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발해고 - 지리에 관한 고찰(地理考)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4.
1. 『신당서』에 기록된 발해 지리

5경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
동경(東京) 용원부(龍原府)
남경(南京) 남해부(南海府)
서경(西京) 압록부(鴨綠府)

15부
용천부(龍泉府) 숙신족이 살던 곳이다.
현덕부(顯德府) 숙신족이 살던 곳으로, 용천부 남쪽에 있다.
용원부(龍原府) 예맥족이 살던 곳으로, 책성부(柵城府)라고도 부르며, 일본으로 가는 길이다.
남해부(南海府) 옥저 땅이었던 곳으로, 당나라에 조공하는 길이다.
압록부(鴨綠府) 고구려 땅이었던 곳으로, 당나라에 조공하는 길이다.
장령부(長嶺府) 고구려의 땅이었던 곳으로, 당나라 영주(營州)로 가는 길이다.
부여부(扶餘府) 부여 땅이었던 곳으로, 거란으로 가는 길이다.
막힐부(鄚頡府) 부여 땅이었던 곳이다.
정리부(定理府) 읍루 땅이었던 곳이다.
안변부(安邊府) 읍루 땅이었던 곳이다.
솔빈부(率賓府) 솔빈부 말갈의 한 부락이다. 중국 흑룡강성에서 발원하여 러시아 연해주로 흐르는 수분하(綏芬河)의 명칭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가 있던 곳이다.
동평부(東平府) 불녈부 말갈 7부락의 하나에 속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지금의 중국 흑룡강성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 있던 곳이다.
철리부(鐵利府) 철리부 말갈의 한 부락으로, 송화강 하류 일대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 있던 곳이다.
회원부(懷遠府) 월희부 말갈의 한 부락으로, 러시아 연해주 일대로 보는 설이 있으나, 다른 곳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가 있던 곳이다.
안원부(安遠府) 월희부가 있던 곳이다.

62주
용천부 3주 용주(龍州), 호주(湖州), 발주(渤州)
현덕부 6주 노주(盧州),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
용원부 4주 경주(慶州),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
남해부 3주 옥주(沃州), 청주(晴州), 초주(椒州)
압록부 4주 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豐州), 정주(正州)
장령부 2주 하주(瑕州), 하주(河州)
부여부 2주 부주(扶州), 선주(仙州)
막힐부 2주 막주(鄚州), 고주(高州)
정리부 2주 정주(定州), 반주(瀋州)
안변부 2주 안주(安州), 경주(瓊州)
솔빈부 3주 화주(華州), 익주(蓋州), 건주(建州)
동평부 5주 이주(伊州), 몽주(蒙州), 타주(沱州), 흑주(黑州), 비주(比州)
철리부 6주 광주(廣州), 분주(汾州), 포주(蒲州), 해주(海州), 의주(義州), 귀주(歸州)
회원부 9주 달주(達州), 월주(越州), 회주(懷州), 기주(紀州), 부주(富州),
미주(美州), 복주(福州), 사주(邪州), 지주(芝州)
안원부 4주 영주(寧州), 미주(郿州), 모주(慕州), 상주(常州)
3독주주 영주(郢州), 동주(銅州), 속주(涑州)

이상은 『신당서』에 기록된 것인데, 62주라 해놓고 단지 60주만 열거되어 있다. 또 『청일통지』에 곽주(郭州)가 있지만 여기에는 실려 있지 않으니, 당나라 역사서에 누락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발해 5경제도를 보면, 상경 용천부는 지금의 영고탑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寧安市)이다. 실제로 발해 상경은 영안시 남쪽의 발해진(渤海鎭)에 있었다.
이고, 중경 현덕부는 지금의 길림이고, 동경 용원부는 지금의 봉황성이고, 남경 남해부는 지금의 해성현 지금의 중국 요령성 해성현이다. 이와 달리, 발해 남경은 함경남도 북청군 청해토성이 있었다.
이며, 서경 압록부는 지금 알 수 없지만 압록강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용원부를 동경으로 삼고, 압록부를 서경으로 삼았다는 말은 의심스럽다. 봉황성 서쪽에 또 압록강이 있었다는 말이 되니, 요양에도 패수가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로다. 『요사』에서 요양에도 패수가 있는 것처럼 서술되어 있으니, 이에 대한 문제점 지적은 뒤에 다시 나타난다.

