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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논형에 실린 동명왕 이야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23.

퍼온글 http://kr.blog.yahoo.com/buja100kim/44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에 부여(夫餘)를 세운 동명왕(東明王)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구리(高句麗)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 이야기와 매우 비슷하므로 학자들은 고구리
(高句麗)
건국신화(建國神話)가 부여 건국신화에서 그 내용을 따온 것으로 추정한다.


다음은 <논형(論衡)> 권이(卷二) 길험편(吉驗篇)에 기록되어 있는 동명왕 이야기다.


  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   북이(北夷) 탁리국(橐離國) 임금을 모시던 무수리(侍婢)
                        임신했다.

  王欲殺之               임금이 무수리를 죽이려고 하니

  婢對曰                 무수리가 사뢰되

  有氣大如          "크기가 달걀만한 기운이

  從天而下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我故有娠               쇤네가 아이를 뱄습니다"라고 하였다.  

  後                나중에 아이를 낳았다.

  捐於豬溷中             돼지우리(豬溷) 안에 (아이를) 버리니

  豬以口氣噓之不死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復徙置馬欄中           다시 마구간(馬欄)으로 옮겨(徙置)

  欲使馬借殺之           말이 (임금) 대신 아이를 죽이게 했다.

  馬複以口氣噓之不死     말도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王疑以天子           임금이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令其母收取奴畜之       그 어미에게 명하여 거두어 노비처럼 키우게 했다.

  名東明                 동명이라 이름 짓고

  令牧牛馬               소와 말을 돌보게 했다.

  東明善射               동명은 활을 잘 쐈다.

  王恐奪其國也           임금은 (동명에게) 나라를 뺏앗길까 두려웠다.

  欲殺之                 동명을 죽이려고 하니

  東明走                 동명이 달아났다.

  南至掩水               남쪽 엄수(掩水)에 이르러

  以弓擊水               활로 물을 치니

  魚鱉浮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東明得渡               동명이 건너자

  魚鱉解散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졌다

  追兵不得渡             추격병들(追兵)은 건너지 못했다.

  因都王夫餘             그리하여 부여(夫餘)에 서울을 정하고 임금이 되었다.

  故北夷有夫余國焉       이것이 북이(北夷) 땅에 부여(夫余) 나라가 생긴 연유(緣由).

  東明之母初妊時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할 때

  見氣從天下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及生棄之               동명을 낳아 키웠다.

  豬馬以氣籲之而生之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 동명을 살렸다.

  長大                   몸이 장대(長大)하므로 

  王欲殺之               임금이 동명을 죽이려고 하였다.

  以弓擊水               활로 물을 치니

  魚鱉爲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天命不當死             하늘의 운명이 아직 죽을 때가 아니므로

  故有豬馬之救           돼지와 말이 (동명을) 구해주었다.

  命當都王夫餘           부여에 서울을 정하고 임금이 될 운명이므로

  故有魚鱉橋之助也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동명을) 도와주었다.

  <논형 권이 길험편에서>


  [
한자 풀이]

  橐 : [] 전대(주머니), 풀무

  捐 : [] 버리다, 주다, 기부하다

  豬 : [] 돼지

  溷 : [] 어지럽다. 흐리다, 더럽다, 뒷간

  噓 : [] 불다

  徙 : [] 옮기다. 넘기다. 귀양보내다

  欄 : [] 난간, 울간

  借 : [] 빌다, 빌리다

  奴畜 : 노비처럼 키우다

  掩 : [] 가리다, 숨기다

  籲 : [] 부르다


"
王疑以爲天子"에서 <>는 원래 "의심하다"는 뜻이다.

<>"의심하다"로 풀이하면, 위 글월은 "하늘의 아들인 것을 의심하다",  "원래 하늘
의 아들
이라고 했는데, 그게 의심스럽다"는 뜻이 되어 의미가 180도 달라진다.


<
>를 영어의 "wonder"로 풀이하면 뜻이 명확해진다.

<wonder> "~이 아닐까 긴가민가하다"는 뜻이므로 위 글월은 "임금이 처음으로 '동명이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뜻이 된다.


<
엄수(掩水)> <()>은 우리말에서 "크다"를 뜻하는 "엄엄하다" ""을 음차(音借)
한 글자라고
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에서 추모왕(鄒牟王)이 건넌 강은 엄리대수(奄利大水)이다.

지금의 아무르강(黑龍江)이나 송화강(松花江)이 아닐까?

