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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단군조선의 도읍: 요동군 험독현과 낙랑군 패수현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2. 4.
단군의 고조선 왕검성이 요동 험독이고, 그곳에 하북 창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역사를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안목이 없으며, 한문해독도 잘못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1) 한문 해독 오류

고조선 왕검성이 요동군 험독현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기록은 사기(史記)에 더한 주석을 보고 하는 것입니다. 이 주석들은 사마천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이 더한 것입니다.

《史記卷一百十五》朝鮮列傳
滿…중략…亡命者王之都王險【集解徐廣曰昌黎有險瀆縣也索隱韋昭云古邑名應劭注地理志云遼東有險瀆縣朝鮮王舊都瓉云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
위만은…중략…망명자들의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 【집해(集解)에서 서광(徐廣)이 말하기를 창려(昌黎)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다. 색은(索隱)에서 위소(韋昭)가 말하기를 옛 읍의 이름이다. 응초(應劭)가 주석하기를 한서지리지에서는 요동군(遼東郡)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는데 조선(朝鮮)의 왕이 옛날에 도읍한 곳이다. 또 주석하기를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樂浪郡)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다고 신찬(臣瓉)이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집해(集解)라는 것은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를 송(宋)나라 때 주석한 것이고, 색은(索隱)이라는 것은 사마천이 지은 사기를 당(唐)나라 때 주석한 것입니다. 사마천의 기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집해와 색은의 저자들이 인용한 것은 모두 한서(漢書)에 나오는 것들이고 중요한 부분을 쏙 빼먹었습니다. 원래 한서(漢書)에 나와있는 기록을 보면 이렇습니다.

《前漢書卷二十八下》地理志第八下
遼東郡…중략…險瀆, 應劭曰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曰險瀆臣瓉曰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師古曰瓚説是也浿音普大反
요동군(遼東郡)에는 험독현(險瀆縣)이 있다.
험독현에 대하여 주석하였는데…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조선(朝鮮) 왕(王) 위만(衛滿)의 도읍이다. 물이 험한 것에 의지하였기에 험독이라 하였다. 신찬(臣瓉)이 말하기를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樂浪郡)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다. 요동군 험독현은 그냥 험독이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신찬의 설명이 옳다(瓚説是也)


즉, 응초는 조선의 왕이었던 위만이 도읍한 왕험성이 험독이라고 하였지만, 이에 반하여 신찬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둘의 이론이 서로 상반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고는 신찬의 설이 옳다고 하였던 것이죠.
그런데 고조선 왕험성이 하북성 창려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이러한 것을 쏙 빼먹고 오직 응초의 기록만을 가지고 왕험성이 하북 창려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지 알 것입니다.
 
A를 낙랑군이라 가정하고
B를 요동군 험독현이라 가정하고
C를 낙랑군 패수현이라고 가정하여 봅시다.
 
그럴 때 서로 다른 주장이 나올 수 있습니다.
 
개똥이는 ‘A=B이다’라고 하였다.
소똥이는 ‘A=C이다’라고 하였다.
말똥이가 말하기를 ‘개똥이의 말이 옳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3가지 주장 중에 왕험성이 하북성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오직 “개똥이는 ‘A=B이다’라고 하였다.”를 가지고 자신들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역사를 보는 안목이 없고 오직 기록 중 일부만을 가져와 역사를 헷갈리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 어떤 이는 요동군 험독현 기록을 이렇게까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應劭曰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曰險瀆臣瓉曰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師古曰瓚説是也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조선(朝鮮) 왕(王) 위만(衛滿)의 도읍이다.
신찬(臣瓉)이 말하기를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樂浪郡)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다. 여기가 바로 험독이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신찬의 설명이 옳다(瓚説是也)
 
이렇게 해석해 놓고선 험독이 왕험성이라고 합니다. 맞는 것 같지만 완전히 틀리며 이건 논리도 뭐고 없는 주장입니다. 보시지요.
 