조공하는 길을 압록부에 둔 것은 바닷길로 당나라와 통하였기 때문이다.『일본일사』를 살펴보니, 등주와 양양이 당나라 조정으로 들어가는 길이라 하였으므로 정말 그러하다. 남해부를 신라로 가는 길로 삼은 것도 역시 바닷길로 신라와 통하였기 때문이다.『문헌통고』와『청일통지』에는 압록부를 조선으로 가는 길이라 하였는데, 이 때는 조선이 없었으므로 마땅히『신당서』기록에 따라야 할 것이다.

2. 『요사』에 기록된 발해 지리

<부, 주>
현덕부 - 본래 고조선의 땅으로서 평양성이다. 현덕부를 평양성으로 비정한 것은 요사의 오류이다.
주 무왕이 이곳에 기자(箕子)를 봉하였고, 한나라 말기에는 공손탁(公孫度)이 점거하였고, 진(晉)나라 때에는 고구려에 함락되었다. 당나라는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두었고, 발해 대씨의 소유가 되어 중종이 홀한주(忽汗州)란 명칭을 내려주었다.
용원부 - 동남쪽으로 바닷가에 이르는데, 고구려 때의 경주이다. 원문은 경주(慶州)인데, 고구려에 주군현이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경주가 오류인지는 나중에 밝힐 문제이다.
돌을 쌓아 성을 만들었는데 둘레가 20리였다. 당나라 설인귀(薛仁貴)가 고구려를 정벌하였을 때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석성(石城)에서 잡았다고 하였으니 이 곳을 말한다.
압록부 - 고구려 때의 고국성 국내성을 염두에 둔 말 같다.
으로 성의 높이가 3장이고, 동서 및 남북 너비가 20리 이른다.
동평부 - 당나라 이세적이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요성 요동성을 이르는 말로서, 지금의 중국 요령성 요양이다.
을 함락시켰고, 정명진(程名振)과 소정방(蘇定方)이 고구려 군대를 신성에서 크게 격파했다고 했으니, 모두 이 곳이다. 요하(遼河), 양장하(羊膓河), 추자하(錐子河), 사산(蛇山), 낭산(狼山), 흑산(黑山), 건자산(巾子山)이 있다.
철주(鐵州) - 한나라 때의 안시현(安市縣)이었고, 고구려 때에는 안시성(安市城)이었다. 당나라 태종이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설인귀가 흰옷을 입고 성벽을 올랐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탕주(湯州) - 한나라 때의 양평현(襄平縣)이었다.
흥주(興州) - 한나라 때의 해명현(海冥縣)이었다.
경주(慶州) - 태보산(太保山)과 흑하(黑河)가 있는 곳이다.
환주(桓州) - 고구려 중도성 중도성(中都城)은 환도성(丸都城)의 잘못이다.
으로 이 곳에 궁궐을 세워 신국(新國)이라 하였다. 고구려왕 쇠 쇠(釗)는 고구려 16대 고국원왕을 이른다.
가 모용황(慕容皝)에게 패하여 궁궐이 불에 타버린 곳이 이 곳이다.
개주(蓋州) - 나중에 진주(辰州)로 고쳤으니 진한(辰韓)애서 이름을 얻은 것이다. 마을이 죽 늘어서 가장 번화한 요충지가 되었는데, 고구려 개모성(蓋牟城)이 이 곳이다. 당나라 태종이 이세적을 만나서 함께 공격하여 격파한 곳이 이곳이다. 당 태종이 이세적을 만나 함께 공격한 곳은 요동성이다.(『구당서』권3,「태종본기 하」)

속주(涑州) - 이 곳에 속말강(涑沫江)이 있으니, 이는 속말수를 말하며, 속말말갈이 거주하던 곳이다.

