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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남당 박창화 백제왕기 중 구지왕기가 가짜인 이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18.

요즘 남당 박창화가 남긴 사료들이 문제가 되는데요...
그 중 백제왕기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와는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가장 이상한 것은 구지왕기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없는 왕이죠.
구지왕기의 기록을 보니 삼국지 부여전에 나오는 위구태더군요. 
우선....
구지왕기에 분명히 공손씨로부터 딸을 받아 결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제왕기> 구지왕편
三年 庚午 三月 公孫度王以女宝婁歸王曰 “聞王未有室家 故敢以賤息往 奉巾櫛 幸勿棄焉” 王乃以白馬三雙爲幣以娶焉. 十月 王助遼富山之軍 大獲捷利.
3년(AD190) 경오 3월 공손탁왕이 딸 宝婁(보루)를 구지왕에게 시집보내며 말하기를 “왕이 室家(실가)가 없다고 들었는데 고로 감히 천한 자식을 보내니 아내로 삼고 행여나 버리지 말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내 백마 3쌍을 폐물로 삼고 宝婁(보루)를 취하였다. 10월 왕이 멀리 富山(부산)의 군대를 도와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역사상 이런 사람은 딱 한명인데 바로 삼국지에 나오는 위구태입니다. 북사나 수서에는 구태라고도 적혀 있죠.

삼국지의 기록을 보면....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 부여夫餘는 본래 현도玄菟에 속하였다. 한漢나라 말년에 공손도公孫度가 해동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외이外夷들을 위력威力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소속을 바꾸어 요동군遼東郡에 속하였다. 이 때에 구려句麗와 선비鮮卑가 강성해지자, 공손도公孫度은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어 (부여와 동맹同盟을 맺으려고) 종녀宗女를 시집보내었다.

여기에 나오는 위구태가 바로 백제왕기의 구지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구태 후에 임금이 된 자가 삼국지에 계속 나오는데 백제왕기나 삼국사기와 다름을 알 수 있죠.

위구태尉仇台가 죽고 간위거簡位居가 王이 되었다. 적자適子가 없고 서자庶子 마야麻余가 있었다. 簡位居가 죽자, 제가諸加들이 함께 마여麻余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우가牛加의 형兄의 아들도 이름이 위거位居였는데, 대사大使가 되어서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니 국인國人들이 그를 따랐으며, 해마다 魏나라 서울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쳤다.

여기서 위구태 다음으로 왕력이 나옵니다.
"위구태 --> 간위거 --> 마여" 이런 순이죠.
만약 백제왕기가 맞다면 아래와 같을 것입니다.

간위거 = 초고왕肖古王
마여 = 구수왕仇首王

그러나 초고왕의 이름이 간위거가 아니고,  구수왕의 이름이 마여도 아니죠.
따라서 삼국지에 공손씨가 딸을 준 위구태는 구수왕이 아니라는 결론이 납니다.
삼국지 부여전의 "위구태-간위거-마여"로 이어지는 왕력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와는 전혀 딴판이고 백제왕기와도 딴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