이렇게 해독하게되면 왕험성이 있던 자리는 낙랑군 패수현이 되고 그리고 此自是險瀆也(여기가 바로 험독이다)라는 주장에 따라 요동군 험독현도 됩니다. 그러나, 분명히 한서지리지에는 낙랑군(樂浪郡) 패수현의 기록도 존재하고 있고 요동군(遼東郡) 험독현의 기록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만약 두 곳이 같은 곳이라면 한(漢) 나라라는 하나의 나라에 왕험성이라는 한 곳에대하여 두개의 지명을 부여하였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낙랑군을 요동군이라고 바꾸었다는 기록도 없을뿐더러 설치했던 시기도 다릅니다.
 
똑같은 책 한서(漢書)에 보면 그 설치시기가 나옵니다.
 
遼東郡秦置屬幽州 요동군은 진(秦)이 설치하였다.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 낙랑군은 원봉 3년에 설치하였다.
 
즉, 두 곳이 서로 다른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대도 물구하고 왕험성이 요동군 험독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서의 기록을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즉, 瓚説是也(왕험성은 낙랑군 패수현에 있다는 신찬을 설이 옳다)는 구절을 숨기고 한서(漢書) 지리지(地理誌)에서 틀렸다고 주장하는 “왕험성은 험독에 있다”는 것을 가져와 자신들의 주장을 피는 것입니다. 이들은 신찬과 응초의 설을 비평할 실력이 모자란 것입니다.
 

2) 역사를 볼 줄 아는 안목의 부족

그렇다면 신찬과 응초 중에서 누구의 말이 맞을까요? 제가 볼때는 응초의 말이 옳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고조선 왕검성이 하북성 창려가 될 수가 없느냐고 질문하실 것입니다. 역사를 알면 틀렸다는 것을 아시게 되실겁니다. 결론을 딱 잘라 말한다면 “위만(衛滿)의 도읍 왕험성(王險城)은 단군(檀君)의 도읍 임검성(壬儉城)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역사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단군(檀君)은 처음에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합니다. 나라이름은 신단(辰檀)이죠. 아사달(阿斯達) 시라무렌강(西拉沐倫河)이죠. 이곳이 바로 고려사에서 말한 부소량(扶蘇樑)이라는 곳입니다.
 
그리고 10년 뒤에 도읍을 평양(平壤)으로 옮기는데 현재 북한에 있는 평양이 아니라 대릉하 주변에 있던 평양입니다. 이곳이 고려사에 말한 백아강(百牙岡)이란 곳이죠. 이 부근이 낙랑군 패수현입니다.
 
그리고나서 약 1000년 뒤인 기원전 13세기에 람국(藍國)이 모든 제후를 거느리게 되고 47대 임검(壬儉)인 고열가((古列加)는 아사달 근처인 당장경으로 피합니다. 람국의 도읍은 엄독골(奄瀆忽)이며 고려사에서 말한 오덕지(五德地)라는 곳입니다.
 
또 200년이 지나고 기자(箕子)가 람국(藍國)에 투항을 하니 람국(藍國)에서 그를 봉하여 후국(侯國)으로 삼고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한 것입니다. 이를 두고 지나(支那) 사서에서는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식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드디어 조선(朝鮮)이라는 국호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곳이 바로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이 되는 것이죠.
 