<군, 현>
현덕부 1군
삼로(杉盧) - 때로는 삼로현이라고도 하는데, 노주에 속하였다. 여기서 삼로군을 삼로현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면서 노주에 예속되어 있었다고 하였으나, 노주의 별명이 삼로군이다. 따라서 유득공이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이하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요사』「지리지」에는 발해의 몇 개 주를 군으로도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어느 시기엔가 주를 군으로 개편한 적이 있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렇다면 발해 말기의 지방제도는 부, 주ㆍ군, 현의 3단계 체제를 유지하였던 것 같다.


용원부 3군
용하(龍河) - 때로는 용하현이라고도 하는데, 염주에 속하였다.
회농(會農) - 때로는 회농현이라고도 하는데, 목주에 속하였다.
길리(吉理) - 때로는 길리현이라고도 하는데, 하주에 속하였다.

압록부 2군
반안(盤安) - 풍주 속하였다.
비류(沸流) - 정주에 속하였다. 비류왕이 있던 곳으로 비류수가 흐르며, 공손강(公孫康)에게 병합되었다.

철리부 1군
철리(鐵利) - 어느 주에 속하였는지 알 수 없다. 한나라 때에 양평현(襄平縣)이었고,
고구려 때에는 당산현(當山縣)이었다.

부, 주가 미상의 3군
안정(安定)
동산(銅山) - 고구려 때의 동산현으로 발해 용천부의 남쪽, 한나라 때의 후성현(候城縣) 북쪽에 있었다.
산이 많아 지세가 험하다.
안녕(安寧) - 고리국(藁離國)이 있던 곳이다.

용천부 5현
부리(富利), 장평(長平) - 모두 용주에 속하였다.
공진(貢珍) - 발주에 속하였다.
숙신(肅愼), 좌모(佐慕) - 모두 어느 주에 속했는지 알 수 없다.

현덕부 26현
산양(山陽)
한양(漢陽)
백암(白巖)
상암(霜巖) - 고비리군(古陴離郡)이 있던 곳으로 한나라 때에는 험독현(險瀆縣)에 속하였다.
영풍(永豐) - 현주에 속하였다. 「신선전」(神仙傳)에 “신선 백중리(白仲理)가 신령스런 단약을 만들 줄 알고, 쇠를 다루어 황금을 만들 줄 알아, 백성들을 구제하였다”고 한 곳이 바로 이 곳이다. 한나라 때의 요대현(遼隊縣)이다.
위성(位城), 하단(河瑞), 창산(蒼山), 용진(龍珍) - 모두 철주에 속하였다.
영봉(靈巖), 상풍(常豐), 백석(白石), 균곡(均谷), 가리(嘉利) - 모두 탕주에 속하였다.
성길(盛吉), 산산(蒜山), 철산(鐵山) - 모두 흥주에 속하였다.
장녕(長寧)
금덕(金德) - 상락현(常樂縣)이라고도 부른다. 한나라 때의 패수현(浿水縣)이고,
고구려 때에는 구려현(句麗縣)이었다.
계산(鷄山) - 한나라 때의 거취현(居就縣)이다. 옛날의 정령위 한나라 때 요동지방 사람이라 전해지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의 집이 이 곳에 있었는데, 집을 떠난 지 천 년만에 학이 되어 돌아와서 화표주 고대에 왕이 신하의 간언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표시하고자 세운 화려한 장식의 기둥을 말한다. 이것이 이정표의 역할도 하였다. 또 교량, 궁궐 성곽, 가옥 외부 등에 세운 장식기둥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성문 앞에 세운 기둥을 말한다.
에 앉아 부리로 화표로 그림을 그려서 “새가 있네, 새가 있네, 바로 정령위로구나. 집 떠난 지 천 년 되어 이제 돌아왔도다. 성곽은 옛날 그대로이되 사람은 그렇지 않네. 어찌 신선술을 배우지 않아 무덤들만 연이어 있는가?”라고 말하였다.
화산(花山) - 한나라 때의 망평현(望平縣)이다.
자몽(紫蒙) - 한나라 때의 누방현(鏤芳縣)으로, 불녈국이 이 곳에 동평부를 설치하였다. 불녈말갈의 땅에 동평부를 설치한 것은 발해이다.

