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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대요수는 현재의 난하이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2. 13.
대개 대요수인 상류인 백랑하를 현재의 대릉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면밀히 검토해면 백랑하는 난하의 상류이고 대요수는 난하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수경주에 나타난 이상한 백랑하의 흐름.

수경주에 나타난 백랑하의 기록을 요약해보면....

(우북평군 백랑현)--> 북쪽으로 흐름 --> 서북쪽으로 흐름 --> (광성현) --> 서북쪽으로 흐름
-->(白鹿山을 지나는 石城川水가 합류) --> 북쪽으로 흐름 --> 동쪽으로 흐름 -->
동북쪽으로 흐름 --> (창려현을 지남) --> (倭城을 지난 高平川水가 동쪽으로 흘러 합류)
--> 동북쪽으로 흐름 --> (自魯水가 합류) --> 동북쪽으로 흐름 --> (龍山을 지남) -->
북쪽으로 흐름 --> (황룡성을 지남)  --> 동북쪽으로 흐름 --> 물줄기가 두 개로 나뉘어 --> 하나는 임유현의 營丘城을 지나는 渝水가 되고, 다른 하나는 遼水가 된다.
 
위 기록에서 중요한 것 몇가지를 추려보면...
* 백랑하의 상류는 대개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동북쪽으로 흘러 遼水와 합류한다.
* 白鹿山을 지나는 강이 지류로 존재한다.
* 황룡성을 지난다.
* 임유현의 근처이다.
 
그런데 현재 대릉하는 동북쪽으로 흐르지 서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없습니다.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흐르다가 다른 물줄기와 합류하는 강은 현재 난하의 서쪽 상류인 閃電河 밖에 없습니다.
과연 이 閃電河가 백랑하일 가능성이 없는가 보면....
 

2) 백랑하는 2개

백랑하는 白鹿山 혹은 白狼山에서 딴 것일겁니다.
북경 동쪽으로 발견되는 白鹿山은 2개인데요...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대릉하변에 있었다는 白鹿山이고...
또 다른 하나는 獨石 근처에 있던 白鹿山입니다.
 
<<대청일통지>>
白鹿山, 在牧厰西南, 土人名巴顔崑兑. 直獨石口東北百里.
白鹿山은 牧厰의 서남쪽에 있고 토착인들은 巴顔崑兑라고 한다. 獨石口 동북쪽 100리에 있다.
 
여기 白鹿山은 獨石口의 동북쪽 100라고 하였으므로 대개 난하 서쪽 상류에 위치했던 것이죠. 그리고 난하 서쪽 상류가 백랑하라고 불리웠을 가능성이 있고 첨부한 대청광여도에는 이 강을 백랑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독석구 근처에 백랑하가 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方輿紀要>> 권11 순의현 
桃山在縣西北三十五里, 舊唐書謂之桃谷山, 山有五峰如桃花瓣, 巨石錯落, 横亘數畆. 元致和初, 上都兵入古北口, 留重兵屯燕樂城, 以輕騎進抵桃山, 雅克特穆爾掩擊之於白狼河, 追至桃山, 降其衆. 燕樂聞之, 遂潰白狼河, 即白河也, 一云白狼河在縣西北三十里.
도산(桃山)은 순의현 서북 35리에 있으며 구당서에서 말하는 도곡산(桃谷山)이다. 도곡산에는 5개의 봉우리가 도화판(桃花瓣)처럼 있는데, 巨石錯落, 横亘數畆. 원(元) 치화(致和) 초기에 상도(上都)의 병사들이 고북구(古北口)로 들어왔는데 남아있는 병사들은 연락성(燕樂城)에서 진을 치고 있었는데 경기병(輕騎兵)들이 나가서 도산(桃山)에서 막았다. 아극특목이(雅克特穆爾)는 백랑하(白狼河)에서 몰래 공격하여 도산까지 추격하자 그 무리가 항복하였다. 연락성 사람들이 이를 듣고 드디어 백랑하(白狼河)로 흩어졌는데 즉 백하(白河)이다. 또 말하기를 백랑하는 순의현 서북 30리에 있다고도 한다.
 