또 700년이 지나서 기원전 4세기경에 후국(侯國)이었던 조선(朝鮮)에서 기후(箕詡)라는 자가 일어나 람국(藍國)을 이어 패권을 차지하게 되죠. 이를 두고 지나의 사서에서는 조선(朝鮮)이 후(侯)라는 칭호를 버리고 왕(王)이라고 일컬었다고 썼던 것입니다. 전혀 지나(支那)와는 상관없는 사건을 그들 중심으로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또 200년이 지나서 위만(衛滿)이 조선(朝鮮)으로 투항해오자 조선(朝鮮)과 한(漢) 사이에 공터로 있던 곳에 위만(衛滿)을 봉합니다. 그곳을 사서에서는 고진공지(故秦空地)라고 말합니다. 이곳이 요동군(遼東郡) 험독현(險瀆縣)이 되는 것입니다. 기준(箕準)이 임금으로 있던 조선(朝鮮)의 도읍인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보다 더 서쪽에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는 위만(衛滿)이 기준(箕準)을 쳐들어가 조선(朝鮮)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안다면 단군의 도읍 임검성을 왕검성이라 하고 이것이 지나(支那) 사서에 나온 왕험성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라는 것을 아실것입니다.
 
i) 조선(朝鮮)이란 나라는 누구의 나라인가요?
당연히 기자(箕子)가 다스렸던 나라고 단군이 다스렸던 나라는 신단(辰檀)이라고 해야합니다. 그리고 조선(朝鮮)은 신단(辰檀)을 이은 람국(藍國)의 봉국(封國)입니다.
 
ii) 임검성(壬儉城)과 왕험성(王險城)이 같습니까?
당연히 다릅니다. 임검성이란 통치자가 살던 곳이라는 뜻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청와대”라는 뜻입니다. 단군(檀君)이 세웠던 신단(辰檀)이라는 나라는 아사달(阿斯達)→평양성(平壤城)에 도읍했고, 신단(辰檀)을 이은 람국(藍國)은 엄독골(奄瀆忽)에 도읍했으며, 람국(藍國)을 이어 기후(箕詡)의 조선(朝鮮)이라는 나라는 그 도읍이름이 명확하지 않으나 낙랑군 조선현이라는 곳입니다. 그리고 위만(衛滿)은 조선(朝鮮)에 망명하여 조선(朝鮮)으로부터 봉함을 받아 조선(朝鮮)의 서쪽 땅인 고진공지(故秦空地)에 도읍하였죠. 그리고 그 도읍의 이름은 왕험성(王險城)입니다. 그리고 왕험성이 바로 고진공지(故秦空地)인 요동군(遼東郡) 험독현(險瀆縣)이 되는 것입니다.
 
iii) 임검성(壬儉城)은 어딘가요?
임검성(壬儉城)은 청와대라는 말로써 아사달(阿斯達), 평양성(平壤城), 엄독골(奄瀆忽) 이렇게 3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정위치가 될 수 없죠.
 
iv) 왕험성(王險城)은 어딘가요?
왕험성은 위만이 도읍했던 곳으로 단군이 도읍했던 곳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요동군 험독현입니다.
 
v) 단군(檀君)의 아사달(阿斯達)은 어딘가요?
단군이 도읍했던 평양성 서북쪽으로 시라무렌강 부근입니다. 이곳이 바로 하가점하층문화의 중심지가 되는 것입니다.
 
vi) 단군(檀君)의 평양성(平壤城)은 어딘가요?
이곳은 대릉하 주변 낙랑군 패수현이 되는 것입니다. 아사달(阿斯達)은 이곳보다 훨씬 서북쪽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의 평양은 단군의 평양이 아니라 낙랑군 점제현인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를 따지고 보면,
단군의 임검성(壬儉城)을 지나(支那) 사서에 나온 왕험성(王險城)이라고 주장하며 단군의 도읍이 요동군 험독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봉국(封國)의 도읍을 종국(宗國)의 도읍으로 바꿔치기 하는 것이고 틀렸다는 것을 아실것입니다. 위만의 왕험성(王險城)은 한(漢)과 조선(朝鮮) 사이에 있었던 고진공지(故秦空地)에 있었고 그곳은 임검성(壬儉城)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군의 임검성을 요동군 험독현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한문해독도 잘못한 것이고 역사를 볼 줄 안목도 없어 스스로 헷갈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위만조선이 단군의 정통을 이었다고 밝히는 것입니다. 역사의 계통을 잘못 찾았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