숭산(崇山), 위수(潙水), 녹성(綠城), 봉집(奉集) - 어느 주에 속하였는지 알 수 없다.

용원부 15현
용원(龍原)
영안(永安)
오산(烏山)
벽곡(壁谷)
웅산(熊山) - 설인귀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에 고구려 장수 온사문(溫沙門)과 웅산 설인귀가 싸운 곳은 웅산(熊山)이 아니라 횡산(橫山)으로,(『구당서』권83,「설인귀전」) 발해 웅산현과는 무관하다.
에서 싸웠던 곳이
바로 이 곳이다.
백양(白楊) - 이상은 모두 경주(慶州)에 속하였다.
해양(海陽), 접해(接海), 격천(格川) - 모두 염주에 속하였다.
수기(水岐), 순화(順化), 미현(美縣) - 모두 목주에 속하였다.
홍하(洪賀), 송성(送誠), 석산(石山) - 모두 하주에 속하였다.

남해부 16현
천청(天晴), 신양(神陽), 연지(蓮池), 낭산(狼山), 선암(仙巖) - 모두 정주에 속하였다.
초산(椒山), 초령(貂嶺), 시천(澌泉), 첨산(尖山), 암연(巖淵) - 모두 초주에 속하였다. 동쪽으로 신라와 접하고, 서남쪽은 예전의 평양성이고, 동북쪽으로 120리 떨어진 곳에는 해주(海州)가 있다.
옥저(沃沮), 취암(鷲嶺), 용산(龍山), 빈해(濱海), 승평(昇平), 영천(靈泉) - 모두 어느 주에 속하였는지 알 수 없다.

압록부 10현
환도(桓都), 신향(神鄕), 기수(淇水) - 모두 환주에 속하였다.
신록(神鹿), 신화(神化), 검문(劒門), 안풍(安豐), 발각(渤恪), 습양(鈒壤) 협석(硤石) - 모두 어느 주에 속하였는지 알 수 없다.

부여부 11현
포다(布多), 부여(扶餘), 현의(顯義), 작천(鵲川), 강사(强師), 신안(新安), 어곡(漁谷), 영녕(永寧), 풍수(豐水), 부라(扶羅), 영평(永平) - 모두 어느 주에 속하였는지 알 수 없다.

회원부 9현
부수(富壽), 우부(優富) - 모두 부주에 속하였다.
산하(山河), 흑천(黑川), 녹천(麓川) - 모두 미주에 속하였다.
월희(越喜) 월희현은 기록에 나오지 않으므로, 유득공이 잘못 적어 넣었다.
, 회복(懷福), 표산(豹山), 유수(乳水) - 모두 어느 주에 속하였는지 알 수 없다.

안원부 2현
모화(慕化), 숭평(崇平) - 모두 모주에 속하였다.

부, 주 미상의 9현
장태(長泰), 풍영(豐永), 웅산(熊山), 영봉(靈峯), 녹군(麓郡), 녹파(麓波), 운천(雲川), 안이(安夷), 만안(萬安)

이상은『요사』에 기록된 것으로서, 요나라 태조가 동쪽으로 발해를 병합하여 성읍을 얻은 것이 103곳이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군현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이 지금 113곳이나 되니 의문스럽다.

