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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연구

동아시아 상고시대의 패권자는 누구였을까?

by 부르칸 2013. 8. 27.

동아시아 상고시대의 패권자는 누구였을까?

대부분 중국이라고 말할 것이며 어떤이들은 환국(桓國)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상고시대 패권자는 그 어느누구도 아닌 바로 이족(夷族) 아니 이국(夷國)이다.


위 그림은 獨斷草 - 夷族들의 위치 조사 1과 獨斷草 - 夷族들의 위치 조사 2에서 밝힌바 있는 壇族(단족, 우리민족)과 이국(夷國)과 華族(화족, 현재 중국의 한족漢族)의 위치이다. 


이국(夷國)은 지금의 발해와 우리나라 서해와 중국의 동해를 중심으로 해안가와 황하 중하류를 모두 차지한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국(夷國)은 그저 화족(華族)의 동쪽에 있던 미개한 오랑캐가 아니라 상고시대에 동아시아의 문명을 이끌었던 선진국가였으며 단족(壇族)과 화족(華族)은 이들의 속국이었거나 신하국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도 용산문화(龍山文化)와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들도 화족(華族)의 문명이 아니라 이족(夷國)의 문명이 아닐까 하며 앙소문화(仰韶文化)는 이국(夷國)의 영향을 받은이리라.

그리고 요즘 한참 문제가 되는 홍산문화(紅山文化)도 다름아닌 이국(夷國)의 문명으로서 단족(壇族)이나 화족(華族)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홍산문명이 중국꺼니 우리꺼니 싸울 필요도 없고 논할 가치조차 없음은 상고시대 이족(夷族)은 이제 사라지고 없고 도이(島夷)와 현이(玄夷)와 백이(白夷)를 제외한 대부분이 중국에 흡수 통일되었기 때문이지만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홍산문명은 중국 것이 됨이 당연하다. 


夷國의 쇠퇴

이렇게 이국(夷國) 중심으로 돌아가던 동아시아는 BC2000년경에 커다란 변화를 겪게된다.


단족(壇族)의 추장이었던 왕검(王儉)이라는 자와 화족(華族)의 추장이었던 요(堯)라는 자가 서로 공모하여 왕검(王儉)은 람이(藍夷)의 동쪽에 있는 이국(夷國)들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단군조선을 세웠으며 요(堯)는 람이(藍夷)의 남쪽에 있는 이국(夷國)들을 공격하여 이국(夷國)의 속국상태에서 벗어나 즉위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사서에서 말하는 무진년에 요(堯)가 즉위한 해이다. 이후로 쇠퇴를 겪은 람이(藍夷) 남쪽의 이족(夷族)들은 화족(華族)의 국력에 따라 복종과 반란을 거듭하게 되지만, 람이(藍夷) 동쪽의 이족(夷族)들은 대부분 단족(壇族)과 융화되어 새로운 문명과 언어를 만들게 되니 곧 단군조선이다.


사서에 따라 왕검(王儉)이 즉위한 해를 요(堯)가 즉위한 해를 기준으로 당해에 즉위했다거나, 25년 후에 즉위했다거나, 아니면 50년 후에 즉위했다거나 한다. 

왜 이런 차이가 보일까?


    요(堯)는 이국(夷國)을 공격하고 속국에서 벗어나 바로 즉위하였지만 하국(夏國)이 건국되기까지 나라의 꼴을 갖추지 못하였던 것인데 반하여 왕검은 자신의 대代에 단군조선을 건국하였음이니...

    왕검의 즉위년이 요(堯)의 즉위년과 같다고 기록함은 왕검(王儉)과 요(堯)가 공모하여 같이 이국(夷國)을 공격한 해가 무진년이기 때문이며

    요(堯)가 즉위한지 25년 되는 해에 왕검(王儉)이 조선을 건국했다는 말은 왕검(王儉)과 요(堯)가 공모하여 같이 이국(夷國)을 공격하였고 이로 인하여 이국(夷國)의 속국에서 벗어난지 25년만에 왕검(王儉)만이 홀로 단군조선을 건국했다는 말이며

    요(堯)가 즉위한지 50년 되는 해에 왕검(王儉)이 조선을 건국했다는 말은 왕검(王儉)과 요(堯)가 공모하여 이국(夷國)을 공격하였고 이로 인하여 이국(夷國)의 속국에서 벗어난지 50년만에 왕검만이 홀로 단군조선을 건국했다는 말이다. 


항상 왕검(王儉) 즉위년을 기록할때 요(堯)와 같이 기록함이 전혀 이상할 없음은 무진년에 화족(華族)과 단족(壇族)이 공모하여 이국(夷國)의 속국상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