따라서 대요수 상류인 백랑하가 현재의 대릉하 부근의 백랑하인지 난하 상류의 백랑하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3) 황룡성의 위치

백랑하를 비정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지점이 황룡성입니다.
자치통감에 보면 이 황룡성에 대하여 재미난 구절이 있습니다.
 
<<자치통감>>
慕容廆先居徒河之青山, 後徙棘城. 今自棘城 徙都龍城. 杜佑曰..營州栁城郡 古孤竹國也. 春秋為 山戎 肥子 二國地. 漢 徒河之青山 在 郡城東百九十里. 棘城, 即顓頊之虛, 在郡城東南百七十里. 慕容皝 以栁城之北 龍山之南 福徳之地 遂 遷都 龍城, 號新宮, 為和龍宮.栁城縣有白狼山 白狼水. 又有 僕 扶犂縣 故城 在 東南. 其龍山即慕容皝祭龍所也. 有饒樂水, 漢徒河縣城.
慕容廆는 처음에 徒河의 青山에 살다가 후에 棘城으로 옮겼는데, 지금 棘城으로부터 도읍을 龍城으로 옮겼다. 杜佑는 말하기를 '영주(營州)의 류성군(栁城郡)은 옛 고죽국(孤竹國)이고 춘추시대에는 산융국(山戎)과 비자국(肥子)의 땅이었다. 漢의 徒河의 青山은 류성군성(郡城) 동쪽 190리에 있다.  棘城 즉 顓頊의 虛인데 류성군성(郡城) 동남쪽 170리에 있다. 慕容皝은 栁城의 북쪽과 龍山의 남쪽을 福徳의 땅이라하고 드디어 도읍을 龍城으로 옮겼으며 신궁이라 불렀고 화룡궁(和龍宮)으로 했다. 류성현(栁城縣)에는 백랑산(白狼山)과 백랑수(白狼水)가 잇다. 또한  僕(한, 漢?)의 扶犂縣(교려현, 交黎縣)의 옛 성이 동남쪽에 있다. 그 룡산은 즉 慕容皝이 龍에게 제사를 지낸 곳이다. 饒樂水와 漢의 徒河縣城이 있다.
영주를 대개 대릉하 근처로 보고 있지만,
자치통감은 杜佑의 말을 인용하여 영주(營州) 류성군(栁城郡)은 고죽국(孤竹國)이고 산융국(山戎國)이고 비자국(肥子國)이라고 하였습니다.
첨부한 지도를 보면 고죽국과 비자국은 현재 난하 하류에 있습니다.
즉, 이 말은 대요수의 상류인 백랑하가 대릉하가 아니라 현재 난하의 상류로 보고 있는 것이지요. 즉, 대요수 상류의 백랑산은 獨石口 동북쪽 100리에 있던 백랑산이며 고북구(古北口)와 연락성(燕樂城) 근처에 위치했던 것입니다.
 

4) 임유현의 위치

수경주에서는 백랑수가 2개로 갈리어 하나는 遼水가 되고 하나는 임유현의 渝水가 된다고 했습니다. 임유현의 위치를 보면 대요수가 대략 어딘지 알 수 있죠.
 
<<한서>> 요서군
交黎, 渝水首受塞外, 南入海.
臨渝, 渝水首受白狼, 東入塞外. 又有侯水, 北入渝.
교려현(交黎縣, 즉 창려)에  渝水가 새(塞) 밖에서 만나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임유현(臨渝縣)에 渝水는 상류에서 白狼水를 받아서 동쪽으로 새(塞) 밖으로 들어간다. 또한 侯水가 있어 북쪽으로 渝水로 들어간다.
 
즉, 渝水는 白狼水와 만나고 난 뒤 창려현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수경주에 "백랑수(白狼水)는 또한 동북쪽으로 흘러 창려현(昌黎縣) 옛 성의 서쪽을 지난다."고 했습니다. 또한 수경주에 "동북쪽으로 새(塞)를 나와서 백랑수가 되는데,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방현(房縣)에 이르러 요수(遼水)로 들어간다. 위토지기에서 말하기를 백랑수는 아래로 흘러 료수로 들어간다고 하였다."고 하였죠.
 