3. 『청일통지』에 기록된 발해 지리
5경 15부 62주
대부분 지금의 길림오라, 길림은 연안을 의미하므로 길림오라는 송화강 연안이란 뜻이다.
영고탑 및 조선 영토에 있었다. 안동도호부에 속하였던 요동 땅은 발해에 편입되었으나 어떠한 행정구역이 설치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신당서』지리지에 실려 있는 가탐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을 뿐이다.
요나라 때에 동경의 주ㆍ현들이 발해 때의 명칭을 많이 계승하였지만, 그렇다고 발해 때의 해당 지역을 수복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요사』에 발해 때의 어디였다는 말이 많이 나오지만, 사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용천부
한ㆍ삼국ㆍ진(晉)나라 때에 읍루국의 땅이었고, 후위 북위를 가리킨다. 삼국시대의 위나라와 구분하기 위함이다.
ㆍ제ㆍ주나라 때에는 물길국 땅이었다. 수나라 때에는 말갈국땅이었고, 당나라 때에 발해에 편입되어 용천부가 되었다. 금나라 때에 상경 회녕부(會寧府) 땅이었고, 원나라 때에 합란부(合蘭府)의 수달달로(水達達路) 등에 속하였다. 명나라 때에 건주(建州) 모린위(毛隣衛) 등의 땅이었으니, 지금의 영고탑(寧古塔)에 대항한다.

현덕부
지금의 길림오라성 동남쪽에 있었다. 신당서 지리지에, “압록강 입구에서 배를 타고 100여 리를 간 뒤에 다시 작은 배로 거슬러 올라가면, 동북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박작구(泊汋口)에 이르러 발해 영토에 들어가게 된다. 다시 5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현성(丸都縣城)에 이르니, 과거 고구려 수도였던 곳이다. 또 동북쪽으로 2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神州)에 이르고, 그곳에서 육지로 400리를 가면 현주(顯州)에 다다르니, 당나라 천보 연간(742〜756)에 도읍을 하였던 곳이다”고 하였다.
살피건대, 현주는 현덕부로서, 당나라 선천 2년(713)에 당나라가 홀한주(忽汗州)란 이름을 내려준 곳이 이 곳이다. 『요사』에는 이 곳이 평양성이라 하였고, 또 요나라가 설치한 동경 관할의 현주가 본래 현덕부 땅이라고 하였으나, 모두 잘못된 것이다.

용원부
한나라 때에 현도군 땅이었고 진나라 때에 평주(平州)에 속하였다. 수나라 때에 고구려 경주(慶州) 땅이었고, 당나라라 때에 안동도호부에 속하였다가 발해에 편입되어 용원부가 되었다. 요나라 때에 개주(開州) 진국군(鎭國軍)이었고, 금나라 때에 석성현(石城縣)이었다. 원나라 때에 동녕로(東寧路) 봉황성(鳳凰城)에 속하였으니, 지금의 봉황성이다.

남해부
한나라 때에 현도군 땅이었고, 뒤에 낙랑도위(樂浪都尉)에 속하였따. 동한(東漢) 때에 옥저(沃沮)로 봉해졌고, 삼국시대에 평주 땅이 되었다. 진나라 이후에 고구려 사비성(沙卑城)이 되었고, 당나라가 이 곳에 개주를 두었으며, 당나라 이세적(이적)이 645년 4월에 고구려 개모성을 빼앗은 뒤에 개주(蓋州)를 두었으며, 5월에 정명진이 사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므로,(『구당서』 권199상, 「고려전」) 본문은 사실과 다르다.
발해에 편입되어 남해부가 되었다. 요나라 때에 해주(海州) 남해군(南海軍)이었고, 금나라 때에 징주(澄州) 남해군(南海郡)이었다. 원나라 때에 폐지되어 요양로(遼陽路)에 편입시켰으며, 명나라 때에 해주위(海州衛)가 되었으니, 지금의 해성현(海城縣)이다.

부여부
한나라 때에 부여국 땅이었고, 당나라는 이 곳에 흑수도독부(黑水都督府)를 두었으며, 발해에 편입되어 부여부가 되었다가, 또다시 용천부로 되었다. 요나라는 동경에 예속시켰다. 금나라 때에는 회녕부(會寧府)였다가 상경(上京)으로 승격되었다. 원나라 때에 개원로(開元路)였고, 명나라 때에 삼만위(三萬衛)였으니, 지금의 개원현(開元縣)이다.

