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체적으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내용이 같습니다. 내용중 일부 다르긴 하지만 대동소이하다. 온조왕 44년조의 이야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는 일치하지만 박창화 선생님의 다른 유고인 고구려사초와는 10년이 상이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결어 부분에
'백제'의 어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는데 선생님의 생각인지 어느 시대에 누가 기록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온조왕 다음
페이제에 비류왕과 온조왕 이야기를 반복하여 기재하고 있는데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습니다. 혼란을 느끼실 것 같아 페이지로
구분코자 합니다.
始祖溫祚王
시조 온조왕
其父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 (或云 朱蒙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 沸流溫祚 恐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似今 白頭山)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南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此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足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臺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陁勃之女也 始歸于優臺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臺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開基創業 頗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子 以至嗣位焉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勸勞多矣 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贅疣 不如奉母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鴨綠江)帶(豆滿江)二水 至彌鄒忽(三水)以居之 北史及晉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彊國』 未知孰是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 아버지는 추모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하였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라 하였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월군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라고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지금의 백두산)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처럼 띠고 있고, 남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B.C.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수 없어서 위례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 그 후 (처음) 올 때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씨(氏)로 삼았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는 우대(優臺)로 북부여 왕 해부루의 서손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로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대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대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 건소 2년(B.C.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그저 군더더기 살처럼 답답하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와 대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 북사와 진서(晉書)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그는) 처음에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해설》삼국사기 백제본기와 거의 내용이 동일하다. 다른 부분만 굵은 선으로 표시했다.
元年 癸卯 五月 立東明王廟
원년(B.C. 18) 계묘 5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二年 甲辰 正月 王謂群臣曰 "末曷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宜繕兵積穀 爲拒守之計". 三月 以族父乙音 有智識膽力 拜爲右輔 委以兵馬之事
2년(B.C. 17) 갑진 1월에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였다. "말갈은 우리 북쪽 경계에 연접하여 있고, 그 사람들은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저축하여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3월에 왕은 재종숙부 을음이 지식과 담력이 있으므로 우보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三年 乙巳 九月 末曷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賊生還者十之一二.
3년(B.C. 16) 을사 9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왔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급히 쳐서 크게 이겼다. 적으로서 살아 돌아간 자가 열에 한둘이었다.
四年 丙午 春夏旱 饑疫. 八月 遣使樂浪修好.
4년(B.C. 15)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8월에 사신을 낙랑에 보내 우호를 닦았다.
五年 丁未 十月 巡撫北邊 獵獲神鹿
5년(B.C. 14) 정미 10월에 북쪽 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고, 사냥하였는데 신록을 잡았다.
八年 庚戌 二月 末曷賊三千來 圍慰禮城 王閉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斧峴(厚致岺) 一戰克之 殺虜五百餘人 七月 築馬首城(在茂山) 竪甁山柵(在明川) 樂浪太守使告曰 "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渝舊好 黎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 "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有渝於和好 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彊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 與樂浪失和.
8년(B.C. 11) 경술 2월에 말갈 적병 3천명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하자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이 양식이 다 떨어져 돌아가자, 왕은 날랜 군사를 뽑아 대부현(후치령)까지 쫓아가 한번 싸워 이겼으며, 5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7월에 마수성(무산에 있다)을 쌓고 병산책(명천에 있다)을 세웠다. 낙랑태수의 사자가 고하여 말하였다. "근래에 서로 예방하고 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 영토에 접근하여 성과 목책을 만들고 세우는 것은 혹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만일 옛 우호를 저버리지 않고 성을 허물고 목책을 깨뜨려 버린다면 시기하고 의심할 바가 없겠지만, 혹시 그렇지 않다면 청하건대 한번 싸워서 승부를 결정하자." 왕이 회답하였다.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길인데 어찌 감히 이로써 화친과 우호를 저버림이 있을 것인가. 의당히 집사가 의심할 바가 아닌 것 같다. 만일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낸다면 우리나라도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우호를 잃게 되었다.
十年 壬子 九月 王出獵獲神鹿 以送馬韓. 十月 末曷寇北境 王遣兵二百 拒戰於昆彌川上(富寧大川) 我軍敗 績依靑木山(鏡城白山)自保 王親帥精騎一百 出烽峴救之 賊見之卽退
10년(B.C. 9) 임자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록을 잡아 마한에 보냈다. 10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왕은 군사 200명을 보내서 곤미천(부녕대천)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청목산(경성백산)을 의지하고 스스로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으로 나아가 구원하니 적이 보고는 곧 물러갔다.
十一年 癸丑 四月 樂浪使末曷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人. 七月 設禿山(在北靑)拘川(在咸興)兩柵 以塞樂浪之來路
11년(B.C. 8) 계축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서 병산책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7월에 독산(북청에 있다)과 구천(함흥에 있다)의 두 목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았다.