한서 요서군 교려현(交黎縣, 창려)의 渝水는 수경주의 대요수의 기록과 일치합낟. 이는 대요수가 渝水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태평환우기>>
平州
平州北平郡今治盧龍縣禹貢冀州之域虞十二州為營州之境周官職方又在幽州之地春秋為山戎孤竹白狄肥子二國地史記齊桓公北伐山戎至孤竹爾雅云觚竹北户西王母日下謂之四荒戰國時斯地屬燕秦兼天下為右北平及遼西二郡之境漢因之為遼西郡之肥如縣後漢末公孫度自號平州牧擅據及子康康子淵俱得遼東之地邊外版圗皆伏焉晉屬遼西郡後魏亦然隋開皇初為右北平郡十年改為州煬帝即位又廢州復為郡唐武徳二年廢郡為平州領臨渝肥如二縣其年自臨渝移治肥如仍改肥如為盧龍縣更治撫寧縣七年省臨渝撫寧二縣天保元年改為北平郡乾元元年復為平州
평주 북평군은 盧龍縣에서 다스린다. 우공의 기주지역이고 虞의 영주지경이다.
춘추시대에는 산융 백적 비자 2국의 당이다.
秦에서는 우북평군 요서군의 지경이고 漢은 요서군의 비여현으로 하였고 후한 말 공손도가 명주목이라 한 곳이다.
수 개황 초에 우북평군으로 하였고, 10년에 주로 고쳤고, 양제가 즉위하여 주를 폐하고 군으로 하였다.
당 무덕 2년 폐군을 평주로 하고 臨渝와 肥如 2개의 현을 다스렸다. 그 해에 臨渝로부터 肥如로 옮겨 肥如를 盧龍縣과 무녕현으로 하였다.  7년에 임유 무녕 2현을 다스렸다. 천모 원년 북평군으로 했고 건원 원년에 평주로 하였다.
 
즉, 이말은 노룡현, 산융국, 비자국, 비여현, 임유현 모두 같은 곳이라는 것이죠.
 
백랑하는 대릉하가 아니라 獨石口의 白鹿山 근처에서 발원한 백랑하로 현재 난하의 서쪽 상류인 閃電河이며 류성, 황룡성, 비자국, 산융국, 임유현, 노룡현 모두 난하 주변에 있던 강으로 대요수가 난하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漢때의 기록인 説苑를 보면...
《説苑卷十八》齊桓公北征孤竹, 未至卑耳谿中十里, 闟然而止, 瞠然而視有頃, 奉矢未敢發也. 喟然歎曰..事其不濟乎. 有人長尺, 冠冕大人物具焉, 左袪衣走馬前者.. 管仲曰..事必濟, 此人知道之神也. 走馬前者導也, 左袪衣者前有水也. 從左方渡.. 行十里果, 有水曰遼水表之. 從左方渡至踝, 從右方渡至膝, 已渡事果. 
제(齊) 환공(桓公)이 북쪽으로 고죽을 정벌하러 가는데, 비이(卑耳)의 계(谿) 10리를 아직 못가서 멈추어 잠깐 보고 화살을 들었으나 쏘지 아니하였다. 탄식하며 말하기를 ‘일이 이루지 못할 것 같다. 키가 아주 큰 사람이 있는데 갓을 쓰고 아주 큰 임루이 갖추어 진 좌거의(左袪衣)한 자가 말을 타고 앞으로 달려갔다.’ 관중(管仲)이 말하기를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인데 저 사람은 길을 아는 신이다. 말을 달리는 앞으로 길을 인도할 것이다. 좌거의(左袪衣)한 사람 앞에 물이 있는데 왼쪽으로 건널 것이다.’라고 하였다. 10리를 가니 과연 물이 있는데 료수(遼水)라고 표해놓았다. 왼쪽으로 건너니 복사뼈까지 오고 오른쪽으로 건너니 무릎까지 와서 이미 건너는 일이 과연 이루어졌다.
 
고죽국을 치러 갈때 요수를 건넜다는 것은 역시 난하가 요수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