지도 앞에 앉아 상상(想像)의 나래를 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왕충(王充)은 누구인가?


왕충(王充)
은 서기(西紀) 27년부터 97년까지 살았던 후한(後漢)의 사상가(思想家).

()는 중임(仲任)이고 회계(會稽) 상우(上虞) 사람이다.

왕충에 대한 이야기는 논형(論衡)과 후한서(後漢書)에 각각 적혀 있다.


논형(論衡) 권삼십(券三十) 자기편(自紀篇)은 왕충이 자기자신에 대해 적은 글이다.

후한서(後漢書) 49권 왕충(王充), 왕부(王符), 중장통(仲長統) 열전(列傳)에도 왕충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왕충은  후한(後漢)이 가장 번성(繁盛)했던 시기(時期)와 바야흐로 쇠퇴기(衰退期)에 접어
드는
시기(時期)를 모두 살았다.


유방(劉邦)
이 기원전 202년에 세운 한()나라는 서기 9년에 왕망(王莽)에게 망한다.

왕망(王莽)이 세운 신()나라는 왕망의 죽음과 함께 서기 23년에 멸망한다.

() 종친(宗親)이던 유수(劉秀)는 서기 25년에 후한(後漢)을 세우고 다시 중국을 통일
한다.

유수 이후 명제(明帝)와 장제(章帝)를 거치면서 후한(後漢)은 최고 전성기를 누리지만 제4
대 화제
(和帝) 때부터 외척(外戚)과 환관(宦官)의 발호(跋扈)로 다시 쇠퇴하기 시작한다.


  광무제(光武帝) : 25-57

  명제(明帝)     : 57-75

  장제(章帝)     : 75-88

  화제(和帝)     : 88-105


왕충(王充)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았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책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늘 낙양(洛陽) 저자거리에 있는 책방에 가서 책을 봤는데, 기억력이 좋아 한 번 보
기만 해도
그 내용을 줄줄 외었다고 한다.


나중에 반표(班彪)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그 아들 반고(班固)와는 동무 사이였다.

반고(班固)는 한서(漢書)의 저자(著者).


왕충 사상(思想)의 특징(特徵)은 도참사상(圖讖思想)이 유행했던 시대상(時代相)과는 달리

객곽적(客觀的)이고도 합리적(合理的)인 관점(觀點)에서 사물(事物)을 바라보았다는 점이
.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는 관념(觀念)을 부정했고, 귀신(鬼神)과 신령

(神靈)의 존재(存在)도 부정했다.


왕충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체계(思想體系)를 가졌다고 하지만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왕충이나 왕충이 비판한 사람이나 다 "도토리 키재기".


그는 또 기존 권위(權威)에 굴하지 않는 성격을 지녀 비록 공자나 맹자라 하더라도 잘못이

있으면 거침없이 비판하였다.


관직(官職)에도 오른 적이 있지만 타협(妥協)을 모르고 논쟁(論爭)하기 좋아하는 성격(
)
문에 오래 있지는 못했다.


<
기속절의(譏俗節義)>, <정무(政務)>, <논형(論衡)>, <양성(養性)> 등의 여러 책을 썼으나
<논형
(論衡)>만 빼고는 모두 실전(失傳)되었다.



논형(論衡)


논형(論衡)
은 모두 30 8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명왕(東明王) 이야기는 제2권 길험편(吉驗篇)에 적혀 있다.

논형(論衡) 2권은 길험편(吉驗篇) 외에도 행우편(幸偶篇), 명의편(命義篇), 무형편(無形
),
솔성편(率性篇)이 더 있다.


논형(論衡)은 무슨 뜻일까?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면 영어로 "Critical Essays"라고 번역되어 있다.


논형(論衡)의 논()"()한다"는 뜻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 심도있게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저울"을 가리킨다.

그런데 논형(論衡)의 형()"저울"로 풀이하면 "저울을 논한다"는 뜻이 되어 뭔가 부자
스럽다.


야후 대만의 사전 서비스에서 형()을 찾아보니 "Judge"라고 풀이해 놓았다.

저울의 기능이 물건의 무게를 재는 것인데, 이 뜻이 전용(轉用)되어 "사물을 판단한다"
뜻으로
쓰인 것이다.


이 두 글자를 더하면 논형(論衡)"사물을 논하고 그 가치(價値)를 판단한다"는 뜻이
된다.

대만(臺灣)에서는 지금도 이 말을 쓰고 있다.

익숙한 우리말로 바꾼다면 "논설(論說)"이 적당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