十三年 乙卯 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末葛 侵軼疆境 少無(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有, 문맥상 有가 맞다)寧日 今妖祥屢見 國母棄養勢不 自安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劃定疆域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13년(B.C. 6) 을묘 2월에 서울에서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가 돌아가시어 (우리를 돕기를 버리니) 형세가 불리하므로 스스로 편안하기 위해서는 필히 장차 도읍을 옮겨야 한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7월에 한산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十四年 丙辰 正月 遷都. 二月 王巡撫部落 務勸農事. 七月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14년(B.C. 5) 병진 1월에 도읍을 옮겼다. 2월에 왕은 부락을 순행하며 위무하고 농사를 힘써 장려하였다. 7월에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해설》아래에 붉은 색으로 쓰인 부분은 또렷이 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남당 선생님이 다른 책의 내용을 옮겨 보완한 것으로 보이므로 해석을 생략하겠다.
十五年 丁巳 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15년(B.C. 4) 정사 1월에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천하지 아니하게,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
十七年 己未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四月 立廟以祠國母.
17년(B.C. 2) 기미 봄에 낙랑이 쳐들어 와서 위례성을 불 질렀다. 4월에 사당을 세우고 국모에게 제사지냈다.
十八年 庚申 十月 末曷掩至 王帥兵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乃還
18년(B.C. 1) 경신 10월에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하여 왔다. 왕이 장수가 되어 칠중하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11월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려고 구곡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二十年 壬戌 二月 王設大壇 親祠天地 異鳥五來翔
20년(A.D. 2) 2월에 왕이 큰 제단을 설치하고 친히 천지에 제사지냈는데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와서 맴돌았다.
二十二年 甲子 八月 築石頭高木二城. 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末曷賊 一戰破之 虜獲生口 分賜將士.
22년(A.D. 4) 갑자 8월에 석두성과 고목성의 두 성을 쌓았다. 9월에 왕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부현의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적을 만났다. 한번 싸워 격파하고, 살아있는 채로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二十四年 丙寅 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 王慙遂壞其柵
24년(A.D. 6) 병인 7월에 왕이 웅천책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 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하여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생각건대 우리를 적으로 인정하여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 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二十五年 丁卯 二月 王宮井水暴溢 漢城人家馬生牛 一首二身 日者曰 "井水暴溢者 大王勃興之兆也 牛一首二身者 大王竝隣國之應也" 王聞之喜 遂有倂呑辰馬之心
25년(A.D. 7) 정묘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입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과 마한을 병탄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二十六年 戊辰 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儻爲他所倂 則唇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倂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 固守不下
26년(A.D. 8) 무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달라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는 격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과 금현성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二十七年 己巳 四月 二城(圓山錦峴)降 移其民 於漢山之北.
27년(A.D. 9) 기사 4월에 두 성(원산성, 금현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옮겼다.
《해설》삼국사기 백제본기와 내용이 같으나 일부 누락이 있어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마한이 멸망했다는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박창화 선생님의 유고 나머지부분의 해석이 마무리되면 여기에 대해 보완하겠습니다.
《참조문》삼국사기 백제본기
27년(A.D. 9)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가을 7월에 대두산성을 쌓았다.
二十八年 庚午 二月 立元子多婁爲太子 委以內外兵馬事. 四月 隕霜害麥.
28년(A.D.10) 경오 2월에 맏아들 다루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三十一年 癸酉 正月 分國內民戶爲南北部. 四月 雹. 五月 地震
31년(A.D.13) 계유 1월에 나라 안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남부와 북부로 삼았다. 4월에 우박이 내렸다. 5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三十三年 乙亥 春夏大旱 民饑相食 盜賊大起 王撫安之. 八月 加置東西二部
33년(A.D.15) 을해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왕이 이를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8월에 동부와 서부의 두 부(部)를 더 설치하였다.
三十四年 丙子 十月 馬韓舊將周勤 據牛谷城叛, 王躬率兵五千 討之, 周勤自經 腰斬其尸 竝誅其妻子
34년(A.D.16) 병자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이 우곡성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친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
三十六年 戊寅 七月築湯井城 分大豆城民戶使居之. 八月 修葺圓山錦峴二城 築古沙夫里城
36년(A.D.18) 무인 7월에 탕정성을 쌓고 대두성의 민가들로 하여금 살게 하였다. 8월에 원산성과 금현성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았다.
三十七年 己卯 三月 雹大如鷄子 鳥雀遇者死. 四月旱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37년(A.D. 19) 기묘 3월에 우박이 내렸다. 크기가 달걀만 하여 참새 같이 작은 새들이 맞으면 죽었다. 여름 4월에 가물었는데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한수의 동북쪽 부락에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해 간 자가 1천여 집이나 되니, 패수와 대수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三十八年 庚辰 二月 王巡撫 東至走壤 北至浿河 五旬而返. 三月 發使勸農桑 其以不急之事擾民者 皆除之. 十月 築大壇 祀天地.
38년(A.D. 20) 경진 2월에 왕이 (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여 동쪽으로는 주양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패하에 이르렀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 3월에 아랫사람을 보내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큰 단을 쌓고 천지에 제사지냈다.