심주(瀋州)
한나라 때에 읍루ㆍ부여ㆍ옥저ㆍ조선 등의 땅이었고, 삼국ㆍ진나라 때에는 평주 땅이었다. 후위 때에는 영주 땅이었고, 제ㆍ주나라 때에는 고구려 땅이었다. 수나라 때에 영주 땅이었고, 발해 때에 발해에 편입되어 심양(瀋陽)으로 되어 정리부(定理府)에 속하였다. 요나라 때에 심주 소덕군(昭德軍)이었고, 금나라 때에 심주 현덕군(顯德軍)이었다. 원나라 때에 심양로(瀋陽路)에 속하였고, 명나라 때에 심양중위(瀋陽中衛)에 속하였으니, 지금의 봉천부(奉天府)이다.
『통지』에 “오루하(奧婁河)가 있다”고 하면서, “오루는 읍루를 말한다”고 주를 달아 놓았다.

개주(蓋州)
한나라 때에 서개마현(西盖馬縣)이었고, 삼국시대에 평주 땅이었다. 진나라 이후에 고구려 땅이 되었고, 당나라 때에 고구려 개모성이었으며, 태종 그 땅을 빼앗아 개주를 설치하였다. 발해에 편입된 뒤에도 계속해서 개주를 두었고, 뒤에 진주(辰州)로 고쳤다. 요나라 때에 진주 봉국군(奉國軍)이었고, 금나라 때에는 개주 봉국군이었다. 원나라 때에 개주였고, 명나라 때에 개주위(盖州衛)가 되었으니, 지금의 개평현(蓋平縣)이다.

부주(富州)
한나라 때에 읍루국 땅이었고, 수나라 때에 월희국(越喜國) 땅이었다. 당나라 때에 발해에 편입되어 부주가 되어 회원부에 속하였다. 요나라 때에 은주(銀州) 부국군(富國軍)이 되었고, 금나라 때에 신흥현(新興縣)이 되었다. 원나라 때에 폐지되었고, 명나라 때에 철령위(鐵嶺衛)가 되었으니, 지금의 철령현이다.

삼로군(杉盧郡)
한나라 때에 현도군 땅이었고, 진나라 이후에 고구려 땅이었다. 당나라 때에 금주(金州)를 두었고, 발해에 편입되어 삼로군이 되었다. 요나라 때에 소주(蘇州) 안복군(安復郡)이었고, 금나라 때에는 화성현(化成縣)이었다. 원나라 때에 개주로(盖州路)에 속하였고, 명나라 때에 금주위(金州衛)가 되었으니, 지금의 영해현(寧海縣)이다.

홀한하(忽汗河)
지금은 호이합하(虎爾哈河)라고 하는데, 길림오라 지역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과거의 회녕성(會寧城) 북쪽을 지난다. 또 90여 리를 가서 영고탑성 남쪽을 감싼 뒤에 다시 꺾어져 북쪽으로 700여 리를 흘러 혼돈강(混同江)으로 들어간다.
당나라 때에 홀한하라 불렀으므로, 발해 대씨가 홀한주를 두었다.『신당서』「지리지」에, “발해 왕성(王城)이 홀한해(忽汗海)에 임해 있다”고 하였다. 금나라 때에 금수(金水)라 불렀는데, 현지 속어로 금을 안출호(안출호(按出虎)라 하기 때문에 안출호수라고도 불렀으니, 이것이 바로 금원 안출호수가 금나라의 상경로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금원(金源)이라고 한 것이다. 금나라의 명칭도 여기서 유래하였다.(『금사』권24,「상경로」)
이다.『명일통지』에 홀아해하(忽兒海河)가 북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간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 강이다.

상경성(上京城)
지금의 영고탑성 서남쪽에 있다. 『신당서』에 “천보(742〜756) 말년에 대흠무가 상경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구국(舊國)에서 곧바로 300리 되는 곳으로서, 홀한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가탐은 “안동도호부로부터 동북쪽으로 과거의 개모성과 신성을 경유한 뒤에, 다시 발해 장령부를 경유하여 1,500리를 가면 발해 왕성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이로 생각해보건데, 분명 영고탑 서남쪽에 있었고, 금나라 상경성과 가까웠을 것이다.『명일통지』에는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발해 상경에 도읍을 설치하였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 곳이다.

