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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잡동사니/역사 논설

기준(箕準)이 도망간 곳은 산동과 하남의 경계지역인 남은(南殷)이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10. 12.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보니 신기한 기사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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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 논사류 1, 남은(南殷)에 대한 변증설.

일찍이 어떤 책을 펼쳐보니, 거기에는 미처 듣고 보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기자(箕子) 만년에 국세(國勢)가 미약해진 데다 또 위만(衛滿)의 난(亂)으로 인해 남쪽 지방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것이 이른바 남은(南殷)이다. 남은은 위만과 여러 번 싸웠으나 싸울 때마다 패하였다. 이때 방 장군(龐將軍)이란 자가 전사(戰死)하였는데, 그의 아내는 기와 굽는 사람의 딸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에 더욱 노기(怒氣)를 품고 출전하여 용맹한 적장(賊將)을 죽이고 크게 승첩(勝捷)하여 돌아왔다. 그 후에 남은 무종(南殷武宗)이 한 무제(漢武帝)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여 위만을 토평(討平)하였는데, 한 나라에서 온 장수가 이곳 기와 굽는 사람의 딸에 대한 용맹을 듣고는 크게 놀라 이상하게 여기며, 그녀가 쓰던 큰 칼을 보고 말하기를 '이 칼은 무게가 1백여 근(斤)이나 되겠다.' 하였다. 《오잡조(五雜組)》에 이르기를 '1천 근(斤)을 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어야만이 겨우 말[馬] 위에서 무게 30근 되는 무기를 휘두를 수 있다.' 하였으니, 아무리 용력(勇力)이 뛰어난 중국 남자도 이 같은 용력은 없었는데, 하물며 여자이겠는가. 탄상(嘆賞)하여 마지않는다. 방씨(龐氏)의 자손은 바다를 건너 동양도(東洋島)에서 산다."

이는 마치 《황사(荒史)》나 《노사(路史)》와 똑같은 것으로 믿을 것은 못 되지만, 남은(南殷)이란 두 글자가 매우 새롭기 때문에 부질없이 기록한 것이다. 이것이 어찌 함허자(涵虛子)의 《천운소통(天運紹統)》에서 말한 것과 다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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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믿지 못하겠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위 기사가 무엇은 시사하는지 생각해보면...
기준이 도망간 마한 땅은 옛 날 은나라 수도의 남쪽이라는 말이라는 것이죠. 즉, 마한은 압록강 이남에 있던 나라가 아니라 옛 은나라 땅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죠.

삼국사기에...
백 제는 마한의 동북쪽에 있다. 백제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다. 백제의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애석하게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마한을 압록강 이남에 고정시켜놓고 백제의 위치를 따져보니 백제는 마한의 서북이고, 낙랑은 죽어도 백제의 동쪽에 올 수 없으며, 말갈또한 백제의 북쪽에 죽어도 오지 못합니다.

이런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낙랑이 또한 강원도에도 존재하였다느니, 말갈은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아 다녀서 백제의 북쪽에 올 수도 있다느니, 마한의 동북에 백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한의 서북에 백제가 있다는 이런식의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 기록에서 보시다시피 마한은 은나라 땅에 있었습니다. 제가 중국사를 잘 알지 못하여 수도가 어디에 정확히 위치하였나 알지 못하지만 거의 산동성 서쪽과 하남성 경계정도로 여겨집니다. 백제는 산동과 하남성에서 동북쪽에 위치하였으므로 백제의 초기 도읍은 하북성 동남쪽과 요녕성 서남쪽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위치를 따져보면, 백제의 북쪽에는 말갈이 있게되고, 백제의 동쪽에는 낙랑국이 있게됩니다. 그래서 宋書에 이르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본디부터 요동에 있었고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요서로 진출하였다고 말하는 것이죠.