四十年 壬午 九月 靺鞨來攻述川城. 十一月 又襲斧峴城 殺掠百餘人 王命勁騎二百拒擊之.
40년(A.D. 22) 임오 9월에 말갈이 술천성을 침공해 왔다. 겨울 11월에 또 부현성을 습격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날쌘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四十一年 癸未 正月 右輔乙音卒. 拜北部解婁爲右輔, 解婁本扶餘人也. 神識淵奧 年過七十 膂力不愆 故用之. 二月 發漢水東北諸部落人年十五歲已(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以)上 修葺慰禮城.
41년(A.D. 23) 계미 정월에 우보 을음이 죽자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이다. (해루는) 나라 안의 아는 것이 깊었고 (사정에 밝았고),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한 것이었다. 2월에 한수 동북쪽의 모든 부락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의 (지붕을 덮어) 수리하였다.
四十三年 乙酉 八月 王田牙山(咸從)之原五日. 九月 鴻鴈百餘集王宮 日者曰 "鴻鴈民之象也, 將有遠人來投者乎". 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43년(A.D. 25) 을유 8월에 왕이 아산(함종)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월에 기러기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일관(그날그날의 운세를 보는 관직)이 말하였다.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입니다. 장차 먼 데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10월에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여 집이 부양에 귀순하니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안치하였다.
四十四年 丙戌 十月 高句麗王大武神親征盖馬國, 殺其王慰安百姓, 母虜掠但以其地爲郡縣. 十二月句茶國王聞盖馬滅懼害及己 擧國以降于高句麗.
44년(A.D. 26) 병술 10월 고구려왕 대무신이 친히 개마국을 정벌하여 개마국 왕을 죽이고 백성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고, (개마국왕)의 어머니를 포로로 잡고 노략질 했다. 무릇 이로써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12월 구다국 왕이 개마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해설》 1.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없는 내용이다. 박창화 선생님 유고 고구려사략과 10년 차이가 난다. 위의 문제는 백제왕의 재위 년에 영향을 미치는 내용이므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백제의 역사도 아닌 내용을 여기에 적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다음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2. 다음 글은 김성겸 선생님의 해석을 인용한 것으로 coo2.net에 일부 한자가 적용되지 않거나 공란으로 있는 부분이 많지만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문》박창님 선생님 유고 고구려사략 대무신왕
◎九年丙申, 十月, <蓋馬>主<小 >妻<半乙>殺< >而立子<叔乙>. < >子<厚滿><狗文>等相爭, <厚滿>先入城殺<叔乙>, <半乙>與<狗文>潛通而納之. <厚滿>來奔, 上親征誅<狗文>,以其國爲<蓋馬郡>. 十二月, <勾茶王><厚燐>聞<蓋馬>滅, 擧國來降. <厚潾>,<閃尼>子也. 以其< 那部>讓於<絡文>, 而陰有反意, 反< >死. 授<狗文>而約伐<西河><南口>, 事發而國除, 以其都爲南蘇(□□□), 西路皆拓.
太輔<松義>薨, <松>太后胞兄也. 其母<貫貝>氏, 勸<松讓>獻國, 或<義>以忠, <義>守其母訓, 爲國盡忠, 持身儉約, 歷事三世, 德望蘇然, 勝於父矣. 以其弟<屋句>爲左輔, <乙豆智>太輔, <麻勁>右輔. <勁>,<摩離>子也.
<蓋馬>反衆與<漢人>來侵<句麗城(林西)>, <玄 >太守<勾芻>往救, 疾作而薨, <松屋勾>代之而平之(劉秀使吳漢滅蜀□公□□夷其族).
◎9년(A.D.36)병신, 10월, <개마>주인 <소쾌>의 처 <반을>이 <쾌>를 죽이고 아들 <숙을>을 세웠다. <쾌>의 아들인 <후만>과 <구문>은 서로 다투었는데, <후만>이 먼저 입성하여 <숙을>을 죽이니, <반을>은, <구문>과 밀통하고는, <구문>을 받아들였다. <후만>이 도망하여 오자, 상은 친히 <구문>을 정벌하고, <개마국>을 <개마군>으로 삼았다. 12월, <구다>와 <후린>이 <개마>가 멸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후린>은 <섬니>의 아들이고, <연나부>를 <락문>에게 넘겼는데, 속으로는 뒤집을 생각이 있었고, <쾌>에 반하다 죽었다. <구문>에게 넘겨주면서 <서하>와 <남구>를 정벌하기로 약속하였었으나, 일이 생겨서 나라가 사라졌고, 그 도읍도 <남소>가 되어, 서쪽으로 길을 열었다.
