은 고구려 서쪽이어야죠.
그러나 저는 고구려의 초기 건국지는 북경 근처라고 의심하여 비류국은 고구려 서쪽 땅이므로 다물도라 부른 것이고 요서군 근방이라고 의심하였습니다
위의 제 주장이 맞다면 북경 근처에 비류수가 존재한다는 기록이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러한 기록을 찾았습니다. 비류수는 유리하 상류로 의심됩니다.
번역은 제가 한문이 짧은 관계로 대충합니다.
欽定日下舊聞考卷一百三十
按
房山縣河道有由境内發源者曰半壁店河曰長溝河曰韓村河曰(牛奔)流河曰雅河其半壁店河上流一自西域寺出者為西域寺河一自白玉塘出者為白玉塘河白玉塘河至獨
樹村會西域寺河注半壁店歸挾河其長溝河自上方山逕甘池等村歸挾河其韓村河上流一自禪窩水出逕婁子水瓦井等村一自青龍潭逕龍門口村至南章村滙為韓村河亦歸挾
河其(牛奔)流河上流有四一自茶樓頂經山口等村者為壩兒河一自牛口峪馬跑泉經顧冊等村者為凉水河一自西北荆山經塔窪紅寺等村者為西沙河一自沙峪溝經歇息岡
北折而東者為東沙河至坨頭村東四水交滙為(牛奔)流河歸琉璃河其雅河自河西村逕南公村入良鄉界有由境外發源者曰拒馬河曰大石河曰啞叭河曰順
水河其拒馬河自紫荆闗來入房山境張坊村至上灘村東分為二一名風水新河由正子營西歸淶水縣一為東拒馬河由正子營東歸涿州拒馬河其大石河自宛平栁林入房山境長
草村東南歸琉璃河其啞叭河自宛平潭柘寺入房山境石甫村至怪它村歸良鄉界其順水河自宛平太倉嶺馬蹄泉入房山境北歸良鄉界此房山縣水道之大概謹附録於此.
안: 방산현 물길에서 발원하는 것 중에 반벽점하(半壁店河), 장구하(長溝河), 한촌하(韓村河), 분(?)류하((牛奔)流河),
아하(雅河)가 있다. 이 반벽점하의 상류 중 하나는 서역사(西域寺)에서 나와 서역하(西域寺河)가 되고, 또하나는
백옥당(白玉塘)에서 나와 백옥당하(白玉塘河)가 되는데 백옥당하는 독수촌獨樹村에 이르러 서역사하(西域寺河)와 합하여
반벽점(半壁店)으로 들어가고 난 뒤 협하(挾河)로 되돌아간다.....중간 해석 생략.....분류하((牛奔)流河)의 상류는 4개가
있다. 하나는 다루항경산(茶樓頂經山口)촌에서 발원하여 패아하(壩兒河)가 되는 것이고, 두번째는
우구욕마포천경두책(牛口峪馬跑泉經顧冊)등에서 발원하여 량수하(凉水河)가 되는 것이고, 세번째는 서북형산경탑와홍사(西北荆山經塔窪紅寺)
등에서 발원하여 서사하(西沙河)가 되는 것이고, 네번째는 사욕구경헐식강북절(沙峪溝經歇息岡北折)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흘러
동사하(東沙河)가 되는 것인데 이는 이두촌(坨頭村) 동쪽에 이른다. 이들 4개의 강(壩兒河, 凉水河, 西沙河, 東沙河)은 서로 돌아 분(?)류하((牛奔)流河)가 되어 유리하로 들어간다....이하 생략.
여
기 유리하 상류 중에 분명 (牛奔)流河가 있습니다. (牛奔) 글자는 아무리 찾아도 발음이 뭔지 뜻이 뭔지 알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뜻과 음은 유추해 볼 수 있는데 牛과 奔이 합친 글자이므로 소가 달리듯 흐르는 강이라는 뜻일겁니다. 그리고 그 음도 아마
"분"에 가까운 발음일 것입니다.
그러면 沸流水를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보통 비류수라고 읽는데 沸는 다른 발음이 있더군요.
説文解字卷十一上
沸, 畢沸濫泉, 从水弗聲, 分勿切, 又方未切
여기 발음을 보면 두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分勿切 즉 "불"로 발음해야 하는 것이고 또하나는 方未切 즉 "비"로 발음해야 하는 것입니다. 分勿切 "불"이 먼저 나와 있으므로 주 발음은 "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리고 沸의 뜻은 물이 끓어서 넘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특이하게 沸를 "불"로 발음할때는 존한자사전에 뜻이 용솟음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위 (牛奔)의 뜻으로 생각되는 소가 달려가는 것과 흡사합니다. 즉, 沸流水란 끓어 넘치듯이 흐르는 물을 뜻하며
(牛奔)流河란 소가 내달리는 흘러가는 물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발음도 "불"과 "분"으로 서로 비슷합니다. 그러나 "분류수"나
"불류수"나 역행자음동화가 되면 다 똑같은 발음입니다.
또한가지... 유리하의 상류가 (牛奔)流河 즉 비류수이고, 또한 이 강의 상류가 량수하(凉水河)인데 이 량수하(凉水河)는 유리명왕이 두 부인을 위하여 2개의 궁을 지은 곳이 아닌가 합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조에
二女爭寵 不相和 王於凉谷造東西二宮 各置之
두 여자가 사랑 받으려고 서로 다투며 화목하지 않았으므로 왕은 량곡(凉谷)에 동·서 2궁을 지어 각각 살게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비류국과 비류수가 북경의 남쪽 유리하의 상류지역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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