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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백송] 내원성은 요녕성 법고현에 있었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9. 5.



내원성의 위치에 관해서 제가 연구해본 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원문기록은 제가 출간을 준비중인 만주원류고에 실려있는 것입니다.

來逺城 내원성
遼史 來逺城 本熟女真地 統和中伐髙麗 以燕軍驍猛 置兩指揮 建城防戍 兵事屬東京統軍司
元一統志 來逺城 本熟女真地 遼伐髙麗 於此建城 先是侵髙麗 軍敗 值冬雪彌旬不止人馬多斃 軍㑹鴨緑江 餘軍漂溺 遼主隆緒次來逺界 有防邊猛軍數十人 遇而刼之 逮問所從來 開襟示其金製環甲 衆軍驚散 遼主至遼城 收不在營中者誅之 金陞來逺軍

『요사』 내원성(來逺城)은 본래 숙여진의 땅이다. 통화 연간(982~1011)에 고려를 칠 때에 연군(燕軍)이 날래고 용맹하므로 두 지휘(指揮)를 두어 성을 세우고 수비토록 하였다. 군사 사항은 동경통군사(東京統軍司)에 속하게 하였다.
『원일통지』 내원성(來逺城)은 본래 숙여진의 땅이다. 요나라가 고려를 치고 이 곳에 성을 세웠다. 앞서 고려를 칠 때에 군사가 패하였는데 겨울이고 눈이 열흘간이나 그치지 아니하여 인마(人馬)가 많이 죽었다. 군사가 압록강에 모였는데 나머지 군사 또한 빠져 죽었다. 요주(遼主)가 내원 경계로 갔을 때 변경을 방비하는 날랜 군사 수십 명과 마주쳤는데 이들이 요주(遼主) 일행을 붙잡아서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었다. 옷깃을 열어서 금으로 만든 갑옷을 보여주자 무리들이 놀라서 흩어졌다. 요주(遼主)가 요성(遼城)에 도착하여 영내를 떠나 있던 자들을 모으게 한 뒤 모두 죽였다. 금나라 때에 내원군(來逺軍)으로 승격하였다.

○요주(遼州) : 辽置。治所在辽滨(今辽宁新民东北辽河西岸辽滨塔)。辖境相当今辽宁辽滨塔以北至庆云堡一带地。金废。(백도백과)
요주 : 요나라에서 설치. 치소는 요빈에 있었다.(현 요녕성 신민 동북 요하 서안 요빈탑) 관할 경계는 지금의 요빈탑 이북 경운보일대까지이다. 금나라에서 폐지하였다.


保州 보주
遼史 保州 宣義軍 節度 髙麗置州 故縣一 曰來逺 聖宗以髙麗王詢擅立[주4] 問罪 取其保定二州 統和末 髙麗降 於此置榷場 隸東京統軍司 縣一 來逺縣 初徙遼西諸縣民實之又徙奚 漢兵七百防戍焉 户一千
遼史 宣州 定逺軍 刺史 開泰三年 徙漢户置 隶保州
遼史 懐化軍 下 刺史 開泰三年置 隶保州

『요사』 보주(保州) 선의군(宣義軍)에는 절도(節度)를 두었고 고려가 주를 설치하였다. 옛 현은 내원(來逺)현 하나이다. 성종이 고려의 왕순(王詢:현종)이 마음대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죄를 물어서 보주(保州) 정주(定州) 두 주를 뺏았다. 통화 말에 고려가 항복하자 이 곳에 각장(榷場 : 시장)을 두었다. 동경통군사 예하에 두었으며 관할 현은 내원현(來逺縣) 하나이다. 초에 요서의 여러 현민들을 옮겨서 채웠으며, 또 해(奚)와 한(漢)병 7백 명으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였다. 호는 1천이다.

來逺州 내원주
金史 來逺州 舊來逺城{見前遼東京條} 本遼熟女真地 大定二十二年 升為軍 後為州
『금사』 내원주는 옛 내원성(來逺城)으로서 본래 요나라 때에는 숙여진(熟女真)의 땅이다. 대정 22년(1182) 군(軍)으로 승격하였다가 뒤에 주(州)가 되었다

요나라 황제가 고려에 패하여 압록강을 건너 처음 들어간 지역이 내원성 경계이고 요성(遼城)에서 나온 수십 명의 군사(아마도 순찰나온 군사인 듯)에게 욕을 당합니다. 황제의 주위에 겨우 몇 명의 군사만 따르고 있었다는 증거이니 겨우 몸만 빼어 달아난 것이지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기록은 요성(遼城)입니다. 요성(遼城)은 곧 요주(遼州)의 치소가 있는 성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요주의 치소는 위의 지명사전에서 보았듯이 현 요녕성 신민현 요빈탑이고, 그 관할 구역은 지금의 신민현과 법고현일대라고 합니다.
요빈탑은 고대로부터 요하를 건너는 주요 나루를 지키는 요충지였다고 합니다. 또한 경운보 동쪽에 개원이 있습니다.
개원이 무경총요에 나오는 개주로 보입니다. 개원이라는 이름은 원나라 때에 처음 나온다고 하였으니 그 이전의 개주(開州) 개원군(開遠軍)을 개원(開元)으로 고친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재의 지도로 보아서 요나라 황제가 건넌 나루를 대체로 두세 곳으로 좁혀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개원과 법고현 사이의 통강구(通江口)
둘째는 철령에서 법고현을 연결하는 나루 양마보(養馬堡)
셋째는 심양에서 요빈탑을 연결하는 요빈탑나루
여기에서 저는 요나라 황제가 건넌나루가 개원과 가까운 통강구일 것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거란이 고려를 침공할 때 청수강을 건너는데 그것은 지금의 개원 북쪽 청하(淸河)로 추정되기 때문이고, 거란 황제가 자연스럽게 침공로의 역순으로 도망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성이 요빈탑이라면, 요성에서 순찰을 나올 수 있는 거리의 내원성은 아마도 법고현 경내 요하와 가까이에서 통강구를 통제할 수 있는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그렇게 보면, 내원성 동쪽에 개주가 있다는 무경총요 기록과도 일치하게 됩니다.
내원성이 보주에 있으므로 보주는 현 법고현 일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