태보 <송의>가 죽었는데, <송>태후의 동복 오라비였다. 그의 모친 <관패>씨는 <송양>에게 나라를 (고구리에) 바치라 권하였었고, <송의>가 충성스러워서, 모친의 훈계를 잘 지켜, 나라에 충성을 다하며 자신은 검약하여, 삼대가 벼슬을 하였고 덕망이 소연하여, 아비를 능가하였다. 그의 동생 <옥구>는 좌보가 되고, <을두지>는 태보가 되었으며, <마경>은 우보가 되었다. <마경>은 <마리>의 아들이다.
<개마>의 반중과 <한인>이 함께 <구려성(임서)>에 쳐들어 왔는데, <현토>태수 <구추>가 달려가서 구하다가, 병이 나서 죽으니, <송옥구>가 대신하여 싸워서 이를 평정하였다(유수사오한멸촉□공□□이기족).
四十五年 丁亥 春夏大旱 草木焦枯. 冬月 地震 傾倒人屋
45년(A.D. 27) 정해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풀과 나무가 타고 말랐다. 겨울에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을 넘어뜨렸다.
四十六年 戊子 二月 王薨
46년(A.D. 28) 2월에 왕이 죽었다.
按馬韓五十四國有伯濟國. 馬韓王責百濟王曰 “王初渡河無所容足吾割東北百里之地安之” 云. 百濟之起於馬韓東北明矣, 濟之爲字齊水也. 溫祚沸流之名皆取於溫河今白頭山北溫河之地. 盖其鄕也. 南斗滿鴨綠而王於咸鏡平安之間鴨綠斗滿之間多水可稱百濟也. 百字本非數而大之矣故伯字亦可矣. 後人以多水解之故改以百也. 十濟之說恐不當矣, 齊水之義本非渡也, 祭水之神也. 百濟之義與太山相表裏矣. 熊津大川皆與百濟義相同. 此皆古陰陽家祕傳之說, 而今人多不解故只取平易之義而己也.
(주체는 백제) 마한54개국을 누르고 있을 때에는 ‘伯濟’라는 나라가 있었다. 마한왕이 백제왕이 책망하여 말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 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 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다.(중략)” 백제는 마한의 동북에서 일어남이 분명하다. ‘濟’를 바꾸면(파자하면) ‘齊水’이다. 온조와 비류라는 이름도 모두 ‘溫河’에서 (이름을) 취하였다. (溫河)는 지금의 백두산 북쪽 溫河의 땅이다. 모두 그 고향의 이름이다. 남쪽으로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함경(도)와 평안(도) 사이,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에 많은 ‘水’(강, 하천 등)들을 왕이 백제라고 칭하였음이 옳다. ‘百’자는 본래 숫자가 아니라 크다는 뜻이다. 이런 까닭으로 역시 ‘伯’자가 옳다. 후대의 사람들이 ‘多水’를 풀이 하면서 ‘百’으로 고쳐 풀이한 때문이다. ‘十濟’설은 추측하건데 부당한 것이다. ‘齊水’의 뜻은 본래 강을 건넌다는 뜻이 아니라, 제사 지내는 물의 신(祭水之神)이라는 뜻이다. ‘百濟’라는 뜻은 ‘太山’과 서로 겉과 속이다(‘百濟’는 ‘太山’과 의미가 다르다). ‘熊津大川(웅진대천)’은 모두 백제와 더불어 뜻이 같다. 이것은 모두 옛날 음양가(천문(天文), 역수(曆數), 풍수지리 따위를 연구하여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사람)의 비전(비밀리에 전하여 내려오거나 또는 방법) 설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풀이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본래의 뜻을 쉽게 취한 까닭이다.
《해설》‘按馬韓五十四國有伯濟國’라는 말을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백제가 마한을 누르고 있을 때는 백제라는 나라가 있었다면, 그 이후에 혹시 백제가 없어지기라도 하였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온조백제는 한 때 마한의 작은 나라로 축소되었다가 공손씨가 요동을 장악하고 있을 때 부활한 것으로 보여 진다. 왜냐하면 초기백제는 작은 나라에 불과한데 54개국이라는 덩치 큰 마한을 한꺼번에 삼켰기 때문이다. ‘유리’와 ‘비류’를 비교해 보면, ‘유리’는 한 나라를 정복하면 왕의 딸을 취하여 처 또는 첩으로 삼거나 하여 회유하는 정책을 폈고, ‘비류’는 조강지처만 고집하고 있다. 그것이 고구려와 백제의 차이였던 것 같다. 고려왕 ‘왕건’의 예를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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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祖溫祚王
시조 온조왕
其父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 (或云 朱蒙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 沸流溫祚 恐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似今 白頭山)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南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此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足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臺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陁勃之女也 始歸于優臺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臺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開基創業 頗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子 以至嗣位焉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勸勞多矣 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贅疣 不如奉母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鴨綠江)帶(豆滿江)二水 至彌鄒忽(三水)以居之 北史及晉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彊國』 未知孰是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 아버지는 추모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하였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라 하였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월군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라고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지금의 백두산)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처럼 띠고 있고, 남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B.C.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수 없어서 위례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 그 후 (처음) 올 때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씨(氏)로 삼았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는 우대(優臺)로 북부여 왕 해부루의 서손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로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대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대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 건소 2년(B.C.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그저 군더더기 살처럼 답답하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와 대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 북사와 진서(晉書)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그는) 처음에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해설》삼국사기 백제본기와 거의 내용이 동일하다. 다른 부분만 굵은 선으로 표시했다.