평양(平壤)
한나라 낙랑군이 있던 곳으로 나중에 고구려왕의 도읍지가 되었는데,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불렀고, 왕검성(王儉城)이라고도 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하고 이 곳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나중에 발해 땅이 되었으며, 지금의 조선 영토 안에 있었다.

곽주(郭州)
당나라가 곽주를 두었고, 발해가 이를 계승하였다. 나중에 요나라에 속하였는데, 역사 기록에 “요나라가 압록강 북쪽을 고려에게 주자, 고려가 흥화진(興化鎭)ㆍ철주(鐵州)ㆍ통주(通州)ㆍ용주(龍州)ㆍ귀주(龜州)ㆍ곽주(郭州)의 6개 성을 쌓았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조선 영토 안에 있었다.

모주성(慕州城)
보낼 발해 안원부에 속하였고, 녹주(淥州) 서쪽 200리에 있었다. 녹주는 압록부를 가리키는데, 지금의 조선 영토 안에 있었다.
이상은『청일통지』에 기록된 것이다. 우리 나라 영토 안에 있었던 발해 땅이 3개가 있으니, 평양, 곽주, 모주이다. 그러면서 곽주가 압록강 북쪽에 있다고 하였고, 모주가 압록강 서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역시 의문스럽다.
살피건대,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뒤에 동북쪽은 천정군(泉井郡)으로 경계를 삼았으니 지금의 덕원군(德源郡)이요, 서북쪽은 당악현(唐岳縣)으로 경계를 삼았으니 지금의 중화부(中和府)이다. 중화로부터 동쪽으로 상원(祥原)ㆍ수안(遂安)ㆍ곡산(谷山)을 지나 덕원에 이르는 곳이 모두 변방의 요새가 있던 곳이다. 그 밖으로 함경도와 평안도 땅은 모두 발해 소유가 되었다.
신라가 쇠퇴하자 궁예가 처음으로 패서(浿西) 13진(鎭)을 설정하였으니, 평양성주 검용(黔用) 및 증성의 붉은 옷ㆍ노란 옷을 입은 도적 명귀(明貴)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 때는 아직 발해가 거란과 전쟁을 벌이지 않았는데, 이미 그 남쪽 땅을 궁예에게 빼앗겼던 것이다.
거란이 발해를 격파하고서 다스린 땅은 단지 압록강 이북에 그쳤으므로, 압록강 남쪽에 있었던 발해 군현의 변천에 대해서는『요사』에 누락되어 고찰할 길이 없다.
『신당서』에 “발해가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면서 이하(泥河)를 경계로 삼았다”고 하였고,『문헌비고』에 “이하는 마땅히 덕원 땅 안에 있었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후자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요사』를 살피건대, “패수(浿水)는 일명 이하라 하며, 한우초 물에서 자라는 풀이름
가 자란다고 해서 한우락수라고도 부른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요나라 동경(東京)의 강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나라 동경은 지금의 요양현인데,『요사』에는 동경이 “발해 중경현덕부에 해당하며, 본래 기자가 봉해졌던 평양성이다”고 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청일통지』에 아주 자세히 밝혀 놓았으니, 앞의 현덕부 항목에서 언급한 요사의 오류를 가리킨다.
대체로『요사』에서 동경을 평양으로 일명 이하라고도 불리는 패수는 바로 우리 나라의 평양에 있던 패수로서 지금의 대동강 유득공은 요사에서 요나라 동경이 평양에 해당한다고 설명한 것은 잘못이라고 하면서도, 이하(泥河)를 패수로 설명한 견해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은 함경남도 영흥(금야)으로 흐르는 용흥강(금야강)이 이하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니, 신라와 발해의 국경도 바로 대동강 일대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