元年 癸卯 五月 立東明王廟
원년(B.C. 18) 계묘 5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二年 甲辰 正月 王謂群臣曰 "末曷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宜繕兵積穀 爲拒守之計". 三月 以族父乙音 有智識膽力 拜爲右輔 委以兵馬之事
2년(B.C. 17) 갑진 1월에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였다. "말갈은 우리 북쪽 경계에 연접하여 있고, 그 사람들은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저축하여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3월에 왕은 재종숙부 을음이 지식과 담력이 있으므로 우보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三年 乙巳 九月 末曷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賊生還者十之一二.
3년(B.C. 16) 을사 9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왔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급히 쳐서 크게 이겼다. 적으로서 살아 돌아간 자가 열에 한둘이었다.
四年 丙午 春夏旱 饑疫. 八月 遣使樂浪修好.
4년(B.C. 15)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8월에 사신을 낙랑에 보내 우호를 닦았다.
五年 丁未 十月 巡撫北邊 獵獲神鹿
5년(B.C. 14) 정미 10월에 북쪽 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고, 사냥하였는데 신록을 잡았다.
八年 庚戌 二月 末曷賊三千來 圍慰禮城 王閉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斧峴(厚致岺) 一戰克之 殺虜五百餘人 七月 築馬首城(在茂山) 竪甁山柵(在明川) 樂浪太守使告曰 "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渝舊好 黎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 "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有渝於和好 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彊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 與樂浪失和.
8년(B.C. 11) 경술 2월에 말갈 적병 3천명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하자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이 양식이 다 떨어져 돌아가자, 왕은 날랜 군사를 뽑아 대부현(후치령)까지 쫓아가 한번 싸워 이겼으며, 5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7월에 마수성(무산에 있다)을 쌓고 병산책(명천에 있다)을 세웠다. 낙랑태수의 사자가 고하여 말하였다. "근래에 서로 예방하고 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 영토에 접근하여 성과 목책을 만들고 세우는 것은 혹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만일 옛 우호를 저버리지 않고 성을 허물고 목책을 깨뜨려 버린다면 시기하고 의심할 바가 없겠지만, 혹시 그렇지 않다면 청하건대 한번 싸워서 승부를 결정하자." 왕이 회답하였다.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길인데 어찌 감히 이로써 화친과 우호를 저버림이 있을 것인가. 의당히 집사가 의심할 바가 아닌 것 같다. 만일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낸다면 우리나라도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우호를 잃게 되었다.
十年 壬子 九月 王出獵獲神鹿 以送馬韓. 十月 末曷寇北境 王遣兵二百 拒戰於昆彌川上(富寧大川) 我軍敗 績依靑木山(鏡城白山)自保 王親帥精騎一百 出烽峴救之 賊見之卽退
10년(B.C. 9) 임자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록을 잡아 마한에 보냈다. 10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왕은 군사 200명을 보내서 곤미천(부녕대천)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청목산(경성백산)을 의지하고 스스로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으로 나아가 구원하니 적이 보고는 곧 물러갔다.
十一年 癸丑 四月 樂浪使末曷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人. 七月 設禿山(在北靑)拘川(在咸興)兩柵 以塞樂浪之來路
11년(B.C. 8) 계축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서 병산책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7월에 독산(북청에 있다)과 구천(함흥에 있다)의 두 목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았다.
十三年 乙卯 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末葛 侵軼疆境 少無(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有, 문맥상 有가 맞다)寧日 今妖祥屢見 國母棄養勢不 自安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劃定疆域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13년(B.C. 6) 을묘 2월에 서울에서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가 돌아가시어 (우리를 돕기를 버리니) 형세가 불리하므로 스스로 편안하기 위해서는 필히 장차 도읍을 옮겨야 한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7월에 한산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十四年 丙辰 正月 遷都. 二月 王巡撫部落 務勸農事. 七月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14년(B.C. 5) 병진 1월에 도읍을 옮겼다. 2월에 왕은 부락을 순행하며 위무하고 농사를 힘써 장려하였다. 7월에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해설》아래에 붉은 색으로 쓰인 부분은 또렷이 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남당 선생님이 다른 책의 내용을 옮겨 보완한 것으로 보이므로 해석을 생략하겠다.
十五年 丁巳 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15년(B.C. 4) 정사 1월에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천하지 아니하게,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
十七年 己未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四月 立廟以祠國母.
17년(B.C. 2) 기미 봄에 낙랑이 쳐들어 와서 위례성을 불 질렀다. 4월에 사당을 세우고 국모에게 제사지냈다.
十八年 庚申 十月 末曷掩至 王帥兵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乃還
18년(B.C. 1) 경신 10월에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하여 왔다. 왕이 장수가 되어 칠중하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11월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려고 구곡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二十年 壬戌 二月 王設大壇 親祠天地 異鳥五來翔
20년(A.D. 2) 2월에 왕이 큰 제단을 설치하고 친히 천지에 제사지냈는데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와서 맴돌았다.
二十二年 甲子 八月 築石頭高木二城. 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末曷賊 一戰破之 虜獲生口 分賜將士.
22년(A.D. 4) 갑자 8월에 석두성과 고목성의 두 성을 쌓았다. 9월에 왕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부현의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적을 만났다. 한번 싸워 격파하고, 살아있는 채로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二十四年 丙寅 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 王慙遂壞其柵
24년(A.D. 6) 병인 7월에 왕이 웅천책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 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하여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생각건대 우리를 적으로 인정하여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 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二十五年 丁卯 二月 王宮井水暴溢 漢城人家馬生牛 一首二身 日者曰 "井水暴溢者 大王勃興之兆也 牛一首二身者 大王竝隣國之應也" 王聞之喜 遂有倂呑辰馬之心
25년(A.D. 7) 정묘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입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과 마한을 병탄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二十六年 戊辰 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儻爲他所倂 則唇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倂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 固守不下
26년(A.D. 8) 무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달라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는 격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과 금현성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二十七年 己巳 四月 二城(圓山錦峴)降 移其民 於漢山之北.
27년(A.D. 9) 기사 4월에 두 성(원산성, 금현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옮겼다.
《해설》삼국사기 백제본기와 내용이 같으나 일부 누락이 있어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마한이 멸망했다는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박창화 선생님의 유고 나머지부분의 해석이 마무리되면 여기에 대해 보완하겠습니다.
《참조문》삼국사기 백제본기
27년(A.D. 9)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가을 7월에 대두산성을 쌓았다.
二十八年 庚午 二月 立元子多婁爲太子 委以內外兵馬事. 四月 隕霜害麥.
28년(A.D.10) 경오 2월에 맏아들 다루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三十一年 癸酉 正月 分國內民戶爲南北部. 四月 雹. 五月 地震
31년(A.D.13) 계유 1월에 나라 안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남부와 북부로 삼았다. 4월에 우박이 내렸다. 5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三十三年 乙亥 春夏大旱 民饑相食 盜賊大起 王撫安之. 八月 加置東西二部
33년(A.D.15) 을해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왕이 이를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8월에 동부와 서부의 두 부(部)를 더 설치하였다.
三十四年 丙子 十月 馬韓舊將周勤 據牛谷城叛, 王躬率兵五千 討之, 周勤自經 腰斬其尸 竝誅其妻子
34년(A.D.16) 병자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이 우곡성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친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
三十六年 戊寅 七月築湯井城 分大豆城民戶使居之. 八月 修葺圓山錦峴二城 築古沙夫里城
36년(A.D.18) 무인 7월에 탕정성을 쌓고 대두성의 민가들로 하여금 살게 하였다. 8월에 원산성과 금현성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았다.
三十七年 己卯 三月 雹大如鷄子 鳥雀遇者死. 四月旱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37년(A.D. 19) 기묘 3월에 우박이 내렸다. 크기가 달걀만 하여 참새 같이 작은 새들이 맞으면 죽었다. 여름 4월에 가물었는데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한수의 동북쪽 부락에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해 간 자가 1천여 집이나 되니, 패수와 대수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三十八年 庚辰 二月 王巡撫 東至走壤 北至浿河 五旬而返. 三月 發使勸農桑 其以不急之事擾民者 皆除之. 十月 築大壇 祀天地.
38년(A.D. 20) 경진 2월에 왕이 (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여 동쪽으로는 주양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패하에 이르렀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 3월에 아랫사람을 보내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큰 단을 쌓고 천지에 제사지냈다.
四十年 壬午 九月 靺鞨來攻述川城. 十一月 又襲斧峴城 殺掠百餘人 王命勁騎二百拒擊之.
40년(A.D. 22) 임오 9월에 말갈이 술천성을 침공해 왔다. 겨울 11월에 또 부현성을 습격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날쌘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四十一年 癸未 正月 右輔乙音卒. 拜北部解婁爲右輔, 解婁本扶餘人也. 神識淵奧 年過七十 膂力不愆 故用之. 二月 發漢水東北諸部落人年十五歲已(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以)上 修葺慰禮城.
41년(A.D. 23) 계미 정월에 우보 을음이 죽자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이다. (해루는) 나라 안의 아는 것이 깊었고 (사정에 밝았고),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한 것이었다. 2월에 한수 동북쪽의 모든 부락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의 (지붕을 덮어) 수리하였다.
四十三年 乙酉 八月 王田牙山(咸從)之原五日. 九月 鴻鴈百餘集王宮 日者曰 "鴻鴈民之象也, 將有遠人來投者乎". 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43년(A.D. 25) 을유 8월에 왕이 아산(함종)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월에 기러기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일관(그날그날의 운세를 보는 관직)이 말하였다.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입니다. 장차 먼 데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10월에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여 집이 부양에 귀순하니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안치하였다.
四十四年 丙戌 十月 高句麗王大武神親征盖馬國, 殺其王慰安百姓, 母虜掠但以其地爲郡縣. 十二月句茶國王聞盖馬滅懼害及己 擧國以降于高句麗.
44년(A.D. 26) 병술 10월 고구려왕 대무신이 친히 개마국을 정벌하여 개마국 왕을 죽이고 백성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고, (개마국왕)의 어머니를 포로로 잡고 노략질 했다. 무릇 이로써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12월 구다국 왕이 개마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해설》 1.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없는 내용이다. 박창화 선생님 유고 고구려사략과 10년 차이가 난다. 위의 문제는 백제왕의 재위 년에 영향을 미치는 내용이므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백제의 역사도 아닌 내용을 여기에 적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다음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2. 다음 글은 김성겸 선생님의 해석을 인용한 것으로 coo2.net에 일부 한자가 적용되지 않거나 공란으로 있는 부분이 많지만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문》박창님 선생님 유고 고구려사략 대무신왕
◎九年丙申, 十月, <蓋馬>主<小 >妻<半乙>殺< >而立子<叔乙>. < >子<厚滿><狗文>等相爭, <厚滿>先入城殺<叔乙>, <半乙>與<狗文>潛通而納之. <厚滿>來奔, 上親征誅<狗文>,以其國爲<蓋馬郡>. 十二月, <勾茶王><厚燐>聞<蓋馬>滅, 擧國來降. <厚潾>,<閃尼>子也. 以其< 那部>讓於<絡文>, 而陰有反意, 反< >死. 授<狗文>而約伐<西河><南口>, 事發而國除, 以其都爲南蘇(□□□), 西路皆拓.
太輔<松義>薨, <松>太后胞兄也. 其母<貫貝>氏, 勸<松讓>獻國, 或<義>以忠, <義>守其母訓, 爲國盡忠, 持身儉約, 歷事三世, 德望蘇然, 勝於父矣. 以其弟<屋句>爲左輔, <乙豆智>太輔, <麻勁>右輔. <勁>,<摩離>子也.
<蓋馬>反衆與<漢人>來侵<句麗城(林西)>, <玄 >太守<勾芻>往救, 疾作而薨, <松屋勾>代之而平之(劉秀使吳漢滅蜀□公□□夷其族).
◎9년(A.D.36)병신, 10월, <개마>주인 <소쾌>의 처 <반을>이 <쾌>를 죽이고 아들 <숙을>을 세웠다. <쾌>의 아들인 <후만>과 <구문>은 서로 다투었는데, <후만>이 먼저 입성하여 <숙을>을 죽이니, <반을>은, <구문>과 밀통하고는, <구문>을 받아들였다. <후만>이 도망하여 오자, 상은 친히 <구문>을 정벌하고, <개마국>을 <개마군>으로 삼았다. 12월, <구다>와 <후린>이 <개마>가 멸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후린>은 <섬니>의 아들이고, <연나부>를 <락문>에게 넘겼는데, 속으로는 뒤집을 생각이 있었고, <쾌>에 반하다 죽었다. <구문>에게 넘겨주면서 <서하>와 <남구>를 정벌하기로 약속하였었으나, 일이 생겨서 나라가 사라졌고, 그 도읍도 <남소>가 되어, 서쪽으로 길을 열었다.
태보 <송의>가 죽었는데, <송>태후의 동복 오라비였다. 그의 모친 <관패>씨는 <송양>에게 나라를 (고구리에) 바치라 권하였었고, <송의>가 충성스러워서, 모친의 훈계를 잘 지켜, 나라에 충성을 다하며 자신은 검약하여, 삼대가 벼슬을 하였고 덕망이 소연하여, 아비를 능가하였다. 그의 동생 <옥구>는 좌보가 되고, <을두지>는 태보가 되었으며, <마경>은 우보가 되었다. <마경>은 <마리>의 아들이다.
<개마>의 반중과 <한인>이 함께 <구려성(임서)>에 쳐들어 왔는데, <현토>태수 <구추>가 달려가서 구하다가, 병이 나서 죽으니, <송옥구>가 대신하여 싸워서 이를 평정하였다(유수사오한멸촉□공□□이기족).
四十五年 丁亥 春夏大旱 草木焦枯. 冬月 地震 傾倒人屋
45년(A.D. 27) 정해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풀과 나무가 타고 말랐다. 겨울에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을 넘어뜨렸다.
四十六年 戊子 二月 王薨
46년(A.D. 28) 2월에 왕이 죽었다.
按馬韓五十四國有伯濟國. 馬韓王責百濟王曰 “王初渡河無所容足吾割東北百里之地安之” 云. 百濟之起於馬韓東北明矣, 濟之爲字齊水也. 溫祚沸流之名皆取於溫河今白頭山北溫河之地. 盖其鄕也. 南斗滿鴨綠而王於咸鏡平安之間鴨綠斗滿之間多水可稱百濟也. 百字本非數而大之矣故伯字亦可矣. 後人以多水解之故改以百也. 十濟之說恐不當矣, 齊水之義本非渡也, 祭水之神也. 百濟之義與太山相表裏矣. 熊津大川皆與百濟義相同. 此皆古陰陽家祕傳之說, 而今人多不解故只取平易之義而己也.
(주체는 백제) 마한54개국을 누르고 있을 때에는 ‘伯濟’라는 나라가 있었다. 마한왕이 백제왕이 책망하여 말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 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 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다.(중략)” 백제는 마한의 동북에서 일어남이 분명하다. ‘濟’를 바꾸면(파자하면) ‘齊水’이다. 온조와 비류라는 이름도 모두 ‘溫河’에서 (이름을) 취하였다. (溫河)는 지금의 백두산 북쪽 溫河의 땅이다. 모두 그 고향의 이름이다. 남쪽으로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함경(도)와 평안(도) 사이,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에 많은 ‘水’(강, 하천 등)들을 왕이 백제라고 칭하였음이 옳다. ‘百’자는 본래 숫자가 아니라 크다는 뜻이다. 이런 까닭으로 역시 ‘伯’자가 옳다. 후대의 사람들이 ‘多水’를 풀이 하면서 ‘百’으로 고쳐 풀이한 때문이다. ‘十濟’설은 추측하건데 부당한 것이다. ‘齊水’의 뜻은 본래 강을 건넌다는 뜻이 아니라, 제사 지내는 물의 신(祭水之神)이라는 뜻이다. ‘百濟’라는 뜻은 ‘太山’과 서로 겉과 속이다(‘百濟’는 ‘太山’과 의미가 다르다). ‘熊津大川(웅진대천)’은 모두 백제와 더불어 뜻이 같다. 이것은 모두 옛날 음양가(천문(天文), 역수(曆數), 풍수지리 따위를 연구하여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사람)의 비전(비밀리에 전하여 내려오거나 또는 방법) 설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풀이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본래의 뜻을 쉽게 취한 까닭이다.
《해설》‘按馬韓五十四國有伯濟國’라는 말을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백제가 마한을 누르고 있을 때는 백제라는 나라가 있었다면, 그 이후에 혹시 백제가 없어지기라도 하였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온조백제는 한 때 마한의 작은 나라로 축소되었다가 공손씨가 요동을 장악하고 있을 때 부활한 것으로 보여 진다. 왜냐하면 초기백제는 작은 나라에 불과한데 54개국이라는 덩치 큰 마한을 한꺼번에 삼켰기 때문이다. ‘유리’와 ‘비류’를 비교해 보면, ‘유리’는 한 나라를 정복하면 왕의 딸을 취하여 처 또는 첩으로 삼거나 하여 회유하는 정책을 폈고, ‘비류’는 조강지처만 고집하고 있다. 그것이 고구려와 백제의 차이였던 것 같다. 고려왕 ‘왕건’의 예를 생각해 보자.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5-31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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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이지만... 십제는 숫자로 십의 뜻이 아니라 "온조"의 이두식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十은 우리말로 "열"이니 온조의 "온"과 그 음이 비슷하고... 濟는 온조의 "조"를 음차 표현한거죠 그래서 十濟는 온조라고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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按馬韓五十四國有伯濟國 按은 대개 서두에 나와서 "살펴보다"는 뜻이죠. "마한 54국을 살펴보면 (그 중에) 伯濟國이 있었다" 그렇게 쉽게 풀이합니다. 고구려사초가 앞으로 해석되겠지만.. 마한이란 나라는 없어진게 아니고..계속해서 나옵니다. 참고로 했으면 좋겠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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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按'자의 뜻이 중요하기에 옥편과 한글2002 한자를 검색해도 '살펴보다'는 뜻이 나오지 않아 이상하다 생각했습니다. 네이버 한자사전을 검색하니 '살펴보다'는 뜻이 있군요. 그래서 혼자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인가 봅니다. 이희석님 고맙습니다. 온조왕27년에 나오는 '마한이 드디어 멸망했다'는 구절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백제왕기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글입니다. 마지막으로 온조왕 44년조가 문제가 있군요.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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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님/ 님은 해석 분야에 재능이 있어 보여요.. 한문을 모르면 역사연구는 접어야 할 정도로.. 필수요건이랍니다. 민중서림에서 나온 한자사전을 추천합니다. 4~5만원대로.. 용례도 풍부한데다..웬만한 한문해석에 막힘이 없을거예요. 영어사전식으로 되어 있어 보기에도 편리합니다. 그리고, 한문문법책을 사셔서..병행하면서 공부해 보세요.. 문법에 강하면 해석에 지름길을 탈 수 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